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三章 급변(急變) 2
삘리리…… 삘리…… 삘리리……
황함사귀는 풀잎을 뜯어 풀피리를 불었다.
하늘은 구멍이라도 난 듯 빗줄기를 쏟아 붓던 때가 언제냐
는 듯 작렬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살을 익혀버릴 듯한 열기였
다. 수렁이나 다름없던 관도는 며칠 사이에 바짝 말라 흙먼지
가 풀풀 날렸다. 혹한의 밤과 사막의 열기랄까? 해남도의 날
씨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헤헤! 유소저가 전가에 갔을 겁니다."
그 한 마디에 적엽명은 걸음을 멈춰버렸다.
"못 할 일을…… 시켰군요."
"그럼 전가와 싸울 심산이었는지……?"
"호의(好意)를 악의(惡意)로 받아들이는 가문이라면 얼마든
지 상대해 줄 수 있습니다."
"하! 난생 처음 들어보는 못난 소리군요."
황함사귀는 혀를 끌끌 찼다.
"좋습니다. 무공이 강한 것이야 인정합죠. 팔 년 전에 해남
도를 떠날 때와는 천양지차(天壤之差)입니다. 정말 놀랐어요.
그러면 이것 하나만 물어봅죠. 전가를 지탱하는 기둥이 누구
라고 생각하시는지?"
"전가에 인물이라면 전가주와 전방, 전혈뿐이지."
"일반적으로 전가주는 논외로 하고, 전가팔웅이라고 하는뎁
쇼."
"……"
적엽명은 말을 하지 않았다.
전방과 전혈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
하는 듯 했다.
"헤헤! 죄송합니다. 지적을 해야겠군요. 전가를 지탱하는
것은 전가주도 전가팔웅도 아닙죠."
"……?"
적엽명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았다.
"힘입니다."
한백이 대신 대답했다.
"힘이라……"
"힘입죠. 전가의 결속된 힘. 이랑께서도 전가를 방문한 적
이 있으니 잘 아시겠지만 전가에 담장이 있습니까요? 없습죠?
다른 가문들은 전각도 많은데 전가는 그저 기거할 집만 세워
놨습니다요. 참! 흑월이란 자가 범가주를 급습했다는 소식은
들으셨는지?"
"들었어요."
"듣기로 흑월은 오대가주를 노리고 있답니다요. 강성오가
가주들 전부가 살수 대상입죠. 헌데 제일 먼저 범가주를 노린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가는 담장도 없는데……"
"……"
"전가에는 힘이 있기 때문 입죠. 눈에는 보이지 않는 힘입
니다요. 서른다섯 군데 농장의 결속된 힘. 한마디로 전가를
상대하려면 서른다섯 군데 농장의 모든 사람을 상대해야 된
다는 말이 됩죠."
"음……!"
"이랑께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칩
죠. 무공도 익히지 않은 여족인이 쇠스랑을 들고 길을 가로막
는다면 베어버릴 수 있으신 지?"
"……"
"이랑의 성격은 제가 압죠. 강하게 부딪쳐 오는 것은 뚫고
나가지만 약한 상대에게는 한없이 약해집죠. 이랑께서는 틀림
없이 지실 겁니다. 장담합죠."
"하하! 전가주는 그렇게 치사한 사람이……"
"물론입죠. 무공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놀라운 분입죠.
하지만 전가팔웅이 쓰러지고, 전가주를 쓰러트리면 그 다음
은…… 물결입죠. 사람의 물결."
"음……!"
"흑월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요. 전가주만 노린다면 방
법이 있겠지만 그 다음은 백 리를 도망쳐야 합죠. 만약 누구
하나라도 만나는 날에는 끽!"
황함사귀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가로 그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유소저를 전가로 보냈습죠. 전가주는 알고 있을 겁
니다요. 이랑과 싸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체면 정
도 세워달라고 할 테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요? 됐습
니다. 전가주가 전가 전체의 힘만 동원하지 않는다면 살아날
희망은 있는 것입죠."
황함사귀는 실실 웃었다.
"기다려야겠어."
적엽명은 야자수 그늘 밑으로 걸어갔다.
그로부터 두 시진.
적엽명은 유소청을 만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떼어놓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유소청을 만나더라도 지금은 쉬어야 한다.
해남도의 정오는 끓는 기름 속 같아서 무지하게 길을 재촉
했다가는 체력을 급격하게 소진시키고 만다. 그래서 해남도에
서 태어난 자란 사람들은 정오 무렵에 낮잠을 청한다.
섬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지는 것이다.
삘리리…… 삘리리…… 삘리……
황함사귀는 무료함을 풀피리로 달랬다.
문득 야자수 그늘에 누워 잠자는 듯 하던 한백이 입을 열었
다.
"손자(孫子)의 군쟁편(軍爭編)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범공
성지법(凡攻城之法), 최위하책(最爲下策), 부득기이위지(不得
己而爲之). 소위삼월수기계(所謂三月修器械), 삼월성거인자
(三月成距 者), 유월야(六月也)."
[성을 공격하는 것은 최하책으로 부득이할 때만 공격한다.
성을 공격하기 위해 삼 개월 동안 기계를 닦고, 삼 개월 동안
축성하여 총 육 개월을 준비한다.]
"기서여림(其徐如林:진행이 느려 숲과 같다)!"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것은 공격하겠다는 의사가 없기 때
문입니다. 그렇다고 공격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포위공격.
성을 둘러싸고 외부의 지원만 막는다면 성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전가주가 그렇게 한다는 것인가?"
"공격을 늦추는 이유는 사상자가 많이 나기 때문이죠. 성을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진배없으니까요."
한백은 그 말만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땅바닥일망정 두 발을 쭉 뻗고 누워있는 모습이 무척 편안
해 보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씨, 이런 날에는 한백처
럼 그늘에 누워 가만히 있는 것이 시원해지는 길이다.
황함사귀는 한백이 입을 열 때부터 풀피리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헤헤! 저도 한 마디 합죠. 전동은 무지막지하게 당했습죠.
애송이들이라면 분통을 터트릴 일이나…… 전가주는 잘린 몸
통에서 이랑의 검공을 읽었을 겁니다요. 전가에서 누가 나설
것이냐. 곤란한 물음입죠. 전가주는 결국 자신뿐이라고 결론
내릴 것이고, 애꿎은 희생인 줄 빤히 알면서 공격하지는 않을
겁니다. 헤헤!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손가
락이라도 하나 잘라서 줘버리면 깨끗할 것 같은데. 헤헤! 너
무 아까운가?"
그늘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등줄기에서 땀이 줄줄 흘렀
다. 태양의 열기도 열기지만 지열(熱)까지 기승을 부려 숨이
턱 막혔다.
"에구! 더워라. 근처에 물이라도 있어야 풍덩 들어가지. 아
예 잠을 청하는 게 어떨갑쇼? 덥기야 밤에도 마찬가지지만 낮
보다는 한결 나을 것 같은데."
적엽명은 고개를 끄떡였다.
전가와 자신들이 있는 곳과의 거리를 계산해 보니 잠도 자
지 않고 부지런히 걷는다 해도 내일 아침녘에야 도착할 것 같
았다.
"유매를 기다려요. 밤이라 못보고 지나칠 수도 있으니."
자리에 거적을 깔던 황함사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
았다.
"어디 가시려고……?"
"들릴 곳이 있어요."
한백도 쳐다보았다. 그는 잠을 자지 않았다. 눈을 감고 내
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걱정할 일이 아냐. 내일 아침까지는 돌아올 거야."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다.
한백은 다시 눈을 감았다.
"헤헤! 자지 않는다면 말이나 나눕시다."
황함사귀는 웃통을 벗어버린 알몸이었다.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듯한 앙상한 몰골이지만 활개를 쭉 펴고 누워있는 모습
은 무척 태평스러웠다.
"말씀하시지요."
"헤헤! 말씀은 무슨 말씀…… 그저 목숨을 부지하려고 발버
둥치는 못난 늙은이의 푸념이라 생각하고……"
황함사귀는 결코 목숨을 부지하려고 발버둥치는 늙은이가
아니다. 그는 삼십육검 전부가 목숨을 빼앗을 목적으로 달려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도 지금처럼 태평할 게다.
시간이 지나고, 황함사귀를 알면 알수록 한백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추레하고 못나 보이는 늙은이, 황함사귀의 머릿
속은 온통 꾀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그것은 자신이 생각해내는 계책과는 종류가 전혀 다르다.
자신의 계책이 천기(天氣), 지형(地形), 인사(人事)를 두루
살핀 다음 병법(兵法)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대응책을 뽑아내
는 것이라면, 황함사귀는 툭하고 건드리자마자 바짝 몸을 움
츠리는 지렁이와도 같은 본능적인 지략이다.
일이 발생함과 동시에 그의 머릿속은 해결책을 생각해낸다.
세상사를 두루 겪어 인간을 깊이 꿰뚫어볼 줄 아는 현자(賢
者)의 지혜와도 같은 것이다.
살아있는 지혜, 움직이는 지혜…… 거기에 비하면 자신의
계략이라는 것은 건조하지 않은가. 살아 움직인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지금만도 그렇다. 자신은 온갖 병법들 가운데 적당한 해결
책을 찾고 있는 반면, 황함사귀는 본능적인 해결책을 찾은 것
이리라.
"지금 이곳은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말씀이야…… 그래도 엄
연히 여기는 적지(敵地)거든. 이랑을 적지에서 사고를 쳤고.
그럴 경우, 병법에서는 어떻게 처리할까? 헤헤! 궁금해서 생
각해 본 겁죠."
'객전(客戰)……'
"심입즉전(深入則專)."
한백은 엉겁결에 한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그는 줄곧 객전에 대한 대응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황함사귀가 객전에 대한 말을 물어오자 마음속에 있는 말
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가 버렸다.
"헤헤! 무식한 늙은이라……"
"휴우!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병사들이 단결하고, 주도
권을 잡을 수 있다는 말로 손자의 구지편(九地編)에 나오는
말입니다."
"헤헤! 역시……"
황함사귀는 못내 즐거운 듯 했다.
뭐가 역시란 말일까?
"헤헤! 그럼 어떻게 싸워야 할지……?"
"전가는 주인입니다. 우리는 객(客). 그래서 병법에서는 이
런 경우를 객전이라 합니다."
"호오!"
황함사귀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눈을 말똥거렸다.
"적지에 들어와서는 불퇴전(不退戰)의 각오로 싸워야 합니
다. 살려고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한신(韓
信)의 배수진(背水陣)과도 맥을 같이 하죠."
"그럼 죽자살자 싸워야 한다는 말씀?"
"전가무인이 앞을 가로막는다면."
"역시 그 방법일 줄 알았죠. 히히!"
한백은 기분이 조금 언짢았다. 이건 뭔가. 마치 비웃고 있
는 듯 하지 않은가.
"이랑께서 느린 걸음으로 걸으실 때, 허허실실(虛虛實實).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쯤은 생각했습죠. 이랑께 빚을 졌군요.
헤헤!"
'빚…… 빚……'
빚을 많이 졌다. 적엽명이 아니었다면 벌써 불귀(不歸)의
혼(魂)이 되었을 게다. 그러면서도 적엽명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번과 같이 자신의 조그만 실수 때문에 사지(死地)
에 빠진 것이 한두 번 아니지만 그는 언제나 앞일만 생각할
뿐 이미 지나간 일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마음으로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적엽명에게는.
"이 쪽은 약한 나라, 저 쪽은 강한 나라. 그런데 자꾸 무리
한 조공(朝貢)을 원하지 뭡니까?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한백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물어온다.
적지, 병법, 나라, 조공……
'유인책에 걸려들었군. 허!'
한백은 날카로운 눈으로 황함사귀를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저의(底意)로 묻는 것인지?"
"헤헤! 저의랄 것은 없고…… 그런 생각이 들지 뭡니까? 전
가주가 무리한 강압을 해올 것은 자명하고…… 헤헤! 이쪽은
약한 나라, 저 쪽은……"
한백의 눈길이 더욱 사나워졌다.
"아직 몰랐습니까? 이 황함사귀. 이랑을 친자식으로 여기고
살아온 세월이 이십 년이 넘었습죠. 이랑은 늙어서 주책이나
부리는 늙은이 정도로 알고 있지만 말입죠. 헤헤! 이랑을 위
해서라면 하찮은 목숨, 기꺼이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이 사람
입죠. 헤헤! 그대하고라면 뭔가 이야기가 통할 것 같아서."
황함사귀는 '목숨을……' 운운하면서도 전혀 흔들린다거나
결의의 뜻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이런 부류는 둘 중에 하나다.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너무
오랫동안 다져온 결심이라 새삼스러울 게 없는 것.
한백은 후자라고 생각하고 따가운 눈길을 풀었다.
"어떻게 짐작했습니까?"
"헤헤! 무인치고는 병법에 너무 해 밝아서…… 해남도가 해
남파의 텃밭이다 보니 무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접했습죠. 그
러다 보니 이제는 외양만 보고도 무공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
게 됐습죠."
"……"
"이랑은 느낌이 달랐습죠. 피비린내가 전신에서 풍겨 나오
는데……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고. 그대들을 보자
아! 하고 뒤통수를 딱 때리는 것이 있지 뭡니까."
"……"
"제 말이 맞죠?"
"그러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니. 후후! 능구렁이가
천 마리는 뱃속에 든 영감이군. 황함사귀…… 누군지 별호 하
나는 정말 잘 지었어."
한백의 말투가 갑자기 하대(下待)로 바뀌었다.
"어느 분을 모시고 있는지?"
황함사귀가 벌떡 일어나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너무 깊이 알지 말게."
"짚이는 게 있습죠. 이랑께서 군부(軍部)와 연관을 맺었다
면 해남도에 유배되어 왔던 적사장군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요. 적사장군과 관충대장군은 막역지우(莫逆之友)로 알
고 있는데……"
"너는…… 아까운 사람이군."
"헤헤!"
"때를 만나지 못했어. 사람이라도 잘 만났다면 일 국을 좌
지우지했을 인물인데. 외진 해남도에서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
이야."
"헤헤! 과찬의 말씀."
"이제 됐나?"
"조금만 더. 헤헤! 신분이 어떻게 되는지…… 얼마나 출세
했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죠."
한백은 황함사귀의 눈에서 뜨거운 정을 읽었다.
그는 말해주었다.
"종사품(從四品). 운남도사(雲南都司)의 병권을 쥐고 계시
지."
"햐아! 대단하군요! 종사품이라면……?"
황함사귀는 관직(官職)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 해남도와 광
동을 벗어난 일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특히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흥밋거리도 되지 못했다.
한백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경주지부 자사가 종사품이지."
"와! 대단히 높군요."
"원래 자사는 정사품(正四品)이지만 해남도는 워낙 외진 곳
이라."
"그럼 천호소(千戶所)의 정천호(正千戶)는 몇 품?"
"정오품(正五品)."
황함사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이 늙은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죠. 헤헤! 이거 주착."
황함사귀의 눈에서는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는 황급
히 소매를 눈물을 찍어 닦았다. 관직과 인연이 없는 사람들은
천호소가 제일 무섭다. 그리고 천호소의 수장이 제일 높은 사
람처럼 인식되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적엽명은 정천호보다도
벼슬이 높다니.
"헤헤! 그 정도로 높은 관직이면 봉록(俸祿)도 만만치 않을
줄 압니다만."
"이백 쉰 두 석(石)."
"많이 못 받는군요."
"하하!"
보통 사람들은 꿈에서도 그리는 봉록이다. 하지만 종사품직
이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너무 적은 봉록이다. 세상에 천석지
기, 만석지기가 수두룩한데 일국(一國)의 중책을 걸머진 사람
이 그만도 못하다니.
"이제 속이 풀렸는가?"
"헤헤! 말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끈질기군. 알만큼 알았을 텐데."
"군에서는 이랑을 뭐라고 부르는지……?"
"홍암(紅巖) 장군(將軍)이라고 부르지. 십 년만 일찍 태어
났어도……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세우실 때, 곁에 계셨다면
지금쯤 삼공(三公)이나 못해도 삼고(三孤)의 일 석을 차지하
고 계셨을 거네."
"감사를 드리고 싶군요."
황함사귀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 모았다.
"군에는 이런 말이 있지. 홍암장군의 휘하에는 들어가지 마
라. 십 중 팔,구는 죽는다."
"네엣?"
"하지만 장군의 휘하에 들어오고 싶다는 장병이 줄을 섰다
네. 하하하! 나도 그렇고 화문도 그렇고 우리 모두 홍암장군
의 휘하에 있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지."
그것으로 족했다.
어떤 때는 한 마디 말이 수천 마디를 대신하는 법이다. 황
함사귀는 간단한 한 마디 말에서 적엽명의 위용(威容)을 엿볼
수 있었다.
"부장(副將)이신 지?"
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백이나 화문이나 관직에 욕심을 냈다면 해남도 경주지부
자사쯤은 어렵지 않게 차지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꿀같이
달콤한 권력(勸力)을 멀리한 채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떠돌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광이라고 말한다.
"부디 이랑을 잘 좀 도와주시기를……"
황함사귀는 벌떡 일어서더니 느닷없이 예를 올렸다.
한백은 감당키 어려운 예를 묵묵히 받았다. 그것이 황함사
귀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는 처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신
엄한 일갈로 어색함을 무마했다.
"지금 들은 말은 죽는 순간까지 입 밖으로 내서는 안될 것
이야."
"이를 말씀. 목에 칼이 들어오고, 사지육신이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봉합죠."
태양의 뜨거운 열기는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함사귀와 한백이 거적을 깔아놓은 야자수는 널찍한 대로
변에 있지만 오가는 사람들은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었다.
"마수광의라는 자가 있었지."
"압죠. 외관영 영주인 석두에게 죽었죠. 한광이 죽인 것이
나 진배없지만."
"장군의 간자였어."
"네엣!"
황함사귀는 화들짝 놀랐다.
"사파의 인물이었으나 개심(改心)한 후로는 장군을 위해 몸
을 아끼지 않았지. 그런데 장군이 보는 앞에서 죽은 거야."
"알고 있습죠. 이랑을 처음 만난 장소에 죽어있었습죠."
"당연히 나섰어야 했고, 그랬다면 마수광의는 죽지 않았겠
지. 장군은 나설 수 없었지. 군인이란 그런 거지. 오른팔이
잘리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임무를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없
는."
"그래서 그렇게 울적하셨군요."
황함사귀는 뇌주반도에서 적엽명을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눈가에 떠오른 그늘을 쉽게 떠올렸다. 그는 마수광의의 시신
을 쳐다보며 한없이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날, 그
는 폭음(暴飮)했다.
"한 마디만 더 하지. 우리들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소리소문
없이 죽게 될 거야. 지금까지 해남도에 들어온 사람은 많았
고, 무용(武勇)만으로 놓고 볼 때, 그들은 결코 우리에게 뒤
지지 않아."
"그들은 모두……?"
황함사귀는 소리소문없이 죽어간 몇 사람을 알고 있다. 해
남도에서 죽은 사람도 있고, 죽은 채 바다 위에 떠오른 시신
도 있었고, 대륙에서 죽은 사람도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섬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 신분을 파악하기는 더욱 어
렵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객사(客死)한 떠돌이들
이 한두 명이 아니건만 최소한 서른 군데 이상 칼에 찔린 듯
전신을 난자 당해 죽은 시신들은 수습하자마자 감쪽같이 사라
지곤 했다.
그들이 모두 군인이란 말인가.
"모두 죽었지. 이 곳에서."
"누가 그런 짓을……"
"모르지. 우린 그들의 복수를 하러 온 게 아니야. 그들이
하던 일을 하려고 온 것이지. 그러니 우리의 신분이 드러나는
날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만 했다.
운남도사의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장군이 직접 움직였다는
것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해남
도에 그만한 일이 있었나? 그렇다면 왜 자신이 알지 못했을
까?
여족 제일의 꾀주머니라는 자신도, 여족 제일의 귀를 가졌
다는 황유귀도 모르는 일이라면 도대체 무엇일까? 누가 일을
추진하기에 그토록 비밀리에 진행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비밀리에 군인들을
죽인 그 자야말로 무서운 자다. 그런 자라면 뱀과 같은 촉각
을 가지고 있어서, 신변에 위험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누구보
다도 민감하게 느낀다. 적엽명이 일을 부탁하면서도 끝까지
비개조건이란 단서를 붙인 것은 당연한 처사다. 자신과는 다
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사귀를 자신의 일에 끌어
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황함사귀는 궁금한 점이 생겼다.
정보를 취합하는데는 남다른 솜씨를 가지고 있다는 해남파
비파.
그들은 이번 일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있을까.
"장군이 어디 가신지 짐작 가는 곳은 있나?"
한백이 불쑥 물어왔다.
"모릅죠. 전에도 그랬습죠. 사귀라는 이름을 얻을 때니까
오래됐지만…… 불쑥 어딘가로 사라졌다가는 다음 날 나타나
곤 했습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요."
"자, 이런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다시 황함사귀와 무자
음사로 돌아갑시다."
"헤헤! 알겠습죠."
황함사귀는 털썩 드러누워 발을 포개고 풀피리를 불었다.
아무 이야기도 못들은 것처럼.
'내가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황함사귀처럼 편하게 드러누운 한백은 엉겁결에 비밀을 말
해버린 후인지라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
지 않는다. 황함사귀의 부정(夫情)보다 진한 애정이라면 그만
한 말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
따그닥! 따그닥……!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달려드는 말발굽 소리에 황함사귀
와 한백은 벌떡 일어났다.
콩알만한 점으로 보이던 형체는 곧 수박만하게 커지더니,
이내 제 모습을 드러냈다.
황함사귀는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전력으로 질주해오는 말의 기세로 보아 두 사람을 스쳐 지
나기 십상이었다.
"워! 워!"
유소청은 다급히 말고삐를 잡아챘다.
황함사귀가 손을 흔들지 않더라도 유소청은 이미 이들을 보
고 있었다. 적엽명 일행이 관도를 버리고 들이나 논밭 사이로
길을 잡을 우려도 있지 않은가. 풍경이 질풍처럼 스쳐 지나는
마상(馬上)이지만 그녀의 예리한 안목은 사방을 유심히 살펴
왔다.
"헤헤! 좋은 말을 얻었습니다요. 우리는 내일 아침녘에야
도착할 줄 알았는데."
"큰일났어요."
유소청은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다급하게 소리쳤다.
"비(蜚) 가가(哥哥)는 어디 있죠?"
"어디 좀 들렸다 온다고 했는데 왜……?"
"어디를 갔는데요? 빨리 불러와야 해요."
"유소저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말해봐요. 도대체 무슨 일인
데……"
"전가주가 대가를 요구해요. 체면을 세워 달래요. 손가락을
자르던가 저 사람의 목숨을 요구한단 말예요."
유소청은 손으로 한백을 가리켰다.
그녀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하든 적엽명에
게 이 사실을 빨리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자, 자…… 더운 날씨에 먼 길을 달려왔으니 목이나 축이
고……"
황함사귀는 죽통(竹筒)을 내밀었다.
"지금 물이 문제예요? 빨리 비가가에게……"
문득 유소청은 황함사귀가 웃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고 보니 한백도 웃고 있다.
"왜……?"
"헤헤! 이미 짐작했습죠. 자, 목이나 축이고 나서 천천
히…… 어차피 이랑은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 거예요. 말을 얻
어 타고 올 줄 알았다면 여기서 그냥 기다렸을 텐데."
유소청은 몸이 땅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팽팽하게 당
겨졌던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렇군요. 전 또 이미 알고 있는 줄 모르고…… 물이나 주
세요."
유소청은 죽통을 받아들고 물을 마셨다.
그녀의 의복은 땀에 흠뻑 젖었고, 머리카락도 어지럽게 흩
어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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