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신비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용어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교회가 만들어 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채택한 용어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하신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초대교회부터 세례를 위한 신앙
고백문, 설교나 교리교육, 기도 안에서 분명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오로 사도도 편지의 인사말에서 자주 사용한다.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난해해지기 시작한 것은 이단의 도전 때문이다.
신앙의 내용을 지키려다 보니 ‘실체’나 ‘위격’, ‘관계’ 등
당시에 유행하던 철학 용어를 동원하여 설명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핵심은 단순하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되는 서로 다른 세 위격이
한 하느님으로서 우리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이다.
하나가 되는 비결이 바로 사랑이기에, 구원의 능력을 체험한 우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라고 고백한다.
햇빛이 지구를 달구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을 그 열기로 가득 채운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냉랭할 수 없게 된다.
마치 예수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로 달려가 마을 사람에게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알렸듯이,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선교는 의무라기보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의 형편은
아직 뜨거움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면서 당신을 만나는
사실까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믿음이 있어야 전하러 갈 텐데,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전하러 가라고 하신다. 순서가 뒤바뀐 것이 아닌가?
그 까닭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신앙을 줌으로써 신앙이 견고해진다.”(교회의 선교사명, 1990)
만일 제자들이 믿음이 약하다고 믿음이 굳건해질 때까지 골방에 머물렀다면,
남아 있던 믿음까지도 다 잃어버렸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약한 제자들의 믿음을 강하게 하려고 선교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의도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을 거둔다.
의심하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기도하면서,
병자가 치유되고, 마귀가 쫓겨나고, 심지어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을 체험하며
참 사도로 변해간다. 종국에는 사도들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지고
순교한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교를 하긴 해야겠는데 아직 그럴만한 믿음이 없어서 고민인가?
그러니까 믿음이 강해지도록 복음을 전하러 나가야 한다. 일단 시작만 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완성하실 것이다
글 : 金光泰 James 神父 – 전주교구
폼페이 성모님을 아시나요
호수의 도시, Italy como에 도착했습니다. 큰딸과 함께 떠난 이태리 여행,
이틀 후엔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코모 역에서 바라본 호수가 아름답습니다.
다른 날 같으면 너무 좋다며 호들갑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맘이 생기지 않습니다.
밀라노에서부터 기관지염이 도져서 한기가 느껴지고 몸살 증상까지 겹친 겁니다.
면역이 약한 사람이 젊은 딸을 따라다니며 자유 여행을 하려니 그럴 만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거라도 내 상태가 힘들면 다 소용없다는 결론에 봉착하자 심란했습니다.
예전 아팠을 때의 Trauma가 떠올라서 두려웠습니다. 기침이 멎지 않으니
딸도 밤을 지새우며, ‘어뜩하냐.’라고 하면서 제 등을 쓰다듬습니다.
엄마와 추억을 쌓겠다고 떠나온 여행인데 너무 미안했습니다.
저는 묵주를 들고 힘없이 성모님만 불렀습니다.
이튿날 딸이 호수 맞은편 산꼭대기에 있는 Brunate 동네를 올라가겠다며, Funicular를
타러 나갔습니다. 저는 걱정이 태산일 것 같은 딸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그 시각, 딸은 산 정상에서 한적하고 고요한 호수를 내려다보며 잠시나마 시름을
잊었을 겁니다. 딸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는데, 작고 예쁜 집이 나와서
셀카를 찍었답니다. 집안이 궁금해서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봤는데 세상에나,
커다란 알로 엮은 묵주가 제대 뒤 벽에 걸려있던 겁니다. 의자 몇 개 놓인
작은 경당이었는데,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화가 모셔진 곳이었습니다.
그 액자 속 주인공은 바로 폼페이 성모님이었습니다. 딸이 뭔가 익숙해서 계속
쳐다보니, 54일 묵주기도 책 푸른색 표지 가운데에 그려진 성모자 성화와 같더랍니다.
폼페이에 발현하시어 54일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안내한 성모님이신 겁니다.
딸은 오묘한 이끌림에 감동하면서 엄마를 위해 환희의 신비 5단을 바쳤다고 합니다.
‘왜 하필 지금 엄마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모레 아침엔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의탁일까? 경고일까?’ 그렇게 막 머리를 굴리는 순간,
‘엄마의 병세도 그렇고, 또 내일은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데,
성모님께서 묵주기도라는 무기를 내게 주시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일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스치더랍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저는 코모 성모병원 응급실에
가서 꼬박 7시간을 기다리며 엑스레이와 피검사 등 진료를 받았습니다.
딸은 땡볕 아래서 기다리며 성모님이 쥐어 주신 무기(묵주기도)를 계속 사용했습니다.
이후에도 귀국이 늦어지고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하는 등 놀랄 일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작은 경당의 폼페이 성모님 성화를 떠올리며, ‘왜 하는 것마다 틀어질까.
지금은 다 내려놓고 기도 먼저 하라고 그러시나.’라고 받아들였던 겁니다.
이로써 17일간의 모녀 여행은, 마지막 순례지인 코모에서 새로운 이름의
‘폼페이 성모님’을 만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5월 성모 성월도 어느새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글 : 박지현 Josephine – 방송작가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