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의 오월 사색>
“추워진 뒤에야 나무가 푸르다는 걸 알았다”
옛 사람들의 마음이 새긴 글귀가 이순에도 현현한 배움과 교감이 제대로 오지않는다.
나이 들어서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고 말하기 두렵다. 사람으로서 나이듦이 서러운 것만도 아닐 것이다.
며칠 전 광주에서 선배들이 진도까지 찾아와 저녁시간을 가졌다. 아내와 아들까지 데려가 자리를 채웠다. 옛날 고조리로 내린 홍주 한 병과 단오절은 멀지만 부채 두 개를 담아 선물로 건내주었다. 내가 치르는 밥값이다.
나는 연민이라는 쟁기로 시전(詩田)을 일구자 했지만 어깨와 눈이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 격물의 이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허튼 흉내만 늘었다. 다 허물이다. 사무사(思無邪)와는 너무 멀고 반 고흐의 붓꽃 한 송이 향기에도 미치지 않는 시골 주정뱅이 꿈속 옥주(沃州)타령에 머물렀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마른 솔잎들을 모으듯 시귀를 여기저기에서 줍는다. 이 솔개재는 장흥에서 패퇴한 동학군들이 마지막 항쟁으로 모두 죽고 그 지도자인 박중진은 1백년 뒤에 일본 홋카이도대학 인류학부 창고에서 유골로 발견되었다.
완이 형이 헤어지기 앞서 책 한 권을 주었다. ‘궁핍한 날의 벗’이었다. 안대회씨가 엮은 초정 박제가의 문장과 일화를 담은 책이다. 표지에 담긴 그림은,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겨울 설매가 핀 산중 모옥으로 ‘이문회우(以文會友)’ 발자국을 꽃잎처럼 새기며 세속을 벗어난 지우가 찾아가는 그림이다. 제자 우선을 위해 그린 완당(阮堂)의 세한(歲寒)은 고고하며 외롭지만 이 그림은 의외로 따스하다. 눈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섬에서 산숭해심(山崇海深)을 이순의 눈에 판각하듯 몇 번이나 새겼지만 산도 못 오르고 바다를 건너가길 두려워 하며 살고 있다. 엉겅퀴처럼 할미꽃처럼 민들레처럼 살고 싶다.
소치(小癡)는 서울살이를 접고 진도로 돌아와 첨찰산 아래에 운림산방을 짓고 살았다. 큰아들 허 은(米山)을 데리고 목숨을 걸고 제주 대정마을을 세 번이나 찾았다. 여기서 허 은은 제주도 귤농장 주인(문백민)의 초상화를 그린다. 찬(讚)은 아비인 소치가 썼다. 현재 이 그림(귤수소조)은 제주특별자치도의 유형문화재(33호)로 지정되어 전시되고 있다. 진도에도 대미산의 진품 초상화가 소장되욌지만 군에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방문(榜文)처럼 선인들의 글귀를 오래 전부터 읽었건만 가끔 가슴에 사무친 까닭이, 추사에 비할 바 못 되지만 세한(歲寒)의 곡절을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제법 단단해져서인지 모르겠다. 추사가 그토록 중시한 ‘그림에서 글을 읽을’ 수는 없지만 장무상망(長毋相忘)으로 나를 찾는 분들에게 마음 답례를 건내주고 싶을 뿐이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인 내 아들도 이런 물결이 닿을지 모르겠다. 소년시절부터 너무 좋아해서 몸과 간이 상한 술버릇을 버리지 못해 막걸리 두 잔을 마셨다. 그 집 주인 진엽여사는 시와 책을 좋아한다. 이 생이라는 것 또한 결국 일엽편주에 불과한 것을.
석구형과 완형은 생선구이 저녁을 들고 다시 광주로 돌아갔다. 광주고등학교 문학반 출신 아카시아문학동인은 순백한 열정과 세상에 대한 연둣빛 사랑이 오월의 동산을 수놓았다. 그 인연은 세월과 질곡의 시대를 건너 ‘사람의 마을’을 만드는데 그 역할을 다하려 노력해왔다.
세상은 이제 계절과 관련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춥고 시린 회랑으로 바람이 흐른다. 제도는 홍익을 추구한다지만 물지른 편중되고 누구나 섬이 된다. 유배를 당한다. ‘어디에서 보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미 서울은 대한민국 안에서 괴물같은 선택된 제국으로 자리하고 있다. 솔과 잣은 매연과 황사로 신음거리고 몸부림치며 아파트는 봄비도 없이 마구 솟아오른다.
혼돈과 치욕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고 했다. 4월이 다 가지만 나는 더 푸르고 싶다. 나를 가두고 나를 키운 진도의 바다. 나의 시는 깊이도 높이도 없는 기억의 늪이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5년이 흐른 1844년, 거친 바다를 건너 《우경문편(藕耕文編)》이라는 거질의 책이 바다를 건너와 추사에게 전해진다. 이상적이 만리 밖 북경에서 여러 해를 두고 구해서 보내 준 귀중한 책이었다. 추사는 지우이자 제자인 우선의 깊은 경외심에 보답하듯 갈라진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온전한 붓으로 발문을 썼다.
<세한도 발문(歲寒圖跋文)>
지난해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집》 두 종류의 책을 부쳐 오고 올해에는 또 《우경문편》을 부쳐 오니 이 책들은 모두 세상에 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천만 리 밖에서 여러 해에 걸쳐 구입하여 보낸 것이니 한때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세상의 도도한 흐름은 오직 권세와 이익을 쫓아 그것을 얻기 위해 마음과 힘을 이토록 허비하는데 그대는 권세와 이익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마침내 바다 바깥 초췌하고 바싹 마른 늙은이에게 돌아가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쫓듯 하는구나.
태사공이 이르길 “ 권세와 이익으로 만난 관계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고 나면 사귐 또한 끝난다”라고 했다. 그대 또한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스스로 도도히 흐르는 권세와 이익의 밖에 있으니 그렇다면 그대는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렸단 말인가?
공자께서 이르시길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에 관계없이 시들지 않으니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그대로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일 뿐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단지 날씨가 추워진 뒤의 소나무와 잣나무만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이 이전에 더 잘해 준 것이 없었고 이후로 더 덜어진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것이 없겠거니와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성인께서 특별히 칭찬하신 것은 한갓 늦게 시드는 굳센 절개 때문만이 아니라 날씨가 추워진 뒤에 감동한 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아! 한(漢)나라처럼 순박한 시절에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같이 어진 사람들도 빈객의 수가 권세와 이익에 따라 늘거나 줄었다. 이를테면 하비의 적공(翟公)이 문에 걸었던 방문(下邳榜門) 같은 일이야 박절함이 극에 달한 경우라 할 것이니, 슬프구나! 완당 노인이 쓰다.
그는 무엇이 더 슬펐을까? 인군의 마음이 닿지 않는 냉혹한 조정의 현실 때문이었나. 그 많은 벗들, 고향 예산의 냇물이 마르도록 쓴 꽃다운 언약들이 떠올랐을까? 여기에 비해 폄하되던 해도인(海島人) 소치 허련이 내보인 지극함은 더욱 돋보인다. 지금도 운림산방에는 완당의 ‘소허암(小許庵)’이 판각된 현판이 걸려있다. 의재 허백련의 독특한 서체 현판(운림산방)도 함게 걸려있다.
시(詩)인가 비(非)인가
이쯤에서 허 소치의 운림각도 화제를 잠시 소개하고 싶다.
“깊은 산골에 있는 내집은 봄이 지나 여름이 오면 뜰에 푸른 이끼가
깔리고 좁은길에 꽃잎이 가득 떨어지는데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소나무 그늘에 누어
새소리를 들으며 낮 잠을 즐긴다.
단잠에서 일어나면 솔가지를 모아 차를 다려 마신다.”(중략)
자신을 꾸준히 채찍하고 갇혀있던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로 만드는데 소치는 생을 바쳤다. 완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허 소치는 자신의 작품에 더 멀고 더 이상적인 세상을 담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남도의 풍정을 담고자 했다. 그는 메추라기라 불리던 최북이나 그 이후 오원 장승업과는 길이달랐다.
사람들에게 광기의 화가라 불렸을 만큼 엉뚱하고 별난 행동으로 늘 화제를 모았던 오원, 서민들에게 더 깊숙이 다가서 ㅎ조선후기 시대상을 제대로 실록처럼 그려낸 단원 김홍도와도 기러가 멀었다.
추사는 정점을 지나 하현의 달로 기울고 있었다. 전주에서 이삼만을 만나고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 걸린, 동국진체를 이뤘다는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을 금강안 혹리수로 뜯어 내리라는 호기를 부렸지만 제주 유배에서 풀려나오면서 다시 걸려라고 하는 것 까지도 호기와 당대의 지배층 문화지식 독점의식이 다 씻어내지 못한 듯하다. 소치는 여전히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초의와 완당의 충실한 그늘이었다. 그는 고뇌하였다. 열정과 상상력의 근원은 저녁 다향처럼 식어내렸다. 그의 끊임없이 예술적 영감을 제공했던 서화집도 더 이상 구할 수 없었다. 산숭해심을 들고 화인이자 화상으로 옛길을 다시 되짚어 떠돌았다.
그에게 삶은 음양의 조화로움이었다. 만월보다는 ‘구름으로 그린 달’처럼 살고자 한 듯하다. 처음 조선에서 화가로서는 자서전을 만들 때 ‘몽연록(夢緣錄)’이라 하였다. 나중에 소치실록으로 했다. 치옹만고도 지었다. 그림 밖으로 튀어나온 글들은 그를 단지 화인으로 머물지 않고 다선일여와 시와 그림이 하나이다는 철학개념을 고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를 곧추 세운 것은 솟대와도 같은 ‘작대기 산수’와 추사체의 허리뼈를 버리지 않은 일체유시믜 장무상망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슬프지만 운림산방의 소치미술관에 들어서면 그저그런 화랑에 들린 이미지를 떨칠 수가 없다. 허 소치의 대표작이라는 운림각도(서울대 소장)는 선면산수화로 그 화제가 한 노 화가의 삶이 녹아있는 철학시이자 자신이 기거하는 산방의 고아한 이상향을 옮겨놓은 걸작이다. 그러나 너무 아쉽게도 이 그림은 그저그런 복사본에 불과하다. 다른 그림글씨들도 마찬가지다. 입맛이 쓰다. 미산(米山)의 작품도 이곳보다 진도읍 교동리 진도현대미술관(관장 박주생)이 더 많이 소장하고 있는 듯하다.
남도의 외진 섬 산골에서 3대에서 5대까지 이어지는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이 화맥은 금맥으로 치자면 순도가 아직 떨어진다. 오히려 주변의 풍경과 장풍득수의 길지, 양택명당임에 매료당할 것이다. 그림도 어찌 보면 19세기 한복판 인연의 꿈세계를 거닐며 연운공양 86년의 인생에서 하나의 곁가지일 뿐일지도 모른다. 나의 시 또한 그럴 것이다.
나는 두 번째 시집 제목을 ‘몽유진도’라 하였다. 그보다 훨씬 먼저 자운 곽의진 작가는 총 5권의 대하소설 ‘꿈이로다 화연일세’를 내 소치 허련 선생을 세상에 다시 밝혔다. 동다송을 지은 초의 장의순 선사와의 아름다운 인연과 해남 윤씨 가문과의 은혜로운 만남 등을 진도 돌미역같은 질긴 향기를 엮어내었다.
200년을 넘게 굳굳히 지키고 있는 소나무와 그 앞의 묘자리와 얽힌 집안의 아름다운 사연이 소치 허련선생의 인품과 보은의 따스한 성정을 드러내보여준다. 감나무와 동백나무 몇 그루가 더욱 운치를 더한다. 나는 어린시절 이곳에서 비석치기를 하며 놀았으며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다 떨어지기도 했다. 백설기같은 동백떡을 먹어본 적이 있는가? 장무상(長毋相)과 차바구독, 향동 이씨를 무정(정만조)에게 소개한 소치선생 아들 미산 허형의 혜안은 벽오강을 적신다.(박남인 추모 글)
(귤수소조. 대미산 허은 작)
하비방문(下邳榜門) 내용
한 번 죽고 한 번 살아남에 사귀는 마음을 알 수 있고,
(一死一生 卽知交情)
한 번 가난해지고 한 번 부유해짐에 사귀는 태도를 알 수 있고,
(一貧一富 卽知交態)
한 번 귀해지고 한 번 천해짐에 사귀는 심정을 알 수 있다.
(一貴一賤 卽見交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