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래미 언니
박정 자
어느 시인은 언니라는 말에서 하얀 찔레꽃과 하얀 치자꽃
향내가 난다고 했다.
그런 언니가 다섯이나 되니, 나는 치자꽃과 찔레꽃밭에서
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어렸을 땐, 외동딸로
자란 친구를 턱없이 부러워 하곤 했다. 몸에 꼭맞는 옷과, 새
운동화를 계절따라 챙겨 입는 그 애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집안 형편이 그리 궁핍한 것도 아닌데 막내로
자랐기 때문에 옷과,신발, 책가방은 물론 속내의까지 물려
입어야만 했다. 느을 신발은 커서 헐떡거렸고, 심약했던 나는
운동화 때문에라도 체육시간을 제일 싫어했다. 항공모함처럼
큰 신을 유행이라고 사 신고는 터벅터벅 소리를 내며
등교하는 딸애를 보고 있으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도 운동화는 조금 헤지면 헐렁하나마 새로 사 신었지만
(발이 자라 금방 작아 진다며 한 번도 발에 꼭맞는 신발을 사
주신 적이 없었다.) 속내의는 무릎과 팔꿈치를 두꺼운 헝겁을
대서 기워 입었다. 꿰맨 셔츠가 어찌나 입기 싫었던지,
날씨가 쌀쌀해져 기운 셔츠 생각만 해도 몸서리를 치곤 했다.
공부 시간에 필기를 할 때면 기운 팔꿈치기 배겨 아파왔다.
그 당시 내 소원은 한 번도 빨아 본적이 없는, 새옷 냄새가
풀풀나는 새 셔츠를 입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몸맵시를 낸다며 속내의를 입지
않아 이루지 못한 내 소원이 되었다. 첫 월급을 탄 돈으로
엄마, 아버지의 잿빛과 붉은색 셔츠를 사들고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속옷가게를 지나게 되면 발길이 머물곤 한다. 예쁜
속옷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이 것, 저 것 고를때가 있다. 마치 어렸을 때의
보상이라도 하듯이…
어깨선이 고와 한복 맵시가 좋았던 둘째 언니는, 내가 둘째
아이를 낳던 해 오랜 지병인 심장병을 앓다 돌아 가셨다.
아들을 바라던 끝에 둘째딸로 태어나자 ‘명자’라는 이름대신
둘래미라고 불리던 언니. 우리 여섯 자매중 음식솜씨가
뛰어난 언니는 씩씩하고 상냥해서, 술잡숫고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술시중을 도맡아 하곤 했다.
내가 결혼해서 이웃으로 살림나게 되자, 친정 어머니처럼
때마다 맛난 반찬으로 남편을 신나게 해 주던 언니. 아파서
누워 있을 때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못 가본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돌아가기 며칠전 입맛없어 하는 언니께 밑반찬 몇 가지
해준 것을 조카들이 고마워 이야기 할 때면 너무나 죄스러워
어디로 숨고만 싶다.
무능한 형부가 미워 쌀쌀맞게 대했는데 언니없는 살림에
부쩍 늙은 형부를 볼 때면 마음이 언짢다.
작년 회혼례때, 돌아간 둘째딸 때문에 잔치하길 거부하신
어머니께선 이제 딸과의 해후가 멀지 않았다는 이야길 자주
하신다.
너무나 딸이 그리울때면 죽은게 아니라 멀리, 너무나 멀어
갈 수 없는 나라에 이민보내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어머니. 행여 너무 늙어 버린 자신을 못 알아볼까 걱정이
되신다며 로숀 바르는걸 잊지 않으신다.
이제는 사진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언니의
얼굴.
산들이 자랑이라도 하듯, 찔레꽃을 하얗게 피워 낼때면,
둘래미 언니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다.
어려웠던 그 시절에는 소중한지도 몰랐던 지나간 것들이
오늘은 너무도 그립고 소중해서 가슴이 젖어온다.
1998.
첫댓글 어머니. 행여 너무 늙어 버린 자신을 못 알아볼까 걱정이
되신다며 로숀 바르는걸 잊지 않으신다.
이제는 사진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언니의
얼굴.
산들이 자랑이라도 하듯, 찔레꽃을 하얗게 피워 낼때면,
둘래미 언니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다.
어려웠던 그 시절에는 소중한지도 몰랐던 지나간 것들이
오늘은 너무도 그립고 소중해서 가슴이 젖어온다.
사진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언니의 얼굴.
산들이 자랑이라도 하듯, 찔레꽃을 하얗게 피워 낼때면, 둘래미 언니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다.
어려웠던 그 시절에는 소중한지도 몰랐던 지나간 것들이 오늘은 너무도 그립고 소중해서 가슴이 젖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