충남에 넘쳐 흐른 우리가족의 가을미소...
*언제: 2008년 10월18일(토)~19일(일) 1박2일
*누구: 작은새한쌍 + 우리부부 (4명)
*어디: 충남(서산 마애삼존불,보원사지,개심사,해미읍성,
덕숭산 수덕사,천북면 장은리, 뷰1박,남당항,간월도 간월암
첫날: 10월18일 토요일
서울홈에서 오전8시15분 출발-서해고속도로-서산 IC-서산마애삼존불
-보원사지-개심사-중식-해미읍성-덕숭산 수덕사-천북면 장은리 뷰1박
작은새들과 함께 하는 충남행 가을나들이...
도로사정이 원활하여 2시간 남짓 소요로 서산마애삼존불 입구에 도착했다.
안내판부터 열심히 들여다 보는 일행..
서산 마애삼존불을 보려면 이 불이문(不二門)을 통과해야 한다.
불이(不二)란 뜻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세속과 부처의 세계가 둘이 아니며, 선악(善惡), 유무(有無), 깨끗함과
더러움, 등등 상대적 개념에 대한 모든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길따라 오르면 바로 돌축대위에 마애삼존불상이....
바로 백제의 미소를 볼 수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국보 제84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0
![](http://cfs13.blog.daum.net/image/34/blog/2008/06/29/08/27/4866c8cce454a&filename=CIMG8920.JPG)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제화갈라보살),
왼쪽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http://cfs8.blog.daum.net/image/6/blog/2008/10/20/06/40/48fba95d39283&filename=s13.jpg)
![](http://cfs8.blog.daum.net/image/21/blog/2008/10/20/06/40/48fba95dc833b&filename=s14.jpg)
여기저기 위치를 바꿔가며 뽐을 잡는다.
해설에 능한 반려자의 설명을 들으려고 모인사람들, 귀 쫑긋!
관람 마치고 내려오는길의 젊은 제스츄어, 언제까지나 이처럼 다정히...
마애삼존불에서 1.3km 위치에 있는 운산면에 위치한 보원사지로 부릉...
보원사지(普願寺址)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으로 가람배치가 이루어졌음이 한눈에 보인다.
보원사지 오층석탑(普願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104호)을 향하여...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통일신라-고려총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이다.
목조탑파에서 석조탑파로 변환되는 과정의 형식이며 아래층
기단에 사자상을, 위층기단에 8부중상을 새긴것이 특이하다.
기단부에 우주(隅柱), 탱주(撑柱)를 세웠고 탑신부 1층밑에 받침돌
한 장을 끼워 넣은 것과 옥개석의 평활하며 끝이 살짝 들어 올린 것
등이 백제계 양식이다.
또한 옥개석 받침을 4층으로 한 것은 신라계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백제지역에 신라이후 세워지는 석탑의 공통된 양식이다.
이탑은 전체적으로 미려하고 경쾌하며 안정감이 있다. 상륜부에는
긴 찰주만 남아 있지만 1945년 광복전까지 아름다운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련, 용차, 보주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있었다고 한다.
1968년 해체 복원시 사리 내감(內감),외감,사리병,남석소탑등이
출토되어 부여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현장해설옮김
* 팔부중상(八部衆像: 불법을 지키는 여덟신)
팔부중상은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達婆)·아수라(阿修羅)
·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伽) 를 말한다.
① 천(天, Dava) : 무장을 한 장수가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아랫 세상을 쳐부수려고 하는 모습인데, 언제나 땅을 깨끗이
하려는 하늘의 뜻을 인격화 한 상이다.
② 용(龍, Naga) : 머리에 염주를 쓰고 손에 비바람을 마음대로
일으킬 수 있는 여의주(如意珠)를 들고 있다.
③ 야차(夜叉, Yaksa) : 입에 염주를 물고 손으로 받들고 있는데
귀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신이다.
④ 건달바(乾達婆, Gandhorva) : 사자탈을 쓰고 있는데
때로는 악기를 들고 있을 때도 있다.
⑤ 아수라(阿修羅, Asura) : 지옥의 신인데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덞이다. 이 신이 화가나서 여덞 개의 팔을 휘두르면 온 세상이
뒤죽박죽이 된다는데 이러한 현상을 아수라장이라 한다.
⑥ 가루라(迦樓羅, Garuda) : 새들의 나라를 대표하는 신(神)인데
몸체와 얼굴은 사람이나 입만은 독수리 부리처럼 날카롭게 튀어 나왔다.
⑦ 긴나라(緊那羅, Kinnara) : 인비인(人非人)이라 하여 사람과 짐승의
중간에 있는 존제인데 노래의 신이기도 하다. 얼굴 양쪽에 말머리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⑧ 마후라가(摩喉羅伽, Mahoraga) : 뱀을 인격화한 것인데 뱀의
몸체를 손에 들고 뱀 머리는 관 옆에 붙어 있다.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위치한 개심사로 이동..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
![](http://cfs8.blog.daum.net/image/10/blog/2008/10/20/06/41/48fba99ef0589&filename=s29.jpg)
![](http://cfs8.blog.daum.net/image/15/blog/2008/10/20/06/41/48fba99f4acf1&filename=s31.jpg)
이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전서체로 쓴 글이다.
개심사 대웅전
개심사 심검당
요사채로 쓰이는 심검당은 조선 전기에 세워진 건물로
개심사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절집에 있으면서도
단청을 하지 않아 사대부가의 기와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1962년에 심검당을 해체 수리할 당시에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여섯 번이나 중창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더욱 주목할 점은
상량문에 시주자의 이름과 함께 목수의 이름까지 적혀 있어
눈길을 끈다.
심검당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바로 부엌의 기둥이다.
휘어진 기둥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고 건물의 멋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개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심검당에서 이 부분은
후대에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심검당에서도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은 해탈문이 있는 3칸 정도라고 한다.
개심사 명부전
개심사 안양루
개심사 뜨락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http://cfs8.blog.daum.net/image/36/blog/2008/10/20/06/42/48fba9dd58f1a&filename=s45.jpg)
![](http://cfs8.blog.daum.net/image/18/blog/2008/10/20/06/42/48fba9de12d95&filename=s48.jpg)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海美邑城) 으로 이동..
서문밖 순교성지에 먼저 이른다.
해미읍성(海美邑城)
진남문(鎭南門)으로 함께 입장할까요? 얼른 오세요.ㅎ
![](http://cfs8.blog.daum.net/image/33/blog/2008/10/20/06/43/48fba9e00a3be&filename=s58.jpg)
진남문 안쪽으로 들어서서 뒤돌아보니 빨간글이 보인다.
천주교도 순교목(殉敎木) 충남 해미읍성 호야나무
충남 서산군 해미읍성 내에는
호야나무(회화 나무이나, 이 나무의 고유 이름처럼 불리움)가
나무줄기마다 많은 상처를 입은채 서 있다.
그 연유는 조선조말, 1801년 신유사옥 이후 100여년간의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했는데 특히, 1866년 병인양요와 1868년의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덕산소재 남연군묘를 파헤친 사건이후 천주교도들이
개입된 사건임을 알고 탄압이 극심했다.
이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 12개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지역의 교도들은 모두 잡아들여 이곳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숫자가 무려 1,000여명이었다고 한다.
처형방법은 호야나무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매달아
고문하였으며 철사줄이 박혀있던 흔적이 현재까지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당시 이 나무가 여러가지 고문 도구들을 걸쳤기 때문인지
나무 곳곳에 많은 옹이가 있다.
내아인 살림집 앞 마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 읍성에는 동헌과 아사, 작청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동헌과 2002년 복원한 객사 등
4채의 건물뿐이다.
객사(客舍)는 건물의 중앙 정청(政廳)에 궐(闕)자가 새겨진 위패
(位牌)를 모시고 삭망(매월 초하루, 보름)에 관아의 대소 관원(官員)
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으며, 양편 익실(翼室)은 조정이나
상부에서 파견된 관원및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官舍)건물로 동헌(東軒)이
고을의 공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반해,내아(內衙)는 살림집이다
![](http://cfs8.blog.daum.net/image/14/blog/2008/10/20/06/45/48fbaa4188de0&filename=s90.jpg)
읍성내 관람을 마치고 나올땐 성 위를 걸으며 바람과도 동행이다.
두번째 찾아온 해미읍성앞 전통있는 뚝배기집에서 중식을 끝내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德山面)에 위치한 덕숭산 수덕사로 부릉~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
여름끝자락을 방불케 하는 더운 가을날이다. 여러곳을 돌고
마지막 일정으로 잡힌 수덕사에 이르니 오후시간이었다.
나가는사람, 들어오는사람이 개미군단처럼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웬사람이 이렇게도 많은지, 가을 단풍 즐기려 몰려온 줄만 알았다.
알고보니 큰 사찰 행사가 있었다.
국보 제49호 대웅전 건립 700주년 기념대 법회와
사찰 창건 1409주년 개산대제를 봉행한 날이었다.
가을 국화100만송이로 도량을 장엄하고, 1천여 스님과
5000여 신도들이 함께 <법화경> '여래수량품'을 독경하는
장엄한 '야단법석'이 재현 된 날이었다.
즐비한 화환들중엔 유명정치인의 이름도 보였다.
수덕사 대웅전 [국보 제 49호 ]修德寺 大雄殿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건축물로
고려 충렬왕34년(1308)에 건립-
고려충렬왕34년(1308)에 세워진 수덕사 대웅전은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꼬리모양의 우미량(牛尾양)은 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다.
내부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과거에는 바닥에 전돌이 깔렸으나 현재는 우물마루가 깔려있다.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 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수덕사 대웅전은
건물의 기능미와 조형미가 잘 조화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리고 특히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
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형미와 역사적 가치로 인해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은 현존하는 건물 중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건축물이다.
![](http://cfs8.blog.daum.net/image/1/blog/2008/10/20/06/45/48fbaa8de5969&filename=s102.jpg)
사랑하는 나의 가족.. 지금처럼 늘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http://cfs8.blog.daum.net/image/32/blog/2008/10/20/06/45/48fbaa4388106&filename=s99.jpg)
수덕사 대웅전:수덕사 창건에 대한 설화 1가지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수덕사 금강보탑(修德寺 金剛寶塔)
전탑좌대가 현 위치에서 발견(發見)되어 전문가의 고증(考證)을
거쳐 탑을 세우고 금강보탑(修德寺 金剛寶塔)이라고 칭하였다.
금강(金剛)이란 불괴신(不壞信)의 불(佛), 법(法), 승(僧) 삼보
(三寶)와 계체(戒體)의 상징으로 이름하게 되었으니 신앙의 대상이다.
이탑 내부에는
1988년 덕숭총림방장 원담대선사(德崇叢林方丈圓潭大禪師)께서
스리랑카국을 예방했을때 스리랑카 종정스님으로 부터 한,스간의
우의(友誼)를 견고히 하는 뜻으로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증정하므로
10수년간 친견법회(親見法會)를 거쳐 본 탑에 봉안(奉安)하게
되었으며, 불상 1,000불과 탑 모형을 동(銅)으로 주조하여 999탑을
소장하기에 이르렀으니 천불천탑(千佛千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탑(塔)은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세계평화(世界平和)는 물론
청풍낭자(淸風娘子) 속성정각(速成正覺)하여 광도중생(廣度衆生)하고
박복자(薄福者) 복덕구족(福德具足)하여 고통받는 이 모두는
이고득락(離苦得樂)할것을 발원(發願)하면서 2000년 7월 세우도다.
현지 해설글 옮겨 씀
수덕여관
![](http://cfs8.blog.daum.net/image/33/blog/2008/10/20/06/45/48fbaa9098969&filename=s117.jpg)
이른아침 집에서 출발 하룻동안 동선이 꽤 길었다.
해는 늬엿늬엿 서산에 기울고 기운도 다 소진되어 나른하다.
나만이 아닌 일행 모두가 축 쳐져 있었다. 미리 예약해둔
하룻밤 숙소를 향하여 충남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로 부릉~
![](http://cfs8.blog.daum.net/image/33/blog/2008/10/20/06/46/48fbaac3d5026&filename=s130.jpg)
전면객실이 전부 바다를 향해 전망좋은곳,호텔"뷰" (041) 641-7890-91
굴단지 언덕위에 위치.. 생각보담 이용료 가볍구요. 평일엔 더욱..
그리고 호텔옆으로 내려가면 서해돌꽃팬션이..041) 641-0702,7809
이곳에 머무시려면 이 두곳뿐이랍니다.
하룻동안 무리한 여정으로 몸이 다 풀려 흐느적이다.
저녁도 굶고 그냥 뻗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다음날 힘을 못 쓰니
저녁식사차 석굴촌으로 내려온다. 장은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어느 천막촌에서 석굴구이로 식사를 대신했다.
장갑끼고 나이프로 뜨거운 석굴 갈라 먹는데 아주 곤욕스럽다.
석굴이 제철이 아니고 대하가 한창이라는데 대신 조개모듬까지..
요 이미진 지난날에 다녀온 이미지여서 조개는 없죠.ㅎㅎ~
하루의 여정을 숯불앞에서 음식도 나누니 그 또한 행복인걸..ㅎ
기분이 좋으니 피곤이 싸악~ 빠져 나간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 오르는 길에 또 찰칵 찍어댄다.
뒷편이 까아만 바다...그야말로 칠흑.ㅎ
다음날 오전 9시에 기상 약속하고 나란히 정한 제 둥지로 든다.
이튿날: 10월19일 일요일
홍성군 서부면 남당리항-서산시 부석면 간월도 간월암-마이홈
오늘은 1박2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날이다.
마지막날은 해지기전 집도착을 위해 일정을 늘 간단히 잡는다.
창을 내다보니 벌써 고깃배가 두줄기 물길을 하얗게 내며
들어오고 있다. "아니! 저쪽 저 배는 지금 나가는 배잖아~"
![](http://cfs8.blog.daum.net/image/15/blog/2008/10/20/06/46/48fbaac2f3cd1&filename=s125.jpg)
오전9시..홍성군 서부면 남당리항으로 아침식사차 출발한다.
남당항
썰물로 바닷물이 빠져나간 자리엔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있다.
바로 아래 갯벌을 내려다 보니 작은 구멍이 숭숭 나있다.
부르면 게가 나올까?ㅎ 그냥 쳐다만 본다. 한마리도 못봤다.
에라~ 뽐이나 멋지게 잡구서리 기분이나 내자! ㅎ
남당리항을 한바퀴 쭈욱 돌아보고 아침식사를 향해 자리잡는다.
오늘은 대하..팔딱이는 대하, 좀 그러했지만 맛짱! 쥔님의 서비스
좋아 기분좋은 식사를 마치고.."선옥이네 파라솔" 041) 634-0928
오늘 마지막 코스이면서 처음인 간월도 간월암으로 출발..
가는 길에 잠시 Stop! 물위에서 무리를 이룬 천수만 철새들! 장관이군요,
어리굴젓의 섬 간월도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속한 섬.천수만 내에
있으며, 면소재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19㎞ 떨어져 있다.
간월도 어리굴젓 기념탑
간월도에서 생산되는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시에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있는데
이 행사는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은 청결한 아낙네들이 소복(흰옷)을
입고 마을입구에서 춤을 추며 출발하여 굴탑 앞에 도착하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굴 풍년 기원제를 지내며
채취한 굴은 관광객에게 시식도 시켜준다고 한다
낙조가 아름다운 섬 간월도
당초 섬이었으나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된
간월도에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에 기여한 무학대사가
도를 깨우쳤다는 간월암이란 작은 암자가 있다.
![](http://cfs8.blog.daum.net/image/14/blog/2008/10/20/06/48/48fbab3071e79&filename=s169.jpg)
간월암은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만공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간조시에는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위에 떠있는 느낌을 주는
신비로운 영지다. 밀물과 썰물은 6시간마다 바뀌며
주위 자연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어 시원한 청량감을 느끼고 해가
넘어가는 일몰의 장관이 연출되는 간월도는 천혜의 자연 경관과
옛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고찰이 어우러져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주변 관광지 : 부석사, 해미읍성, 서산마애삼존불, 팔봉산 등
*무학대사라 하면 1327년에 태어나 1405년에 죽은 고려말의 중,
속성은 박씨로 서산군 인지면 모월리에서 태어났다. 18세의 나이로
출가한 그는 고려말의 명승 나옹(懶翁) 혜근(慧勤)화상의 인가를
받고 그의 법제자가 되었다.
그가 26세의 청년시절이었던 1353년, 일찍이 진주의 길상사(吉祥寺)와
묘향산 금강굴(金剛窟)등에서 도를 닦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원나라의 연경(燕京)으로 유학을 떠나려 하기직전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이 섬으로 건너와 스스로 절해(絶海)인 이곳에 와서 몸을 감춘다.
그 때가 공민왕2년, 그는 이 암자에서 마침내 바다위에 뜬 달을 보고
홀연히 오도(悟道)하였으니 그 이후부터 이 섬의 이름은 간월도
(看月島)로 바뀌어 불러지게 된 것이다. 한때 이 암자는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태조(李太祖)의 스승이었던 왕사 무학자초(自超)대사가 도를
이룬 곳이라 하여 각별한 우대를 받았으나 그 이후 불교를 억압하는
조선왕조의 배불정책으로 말미암아 헐리고 황폐하게 되어 버렸다.
출처:최인호의 불타는집에서 일부 발췌
간월암과 함께 모진 풍상을 견뎌 낸
수령 200년 넘은 팽나무가 사찰뜨락에 기품있게 서 있다.
팽나무 [Celtis sinensis]
느릅나무과(―科 Ulmaceae)에 속하는 낙엽교목.
키는 25m까지 자란다. 회색의 수피(樹皮)는 밋밋하지만 조그만
요철(凹凸)이 있다. 어긋나는 잎은 끝의 양쪽이 서로 같지 않으며,
가장자리에 끝이 무딘 톱니들이 있다. 홍갈색의 꽃은 4~5월경
새로 나온 가지에 취산(聚繖)꽃차례를 이루어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한 그루에 핀다.
수꽃은 새 가지 아래쪽에, 암꽃은 위쪽에 피는데, 수꽃은 4장의
꽃덮이조각[花被片]과 4개의 수술로 이루어져 있고 암꽃은 4장의
꽃덮이조각과 4개의 작은 수술, 1개의 암술로 이루어져 있다.
열매는 가을에 적갈색의 핵과(核果)로 익는다. 어린잎을 봄에 따서
날것으로 먹거나 나물로 먹으며, '팽'이라 부르는 열매는 8~9월에
따서 날것으로 먹거나 기름을 짜서 사용한다.
수피는 월경불순이나 소화불량에 쓰기도 한다. 목재는 심재와 변재
모두 담황회색으로 좀 단단하며, 틈이 벌어지지 않아 건축재나
가구재 또는 땔감으로 쓴다.
한국에서는 주로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데,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의 팽나무는 천연기념물 제82호, 전라남도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
팽나무는 제108호,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팽나무는 제161호,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팽나무는 제309호,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
가입리 팽나무는 제310호,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의 황목근은
제400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공원수나 그늘을 만들어주는 정자목으로 심으며, 바닷 바람에도
견디며 자라기 때문에 바닷가의 방풍림으로도 심는다.
양지바른 평탄한 땅에서 잘 자라며, 뿌리가 깊지 않고 오래되면
뿌리 위쪽이 두드러지게 굳어져 땅위로 나오기 때문에
옮겨심을 때 주의해야 한다.
간월도 가는길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 천안을 거쳐 온양, 예산, 덕산온천과
수덕사 앞을 지나 갈산농협 앞에서 좌회전한다.
수덕사가 있는 덕산온천에서 서산간척 지까지 약40분 걸린다.
간월도는 서산간척지 간월호를 지나 A지구 방조제 초입에서
회전하면 10분 거리이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 - 32번 국도 - 서산 - 649 지방도 - 부석
- 서산 AB지구 방조제 - 간월암
*서울 - 서해안고속도로 - 홍성ic - AB방조제 - 간월도
서산- 부석 - 창리3거리 - 간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