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채팅방 링크 주소레올람토라 온라인 성도방에 초대합니다.
카카오 오픈채팅방에 "레올람토라"를 검색하시거나, 아래의 링크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픈채팅방 링크 주소
https://open.kakao.com/o/gvbFarQf
# 갈라디아서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 할례가 십자가의 걸림돌인가?
바울이 할례를 전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할례가 여호와께서 주신 선한 표징이라 해도 그 뜻이 왜곡된다면 예슈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할례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래서 언약 안에 머물지도 않으면서 할례를 행하여 의로워졌다고 믿던 이들에게 십자가는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전통을 지키려고 율법을 안지키는 자들을 예슈아께서 책망하셨고 바로 이런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셨다(막7:9). 예슈아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며 진정으로 율법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목숨을 다해 가르치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전통에 익숙해져서 스스로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의해 예슈아께서 오히려 율법을 어긴다고 오해 받으시고 죽으셨다(막3:2).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눅13:16)
2 교리와 전쟁한 사도 바울
당시 가장 큰 싸움은 '전통이냐 율법이냐'였고 예슈아께서는 율법을 다시 세우시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할례파가 있었다. 할례파는 할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유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전통을 지키는 자들이었으며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잘못된 사상을 고치는 것은 바울에게 커다란 숙제였다. 가장 먼저 바울이 해야 하는 일은 구원받기 위해 즉 의로워지기 위해 육체의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그들의 가르침과 싸워야했다. 가르침이 곧 그들의 교리이다. 이들의 교리가 문제였던 이유는 하나님께 믿음이 없는 육체의 행위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전통을 따른 것도 결국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이 없었다는 것은 그분을 알지도 못했던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의 하나님을 우상 숭배한 것이다(요일3:6).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고 요한이 증언한 바 있다(요일2:3,4)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롬10:2)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2:3,4)
3 십자가의 도는 목숨을 건 순종이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율법을 폐하는 사람의 전통과 목숨을 다해 싸우면서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고 환란을 받아도 불법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말한다.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 같아도 인내하며 싸우는 것이 십자가의 삶이다(히11:13). 이러한 삶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예슈아의 삶이고 장자로서의 삶이다. 그러나 할례파는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율법을 폐하는 자들로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으니 십자가의 걸림돌과 같지 않았겠는가?(갈6:13) 할례파에게 예슈아의 목숨을 건 순종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한다고 해도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에 접붙여져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가장 중요한 순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통주의를 가르치는 것은 큰 문제였다. 그래서 바울이 할례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할례가 문제가 아니라 할례파의 가르침이 문제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11:13,37,38)
# 갈라디아서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4 잘못된 지식을 할례하라
할례는 피의 언약이다. 왜냐하면, 직접 자신의 살을 베어 피로하는 언약이기 때문이다(출4:25). 마찬가지로 모든 율법의 언약도 희생 제물의 피로 백성에게 뿌려 언약을 맺었다(출24:7-8). 그 의미는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피로 언약한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도록 가르치거나 지켜야 할지 말지 헷갈리게 가르치는 자는 거짓 선지자와 같다.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고 더럽히는 자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하고 전통을 지키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베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스스로 죽으라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할례를 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에 까지 새로워져야 진정으로 거듭날 수 있다(골3:10). 바울은 율법을 준행하지 않으면 할례도 헛되다고 경고하고 있다(롬2:25). 즉 어지럽게 하는 교리, 어지럽게 하는 사상을 베어 버려야 참 마음과 진실한 믿음으로 진리에 순종할 수 있다(히10:22). 이것이 언약이 있는 구원을 받을 만한 믿음이다(히10: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9,10)
5 부정한 자를 할례하라
어지럽게 하는 자는 진리는 왜곡하는 자와 같다. 성경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율법을 지키라고 말하는데 진리에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어지럽게 하고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 바울은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원어로 보면 '스스로'라는 단어는 없다. 즉 이들이 자신의 사상, 전통적인 교리를 고수하므로 율법을 배반한다면 공동체를 더럽히는 자들을 잘라내라는 말과 같다. 여기서 '원하노라'라고 번역된 단어도 원어로는 '당연히 그렇게 할 의무가 있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또한 스스로 망령된 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사상과 생각을 항상 정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슈아께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했다. 이들은 율법중에 십일조는 하면서도 율법의 본질인 믿음과 공의와 사랑을 버린 자들이었다. 그래서 예슈아께서 믿음과 공의와 사랑을 회복해야 함을 가르치셨다. 믿음과 공의와 사랑이 없는 율법의 행위는 할 필요가 없으며 진정한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가르치지지 않으셨다. 율법의 본질이 더 중요한 이유는 진정한 사랑과 믿음과 공의의 정신이 있으면 나타나는 행동도 의로워 지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는 그대로 하되 본질을 회복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마23:23). 믿음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믿음으로 전통을 지키는 것이 믿음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린 성경을 다시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틀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변함 없는 진리이다. 그렇다면 말씀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골3:9,10)
#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6 자유자가 되도록 부르셨다
우리는 자유에 이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사실 전통은 사람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종노릇하게 한다. 그러나 우린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마음에 있어 땅에서 하늘을 사는 사람들이다(눅17:21). 하나님의 나라는 불법이 없으며 우리가 왕이고 우리가 그 나라의 주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부르셨다. 그러한 삶이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율법으로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신30:14). 당시 수많은 전통을 율법에 덧붙여 율법에 종노릇하도록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율법으로 우리가 자유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인자가 안식일에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주인이니 안 지켜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막2:27,28). 잘못된 교리로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자유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2:27,28)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기 위해 말씀을 이용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이 가로채려 한다(골2:22). 여호와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고 성회로 모이라고 말씀하셨다(레23:3). 여기에 일에 대한 정의를 수없이 달아 놓아 안식일에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안식일을 기뻐하고 누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따르면 전통이 된다. 율법에 더하거나 빼면 그건 더이상 율법이 아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전통을 지키면서도 율법을 준행한다고 속은 것이다. 이처럼 어떻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 자신의 가르침(교리)을 늘어놓으며 마치 생명의 키를 자신이 가진 양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이다. 악한 자들은 언제나 법을 이용하여 죄를 짓고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런 자들 때문에 법을 버린다면 아기를 씻기고 물이 더러워지자 아기까지 버리는 자와 같다. 율법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악용하는 자들을 책망하나 율법은 거룩한 것으로서 바로 세우는 것이 진리를 아는 자의 지혜로운 태도이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레23:3)
#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7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이웃 사랑에 대한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안에 모두 들어있다(마22:39). 우리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는 지는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지도 않으신다.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남을 용서할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남에게는 잘하지만 가족에게는 잘 못한다. 아내에게는 잘 못하지만 타인에게는 잘 할 수 있다. 남편과 자녀에게는 잘 못하지만 다른 이웃에게는 잘할 수 있다. 그것으로 인해 서운하고 화가 날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우리 삶에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남편이 싫거나 아내가 싫거나 가족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족을 자기 자신과 같이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소중히 여기지 못한다면 배우자나 자녀에게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사실 가장 가까운 이웃이 가족이다. 그러므로 우린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을 용납하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이웃 사랑이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보다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진정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먼저 자기 자신, 그리고 가정을 사랑하고 믿어주고 격려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8 예슈아와 힐렐 (율법은 사랑에 대한 주석이다)
한번은 어떤 이방인이 랍비인 힐렐을 찾아와 그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모든 유대교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힐렐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은 네 이웃에게도 하지 마라. 이것이 모든 율법이요 나머지는 그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Shabbat 31a) 그리고 70년 정도 지난 후 예슈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담고 있다.”(마22:40) 랍비인 예슈아께서도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존경하던 랍비 힐렐처럼 레위기 19장 18절에 근거하여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율법은 사랑에 대한 것이고 사랑하는 방법을 나열한 주석과 같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19:18)
9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가?
여호와께서 과연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셨을까? 사라는 경수가 멈추어 이제는 임신이 불가능한 나이가 되었다. 그녀는 갱년기였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아들을 낳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녀는 믿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아들이 있을 거라 말씀하셨다면 그 말은 그녀가 임신하고 출산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불가능한 것을 언약으로 주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여호와에 대한 신뢰로 인해 그녀는 잉태할 수 있었고 출산할 수 있었다(히11:11). 이처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주셨다. 지킬 수 없다고 믿는다면 우린 결코 생명을 취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는 믿음이 우리가 생명에 이르게 도와줄 것이다(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가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고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지킨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의 순종하기 위해 외아들을 드림과 같다. 우리의 모든 것으로 순종할 때 우린 생명의 부활을 언약으로 받을 것이다(히11:19).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5:3)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히11:11)
10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라
율법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율법의 정신이고 또 하나는 보이도록 나타나는 율법의 행위이다. 즉 내면적 측면과 외면적 측면이다.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율법의 정신이다. 율법의 정신이 본질이고 그것이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율법의 행위이다. 따라서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본질에 해당하는 율법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예슈아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면서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셨다. 율법에서도 더욱 중요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다. 이것이 본질인데 외식하는 자들은 마음에 공의도 없고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으면서 십일조라는 행위만 있다는 것이다(마23:23). 물론 십일조는 너무나 귀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함이 헛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헛되게 될 바에 차라리 율법을 지키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다(요일2:3,4). 그러므로 율법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예슈아께서 외식하는 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온전하라는 것이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즉 율법을 계속 행하는 것은 당연한데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11 율법의 가벼운 것도 경시하지 마라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오해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준행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율법 준행자가 외식하는 자인가? 언행이 불일치하는 자를 말한다. 말은 하지만 행동하지는 않는 자를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하는 말은 지키나 위선적인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한 것이다(마23:2,3) 물론 이들은 십일조는 지켰다. 그러나 율법에는 십일조만 있지 않다. 그러므로 공의와 사랑과 믿음에 대한 다른 율법들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쉽게 버렸다. 그리고 예슈아께서 이것을 헛된 예배라고 비판하셨다(막7:7-9). 다시 말해 이들은 율법의 행위는 있었지만 전통에 열심인 자들이었다(갈1:14).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아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의 열심이 우리를 거룩하고 의롭게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지식에 따른 열심이 필요하고 그 열심은 우리로 하나님의 법도에 복종하게 한다(롬10: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10:2,3)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었고 지키는 척 가식적인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율법 준행자로 오해하면 예슈아의 책망을 통해 너무 열심히 지키면 가식적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잘못된 오해는 오히려 율법을 적당히 지키거나 떠나게 만들 수 있다. 샌더스(E.P.Sanders)는 이렇게 지적했다. “랍비들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계명을 주셨으며, 모두 다 순종해야 한다. 어떤 것은 경시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인간들의 가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5:19)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깃발 재작 문의
https://cafe.naver.com/freeflaging
#레올람토라 #갈라디아서 #히브리적관점 #미라클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