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 일차선 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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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 일차선 위의 도로를 달려본 운전자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지 않았을까? 특히나 그 길이 구불구불하고 경사가 있는데다 내 차 앞에 많은 짐을 적재하고 느릿느릿 가고 있는 대형 트럭이 있을 때 느껴지는 그 답답함에 대해서. 얼마나 오래 인내해야 그 정체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아주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 도로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고 그 대형트럭 앞에는 또 얼마나 많은 차량이 줄을 짓고 있을지 모르기에... 함부로 중앙선을 넘어 추월하려다가는 돌이 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만화를 잘 그린다며?]
더운 여름이었다. 첫 발령지에서 5년 2개월, 두 번째 발령지에서 또 다시 7년여를 보내고 세 번째 발령지로 첫 출근한 아침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수기에서 종이컵에 냉수를 받던 중 누군가 내게 물었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러나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는 이대팔 가르마의 오십 대 과장이었다.
[만화요? 그게 무슨...]
나는 갑작스런 알 수 없는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고 그 또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닌가...?]
나를 다른 누군가로 착각한 모양이다. 종이컵에 떠 놓은 냉수를 한 번에 쭉 마시고는 내 명패가 붙어있는 자리로 돌아와서 회사 내부전산에 로그인을 한 후 이 번 인사발령 명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이곳으로 발령이 난 사람들 중 같은 직급, 비슷한 또래의 직원들은 나를 포함 세 명 정도였다. 내가 이곳으로 오기 전 나머지 두 명에 대해서 확보한 정보는 두 가지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 그리고 그 두 명 다 나보다 입사시기가 빠르다는 것. 그 두 가지는 인사발령이 난 직후부터 이곳으로 향할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유는 나이 및 입사연도를 최우선시 하는 회사 고유의 승진인사시스템 덕분이다. 이름하여 연공서열.
이쯤에서 내가 다니는 회사의 소개를 하겠다. 우리 회사는 정부 산하 공공기관의 한 자회사이며 주된 일은 IT컨설팅을 기반으로 항만물류시스템 및 솔루션을 공급하는 것이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쉽게 말해서 물류관리프로그램을 항만을 통해서 수출입을 하고 있는 기업에 제공하고 그 사용료를 받는 것이다. 규모가 큰 곳은 아니지만 2000년대 들어 급속히 팽창하고 있는 IT기술개발 수요와 전자정부를 지향하는 정부의 의도를 충족하기 위해서 적어도 현재까지는 나날이 발전중인 회사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직장인으로서 회사의 장점을 굳이 이야기 하자면 집에서 출퇴근이 쉬운 대도시에 본사를 포함한 각 지점들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고 공공기관의 자회사라는 점 때문에 정년을 포함한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 근로기준법을 착실히 이행 중이라는 점 정도이다. 극심한 청년실업과 경기악화로 인한 베이비붐 세대의 조기퇴직 등의 극단적 실업문제들이 거의 매일 신문과 방송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요즘 그런 장점들은 그야 말로 평소에는 절대로 동의하지 못하지만 때로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신의직장’이라는 표현에 현실감을 부여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세상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어느 경제학자의 말처럼 우리 회사도 단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승진인사 시스템’ 이다. 여느 공공 기관이 그러하듯이 ‘연공서열순’은 우리 회사의 인사시스템을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근무성적? 직무능력? 음... 그런 것들은 나이, 입사년도, 출신대학, 그리고 이 곳 근무지에서의 헤게머니를 가지고 있는 관리자와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등 등의 수많은 조건에서 완전히 똑같은 두 사람이 존재할 아주 희박한 확률의 경우에서만 그 쓰임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회사의 그런 인사시스템의 수혜자였다. 8년 전 처음 대리로 승진할 때 까지는 말이다. 입사와 함께 세 명의 동기들이 P시에 있는 지사에 함께 발령을 받았다. 처음에는 좋았다. 생경한 이 사회의 첫걸음에서 언제든지 마음 놓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동기들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선배들을 안주삼아 맥주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동기들이 있다는 것이. 그렇지만 몇 년이 지나고 내가 그들 중 처음으로 승진을 했을 때, 이미 동기들은 모두 다른 지사로 떠나고 난 후였다. 내가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연공서열이란 말은 그야말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했다. 그때까지는...
거기까지였다. 연공서열은 그 후 8년 간 나를 대리라는 직급에 머물게 했다. 그 세월은 미래를 생각하면 언제나 푸른 바다가 떠오르던 ‘가능성의 30대 초반’에서 상상하기에도 생경했던 40대 직전으로 나를 밀어 놓았다. 하지만 내가 정말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지점에서 가장 많은 계약 건수를 달성했을 경우에도, 남들이 기피하는 업무를 자진해서 떠맡아 했을 때도, 위장병이 날 정도로 관리자들과 술을 마셔 댄 시즌에도 결과는 같았다. 내 앞의 몇 명이 승진을 하고나면 다른 지점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날아와 그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승진은 언제나 선배들에게 돌아갔으며 앞으로도 선배들은 연공서열이란 마술지팡이를 나로 하여금 현재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결국 내가 승진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모두 승진을 할 것으로 예상되는 5년 후이거나 그들이 어떠한 이유로 휴직 혹은 퇴직을 할 때 뿐 일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회사 밖 내 주변인들은 나를 무능력자나라고 욕할지 모른다. 이 지점에 첫 출근을 하기 전 날 있었던 내 여자 친구 유정과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그러한 가정은 아마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이번에도?]
유정은 마시던 아이스커피 잔을 테이블에 던지 듯 내려놓으며 물었고 나는 슬며시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대체 몇 번째야? 과장 승진이 무슨 고시라도 돼?]
나보다 먼저 대기업에 취직해서 4년 뒤 대리로 승진하고 또 4년 뒤 착실하게 과장으로 승진한 후 이제 내년이면 차장이 될 것이 확실하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몇 년째 이 시기를 무사히 넘겨야 할 그 어떤 것으로 여기고 있는 중이다.
[우린 너희랑은 다르다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벌써 몇 년 째 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 나로써도 처음엔 확실히 근거 있는 이유로 생각됐던 말들이 이제는 스스로 하나의 핑계처럼 들리는 중이다.
[그래서?]
유정은 양 눈썹에 각을 세우며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나를 향해 몸을 숙여 물었다.
[그래서라니...?]
[그래서 언제 할 거냐고? 승진!]
나는 이미 바닥나버린 아이스커피잔 속의 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아대며 그녀의 시선을 피해 간신히 대답했다.
[곧 하겠지.... 또 운도 따라야 하고...]
[뭐? 운이라고? 그럼 오빤 우리 결혼을 운에 맡긴 다는 말이야?]
그녀는 금방 내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흥분 했다. 물론 그녀가 그렇게 흥분하는 이유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 나였다. 3년 전 까지만 해도 유정은 나의 승진 탈락 소식에 누구보다 가슴아파했고 힘내서 다시 열심히 뛰라며 운동화까지 선물해 주었던 가슴 따뜻한 여자였다. 그녀는 10년의 연애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이유 없이 내게 화를 낸 적이 없었고 보통의 남자들이 꿈꾸는 합리적인 여성이었으며 내 삶의 동반자이자 최고의 조력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흥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녀 아버지의 ‘사위관’ 때문이었다. 35년을 대기업에서 일하며 초고속 승진을 하여 임원으로 은퇴하신 그녀의 아버지. 직장인이 직장을 다니는 이유는 첫 째도 승진, 두 째도 승진, 오직 승진만이 셀러리맨의 삶의 이유라고 생각하는 그의 직장인관. 그런 그의 신념으로 비추어 볼 때, 직장생활 13년간 단 한 번 승진한 남자가 그에게 딸의 인생을 맡겨달라고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언감생심.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버님이 뭐라 하시니?]
나는 답을 알면서도 무의식 적으로 물었다.
[아빠가 선보래. 아버지 다녔던 회사 직원이랑. 물론, 초고속으로 승진 중인...]
유정은 도중에 말을 끊고 아이스커피를 얼음 채 벌컥 벌컥 마시고 나선 나를 똑바로 처다 보았다.
[하하!]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웃으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처음엔 어이없어 하던 그녀도 곧 소리 내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하하]
10년의 연애기간 동안 파악한 그녀의 버릇들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할 때면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 것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그녀에게 ‘지금 거짓말 중이지?’라고 묻는 것이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그렇다는 뜻이었다.
한바탕 웃고 난 우리는 카페에서 나와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며 요즘 유행하는 TV프로그램과 해외여행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내일 새로운 근무지로의 첫 출근을 핑계로 평소보다 일찍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빨간 벽돌담에 장미 덩굴이 어울리는 그녀의 집 앞에 이르자 유정은 갑자기 돌아서며 내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오빠가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응? 뭘?]
[아빠 말이야...]
유정은 불이 켜진 자신의 집 거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해해.]
난 애써 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다짐하듯 말했다.
[이번엔 꼭 할께! 승진!]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방금 내가 한말이 실현될 극히 저조한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막상 새로운 인사발령지에 출근하여 다시 한 번 인사 발령 명부와 이 지점의 조직도를 확인하니 점점 더 현실의 암울함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듯 했다. 이 지점에 근무 중인 직원들은 모두 30 명. 그 중 대리들은 총 9 명 이었다. 그 중 나보다 입사가 빠른 사람은 나와 함께 전보를 해서 혼 선배 두 명과 이 지점에서 계속 근무를 해왔던 다른 선배 한 명이 더 있었다. 모든 대리들 중 입사 순으로 네 번째인 나... 역시 뚜렷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선배 대리들 모두가 갑자기 교통사고라도 나서 한꺼번에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참 무기력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이어 진다.
이곳에서 내가 맡게 될 업무는 이미 일주일전 이곳 팀장에게서 메일로 전달을 받았다. 그것은 회계 업무였으며 지난 2년간 내가 쭉 해오던 일이다. 업무의 특성상 조금은 전문성이 요구되며 지점장과의 궁합도 잘 맞아야한다. 그래서 이 업무를 맡은 사람이 지점을 떠나지 않는 한 좀처럼 업무 담당자가 바뀌지 않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전 담당자는 이 지점을 떠나지 않고 다른 부서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팀장으로부터 전달 받았다. 그런 경우 통상 첫 출근 하는 날 그 사람이 내 자리로 와서 인수인계를 해주는 것이 우리 회사의 관례였다.
[저기요, 안녕하세요? 그 쪽이 혹시 서영진 대리...?]
자기 몸보다 훨씬 커 보이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한 쪽 팔에 몇 권의 서류파일을 들고서 어느새 내 옆자리에 와 있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내가 호칭을 고민하며 쭈뼛대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서류 파일들을 내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은주 대리에요, 제가 사정이 있어서 회계를 못 맡게 됐어요. 인수인계 하려고 왔어요.]
그녀는 마스크팩을 한 듯 무표정한 얼굴과 매우 사무적인 어투로 자신을 소개한 후 어디선가 간이 의자를 하나 끌어와 내 옆에 앉았다. 그녀의 이름을 듣자 나는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어린 아이처럼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이 검은색 원피스가 이 지점에 근무 중이던 단 한 명의 선배 대리였기 때문이었다.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서영진 대리입니다.]
[이 일 해보셨다고 들었어요.]
그녀는 시선을 내게 고정한 채 고개를 숙여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가 사용하고 있던 컴퓨터의 전원을 키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과도 같은 특징 없는 향수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예, 이 전 지점에서도 2년 정도 해봤습니다.]
[그럼, 업무 프로세스는 대충 알고 있을 테니 간략하게 지금 급하게 처리 중인 것들만 설명 드릴게요.]
이은주는 파일더미를 하나씩 펼쳐 보이며 설명했고, 간간히 컴퓨터 파일로 된 자료들을 열어 보이며 확인시켰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그녀가 왜 본인에게 익숙하던 업무를 떠나서 다른 부서로 옮기게 되었는지 이다. 이곳에 오기 전 얼핏 듣게 된 소문에 의하면 이곳 지점장은 성격이 까탈스럽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녀가 자리를 피해 옮기는 것이라면 나에게도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솔직히 꾀나 신경이 쓰였다. 그녀의 표정 없는 얼굴과 사무적인 설명을 계속 듣고 있자니 졸음이 쏟아 질 것 같았지만 그녀가 이 자리를 떠나는 이유를 묻고자, 정확히 말하면 그 타이밍을 잡으려고 최근 몇 년간 만들어 본적 없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귀를 쫑긋 세워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자 나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대리님...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요?]
[예, 그러세요. 업무 인수인계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그녀는 마지막 파일을 접어서 내게 건넨 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여기 지점장님이 그렇게 까다롭다면서요?]
내가 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묻자 그녀의 표정이 약간 진지하게 변했다. 그녀는 어느 정도 내 질문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답변도 준비해놨다는 듯이 역시 소리를 낮춰 지점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원두커피를 내려 책상에 올려놔야 한다는 것. 처음에 뭣도 모르고 믹스커피를 가져갔다가 ‘기본도 안 된 요즘 젊은 것들’로 찍혔다는 것. 겨울에 감기에 걸리자 사무실 습도가 낮아서 그렇다며 수족관을 설치하고 그녀에게 수족관 관리 및 열대어 키우는 방법까지 공부시킨 이야기. 교회에 다니면서 한 달에 한 번씩 헌금을 10만원씩 내는데 그걸 회계직원이 모두 은행에서 천 원 권으로 바꿔야 하고 그게 다 신권이어야 한다는 것. 그녀가 지점장에게 은행에서 신권을 잘 안 바꿔 준다고 말하자 ‘능력 없는 것’으로 자신을 나무랐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그녀의 무표정도 어느 정도 인간미가 느껴지는 일그러진 얼굴로 변해있었다. 그 후에도 그녀는 지점장과 있었던 많은 에피소드들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면서 그에 대한 분노를 내게 투영하듯 흥분한 표정을 이어 갔다.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면서 앞으로 지점장의 비위를 어떻게 맞출지가 걱정되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투와 표정이 몇 분전과 너무도 달리 희극적이란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정말 힘들었겠네요. 그래도 승진하실 때 되지 않으셨어요? 조금만 더 버티시지.]
나는 그때서야 진짜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녀는 큰 한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도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갑자기 이 녀석이 생기는 바람에요. 웬만하면 올해 말까지 버티려고 했는데 저 인간 밑에 있다간 우리 ‘기쁨’이한테 안 좋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지점장실 문 쪽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자신의 배와 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양 손을 자신의 배 위로 가져다 대고는 쓰다듬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가 자신의 체형보다 훨씬 큰 원피스를 입고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쁨이?]
[네. 저 임신 중이에요. 우리아기 태명이에요. 결혼 7년 만에 어렵게 가졌거든요. 그래서 얼마 안 있음 휴직 들어갈 예정이에요.]
[아 예...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한 달 정도는 더 있을 거니까 일 하시다가 궁금하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네. 그럴게요.]
그녀가 물러가자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신이 어려운 과제를 내주면서 약간의 힌트를 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분명 그녀의 ‘기쁨’이는 나에게도 기쁨이었고 그녀의 휴직은 나에게도 축하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명의 선배들이 남아 있고 그들은 모두 남자였다. 더 이상 임신 같은 행운은 기대할 수는 없었고 여전히 나는 넘버 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컴퓨터 화면 속 지점의 조직도에서 그들의 이름들을 쳐다보며 마치 저주를 내리는 주문이라도 외우 듯이 입을 중얼거리며 오전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감색 정장 바지에 깔끔한 붉은 넥타이까지 착용한 흰 셔츠 차림의 행정팀장이 내 자리로 왔다. 그는 몹시 더워 보였지만 얼굴에는 첫 만남에서만 볼 수 있는 친근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서영진 대리 점심 약속 없지?]
[네, 아직 없습니다.]
[첫날이니까 지점장님하고 오늘 전보 온 직원들하고 점심이나 먹자고.]
[좋습니다.]
나 또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어느 정도 정리 됐으면 날 따라와.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나갔어.]
행정팀장은 나를 데리고 건물을 빠져 나온 뒤 건물 뒤편의 음식점들이 빽빽이 들어찬 골목 안으로 데리고 갔다. 길거리의 좌우로 분식점, 백반집, 중국집 등 수 많은 음식점들이 갖가지 식재료들로 혼합된 냄새를 토해내며 허기진 직장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다분히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겼던 이전 근무지의 식당가와는 상반된 느낌 이었다. 거기서는 일 년 내내 한두 군데의 백반집과 계약을 해놓고 매일 출근하듯 가서 점심을 해결하곤 했다. 함께 그곳에 근무하던 직원들은 백반집들의 음식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불평불만이 많았지만 그러면서도 쉽사리 식당을 바꾸지는 않았다. 매일 매일 수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점심메뉴 선택을 또 다른 고민거리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한참 행정팀장의 꽁무니를 쫒아서 도착한 곳은 길모퉁이에 위치한 민물장어집 이었다. 출입구 앞에는 대형 식당용 수조 속에서 수 백 마리의 장어들이 수면위로 얼굴을 내밀며 아가미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음식점 간판에는 ‘진짜 민물 장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는데 요즘 미디어들의 주요 취재재료 중 하나인 가짜 혹은 저질 식재료들에 대한 대응인 것처럼 느껴졌다. 식당 안의 예약된 방으로 들어가자 지점장을 비롯해서 이번에 전보 온 일곱 명의 직원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제 다 온 건가?]
보통 사람들보다 덩치가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지점장이 행정팀장과 나를 반기며 선언하듯 물었다.
[오전에 말씀 드린 데로 강윤선 대리 빼고는 다 왔습니다.]
행정팀장은 며칠 만에 집에 들어온 주인에게 반가움을 표현하는 강아지 같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에 위치하고는 대답했다.
[함께 일하게 돼서 반갑습니다. 우리 지점이 올해는...]
석쇠 위에는 배가 갈린 장어가 두 마리씩 올려 졌고 반찬들이 완전히 세팅되기 직전까지 지점장은 지점의 올해 실적 목표와 그것을 달성해야하는 이유 그리고 본인의 경영철학에 대해서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마치 경마 기수가 말에 올라타기도 전에 말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직원들은 대부분 생기 없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지점장이 있는 쪽으로 향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지금 지점장이 하고 있는 관리자들의 판에 박힌 듯한 ‘밥상머리 훈시’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장어가 어느 정도 노릇하게 익자 지점장이 더욱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요즘처럼 날씨가 더운 날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장어를 먹습니다. 장어가 일본에서는 최고의 보양식 중 하나라고 해요. 나는 여러분들이 새로운 지점에 오셨으니 장어 드시고 힘내서 열심히 일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건배를 외쳤다. 건배 후에 각자가 몇 점의 장어를 집어먹는 동안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사실 장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한두 점은 먹을 만 했지만 그 이상 입에 들어가면 왠지 물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장어보다는 반찬에 젓가락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행정팀장은 내 밥그릇에 잘 익은 장어를 올려주며 말했다.
[서대리 많이 먹어. 그리고 앞으로 회계일 좀 잘 부탁하고]
[아, 예...]
이곳으로 오기 일주일전에 행정팀장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근무희망 부서를 물었다. 그때 나는 다른 부서를 지원했지만 역시 이곳에 발령이 나자 행정팀장은 내 보직을 회계로 정해두었다. 회계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일을 맡기기가 행정팀장으로서는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결국 2년간 회계 일을 해왔던 내게 근무희망 부서를 물었던 것은 그냥 형식상의 절차였다. 어쨌든 지금 행정팀장의 행동은 내 부서 이직을 들어 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몇 번 장어를 더 집어 주던 행정팀장은 더 이상 침묵이 늘어지는 걸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자! 서로 아시는 분도 있지만 처음 뵙는 분도 있을 테니 각자 자기소개를 해보는 게 어떨까요?]
행정팀장은 동의를 구하는 듯이 지점장을 쳐다보았고 지점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는 매우 간단했다. 이름과 직급, 어느 지점에서 왔는지, 지금 어떤 업무를 맡고 있는지에 대해 무미건조한 나열이 이어졌다. 그리고 차례가 내 옆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돌아오자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안양지점에서 온 김대석 대립니다.]
남자가 다른 직원들과는 달리 일어서서 자기소개를 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귀를 쫑긋 세우며 옆자리에 서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처음 본 사람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미남형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 어떤 호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바로 나머지 두 명의 선배 대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먼저 여러 선후배님들을 만나게 되어서 너무 반갑습니다. 앞으로 있는 동안 잘 부탁드리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대석이 자리에 앉자 지점장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열심히 하기는 에이. 암튼 잘 다녀와...]
지점장의 태도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강대석에게 향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 사실은 여기 오기 전에 지점장님과 행정팀장님께는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한 달 뒤면 회사를 휴직합니다. 제 아내가 공무원인데 해외 연수를 가게 돼서요. 아이들도 있고 해서 저도 따라서 가게 됐습니다.]
일순간 와 하는 부러움 섞인 환호가 터져 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그칠 때까지 양 손바닥이 금 새 빨개질 만큼 힘을 주어 손뼉을 마주쳤다. 지점장과 행정팀장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직원들은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있을 건지를 묻는 데에 열을 올렸다. 목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내 이름과 이전 근무지를 짧게 말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뒤로하고 행정팀장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팀장님! 이 장어 진짜 맛있는데요!? 지금까지 제가 먹어본 장어 중 최곱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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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점의 분위기를 대충 익히고 직원들 얼굴과 이름을 매칭하여 기억하며 아침에 출근해서 지점장의 입맛에 맞는 모닝커피를 탈 수 있을 정도가 되기까지 나흘이 흘렀다. 하지만 그 나흘 동안 나를 더 신경 쓰게 만들었던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강윤선이란 사람이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이곳에 발령을 받은 지 나흘이나 지날 동안 출근을 하지 않는 다는 사실과 그 이유였다. 그 사실은 나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그 이유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두 가지는 나로 하여금 하루 에도 몇 번씩이나 그가 배치된 부서를 이유 없이 서성이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그런 짓을 해가면서 그쪽 부서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은 바로는 그가 현재 병원에 입원해 있고 언제 출근 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서 한 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앞의 두 선배들이 각자의 사적인 이유로 적어도 한두 달 내로 승진 레이스에서 퇴장하게 된 것 만으로도 나는 처음 이곳에 올 때의 기분과는 사뭇 다른 흥분된 기분으로 출근길에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 명마저도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내 저주 때문에 교통사고라도 당한 것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내 꿈속이 아니라면 이렇게 내 뜻대로 흘러 갈 수는 없는 거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 꿈속에서도 이렇게 까지 완벽하게 내 주변을 통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건 그야 말로 꿈에서도 불가능한 이야기 같았다. 이대로라면 나는 앞으로 세 달 후 있을 근무평가에서 내가 사원일 때 그랬던 것처럼 연공서열이라는 회사의 준엄한 절대적 기준에 의해 최고 점수를 받을 것이고 거의 8년의 대리 생활을 끝낼 것이며 유정에게 청혼할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 쪽 부서로 달려가 그가 왜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퇴원하는데 얼마나 걸릴지 묻고 싶었지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안부를 묻는 데는 그럴 만한 명분이 필요했고 나는 오전 내내 그걸 떠올리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영진 대리 기분 좋아 보이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안녕하세요? 아뇨 그냥. 무슨 일이세요?]
가슴에 ‘쟁취’라는 글자가 새겨진 리본을 달고 있는 한 노동조합 간부가 손에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서있다.
[이번 주 금요일 퇴근 후 새로 전보 온 조합원들 환영회 있는 거 알지?]
[네? 아직...]
[이런, 아직 이메일 확인 안 해 본거야? 서대리를 위한 자리니까 꼭 참석하라고. 올 거지?]
[아 예, 그래야죠.]
노동조합 간부는 내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그 때서야 이메일을 열어보니 내일 저녘 지점의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모여서 회식을 한다는 초대장이 도착해 있었다. 이런 모임은 연 초나 인사시즌 직후에 의례 있는 것이지만 어쩐지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진을 앞두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노조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인상을 새 지점의 관리자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론 그 모임에 노동조합원이 아닌 관리자들은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부턴가 그런 모임에서 조합원들끼리 아무 생각 없이 나누는 이야기들 하나 하나가 관리자들의 귀에 모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회사 내부에도 분명 빅브라더가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점심을 팀 동료들과 먹고 오후 세 시쯤 되어서야 나는 강윤선 대리의 부서로 가서 그가 언제 퇴원하여 회사로 복귀할지를 물어볼 구실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명함 제작에 관한 일이었는데 마침 지점 회계직원이 새로 전보 온 직원들의 명함을 만들어 줘야 했다. 그가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리 명함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몇 번의 심호흡을 하고 나서 강윤선 대리의 자리로 가서 빈 의자를 무심히 둘러보다가 마침 생각 이 났다는 듯이 옆에 앉은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강윤선 대리는 언제 출근 한답니까? 병원에 있다죠? 많이 아픈가요?]
그 직원이 반사적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미리 준비해간 여러 개의 명함 시안을 보여 주며 내가 온 이유를 밝혔다.
[강대리 아마 일주 일 쯤 지나야 출근 할 거예요. 인사발령 하 루 전에 갑자기 맹장이 터졌다지 뭐에요. 다행히 수술은 잘 됐지만.]
그 직원은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를 가위로 자르는 시늉을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는 재빨리 자리로 돌아왔다. 행여나 무의식적으로 내 얼굴에 실망감이 비칠까 두려워서였다. 나는 주변을 돌아보고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인터넷에 맹장수술에 대해서 검색해보았다. 일반적으로 너무 병원에 늦게 간 것이 아니라면 4,5일이 지나면 퇴원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이 수술로 인해 사망할 확률은 내가 아침에 타고 다니는 마을버스가 사고로 전복해 사망할 수 있는 확률보다 작다는 것 등이 눈에 들어 왔다.
‘그러면 그렇지...’
신은 가끔 우리를 돕지만 항상 그러는 것은 아니다. 내 가슴 속 어딘가가 분명하게 펑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었다. 거의 손에 잡힐 듯 하던 사탕을 누군가가 가로챈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오늘 지출한 법인카드 영수증을 내 자리로 들고 왔을 때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면서 영수증을 건너 받아 책상 서랍 속에 처박아 두었다. 도무지 일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은 오로지 강윤선이라는 남자가 가득차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추호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한직원에 대해서 끊임없는 물음표를 찍어대고 있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집은 어딘지, 결혼은 했는지, 회사에서의 근무 이력은 어땠는지... 하지만 현재 그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회사 전산망 조직도에 입력된 그의 사진과 이름,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하고 있는 그의 입사 년도뿐이었다. 그것 하나 만으로 그는 나보다 훨씬 더 앞에서 출발하는 스프린터였고, 오리발을 착용한 수영 선수였다.
지점장이 퇴근하고 5분도 안 돼서 대부분의 직원 들은 썰물처럼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오후 내내 허탈함에 빠져있던 나는 간신히 책상에서 영수증을 꺼내 전산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지점 서무과장인 유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서대리 퇴근 안 해?]
[예, 조금 처리할게 남아서요.]
[그럼,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
[예, 어떤?]
[지금 내 컴퓨터 백신으로 점검 좀 하고 있는데 이게 15분 정도 걸릴 거 같아. 그래서...]
[아, 네. 제가 갈 때 꺼드리고 갈게요.]
[고마워~!]
유과장은 잘 됐다는 듯 잽싸게 가방을 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데 과장님, 윈도우 비밀번호는 적어두고 가세요. 그래야 컴퓨터를 끌 수 있으니까요.]
[아.. 그래.]
유과장은 잠시 망설이는 듯 했지만 이내 포스트잇에다 큼지막하게 자신의 컴퓨터 비밀번호를 적어서 모니터에 붙여 놓고는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슬쩍 포스트잇을 보니 비밀번호는 한글로 되어있었다.
‘열려라 참깨!’
나는 그 비밀 번호를 보고 실소를 터뜨리고는 다시 영수증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거의 다 입력이 되어갈 때 쯤 유정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빠! 잘돼 가지? 마음 같아서는 엄청 보고 싶지만 우리 서영진 예비 과장님 피곤할 테니까 먼저 들어갈게~’
나는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강윤선 대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굉장히 승률이 낮은 게임에서 적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참담한 기분으로 회사 전산망의 사내 게시판으로 가서 무의식 적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몇 초 후 그와 관련 된 몇 개의 글이 검색 되었고 거기서 나는 그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건질 수 있었다. 먼저 그는 미혼 이었다. 경조사 게시판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는 강성의 노동조합원 이었다. 그가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들은 대부분 회사 관리자들의 치졸한 권력다툼에 대한 비판이나, 조합원들의 노동자로써의 권리 의식 고취에 관한 내용, 그리고 정치인들의 가면놀이에 관한 이야기들 이었다. 그가 올린 몇 개의 글들을 꼼꼼히 읽어보니 굉장히 논조가 호전적이었고 조금 과장하자면 이따위 회사는 언제든지 그만 두어도 좋다 라는 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가 만화광 이라는 것 이었다. 가끔 게시판에 회사 정책을 풍자하는 만화를 그려 올리곤 했는데 그림이나 만화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그림 실력이 아마추어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만화에는 어김없이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는데 대부분은 그의 그림실력에 대한 감탄이었고 왜 만화가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들도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강성 노동조합원에, 만화광이라...’
그때서야 이 곳 지점에 첫 출근 했을 때 이대팔 가르마의 과장이 나를 향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화를 잘 그린다며?’
아마도 그는 나를 강윤선 대리로 착각 했던 듯 했다. 내 안에서 그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쭉 한 번 둘러보고 내 자리로 돌아와서 심호흡을 했다.
'흠...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그러나 곧 유정과 그의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잽싸게 내 머리 한 구석을 차지하며 빠르게 그 세력을 확장했다. 나는 다 시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서무과장인 유과장의 자리에 앉았다. 긴장감 때문에 몇 번이고 양 손을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 한 후 마침내 ‘열려라 참깨!’를 키보드에 입력했다. 모니터 화면이 켜지자 서무과장의 전산 권한으로 강윤선 대리의 인사기록카드를 살펴보았다. 약 10분간 그의 인사기록을 꼼꼼히 체크한 결과 그에 대한 중대하고도 종합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나와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명문대인 K대 출신이라면 나는 지방대 비인기 학과를 간신히 졸업했고, 그의 주소는 부자들이 모여서 산다는 평창동 단독주택 단지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 나는 회사에서 한 시간이 넘는 지하철 1호선 끄트머리에 위한한 역에서 내려 다시 마을버스를 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었으며, 사진에서 본 그의 얼굴은 매우 호감이 가는 미남형이었고, 나는 굳이 내 얼굴을 평가하자면 며칠 전 나를 그로 오해한 이대팔 가르마 과장의 착각에 경의를 표해야 마땅했다.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을 나왔다. 어느새 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있었다. 지하철로 향하는 대로변 어딘가의 상점가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은 듯 음악소리가 흘러나온다. 멜로디가 낮이 익어 귀를 기울이니 가사가 들려왔다.
‘한 걸을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 이 세상도 사람들 얘기처럼 복잡하지 만은 않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위로하려 드는 것 같았지만 도저히 포기 할 수가 없었다. 지하철 입구에 이르러 계단을 내려가며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할 수가 있어... 굴하지 않는 보석 같은.... 마음 있으니...’
몇 명의 사람들은 나를 돌아보았고, 나머지는 그냥 지나쳤다.
3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컴퓨터를 켠 후 사무실 구석에 설치된 에어콘 앞에 서서 15분이나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평소 에어콘 바람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밤새 강윤선에 대한 생각으로 내 뇌구조가 온통 뒤죽박죽 된 듯 머리에서 스팀을 뿜고 있었다. 내 자리에 돌아와 책상을 열고 서류철을 꺼내 30분 남짓 집중하자 콧물이 찍하고 흘렀다.
‘한여름에 감기라...’
스트레스와 며칠 전부터 신경을 과도하게 쓴 탓이리라. 그런데 점심을 먹고부터 콧물은 더 심해져서 3분마다 휴지로 코를 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이마를 짚어보니 약간의 미열이 있었고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두통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4시쯤 돼서 건물 1층에 있는 약국에 들러 감기약을 사먹자 5분도 안돼서 나른함이 온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간신히 오후를 버티고 5시 30분이 되자 나는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고 서무과장이 내 몰골을 아까부터 유심히 살펴보더니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오늘 참석 할 거지? 식당 예약을 해야 하거든.]
노동조합 간부가 사무실을 돌며 오늘 환영회 참석 여부를 묻고 있었다. 일부는 참석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고 불참석의 표시로 고개를 저은 사람들은 벌금을 내고 있었다.
[얼마에요?]
고개를 저은 직원 한 명이 지갑을 꺼내며 물었다.
[3만원~]
간부는 교회의 헌금 주머니처럼 생긴 둥근 모양의 박스를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참석 못하는 건데...]
직원이 볼멘소리를 하며 지갑에서 망설이듯 만원짜리 지폐 세 장을 꺼내자 간부는 빼앗듯 돈을 낚아채며 말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돈은 조합과 조합원의 단합 및 발전을 위해 소중히 쓰겠네~]
나는 그 때서야 어제 이 곳 지점으로 전보 온 조합원들을 위해 노동조합에서 환영회를 준비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곳에 오자마자 첫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이곳 직원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줄게 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몸은 금방이라도 책상 밑으로 꼬꾸라질 듯 위태로웠다. 지갑에는 달랑 3만원 뿐이었지만 나는 할 수 없이 노동조합 간부가 내 자리로 오자 가방에서 지갑을 꺼낼 준비를 했다.
[서영진 대리는 당연히 참석 할 거지? 이번에 전보해서 온 직원들 모두 참석 한다네.]
노동조합 간부가 내 어깨에 그의 두툼한 팔을 걸치며 친근한 척 물었고 나는 있는 힘껏 코를 팽하고 풀고는 물었다.
[모두 다요?]
[그래. 모두 다.]
[혹시 강윤선 대리도?]
노동조합 간부는 메모장을 체크하고는 다시 한 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니까. 아까 통화했는데 오늘 마침 퇴원하게 됐는데 이쪽으로 온다네.]
나는 꺼냈던 지갑을 슬며시 다시 가방으로 밀어 넣고 말했다.
[그럼요, 당연히 가야죠. 조합의 단결을 위해서!]
코에서 다시 맑은 콧물이 쨍하고 흘렀다.
퇴근시간이 지났지만 지점장이 평소 자기 방에서 즐기던 인터넷 바둑이 하필이면 길어지는 바람에 40분이나 늦게 퇴근했고, 나는 몽롱한 눈으로 인사를 한 후 지점장실 문을 시건 한 후에 재빨리 노동조합의 회식장소로 향했다.
[어서와~ 서대리~]
노동조합 간부는 벌써부터 눈 주의가 빨개져서 이 곳 술판의 속도가 어느 정도 인지를 가늠케 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빈자리에 앉은 나는 옆 직원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식당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직원들은 잔을 부딪치고 술을 따르고 고기를 구우며 회식에서 본인들이 해야 할 본연의 일들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지만 내 온 신경들은 강윤선이라는 남자의 행방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어느 테이블에도 그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 후 자리에 앉자 와이셔츠 단추를 세 개나 풀고 3분 간격으로 계속 건배를 권하는 어떤 과장의 압박에 못 이겨 안주도 먹지 않은 채 빈 내장에 계속 알콜을 들이부어야 했다. 일부 테이블에서는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직원들이 있는가 하면 음식점 주인은 다른 테이블에 피해를 준다며 주의를 주었다. 몇 몇의 여직원들은 식사가 끝나는 시점에 핸드백을 챙기며 호시탐탐 자리를 탈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어떤 직원은 목청이 터져라 오늘 만났던 민원인에 대한 험담을 서사적으로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몸 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아서 때때로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고, 벌써부터 내일 출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월차를 내야하는지, 그럴 경우 괜히 술마시고 월차를 내는 개념 없는 직원으로 찍힐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었다. 그때 노동조합 간부가 식당 출입구 쪽을 보며 말했다.
[어! 저기 오네! 어서와 강윤선씨!]
식당 출입구에는 한 남자가 배에 복대를 착용하고는 한 쪽으로는 목발을 짚은 채 서 있었다. 남자는 목발을 신발장 위에 올려놓고는 간신히 한 쪽 손으로 신발을 벗은 후 노동조합 간부가 있는 맨 앞 테이블 쪽으로 절뚝거리며 걸어왔다. 그의 범상치 않은 등장에 식당 내부는 일순간 정적으로 휩싸였다.
[강윤선 조합원입니다. 인천지부에서 이번에 전보 온 분이구요, 전보 전날 맹장이 터졌지 뭐에요. 하하. 다행히 오늘 퇴원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자. 여러분 박수 한 번 주세요~]
간부의 소개가 이어지자 테이블 여기저기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강윤선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듯했고 얼굴에는 약간의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에 등장하는 것을 계획이라도 세운 것처럼.
[동지 여러분! 인사가 늦었습니다! 강윤선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과 즐겁고 살맛나는 직장생활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 할 것을 다짐하며 구호하나 외치겠습니다.]
그는 약간은 외소 해 보이는 흰 팔뚝을 들어 올려 구호를 외쳤다.
[하나 되어 쟁취하자! 인간다운 직장생활!]
처음 본 그의 모습은 강성 노동조합원으로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흰 피부에 약간은 염색을 곁들여 멋을 낸 파마머리, 목소리는 미성에 가까웠고 옷차림은 체크남방에 스키니진 이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자기도 모르게 호소력 짙은 그의 목소리에 빨려들고 있었다. 마치 대중가수의 콘서트에 모인 관중들처럼 갑자기 한 목소리로 그의 구호를 따라했다. 겉보기에는 그다지 볼 품 없는 평범하고 마른 체형을 가졌음에도 그 순간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강력한 카리즈마를 내뿜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쳇... 그거 참 빌어먹을 등장 한 번 거창하군...’
강윤선이 테이블을 돌며 조합원들과 개별적으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나는 맞은 편 과장의 계속되는 건배 제의에 다시 몇 번이나 소주잔을 들이켰다. 어쩌면 그 중 일부는 강윤선의 거창한 등장에 반발하며 내 스스로의 의지로 마셨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요란스런 등장은 어쨌든 나에게 두 가지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었다. 첫째는, 내가 승진행이라는 편도 일차선 도로위에서 맞닥뜨린 상대가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어쩌면 그는 스스로 다른 직원들처럼 이 레이스에서 이탈 할 수도 있는 너무 쉬운 상대일 수도 있겠다 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강성 노조원이 순탄하게 승진하는 꼴은 본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그가 내 자리로 올 때 까지 감기기운과 술기운, 그리고 이곳에 오기 직전 먹었던 감기약 기운의 하모니가 만들어 내는 참기 힘든 몽롱함을 제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감시자의 역할에 충실했다. 테이블을 도는 그가 대체 몇 잔이나 술을 마시고 있는지,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가능성이야 미약하겠지만 술 때문에 다시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나갈 기미는 보이지 않는지 따위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막 퇴원한 환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건강해보였고, 내 정신이 온전했다면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도착하기 전 정확히 스물 한 잔 의 소주를 마셨다. 30분 안 밖의 짧은 시간이었고 내가 마신 양의 딱 두 배였다.
[반갑습니다. 강윤선입니다.]
목소리마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고, 얼굴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몸살기운에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파왔고 소주는 내 한계 용량을 넘어선 듯 목구멍 직전 까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등짝은 진적에 식은땀으로 흥건했고 소주잔을 든 오른손은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네...서...영진 대립니다...]
나는 사력을 다해 잔을 들어 그에게 약간은 도전적으로 내밀었고 그는 씽긋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우리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잔을 비웠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나는 내 뇌 속에서 단단하게 묶여 있던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웩! 엑...]
갑자기 내 입속에서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구토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분명히 내 턱근육에게 당장 입을 다물라고 명령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구토물은 계속해서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그 후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부축하여 나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파도에 몸을 맡긴 것처럼 휘청거렸다. 곧 정신이 아득해지고 직원들 몇 명이 이쪽으로 다가 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기 전 분명히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반갑네요... 강윤선 대리님...]
그리고 또 하나 분명히 생각나는 것은 그 순간에도 강윤선은 전혀 표정의 일그러짐이 없었다. 필름이 끊기기 직전까지 내가 목격한 것은 그가 구토물이 묻은 자신의 소매를 물티슈로 닦으며 전혀 싫은 내색 없이 심지어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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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잠깐 동안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반복해 보았다. 어제 일이 꿈이었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몇 분이 지나자 목은 타는 듯 갈증이 났고 화장실 거울로 비춰본 내 두 눈은 빨갛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현실 감각과 어젯밤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교차하기 시작하자 입에서는 저절로 비속어가 튀어나았다.
[병신... 하필이면...]
정신을 차리기 위해 거실에 나가서 생수통을 꺼내 물통 채 벌컥벌컥 마시고 나자 그 기억들이 더욱 또렷해져 왔다.
[빌어먹을...]
참담한 기분이었다. 어젯밤 회식에 가지 말았어야 했단 생각을 하며 거실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옷가지들 사이에서 휴대폰을 주워들었다. 몇 개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서대리 좀 괜찮아? 나 유과장이야. 오늘 못나오지? 연차 처리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지점장님한테 잘 말했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잘 쉬어~’
그제 서야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오전 11시였다. 술을 마시고 회사에 나가지 못한 것은 12년의 직장생활 중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신입사원 때 선배들이 주는 술을 아무 생각 없이 다 받아 마시고 나서였다. 그 때 역시 필름이 끊겼었고 다음날 오후가 돼서야 출근을 했었지만 지금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럴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 모습은 한 번의 추억이고 한 번의 실수였으며 그 후에 끝도 없이 이어질 직장생활에 있어서의 액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는 아니었다.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었고 화가 났다. 다 시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
‘서영진 대리? 나 강윤선이에요. 어제 환대가 너무 인상적이던데요.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고 출근하면 점심이나 한 번 합시다. 잘 쉬구요.’
나는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지만 메시지를 두세 번 정독했다. 그러고나서 침실로 돌아와 휴대폰을 다시 방바닥에 던지듯 팽개치고는 침대에 누웠다.
[재수 없는 자식...]
다음 날 출근을 하자 책상 위에는 수많은 영수증들로 수북했다. 나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점심시간 직전까지 기계적으로 일을 했다. 몇 몇의 직원들이 괜찮냐면서 안부를 물었고 최대한 괜찮은 척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자 나는 강윤선의 문자메시지를 떠올리고 그제 일을 사과 할 겸 그에게 사내 메신저로 쪽지를 보냈다.
‘점심 약속 있으세요? 없으시면 저랑 하시죠.’
곧바로 답장이 왔다.
‘좋아요. 10분 후 1층 로비에서 만나요’
우리는 1층에서 만나 인근의 뼈다귀 해장국집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그제 일을 사과 하며 초면에 너무 실례가 많았다고 말했고,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괜찮다고 했다. 회사에서의 보직 경로를 묻던 중 그는 본사 홍보실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잠깐 그의 인사기록카드에서 본 대학 전공을 떠올렸다. 서로의 미혼 여부를 물었고, 곧이어 나이를 확인한 직후 우리는 금방 말을 놓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아무리 오랜 기간 같이 근무를 해도 항상 존대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이를 확인하면 사석에서는 언제든지 형, 동생으로 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강윤선은 후자에 속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그가 담배를 꺼내 피웠다.
[예전에 만화가 되는 게 꿈이었다면서 요?]
내가 게시판에서 본 그의 만화들을 떠올리며 묻자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대답했다.
[지금도 그래.]
[정말요? 대단한 데요.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으셨다니, 14년차 직장인답지 않네요. 하하.]
[직장이라? 직장은 우리 아버지 때문에 다니는 거야.]
[아버지요?]
[응. 굉장히 보수적이신 분이거든.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아버지는 내가 기자나 아나운서가 되길 바라셨지. 내가 신문방송학과 출신이거든.]
강윤선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고 나서 다시 한 번 담배를 길게 빨아들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까 이게 도저히 내 적성에 안 맞는 거야. 난 어릴 때부터 만화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었거든. 학교 공부는 그냥 부모님을 만족시켜드리려고 했지. 성적은 꽤 괜찮아서 결국 성적에 맞춰서 대학과 과를 선택한 거고. 하지만 결국 한 학기 지나서 아버지 몰래 다시 대학입시를 준비했지. 그리고 몇 개 미대를 붙긴 했는데...]
거기서 강윤선은 담뱃불을 끄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버지 반대에 결국 미대에는 가질 못했지.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 공부는 언제나 뒷전이었고 이래 저래 방황하다가 군대를 갔다 왔어. 그런데 그래도 포기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학교 복학하기 전에 어느 유명 만화가 문하생으로 들어간 적도 있어.]
[아.. 정말요? 참 대단하네요.]
[그런데, 그 문하생 생활이라는게...]
강윤선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아침 6시부터 일어나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그렇게 2개월을 하고 나니까 그때부터 화실청소를 맡기더군. 화실 정리와 청소로 또 2개월을 보냈지. 선후배 관계는 또 어찌나 엄격한지 이건 마치 군대 같다 와서 얼마 안 돼 재입대를 한 느낌이었지. 물론 월급은 없었고, 그 4개월간 배운 건 각종 집안일들뿐이었어. 하하....]
[그러면 거기서 포기한 건가요?]
[음...일단 복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또 아버지와 부딪치기 싫어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
[그 다음은...?]
[그 다음엔 그냥 쥐죽은듯이 학교를 다니다가 결국 3학년을 마치고 이 만화병이 다시 도졌지. 사실 학교를 다니면서도 거의 수업시간 외엔 학교 앞 만화방에서 살다 시피 했어.]
[만화병이라...하하...]
[결국 또 휴학을 하고 일본으로 갔어.]
[일본이요?]
[그래. 세계 최고의 만화시장이자 만화선진국인 일본 말이야.]
[와... 대단하시군요. 일본에선 어땠어요?]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점 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동경하는 세계에 대한 그의 끝없는 도전이 부러웠던 걸까. 어쨌든 나든 그 때쯤 잠시 그가 나와 승진 경쟁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던 것 같다.
[그냥 그랬어... 역시 아버지 도움 없이는 못 버티겠더라구... 등록금 삥땅친거랑 한 두어 달 막노동해서 번 돈으로 건너갔었어. 1년 정도 에니메이션 학원을 다니면서 만화공부를 할 요량으로. 남는 시간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거의 기초수급자 수준의 생활이었지... 유통기한이 지나서 버려지는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고 근처 공원에서 꽁초를 주워서 담배를 피우고... 처음엔 독방인 월셋방에서 지내다가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니까 2인실로 옮겼었고, 한국으로 들어오기 직전엔 다리 밑에서 텐트치고 지냈을 정도니까. 그런데 웃긴 건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학원 공부보다는 먹고 자고 하는 본능 적인 생활에 더 치중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 거야. 하, 결국 그 옛날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로망은 오늘날에는 판타지일 뿐이라는 거지...]
그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 다락방에 처박아 두었던 빛바랜 사진 한 장과도 같은 내 기억 속 한 장면을 끄집어내었다. 군대에 있을 때 축구를 하다가 한 쪽 다리가 골절된 나는 세 달간 훈련을 받지 않고 군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때 내가 깨닳은 것은 하루 종일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는 것 보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어야 하는 하루가 훨씬 더 길고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온 몸이 분기탱천한 혈기로 무장된 20대 초반의 나이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매일 고된 훈련과 1분, 1초도 철저한 계획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생활을 하다가 아침부터 잠들 때 까지 책 읽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허용 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그야 말로 고역이었다.
처음엔 병실에 마련된 몇 권의 책들을 읽었던 것 같다. 김정현의 ‘아버지’였나...? 그걸 한 세 번 정도 읽으면서 처음에 흑흑 소리까지 내며 흘렸던 눈물도 세 번째 쯤 되니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나머지 것들은 전혀 기억이 안 날 정도의 그저 그런 삼류 소설들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마저도 다 읽고 나자 이번엔 사회에 있는 친구,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도 한 사람 당 10장이 넘는 장문으로. 답장을 써야하는 상대방의 의사는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현재의 내 고독함을 달래기 위한 철저한 이기심으로,,, 그런 식으로 한 열 댓 명에게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군생활 및 신세타령을 하고 나자 그야 말로 ‘할 것’이라는게 똑 떨어지고 없었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여전히 넘쳐나는 시간과 백지 노트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구속된 몸과는 반비례하여 매일 매일 시공을 초월하여 빅뱅하고 있는 내 상상력. 물론 그 모든 상상력의 전제는 ‘만일 제대를 하면’으로 시작되었지만... 어쨌든 주체 할 수 없이 많이 주어진 시간과, 빈 종이와 내 상상력은 나로 하여금 그 전까지는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던 일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바로 소설쓰기였다.
말이 소설이지 어찌보면 그냥 습작을 위한 습작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쓰고, 또 썼다. 그렇게 채워 간 백지가 5장, 10장, 100장, 200장을 넘게 되자 어느 덧 부러졌던 다리뼈도 다 나았고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부대에 복귀하고 난 후 나는 휴가 날자만 애타게 기다렸다가 그 노트를 워드로 옮겼고 대학교 인근의 어느 인쇄소에서 책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책을 처음 인쇄소 주인에게 받아서 가슴에 품었을 때의 감동은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 제대할 때까지도 틈만 나면 소설을 쓰고 독서를 계속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한 순간 거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듯이 강렬하게 다가왔던 글쓰기의 감동은 현실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놀라우리만큼 쉽게 사위어 들었다. 제대를 하고 학교로 돌아갔을 때 나는 이미 공대 3학년의 복학생 이었고 다시 세상이 정해 놓은 길을 순순히 걸어가야 했다. 학과 공부와, 토익 점수, 취업을 위한 자격증을 준비하는 사이 나는 지금 것 내가 한 어떤 일보다 나를 설레게 했던 그 순간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 후에도 틈틈이 단편 몇 편을 끄적이면서 적당히 취미생활의 한 편으로나마 독서와 소설쓰기를 계속 했었지만, 적어도 강윤선의 이야기에서 느꼈던 그의 열정이 더 이상 내게는 없었다.
[그래도 부러운데요, 아직도 꿈을 잃지 않으셨다니. 하하]
나는 장난스럽게 감동하는 척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진심을 말했던 것 같다.
[그래.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지! 내가 공모전만 당선 되면 당장 그만 둘 거다 이딴 회사!]
강윤선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던지듯 비벼 끄고는 다짐하듯 외쳤다. 그의 도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듯 했다.
[공모전이요?]
[응. 계속 탈락 중이지만. 한 50번 쯤 떨어졌나. 하하]
강윤선은 멋쩍은 듯 자신의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헤집어 두피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에이~ 그래도 회사까지 그만둔다는 건 쫌 그렇지 않아요?]
나는 마음 속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말하며 다시 한 번 그의 의중을 떠보고 싶었다.
[아니! 진짜 공모전만 한 번 되면 회사 때려치우고 작업실 만들어서 도전해 볼 거야! 사실, 아버지도 몸이 많이 안 좋아지셔서 예전 같지 않으시거든.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인생은 한 번 뿐이잖아?]
강윤선은 그러면서 동의를 구하 듯 나를 처다 보았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그의 흰 피부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피부보다 더 밝았고, 눈은 더 맑고 깊었다. 나는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것처럼 그의 투명한 시선이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깐 동안의 침묵 뒤에 내가 말했다.
[저도 사실은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진짜?]
강윤선은 흥미로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군복무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도 간간이 공상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제일 좋아 하노라고. 가끔은 빨강머리 앤이 나로 환생한 것 아닌가하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고.
[어쨌든 우린 공통점이 있네?]
[공통점이요?]
[그래. 이 빌어먹을 창작의 세계를 좋아한다는 거.]
[하하. 그러네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서로 인상 깊게 읽었던 만화나 소설들에 대해서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 까지도 이야기를 하다가 사무실로 돌아갔다.
5
[말도 안 되지 그건! 그건 좀 그래.]
유정은 아주 간단 하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나는 양팔을 가슴 앞에서 교차하며 더 이상 그녀가 이야기를 진전시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단호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어제 강윤선과 나눈 대화를 들려주자 마치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한 참 만에야 이정표를 발견한 것처럼 아주 기뻐하면서. 그를 승진레이스에서 탈락시킬 계획을.
[그렇긴 뭐가 그래. 어차피 직장은 전쟁터야.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한다구.]
역시 차장을 바라보는 대기업의 과장이자 승진이라는 단어와 인생철학을 나란히 해왔던 아버지의 딸다웠다.
[그럼 나보고 만화 시나리오를 써서 그 사람을 공모전에 당선시키라고?]
[응.]
커피숍 종업원이 쟁반에 담긴 오렌지 주스 잔을 그녀 앞에 내려놓자마자 주스 잔이 금방 바닥을 드러내 보일만큼 빨대로 쪽쪽 빨며 그녀가 말했다.
[그게 말이 되냐? 글 안 쓴지 몇 년은 됐다.]
나는 그녀가 우리의 결혼을 위하여 이런 생각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과 이 현실이 못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의 바램과 다르게 계속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나갔다.
[아냐. 오빠 글 쓰는데 재능 있어! 학교 다닐 때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상금도 받았다며?]
나는 너무 오래 되어서 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는 존재감 없던 같은 반 친구의 얼굴을 기억해 내는 것과 같이 대학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처음에 오빠를 왜 좋아한 줄 알아?]
유정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잘 생겨서?]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치아가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이라는 뜻이었다.
[참나. 그럼 뭔데?]
[오빠가 나 처음 만난 날 나 우리 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가는 길에 문자 보냈던 거 기억나?]
[응. 그런데?]
나는 잘 생각이 안 났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10년 전 일이었다.
[사실 오빠 첫인상 별로라 한 번 만나고 안 만나려고 했거든. 그런데 옷 갈아 입고서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니까 오빠한테 문자가 왔었지. 무려 50통이나. 그 날 처음 본 내 모습을 마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묘사한 그 문자가 맘에 들었던 거야. 사실 처음 본 사람을 그렇게 자세히 묘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내 행동과 말투 하나 하나를 그렇게 세심하게 이야기해준 사람은 오빠가 처음이었거든. 지하철로 집에 30분이면 가는데 그 사이에 그렇게 장문의 편지 같은 문자를 보낸 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유정은 이번에는 웃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 고맙군... 첫인상이 별로인 나를 지금껏 만나 주고 결혼까지 해주실 예정이라. 근데 그거랑 이거랑 같냐. 차원이 다르지.]
[다를 게 뭐가 있어. 어차피 글은 똑같은 글인데.]
[소개팅녀한테 좋은 인상 심어 주는거 하고 시나리오를 써서 만화공모전에 당선되는 게 같다고?]
[응.]
순간 나는 내가 10년 간 만나왔으며 결혼을 계획 중인 이 여자의 정신세계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열심히 해서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지. 이게 되겠어?]
[안 될게 뭐가 있어. 우리 아빠 회사엔 승진하려고 자기 종교도 바꾸고 본적까지 바꾸는 사람도 있다고. 그뿐인 줄 알아? 어떤 경상도 시골 출신인 사람은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서 졸업하고 직장 구하는 10년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사투리가 안 고쳐지더래. 나름대로 연습도 하고 사투리 교정 학원까지 다녔는데도. 그런데 말이야, 회사 내 승진 인사를 앞두고 자기 팀장이 전라도 사람으로 교체 되자마자 거짓말처럼 경상도 사투리가 고쳐지고 어느 날 갑자기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자신을 발견 했다지!? 이게 뭐겠어. 사람은 궁하면 다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어.]
[하... 눈물 겹군...]
[해 볼 거지?]
유정은 마치 전투에 나기기 전 군사들을 독려하는 장군처럼 두 주 먹을 불끈 쥐고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의 손가락에 내가 5년 전 쯤 인가 선물해준 가느다란 얇은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반지를 선물할 당시엔 내년에 결혼반지를 꼭 끼워주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그게 벌서 5년 전 이었다. 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분명 5년 전보다 훨씬 기대에 차 있는 웃음이었다.
6
인사 발령이 나고 한 달 정도가 지나자 이곳에 새로 전보 온 직원들이나 업무가 바뀐 직원들도 모두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루틴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지점장은 상상도 못할 정도의 까탈스런 인간이었다. 수시로 은행 업무 같은 개인적인 용무를 나를 통해 해결하는 것은 일상적이고 당위성을 진작 확보한 듯한 중요 업무 과제들 중 하나였고, 거래처로부터의 컴플레인이 접수되면 컴플레인을 받은 팀장을 지점장실로 불러 지점장실이 떠나갈 정도로 호통을 쳤으며, 프로그램 판매 계약 건수가 전 분기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집계되자 전 직원의 정신 무장이 필요하다며 주말에 직원들을 본인이 다니는 등산로에 소환시켰다. 물론 아직까지 나에게 직접적인 불똥이 튄 적은 없지만 그 주말 등산 건만 하더라도 지점장의 의중을 전체 직원들에게 메일로 전파해야 하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것도 주말 하루 전인 금요일에.
직원들은 지점장을 향해 쓰레기라는 등 증오에 가까운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막강한 인사권을 가진 그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오직 지점장의 의견을 메일로 전달한 내게 그들의 증오가 투사될 뿐.
[서 대리! 이게 뭐야. 나 내일 조카 결혼식도 참석해야 하는데 정말 짜증나네...]
[글쎄요...]
직원들은 내 자리 옆을 지나가면서 시선은 지점장실을 향하고 말은 내게 걸었다.
[이거 꼭 가야 하는 거야? 주말에 가족들이랑 계획 잡아 놓은 거 있는데...]
[글쎄요... 참석은 자유에요. 아시잖아요...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분명한 것은 주말 지사장의 소환에 참석은 자유였지만 그런 자유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직원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란 것이다. 어쨌든, 지점장은 최소한 지점 내에서는 대통령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참나!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어.]
점심시간 회사 앞 흡연장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내게 다가와 역시 담배를 꺼내 물며 강윤선이 내게 던진 말이다. 한 달에 22일 정도를 출근 한다고 치고 담배를 피우는 장소가 한 곳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우리 둘의 흡연시간 싸이클이 하루에 3번 정도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간 최소 60회 이상 담배를 피우며 서로간의 친밀감을 높여 왔다. 물론 내 쪽에서는 확실한 어떤 목적이 있었지만.
그간 우리는 허공에 숱한 연기를 뿜어대며 각자가 감명 깊게 본 만화, 소설, 영화 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창작세계의 동지로서 서로의 문화적 취향을 주지시키는데 그 60회를 소진해왔다.
[흐.. 글쎄 말이에요. 저도 지금 죽겠어요 아주.]
[이거 진짜 회사를 때려 치든지 해야지.]
강윤선은 씩씩 거리며 연신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 댔다. 나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요즘 작품 활동은 잘 되 가요?]
[어? 그저 그래. 만화 쪽은 요즘은 웹툰이 대세인데 정말 잘 그리는 놈들이 많더라구. 그런 작품들을 볼 때마다 정말 좌절이지.]
그는 거품 빠진 맥주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루 빨리 공모전에 당선이 돼서 그가 회사를 그만 두길 바라는 내 입장에서는 역시 그 만큼의 좌절감이 엄습했다.
[한 번 보고 싶네요. 형님 만화요.]
[그래? 그럼 생각나면 한 번 가져올게.]
지나가면서 한 이야기에 그가 얼마만큼의 주의를 기울였을까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바로 다음 날 아침 그의 만화들을 회사로 가져와서는 내게 보여 주었다. 본인이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같이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만들었다는 동인지며 스케치북에 다른 만화가의 작품들을 모사한 듯한 여러 그림들, 공모전에 내려고 준비해 왔다는 스무 장 남짓한 단편만화들이 명절 종합선물세트의 포장박스처럼 생긴 종이박스에 가득 담겨져 있었다.
[우와~! 이 많은걸... 혼자 다 그리셨단 말이에요?]
내가 그의 정성에 필요 이상으로 놀라며 묻자 그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냥 넘어 갈 텐데, 영진이 너는 글 좀 써 봤으니까 좀 다를 것 같아서. 집에 가져가서 천천히 시간 날 때 마다 한 번씩 보구 가능하면 스토리라인 같은 것들에 대해서 조언 좀 해줘.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하... 제가 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럴게요.]
나는 그의 의외의 제안에 적지 않게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도와 만화 공모전에 당선시키라는 유정의 당부가 머릿속에서 오버랩되면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야죠! 꼭 도와 드릴게요!]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강윤선이 준 상자를 열어 만화들을 꺼내 읽어 보았다. 대부분 년도 별로 정리되었고 책의 형태로 제본되어 깔끔해보였다. 상자에 보관된 작품들은 약 2년 전까지 제본이 되어 있었는데 최근의 작품들은 아마 따로 보관하고 있거나 계속 그리고 있는 듯 했다. 나도 예전에 단편 소설집을 만들던 때가 떠올랐고 그가 이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쏟았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학창 시절로 추정되는 년도의 만화들은 그 당시에 주로 유행했던 만화들을 그대로 따라 그린 것들이 많았다.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만화들의 캐릭터들을 보자 나도 수업시간에 몰래 애들과 그런 만화들을 돌려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2000년대에 이르자 그는 좀 더 창의적인 캐릭터들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만화방에서 즐겨보던 만화들의 캐릭터들과 큰 차이는 없었고 아주 짧은 단편 위주의 만화들이 주를 이루었다. 보관된 작품들 중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3,4,5년 전 작품집들은 그 이전의 것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분량도 더 많았고 간혹 칼라로 된 면도 보였으며, 겉표지의 디자인도 무척 세련되게 공을 들인 티가 났다.
나는 저녁 식사도 거른 채 그가 공모전에 줄곧 도전 했을 거라고 생각되는 그 3년 치의 작품들을 시간을 들여서 읽어 보았다. 스스로 만화를 그릴 줄은 몰랐지만 보아온 것들이 있기에 그의 그림 수준이 그냥 좋아서 하는 것 이상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몇 개의 작품들을 살펴보던 나는 그의 작품들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가 최근에 그린 것들은 대부분 장르가 SF라는 것이고 거기에 나오는 것들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온갖 짐승들이 하이브리드되어 당체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사자머리에 문어다리를 한 짐승이랄지 팔이 10개가 달린 요가자세의 인간이랄지 내가 보기엔 온통 괴물들로 보였다. 뿐만 아니라 내용을 보더라도 현재와 미래와 과거를 넘나들며 역사와 신화가 뒤죽박죽이 되어 중심 내용이 뭔지 알 수 없고 그야말로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서 나는 그가 왜 그토록 여러 번 공모전에 탈락해 왔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SF라는 장르는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첫째이고, 만화 공모전의 특성상 연재를 할 수 있도록 뭔가 신선하고 읽히기 쉬운 첫 회를 심사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의 만화는 마치 발자크의 소설처럼 작품 속 인물들과 친해지는 데에만 최소 60페이지가 필요했다. 하여간 그의 작품을 본 내 느낌은 한마디로 ‘난해하다’ 였다.
다음 날 오전 회사 앞 흡연 장소인 화단 앞 벤치에서 만난 그는 마치 선생님에게 과제물을 제출한 학생처럼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어때? 괜찮았어?]
오전에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면서 어떻게 그에게 감상평을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나는 막상 그의 질문을 받자 기억해 두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 좋게만 이야기 하면 내가 그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는 종류의 인간으로 인식될 것만 같았고, 대놓고 단점을 이야기 하자니 비전문가로서 그의 경력과 자존심에 흠집을 내는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그를 도와 공모전에 당선시켜야 하고 그와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의 공감을 이끌어 내야 했다.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에 집중하며 뜸을 들이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 나를 재촉했다.
[얼른 이야기 해보라니까. 보기는 한 거야?]
나는 담배를 화단 흙에 비벼 끄고 나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감상평을 말했다.
[그림은 너무 환상적인데요... 대부분 장르가 SF라는 게 좀 걸려요... 읽는 층이 매우 얇을 것 같아서...]
[그래! 맞았어! 내가 추구하는 장르가 바로 SF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 그걸 이해 못한다니까! 가까운 미국만 봐도 작년에 팔린 소설들 1위부터 10까지 중 무려 8개가 다 SF소설인데 말이야.]
나는 미국이 어떤 부분에서 우리와 가깝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하! 그래서 걔네들이 그렇게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군요. 전 아직도 아임 유어 파더가 왜 그렇게 유명한 대사가 되었는지 이해가 안가지만요...]
[그렇지~! 정말 SF의 레젼드지 스타워즈는!]
강윤선은 무척이나 감동스러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는 듯 두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나서 그는 그가 감명 깊게 읽었다는 어느 SF소설의 스토리에 대해서 흥분하며 들려주었다. 외계 행성의 어떤 외계인 종족이 신이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그들 중 최고의 수행 끝에 신의 경지에 이른 존재가 바로 부처라는 황당무계한 스토리였다. 그는 마치 스포츠아나운서가 복싱경기 중계를 하다가 한 선수의 다운직전 모습을 묘사하듯 최대한 감정이입을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왜 재미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이야기에 감동한 듯 박수까지 쳐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리액션의 콤비네이션을 다 보여주었다.
[어쨌든... 다음 공모전에는 좀 더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를 그려봐요.]
어쨌든 내가 진중하게 결론을 내자 그도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음... 알았어.. 좋은 충고였어.]
토요일 아침이 되자 지점의 직원들 삼분의 이 정도가 북한산 등산로 입구인 불광역 앞으로 모였다. 지점장은 짙은 갈색의 선글라스에 지휘봉처럼 생긴 짧은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마치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직원들은 저마다 예비군 훈련을 온 훈련생처럼 여기 저기 흩어져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직원은 나에게 출발 전부터 오늘 등산이 언제 끝날지를 물었는데 나는 그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대충 얼굴만 비추고 중간에 내려가세요.]
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러다 찍히면?]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오늘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여기에 모이지 않은 사람들은 이은주대리처럼 임신한 여직원이거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승진한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승진이나 회사생활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갤러리맨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토요일에 예배를 보는 종파의 독실한 교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관심사는 오늘 여기에 얼마나 사람들이 모였고 언제 집에 갈 수 있는지가 아니었다.
내 눈은 이곳에 올 때부터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강윤선이었다. 어제 담배를 피우며 그가 이 등산계획에 보인 반응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는 여기에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직원들이 몇 명 모이지 않았을 때부터 나와서 초조하게 그 가 오는지를 기다렸고 행정팀장이 마침내 지점장에게 인원보고를 할 때가 돼서야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어쩌면 유정의 당부처럼 만화시나리오 따위는 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나오는 안도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자~ 오시느라고 수고 하셨고 지금부터 천천히 가 봅시다!]
인원 보고를 받은 지점장이 귀속 말로 행정팀장에게 뭐라고 하자 행정팀장이 출발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8월 말의 산행은 생각 보다 힘들었다. 날씨는 푹푹 쪘고 습도가 높아서 얇은 등산용 반팔도 부담스러워 당장 벗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오래 동안 운동을 하지 않은 나는 술과 담배로 찌든 육체의 저조한 운동능력을 체감하며 등산을 시작한지 20분 만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헥헥거렸다. 일부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고 다시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하나 둘 씩 등산로 옆으로 퍼져서 열외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한 번의 휴식이 있었지만 짧은 휴식 후 내딛는 발걸음은 금방 천근 만근으로 변했다. 나는 출발 전 다른 직원에게 아무 생각 없이 뱉었던 것처럼 몰래 물이라도 마시는 척 하며 뒤로 빠지고 싶었지만 지점장은 일행의 맨 뒤에서 열외 하는 직원들 볼 때마다 한마디 씩 던지며 혀를 끌끌 찼다.
[차과장 살 좀 빼지 그래. 쯧 쯧...]
[유차장 그래서 어떻게 팀원들을 이끌겠나...쯧 쯧..]
지점장의 혀 차는 소리는 채찍이 되어 직원들을 보채었다. 출발한지 2시간이 지나서 산 정상까지 500m가 남았다는 팻말이 보일 때쯤 나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있었다. 널찍한 바위의 공터가 있는 곳에서 일행은 짐을 풀어 김밥이나 바나나 등을 먹으며 두 번째 휴식을 취했다. 직원들은 이제 10명 남짓 남았는데 반 이상이 벌써 뒤쳐져서 산행 후 있을 뒤풀이 장소에 미리 가 있거나 지점장에게 얼굴을 비추는 정도의 성의를 표한 것에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는 이정도면 확실하게 지점장에게 눈도장을 찍었으리라 생각 했다. 가방에서 콜라를 꺼내 처음에는 한 두 모금 쯤 마시다가 그래도 갈증이 안가시자 거의 얼굴에 들이 붓듯이 마셨다. 물통은 진작 바닥이 났고 다른 직원들도 물이 다 떨어졌는지 오이나 바나나를 꾸역 꾸역 먹고 있었다.
[누구 물 남은 사람 없습니까?]
행정팀장이 헉헉거리며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지만 대부분 빈 물통을 흔들어 보였다. 지점장도 물이 다 떨어졌는지 침을 꼴깍 삼키고는 행정팀장이 건네준 오이 반쪽을 잘근 잘근 씹었다. 나는 먹다 남은 콜라라도 지점장에게 건넬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직원들은 모두 앞으로 남은 500미터를 물도 없이 어떻게 버틸지 걱정했지만 지점장의 눈치를 보며 여기서 내려가자는 말은 아무도 꺼내지 못했다.
나는 체력이 소진되어 소나무 그늘 밑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다시 일어나 산행을 하자니 눈 앞이 캄캄 했다. 이정도면 지점장에게 확실히 눈도장은 찍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일행이 다 시 출발하면 눈치를 봐서 열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바나나 하나를 까서 먹을 때 쯤 이었다. 누군가가 시뻘건 얼굴이 돼서 산 밑의 비탈을 달리듯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배낭을 메고 도저히 비탈을 오르는 속도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걸음으로 빠르게 우리가 있는 공터로 달려왔다. 그가 마침내 우리 앞으로 와서 멈춘 후 배낭을 내려놓고 턱에 흐르는 땀방울을 팔꿈치 소매로 닦아 낼 때에서야 나는 그의 흰 얼굴을 정확히 알아 볼 수 있었다. 바로 강윤선이었다.
[헉... 헉... 좀 늦었습니다...헉...]
그는 또 그런 식으로 등장 했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행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누군가가 혹시 물이 없냐고 묻자 그는 배낭을 열어 커다란 패트병 두 개를 꺼냈다. 둘 다 얼음물로 꽉 차 있었고 지점장을 포함한 거의 모든 직원들은 사막을 며칠 헤매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들처럼 그 앞으로 달려들었다. 직원들이 허겁지겁 물을 마시는 사이 그는 조그만 물병 하나 를 더 꺼내서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물병을 건네며 말했다.
[내가 좀 늦었지?]
나는 얼떨결에 물병을 건네받고는 대답했다.
[아뇨... 아주 극적인 등장이에요...]
지점장의 흐믓한 표정과 내 멍한 얼굴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어제 네 충고를 받고 좀 생각을 해 봤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공감이 되더라구. 그래서 말인데 내 공모전 시나리오는 네가 써주면 안될까?]
나는 뜨거운 태양빛과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갈증과 강윤선의 극적인 등장이 만들어 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간신히 참아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러지요...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7
녹이 슨 지하실 문을 열면서 내가 여기 온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 5년 쯤 되었던 것 같다. 배우던 기타의 줄이 끊어지고 열정이 다하자 그 기타를 처박아 두기 위해 지하실에 내려온 후 그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면 내가 썼던 단편 소설들은 훨씬 더 이전에 여기에 처박혔으리라.
거미줄과 수북이 쌓인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종이 상자를 발견하고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기까지도 나는 내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등산을 다녀온 후 내가 내린 결론은 분명했다. 공모전에 강윤선을 당선시키는 것 이외에는 내가 승진을 할 수 없다는 것. 그가 퇴사를 해야만 내가 승진을 할 수 있다는 것. 다음 번 승진인사가 있을 12월까지는 4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박스를 들고 올라와 대충 걸레로 먼지를 닦아낸 후 방으로 가져왔다. 뚜껑을 열자 습기에 색이 바란 습작 노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노트들을 하나 씩 꺼내어 읽어보았다. 오래된 앨범 사진을 보듯 읽으면 읽을 수 록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제목을 보면 인물들이 떠올랐고 인물의 이름을 보면 그가 말한 대사가 떠올랐으며 대사를 떠올리면 내가 까마득한 옛날에 했던 생각과 그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대화를 하다가 그들과 있었던 에피소드가 떠오르듯 수많은 음악과 장면과 인물과 배경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습작노트를 쓰면서 내가 느꼈던 그 박찬 감동들도...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한 두 해 까지는 계속 글을 썼었던 것 같다. 하지만 10년의 회사생활은 조금씩 조금씩 내 꿈을 갉아먹고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월급의 노예로, 꿈을 잃고 내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는 방랑자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도스토예프스키와 노벨상을 꿈꾸며 시작했던 소설들은 그냥 그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습작노트로 남아 지하실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그나마 대중성이 있는 단편 몇 개를 골라서 정독하며 읽어보았다. 물론 습작 수준이기에 퇴고를 거쳐야 강윤선에게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새로 쓰기 보다는 예전에 썼던 것을 퇴고하여 새로 만드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잠들기 전까지 인터넷으로 만화공모전과 당선된 작품들의 성향을 조사했다. 공모전의 주최가 어느 곳인가에 따라서 당선작의 성격이 달라졌지만 어떤 특정 공모전을 위해서 시나리오를 쓰기에는 시간도 없고 그 공모전에 내 시나리오로 그려진 강윤선의 만화가 뽑힐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세 개의 단편들의 프롤로그들을 가끔씩 들르던 인터넷 소설사이트에 올리고 반응을 보고 각색 및 퇴고를 해서 강윤선에게 내밀 원고를 결정하기로 했다. 한글 파일로 만들어 놓지 않은 순수 원고들을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는 데에만 네 시간이 걸렸다. 손가락에 뻐근함을 느끼자 나는 컴퓨터를 끄지 않고 잠깐 눈을 붙이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이내 곧 곯아 떨어졌다.
꿈속에서 나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곡은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실제로 나는 바이올린을 만져본 적도 없는 사람이지만 꿈속에서의 나는 꾀 능숙하게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내 모습 뒤로는 수많은 사람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모두 각자의 악기를 조화롭게 연주하고 있었다. 연주자들의 표정은 진지했고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숨 막히도록 균형미 넘치는 아름다운 연주를 이어갔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계속 연주에 몰입했고 협주곡은 어느 덧 마지막으로 흘렀다. 그리고 곡이 끝나자 그 때 까지 보이지 않던 관중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환호했고 연주자들도 일제히 일어나 관중들의 환호에 답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관중들의 환호가 솔로 연주자인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연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고 있었는데 내 옆의 지휘자를 향해 격렬히 함성을 질렀다. 지휘자는 관중에게 답례하느라 나를 등지고 있었다. 검은 연미복 스타일의 지휘복에 짧은 은색 지휘봉을 들고 있던 그는 몇 차례 관중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마침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보이자 나는 들고 있던 바이올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 지휘자가 강윤선이었기 때문이다. 텅하는 소리와 함께 바이올린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는 나와 바이올린을 번갈아 쳐다보며 씨익하고 웃었다.
사흘 간 나는 내가 올린 세 개의 단편들에 대한 네티즌들의 품평을 들으며 그 내용을 메모했고 간간히 진행사항을 강윤선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그때마다 매우 흥미롭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한편 올해 있을 만화 공모전의 일정을 내게 조사해와 알려주었다.
[올해 굵직한 것들만 네 개정도 남았는데 전부 다 내가 세 번 이상 떨어진 곳이야.]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면서도 두 눈은 빛나고 있었다.
[SF만 아니었으면 1등은 아니어도 몇 번은 입선 됐을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손을 내미는 거 아냐. 어때? 시나리오 집필은 잘 되어가?]
[말도 마요. 매일 세 시간씩 자면서 쓰고 있어요.]
실제로 나는 회사에 나와서 일하는 시간보다 꾸벅꾸벅 조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래도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다시 글을 쓸수록 내 안에서 뭔가 잊고 있었던 감각이 살아나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래 전에 맡았던 향수 냄새를 낮선 거리를 걸어가다가 다시 맡게 된 느낌처럼. 주말에도 나는 유정과의 데이트를 미루고 방에 틀어 박혀서 최신 만화시나리오들의 성향을 조사했다. 그리고 네티즌들로부터 그나마 가장 호응이 좋았던 작품을 골라 최신 성향에 맞게 밤을 새워 각색했고 마침내 짧은 내용의 시나리오를 완성시켰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피곤했지만 참으로 오랜 만에 느껴보는 탈고의 카타르시스였다.
다음날 강윤선과 나는 퇴근을 하고 회사 앞 맥주집에 마주 앉았다.
[벌써 다 된 거야?]
그는 놀랍다는 듯 말하고는 500cc 잔 속 맥주를 절반정도 단숨에 비웠다.
[일단 써지는 대로 써봤어요. 한 번 읽어 보세요.]
나는 시나리오가 적힌 A4용지를 그에게 건네고 그를 따라하듯 맥주컵을 반 쯤 비웠다. 알콜이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내려가는 느낌이 들자 약간은 긴장이 풀렸다. 나는 어젯밤에도 거의 잠을 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쓴 시나리오를 그가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 기분은 마치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건넬 때 느꼈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시나리오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 적한 시골 마을의 고등학교에 한 학생이 전학을 온다. 그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것이 없는 모범생이다. 게다가 얼굴까지 잘생긴 팔방 미남. 그런데 그는 공부와 입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음악에 미쳐있다. 그런 그가 전학 온 시골 학교의 음악실에서 우연히 기타를 치고 있는 같은 반 친구를 목격하게 된다. 그 친구의 기타 연주는 지금껏 그가 들어왔던 음악과는 다른 차원의 감동을 주고 결국 그와 함께 고등학교 시절을 음악에 빠져 지낸다.
하지만 둘이 자라온 환경은 극명하게 대조된다. 전학생 이도헌은 부잣집 출신으로 집안의 기대는 역시 명문대 진학이다. 기타 천재 김재성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평범한 시골출신의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재성과 보낸 2년의 시간은 도헌으로 하여금 부친의 기대를 저버리고 재성과 음악을 함께하기 위해 명문대 대신에 3류 대학에 진학하게 만들었다. 집안과 부친의 기대를 저버린 도헌은 대학 진학 후 독립을 하게 되고 재성도 역시 대학 진학을 위해 도헌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대학 축제에서 그들은 그들이 꿈꿔왔던 음악을 통해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내밀고 그들의 창의적인 음악은 곧 유명세를 타게 된다. .
한편, 음악 평론가이자 기획사 사장인 장세형은 우연히 대학 축제에서 그들의 음악을 듣게 되고 그의 음악인생 30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전율을 느낀다. 그들의 음악은 새로웠고 자유로웠으며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결국 그는 도헌과 재성을 스카웃해서 가요계에 데뷔시켰고 그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거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후 계속 승승장구 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인기에 비해서 대중들의 관심은 도헌에게로 지나치게 쏠려 있었다. 그 이유는 도헌이 작사, 작곡, 편곡을 하고 매체와의 인터뷰도 도맡아서 했으며 비쥬얼 적인 면에서도 재성과는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재성은 기타가 들어간 부분을 연주하는 것과 회사에서 짜준 안무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것이 그가 하는 전부인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는 지나치게 과묵한 편이어서 기자들 사이에서 조차 도헌에게만 인터뷰를 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그는 들러리였고 도헌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런 그들이 결정적으로 위기를 맞이한 것은 그룹의 해외진출에 관한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장세형은 그들의 성공을 확신하며 그룹의 해외진출을 준비했고 도헌도 그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와 뜻을 같이 했다. 그 때쯤에는 도헌의 성공으로 인해 그의 부친도 그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집안사람으로 인정하고 난 후였다. 하지만 재성은 달랐다. 그는 병에 걸린 홀어머니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도헌은 끈질기게 재성을 설득했지만 재성은 단호했다.
그렇게 그들이 함께한 시간은 끝나고 말았고 도헌은 해외 진출을 시도했으며 재성은 혼자 국내에 남아 음악을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 후 도헌의 음악은 발표할 때마다 실패를 거듭했고 많은 음악평론가들로부터 최악의 비평을 들어야 했으며 그가 쌓아 올렸던 명성은 하루 아침에 물거품 처럼 사라진다. 그에 반해 재성은 그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싱어송라이터로써의 입지를 굳혀간다.
도헌은 그러한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전학을 갔던 고등학교에서 재성을 처음 봤을 떄 그가 연주하던 곡은 이 세상에는 없는 곡이었다. 그 곡은 장르도 없고 코드 구성도 그가 알고 있었던 그 어떤 음악과는 달랐다. 한마디로 완전히 새로운 완벽한 구성의 곡이었던 것이다. 그런 음악을 재성이 만들었고 재성이야 말로 작곡 천재였다. 그동안 대중이 들었던 음악과 감성과 감동의 지휘자는 도헌이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은 모두 재성이 만들어 왔던 것이며 도헌은 그저 재성이라는 ‘친구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제서야 도헌은 자신의 실수를 깨닳았지만 이미 재성은 멀리 있었고 이미 그는 대중의 관심이 없이는 살아 갈 수 없었지만 그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시 과거로 돌아 갈 수 없는 초라한 자신의 재능에 절망하고 만다.
결국 도헌은 집안의 힘을 빌려 재성을 살해하고 그가 작곡해 놓은 음악을 빼앗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운명을 시험할 도전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그것은 재성이 작곡한 음악과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한 날 한시에 발표함으로써 더 이상 ‘친구의 그림자’로써 살아가야하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가요프로그램의 시상식에서 그는 재성의 곡으로 1위를 하게 되고 재성의 그림자로써의 자신을 부정하며 수상을 거부한다. 생방송 프로그램에서의 기이한 행동으로 수상을 거부한 그는 미친 듯이 재성의 무덤으로 달려가 재성에게 사죄한다. 거기서 도헌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재성이 연주하던 곡을 기타로 연주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다...」
A4 용지를 넘기며 내가 쓴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강윤선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나는 시종 침을 꼴깍 삼키며 혼자서 맥주를 세 잔이나 홀짝였다. 그가 시나리오를 다 읽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두 눈을 감았다.
[어때요?]
내가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다는 듯이 말하자 그는 갑자기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며 나직하게 말했다.
[바로 이거야!]
그의 그 두 마디는 나로 하여금 지금 그와 함께하고 있는 이 시간의 목적을 잊게 만들만큼 감동적이었다.
[정말 괜찮았어요?]
[야 이거 정말 네가 쓴 거야? 죽이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흥분한 듯 연속으로 자신의 잔에 맥주를 따라 1000cc정도를 벌컥벌컥 마셨다. 읽으면서 생각한 듯 만화적인 요소를 몇 장면 삽입하는 것에 대해서 나에게 동의를 구하고 오늘 밤부터 당장이라도 주요 인물에 대해서 데생 작업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날 거의 만cc에 가까운 맥주를 마시며 가게 문이 닫힐 때까지 만화와 소설에 대해서 대화를 했다. 그는 만화책을 빌려보는 대여문화에 대해서 개탄했고 자신의 일본생활의 경험을 비교하며 그런 것이 우리 같은 예술가들을 죽인다고까지 말하며 격분했다. 나는 어느 정도 공감 했지만 우리를 예술가로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나는 이문열의 ‘변경’을 읽으면서 느꼈던 한 가족사의 드라마틱함과 박경리의 ‘토지’를 두 번 읽으면서 이 장대한 소설에서 주인공이 과연 누구일까 하는 의문을 품었던 기억 등을 그에게 이야기 했다. 그리러나서 우리는 공모전에 참가할 세부 계획을 세웠고, 얼큰하게 취했을 무렵에는 상금을 탔을 경우의 배분 계획까지 세웠다. 술집을 나와서 택시에 먼저 오른 그가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언젠가는 될 거야!]
나는 그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택시가 천천히 출발하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되고 말고요...]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강윤선에게 보여주었던 원고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그리고는 원고를 가방에 구기듯 넣었다. 술기운에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 몇 년간 단 하루도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잠이 들 때까지 승진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전혀 그것을 머리에 떠올리지 않았고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요 며칠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피곤하다고 반응했지만 그것은 분명 기분 좋은 피곤함이었다.
8
나와 강윤선은 일주일에 세 번 퇴근 후에 남아서 전 날 그가 그린 그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고 준비하고 있는 공모전의 성격에 대해서 토의했으며 시나리오의 수정사항에 대해서 타협했다. 그는 내 기대만큼이나 열심히 만화를 그렸고 주인공들의 모습이 내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머릿속에 떠올렸던 이미지들과 너무도 닮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내 원고를 얼마나 꼼꼼히 읽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공모전이 있기 전까지 거의 4주를 보내는 동안 나는 거의 일에 집중 하지 못했다. 내 최대 관심사는 지점장의 커피를 맛있게 타는 것에서 어떻게 하면 강윤선의 만화가 공모전에 입상할지로 바뀌어 있었고 칼 같이 지켜왔던 출근 시간은 들 쑥 날 쑥 해졌다. 몇 달에 한 권 꼴로 그것도 유정의 권유로 읽고 있었던 자기계발서는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었고 다시 문학책을 챙겨 보기 시작했다.
[이제 됐나요?]
[응. 다됐어.]
빈 회의실 테이블에서 벌써 두 시간을 만화 그리기에 몰두하던 그가 갑자기 모든 붓들을 물통에 넣더니 붓들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기도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진진해 보여서 나도 덩달아 묵념하며 고개를 숙였다.
[기도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냥 나만의 의식이야. 한 편을 끝낸 뒤에 ‘미저리’에서 폴 셸던이 탈고 후 성냥으로 담배를 피우며 샴폐인으로 자축하는 것과 같은 이치야.]
[하하. 그렇구나.]
붓들로부터 가지각색의 색깔이 퍼져 나와 물통의 물을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그는 이번엔 붓들을 하나씩 꺼내 다른 새 물통에 하나씩 집어넣으며 완전히 헹군 후 붓통으로 하나씩 넣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공모전에 집착하시는 거예요? 지금 삶도 꽤 괜찮지 않아요?]
나는 그의 외모와 학력 집안배경 그리고 현재의 안정된 직장생활 따위를 떠올리며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글쎄, 어떻게 보면 만화 그리는 걸 그냥 영원히 취미로 남겨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정상적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그런데 왜 굳이 공모전이라는 형식적인 절차에 집착하느냔 말이지?]
나는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만화를 그리는 게 너무 좋고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인물들과 배경들과 사건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게 너무 신기하지. 하지만 이야기란 건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는 것들이야. 그렇지 않으면 존재의 이유가 없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내가 만든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공모전이라고 생각해. 물론 그냥 이렇게 만화를 그리고 있으면 행복하지만... 나 혼자서 그렇게 행복해 하는 건 마치...]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그냥 미친놈이 되는 것 같아서.]
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다 이해 할 수는 없었다. 어떤 사람이 정상이고 어떤 사람이 비정상인지는 시간이 흘러 봐야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 왔다.
다음날 우리는 한 만화 주간지의 신인공모전에 우리가 합작한 작품을 출품했고 열흘 뒤에 주간지 관계자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거기엔 한 가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각각 들어있었는데 나쁜 소식은 역시 공모전에 입상하지 못했단 거였다. 그러나 그 공모전은 10위 이내에 든 작품들을 위해 유명 만화가들의 감상평을 보내주었는데 그게 바로 좋은 소식이었다. 우리의 작품을 심사한 사람은 유필 이라는 만화가였는데 최근에 개봉한 몇 개의 영화시나리오들의 원작자였고 나도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었다. 공모전 결과에 관계없이 강윤선의 반응은 마치 만루홈런을 친 야구 선수 같았다.
[야! 유필이야 유필! 내가 이런 사람으로부터 감상평을 듣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가보로 간직할거다!]
그는 이메일을 출력해서 코팅까지 한 후에 나에게 읽어 주었다.
「귀하의 작품을 잘 보았습니다. 귀하의 작품 ‘친구의 그림자’는 배경의 섬세함이나 인물들의 표정, 근육, 명암 같은 부분들을 보았을 때 귀하가 얼마나 오랫동안 데생의 수련을 쌓았는지를 알 수 있었으며 시나리오 또한 대중음악이라는 통속적인 주제를 가지고 그 안에서 창작자의 고뇌를 참신하게 표현하는 등 한 편의 웰메이드 카툰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주제가 너무 아이디어에 치중해 있으며 각 장의 에피소드가 주제의 진지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등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앞으로도 만화를 그리는 일에 더욱 정진하셔서 언젠가는 이렇게 출품자와 심사자의 사이가 아니라 이 광활한 창작의 세계에서 서로 경쟁자의 위치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진지하게 기대하겠습니다. 끝으로 이번 공모전에 출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화가 유 필 」
우리들의 첫 공모전 도전은 실패였지만 업계의 권위자로부터 받은 감상평은 생각보다 더 힘이 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강윤선은 이 후 거의 매일 사무실에 남아서 만화를 그렸고 나 또한 거의 매일 매일 그의 옆에서 그의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보며 좀 더 공모전의 형식에 맞는 스토리라인의 변형에 대한 조언을 해주며 책을 읽었다. 그는 때로는 그림을 그릴 때 무서운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가끔씩은 내가 하는 말을 듣지도 못한 채 그림에 열중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앞으로 얼마 후에 또 다시 승진 인사가 있을 지, 그 이전에 언제 근무성적 평가가 있을 지를 계산하며 그림에 몰입한 그를 향해 무의식적인 말을 내뱉고는 했다.
[이 번엔 되 야 할 텐데요...]
그럴 때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작업을 하면서 우리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음악을 틀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대중가요 보다는 클래식을 주로 틀었다. 사무실 직원들 중 어느 클래식 애호가가 가져다 놓은 씨디였는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에서 시작되어 베토벤, 모차르트, 브람스와 거슈인을 지나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 3악장으로 끝을 맺었다. 이 드보르작의 음악이 흐르면 강윤선도 화구를 챙기며 그날의 작업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이 곡의 보헤미안적인 선율이 직장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이곳을 떠나려하는 강윤선의 의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렇게 드보르작의 교향곡 8번속 모든 악기들의 연주파트가 내 귀에 완전히 익숙해 질 때쯤 우리는 5번이나 더 공모전에 떨어지고 있었다.
승진인사는 거의 매년 12월 말에 있었고 그에 앞선 근무평가는 11월 중순에 있었다. 나는 그가 5번째 공모전에 떨어졌을 때 쯤 부터는 거의 히스테릭하게 그의 그림에 대해서 내가 넘지 말아야할 조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여느 연인들의 냉각기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결국 얼마 안가서 다시 퇴근 후 회의실로 모였다. 우리들의 꿈은 달랐지만 결국 같은 지점을 지나야만 했다. 그는 만화 그리기에 집중하고 나는 클래식을 듣고 책을 읽으며 때로는 짤막한 단편을 쓰며 여름을 보낸 지금, 현실적으로 11월의 근무 평가 전에 그가 회사를 그만두기 위해서는 최소 10월 초까지는 그가 공모전에 입상을 해야 했다. 어느 새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마지막 공모전의 기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 왔다. 마지막 일주일 동안 우리는 회사에서 거의 밤을 새다시피 했다. 새벽 세 시가 돼서야 각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으며 아침엔 거의 매일 지각을 하며 졸린 눈을 비비고 회사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와 내가 함께한 일곱 번째 공모전 마감일 바로 전날 역시 퇴근 후 회의실에 모여 최종적으로 그림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피곤했고 지쳐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쩌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 서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다.
[형님 정말 공모전 입상하면... 회사 때려치울 거예요?]
그림들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돌려 내 시선과는 마주치지 않은 채 내 쪽을 보며 웃었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게 중요한건 아니야.]
그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구를 정리하고 공모전에 보낼 만화 원고를 우편용 봉투에 담은 후 우리는 함께 사무실을 나왔다. 그가 택시에 오르는 걸 보면서 나는 손을 흔들었다. 그가 마침내 내 앞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자 그 때서야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나는 어느 쪽으로도 고개를 움직일 수 없었다. 공모전에 원고를 부치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에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회사를 나왔고 커피를 마셨으며 담배를 피웠다. 그에 반해 나는 얼마 전 부터 생긴 불면증에 자주 지각을 했고 월차를 썼다. 팀장에게 핀잔을 들었으며 담배는 두 배로 늘어 있었다. 공모전의 결과 발표가 있던 날 그와 점심을 먹으며 그는 설레여 했고 나는 초조했다. 점심을 다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그가 주머니에서 진동하고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 휴대폰을 응시하던 그는 갑자기 두 팔을 하늘로 쳐들더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다 돌아볼 정도로 탄성을 질렀다.
[끼얏호! 됐어!]
나는 그의 손으로부터 빼앗듯 휴대폰을 건네받고는 그에게 온 문자를 확인했다.
‘《세계만화 공모전에 응모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귀하께서 출품하신 ’친구의 그림자‘는 우리 공모전에 3위에 입상하였음을 알려 드리는 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상금 수령과 기타 시상 절차에 관한 사항은...》
[정말 된 거 맞지? 내가 공모전에 입상한 거 맞지!?]
[맞아요! 3위에요!]
나는 그의 볼을 꼬집고 축하한다며 문자를 다시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는 서로를 얼싸 안고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문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퇴근 후 우리는 그동안 고생했던 기억들을 아주 가벼이 여길만큼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그는 진심으로 내게 고마워했고 나는 그의 노력에 공을 돌렸다. 우리는 술을 마시는 내내 우리가 출품한 작품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잘됐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술기운이 있어서인지 절로 어깨가 으쓱했으며, 아쉬웠던 부분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감명 깊게 읽었던 만화들에 대해서 추억했고, 예전에 그가 그렸던 만화들에 대해서 떠올렸으며, 앞으로 그릴 만화들에 대해서 다짐했다. 나는 주로 듣는 쪽 이었고 그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설 때 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술집에서 나온 우리는 포장마차를 거쳐 3차로 사케를 마시러 갔다. 내가 기억하는 부분은 거기까지였고, 그 후 나는 아마도 4컷 만화의 주인공처럼 기억이 드문 드문한 상태로 집에 도착 했던 것 같다. 씻는 것을 포기하고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운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그와 사케 집에서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그가 말 한 어떤 장면을 애써 떠올리고 있었다. 그 부분이 내 뇌 속에서 선명해졌다가 다시 희미해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사진기의 초점이 정확히 맞춰졌다 이내 흐트러지는 것처럼. 하지만 그 기억은 더 이상 선명해지지 않았고 나는 마침내 잠들기 전 내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려는 듯 입으로 중얼거리고는 이내 골아 떨어졌다.
‘회사는 그만 둘 거야... 이따위 회사...만화가가 될 거야...’
9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은 후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아침을 먹지 않고 집을 나섰다. 어제 많은 술을 마신 것 치고는 발걸음이 가벼웠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의 공기가 상쾌했다. 역 앞 자판기에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커피를 한 잔 뽑아 마시며 장에도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매일 같은 시간에 타는 열차가 도착하려면 아직 5분 정도가 남았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승강장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 딛자 멀리서 열차가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마시던 종이컵을 대충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뛰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열차는 벌써 출발하고 있었다. 몇 달째 같은 시각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출근을 해왔던 나는 플랫폼 차양막 기둥에 붙여놓은 열차 시간표를 확인해 보았다. 역시 평일 오전 7시 40분에 출발해야 할 열차가 3분정도 먼저 출발한 셈이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로 열차가 증편 되었나 생각했지만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었다. 수능시험일도 아니었고 연말 연시도도 아니었으며 명절 연휴의 초입도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열차는 정확히 시간표에 맞춰서 도착했고 내가 열차에 오르자마자 치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곧 출발했다.
열차 안에서 나는 문득 승진을 하게 되면 무엇이 좋은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회사 내에서는 당장 월급이 30만원쯤 오르는 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되자 조금은 허무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동안 그토록 답답하게 여겼던 편도 일 차선의 끝 부분에 와 있다고 생각하니 구불 구불하고 지루하게 이어졌던 지난 팔 년의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유정에게 똑 같은 변명을 늘어놓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다행이었고 감사한 일이었다.
회사에 도착하자 먼저 출근 했던 직원들이 모두 한 사람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 모여서 웅
성대고 있었다. 그는 노동조합 간부였는데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직원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재밌는 일이라고 있어요?]
[쉿!]
그러자 직원 한 명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노조 간부의 모니터에는 위원장 서한문이라는 제목으로 이메일 한 통이 와 있었고 그는 곧 그 편지를 천천히 큰 소리로 직원들을 향해 읽어 주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노동조합 위원장 ooo입니다. 저와 노동조합 집행위원들은 지난 6개월간 회사 측과 임금 및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10차례 회의를 갖고 교섭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섭이 타결되어 조합원님들께 교섭 결과를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물론 최종적인 결정은 일주일 뒤 실시 할 조합원 투표의 결과로 확정 될 것입니다. 임금 및 직원 복지 부분의 개선사항 이외에도 우리 노동조합에서는 이번 회사 측과의 담판을 통해 12월에 있을 승진 인사를 10월 말로 앞당기는 등의 성과를 도출하였습니다. 조합원 여러분의 현명한 결정을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
노동조합 간부는 계속해서 협상결과를 읽어 내려갔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직원들은 일제히 나를 처다 보았고 몇 명의 직원들이 차례대로 내게 말했다.
[이정도면 괜찮은 거 아니야...?]
[그래 임금 3% 상승이면 최근 몇 년 중 가장 높은 거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내 자리로 걸어가서 가방을 던지듯 책상위에 팽개치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금방 끝이 날 것만 같았던 편도 일차선 위의 도로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10
일주일 후 있었던 조합원들의 투표 결과는 91프로의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 되었다. 혹시나 하는 나의 기대는 여름철 활짝 핀 장미가 첫 눈이 내리는 겨울까지 생생하게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2주 후 승진 인사가 발표되었다. 내 이름은 없었고, 강윤선의 이름도 없었다. 그는 벌써 일주일 전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기 전 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계속 연락하자. 우린 참 좋은 인연 인 것 같다.]
좋은 인연이라. 어떠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승진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지금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으므로. 연말이 되자 하반기 전보인사가 발표되었다. 다행히 이번에 다른 지사에서 우리지사로 오는 선배 대리는 없었다. 불행이라는 녀석도 결국에는 나를 불쌍히 여기는 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른 지점으로 전출 가는 직원들의 송별회에 참석했다. 술이 얼큰하게 돌아가자 직원들은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다른 자리에 앉은 직원들과 어울리려고 자리를 옮기고 술잔을 바꾸며 순식간에 술자리가 어수선해졌다. 나는 어느 정도 배를 채웠기에 담배를 피우려고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고 했지만 라이터는 틱틱 소리만 내고 불꽃이 타오르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말했다.
[거지같은 중국산!]
그러자 누군가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라이터 불을 내 입으로 갖다 대었다. 나는 담배를 빨아들여 불을 붙이면서 담뱃불을 권한 그를 쳐다보았다. 총무과의 유대리였다. 입사 13년차의 대리로 나보다 입사년도가 한 해 느린 그가 말했다.
[라이터 따위에 화내시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하고는 자기도 담배를 물어 불을 붙였다. 나는 연기를 차가운 밤하늘로 훅 불면서 말했다.
[그렇지 스트레스 받아서 좋을 건 하나도 없지. 근데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 그렇게 용쓰는 것도 스트레스라는 거 알아?]
[그건 그래요. 우리도 언제 저 라이터처럼 내팽개쳐 질지 모르는 데 항상 즐겁게 살아야지요.]
[하... 시인 같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이쿠. 고맙습니다. 제가 원래 꿈이 시인이 되는 거였어요. 예이츠 같은...]
어느 순간 내 뒤에 따라붙은 차가 깜빡이를 번쩍 거리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바닥에 천천히 비벼 끈 후 그에게 말했다.
[예이츠라...? 그러면 혹시 공모전이라도 나갈 생각 있어?]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