短篇小說/ 23 話 石花/ 惠庵 박 상 국
썩을 년 망할 년 욕바가지를 얻어먹으면서도 죽어 소하고 대가리를 처박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석화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로 용기를 내기까진 십 수 년이 걸렸다 어매아베 말 못하는 벙어리라고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야박한 인심을 뿌리치고, 고향산천을 떠나 일가친척 아는 사람하나 없는 눈감으면 코 베먹는다는 서울 땅을 밟기까진 가슴의 한이 너무나 무겁고 깊었다. ‘사모님! 다녀오이소’ 대문 앞까지 따라 나와 넙죽 절을 하며 배웅을 한 석화는 사람 사는 게 솔솔 재미가 붙었다 지난겨울 혹한기에 얼어 죽지 않으려고, 뱀 굴 같던 고향집을 떠나 서울에서 양장점을 하는 동네 친구 이모 집에 식모살이로 온 것이다 어매아베가 말 못하고 듣지를 못하는 농아인데 자식은 올망졸망 구남매라 장녀인 석화는 늘 마음의 짐이 무거웠다 먹고살 터전도 그리 많지 않는 논밭 서너 마지기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을 할 형편이었다. 간혹 동네 길흉사가 있으면 불려가 하루 몸 고생한 댓가로 음식이랑 곡식을 얻어와 보태기도 하고, 농사철에 품삯을 받아 자식들 학용품정도 사줄 처지고 보니, 석화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뱀 굴 같이 오글거리는 집을 떠나기로 결심을 했다 양장점을 하는 승희 이모도 고생을 한 사람이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석화야!’ ‘예-’ ‘집에서라도 책을 놓지 마라! 집안일 끝내고 간간이 틈틈이 공부해 내년엔 중학교에 가야 하지 않겠니.....’ 석화는 승희 이모 그 말씀에 울컥, 가슴이 북 바쳤다 ‘제 형편에 공부라니요’ ‘없을수록 배워야 한다. 돈 없는 설음보다 못 배운 설음이 더 큰 날이 있을 태니....’ 석화가 그 말뜻을 어찌 모르랴만, 그러나 처지와 분수를 아는 입장에서는 황송하고 고마우나 한 낯 사치로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봄은 겨울을 밀어내고 언 땅을 헤갈하고, 그 땅위에 각양각색의 꽃들을 피웠다 겨우내 알몸으로 섰던 나무들이 푸른빛이 돌쯤, 바람은 향기로운 미풍을 가슴에 불어 넣었다 사춘기로 접어든 석화의 몸에도 봄바람이 불었다 나물캐던 봄 처녀들 싱숭생숭 가슴 봄바람들 듯, 석화도 그런 봄날을 창가에 기대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쯤 고향마을 고향산천은 꽃 대궐일 것이다 앞개울 뒤 개울엔 오동통 버들강아지가 살이 올랐을 거고, 언덕배기에 찔레꽃이 하얗게 폈을 것이고, 동생들은 춘궁기 허기진 배 를 움켜쥐고 있을 것이다 석화는 하루새끼 이밥에 고기반찬을 먹는다. 비록 신분은 식모이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먹고 마시고 잠자는 공간의 의식주만은 천석꾼 못 지를 않다 -1- 말 못한다 말귀가 어둡다 천시도 말고 갈시도 마라! 내 어매아베 말 잘하는 너네 보다 생각 깊고 속 어쭙잖나니, 번지르르한 그 말발로 개 같은 경우 감출생각을 마라! 석화는 늘 어매아베를 비웃는 세상을 원망했다 ‘석화야!’ 2층 베란다에서 승희 이모가 소리쳤다 ‘예-’ 석화가 한달음에 2층으로 뛰어 같다 ‘석화야! 꽃이 시들지 않니....’ ‘그러네요. 사모님!’ ‘석회야! 꽃이랑 반여동물도 가족이란다. 가족을 외면하는 것 같아, 꽃이 시드는 건’ ‘....’ 석화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꽃이 시드는 건 목 마르다는거야! 그러니까 물 좀 주렴, 가끔 시시때때로....’ ‘예- 사모님!’ ‘짐승들도 배가 고프거나 어디가 불편하면 울음으로 말을 하고, 꽃과 나무들도 목마르면 축 늘어져 시르죽는 상을 짓지.....’ 승희 이모는 일장설교를 하고 2층에서 내려같다 석화는 분주했다 화분에 물을 주고 지저분해진 화분을 정갈하게 닦고, 겨우내 바람이 담아다 내려놓은 잡다한 것들을 쓸어 담았다 주위환경이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도 하고 지배하기도 한다는 걸 무심한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는 욕을 먹는 것도 그 애비만 질 못한 게 아니라, 그 자식도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애비까지 욕을 먹는 것 이다 석화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어매아베 밑에서 자라며 봐왔다 어매아베가 귀머거리 벙어리라는 욕 말고는 그 어떤 비난의 욕도 먹는 일이 없었다는 걸 착하게 살아 무시당하는 수모는 어매아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석화는 불현 듯 어매아베가 보고 싶었다. 집 떠나 반년이 훌쩍 지나도록 편지 한통 쓰지 않은 것이 죄스러워, 오늘 밤엔 편지를 쓰리라 결심을 했다 집 떠나와 겨울을 두 번 보냈다 달무리 지는 밤이다 어스름달빛에 기우뚱 넘어진 나무그림자가 허리 휜 아버지 모습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편찮으신가, 올망졸망한 자식새끼들 배 안 굶기려고 아버지는 오늘도 힘겨운 하루를 보냈을 것이란 생각에, 왈칵 눈물이 북 바쳐 올랐다 석화는 생각했다 공장이라도 나가 돈을 벌어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려야겠다고, 언제까지 식모살이로 내 입 칠만 하고 있을게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 듯 솟아올랐다 그날 밤 쇠뿔은 단김에 뽑는다고, 승희 이모에게 속사정을 얘기하기로 했다 -2- ‘사모님 예- 그 동안 고맙고 감사했습니다만, 어매 아부지 고생하시는데 쪼매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기숙사 있는 공장에 들어갈라카는 데 허락해 주이소’ ‘석화야! 생각은 기특하다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왜! 예-’ ‘돈을 벌면 얼마나 벌 것이며, 지금 당장 너 오라고 손 벌리는 공장도 없을 태니, 올 한해 우리랑 함께하고 내년에 양장점에 나와 일을 하렴. 공장에 나가 일하는 것보다 양장 일을 배우면 앞으로 살길이 더 밝을 태니, 그러면 월급으로 얼마씩 줄 터이니 시골집에 부처 주던지....’ ‘그리고 야간학교라도 나가 공부를 해야 한다’ 승희 이모는 석화를 앉혀놓고 장장 한 시간을 설교를 했다 배워야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 배워야 앞으로 상대도 배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다. 배움의 시간도 때가 있는 것이다. 남이라고 생각지 말고 이모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 어려운 일 주저 말고 하라며, 다독거렸다. 석화는 아무 말을 못했다 당장 이렇다 저렇다 할 카드를 까 보일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시계추처럼 흔들흔들 잘도 갔다 봄 꽃 피고 진 뒤 여름 꽃이 다투어 피고, 여름 꽃이 시들자 가을꽃이 대지에 수를 놓았다 초등학교졸업하고 서울올적 촌티가 나던 석화도 수도꼭지 빤 세월이 다섯 해를 넘기고 나니, 솜털 송송하던 얼굴이 보름달 같다 뱀 굴 같은 고향집에 있었다면, 꿈도 못 꿀 일들이 현실 앞에서 널브러지는 하루하루를 살며 환경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걸 모름직이 느낀다. 낯에는 양장점에서 밤에는 야간학교에서 인생의 꽃을 피웠다 한 해가 가면 이 따라 다음해가 연결되어,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늙어 세상을 하직 했다 석화도 청춘이다 단발머리 가시나가 아니라 치렁치렁한 머릿결이 나부끼는 숙녀가 되었다 양장점 시다가 아니라 어엿한 제봉사요 재단가 되었다 승희 이모는 석화에게 양장점을 맞기고 아예 가게에 나오지를 안았다 직원들은 석화를 점장님이라고 불렀다 돌아보면 승희 이모가 예전 까전에 한 말들이 주마등처럼 흔들거렸다 석화가 공장에 간다고 할 때 승희 이모가 한 시간 가깝게 설교한 말들이 하느님의 말씀처럼 석화가슴에 주홍글씨로 쓰여 졌다. 세상에 길은 많고 많지만 어떤 길을 가느냐가 사람 사람마다 달라 사람의 운명이 다른 것이다 석화는 선택이 믿음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승희 이모 말을 믿지 않고 고집스럽게 뒤쳐나가 공장에라도 갔더라면, 석화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석화는 감사하고 감사했다 오늘이 있기까지 지켜주고 보듬어 준 많은 사람들에게, 배고픈 서러움보다 못 배워 무시당하는 서러움이 더 슬픈 것이라 일러준 승희 이모에게 감사하고 감사했다 ‘이모 그 동안 감사했어요.’ 석화는 승희 이모에게 대학등록을 한 그날 밤 감사인사를 했다 -3- ‘장하다’ 승희 이모는 석화를 보듬어 앉으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생의 어미와 자식의 별똥별 하나가 획- 사선을 그으며 지나 같다 ‘이모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 할게요’ ‘그래 믿는다.’ 승희 이모는 석화를 혈육처럼 여겼다 세상엔 달처럼 차가운 사람도 많지만, 해처럼 따뜻한 사람도 많다 한 세상을 살며 사람 잘 못 만나 울고불고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 잘 만나 한 세상 사람구실하며 사는 사람 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줄을 잡느냐 어떤 길을 가느냐 하는 것도 인생에서 어려운 숙제가 분명하다 석화에게도 또 하나의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이다 아무나 사랑할 수 없으니, 아무나 결혼상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애상대와 결혼상대는 다르다고 말들을 하지만, 석화에게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로만 들릴 뿐, 사랑이 하나인만큼 그 사랑이 결혼의 상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싱그럽던 여름나무들이 자기 나름으로 물들어 붉고 노리고 갈색으로 단풍졌다 겨울초입 앙상한 가지사이로 사랑하나가 손짓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속에 나만의 사람이 있다는 걸 사랑을 모를 땐 생각지도 못했었다 옛사람들이 짚신도 짝이 있다고 한 말을 생각했다 그 짝이 짚신인가, 고무신인가, 장화인가, 운동화인가, 구두인가가 운명이다 그래 어쩌거나 장화만은 피하자 석화는 그러고 혼자 웃었다 ‘점장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지난 봄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골에서 올라온 미순이가 지나다 한 말이다 ‘왜-!’ ‘점장님이 혼자 웃으셔서’ 석화는 그제 서야 혼자 실성한 사람처럼 싱글벙글거렸다는 걸 느끼고, ‘응- 좋은 일 있어’ 미순인 무슨 좋은 일이냐고 물을 만큼 짠 밥이 많지 않아, 아무 말 없이 제 자리로 돌아갔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꽃이 벚꽃처럼 핀 날이다 ‘알았어요.’ 석화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대학선배인 창수가 설경을 구경하려가자고 전화를 한 것이다 이 남자는 독불장군이다 한 번 삘 꽂히면 앞뒤 없는 전차처럼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는 스타일이라 노라고 대답하는 게 부담을 느끼게 하는 남자다 석화는 왠지 이런 창수가 싫지가 안았다 내숭 까는 비리비리한 사내들보다 화끈하게 밀어붙이는 그 탄력성이 사내답게 보이니, 어찌 사랑이 아니 되겠는가, ‘오늘 따라 더 이쁘네’ 창수가 만나자마자 립 서비스를 했다 -4- ‘정말 진짜로’ 석화도 응대했다 ‘응, 정말 오늘은 더 이쁘 당’ 창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석화가 창수 볼에 입맞춤을 했다 ‘오- 예 에’ 창수는 싱글벙글 좋아 죽었다 ‘그렇게 좋아’ ‘응-’ 창수는 큰 눔을 더 크게 뜨며 말했다 그래 웃으면 복이 온 단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다더라 석화는 속으로 말하며,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하나 부다 생각했다 오늘따라 남자냄새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창수허리를 감싸 안으며, 석화가 말했다 ‘사랑해-’ 참 오랫동안 가슴에 숨겨뒀던 말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해보는 사랑한다는 말이, 어색하지도 부끄럽지도 안게 튀어나왔다 꾹 눌려있던 용수철이 그 무게를 들쳐 내고 튕겨지듯이, 사랑한다는 말이 두꺼운 가슴 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 뜻밖의 고백에 창수도 놀랐는지 석고처럼 굳어버렸다 ‘싫어’ 석화가 창수의 태도에 쐬기를 박듯 말했다 ‘아니’ ‘그런데 그 태도가 뭐야’ ‘ 뇌를 다처서’ 창수는 갑작스런 사랑고백에 뇌를 다쳤다고 얼버무렸지만, 사실상은 몇날며칠 혼자 끙끙거리며 고민했었다 사랑한다고 말을 할까? 말까? 그런데 그 고민이 무색하리만큼 선방을 맞았으니, 뇌를 다칠 밖에 ‘나도 많이 사랑하지.....’ 언제나 선후배의 관계에서 벗어날 줄 몰랐던 청춘남여들이 불놀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외로움에 떨고 있던 사슴이 짝을 만나 목메는 소리로 ‘창수씨 나 좀 꼭 안아줘’ 사랑이 참 포근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할 때 잊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랑이란 한결 같지 않다는 것 사랑은 낯과 밤이 있다는 것 사랑은 사랑할 때와 이별할 때가 다르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 가슴에 코를 박고 있을 땐 그 사람 냄새에 취해, 그 다음에 오는 아픔과 괴로움을 모른다는 것을...... -5- 석화는 남자냄새가 이러토록 매혹한 줄 몰랐었다 마법에 걸린 듯 코를 박고 한참을 숨죽여 있다 정신을 차려도 그 여운이 몽롱한 파장으로 이어졌다 ‘흠-냄새 좋다’ 창수도 따라 몽롱한 꿈에서 깨어났다 ‘냄새, 무슨 냄새’ 뜻밖의 말에 당황한 듯 한 어투로 석화기 대꾸하자 ‘머리냄새. 자기 머리냄새가 좋다구’ 이처럼 사랑의 언어는 발전한다. 무심결에 나온 잠재된 자기라는 지칭, 참 아늑하고 포근한 언어마술이다 석화도 자기라는 언어의 공통성을 모를 리가 없다 둘은 서로의 자기로 인정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다 어느 듯 녹음방초의 여름으로 치닫고 모기와의 한판 전쟁을 치루고 나면, 갈바람이 스산하게 옷깃을 여미고, 그 바람 끝에 또 삭풍이 몰려왔다 한해는 그렇게 다람쥐 채 바퀴 돌듯 돌고 돌아, 창수와 연애의 계절도 두 번을 번갈아 넘겼다 이잰 입이 웃고 있어도 그 웃음속의 감춰진 비밀을 엿볼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이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할 대상이 아니란 판단이 섰다 석화는 늑대의 기질을 가진 남자를 원한다. 그런데 이 남잔 개과다 아무여자나 사랑하고 아무여자나 품을 수 있는 남자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을 때, 이별통보를 한 것이다 ‘우린 여기까지만 올 수 있는 관계였어, 창수씨’ 창수는 더 이상 구질구질해지기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미련 없이 빠이빠이 하고 돌아선 것도 양손에 떡을 쥐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사랑이 익어지면 그 누구라도 결혼이라는 예기를 넌지시 저울질하고 슬쩍슬쩍 떠보는 게 상례이건만 이 남자는 사랑의 조건이 떡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육적사랑에 매달렸다 절박함이 없는 사랑은 내 사랑이 아니다 어느 때인가 그는 결혼이라는 걸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석화가 살고 있는 영양 일월산 아래 고향집을 살펴봤을 것이다 그러자니 올망졸망한 가족과 귀머거리 어매아베가 장인 장모가 되는 게 싫었을 것이라는 것이 추측컨대 정답일 것이다 석화도 훌훌 털어버리고 일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가 오면 그 빗길을, 바람이 불면 그 바람결에 알게 모르게 옛사랑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잊자고 하면 더욱 발목을 잡는 게 미련이 아니던가, 처녀나이 서른을 바라보면 노처녀가 아니라 한물간 처녀로 밀리고 밀리는 시절이었기에. 가슴에서 결혼이라는 두 글자를 구겨버렸다 억지사랑도 할 수 없을뿐더러 억지 결혼은 더더욱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결혼을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누구라도 결혼을 생각하면 장인장모가 귀머거리 벙어리란 걸 알텐데 목숨처럼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석화도 알기 때문이다 -6- 가난에 찌든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결혼해 한 남자에게 희생하기보다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으로 질매지고 태어난 동생들을 거두는 삶을 살겠노라 마음을 굳혔다 미치도록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을 해도 살다보면 사내 못 사내 하는 판에 처음부터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랑 엮여 한평생을 가슴앓이 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세상이 그러지 안든가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이미 떠난 사람은 그럴 위인이 아니란 걸 석화도 알았기에 시간낭비를 줄인 것이다 승희 이모가 석화에게 양장점을 인수하라고 했다 그동안 가족으로 살았지만 분명하게 이름을 짓고 넘어가야 서로 간에 편한 일이라며, 적당한 선에서 셈을 치루고 석화명의로 해주고 싶었든 것이다 석화는 그동안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돈으로 양장점을 인수하고, 작은 아파트하나 전세로 얻어 승희 이모 집에서 나왔다 항상 마음에 걸렸던 어매아베를 이사하는 날 올라오라고 했다 남의 집에 있을 땐 눈치 보여 못했던 일이다 얼마나 딸자식이 있는 서울 땅을 와 보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어매아베는 꾹꾹 눌러 앉혔을 것이다 주변사람들 눈치가 보였을 것이고, 그 또한 딸자식 위신을 깎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막내 철부지 순화가 이사한 집에 들어서며 호들갑스레 말을 했다 ‘언니 집 참 좋다’ 순화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방 저 방 거실로 뛰어 다니며, 야단법석을 떨건만 어매아베는 싫다 좋다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처지니, 얼굴빛으로 환한 표정을 지웠다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벙어리 딸이라고 놀려대면 석화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인 체 늘 피했던 걸 기억에서 소환하며, 저 철부지 동생도 그럴 것 이란 걸 생각하며 아파했다 ‘많이 먹어’ 석화가 동생 앞으로 맛 나는 음식을 끌어다 놓으며 빙긋 웃었다 ‘언니야! 우리도 여기 살면 안 돼’ 순화는 석화얼굴을 살핀다. ‘중학교 졸업하고 올라오렴, 그때까지 공부 열심히 하고, 어매아베 속 시끄럽게 하지 말고’ ‘응’ 더 보채봐야 안 되는 건 안 되는 줄 알만큼 이민경이 터진 나이 아니던가, 중 2학년이니..... 세상 사람들 다 불러 모아 물어봐도 장애를 가진 무모에게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고 가난뱅이 어매아베에게 태어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선택이 아니고 운명이다 불가에서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 그 죗값을 치루기 위해 부모자식의 연을 맺는 거라지만, 그 전생이라는 것도 이승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자우당간 부모자식은 분명하니 자식은 자식도리를 다 하면, 그것으로 부모에게 보은하는 것이라고 석화는 생각했다 즐겁고 행복한 날은 지나고, 갈 사람들은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갔다 서울의 아침은 늘 분주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7- 석화의 일상도 늘 그랬다 늘 바쁘고 늘 분주하고, 늘 고달프지만 즐거웠다 높은 빌딩아래 후미진 골목으로 댕그랑거리며 두부장수가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헐떡거리며 신문배달 학생이 달려가고, 그 뒤 를 이어 또 댕그랑거리며 청소부아저씨가 지나갔다 개미는 잘록한 허리로 열심히 일을 한다. 허리띠를 졸라 맨 사람들도 개으름을 피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한다. 서산으로 기우는 해가 기우뚱 높은 빌딩 그림자를 길게 쓸어 트려 놓은 보도블록 위 가로등에 불꽃이 피면, 사람들은 총총걸음으로 새벽에 나선 길을 되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네요,’ 석화가 반기는 사람은 한때 메스컴에 오르내릴 만큼 유명세를 탄 강남유명학원 스타강사였던 민지수다 이 여자로 말할 것 같으면 여장부라고 해도 아니면,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 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이 시대의 황진이라고나 할까? ‘결혼 했어요’ 석화의 물음에, 민지수의 대답이 화끈했다 ‘떡 좋아하는 놈은 많은데 꽃 좋아하는 놈은 없더라고’ ‘ㅋㅋ’ 석화는 이 여자 그 세월에도 하나 변한 데가 없구나 싶어, 다시 또 물었다 ‘키우는 사낸 있어’ ‘그딴 걸 뭣 땜에 키워, 키워 잡아먹으면 더 맛나나’ 과연 민지수다 한 때 단골이기도 하였지만, 그 보단 동성연애자처럼 한 세월을 보낸 관계라는 게 정답이다 ‘자긴 왜 혼자야’ 지수의 묻는 말에, 석화도 직설적으로 답했다 ‘늑대인줄 알았는데 개더라고’ ‘그래서 아웃 했다구’ ‘응-’ ‘그 자식 복을 차구 먼’ 석화는 종업원들에게 시간되면 퇴근하라고 이르고 지수와 시내로 나갔다 길 위엔 많고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바쁘게 목표를 향 해 달려 같다 어둠이 내리는 도심의 야경은 황홀경에 가까웠다 어디에선가 날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하루하루를 살아온 석화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몰랐다 강물은 하염없이 바다를 향해가고, 나무들은 쉼 없이 꽃 달고 열매 맺기 위해 물 퍼 올리는데 석화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지 몰랐다 ‘아끼다 똥 된다’ 뜬금없이 내 뱉는 지수의 말에, ‘뭔 소리야!’ ‘버는 데 열을 올릴게 아니라 어떻게 쓸까 고민하라는 얘기야’ -8- 지수의 말꼬리를 잡고 ‘옌 네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그래, 종업원 월급주고 나면 내 생활비도 빠듯해’ ‘예-예에, 돈 빌려 달라 안 카겠스무니다’ ‘하하하’ 오랜만에 웃어보는 환한 웃음이다 지수는 자유연애주의자이다 ‘사랑하고 싶은 놈 있으면 사랑하고, 먹고 싶은 놈 있으면 손가락 빨 듯 빨고’ ‘옌-’ 민망하다는 투의 석화의 말에, ‘요조숙녀입네 할 것 없어,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야!’ 그러나 세상 사람들 다 그렇고 그렇다 한들 석화에게는 어렵고 어려운 문제가 분명하다 천성적으로 낯 뜨거운 짓거리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사랑 그거 중독성이 있어’ 먹어도 먹어도 성이 차지 않는 사랑중독성을 앓고 있는 지수의 말에, 석화는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럴 수 있는 너의 자신감이 부러워’ ‘자신감 아니야!’ ‘그럼’ 뭐냐고 반문하는 석화를 빤히 처다 보며 지수는 혀를 쏙 내밀었다 ‘뭐야-’ ‘막대사탕을 빠는 것이랑 같다는 거야, 혀를 빠는 것은-’ ‘어이구 숭해-’ ‘그럴 것 없어,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너도 다 먹어봤잖아’ ‘....’ 그래 그렇다 솔직히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어본 석화다 숨이 넘어갈 만큼 벅찬 희열도 느껴봤고, 깔딱 숨넘어가는 아리랑고개도 넘어본 석화이다 미운 정 고윤정이 들었던 창수의 모습이 흑백영화필름처럼 찰찰 찰 돌아갔다 그 남자 한 때 사랑했던 그 남자 개과의 그 남자 석화는 화들짝 눈을 떴다 ‘홍콩 간 날 생각하니’ 지수가 입가에 웃음을 물고 짓궂게 추궁하듯 물었다 ‘홍콩 좋아하네.’ 까르륵 지수가 호들갑을 떨며 소파에 엎질러졌다 반나절 지수와 붙어 있으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사랑이라는 개념 속으로 풍덩 빠질 수 있어 석화로서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거리에 어둠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높은 빌딩의 창문을 밝혔던 불들도 하나둘 꺼지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니던 사람들도 그림자를 숨겼다 이제 석화도 외로운 둥지로 날아가야 했다 고독했다 -9- 들녘에 홀로 선 허수아비처럼 가슴이 텅 빈 것 같았다 천시와 괄시를 받으며 한 세상을 산 아버지가 떠나고, 그 이듬해 어머니까지 아버지를 따라 저세상으로 가시고, 뱀 굴처럼 오글거렸던 형제자매들도 하나둘 짝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홀로와 홀로 가는 인생길에서 석화도 저녁 놀 속으로 끼룩거리며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끼룩 끼룩 처연한 울음을 울며 황혼녘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옛 선비들은 황혼에 이르러 관직을 내려놓고, 물 좋고 산천경개 수려한 곳에다 정자를 지어 남은여생을 여유롭게 보내고 져 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아등바등 삶에 매어 하루하루를 곡예 하는 생을 살아야 하는지 홀로 문답하는 시간이 잦아졌다 밤이면 짓누르는 고독에 숨이 벅찼고, 잠 못 들고 뒤척이는 밤엔 홀로 남은 외로움에 휑한 가슴을 달래줄 그 누군가 목말랐다 꼭이 이성으로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랑을 나눌 대상이 절실했다 결혼이란 걸 하고 사랑에 집착하다 사내 못 사내 티격태격 밑구멍까지 다 들어낸 인신공격을 하다 골 깊은 상처만 안고 남남으로 갈라서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했다 누군가 소리 없이 왔다 소리치며 나가는 게 돈이랑 사랑이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시대가 변하니 사람들 취향도 변해, 유명메이커에서 기성복이 쏟아져 나왔다 석화는 해방되고 싶었다. 일에서 억매임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어떤 구속에서, 가게 문을 닫았다 팔월의 폭염이 아스팔트를 녹였다 사람들은 헉헉거리며 그늘 막으로 피해들어, 줄줄 흐르는 육수물의 짠 내를 맞아야 했다 그래 미친 짓 한번 해 보는 거다 석화는 다이 알을 돌렸다 ‘삐삐 삐’ 어서 받으라고 통화음은 계속적으로 삐삐 거리건만, 이 사람은 똥 싸러 갔는지 술독에 빠졌는지 응답이 없다 그래 필연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지..... 마지막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건만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은 지인으로부터 소개 받아 두어 번 찻집에서 만난 남자다 핸섬한 중년의 독신 남, 이 남자에게서 수컷냄새가 물신 했던 기억을 소환해 다이 알을 돌렸건만 부재중이다 농익은 오십 줄 여자의 목마름을 정녕코 세상은 외면 할 것인가, 별똥별이 초롱초롱한 별들 사이를 비집고 획- 사선을 긋고 어디론가 달아났다 석화는 뒤척이며 생각했다 팔베개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어둠은 고요를 물고 새벽으로 내 달리고 있었다. 멀뚱멀뚱 뜬 눈으로 아침을 만났다 밤새 어둠에 침잠된 세상은 아침햇살에 예전가 다를 바 없는 그대로의 세상을 들춰내 보였다 혼자 먹기 위해 밥을 지어야 한다는 그 자체가 성가시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지 않는가, 아침밥을 지어 누군가를 먹이는 상상만으로도 석화에게는 행복한 그림이다 -10- 낙엽지고 앙상한 가지사이로 삭풍이 몰아쳤다 이른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수화기 속에서 착 갈아 앉은 승희 이모의 목소리 들려왔다 ‘밥은 먹었니....’ ‘아직요’ ‘그럼 지금 우리 집으로 달려오려 무나, ’ ‘왜요’ ‘얼굴도 보고 싶고, 의논할 일도 있고’ ‘네에’ 석화는 화장 끼 없는 민낯으로 승희 이모내로 달음질을 쳤다 석화네 집에서 승희 이모 집까지는 걸어서 2-30분 거리다 석화는 택시를 잡았다 보도블록위로 오가는 자동차의 경적소리에 은행나무가랑잎이 이리저리 뒹굴었다 평창동 미술관 언덕 위를 조금 오르면 승희 이모 집이다 담장위에 넝쿨장미는 앙상한 가시로 잎이라도 서릿발에 지키려하지만, 그 가시로 가는 세월을 지켜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나기 무섭게 승희 이모가 달려 나와 와락 끌어 앉았다 ‘얼굴이 왜 이래-’ ‘화장을 안 해서 그래요’ ‘네가 화장발 민낯 구분 못 하겠니, 밥이나 먹고 사니....’ ‘왜요. 쌀 떨어져 굶고 있을까 봐요’ ‘그런 말 아니잖니.... ’ ‘이모 의논할 일이 뭐예요. 난 그게 궁금해 달려 왔는데’ ‘시집가라고 그런 다 왜!’ ‘어디 내게 돌아올 쓸 만한 사내라도 있나요’ ‘그래-’ 석화는 웃으며 ‘지금 내 나이가 몇 갠 줄이나 아세요.’ ‘나이가 뭔 대수라니-, 좋다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 사랑을 나이로 한다던’ ‘이모는 저를 이팔청춘으로 아시나봐 저 두 낼 모래면 환갑이유-’ ‘그래 좋겠다. 환갑이래서-’ 승희 이모는 속상하다는 뜻 쏘 아 부친 뒤 조근 조근 말을 이어 같다 늙어갈수록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한 다 에서부터, 꼭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말동무삼아서라도 옆에 사람을 둬야 한다까지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다 ‘저 그만 가야겠어요.’ ‘자고 가렴’ ‘이모부는 안 보이시네요’ ‘시골친구 마누라가 죽어 초상집에 같다’ -11- 그 밤에 확답을 받을 요량으로 승희 이모는 석화를 붙들고 설득을 하는 것이다 ‘남자는 진국이다’ 승희 이모는 자리를 펴고 누워 귓속말처럼 소곤소곤 남자의 이력을 말했다 대학교수였다는 것. 상처를 했다는 것. 슬하에 무자식이라는 것. 너만 오캐이 하면 니꺼 내꺼 할 것 없이 다 니끼라는 것 그 양반도 등 긁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너도 등 긁어 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되는 거라고, 살살 녹이는 것이다 ‘이모 저는 얽매는 게 싫어요. 저라고 왜 외롭지 않겠어요?’ ‘얽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이모 한번만 더 믿어 보련’ ‘생각 해 볼게요. 그만 주무셔요’ ‘놓치기 아까워서 그래-’ 승희 이모는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자정이 이슥하도록 흥얼거렸다 석화도 싫지는 안았다 허지만, 사람의 속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고약한 놈 나쁜 놈 마밖에 써 붙여 놓은 것도 아니고, 혹여 아차 하는 날엔 다 써 놓은 죽에 코 빠트리는 격이 될 텐데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부처님이 보증을 서겠는가, 예수님이 보증을 서겠는가, 석화는 비구니처럼 수녀처럼 정갈한 죽음을 맞고 싶었다. 이젠 사랑에 허기진 나이도 다 피했으니, 보통사람들도 노후에는 각방을 쓰듯이, 나이 들어 칭칭 감기는 잠자리 그 자체가 불편하다는 생각이다 승희 이모는 석화에게 은인이다 허지만, 결혼만은 그 누구에게 등 떠밀려서 가기 싫은 시집을 가고 싶진 않았다 남자는 늙으나 젊으나 남자는 남자니까? 그런 남자의 속셈은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를 태니까? 처음 그 처음은 하늘의 별 달이라도 따줄 것 같다가도 아니 아니, 간이라도 다 빼줄 것 같다가도 제 품에 한번 안기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얼굴을 싹 바꾸는 짐승 같은 인간이 남자니까? 그런 남자 말에 엎어지면 코가 깨질 수 있다고 석화는 생각했다 올망졸망 구남매를 낳은 어매아베의 자식들 중에 어매아베와 같은 증상의 병력을 가지고 태어난 동생이 일곱 번째 미화였다 미화는 여동생들 중에 가장 얼굴이 빼어난 미인상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어매아베와 같이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를 앓는 농아이다 석화가 동생들 중에 가장 안쓰러워하고 마음이 쓰이는 동생이기도 하다 어쩌면 신께서 이토록 가혹하실까? 미화도 어매아베처럼 같은 병력을 가진 장애인가 결혼했다 미화남편 오재식은 아버지처럼 성실하고 순박한 남자로 그 또한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이었다. 석화는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아는 터라 틈틈이 짬짬이 안부를 묻고, 아이들 입학 졸업할 땐 잊지 않고 이모로서의 마음을 보냈다 미화는 아들딸 남매를 낳았다 그 둘 중 큰 애는 남자이고 동생인 여자아이가 하늘이다 석화는 하늘이가 중학교만 졸업하면 고등학교 대학은 자기가 데려다 공부시키겠노라 일찌감치 동생미화와 약속한 터였다 천만 중 다행이랄까 하늘이 남매는 정상적인 아이들이다 -12- 아들인 석만이는 공고를 나와 일찌감치 산업전선에 뛰어들었고, 하늘이만 석화가 데려다 공부를 시키면 미화부부도 삶이 헐 수월해 질 것이다 긴긴 기다림의 겨울밤이 지나고 아른아른 아지랑이 너울너울 너울거리는 봄이 왔다 살레였다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 기다림이 닿는 다는 것이..... 내일이면 하늘이가 온다. ‘이모’ 일 년 사이에 몰라보게 자란 하늘이가 서울역 출구를 나오며 소리쳤다 ‘어머 우리하늘이 몰라보게 자랐네.’ 석화는 하늘이를 끌어 앉았다 처음 느껴보는 혈육의 뜨거운 맥박소리 숨소리가 귓전에 쿵쿵거리는 것만 같았다 ‘가자 집으로’ 석화가 하늘이 손을 잡고 택시에 올랐다 언제나 봐왔던 하늘이건만 오늘 따라 하늘빛이 너무 맑고 푸르다 밤이 이슥하도록 석화는 하늘이와 앞으로의 일을 의논 했다 ‘공부 열심히 하기. 이모에게 비밀 없기’ ‘예-’ 그렇게 간단명료하게 끝을 마무리하고, 서로의 방으로 돌아갔다 행복하다 각방에 누웠지만, 하늘이도 오늘밤은 행복을 느낄 것이다 아침은 언제나 찬란했다 햇살에 묻어나는 아침공기가 어쩜 맑은 물소리처럼 콸콸 콸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사람하나에서 나오는 온기가 이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줄 몰랐다 집안이 화원처럼 향기롭다 하늘이가 온 그날부터 석화는 바빴다 하늘이 밥을 지어야하고, 하늘이가 좋아하는 반찬에 신경을 써야 하고, 하늘이가 미처 챙기지 못한 학교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하는 일들이 하루를 바쁘게 했다 그리움을 채운 다는 것 외로움을 달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석화는 생각했다 ‘밥 먹자’ 네-‘ 이렇게 하루는 시작 됐다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쏟는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행복인가를 느끼게 했다 보람은 일 속에 있었다. 석화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가까이 있을 땐 그 소중함도 그 고마움도 모르다가 멀리 떨어지거나 멀리 떠난 후에 그리워하고 보고파 한다는 것을.....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어매아베가 살았듯, 석화도 환경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가슴 깊은 곳에 쇠말뚝이 되어 박히는지 느끼며 자랐기에, 비록 배 아파 낳지는 않았지만 하늘이를 이모가 아닌 엄마가 되어 보살피겠다고 다짐했다 눈을 뜨면 하늘이의 얼굴이 하얀 꽃처럼 닥아 섰다. ‘굿 모닝’ -13- 언제나 석화가 아침인사를 먼저 했다 ‘이모 잘 주무셨어요.’ 행복나무에 물주기 거름주기 예쁘게 다듬고 손질하기 하루의 시작이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서 방패연은 숨구멍으로 들숨날숨을 쉬며 바람의 방향을 읽을 때 얼레에 감긴 실이 풀리는 만큼 연은 하늘높이 오른다. 아낌없이 다 주리라! 석화는 마음으로 다짐했다 세상을 보는 마음이 눈이 맑으면 세상은 아름답고 향기로울 것이다 누구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원망한 다는 그 자체가 마음이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부처는 산중절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는 스님의 말씀을 떠 올리면서 합장하며, 관세음보살을 외며 어매아베의 명복을 빌었다 정말, 그리운 사람들이다 사람팔자시간문제라고는 하지만, 그 놈의 시간이 또 문제인기라 늘 탱자탱자 삐 빠빠 눌라 외치는 인간이 시간이 흘러봤자 무슨 늘 푼수가 생기겠는가. 문디 지 자루 뜯기 허송세월에 지 몸만 늙어 빠지겠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리 말이 비단 같아도 그 말은 뻥이고 부도수표에 그치는 기라 이 말인즉 시골 옆집 할배의 레퍼토리였다. 석화도 승희 이모네에 오지 않고 뱀 굴 같은 고향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천덕꾸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남의 집 식모살이를 했을지라도 시골부잣집 외동딸도 매일 같이 못 먹는 이밥에 고기반찬을 끼니때 마다 먹을 수 있었다 팔자는 길들이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속담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빠꿈이 보이는 하늘만 하늘인줄 알 듯, 가슴이 비좁은 사람의 하늘도 동전만 할 것이다 옛사람들이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재주도로 보내란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형제는 몰라도 장애를 가진 여동생 미화만은 석화가까이 두고 싶었다. 허지만 미화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두 사람이 각박한 서울 땅에서 뭘 해먹고 사느냐는 것이다 남들처럼 장사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직장을 얻을 수도 없는 자기들의 처지를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적은 농토지만 그 논밭에 씨 뿌리고 가꿔 가을에 추수해 먹고사는 편이 헐 자유롭다는 것이다 석화도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라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자급자족 할 수 있을 만큼 농토를 마련해 주리라 마음먹었다. 더 이상 남의 집에가 품삯을 얻어 오지 않아도 될 만큼 만들어 주겠노라고 했다 세월가고 세월지난 뒤에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나눌 수 있을 때 나누고, 베풀 수 있을 때 베풀어야지, 시 놓치고 때 놓친 뒤에 후회 해 본들 죽은 아들 불알만지며 애통해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었다. 언젠가 내 죽으면 울어 줄 사람 형제들이랑 조카 말고 뉘 있겠냐고, 석화는 생각했다 가을빛에 나무들이 물들고 있었다. 하늘이도 대학에 들어가고, 석화도 머릿결이 백옥처럼 희디흰 할매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14- 산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지만, 그 이름 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만이라도 세상 누구에겐가 남기고 싶었다. 죽으면 끝난다. 모든 것이..... 어쩌면 한편의 드라마 거나, 한편의 연극 같은 인생이 아니겠는가, 막이 내리기전에 주어진 역할을 석화는 멋지게 하고 싶었다. 뻘떡뻘떡 쉬던 숨 언제 어느 때 뚝- 끊어질지 모를 일, 예고 없이 올 그날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석화는..... 꽃단풍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졌다 봄날 물꼬로 뜸북뜸북 뜸부기 기어들든 논배미 황금물결이루고, 이른 새벽 촌로의 헛기침소리 싫은 경운기 탈탈 거리던 그 들녘에, 추수 바인다가 탈탈 거렸다 농부의 땀의 결실은 흘린 땀 만큼이다 석화는 하늘 우러르며 하늘에 감사했다 그리고 가난에서 구해준 승희 이모에게도 감사했다 무엇보다 이렇다 저렇다 세상을 비난하지 않은 어매아베에게 고맙고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석화는 하늘이애게, 아끼다 똥 되지 않게 나눌 수 있을 때 나누고, 베풀 수 있을 때 베푸는 넉넉한 마음으로 한 세상을 살라고 주문했다 아름답게 늙는 것도 제 몫이라고,
[블로그] 혜암의 시 향기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반추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