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봉마르셰_세계 최초의 백화점, 30×40㎝, 종이에 혼합재료, 2019
■ 봉 마르셰 백화점
1870년대 지은뒤 리모델링
고색 창연한 맛 사라졌지만
옛날식 오페라극장 간 느낌
젊은시절 향수 되돌아보며
쇼핑보다 산책 어울리는 곳
백화점과 관련해 설마 싶은 얘기 하나가 전해 내려온다. 오래전 한 백화점의 간부가 해외여행길에서 아내에게 선물할 핸드백을 사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시큰둥해하며 색깔과 디자인이 전혀 마음에 안 든다고 퇴박을 놨다는 것. 난감해진 남자는 포장만 뜯은 물건을 슬쩍 자기네 백화점 매대에 놓아 보았다고 한다. 고객들의 반응은 어떨까 싶어서였다.
역시나 몇 달이 지나도록 거들떠보는 이가 없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남자는 가격표에 0을 하나 더 붙였단다. 그날 오후 물건이 팔려나갔다. 당황한 남자는 힘들게 고객을 찾아 전화로 사연을 말하고 되돌려주기를 원했지만 반응은 자다가 웬 봉창 두드리는 얘기냐는 투였다. 그리고 정작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똑같은 핸드백을 구해달라는 고객들의 요청이 쇄도했다는 것. 허허 하고 듣기에는 뒷맛이 개운치 않다.
백화점은 이토록 욕망을 끝없이 확대 재생산한다. 그곳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토록 예민하던 이성의 촉수는 마비되고 무장해제돼 버리고 만다.
그다음부터는 패배가 예정된 코스를 돌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극소수 얘기겠지만 간혹은 통제되지 못하는 구매욕구로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경우까지 생긴단다. 구매욕에 대한 갈망과 그것을 통제하려는 의지 사이에서 번번이 승리는 전자의 것이 되고 상품의 역습 속에서 의지가 무력해지는 어이없는 풍경이라니.
그렇다면 세상 최초의 백화점이라는 곳은 어떤 모습일까. 혹 꼭 필요한 것만 제공하는 수도원처럼 절제된 곳은 아닐까.
그 호기심 하나로 나는 옛날식 오래된 찻집을 찾듯 봉 마르셰를 찾아간다. 도착해 보니 건물은 평범하다. 1870년대에 처음 지어졌다지만 리모델링을 거듭해서 그런지 고색창연한 맛 같은 것은 없다. 입구에는 웬 정장을 한 두 남자가 서서 가방을 열어보란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멈춘 곳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나는 속으로 실소했다. 백화점은 백화점, 수도원은 수도원. 파블로 네루다 식으로 말한다면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이다. 서울의 화려한 백화점들처럼 첨단의 시설과 물건들로 넘치는 풍경은 아니었지만 백화점은 백화점이었다.
한산하기 그지없지만 여느 곳처럼 명품숍들도 보인다. 그렇다 해도 너무 한산하다. 가끔은 물건을 사기보다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도 백화점 고고학 산책에 나선 것일까. 우선 라파예트처럼 사람들 물결에 떠밀려 다니지 않아서 다행. 교복을 입은 듯한 종업원들 복장 하며 매대의 진열 모습이 일단 험블하고 편하다. 무슨 사회주의 국가에 온 듯한 느낌도 있다.
우리나라 옛날 동대문 시장 사진에서처럼 포목점이 있어 사람들이 옷감을 사가는 모습도 보이고, 그 옷감으로 한쪽에서는 수천 번 바느질해 옷을 짓는 모습도 보인다.
간혹 보이는 고객 중에는 확실히 노년층이 많은데 처녀·총각 시절 이곳을 드나들었던 향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격도 거품이 없어서 관광객들보다는 오래된 프랑스인 단골이 많고 명품보다는 프랑스 브랜드의 장인(匠人)들이 만든 물건들을 많이 취급한다고 했다. 어쨌거나 과도한 인테리어와 조명으로 고객을 불편하게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물건도 적절히 적은 양으로 나뉘어져 있는데다가 백화점보다는 마켓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좋았다. 중앙 홀이 뚫려있고 커다란 샹들리에며 에스컬레이터가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얼핏 옛날식 오페라 극장 같은 느낌도 있다.
백화점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다. 어떻게 하면 고객의 마음과 눈길을 단 몇 초 만에 끌지에 골몰한다. 그런데 봉 마르셰는 진화를 멈춤으로써 오히려 퇴행한 듯한 풍경으로 진화에 맞선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파리 중심가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버텨낸 비결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그 금싸라기 공간에서 커다란 서점이라니… 여러 개의 상품매장을 거느릴 수 있는 공간에 이토록 큰 책방이 있다니 반갑기 그지없다. 텅 비다시피 한 카페도 좋다. 물어물어 백화점에 찾아갔다가 에스프레소 한 잔에 작은 화집 하나 사들고 나오니 그 발걸음이 유쾌하기 그지없다.
길을 건너와서 높지 않은 그 건물을 바라보니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손님, 이곳은 욕망을 파는 곳이 아니랍니다. 파리의 자존심을 파는 곳이죠. 게다가 ‘오래된 시간’을 덤으로 드린답니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한때 파리 패션 선도… 이젠 복고품 팔아
1852년에 개장한 유럽 최초의 백화점인 봉 마르셰(사진). 파리에서 처음 문을 열면서 여러 상품을 한곳에 모아 파는 백화점 형태들이 유럽 각국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파리 패션을 선도하는 곳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새로운 형태의 백화점들에 밀려 주로 복고풍 물건들을 많이 취급한다. 라파예트처럼 관광객들로 붐비지 않아 한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