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차지할 아름다운 땅(2)
신 8:1-10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신 8:1-10 / [이스라엘을 가르치시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명하는 모든 계명을 그대로 지켜 행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이 살아 남아서 번성하게 되고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2)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 주신 그 여정을 모두 돌아보십시오. 그 목적은 여러분의 고집을 꺾어 겸손하게 낮추어 놓는 한편, 여러분이 과연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 여러분의 마음을 시험하여 알아보시려는데에 있었습니다. 3) 주께서 여러분의 고집을 꺾으실 때에 여러분을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여러분도 몰랐고 여러분의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주께서 여러분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그 목적은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시려는 데에 있었습니다. 4) 지난 40년 동안 여러분의 옷이 해진 일이 없었고 여러분의 발도 부르튼 일이 없었습니다. 5) 여러분이 이 사실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옳게 가르치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르쳐 주시는 길로만 걸어가면서 주님을 경외함으로써 주님의 명령을 지키십시오. 7) [선물로 주시는 가나안 복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제 여러분을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땅에서든 들녘에서든 산지에서든 똑같이 깊은 곳에서 샘물과 시냇물들이 솟아날 것입니다. 8) 그곳은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열고 올리브 기름과 꿀이 나는 땅입니다. 9) 그 땅에서는 먹는데에도 부족한 것이 없고 어느것 하나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 땅의 돌에는 철이 들어 있고 어느 산에서나 구리를 캘 수 있습니다. 10) 여러분은 거기서 풍족하게 먹고 행복해지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땅을 보며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 설 교 >
지성소의 원칙으로 자기를 경영하라
신명기 6:3-6 / 노환영 목사(함부르크 교회)
8월 첫 주 성찬주일 예배에 오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예수님의 피 공로로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지성소의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주일은 세상의 날과 하나님께 믿는 사람들에게 구별시키시고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처럼 여기고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주일은 주님의 몸에 연합하는 일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전 지성소에 두었던 언약궤 안에는 3가지‘감추인 만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십계명 돌비’가 증거물로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영성이고 하나님의 가치관이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경영하려면 하나님께 코드를 맞추어야 합니다. 신약시대에 부르심을 받은 왕 같은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지성소의 원칙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지성소의 원칙에 대한 말씀을 함께 듣겠습니다. 지성소의 원칙에 따라 자기를 경영하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결단하십시오.
첫 번째 감추인 만나의 영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 살 때 하나님께서 양식은 무엇을 주셨습니까? 신명기 8장 3절에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로 먹이셨다고 합니다. 매일 같이 먹을 만나를 공급해 주신 일을 통해 오늘 하나님이 주신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양식의 공급자였음을 교훈입니다.이는 대자(對自)관계입니다.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질 것이냐를 말합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써 백성들에게 와서 하나님의 얼굴이 되고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면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약속입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양식인데 오늘날로 이해하면 경제와 돈을 뜻합니다. 제사장은 눈에 보이는 경제, 쌓아 놓은 돈, 월급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자임을 가르치기 위해 만나를 언약궤 안에 두게 하셨습니다. 감추인 만나 영성은 우리가 먹을 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지성소를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부터의 공급을 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도 교회와 신앙생활을 통해 얼마나 많은 양식, 어떤 질 좋은 양식을 공급받을 것이냐를 내가 선택합니다. 아무나 볼 수 있도록 노출된 것이 아니라 지성소의 언약궤 안에 감춰져 있어 대제사장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분 앞에서 기도하는 시간, 남모르는 희열과 기쁨 그리고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시간이나 공간이 없는 사람은 지성소가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위로부터 공급해 주시는 것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힘이 있어야 상처주고 들이 받는 사람을 받아 줄 수 있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섬길 수 있는 힘은 이 은밀한 공간, 은밀한 시간에 하나님이 공급해 주십니다. 쉽게 말하면 개인의 영성시간, 경건의 시간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땅에 있는 창고에 쌓는 것이 아닌 하늘 창고에 쌓는 것이 내 재산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재물을 쌓지 말고 하늘 창고에 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은 완전한 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건물과 창고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 창고는 안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48절-51절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공급받아 먹었지만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 온 떡인 예수님을 양식으로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떡이고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는 예수님만 나의 양식이요. 하나님만 나의 공급자이심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제사장에서 주신 공급이며 양식입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가 아닌 주님의 위로와 격려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양식은 한 번에 주시지 않고 매일 아침 취하게 하셨습니다.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 그 공급하시는 양식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야 합니다. 지성소를 사는 첫 번쩨 원칙은 제사장은 어떤 공급으로 사느냐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만나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과 약속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원칙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영성입니다.
이것은 대인(對人)관계의 원칙입니다. 민수기 16장에 고라 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습니다, “너희들만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도 같이 출발했는데 왜 너희들만 잘난 체하느냐?” 고 당을 짓고 거역하였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이보다 더 무서운 심판은 없었습니다. 삼중 심판을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토록 대노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열쇠입니다. 하나님께서 혼자 하려고 하셨으면 에덴동산에서 모두 끝을 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께서 홀로 하려고 생각하셨으면 십자가에서 이미 끝장을 내셔야 합니다. 하지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사고 친 이 여자와 이 아담의 후손들을 통해 내가 뱀,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원 복음이라고 하는데 구속사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시지 않고 천사를 보내서 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이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계시와 감동을 주시고 비전을 주셔서 일을 하십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대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은 걷어 차버리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구속사는 중단되고 맙니다.
고라 자손들이 반역했을 때 12지파 대표의 지팡이를 가져오게 해서 지성소에 두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 열매가 맺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라 일당의 반역은 왜 아론만 제사장직을 맡고 또 그것을 세습할 특권을 가졌습니까?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지위를 가질 수 있지 않느냐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반역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나무 지팡이에 피어난 살구 꽃과 열매을 통하여 “내가 아론과 모세에게 리더십을 줬다. 너희는 그의 인도와 권위에 복종하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면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보면서 대제사장은 무엇을 결단해야 할까요? 사람 위에 세워진 영적 질서에 “네가 복종하겠느냐”를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지성소 원칙으로 산다는 개념은 어떤 사람들처럼 “눈을 감으면 무엇이 보인다, 기도만 하면 나는 응답을 받는다” 그런 신비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형상이지 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세우신 목자의 권위 그리고 리더십을 인정 하겠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 목사가 너보다 못해도 그 권위에 복종할 수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또한 교회 안에 여러 부서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리더들을 사람들이 따라 가야 합니다. 그 리더가 얼마나 잘하느냐 못하느냐로 평가를 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영적 질서가 무너집니다. 그런 일로 인해 가정이 깨지고, 교회가 깨지고, 주님의 몸이 깨지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관계는 윗사람과의 관계, 나와 친구와의 관계, 상호관계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순응해야 합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영성은 나의 스승, 멘토, 목자를 철저하게 따르고 존중하고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또한 옆 사람과의 관계 즉 동료와의 관계 그리고 나와 친구와의 관계도 있습니다. 이 관계는 지체와 동역자를 적으로 대하지 말고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내가 도와 주어야 할 사람, 나의 제자, 나의 양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영성을 누군가에게 되물림 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안에 위로, 옆으로, 밑으로 섬겨야 합니다. 현대적인 용어로 전방위 리더십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위로 목사가 있고, 내 곁에 교통하는 동료가 있습니다, 내 밑으로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영성을 흘려 보내고 섬겨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만 잘 났다고 남을 들이 받고, 부딪히고, 비판하고, 공격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공격하고 대적하는 사람입니다. 지성소에 있는 사람은 동역자를 섬기고 살피는 일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지성소를 사는 두 번째 원칙은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제사장 제도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질서를 보고 따르며 동역하시기 바0랍니다.
세 번째 원칙은 돌비 영성입니다.
돌비는 大神관계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일하고 사느냐에 대한 원칙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두개의 돌비가 있습니다. 한쪽 비석은 예배의 원칙입니다. 다른 한쪽 비석은 사람을 섬기는 원칙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내 멋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준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의 정신입니다. 내 마음, 내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섬기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내가 사기 치지 않고, 도둑질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존대하고 섬기는 마음,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그를 높이겠다는 정신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는 말은 사람을 만나고 대할 때 이용가치로 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함께 사는 배우자라 할지라도 존대하는 마음으로 공격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능력을 북돋아 주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그리고 자식을 부모가 대하고, 교회학교와 목장에서 사람들을 대할 때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하듯 존대하는 마음으로 그 영혼들을 섬기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경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은 자신의 몸을 돌보듯 동일하게 존대하라 하십니다. 하나님 섬김의 원칙은 최선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예배는 형식이 아닌 마음이 먼저입니다. 지고지선의 자세로 예배를 준비하고 드려야 합니다. 사람을 섬기는 법도 원칙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큼 아끼고 보살펴야 합니다. 이 두 말씀이 온 율법과 선지자들의 주된 요점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예배 사상 -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유일신 신앙으로 하나님 형상화 금지, 하나님은 이용의 대상이 아닌 예배의 대상으로,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안식일을 구별해야 합니다. 부모님을 하나님의 대행자로 공경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도 약속하셨습니다. 이웃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사람은 존대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입니다.
언약으로서의 지성소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지성소를 사는 사람은 원칙을 지키고 나에게 주어진 직임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성가대원이라면 겸손한 마음으로 연습하는 시간에 준비된 마음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입니다.
교사도 지성소원칙으로 영혼을 섬겨야 합니다. 아이들을 대할 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세로 그 시간만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 아이들을 품고 기도하고 정성되게 준비하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의 어느 곳에서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정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정신입니다. 이러한 예배정신이 있는 지성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정신으로 하나님 앞에 작정하고 나오십시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얼굴이 됩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람이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예배 정신으로 나의 자리에서 섬기면 빛이 납니다.
언약궤 앞에 서십시오. 언약궤는 계약의 궤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장막 또는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모신 거룩한 상자를 말합니다.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계약판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 언약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직사각형 상자입니다. 길이가 1.3센티미터 너비가 약 79센티미터입니다. 안과 밖에 금의 연판으로 덮고 바깥 주위에는 금으로 된 장식테를 붙였습니다. 그 밑 네 모서리에는 금고리가 달려 있고 운반용 아카시아 나무에 금을 씌운 막대 2개를 가러 질렀습니다. 상자 위쪽에는 금판으로 씌운 뚜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곳에서 자기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과 만나는 장소로 삼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궤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이 신실하다는 것을 십자가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문제가 있지만 후사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밀어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 앞에 신실하게 서야 합니다.
요셉이 죽은 지 400년이 지나 뼈와 가죽만 남은 미라를 그 후손들이 운반을 합니다. 창세기 50장 24절-25절에 요셉이 임종할 때 자녀들에게 “너희가 이 땅을 떠나 약속의 땅에 갈 때 내 유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광야 40년의 시간에도 가나안 정복 전쟁 7년 동안에도 유골을 가지고 다니다가 결국 약속의 땅에 묻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500년, 1000년이 지나도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내가 지성소의 수준의 삶을 산다는 말은 언약이 살아 있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듯 우리도 언약에[ 신실해야 합니다. 언약궤 앞에 서 있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세 가지 영성이 있는지를 점검하길 원하십니다.
감추어진 만나 영성-땅에 공급만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양식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론의 싹난 지팡이 영성-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대로 목자에게 절대 복장하며 삽니까? 돌비 영성-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사람을 존대하는 삶을 삽니까?
기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시고 지성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공급하심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지성소의 3가지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삶에서 행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도 양보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고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남은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사
신 8:2-3 / 김삼환 목사
교회는 우리에게 영적 양식과 신령한 은혜를 우리에게 공급하여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또 이번에 새벽집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마음의 양식, 마음의 은혜, 속사람을 잘되게 하며 우리 영혼을 복 주시는 은혜를 우리는 새벽을 통하여 지금까지 받아왔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젊었을 때, 청소년 때를 지나보면 세수를 안해도 얼굴이 깨끗하고, 화장을 안해도 맑고 아주 살결이 곱고, 또 홍안소년이라고 하듯이 얼굴이 빛이 나고 그렇지 않았습니까? 왜 그런가 하면 영양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화장을 할 때 자꾸 영양보충을 하는 이유가 얼굴에 영양이 없어지면 점점 주름도 지고 거칠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도 한동안 머리가 많이 빠졌습니다. 머리를 감고 나면 수도 밑에 물 내려 가는 곳이 막히는 것입니다. 이리 머리가 빠져서는 머리가 남겠나 또 자고 일어나 보면 베개에도 머리카락이 몇 백개가 쌓이는 것입니다. 한 십 여 년 그랬습니다. 그런데 누가 저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사님 머리에 영양을 좀 주어보세요." 그러면서 하나 뭘 주셨습니다. 국산인데 발랐더니 머리가 안 빠졌습니다. 그것이 영양을 공급한다라는 것입니다.
영양분이라고 하는 것, 우리의 삶의 에너지라고 하는 것, 칼로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사람의 뇌도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대체로 사람의 뇌는 다른 세포와 같이 뇌세포도 자꾸 줄어든다는, 그래서 기억력이 없어진다는 학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뇌도 영양만 계속 공급해 주면 뇌세포도 살아난다고 합니다. 기억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0세, 90세가 되어도 기억력이 쟁쟁하여 일을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40대가 되어서 빨리 기억력이 없어지고 자꾸 잊어버리는 분들은 뇌에 맞는 영양을 공급해 주는 것이 참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도 89세가 되어도 아프리카 람바레네에서 병원도 잘 운영하고 선교사역도 감당했습니다. 유명한 독일의 아데나워 수상도 87세에 수상을 훌륭하게 감당했습니다. 나라를 감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기억력이 좋고 정신적으로 건강하면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버나드쇼는 92세에 희곡을 썼고, 우리가 잘 아는 괴테는 83세에 '파우스트'라는 세계적 명작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건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건강도 영양을 섭취해야 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좋게 영양분을 섭취하면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잘 먹는 것, 못 먹는 것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신령한 영양, 영적인 영양을 채우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때가 묻으면 씻을 곳이 없습니다. 육체의 때는 씻을 곳이 있지만 마음을 누가 씻어줍니까? 마음이 병들면 누가 치료해 줍니까? 우리 영혼을 누가 치료해 주십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때 우리 영혼에 큰 기쁨과 자유함이 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잘 살아야,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내 안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안에 천국이 없는데 누구를 만나 행복하고, 내 안에 기쁨이 없는데 어디 가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 안의 기쁨, 우리 안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것이고,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안의 관리를 경홀히 여기고 안의 영양보충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사회가, 국가가, 민족이 어려워지는 모든 이유를 안에서 찾아야 되는데 대체로 밖에서 찾는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인류역사에 국가의 흥망도 안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밖에서 무슨 전쟁이 일어나고 외세가 침략을 해서 군사적으로 나라가 멸망을 하는 것이 거의 아니라고 합니다. 유명한 토인비 박사도 말하기를 인류역사에 21개국을 조사를 해 보았는데 19개국이 내부로 말미암아 침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앗수르가, 헬라가, 메대, 페르시아, 로마, 이집트가 그렇습니다. 여러분, 전쟁이 일어나고 밖에서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안이 강건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문제가 있습니다. 안에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음이 썩으면 윤리 도덕이 사라지게 되고 퇴폐 문화가 흥왕하게 되고 부정부패가 늘어나게 되고, 마음이 병들면 다 구석구석이 병드는 것입니다. 안을 치료해야, 안을 회복해야 나라가 강건해지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우리의 신라, 백제, 고구려가 무슨 전쟁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백제가 전쟁으로 망한 것이 아닙니다. 의자왕이 패역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신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이 병들면 다 병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늘 회복하고 마음을 귀히 여기고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영적으로 강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안' 때문에 나오는 것이지 '밖'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의 얼굴이 빛나고 감사생활 하는 것이 더 잘 살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잘 되어서 늘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여러가지 어려운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곳은 건조한 땅, 물도 없고 곡식도 없고 그늘도 없고 아주 메마른 땅, 과일도 없고 덥고 힘든 땅이었습니다. 독사가 있고 전갈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인도해 주셨습니까? 저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강건하고 영적으로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이 광야로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번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왜 이런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왜 목마르게 하시고 왜 굶주리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영적 건강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때 그런 말이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늘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도 늘 어려움이 옵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좋은 일만 있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상 형통한 가정은 한 가정도 없습니다. 어떤 나라, 어느 가정, 어느 기업이든 끝까지 잘 되는 사람,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일본도 지금 15년 만에 제일 어렵다고 합니다. 작년에는 3만 개의 기업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일본이라고 항상 잘 되겠습니다? 미국도 여러 가지로 굉장히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미국이라고 항상 잘 되겠습니다? 그런 나라, 그런 가정, 그런 삶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려움이 올 때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대체로 많은 분들을 보면 '왜 이 어려움이 우리집에 오나? 왜 내가 이런 어려운 일을 만나야 되는가? 왜 이런 일이 내게 닥치는가?'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어려움이 있나?'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부모나 형제나 아내나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당신 때문이라고, 내가 저 사람 만나서 이렇게 고생한다고.' 이것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또 낙심합니다. 타락합니다. 성격이 강팍해집니다. 술 먹고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고 성격이 거칠어지고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그런 분들도 너무 많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욥의 아내형도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한다고 하더니만 기도해서 잘 된게 뭐가 있냐?'고 합니다. '교회에 나가더니만 나가서 잘 된게 뭐 있냐'고, '하나님 원망하고 죽으라.'고. 이런 악한 욥의 아내같은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생각해도 안되고 이렇게 말해도 안되고 이런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서도 안됩니다. 언제나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왜 광야로 왔느냐? 광야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가 왜 어렵냐? 이 어려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됩니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안식주리라♬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 믿음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물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떡이라는 말은 물질을 말합니다. 사람은 돈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닙니다. 모든 동물은 물질 없으면 죽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죽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는 한 언제나 살게 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길이 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렵다고 해서 자살하고 죽고 성격 버리고 가정 파탄 일으키고. '이게 끝이다!....' 그게 아닙니다. 중국말도 위기라는 말은 한문에 굉장한 뜻이 있습니다. 위기라는 말이 위험한 일도 위기지만 위험한 일이 기회도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위·기'를 같이 넣어 가지고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험이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시험이 잘되면 기회가 됩니다. 성경에도 요셉이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 더 잘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당한 어려움을 통하여 잘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려울 때에 하나님 앞에 그 기회가 하나님을 찾는 기회, 회개하는 기회, 반성하는 기회, 은혜받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사이 실직한 분들이 많습니다. 실직하는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40대에 일해서 뭐하겠냐?"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25년 동안 직장생활을 앞도 뒤도 모르고 너무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하나님을 가까이할 기회가 없었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1년 동안 영적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한, 나에게 마음의 영양분을 주시기 위한 기회로구나!' 성경 못 보던 분 1년 동안 성경을 읽기도 하고, 다 모두 세상적으로 좋게 살아가는 분들이지만 적어도 이 기회만큼은 마음을 뜨겁게 해야 된다는, 우리의 영적 건강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된다는, 예배 분위기가 적어도 살아있어야 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7개 성가대가 다 잘합니다. 그러나 잘해도 그게 그것입니다.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은혜로운가입니다. 설교할 때 '아멘' 소리가 얼마나 크게 나오는가가 중요하지 찬양은 다 비슷합니다. 그러나 성가대 자리에 앉아서 '아멘'한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저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도 10년동안 '아멘'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은혜가 되어야 '아멘'이 나오지, '아멘'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박수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영적 건강이 적어도 입으로 '아멘' 할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앞날은 어떤 다른 건강보다 영적 건강이 좌우한다고 믿습니다.
어려움도 문제지만, 본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고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잘되어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되는 사람, 은금(銀金)이 증식되고 재산이 늘어나고 모든 것이 풍부하게 될 때에도 너희들은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 되어서, 어려워서, 낙심해서 문제가 되는가 하면 잘 된 사람이, 교만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내가 벌어서 내 마음대로 쓴다는 생각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치하고 흥청대고 연락하고 죄짓고 온갖 불의한 일을 행하면서 '내가 벌어서 내 좋은 일 하는데 무슨 상관이냐?'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전자로 말미암아 상처받는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무 있고 형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관리하지 못하는 계층도 너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8장 12절서부터 1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내 우양이 번성하며 내 은금이 증식되며 내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내 마음이 교만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 까 하노라" 어느 것도 내가 잘나서 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생명이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생명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 오고 싶어 태어난 생명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이요 하나님이 살게 하신 생명입니다. 여러분의 몸 하나 지키기도 어려운데 여러분의 가정 다 지킨 이가 여러분입니까? 여러분이 정말 여러분의 가정을 지키셨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교통사고를 면하고, 그 많은 질병을 무슨 힘으로 다 물리치셨습니까? 어떻게 병을 물리칠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조금 운동했다고 건강한 것입니까? 좀 잘났다고 여러분이 행복한 것입니까?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로 알면 절대로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도 버림받고 사람에게도 버림받습니다. 교만한 자의 종말은 좋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의 사회는 언제나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돈이다, 이거는 내가 잘나서 내가 번 것이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광야 생활을 지나서 불러주시고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시고 나를 정결케 하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은혜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우리 마음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분은 살아있는 마음, 영양분이 있는 마음, 행복한 마음입니다. 천국은 결코 여기 있는 것도 저기 있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영양분이 넘치는 우리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영적 영양분을 주는 신령한 식당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이 많은 성도들에게 무슨 양식을 먹여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의 종은 한 주일 내내 그 눌림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전해서 성도들을 건강하게 해야 된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웃기는 것도 웃길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웃는 영양분, 말씀을 통하여 기쁨의 영양분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웃겨도 억지로 안 웃고 버티는 분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웃기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감정적으로 무슨 이성에 전달하고 그런 웃음입니까? 그런 세속의 웃음입니까? 이건 신령한 웃음입니다. 은혜 받은 자가, 구원 받은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웃을 수 있는 웃음은 교회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실로 놀라운 신령한 영양분을 주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혼하기 직전에 와서 은혜 받고 회복된 가정이 수 천입니다. 여기에는 별의별 사기꾼 도적놈들도 나옵니다. 여기 나와서 새사람 되는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평생 도박 밖에 모르는 분도 여기 와서 고침 받고, 온갖 나쁜 짓만 골라 하는 사람이 여기 와서 새사람 되는 일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인생을 망치고 가정을 망친 분들이 여기 와서 다 일으키고 회복된 분들이 많습니다. 왜? 양식 때문입니다. 안의 양식입니다. 우리 교회는 제비족도 많이 나왔습니다. 나와서 참새가 되는 것입니다. 잘못 되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지난번 조세형이 평생을 남의 것을 훔쳐도 한번도 남의 것이란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는 얘기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이 마비된 양심, 완전히 남의 것도 모르고 나쁜 짓인 줄 모르고 행하는 이 패역한 세대를 고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저는 어제 TV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70세 된 할머니들 공갈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70세 된 할머니들이 모여서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건널목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오토바이가 하나 있으면 할머니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붙잡아놓고 '당신 건널목에 지나가면 형사구속 되는 것 모르냐?'고 협박을 합니다. 그러면 오토바이 타고 가던 분은 쩔쩔 맵니다. 할머니는 약국에 가서 바로 약 짓고 그 다음날 작전대로 바로 병원에 입원을 합니다. 할머니 옆에 있던 남자 하나가 자기 이모라고 하면서 달려들며 한 보름 입원해야 되는데 합의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500만원 정도 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100만원씩 나눠 갖는 것입니다. 이걸 영주서도 그랬고 안동서도 그랬고 여수서도 그랬고 충청도에서, 전국을 몇 달 동안 돌아다니면서 계속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가 노인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정신적으로 마음이 병들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얼마나 지금 병들어 있는 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고쳐야 됩니다. 회복해야 됩니다. 이 나라에 소망은 우리 마음을 회복할 때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문제를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심령에서 찾아야 됩니다. 60년대, 70년대에는 지금보다 20배, 30배, 100배 더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마음이 모두 좋았습니다. 예의가 있었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있었습니다. 교육이 살아 있었습니다. 가정이 살아 있었습니다. 부모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지도자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마음을 귀히 여기던 시대였습니다. 마음을 무시하고,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안의 관리를 하지 않고, 길만 닦고 그저 공부만 해야 된다고 하면서부터 우리는 잘못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잘못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적어도 대학에서 철학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고전을 많이 읽었습니다. 김동길 교수님이라든지 함석헌 선생이라든지 안병욱 교수라든지 김영섭 교수... 철학교수들의 강의에 학생들이 천 명씩 몰렸습니다. 강당이 좁아서 대강당으로 옮길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철학이 어디 있습니다? 고전이 어디 있습니다? 음란하고 퇴폐적인 것들에 빠져 있습니다. 이상(理想)이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썩었습니다. 병들었습니다. 전부 방, 방, 방입니다. PC방, 비디오방, 찜질방 전부 방만 늘어나고 술집만 늘어나고 러브호텔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원조교제'도 어른이 아이를 꾀던 것은 다 지나가고 아이들이 어른을 꾀고 있습니다. 줄줄이 애 하나가 몇 백 명씩 어른들을 이끌고 다니고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제비가 무서운 게 아닙니다. 여자들이 더 무섭습니다. 그런 여자를 꽃뱀이라 하죠. 그런 여자한테 걸리면 혼납니다. 신세를 망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회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영적 바람을 일으켜야 됩니다. 신령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나라가 사는 길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 어느 교회 수요일날 예배를 드리면서 변화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분이 믿는 집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머니가 잘 믿었지만 이 안에 영적 변화가 주어지지 아니한 웨슬레는 역시 근심 걱정을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회개하고 한 영혼이 거듭나면서 옥스포드에 신령한 바람이 불게 되었습니다. 그당시 영국은 도덕적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황폐화되어 있었습니다. 세 명이 걸어가면 두 명이 사생아라 그럴 정도로 온 나라가 타락하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심히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 때 영적 운동을 일으켜 나라를 살리고 경제도 살리고 정치도 살리고 대학도 살리고 교육도 살리고 20세기의 최고의 나라를 건설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덴마크도 100년 지나서 그룬드빅 목사가 태어났습니다. 덴마크도 전쟁이 일어나서 좋은 것은 다 빼앗기고 어려운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전 국토는 황폐해졌습니다. 기름진 땅은 다 잃어버리고 경제는 엉망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의 연합국에게 패배를 당해 지배받고 있던 때에 그룬드빅 목사가 일어나 영적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의 영적 앞날이 이와 같은 영적 운동에 달려 있습니다. 60년대, 70년대 일어나던 새마을 운동과 가나안 농군학교. 제가 가나안 농군학교 옆에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장관, 높은 분들, 회사 간부들, 육해공군 장군들 다 거기 와서 훈련받았습니다. 정신적인, 도덕적인, 영적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우리가 찾아갈 때에 이 나라는 든든한 나라가 되고 살기좋은 나라가 되고 저력있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나라 경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이 놀라운 창조의 힘은 그때 우리 정신적인 힘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느 세대도 정신적으로 믿을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교회도 너무 물질주의에 빠져 있고 현실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불을 일으켜서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이 교회로부터 있어야 됩니다. 할렐루야! 교만하면 안됩니다. 겸손해야 됩니다.
고구려에 평강공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죠? 이 평강공주가 온달이에게 시집을 갑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왕이 좋은 곳에 혼사(婚事)가 있는데도 기어이 자기가 '나는 온달이한테 가겠다'고 해서 집을 나와 산속 외딴 오두막집에 있는 온달이에게 갔습니다. 이 온달이가 사실은 거지 같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착했다고 합니다. 이 온달이에게 공부를 시킵니다. 무예를 시킵니다. 그래서 전국 무술대회에 나가서 1등하고 나중에 쳐들어오는 중국으로부터 고구려를 건져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중에 온달이하고 잘 산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교만하면 안돼요. 항상 겸손하게. 할렐루야! 저희 교회도 강단도 이전에 이렇게 크게 했다가 지금 다 낮추고 색깔도 바꾼 이유가 하나입니다. 큰 교회라고 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는 오히려 제일 작을 지 모릅니다. 제일 보잘 것 없는 사람일 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 마음에 성령의 불을 지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나라의 앞날을 위해 우리 모든 성도들이 앞장서서 전개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친절 운동입니다. 부드러운 인상이 가져야 합니다. 좀 웃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긴장되어 있습니다. 얼굴에 웃음이 없습니다. 교인들마저도 기쁨이 없습니다. 천국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밝은 모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 어렵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성소병원을 운영하면서 친절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을 해도 잘 안 되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아무리 시설이 잘 되어도 그 간호원들이 친절해야 병원이 잘 되는데 이걸 안 하는 것입니다. 신경질 내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환자들하고 싸우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친절운동을 3,4년을 했습니다. 지금은 가보면 웃으면서 '어서 오세요'하고 친절하게 인사를 합니다. 병원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돈을 투자해서 병원이 되는 게 아닙니다. 친절해야 됩니다. 친절! 그 나라가 잘 살고 관광자원이 많아서 사람이 많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라크같은 나라는 바벨론 문명권이지만 누가 갑니까? 북한 땅에 관광 자원이 많지만 누가 갑니까? 사람도, 집안도 그렇습니다. 잘 산다고 지위가 높다고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부드러워야 됩니다. 친절해야 그 집에 손님이 많은 것입니다. 식당 주인이 강팍하고 손님들한테 인상을 쓰면 누가 그 식당에 갑니까? "어서오세요. 국 더드세요. 돈 없으면 다음에 내세요." 이렇게 해 보십시오. 식당이 저절로 됩니다. 좀 친절해 보십시오. 우리 교인들만이라도 그런 마음으로 하기를 바랍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 사회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질서입니다. 모든 법이나 사회가 질서가 있어야 됩니다. 줄을 잘서야 됩니다. 기다려야 됩니다.
세 번째는 근면입니다. 일하는 것을 좋아해야 됩니다. 노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세계에 없는 다방이 우리 나라에는 너무 많습니다. 수 십만, 수 백만의 사람이 많은 시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살 생각 안하고 종일 거기 앉아 누구 꼬여 가지고 사기할 생각만 하고 남을 속여 해치며 잘 살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회복되어야 이런 것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대화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대화를 잘 안 합니다. 모이면 욕이나 하고, 중상모략 하고, 시기 질투나 합니다. 너무 욕이 많고 싸움이 많고 투쟁이 많습니다. 조금만 뭐하면 빨간 것 두르고 외칩니다. "결사, 결사!!" 전부 두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 교인들도 전국의 노조에 관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너무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 부드러운 대화로 이야기를 하며, 부드럽게 사십시다."
다섯 번째는 우린 너무 감정적입니다.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이성적이어야 되고 합리적이어야 됩니다. 순리적이어야 됩니다. 우리 아시아를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 나라와 붙어있는 나라가 일본하고 중국입니다. 중국이 절대로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일본도 굉장히 이성적입니다. 절대로 흥분을 안 합니다. 냉정하게 봅니다. 사고가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도 울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순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푸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비가 오면 정부가 무슨 비를 오게 한 것처럼 막 달려듭니다. 이거 뭐 눈이 오면 눈 왔다고 달려들고 비오면 비왔다고... 이건 하늘에 하나님 보고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너무 감정적입니다. 휘발유를 갖다 놓은 나라처럼 확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너무 한탕주의입니다. 성실성과 진실성과 근면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박문화가 자꾸 발전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이웃을 너무 모릅니다. 나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는 쉽게 말하면 이웃입니다. 같이 더불어야 됩니다. 함께 살아야 됩니다. 다같이 좋아하고 다같이 잘되는 일을 좋아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국에 공산주의가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것이 믿는 자들이 자꾸 본을 보여서 나눠주고 사랑해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일로 그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고 발전하는 줄로 믿습니다.
여덟 번째, 우리 문제는 너무 퇴폐하였습니다. 술집, 러브호텔, 사우나, 원조교제 이런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 다음에는 비전이 없습니다. 비전을 가져야 됩니다. 꿈이 없습니다. 소망, 꿈을 가져야 됩니다. 어느 것 하나를 하여도 어린아이로부터 노인까지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할렐루야!
♪나의 희망이 하늘에 있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 모두 헝클어지고 상처받고 일그러진 마음들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신령한 영양분이 있는 음식을 먹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요사이는 음식을 먹는 분들도 비타민 공급을 더 받아야 된다고 합니다. 하도 공해가 많아서 그전 칼로리 가지고는 안된다고 합니다. 음식도 농약 전부 친 거 먹지요, 물도 오염된 거 마시지요 공기도 전부 오염된 것 마시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그 음식이면 넉넉했는데 지금은 비타민C나 비타민E 같은 걸 먹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건강해 진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가 하도 어렵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그전보다 더 기도하고 더 은혜 받고 더 능력 받아야 합니다. 더 기도하고 더 은혜 받고 더 능력받아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은총
신 8:2-10 / 손상율 목사
인간이 말하는 행복의 지수는 그 사람들의 내면적 기준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됩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말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남이 모르는 행복을 구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옛날 애굽에서 올라 온 이스라엘의 가나안 여행은 그야말로 천신만고 하는 괴로운 날 들이었습니다. 특히 지도자 모세의 경우 백성들이 쏟아내는 온갖 불평과 원망을 받으며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힘든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의 소원인 가나안 입국을 목전에 두고 모압 땅에 있는 비스가 산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어떻게 보면 한 많은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번도 자기가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고, 하나님께 대하여 야속하다거나 불만 섞인 감정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야말로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하였습니다(신34:10-12). 그가 죽기 직전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의 예언을 할 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신33:29).
모세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에 온갖 애환이 깃들고 고달프기는 이를 데 없었으나 따지고 보면 참으로 행복한 걸음이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2002년 한 해를 마감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와 있습니다 1년 52주일을 돌이켜 보면 아쉬움도 있지만 큰 보람과 뿌듯한 긍지를 가질만한 일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밟은 발걸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임마누엘의 은총이 컸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계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길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참 행복자의 걸음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사십 년 광야 여행에 대한 모세의 회고담으로써 「임마누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Ⅰ. 만나의 은총입니다.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는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 먹고 입는 문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먹는 문제와 입는 문제는 일차적인 문제요, 중요한 과제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정치, 사회, 교육, 문화, 예술 등 삶의 질을 높이고 윤택하게 해주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지만 이런 것도 다 먹고 입고 사는 의식주(衣食住) 문제가 선결 된 후에 생각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런 문제는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 해결되면 일단 살아가는데는 안심하여도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딤전6:8).
(2) 하나님의 도우심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山上寶訓)을 강론하시면서 먹고 입고 사는 문제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더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중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실 때 먹고 입고 사는 문제는 보장하셨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 예로 공중의 새들에게 먹을 것을 염려하지 않게 하셨고, 들에 핀 꽃들에게도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마6:26-30).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가 요구하시는 고상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의식주 문제를 보장해 주셨다는 뜻입니다(마6:33). 본문 말씀 3-4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기간에 매일 아침 하늘로부터 내리는 떡을 먹고살았던 것이나 또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게 되었던 것이 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요 도우시는 은총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3) 생명의 떡
여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대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창조 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되면 사람에게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고 공급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하게 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였습니다(요6:51). 결국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Ⅱ. 생수의 은총입니다.
이스라엘이 사십 년 간 여행하였던 그 광야 길은 대부분 사막이어서 물이 흐르는 강이나 시내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1) 사막 같은 세상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생이 사는 세상을 물이 없는 광야나 사막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13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7:5-6에는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고 하였습니다.
(2) 목마른 인간의 모습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행길에 가장 큰 어려움은 마실 물을 얻지 못하고 목이 말라 당하는 고통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얼마 못 가서 수르 광야를 통과할 무렵 마라의 쓴 물로 인한 소동을 치렀습니다(출15:22-24). 또 그들이 신 광야의 르비딤에서도 장막을 친 곳에 물이 없어서 아우성을 질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로 반석을 치게 하였고 거기서 샘물이 솟아나는 신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출17:1-7). 시편 42:1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영혼의 갈증을 가지는 사람들은 목마른 인생을 살면서도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립니다. 아모스 8:11에는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였습니다.
(3)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길에 반석에서 솟아난 샘물을 마신 것에 대하여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생수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3-4에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였습니다(요7:37-38).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야곱의 우물에서 길어다 먹는 물을 가지고 그 마음의 갈증을 면하지 못하고 살았으나 생수의 근원 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인생이 해갈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되었습니다(요4:9-28).
Ⅲ. 구리뱀의 은총입니다.
성도의 가는 길에는 형통함과 곤고함이 교차되어 있습니다(전7:14). 은혜롭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괴로운 일이나 역경에 봉착하게 되면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곤 합니다. 민수기 21:4-9에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을 지날 무렵 길을 헤매게 되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사막에 있는 불뱀들이 나와서 백성들을 물어 죽였습니다. 이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게 하였습니다. 장대 위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불뱀의 독에서 풀려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이적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베푸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1) 광야의 불뱀들
이스라엘이 여행하던 시내 광야에는 물이 귀하고 풀과 나무 같은 식물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여우나 이리 뱀과 전갈 같은 사람을 해치는 동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뱀은 바위틈이나 모래 속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날쎄게 공격하고 나오기 때문에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뱀에게 물리면 그 즉시 잇발자국으로 독이 온 몸에 퍼지므로 생명을 잃게됩니다.
성경은 뱀이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3:1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3에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습니다.
(2) 목이 곧은 백성
민수기 21:5에 보면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21:6에는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하였습니다.
광야 여행 중 일어난 불뱀의 사건은 백성들의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원망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 그 광야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하늘의 양식 만나와 반석에서 솟아나게 하는 생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양식들을 "이 박한 식물"이라고 혹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출33:3).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0:10에는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3) 살려주는 구리 뱀
민수기 21:9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류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시기도 하지만 죽음 아래 멸망 받을 죄인들을 살려주시는 구원의 능력도 발휘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뱀에게 물려서 죽게 된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구리뱀을 만들어서 높이 달게 하였습니다. 뱀에게 물린 자가 그것을 쳐다보기만 해도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3:14-15).
Ⅳ.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은총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 길로 들어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 앞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나서 그 길을 비춰주며 백성을 보호하게 하였습니다(출13:22).
(1) 더위와 추위와 어두움의 광야
광야로 행진하는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자연의 악조건과 싸워야 하였습니다.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지만, 밤낮의 일교 차이가 극심한 사막에서 낮에는 태양열의 더위에 숨이 막힐 지경이고,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 추위에 떨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나타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낮에는 구름이 차일처럼 펼쳐져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밤에는 불기둥의 빛과 열이 백성을 보호하게 하였습니다(민10:34).
(2) 갈 길을 인도하시는 계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갈 길을 알지 못하는 그 백성에게 나아가는 행진의 노정을 지시하는 인도자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광야 길을 회고하면서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볼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신1:33). 출애굽기 40:36-38에 보면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나아가는 행보에 언제나 함께 하시고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평생을 두고 그 걸음마다 밝게 조명하시며 길을 인도하여 주셨습니다(히11:8-16). 옛날이나 지금이나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고 오직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 지시하시는 계시의 싸인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애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3) 임마누엘의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을 주도했던 모세가 그 여행을 마치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고 한 것은 그 걸음에 여호와 하나님이 같이 하셨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 고달픈 광야 길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로 보호하셨고 고비마다 시험을 극복하며 더 큰 축복의 체험으로 다가서게 하여 주셨습니다.
원래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사7:14).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광야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임마누엘의 은총을 입혀 주셔서 성공적인 여행을 하게 하십니다. 성경은 그 임마누엘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요(요6:48-50), 그 뱃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의 샘이며(요7:38), 죄와 죽음의 독으로 멸망 받을 인생이 쳐다만 보면 살게 되는 구세주입니다(요3:16). 그 뿐아니라 인생의 행보에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 되어 항상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승리의 길을 걷게 하시는 분입니다.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신 8:1-2 / 문성욱 목사
서구사회의 결혼 풍습 중에 시집가는 딸에게 엄마가 진주를 주는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이 진주를 흔히 '얼어붙은 눈물'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딸이 시집가서 흘려야 할 많은 눈물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런데 많고 많은 보석 중에 왜 진주를 택했을까요? 그것은 진주의 생성과정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주는 '아비큘리데(Aviculidae)'라고 불리우는 특별한 조개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이 조개 속에 모래알이 들어오면 조개는 '나카(Nacre)'라고 불리우는 물질을 만들어 모래알을 싸 바르기 시작합니다. 나카가 많이 덮일수록 진주는 커지고 값도 올라갑니다. 그러나 조개속에 들어온 모래알이 모두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래알이 조개 안으로 들어오면 굴에게 두가지 선택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개 안으로 들어온 모래알을 무시하고 그냥 놓아 둘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수개월, 수년에 걸친 고생은 하지 않아 편안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그 모래알 때문에 이 조개는 병들고 죽어 버리게 됩니다. 반면에 조개가 처음에는 상당히 고통스럽지만 나카를 생산하여 모래알을 계속해서 둘러싸면 크고 아름다운 진주가 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도 크고 작은 모래알들이 계속 굴러 들어옵니다. 지나온 우리 삶을 돌아보면 그 가운데에 질병의 모래알, 부도라는 모래알, 실직이라는 모래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끊이지 않고 찌르는 모래알 뒤에는 아름다운 진주가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래알을 통해서 우리들을 아름답고 귀한 진주로 만들어 가십니다.
올해는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4년이 되는 해입니다. 대한민국은 크게 두 세대로 나뉩니다. 6.25를 경험한 전쟁 세대와 6.25를 경험하지 못한 전후 세대입니다. 전후 세대는 현실을 바로 보기보다는 미래만 꿈꾸고, 전쟁 세대는 과거의 아픔 때문에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다행히,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전쟁은 안 된다’는 데에는 모두가 일치된 입장을 보입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 두 세대는 소통해야 합니다. 과거는 오래된 미래라고 했습니다. 과거 역사를 계승할 때, 미래가 열립니다.
북한은 6.25가 북침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6.25는 명명백백한 남침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쳐들어왔습니다. 겉으로는 평화협상을 제의해놓고서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그때 한국은 비상경계령 해제로 국군의 3분의 1이 외출 중이었습니다. 무기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는 북침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북한 공산당은 지금도 적반하장으로 북침이라고 계속 선전합니다. 북한 동포는 사랑하되, 북한 공산당은 경계해야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 한반도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6.25전쟁이 일어나던 그 때, 대한민국은 북한 병력의 2분의 1도 안 되었습니다. 국방경비대가 막 갖춰지기 시작할 때였고, 주한미군은 이미 1년 전에 철수한 상태였습니다. 소련 때문에 유엔연합군의 참전도 불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셨습니다. 즉각적으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연합군이 파병되었습니다. 외교력이 강하지도 않던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6.25는 동족간의 전쟁이었습니다. 그 때 그 일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런 전쟁의 참상 때문입니다. 전쟁은 동족끼리 총을 겨누게 합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총을 겨눕니다. 한 피 받은 형제가 이념에 따라 갈라섭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이 참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아이들은 전쟁을 인터넷 게임 정도로 생각합니다. 전후 세대는 ‘설마 전쟁이 나겠어’라고 착각합니다. 기성세대는 사는 것에 바빠서 그 때 그 일을 잊습니다.
하나님은 “수치와 고난의 역사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32:7절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역사를 기억할 때, 동족상잔의 참상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전쟁은 분명 비극이고 아픔이며 슬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전쟁일지라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는 분이십니다.(롬 8:28) 6.25는 이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의지하던 각종 우상과 더러운 영들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이라는 고난을 통해서 이 민족에게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는 복음에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휴전 후에 한국 교회는 1980년도 초까지 계속해서 인구 성장을 앞지르는 교회 성장이 거듭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6.25 사변 때 나라가 공산화될 뻔했습니다. 6.25 사변 전에는 남한은 북한보다 너무나 군사력이 약했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이 쳐들어오자,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3개월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이 점령을 당했습니다. 만약에 유엔군이 조금만 늦게 참전했더라면 온 나라가 완전히 공산화됨으로 교회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도우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국인들, 특히 한국교인들은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한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이 정도로 잘 살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줄 알고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감사의 소리보다 불평의 소리가 더 높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어 가실까봐 두려운 마음이 앞섭니다.
6.25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수치와 고난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서,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가야 하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광야와 같은 길을 우리 민족에게 걷게 하셨을까요? 우리로 더 겸손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한국을 세계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로 그냥 두시는 이유는 북한을 한국교회의 육체의 가시로 두셔서 더 기도하게 하시고 더 영적으로 강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이루도록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도왔던 나라 때문에 어려움을 극복했던 것처럼 우리도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게,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기쁨과 자랑이 되는 이 나라 이민족,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깨어진 사랑
신 8:2 / 조용기 목사
오늘 여러분과 함께 저는 “깨어진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물건은 깨어지면 못씁니다. 내가 어릴 때는 어머니 따라 부엌에 가서 불 때는데도 도와드리고 불도 쬐고 했는데 항상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그릇들 만지지 말라. 왜요? 얼마나 비싸다구. 네가 떨어뜨리면 깨어지잖아. 그래서 어머니가 계시면 항상 그릇에 손을 안 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릇은 깨어지면 못쓰게 되지만 사람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람은 깨어지지 아니하면 쓸모가 없어요. 여러분 자신도 깨어진 사람이 아니면 남편에서 골머리가 되고 또 아내에게 골치 아픈 자가 되고 이웃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인 깨어지지 않은 모진 사람들은 이웃에게 재앙이 됩니다. 세상의 환란과 고통과 재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깨어지지 않은 강한 지도자는 수많은 슬픔을 세상에 가지고 왔습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 도죠, 김일성 같은 깨어지지 않은 사람이 우리 인류에 끼친 화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농부가 하나님께 나가서 요구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원하는 때 비를 주시고 원하는 때 빛을 주시면 상당히 수확을 많이 거두어서 십일조도 많이 드리겠으니까 좀 제가 시키는 대로 해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그래, 1년 동안 네가 시키는 대로 해주마.” 그래서 비가 필요할 때 “하나님 비를 주십시오.” 하니까 비가 농장에 내려서 곡식이 잘 자랍니다. 그리고 햇빛이 비췰 때 “햇빛을 비춰 주십시오. 열매 맺을 때 햇빛이 비취니까 참 좋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보내지 마십시오. 태풍이 불면 큰일입니다.” 바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가을에 추수하는데 곡식들이 잘 자라서 수확이 굉장히 많을까 싶어서 기분이 좋아서 거둬 보니까 곡식 알맹이가 거의 없는 쭉정이들이에요. “하나님, 비올 때 비를 주시고 햇빛 비췰 때 빛을 주셔서 곡식이 열매를 잘 맺은 줄 알았는데 왜 반 쭉정이가 되었습니까?” “자네가 한 가지 잘못한 것이 있네.” “뭡니까?” “바람 불어야 될 때 바람 달라고 말 안했기 때문에 곡식이 쭉정이가 되었다.” 여러분 곡식도 바람 불 때는 바람이 불어야 알맹이가 탄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생활에 살아가면서 바람 없는 고요한 인생을 살게끔 해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런 삶은 주시지 않겠지만 주면 열매가 없습니다 인생에... 여러분 인생에 이름을 나타내고 큰일을 이룬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 험한 길 걸어왔습니다. 시련을 많이 겪습니다. 인생 풍파를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큰 축복을 그 이후에 갖다 주는 것입니다. 알곡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햇빛뿐 아니라 적절한 바람이 필요하듯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이 우리 생애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지 아니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깨어진 사람들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이 택해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복을 준 사람은 인간의 삶속에 시련을 당하고 깨어진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굉장히 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 하며 번창케 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가서 창성하고 거부가 되고 굉장히 복 있는 사람이 되었지만 우리가 그 배후를 보면 시련을 많이 겪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고향산천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내려갔는데 큰 기근이 다가와서 일가친척들이 다 고향으로 도로 돌아가고 롯을 데리고 올데 갈데 없어서 살려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애굽에서 자기 아내가 너무 이쁜 고로 임금님에게 아내까지 뺏기고 고생을 실컷 했습니다. 또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온지 오랜 세월동안 조카를 데리고 살았는데 조카의 재산이 늘어나니까 삼촌의 목동들과 조카의 목동들이 풀밭 가지고 서로 싸우고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조카하고 헤어졌는데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멸망을 받게 되었으니까 그것 건져내려고 죽을 애를 썼습니다. 한편으로는 축복을 굉장히 받았는데 다른 면으로는 시련이 그치지 않습니다. 제일 큰 시련이 100세에 낳은 아들을 모리아산에 번제로 드려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불에 넣어서 태우는 것입니다. 시련치고 그만큼 고약한 시련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짐승을 잡아서 드리라고 해도 힘들겠는데 자기가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아들을 재물로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가서 모리아산에 가서 재단을 쌓고 장작을 펼쳐 놓고 아들에게 달라 들어서 그를 묶어서 장작 위에 얹어놓고 칼을 들어서 잡으려고 달려드니까 하늘의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외독자 아들 이삭에게 칼대지 마라. 네가 외아들이라도 아끼지 아니하고 내게 내놓은즉 이제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 줄 알겠다. 하나님은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을 알아보실 뿐 아니라 시련과 환난을 통해서 우리를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야곱은 정말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았었습니다. 형하고 늘 부딪혀서 많은 시련을 집안에서 겪다가 나중에 형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난 다음 형이 죽이려고 하매 그가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래서 외삼촌 레아와 라헬이라는 두 딸을 사랑해가지고서 라헬 동생을 아내로 삼으려고 외삼촌에게 조건을 댔습니다. “내가 7년 동안 월급 하나 안 받고 임금 없이 일을 해드릴테니까 라헬을 내 아내로 주십시오.” 외삼촌이 “좋다. 남에게 주는 것보다 네 누나의 아들에게 내 딸 맡기는 것 나도 좋게 생각한다. 좋다. 그렇게 해라.” 그래서 7년을 하루같이 세월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7년을 살았는데 하루 지낸 것 같더라. 굉장히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혼식날 삼촌보고 “삼촌, 이제 내 사랑하는 라헬을 내게 주십시오.” “데리고 가라. 오늘식에 데려가라” 아주 행복하게 하룻밤을 지내고 아침에 보고 기겁을 했습니다. 얼굴을 보니까 라헬이 아니라 레아입니다. 언니에요. 전등불이 없었으니까 그런 일 당했지 전등불 있었으면 그런 일 안 당했지요. 그러나 외삼촌에게 항의를 하니까 외삼촌이 “우리 지방에서는 언니보다 동생을 먼저 시집보내는 법이 없으므로 내가 다시 라헬을 줄 테니까 7년 동안 일 좀 더 하게.” 그래가지고 외삼촌은 자기 딸 둘을 한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20년 가까운 머슴살이를 시켜서 공짜로 부려 먹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계획도 안했는데 아내를 두 사람이나 거느리게 되었어요. 자식들 이제 많이 낳아서 돌봐야 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삼촌이 모든 것을 다 빼앗고 강제로 고향으로 못 돌아가게 하려 했으나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얼룩 덜룩이,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큰 부자가 되어서 짐승 떼를 거느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형이 400인의 군인을 거느리고 자기를 죽이러 온다는 것입니다. 20년 동안 이를 갈며 원수를 갚으려고 기다렸던 형이 동생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자마자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낭패입니다. 이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 얍복나루터에 가서 강 건너 가족들을 다 건너 보내고 자기는 강 이편에 있어서 형이 와서 식구들을 치기 시작하면 자기를 진실로 죽일 의사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는 도망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자기 혼자 숨어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밤에 얼토 당토 않게 큰 장정이 뛰어 들어와서 그의 목을 잡았어요. 그리고 건너가라! 왜 너만 살겠다 하느냐. 너 처자가 있는 곳으로 건너가라! 난 못 건너갑니다. 처자가 있어도 내가 살아야지 처자가 살기 위해서 내가 같이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몸의 덩치가 하도 큰 장정에게 부딪친지라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요번에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느낀 것은 우리 한국에서는 나도 중간쯤 키가 큰데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네피림의 자손 아낙자손 대장부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엘리베이터 타면 전부, 전부는 아니지.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내 머리가 그들 턱 밑으로 들어가요. 이렇게 쳐다봐야 돼요. 이번 집회를 주장한 프레지던트, 책임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내가 별로 안했습니다. 아침에 밥 먹으러 내게 오고 날 인도하러 오고 나하고 이야기하러 와도 내가 마음 놓고 이야기를 못하는 것은 이렇게 하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말을 하기 전에 벌써 꿀린다 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키 큰 사람이 있으니까 정신적으로 억압을 당하는데요. 감당을 못하겠어요. 그런 사람하고 씨름하라고 하면 백발백중으로 질 거에요. 그런데 야곱이 당한 것도 그것입니다. 자기보다 등치가 크고 키가 큰 대장부가 들어와서 건너가라! 나는 안 건너갑니다. 건너가라! 안 건너 갑니다. 죽어도 가족들과 같이 죽고 살아도 가족들과 같이 살아야지. 그것은 옛날 사람들 이야기고 내가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덩치 큰 사람이 도저히 야곱이 말을 안듣고 발버둥을 치므로 여기 환도뼈를 치니까 환도뼈가 어그러져가지고서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형은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데 이제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달아날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절뚝거리면서 여러분 어떻게 달아납니까? 사람은 두 다리가 튼튼해야 일도 잘하고 달아나기도 잘할 수 있는데 다리가 절뚝거리면 큰일이거든요.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목사들과 어지간한 성도들은 제가 파킨슨병에 걸려서 고생한다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 안 있으면 못 걷고 휠체어에 앉아서 밀고 다닐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제가 설교하는 중간에 사람들 앞에서 걸었습니다. 여러분이 박수치는 것처럼 그들도 일어나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십시오. 절름발이가 되었습니까? 안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므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므로 여러분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하라고 절름발이를 안 만들었습니다만 야곱은 하도 고집이 세니까 하나님이 영구히 절름발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형이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데 건강한 몸이 아니고 상대가 안 되니까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잔뜩 분을 품고 오다가 보니까 절름발이가 오는데 창 한번 던질 가치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같이 계시므로 갑자기 측은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을 주셔서 20년 동안 원한이 변해서 20년 동안 불쌍한 마음이 되었어요. 사람이 마음에 측은한 마음을 품으면 원수를 갚을 수가 없습니다. 눈물이 앞서지요. 아까 어머님의 사랑은 말할 수 없다는 찬송 부를 때 자꾸 눈물이 나서 내가 오늘 강단에 서서 눈물 흘리면 안 되겠는데 애를 써서 결심을 해서 다행히 안 울었어요. 이와 같이 형이 갑자기 마음속에 긍휼한 마음이 생겨가지고서 동생에게 오는데 동생은 땅에 일곱 번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기에 일곱 번 절했습니다. 일어났다 절하고 또 일어나고 절하고 또 일어나고... 그러니 형이 와서 목을 얼싸안고 야 이놈아, 20년 동안 안부도 한번 안전해주고 아버지 세상 뜨시고 어머니 세상 뜨셨는데 장례식도 안 와보는 고약한 놈아, 이렇게 했으면서 건강한 몸으로 못오고 절름발이가 되어서 왔느냐!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내가 너를 죽이려고 400인의 군대를 거느리고 왔으나 400인의 군대를 동원해서 너를 옹위해서 보호해서 데리고 갈 것이다. 하나님 앞에 깨어지니까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까 원수가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하나님이 복 주실 때 어지간한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깨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더구나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을 보십시오. 형들에게 질투와 시기를 당해가지고서 애굽으로 포로로 종으로 팔렸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10년 동안 종살이하고 그 다음에 보디발의 아내의 참소를 받아서 3년 동안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13년 동안에 그는 종살이, 감옥살이에 뼈가 굵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매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나중에 그를 팔아먹었던 형제들이 다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굻고 항복하고 사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깨어져야 하나님이 쓰는 것입니다. 가장 놀라운 일은 모세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어서 애굽의 바로궁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애국심이 투철해서 자기 동족을 방해하는 애굽사람을 쳐 죽이고 난 다음 이것이 들켜서 바로왕이 죽이려고 하매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쳐서 40에 도망을 쳐서 미디안의 추장인 이드로의 딸에게 결혼해가지고서 40년 광야에서 삽니다. 목동으로서 떠오르는 햇빛 그리고 폭풍우, 메마름, 아무 친구도 없는 곳에 양떼를 거느리고 풀을 찾아 이구석 저구석으로 다니는 생활을 40년 동안 해서 40살의 젊은 나이에 광야에 들어온 그가 40년 동안 머슴살이로 세월이 흘러갔으니 이제는 세상에서 잊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머리도 백발이 되고 몸도 허리가 굽어지고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고 이제는 나는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불붙는 가시넝쿨 안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백양목도 있고 좋은 나무도 있었을 것인데 가시넝쿨을 통해서 이야기 했느냐.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니까 인생이 가시와 같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가시넝쿨 아닙니까? 자기 인생이 가시넝쿨 같이 되어서 나는 버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가시넝쿨이 불에 타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오면 아무리 가시넝쿨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주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비하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나는 가시넝쿨 같은 인간입니다. 나는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 개의치 않습니다. 가시넝쿨에도 성령의 불만 임하면 천하를 밝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그런 시련을 통해서 깨어져서 하나님에게 항복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종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8장 2절로 3, 16절에 보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의 목적은 마침내 복을 주겠다. 그러나 그 중간에 깨뜨려서 낮추신다. 교만하고 오만하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이렇게 어깨 펴고 머리를 흔들어 재끼는 사람하고는 무슨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깨어지고 낮아진 사람 그리고 진실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모세는 그 단계에 도달한 40년의 세월이 걸린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사업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하는데 일이 안되고 자꾸 어려워지고 괴로워지면서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데 왜 하나님 나를 버리십니까? 그렇게 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큰 시련 뒤에는 큰 축복이 있고 적은 시련 뒤에는 적은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앞에 밥상 차리시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잔이 넘치게 한다.
원수가 큰 원수면 밥상도 진수성찬이고 원수가 큰 원수가 아니면 김밥입니다. 그래도 시험이 없이는 김밥도 얻어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시험을 보내는 것은 시험이라는 것이 나쁜 것이 시험만 되는 것이 아니라 큰 축복 이것도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당장 너무 큰 축복이 오면 그만 마음이 세상에 잡혀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에 끌려가고 낭패가 되니까 하나님은 영혼도 붙잡아 주고 천당도 주고 이 세상에도 축복받게 하기 위해서는 시련을 통해서 영혼이 단단히 교훈을 받고 난 다음에 이 땅에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시험 없는 축복은 큰 환난이 될 수가 있습니다. 시험 없이 백만장자가 되는 것은 백만 지옥으로 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고 끝까지 하나님이 잘되게 한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나를 시험하시는 것은 마침내 내게 복을 주기 위한 것이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마침내 내게 복을 주시려고 나를 낮추시고 나를 시험하신다. 이것 잊지 말아야 돼요. 시험 당하면서 내내 불평하고 원망하면 그 축복도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2. 깨어진 사람과 안 깨어진 사람
우리가 살면서 깨어진 사람과 안 깨어진 사람이 뭐가 다르냐고 그런 질문을 합니다. 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안 깨어진 사람 어떻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생각해 보면 깨어진 사람은 하나님이 삶의 주인이 된 사람인 것입니다. 깨어지기 전에는 내가 내가 이 집도 내가 지었고 이 성도 내가 지키고 이 사업도 내가 하고... 전부 자기중심으로 자기를 자랑하는데 깨어진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도 돌보아 주셨고 이 집을 짓는 것도 하나님이 지어 주셨고 이 성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이 축복해서 건강하게 살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주인이 되고 하나님만 자랑하는 사람은 깨어진 사람이고 안 깨어진 사람은 자기 자랑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와 동등하지. 하나님 선악을 심판하는 것처럼 나도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선악을 판단하는 사람이니까 하나님과 나는 똑같이 이퀄(equal)이다. 미안한 말로 불신자와 무신론자니 하나님 자기나 나나 이런 소리를 합니다. 아주 두렵지요. 자기 삶의 주인이고 안 깨어진 사람은 극히 이기주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통해서 만나서 이야기 할 때 자구 내가 내가 라고 말하거든 큰일 날 사람인줄 알고 빨리 비키는 것이 좋습니다. 그 다음 또 깨어진 사람은 무엇이 다르냐. 사람이 환난과 시험을 당하여 깨어지고 나면 그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끊임없이 감사의 말이 나옵니다. 깨어진 사람이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무엇이든지 감사합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니 감사합니다. 감사를 자꾸 하는 사람은 깨어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하고 시간을 보내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긍정적으로 말하고 감사하고 칭찬하고 좋지요. 그러나 안 깨어진 사람은 범사에 원망, 불평, 부정적입니다. 일이 생겼다 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정적입니다. 참 모시기 힘든 사람인 것입니다.
시편 37편 7절로 8절에 “야훼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야훼를 의지하고 잠잠히 참아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하나님께 기다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깨어진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사람이 깨어진 사람은 자기가 참 따뜻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안 깨어진 사람은 완악하고 냉정하고 사납습니다. 서로 만나서 이야기할 때 보면 냉정하고 사나운 사람, 그 사람은 안 깨어진 사람입니다. 나중에 같이 일하면 큰일 당할 사람인 것입니다. 그 다음 또 깨어진 사람은 이해와 동정과 사랑과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서로 일을 당해도 이해하려고 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오래 참습니다만 안 깨어진 사람은 아집과 무정과 미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중심이고 무정합니다. 몰인정하고 한번 미워하면 용서하지 않아요. 참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진 사람은 은혜의 사람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도와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베풀고 도와주려고 하지만 안 깨어진 사람은 율법주의자로서 판단하고 정죄하고 벗깁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잘못하고 내가 제일이다. 내가 옳다. 나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 내가 옳고 네가 다 나쁘다. 그래서 너가 욕을 먹어야 되고 너가 화를 당해야 되고 너가 발가벗김을 당해야 된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이웃을 벗기려고 달라드는 사람 이 사람은 안 깨어진 사람입니다.
3. 사람을 깨뜨리는 시련과 고난
그 다음에 시련과 고난이 사람을 깨뜨리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다른 것으로는 안 깨어져요. 수양과 도덕을 닦는다고 깨어지느냐. 안 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벌써 범죄자의 자식으로 DNA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옆으로 앞으로 인간적인 수양과 도덕을 닦도록 해도 안 깨어지는 것입니다. 속에서부터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야 되는데 그것은 인생에 심한 내적 고난을 겪어야 깨어지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사람을 깨뜨리지 수양과 도덕과 논리를 가지고는 깨지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으스대는 인간이 자기의 무력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순종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올 만큼 고난을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난은 싫어요. 누구든지 고난당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야 여러분 깨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이 감당할 만한 고난은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감당치 못할 시험은 당하지 않게 합니다. 시험당할 쯤에 이제 이 사람이 못 견디겠구나 하면 하나님이 시험을 중지시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여러분 시험 당해도 여러분이 못 감당할 시험은 안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톱시키는 것입니다. 시험 여러분이 감당할 만한 시험은 끝까지 당하게 해서 그만큼 여러분이 깨어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로 6절과 11절에 보면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깨어지고 난 다음에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깨어져서 악인의 꾀를 버리고 오만과 교만을 버리고 온유하며 순종하고 겸손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깨어진 사람이어야 믿음의 사람이 되어요.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내가 내가 내가 하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안되는 것입니다. 깨어진 사람은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믿음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깨어지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사람은 큰일을 이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하니까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혼이 나고 깨어지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지킬 수가 있어요. 내가 안 깨어지고 오만하고 교만할 때는 어떠한 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을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는데 깨어진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를 높이시리라. 높이는 것이 동서남북 어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하나님은 깨어진 사람을 높이시고 깨어진 사람은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천지만물, 인간의 주인으로 모시고 의지하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 주인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니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아예 그것을 인정 안하지만 예수 믿고 아직 초년병 일 때는 내 마음에 하나님이 주인이 되었다가 내가 주인이 되었다가 주인이 두 사람이 들락 날락 들락 날락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초신자들이 교회 나오는데 꼭 교회 나오는 그날에 동창회 모임이 있습니다. 꼭 그런 날이 있어요. 네가 꼭 와야 된다. 너가 안 오면 안 된다. 그 날은 마귀가 동창들 시켜서 특별히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일어나서 하나님, 이번 주일은 아무래도 내 마음대로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환경에 따라서 네가 주인이 되었다가 내가 주인이 되었다 하면 내가 정신이 헛갈려서 못 견디겠으니 네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하면 큰일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나에게 미리 허락을 받으려고 하는 일이 종종 있어요. 토요일 날에도 그렇고 토요일 오기 전에도 나에게 어떤 사람은 전화를 걸어서 목사님 주일날 교회 못나가겠으니 용서 좀 해주십시오. 피치 못할 상황입니다. 내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 주일날 못 갈테니 교회에서 못 오더라도 날 좀 봐주십시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이 교회 오는 것은 내가 봐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봐 주냐 안 봐주냐가 문제지... 주님께 허락을 받아야지. 날 보고 허락해달라고 하느냐 하니까 주님은 안 보이고 목사님은 보이지 않습니까? 벌써 그 때부터 두 주인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기도 하고... 신앙이 자라면 여러분 주일날에는 동창회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 섬기는 것이 제 일의 첫째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하나님을 섬깁니다. 사람들이 저 예수에 미쳤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그게 사랑의 표시니까 어려울 때 내가 건져 주겠다.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너가 나를 알고 있으므로 내가 높여 주겠다. 축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자기가 주인이 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것은 우리에게 천하를 얻을만한 큰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주인은 여러분 자신만 하나님이 받아들여서 돌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도 문제도 주인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 지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어떠한 짐이 해결 못할게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을 우리 주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거대한 축복입니다. 네 길을 네 짐을 네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나를 돌보심이라. 여러분 살아가는 길도 맡기고 짐도 맡기고 염려도 맡기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갈보리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꿈꾸고 믿고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계시면서도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마음으로 쳐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죄가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고 함께 부활해서 함께 승천해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둘로 분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 짐을 예수님 당신의 짐으로 짊어지고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 다 맡기고 믿고 감사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일은 일은 여러분이 하지 않고 주님이 하기 때문에 주님께 일과 짐을 다 맡겨버리고 난 다음에 믿고 그 다음에는 안식하는 것입니다. 쉬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목숨까지도 주님께 맡겼습니다. 주님께서 느부갓네살 당신이 우리를 불풀무에 던져 넣으면 건져내주겠거니와 안 건져 주시더라도 우리는 우상에 절 안한다. 우리 생명을 맡긴다. 그러니까 칠 배나 뜨겁게 한 불구덩이지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이 태우지 않고 천사를 보내셔서 지켜준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은 주님이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참말로 말한 것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 짐 맡기 좋아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짐은 쉽고 내 멍에는 가볍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여러분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복을 주셔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오스트레일리아 목사들의 식탁에서 이야기 하면서 발견한 것은 우리 주님은 죄에서 우리를 용서하셔서 영생을 얻게 하는 주님이시고 그 다음 문제는 주님 책임 안 진다는 그런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하는 말이 여보십시오. 이 땅에 살면서 70년이나 80년을 사는데 그것은 쓸데없는 인생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이 땅에서도 천국 생활을 하고 육신을 떠나서는 천국은 말할 필요 없이 올라가서 천국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인데 주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와 계십니다. 심령천국, 지상천국, 천상천국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을 믿고 마음 천국, 지상천국, 영원천국에 들어가서 삽니다. 좋은 하나님, 좋은 예수님을 모신 결과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게 만들어서 깨어져서 정말로 하나님 품에 안기는 귀한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여러분께서 하나님 말씀을 딱 외워서 가지고 있으면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 말씀을 잡고 말하면 그 말씀이 대신 싸워 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러면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원수가 생겨서 나를 괴롭히잖아요. 그러면 말씀을 가지고 대적을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푼다. 하나님, 진수성찬 차린 것을 믿습니다. 원수가 자꾸 와서 괴로우니 잔을 차려 주심을 믿습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으셔서 내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꼭 말씀을 받아서 대적을 하면 원수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말씀이 굉장히 귀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지고서 여러분 큰 승리를 하십시오.
베드로전서 5장 10절에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시련의 학교를 졸업하면 그 졸업장이 온전하게 굳건하게 강하게 견고하게 하는 졸업장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 론
밤과 낮이 번갈아 하루가 되는 것처럼 평안과 시련이 번갈아 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합당하게 교육시키시는 것입니다. 밤이 가고 낮이 와서 하루가 된다. 그러면 우리 인생살이에도 평안과 시련이 아침, 저녁으로 번갈아 와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신다. 우리는 반드시 시련이 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반드시 시련을 통해서 예수님께 의지하면 우리가 깨어진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은 마음이 깨어져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된 인물인 것입니다. 다윗을 보고 하나님이 내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다윗은 깨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왔다 갔다 하시면서 시련을 통하여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련이 오면 말씀하십시오. 하나님 또 학교 보내십니까? 깨어져서 하나님 앞에 계급이 하나 올라가게 해 주시옵소서. 절대로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감당할만한 시험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당할 때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의 신앙생활에 경험한 것은 시험을 당하면 결과에 가서 좋아지지만 결과의 끝이 다가올 때쯤 되면 참을 수 없이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제일 좋은 길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고통이 감사합니다. 이 시련을 감사합니다. 이 시련을 가져온 그놈 콧대를 때리고 싶지만 감사합니다. 나를 그런 진노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자꾸 감사를 하면 감사가 제일 빨리 우리를 시험에서 건져주는 것입니다. 함께 분노하고 진노하면 더 큰 시험이 다가오고 시험이 괴로워지는데 감사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영화로움을 받고 곧장 시험에서 이겨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하나님 아버지, 이 시험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자꾸 반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멘.
연단을 위한 광야생활
신 8:1-6 / 김양인 목사
신명기 1장 2절을 보면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홍해에서 호렙 산까지 약 240킬로를 걷는데 걸린 열흘을 더하더라도 3주(週)면 가나안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율법을 받고 성막을 만들기 위해 시내산 아래에 머물렀던 기간을 감안하더라도 일 년이면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무려 40년이나 걸려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민수기 13장, 14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열두 정탐꾼이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왔는데, 백성들이 열 정탐꾼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곧이듣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심히 진노하셔서 가나안을 정탐한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40년을 지나는 동안 출애굽 일 세대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다 죽었으며, 여호수아가 인도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 세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40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물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보내게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자손이 일 년 남짓한 기간만 광야생활을 하고 곧장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불순종의 대가로 40년이나 광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내리시는 중에도 광야생활 40년 동안 자상한 보살핌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를 향하여 “우리를 광야에서 굶고 목말라서 죽게 하려고 애굽에서 이끌어 올렸느냐?”고 원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완악한 백성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셨으며, 농사도 짓지 못하는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내려 먹이셨으며, 길쌈을 하지 않았으나 옷이 헤지지 않게 해 주셨고, 물을 구할 수 없는 광야지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40년 동안 단 한 사람도 굶어죽거나 목말라 죽은 자가 없었고, 헐벗은 자도 없었습니다.
광야생활은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릴 그릇을 준비시키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 이 약속을 실제로 받아 누리려면 그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질지라도 빗물을 받을 통을 준비해 놓지 않으면 단 한 방울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름철에 내리는 장마 비를 땜에 잘 가두어 놓으면 그것으로 발전기도 돌리고 식수로도 사용하고 논에 물도 대고 공업용수로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물을 담는 시설이 부족하면, 홍수가 져서 가옥과 전답을 다 쓸어가 버리는가 하면 정작 필요할 때에는 물 기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가 복 받을 그릇이 되지 못하면 결코 복을 받지 못합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복을 내려주시면 주체하지 못하고 탈이 나고 맙니다. 어느 나라나 복권 당첨으로 일확천금을 하고서 불행하게 된 사람들의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돈을 관리할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허랑방탕한 생활로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아 누리려면 연단을 통해서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단지 약속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확고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출애굽한 일 세대 사람들은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광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시키신 후에, 준비된 이 세대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출애굽할 때부터, 가나안 땅을 향해 광야길을 가는 동안, 조금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히브리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여전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생각하시고 열 가지 재앙을 내려 바로를 굴복시키시고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더구나 창일한 홍해를 갈라 바다 사이에 난 길로 선민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자기 백성을 세심하게 보살펴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광야에서 굶고 목말라 죽게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신실하심을 충분히 경험했으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하시는 대로 믿고 순종했어야 마땅합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동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이 난관을 해결해 주실까?” 큰 기대를 가지고 인내하며 해결해 주시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러기에 어려운 일을 만나면 우왕좌왕하고 원망 불평을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원망 불평하고 조급하게 군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만들고 맙니다. 원망 불평이야말로 불신앙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악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이스라엘 자손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나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하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고 계속해서 원망 불평을 하는 한 광야 생활은 고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기왕에 광야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를 연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을 배우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릇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은 우리를 연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아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어느 젊은 엄마가 어린아이를 안고 택시를 타고 가다가 트럭과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트럭과 충돌하는 순간 엄마는 아이를 품에 감싸 안았으므로 엄마는 죽었으나 아이는 조금도 다친 데가 없이 무사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모성애도 이처럼 신실하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비하면 인간의 신실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선량한 부모라도 하나님께 비하면 악한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으시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하였고, 로마서 8장 32절에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이 같이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40년 광야생활을 하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순종한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전폭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시며 지켜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온전한 순종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손바닥과 손등과 같이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 아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된 것입니다.
순종과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면 먼저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사람에게는 본디부터 교만한 마음이 있습니다. 무언가 내세울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타고난 본성이 교만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에 보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집이 세고 교만하여 순종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 광야생활을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마실 물도 구할 수 없고, 보이는 것이라곤 거친 흙과 돌밖에 없습니다. 풀이 자라긴 하나 볼품이 없고 그나마 넉넉하지도 못합니다. 그런 곳에서 가축을 기른다는 것이 신기하게 보일 따름입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 쬐이고 밤에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집니다.
전번에 성지순례를 가서 오아시스에서 기념품을 파는 베드윈족의 여인들을 보았는데, 하나 같이 얼굴에 기름기가 반질반질했습니다. 가이드에게 ‘ 물이 없어서 세수를 안하고 사느냐’고 물었더니, 물도 귀하지만 광야에는 모래 바람이 워낙 심해서 매일 세수를 하면 얼굴 피부가 다 터서 지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세수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낸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오아시스가 더러 있긴 하지만, 그곳은 약간의 야채나 재배할 수 있지, 밀이나 보리와 같은 곡식을 경작할 수 없습니다. 우선, 오아시스의 면적이 그리 넓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은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마실 물도 없는 광야에서 한 두 달도 아니고 무려 40년 동안을 지냈습니다. 그것도 장정만 60만이나 되는 대 민족이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양식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당신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이스라엘 자손에게 겸손히 하나님만 의뢰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하셨습니다.
겸손하려면 우리 자신의 무능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만 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려면 광야를 경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시려고 때로 광야를 허락하십니다. 광야생활 40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마시고, 입고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자랑할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것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 세계의 곳곳을 다녔습니다. 그들은 무슨 사업을 위해서나 관광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방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일신의 평안함을 버리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8)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기 지혜와 역량을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그 같은 연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힘과 내 지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곧 교만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된 것은 은혜 가운데서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교만한 마음으로 들으면 은혜가 될 리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들으면 비록 명설교가 아니라도 성령의 감화를 힘입어 은혜를 받게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악으로 아무도 시험치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을 연단하시기 위해 시험하실 때가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로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망하게 하기 위해 시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시험하십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여러 종류의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은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실력을 향상시켜주기 위한 것입니다. 곧 선한 의도로 시험을 보게 합니다.
학생들에게 시험은 부담이 되고 심신을 고달프게 만들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시험을 잘 통과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 것 역시, 그들의 순종을 시험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복을 받아누리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본받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 성경에 약속하신 영육간의 모든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은, 사람이 살려면 떡도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떡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밀이나 보리와 같은 곡식을 먹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민수기 11장에는 만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7)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만나는 단순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필요한 영양분이 골고루 들어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자손이 밀과 보리를 먹어야 했다면 절대로 광야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백만에 달하는 큰 민족이 먹을 양식을 어디서든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나는 양식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하는 의식주의 문제를 염려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생활 40년을 통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신령한 양식을 먹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의식주를 걱정하느라 하나님 섬기는 일을 등한히 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섬기는 일을 힘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주십니다. 사렙다 과부의 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이웃나라인 시돈의 사렙다 마을로 갔으나 그곳에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한 여인이 들에서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보고서 그 여인에게 “목이 마른데 물 한 그릇 떠주실 수 없겠소?" 라고 부탁했습니다.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기를 "기왕이면 떡도 한 조각만 가져다주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대답하기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는데,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입니다.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려 합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그 여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그대와 그대의 아들을 위하여 만들기 바라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선지자의 말대로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엘리야가 말한 대로 기근이 끝날 때까지 곡식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할 때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은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리 먹더라도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묻는 유대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요, 생명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현대는 생존경쟁이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살아야 합니다. 시편 37편 25절에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의 영적생활 뿐 아니라 육신의 삶에도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구속받은 성도들의 본분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삶속에 복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기기 바랍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알고 영육간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복을 내려 주십니다. 때때로 시련이 다가오거든,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하시려고 광야생활을 하게 하시는구나 생각하시고 겸비한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보고 온전히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하시고 예비해 놓으신 가나안의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시험하시는 하나닌
신 8:1-6 / 손상률 목사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행복한 여행을 하였습니다. 430년간 노예 생활의 속박에서 풀려난 것도 엄청난 은혜이지만, 그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비록 메마른 광야 사막 길을 여행하면서도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초자연적인 이적의 신비를 만끽하면서 벅찬 감격을 가지곤 하였습니다. 훗날 모세는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하였습니다(신 32:10).
이처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과 간섭하심은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늘의 양식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하신 것으로 나타나졌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시고 그것으로 그 백성을 시험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본문 말씀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여행 동안 겪었던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축복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면서 또 한편 피할 수 없는 시험과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I. 선민의 소양(素養)을 기르게 하십니다.
신약의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약 1:13).
그렇지만 여기서 모세는 분명히 시험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이 자기 백성에게 필요한 훈련의 과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에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1) 값없이 받은 은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은 우리에게 그럴만한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거저 받은 은혜입니다(엡 2:8). 신명기 7:6에 “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7-8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거나 뛰어난 자질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심과 그들의 열조에게 맺은 맹세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거저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다가도 쉽게 잊어버리거나 배은망덕 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은혜의 가치를 알고 사모하는 사람이라야 그것을 소중히 여기며 오래도록 간직하게 됩니다. 그렇지 못하면 에서처럼 경홀히 여기고 쉽게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창 25:34). 성도는 시험과 훈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알고 이를 사모하며 소중하게 간직하게 됩니다.
(2) 신앙인격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의 광야행진에는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은혜도 있었지만 거기 못지않게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고통도 있었습니다. 신명기 8:15에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므로 그 당시에는 몹시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으나 지나 놓고 보면 그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16절에는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가장 경계하여야 될 일은 저도 모르게 교만해 지는 일입니다. 모세는 그 백성에게 경계하기를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신 8:13-14).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약 4:6).
(3)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시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곧 시련을 통하여 겸손해지는 것이며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거기에 부응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성군 다윗의 생애에도 있었습니다. 다윗의 말년에 군대장관 요압을 시켜 이스라엘의 인구를 계수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려 백성이 칠만 명이나 쓰러졌습니다(삼하 24:15). 사무엘하 24:1에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다윗의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계획된 수순에 그가 걸려든 것 같이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있고나서 다윗은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하고 회개하였습니다(삼하 24:10). 결과적으로 이 일이 있은 다음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이어서 은 오십 세겔에 그 밭을 사서 훗날 하나님의 성전 부지로 삼았습니다.
Ⅱ. 성숙된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개혁자 루터(M. Luther)는 ‘열매 없는 나무에는 막대기가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곧 가지를 흔들거나 막대기로 때릴 때는 그만큼 소득을 가져올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의도적으로 시험을 하실 때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거기 상응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모인 무리들에게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을 행하실 때도 제자들을 시험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5-6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1) 교훈과 체험으로 훈련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직접 찾아가셔서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장차 교회운동의 초석이 될 수 있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방법은 말씀으로 교훈하시고 때때로 시련도 겪게 하셨으며 신비로운 이적과 능력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가령 마태복음 5장-7장의 산상보훈이나, 13장의 천국비유, 그리고 24장-25장의 말세론적 강론 등은 말씀으로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또 두 차례나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나고 죽음의 위기를 겪은 것은 고난의 체험입니다(마 8:23-27). 한편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유령인줄 알고 두려워했다가 베드로는 예수님이라는 말을 듣고 저도 물 위로 걸었습니다(마 14:29). 모든 질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신유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체험하였습니다(마 11:5).
(2) 굳건한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주가 된다는 사실을 믿고 이를 증거 하는 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에 굳게 서야만 됩니다. 벳세다 광야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을 위하여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을 때 그들은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있어도 먹일 수 없다고 하며 불가능으로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에게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게 하였습니다(요 6:48-51).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은 세상에서 교회운동을 통하여 주님의 사역을 계승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루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위에서 가능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6:16-18).
(3) 투철한 사명의식을 고취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실 즈음 그의 제자들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행 1:8). 복음 증거에 있어서 언어나 종족이나 국경을 초월하여 어떤 대상이든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마 28:18-20).
이와 같은 사명을 수행함에는 엄청난 시련과 고통이 따릅니다. 때로는 공회에 끌려가서 채찍에 맞고 감옥에 들어가고 죽임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뎌내어야만 합니다(마 10:17-23).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시험을 겪어야 되고 고된 훈련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자기의 교회 설립을 선언하신 다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고 제자의 도를 말씀하셨습니다(마 16:24).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며 그의 제자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의 과정을 거쳐 시험을 이겨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Ⅲ. 축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22:1-2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사흘길이나 가서 그를 제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창 22:9-10).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순종심을 귀하게 보시고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 후손들이 받게 될 축복을 예언하였습니다(창 22:16-18). 시험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원하는 축복의 언약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시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1) 축복을 받은 사람
아브라함은 축복의 대명사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으로 그 자체가 축복 받은 민족의 상징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하였습니다(창 12:2).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이 칠십 오세였는데 그 때까지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창대케 되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어져서 그가 백세 되었을 때 이삭을 아들로 받게 되었습니다(창 21:1-6).
그뿐 아닙니다. 고향을 떠나 올 때 집과 전토를 다 두고 빈손으로 나왔으나 어느덧 그에게는 많은 우양과 생축이며 넓은 토지까지 소유하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창 21:22-34). 창세기 21:22에 보면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고 하였습니다.
(2) 수용하고 발전시켜야 됩니다.
창세기 18:18-19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받는 복은 자기들만의 것이 아니라 천하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는 복입니다. 곧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의 자손(예수 그리스도)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달되는 복의 기관으로서 그 엄청난 특권과 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시험하고 훈련시키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수용할만한 그릇의 크기에 따라 받게 되고 또 그것을 누리고 발전시킬 수 있는 자질이 되어야만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명기 8:17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언약을 선포하실 때 그와 그 후손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의와 공도의 표본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주신 복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섬기는 자의 삶이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모델(model)이 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8:19에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총애를 받으며 축복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축복의 대상을 삼으신 것도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목적 있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목적에 맞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축복의 길을 가면서 그것도 사실상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 길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여호와 이레」곧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창 22:8, 14).
왜 광야길의 인생입니까
신 8:1-6 / 이일기 목사
인류 역사상 의학이 크게 발달되지 아니한 때에 인간의 수명을 크게 향상시킨 최초의 항생제 페니실린(Penicillin)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이 페니실린의 발견은 스코틀랜드 출신 플레밍(A. Fleming. 1881. 8. 6~1955. 3. 11. 1945. 노벨 의학상 수상)이 그의 연구실에서 당시의 어린이들에게 흔히 발병하였던 부스럼의 원인인 포도 모양의 병균을 연구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1928년 어느날 플레밍은 배양 된 세균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뒤 그만 깜빡 잊고 접시의 뚜껑을 열어놓은 체 연구실에서 나와 며칠을 비웠는데 그만 그것이 잘못되어 그 접시에 온통 푸른곰팡이가 피고 말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곰팡이가 핀 그 접시를 치우려다가 접시 위에 가득 퍼져있던 포도 모양의 세균들이 사라진 기이한 현상을 본 것입니다. 플레밍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도대체 무엇이 이 접시의 세균을 사라지게 했을까에 대하여 골몰하게 되었습니다.
세균이 이처럼 깨끗하게 사라진 걸 보면 분명 강력한 살균력을 가진 무엇인가가 작용을 하였을 터인데 하면서 연구를 하다 내린 결론은 어디선가 날아 온 푸른곰팡이가 그 효과를 나타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플레밍이 실수로 세균이 있던 접시의 뚜껑을 열어놓은 체 연구실에서 나왔었는데 그 사이에 곰팡이의 포자가 깨어진 연구실 창문 사이로 날아와 그 접시에 붙었던 것이 당시 많은 질병들로부터 생명을 구하는 페니실린의 개발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플레밍은 매우 열악하고 협소했던 연구실, 깨어진 유리창이 틈틈이 있는 연구실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하게 된 셈이지요. 얼마 후 한 친구가 플레밍의 연구실을 방문하였는데 그 형편없는 연구실 환경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렇게 열악한 연구실에서 페니실린을 만들다니 자네에게 좋은 환경의 연구실이 주어졌었다면 훨씬 더 훌륭한 일을 해 내었을 걸세 라고 덕담을 하였습니다.
그때 플레밍이 대답하기를 “이 열악한 연구실이 나로 하여금 페니실린을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었다네. 깨어진 창 틈으로 날아온 먼지가 바로 페니실린의 재료가 되었던 거야....
그렇습니다.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개의치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꾸준히 하다 보면 삶의 질을 높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저는 우리 모두가 현실에서 겪는 고난의 환경도 잘 감당하기만 하면 축복으로 가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믿고 그 축복의 키(Key)를 오늘의 말씀 속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우리의 삶은 광야와 같은 길을 가는 인생입니다.
0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의 길: 뜨겁고 건조한 땅, 물이 없는 모래 길로서 이 길에는 먹을 물도 먹을 음식도 제대로 없는 곳이요 편안히 잠을 잘 데도 없는 곳입니다.
낮에는 모래에 반사되어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태양 빛과 밤에는 혹독한 추위 그리고 사나운 맹수와 뱀 전갈 등이 우글거리는 곳 이러한 곳이 광야인 셈이지요.
어쩌다 오아시스를 만나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는 굶주림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물이 없어서 사막이 되고 광야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가 가장 염려하는 것이 바로 물이 점점 줄어드는 데다 오염되어 가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세계 도처에 가뭄 즉 한발이 심해서 큰 걱정인데 특히 아프리카 하면 원시림을 상상하던 모습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아프리카의 절반 이상이 사막화가 되어서 동식물을 막론하고 많은 생명들이 무수히 죽어가고 있는 실정이며 어느 땅이든지 3년만 완전히 비가 없으면 사막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 광야의 길 사막의 길을 하나님의 계획 속에 걸어가도록 하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도 동일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광야와 같은 우리네 인생살이를 경험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 세상은 고해(苦海)요 인생은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다 라고 합니다. 그만큼 인생살이가 광야의 모래 길처럼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인생이 한 백년 안의 짧은 삶에 있어서 경제적인 어려움, 육체적인 질병, 직장의 문제, 사업의 문제 등으로 인하여 메마르고 목마른 삶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치라도 우리의 삶에 틈이 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2. 우리로 하여금 광야의 길을 가게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0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02....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뜨겁고 건조한 땅 물이 없는 광야 모래 길을 사십 년 동안이나 걷게 하실 때에는 거기에는 그만한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루만에 피었다 지는 작은 풀잎 하나라도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의 삶에도 목적이 있다는 말이에요.
신명기 08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게 된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애굽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①고센 땅에서 지중해를 건너 블레셋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남쪽 길이 있는데 이 길은 약 4~5일이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②고센 땅에서 숙곳을 지나 술 광야로 가는 중앙 통로가 있는데 이 길은 약 보름이면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③고센 땅에서 홍해를 건너 시내광야로 가는 서쪽 길로서 약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 길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서쪽 길을 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넉넉잡고 한 달이면 들어갈 수 있는 길이지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약 이 년이 걸려서야 가나안땅 앞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열 두 명의 정탐꾼 활동과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해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이십 세 이상은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민 13,14장).
동시에 이스라엘은 다시금 광야에서 삼십 팔 년 간을 더 연단을 받게 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고 하시고서는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일까요?
①02....이는 너를 낮추시며:
이렇게 사십 년 간의 고난의 광야 길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첫 번 째 목적은 백성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겸손하면 모든 것이 감사하지만 그러나 교만하면 모든 것이 원망스럽고 짜증스러운 것 아닐까요?
하나님은 복을 주심에 있어 언제고 상황을 바꾸기보다는 나의 마음이 먼저 낮아져 감사로 바뀌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마음이 감사와 은혜로 바뀌어지는 그때서야 하나님은 축복의 환경을 만들어 주시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십 년 간이나 고난의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하여서 먹을 것을 해결해 주시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또 의복과 신발이 헤어지지 아니하도록 하셨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켜 주셨음에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은혜와 고마움과 만족함을 표하는 감사를 한 흔적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있느냐 없느냐 이며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면 누구나가 다 감사가 표현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유의해서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하여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음을 분명히 밝힘과 동시에 그 지나간 광야의 생활이야말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한 기간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광야생활과 같은 삶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의 눈이 뜨여야만 합니다.
그 믿음의 눈이 뜨이게 되면 우리가 광야생활과 같은 삶이라도 그 삶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간다면 그 삶이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 속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②02....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그 목적의 둘째는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무슨 시험이란 말입니까?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지를 알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단순한 물리적인 일에도 참지 못하고 금방 작은 고통에도 몸부림치며 잠간의 갈증에도 목마르다고 아우성을 쳤었던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모습은 사라져야 했고 이제 지금쯤은 불신앙과 불순종의 삶이 경건한 삶으로 순종과 감사의 삶으로 바뀌어져야만 했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모리아산에서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창 22:01~14).
사실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시험이 없었더라면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일로 인해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욥도 시험하신 때가 있었는데 그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자기의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만일 욥에게 그러한 시험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그의 믿음이 얼마나 순수한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욥이 시험을 잘 견디고 이겨냄으로 인해 곤경에서 건지시고 갑절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상태와 그 명령을 지키는지의 유무를 알기 위해서도 시험하신다고 하셨으며 동시에 오늘의 우리가 역시 하나님을 잘 섬기는지를 알기 위하여 광야생활과 같은 환경을 허락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힘든 광야생활과 같은 길을 걷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시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실한지 그것을 알아보시기 위해서 지금 나를 시험하고 계시는 만큼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라의 살림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고 하며 경기가 좀처럼 안 풀려서 못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계속 속출하고 있는 때입니다. 주변에 정말 힘든 사람들이 있다면 이들에게 01절 말씀을 들려주면 어떨까요?
0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 사는 역사가 있고 번성하는 역사가 있으며 축복의 땅이 우리 눈앞에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다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③03....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그 목적의 셋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여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육신의 양식인 떡으로만 살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자기 힘을 의지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광야가 어떠한 곳인지는 이미 앞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삭막하고 메마른 곳,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 또 목축도 할 수 없는 곳,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의식주조차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여 무려 사십 년 간이나 살게 하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그 은혜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재확인하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그들이 굶주릴 때 만나를 허락하셨는데 그 만나는 땅의 소산물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경작하여 수확한 양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목마를 때는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의 갈한 목을 축여주셨고 또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낮에는 구름기둥을 세워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을 역시 띄워주셔서 그들의 걸음을 친히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04절에 있는 말씀처럼 그들이 광야 길을 사십 년이나 지내는 동안에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그들의 발도 부르트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건강까지도 다 책임져 주셨는데 이 모두가 그들에게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그럴수록 나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 손으로 무엇을 쥐고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있을 때가 안전한 것이며 내가 통장의 숫자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의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한 부자를 보십시오. 그 해 농사가 잘 됨으로 인해 그 부자가 창고를 헐고 더 크게 지어 곡식을 가득 쌓아놓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거두시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 끝장이 나고 말았으니 그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이와 같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고 오늘의 우리를 광야와 같은 고난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 택하신 백성들을 미워해서 그렇게 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렘애 0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 심이 아니시로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로 고생했기 때문에 속히 저들에게 안정된 땅과 집을 주고 농사를 짓게 해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며 이러한 신앙 인격이 있어야만 소유물을 가져도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믿음의 삶을 잘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늘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을 다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만족한 은혜
신 8:1-6 / 최영기 목사
오늘은 일년 52 주 가운데서 마지막 주일인 송년 주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두가 마지막입니다. 주일도 마지막이고, 내일도 마지막이고, 모래도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 가운데 '마지막'이란 말은 매우 심각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해의 마지막이라든지, 생의 마지막이라든지 할 때에, 무엇인가 대단한 결단을 촉구하는 심각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은 언제나 그 의미상 중요한 뜻을 가집니다. 한 해가 시작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또 한 해의 마지막 송년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간 일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아마 만감이 교차할 것입니다. 아마 만족함보다는 모두 아쉬움이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가 지나온 한 해를 뒤돌아 볼 때 주님께 감사할 일들이 너무도 많을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는 신앙 수필집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대로 한 해 동안 우리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음을 믿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안식년을 맞아 유럽을 순방할 기회도 가졌었고, 첫 손자도 보았으며, 두 아들의 제대와, 막내아들의 대학 진학의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교회적으로는 금년에도 온 교회가 평안하고 그리고 다른 어느 해보다 더 화목한 한 해 였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국가적으로는 월드컵 4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해서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아시안 게임에서는 일본을 압도하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돈도 계보도 없는 한 정치인이 맨주먹으로 대통령직에 도전하여 당선됨으로 말미암아 정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이고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실로 만족한 은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면 여기 저기서 수많은 모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들 모여서 벌리는 모임의 이름을 가리켜 '망년회'라고 부릅니다. 망년회는 무엇을 하기 위한 모임입니까?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는 모임입니다. 괴로웠던 일들, 아쉬웠던 일들, 서러웠던 일들을 다 잊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를 살아오며 잊어버리고 싶었던 일들을 말끔히 잊고서 새출발을 해보자는 뜻으로 망년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망년회를 갖는다고 해서 모든 게 다 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술기운이 감도는 시간은 어떨는지는 몰라도, 술에서 깨고 나면 결과는 몸만 버리고 마음도 더 괴로울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대신,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1.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무엇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여기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잊기보다는 차라리 기억해야 할 일들을 함께 살피기 위하여, 우리들은 여기에 이렇게들 모여서 송년 주일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금년 한해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베푸신 은혜가 무엇이었는가를 하나 하나 더듬어 기억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충만해서 이 한 해를 마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아름다운 자세인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의 세월을 지나면서, 무엇을 기억해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어쩌면 광야와도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이해하고 교훈을 얻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승리로 장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기억해야 만 했습니다. 어떠한 은혜들입니까?
1)성막을 주신 은혜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2)불기둥과 구름 기둥의 은혜입니다.
200만이 넘는 대가족이 홍해를 건너 광야를 들어서기는 했지만, 광야는 문자 그대로 광야였습니다. 낮에는 기온이 4. 50 도로 상승하고,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져 내려가는 광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 기둥이라는 에어컨으로 시원하게 보살펴 주시었고, 또 밤에는 불기둥이라는 스팀을 겸한 전자동 오토매틱 히터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뜻하게 돌보셨던 것입니다. 그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사병에 걸렸다는 기록도 없고, 감기 몸살에 걸렸다는 기록도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3)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신 은혜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양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 생활에 한 번도 어김없이 시간을 맞추어 주어진 하나님의 특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은 물론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하여 달리 장사도, 농사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완전히 보장해 주셨던 기간이 바로 광야 4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4)광야에서 생수를 주신 은혜입니다.
물에 대한 기사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최초로 진을 친 곳인데, 그곳 물이 너무 쓰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종 모세는 기도하고 한 나뭇가지를 물에 던져 수질을 변경시켜서 맛나는 물로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한 목을 시원케 해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림이란 곳에 당도하니, 거기엔 종려수 70여 그루에 둘러싸인 물 샘이 열둘이나 있는 오아시스가 있어서 시원하게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이란 곳에 이르러 마실 물이 없었을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응답이 내렸습니다. 출17:5-6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생수가 솟구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5)의복을 주신 은혜입니다.
4절에 "이 40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신 29:5절에는 "주께서 40년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헤어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신기한 옷들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한 신들을 신고 다녔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유명 메이커 제품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갓난아이가 태어났을 때 옷을 입혔을 것입니다. 아이가 조금 자라면 그 발에 맞는 신발을 신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40년을 자라 가면서 우리 같으면 수십 벌의 옷을 갈아입었을 것이고, 수도 없이 많은 신발들을 갈아 신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옷은 40년 동안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신발은 헤어지지 아니했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에어컨과 스팀이 달린 히터를 주셨습니다. 특별 메뉴인 메추라기와 만나를 때를 따라서 주시었습니다. 물론 물도 풍족하게 마시도록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40년을 입고 신어도 헤어지지 않는 하늘의 패션으로 장식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고 계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거들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금년 한 해가 거의 다 저물어 가는 오늘까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 왔습니까? 얼마나 형통했습니까? 얼마나 성공을 했습니까? 얼마나 모았습니까? 그 모든 것들이 순순히 여러분들의 힘으로 이룩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잊으시면 안됩니다.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광야 길로 인도하신 목적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40년 동안이나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길을 인도하실 때에 아무런 목적 없이 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2절 하반절에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이는'이라고 함이 바로 목적을 말합니다.
1)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백성들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들에게 고난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생활하는 동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조차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께서는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해진 옷과 신발을 신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절대 결핍의 장소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굶지 않았고 신발이 없어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
2)겸손한 사람들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까닭을 본문에서는 두 번씩이'낮추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높아진 인간에게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아담처럼 넘치는 풍요가 인간으로 하여금 방종하고 불순종하게 하고, 하나님을 잊고 교만하고 자랑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낮아져야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은혜와 사랑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 물을 담을수 있듯이, 겸손해야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고난은 자신을 어린이처럼 낮아져 겸손하게 만들어, 나는 내 인생을 인도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구원하소서 기도하게 됩니다. (예화-이현주 목사 모친의 기도)
시 55:22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했고, 시 37:5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되 온전히 철저하게 맡겨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잘 아는 유명한 의사에게 꾸준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는 차갑게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유능하니 무능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에게나 전도해서 위로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의사의 무지와 오만함에 크게 실망하고 전도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데 수년이 흐른 후 그 의사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을 만난 그 의사는 고개를 숙이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암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며 애원을 했습니다. 사람이란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모든 것이 편안할 때는 자기의 실력을 믿고 교만해 하지만, 심한 환난이 다가와 때리면 그 교만이 박살 나고 '자기'라는 우상이 산산조각 깨져 버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면 먼저 '자기'라는 우상을 깨뜨리십니다. 자기를 우상화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우상에 절하지 말라고 했는데, 자기가 신이 되어 있고 자기를 우상화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3)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역경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난은 아집을 깨뜨립니다. 고집불통의 마음도 고난 앞에서는 깨어집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일도 안 지키고 십일조도 드리지 않고 주님의 일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태풍이 몰아닥치면 그의 아집이 깨어지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섬기는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지, 떡으로만 사는지, 복을 받기 위해서만 예수를 믿는지,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로 하여금 때로 광야와 같은 길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순종의 훈련입니다. 높아지고 부유해지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순종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하고 불순종하는 인생들을 고치기 위해서 때로는 고난이라는 징계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5절에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혹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이라고 느껴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사 더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 징계하시는 줄 알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열심히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징계와 연단을 통해서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풍족한 것을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눈물의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밥맛이 꿀맛인지 모르고, 고생없이 받은 복은 사치하고 방탕하지만, 연단 후에 받은 복은 감사하고 만족하며 하나님께 찬송하며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하여 아름답게 쓰게 됩니다.
4)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시고 시장하신 것을 알고 돌덩이를 명하여 떡이 되게 하여 먹으라고 유혹을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고 하여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는 진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 우리를 광야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송년 주일입니다. 불신 세상 사람들은 연말이 다가 오면 갖가지 '망년회' 모임에 바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때에 오히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있음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 길을 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기억해야 했듯이, 금년 한 해 동안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 온 우리들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거처할 보금자리를 주시고, 영육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금년 한 해 동안 형통한 일들이 있었다면 내가 잘나서 그리된 양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된 것임을 알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심정으로 다가오는 새 해에 더욱 주님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한 해를 살아오며 인생의 거친 들에서 갖가지 시련을 당한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 같은 광야 생활을 통하여 1)주님만 의지하게 하고 2)우리를 낮추어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3)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서 4)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함인 줄 알아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광야 길을 통과하며 신앙과 인격이 아름답게 성화되어 주님께 더 큰 축복을 받고 더욱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신 은혜든지, 광야 길로 인도해 주신 은혜든지, 이 모두가 다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만족한 은혜임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믿음으로만 걸어야 하는 길
신 8:1-6 / 김영주 목사
교회 다니면 다 행복할 것 같아 보여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믿으면서도 고민이요.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성경공부도 가끔 참석합니다. 모임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감격도 없고, 체험도 없고, 하나님의 동행하심도 없습니다. 무엇을 결정할 때나, 무슨 일을 할 때 보면 하나님이 없습니다. 혼자서 다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을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든지, 하나님의 능력이라든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철저하게 이론만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이론은 가설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경험된 결과입니다. 이렇게 했더니 이런 결과가 생기더라는 입증된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론을 가지고 신앙 생활 하십니까? 믿음으로 하십니까?
설교나 성경공부도 들을 때 제일 화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 전 어떤 설교를 들었는데 이 분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설만 전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화가 나는지 진리를 하나님 말씀을 저렇게 전해도 되는가? 하는 맘이 들었습니다. 가설과 진리는 다릅니다. 가설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지, 얻을 것을 것입니다 가 뭡니까? 성경에는 예수 으면 구원받는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구원받는 것이지 '받을 것' 입니다가 뭡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실 것입니다. 들으실 것 입니다가 뭡니까? 기도하면 다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못 들으시는 것은 없어요. 자녀들이 기도하면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들으십니다. 어떻게 압니까? 성경에 그렇게 약속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때로는 '예스'로 때로는 '노'로, '기다리라'고 응답합니다. 응답의 모습은 다르지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들었으니까 응답하시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경험된 결과요, 약속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할 것입니다.'라고 가설처럼 얘기하면 듣는 사람들이 기도의 확신 갖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책임지고 돌보십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가설로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돌보실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자기가 확신이 없으니까,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자신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만 응답하면 누릴 수 있는 수많은 기적과, 하나님의 능력들이, 믿음 없음으로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우리 삶에 필요한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도 먼저 내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의심할 것도 없어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런 경험한 사람 찾아 간증세우면 시간 없어서 못 할 만큼 많은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특히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축복들이 다 자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을 못 믿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께 순종하기 보다 더 힘있고, 능력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 더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 지혜주십니다. 내 머리로는 안 되는 일도 되게 하십니다.
--능력이 부족할 때도 기도하면 능력주십니다.
--아무리 병이 오래고 중해도 하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까 38 년 된 병자도 일어나 멀쩡하게 걸어가잖아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어도, 주님이 축사하시고 떼어주니까 5천명이 먹고도 남잖아요?
--다윗 같은 꼬마도 믿음으로 나가 싸우니까 골리앗 장수를 때려눕히잖아요? 이게 어디 다윗 개인의 능력으로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주신 것이잖아요?
--고기잡이 전문가인 베드로도 실패했는데 예수님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니까 고기가 넘치게 잡히잖아요? 뭐가 안되고, 뭐가 부족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믿음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비록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믿음으로 사는 삶을 중단하면 그때부터는 불신자보다 더 비참해집니다.
제가 하나님이 시간 주인이시구나 하는 것을 체험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 일 하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 바쁜 시간에 교회에서 시간 다 보내고 뭐 하는 거지? 남들은 지금 도서관에서 시험 준비하는데. 이러다 끝나는 것 아닌가? 취직도 못하면 어떻게 하지? 은근히 걱정되더라구요. 그렇다고 시험 때 하나님이 답을 보이게 해주지는 않을 것 같고 말입니다. 그래 부담이 되는 데 한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시간을 써도 천년처럼 길게 쓰는 방법이 하나님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시간정도 공부해야 끝나는 책이 있는데 2시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하루를 천년같이 쓰시는 분입니다. 믿고 기도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공부를 해도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습니다. 또 한참 공부하고 시계를 보면 역시 몇 분 지나지 않았습니다. 5시간 분량의 공부를 다 마쳤는데 두 시간도 안 걸립니다. 이런 경험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지혜, 집중력, 총명 주셔서 한번 읽으니까 다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참 진도 나가다가 이해가 안되니까,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공부하고 확인하고 가야하는데 나는 한번에 다 이해가 되어서 계속 나가는 것입니다. 두 시간만에 끝납니다. 결과도 훨씬 좋습니다. 믿음으로 공부하고 믿음으로 시간 사용한 것입니다. 세상의 시간은 24시간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몇 천년처럼 쓸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모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는 모험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장 강력한 '빽'인 하나님이 보장하시는데도 실패할까 두려워합니다. 벌벌 떠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계산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도, 살아 계심도 체험하지 못합니다. 자기 계산에 자기가 갇혀, 믿음을 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비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비전만 분명하면 나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사명이 있으니까 모세는 80이 되어도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습니까? 사명이 있고, 부르심이 있으면 늦게 불러도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꼭 쓰십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해보면 빠듯한 재정에 나 사고 싶은 것도 다 못사며 살고 있는데 그나마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면 더 빠듯하지 않겠나? 겁나는 것입니다. 계산적으로 따지면 그렇죠. 그런데 그 계산에 하나님이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들어가면 계산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들어가면 계산이 무한대로 나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십일조로 나를 시험해보라고 까지 말씀하셨겠습니까? 보통은 '믿고 경험해 보라' 하시는데 이것은 '시험해 보라'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으면서도 비참한 인생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전능하심, 풍성하심, 채워주심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생의 성패가 내게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쓰시기 전에 먼저 그 생각을 깨뜨리십니다. 사람들이 가장 잘 넘어가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예수를 믿어도 할 것은 해야 해!'하는 말입니다.
적당히 뇌물도 주고, 아부도 하고, 술자리에도 어울리고, 처세를 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처세를 잘하는 것은 좋지만 인생의 성패가 처세술에 달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신문보세요. 처세술에 대해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 다 줄줄이 잡혀 들어가잖아요. 인생은 처세술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다하면서도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을 쓰시기 위해 때로 먼저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인생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만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 광야에서 고생하게 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교만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때마다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하고 그 뒤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중심'이요, 하나님은 '나중'입니다. 내가 열심히 살면 하나님도 내편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렇게 안됩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광야생활입니다. 고생길입니다. 안 풀리는 것입니다. 왜요? 내가 주인이요, 내가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대로라면, 하나님은 늘 뒤나 봐주시는 분밖에 안됩니다. 자기들이 앞에서 열심히 달려가고 하나님은 뒤에서 밀어주시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가시고 그들은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열심히 살았더니 된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40년을 광야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힘든 생활입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배고픔도 겪을 수 있고, 먹을 물이 안나오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3절 보십시오. 어떻게 훈련시켰습니까?
낮추셨습니다. 겸손케 만드셨습니다. 내 힘으로 인생이 살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노력한다고 꼭 다 되는 것은 아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굶주림에 처하게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신 듣도 보도 못한 만나라는 것을 하늘에서 비오듯 내려주심으로 그것을 먹고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먹여주신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광야에서 어디 씨를 뿌릴 수 있습니까? 채소를 기를 수 있습니까? 또 날마다 이동하는 상황에서 어디 나무를 심을 수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굶어죽을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먹이십니다. 땅에서는 아무 것도 나지 않는데 하늘에서는 날마다, 아침마다 만나가 내려옵니다. 기막히게 정확하게 내려옵니다. 안식일 전날에는 두 배가 내려옵니다. 하루 이틀 이렇게 한 게 아닙니다. 사십 년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 하반 절에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능력 있고, 실력 있어도 사막에 들어가면 별수 없습니다. 굶어야하고, 오아시스를 만나지 않는 한 목마름과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는 자격증도 필요 소용없습니다. 권세도 소용없습니다. 실력도, 기술도, 재능도, 돈도 다 소용없습니다. 물 나오지 않으면 죽고, 먹을 것 없으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수 없다는 것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런 광야의 길을 걷는 분 있을 것입니다. 괜히 다른 것 붙들고 시간낭비하지 마세요. 하나님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해답이 있어요. '오직 하나님만이 살 길 이다' 는 각오로 철저히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기 시작하니까 거기에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초원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급과 돌보심이 넘쳐납니다. 4절 보실까요?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40년을 광야에서 지냈는데 옷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질긴 옷이기에 40년을 입어도 헤어지지 않을까요? 무스탕도 이렇게 질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즘 이런 옷 나오면 의류업계 다 망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옷을 조심스럽게 입어서 그랬습니까?
--40년 입을 예상하고 옷감을 좋은 것 써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상하고 세밀하게 돌보시는지 옷감하나, 실밥하나 헤어지지 않도록 완벽하게 보호하신 것입니다. 비록 광야를 걸어도 하나님만 바라보니까 초원에 있을 때보다 더 잘 입히시는 것입니다.
또 뭐라 했습니까?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 했습니다. 하루 이틀 아니고 40년을 걸었습니다. 눈만 뜨면 모래 밭길을 걸었는데 발이 부르튼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마다 발 맛 사지를 잘해서 그런 것입니까?
길이 잘 포장되어서 그렇습니까?
신발을 좋은 것 신어서 그렇습니까?
운동을 열심히 해서 체력이 좋아서 그랬습니까? 그 뜨거운 모래사장을 걸었는데도 관절염도 없고 화상도 없고, 무좀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가면, 비록 광야를 걸어도 하나님이 완벽하게 돌보십니다. 40년 간 매일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 먹여주죠, 발이 부르트지 않게 지켜주셔서 행군에 지장 없게 해주시죠. 옷이 헤어지지 않게 입혀주죠. 하나님을 바라봤더니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주님은 책임져주셨습니다. 하물며 이 풍성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때로 어떤 필요에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평탄한 길이 아닌, 광야로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광야에 있어도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은 머리카락하나 상하지 않게 돌보십니다.
예수님은 마6:25절 이하에서 믿는 자들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이런 것들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문제인데 뭘 이런 것 가지고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대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사람들은 전부 자기 일에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뒷전에 미뤄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사람에게 상처받고, 당하고, 사람 때문에 힘들고, 시험 들고, 하면서도 또 다시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에게 매달립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해답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사람에게서 쓴맛 보게 하십니다. 그러면 좀 깨달아야 하는데, 못 깨닫고 또 사람을 의지합니다. 왜 세상에는, 그리고 교회에는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가까이 하기 때문입니다. 해답 아닌 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깨닫게 하시려고 때로 쓴맛을 보게 하십니다. 그럴 때는 반항하지 마시고 하나님만 가까이하고 사랑하세요. 그러면 광야에서도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1)우선 순위가 제대로 된 삶입니다. 먼저 할 것은 먼저하고 나중에 할 것은 나중에 하는 삶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교회 일에 우선 순위를 두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를 도와 함께 사역하는 삶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2)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지혜, 명철, 능력, 부, 생명, 승리, 권세.....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가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3)맡기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것입니다. '준비가 부족합니다', '실력이 안됩니다', '말을 못합니다', '경험이 적습니다......'이런 말이 필요 없습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리키라' 하면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석을 두드리라' 하면 두드리는 것입니다.
--'네 자리를 들고일어나 걸어가라' 하면 아무리 병이 오래되었어도 일어나 걸어가는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 하면 씻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말은 내가 그 문제 가지고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의견,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인도하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군에 있을 때 행정병을 맡아서 중대 보급을 담당했었습니다. 군수품이 떨어지면 위 사람에게 보고를 합니다. 그러면 며칠 후에 위에서 연락이옵니다. 보급품 내려보내니 와서 가져가라. 가면 에이급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확히 이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는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옵니다. 에이급으로 좋은 것만 옵니다. 모든 공급은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위를 바라봐야 삽니다. 땅을 바라보는 순간 비참해집니다.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시는 삶 되시길 바랍니다.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
신 8:1-6 / 박상훈 목사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
예부터 우리 인생을 가리켜서 "길가는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인생 길을 걸어가다 보면 평탄한 길이 나타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광야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만 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게 되면 생각이 바뀌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질이 얼마든지 밝아지고 그만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여기에 하얀 백지 한 장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거기에 붓끝으로 검은 점을 살짝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물어봅니다.
"여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은 십중팔구 검은 점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물론 그것이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실 검은 점은 하나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주변에는 훨씬 더 넓은 하얀 백지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면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훨씬 더 넓은 밝은 면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살 때 그만큼 우리의 삶의 질이 아름다워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던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우쳐주시는 교훈이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하시고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걸어갈 때 형통할 때도 있지만 광야와 같이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했습니다. 종살이하던 애굽 땅에서 해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이제 가데스 바네아라는 지방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축복의 땅 가나안까지는 불과 사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곧장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사십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곧바로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살기 어려운 광야 길로 인도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능치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이제는 택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싫증을 느끼셨기 때문입니까?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보내었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사십일 동안 그 땅을 두루 탐지하고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열 사람은 모두 매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듣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같이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들이 그 땅을 두루 탐지한 사십일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사십년 동안 광야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택하신 백성들을 미워하셔서 일부러 그들을 골탕먹이시고 괴롭히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애3:33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가 고생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다.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하나님은 그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다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좀 더 성숙한 모습이 되도록 훈련시키시고 연단시키셔서 마침내는 그들에게 큰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든 광야와 같은 어렵고 고달픈 삶을 지금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주시기까지 아낌없이 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의미 없이 우리를 광야 길로 인도하셨겠습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그 이유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살펴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를 세 가지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16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이 교만한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겸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교만을 반드시 꺾어버리고 마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 우리는 언제나 온유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십니다. 우리는 자연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신명기 8장에서 말씀하는 교만은 무엇이고, 겸손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교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잘된 줄 아는 것입니다. 반대로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하나님을 잊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선 교만에 대해서 살펴보십시다.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형통하고 잘될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교만하기가 쉽습니까? 12∼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우리가 무엇인가 잘되고 형통하고 풍부할 때, 오히려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 말씀입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자기가 잘나서 잘된 줄로 생각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내가 잘나서 잘된 줄 알고 교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겸손은 내가 형통할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을 보십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형통하게 된 줄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가 금년 한 해를 무사히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형통하셨습니까?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형통은 감사의 조건이 되어야지, 그것이 교만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난했더라면 겸손했을텐데, 부유하게 되어서 교만에 빠져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교만을 그토록 싫어하십니까? 다른 죄는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면서 다 달아납니다. 그런데 교만죄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바로 교만죄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그러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죄입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 임금이 그러했습니다. 바벨론의 왕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교만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죄는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다루시지만, 교만죄만큼은 팔소매를 걷어붙이시고 철저하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교만을 철저하게 심판하시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억지로 겸손케 하십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모세도 그러했습니다. 그가 애굽의 궁중에서 40년 동안 불편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잊고 지냈습니다. 혈기와 자만심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모세를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 살면서 그는 철저하게 낮아졌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낮추신 것입니다. 그가 겸손하게 되니까 비로소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종으로 사용해 주신 것입니다.
금년 한 해를 보내면서 내가 잘나서 이 날 이 시간까지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여부를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지, 하지 않는지 그것을 알아보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2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때때로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시험하십니다. 그 옛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시험이 없었더라면,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욥도 시험하셨습니다. 두 번씩이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그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욥은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자기의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만일 욥에게 그러한 시험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그의 믿음이 얼마나 순수한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욥이 시험을 잘 견디고 이겨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욥에게 허락하셨던 모든 곤경을 돌이키시고, 그에게 갑절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힘든 광야 길을 걷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실한지, 그것을 알아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라의 살림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힘들다, 못살겠다, 죽겠다!"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번성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축복의 땅이 우리 눈앞에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예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컨대 벳새다 빈 들판에 장정만 오천 명이 모였습니다. 때가 되어서 모두가 배가 고픕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무리에게 나누어주어라!"
여러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떻게 오천 명을 먹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남은 조각을 거두니까 열두 광주리가 차게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주의 명령에 순종하면 사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기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물고기 노는 물살만 보아도 그는 모든 것을 훤하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밤새도록 그물을 내리고 또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배를 바닷가에 대놓고 빈 그물을 깨끗하게 씻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명하셨습니다.
"베드로야,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
예수님의 이 명에 베드로는 순종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이유로 몇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전공과 예수님의 전공은 피차에 서로 다릅니다. 베드로는 한평생 동안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일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수산과 출신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목수였습니다. 요즘 말로 토목과 출신입니다. 그런데 수산과 출신인 베드로에게 토목과 출신인 예수님이 고기 잡는 일에 대해서 배 놓아라 감 놓아라하는 셈입니다.
둘째로, 고기 잡는 시기와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본시 갈릴리 바다는 밤중에 고기를 잡도록 되어 있습니다. 낮에는 고기가 잡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침이 되었지 않습니까? 거기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지쳤습니다. 이제 더럽혀진 그물을 깨끗하게 씻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다시금 깊은 곳에 들어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할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 길을 걷는 것처럼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고 계십니까? 그럴수록 하나님의 명령에 더욱더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우리에게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축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에 순종함으로서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다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떡으로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나를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광야가 어떤 곳입니까?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입니까? 살 수 없는 곳입니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는 삭막하고 메마른 곳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또 목축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의식주조차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사십 년 동안이나 그곳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살아가면서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목축도 할 수 없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구하면서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굶주렸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만나는 땅의 소산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힘으로 농사지어서 수확한 양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음식입니다. 그들이 배고플 때 하나님이 먹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목마를 때는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의 갈한 목을 축여주셨습니다. 또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을 띄워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을 띄워주셔서 그들의 걸음을 친히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4절에 있는 말씀처럼 그들이 광야 길을 사십 년이나 헤매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하셨고, 그들의 발이 부릍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건강까지도 다 책임져 주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그럴수록 나를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는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이가 베란다 밖으로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아이는 다행스럽게도 떨어지려고 하는 찰나에 난간의 철창을 꼭 쥐었습니다. 아이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손목의 힘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고함을 질렀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고함소리를 듣고 놀라 뛰어 나왔습니다. 아이가 힘이 빠져 떨어지려고 할 때 아버지는 아이의 손을 덥석 잡아 주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가 자기의 힘으로 난간의 철창을 쥐고 있을 때가 안전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아버지의 손에 잡혀있을 때가 더 안전합니까? 아버지의 손에 잡혀있을 때가 안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내 손으로 무엇을 쥐고 있다고 해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있을 때가 안전한 것입니다. 내가 떡을 많이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면 하나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러했습니다. 그 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창고에 곡식을 가득 쌓아놓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업을 잘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눅12:20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떡을 먹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떡이 많아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내게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만 하시면 하나님은 만나로 나를 먹여 주시는 것입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 나오게 하셔서 나의 갈한 목을 축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천년 또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이제 마지막 달을 맞이했습니다. 우리의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은 나의 손을 붙들어주시고, 나를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붙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손을 붙들어 주시고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기억해 주시면서 우리를 생각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시면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늘 보살펴 주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나에게 광야의 길로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나를 낮추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나를 겸손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나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로, 나의 순종여부를 시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나에게 시련을 주신 것입니다.
셋째로, 나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몸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나를 광야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지금까지 우리의 손을 붙드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축복의 땅, 약속의 땅, 영적인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인 것을 오늘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을 다 받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