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判書古宅)
삼판서 고택은 영주도서관 옆의 서천(내성천) 제방 둑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조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이 태어난 곳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일명 ‘삼판서 고택’은 고려시대에 건축돼 1961년 ‘사라호’ 태풍 당시 대홍수로 인하여 철거되기까지 7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현재보다 낮은 서천 변에 있다.
정면 6칸, 측면 7칸의 팔작지붕 ‘ㅁ’자형 한옥으로 동루, 정침, 대청마루, 안채마루, 문간채, 솟을대문 등의 형태를 그대로 복원하였다.
영주시(榮州市) 구성공원(龜城公園) 남쪽에 세워졌던 고택으로, 380여년전 풍산인 학사 김응조 선생께서 영천군지를 편찬 할 당시에 지역의 유일한 고적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건물이다.
삼판서 고택은 건축연대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고려조에서 형부상서를 지낸 봉화인 정운경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청렴하게 살던 집이라 한다. 그의 장남은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 차남은 참판 도존, 삼남은 일봉 도복이며, 사위는 평해인 공조전서 미균 황유정이다.
정운경은 이 집을 사위 황유정에게 물려주었는데, 황유정도 병을 이유로 낙향하여 소쇄헌이라는 현판을 걸어두고 말년을 이 구택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에게도 삼남 일녀가 있었는데, 장자는 증지평 전, 차남은 문과급제 현, 삼남은 훈도 정이고, 사위가 바로 현감을 지낸 휘 小자 良자(9世) 선조이시다. 현감공께도 자식이 삼남 일녀이며, 장남은 문교리 증, 차남은 문절공 담, 삼남은 통찬 홍이고, 사위는 안동인 부호군 권겸이다. 현감공께서는 이 집을 차남이신 문절공께 물려주어, 형부상서 정공, 공조전서 황공, 이조판서 문절공께서 살았다하여 世人들은 이 고택을 삼판서 고택(三判書 古宅)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가장을 사위에게 전수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가족제도상 드문 일이라 한다.
이 구택은 웅장하지는 않았으나 규모가 상당히 큰 건물이었고, 집터도 영천고을에서 소문난 명당자리였다고 하며, 현감공의 21대 손까지 500여년을 세거하다가 조선 말기에 주인이 바뀌었으며, 1961년 대 홍수 뒤에 도시확장으로 헐리어 버리고 말았다.
이 구택은 판서급 5명을 비롯하여 문과 8명, 무과 1명, 소과 2명 등 많은 선비들이 태어나거나 살았던 이 지역의 유서깊은 집이어서 복원하였다.(펌)
제민사상의 메카 제민루는 고려 공민왕 때 하륜이 군수로 부임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누각을 여러개 세웠으나 오랜 세월동안 풍파를 겪다 세종15년 (1433)에 후임군수 반저가 하륜의 뜻을 이어 옛터에 동제와 남루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제민루는 양반자제에게 의술를 가르치기 위하여 처음 설립한 의약소(지금의 보건소)로 시작했지만 태백산 소백산의 우수한 약제를 체취 저장 후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많은 선비가 이 곳에 모여 시가를 읊는 경로소 역활도 했고, 퇴계 이황도 이 곳에 자주 들렸던 것으로 전하여 지고 있다.(펌)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榮州 近代歷史文化거리는 영주의 근대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문화공간이다.
2018년 8월 6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720호로 지정되었고, 철도역사와 그 배후에 형성된 철도관사, 정미소, 이발관, 근대한옥, 교회 등 지역의 근대생활사 요소를 간직한 건축물이 집적되어 있는 관사골에서 광복로 일대의 거리로서, 영주의 근대생활사를 보여주는 역사문화공간으로서 보존과 활용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펌)
(영훈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14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있었으며 관청의 손님을 보내고 맞이하던 건물이다.
1467년(세조13)에 군수 정종소가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기 위할 목적으로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남정자로 불리웠다. 이후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1643년(인조21년) 신숙이 다시 세우고 이황이 쓴 ‘영훈정’이라는 편액을 새겨서 걸었다. 그 후 1910년 현재의 위치인 영주 시청 안으로 옮겼는데 시의회사무실 서쪽의 영주초등학교 담장과 인접한 곳에 남향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보편화되었던 각 가문의 정자와는 달리 관청용으로 사용하고자 건립하였던 점이 특이하다.
비록 건물이 일제강점기 이후 관청의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하여 칸막이를 한 흔적들로 가구의 결구가 다소 이완되고 일부 퇴락되긴 하였지만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당시의 건축양식을 이해하고 건축 수법을 연구함에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