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그래. 아주 반가운 일이구나. 그래 내가 말하던 규수를 보
겠느냐?"
"아닙니다. 실은
아버지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실은 이라니? 그러면 벌써 사귀고 있는 규수가 있다는 말이더
냐? 답답하구나 어서 말을 해보거라."
상옥은 그 동안 수빈이와의 관계를 소상하게 말하고 수빈이와 결
혼을 약속했다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한 얘기를 들은 아버지
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러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상옥의 마음이
조금은 안정이 된다. 그러나 이제라도 '안 된다' 하시면 모든 일은
끝장이 나고 만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상옥의 마음이 좌불안적이다.
"언젠가는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
상옥의 마음을 읽은 어머니의 말이었다
"그래 수빈이, 참한 규수지. 누구라도 아들 가진 부모라면 탐
나는 며느리감이더구나. 얼굴도 그만 하면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좀 약해 보이는 것 같더구나."
아버지는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눈을 감고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옥의 마음은 더욱 초
조해졌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상옥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임자는 벌써 수빈이 학생을 며느리로 점 찍어 두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오?"
"예, 그랬으면 해요."
상옥에게 눈을 돌리는 아버지의 표정이 의외로 밝았다
"그래, 시대가 시대이니 네가 좋아서 하는 일, 큰 허물 없
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옛말에 남아 십오 세면 호패를 찬다 했느
니라. 그런데 네 나이 이미 성년이 되었으니 장가 들어 후사를 이
어야지. 내 마음 같아서는 진작에 장가 들여 손자를 안아 보고 싶
었다만은 공부하는 학생이라 여지껏 참아온 게야. 그러나 상옥아,
결혼이라 하는 것은 인륜지대사이다 그리고 결혼이라 하는 것은
본인과 본인뿐만 아니라 가문과 가문이 결합하는 것이며, 사람을
한 번 선택하는데 따라 평생의 행 불행이 좌우되는 것이다. 너는
근 5년 동안을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고 지냈으니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래 네 생각에 그댁 규수에게
너의 평생을 맡겨도 후회 없으리라 자신하느냐?"
'네 . "
'그렇다면 내가 어찌하면 되느냐?"
"아버님께서 직접 청혼을 하여 주시면 합니다. "
"오냐. 그렇게 하마."
상옥은 날아갈 듯 기뻤다. 가장 큰 장벽이 아버지라고 생각했는
데 이토록 쾌히 허락해 주시다니! 이제 머지않은 날에 아버지가
상경하여 수빈이 부모님께 정식으로 청혼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
다면 수빈이와의 결혼 문제는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상옥 아버지는 그로부터 며칠 후에 상경하여 수빈이의 부모와
마쭈 앉았다 정식으로 청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상옥 아버지는
현식이의 안부를 묻고 몇 가지 인사치레를 한 다음 상옥과 수빈
이를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수빈이와 상옥의 혼사 문제가 거론죌
것이다
상옥과 수빈이는 문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서성거렸다 이윽
고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안방에서 상옥과 수빈이를 불러들인
것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예정된 순서이긴
하였으나 막상 결혼 문제로 양가의 어른들 앞에 앉으니 두 사람
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이다.
'편히들 앉아라."
상옥 아버지가 그윽한 눈빛으로 상옥과 수빈이의 얼굴을 번갈
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아주 환한 웃음꽃이 피어 있다.
"상옥아, 네가 나에게 부탁한 혼사 문제를 여기 양주분께 소상
히 말씀드리고 정중하게 청혼을 드렸다. 미숙한 너를 사위로 받아
주십사 하고 이제 우리 양가는 사돈의 인연을 맺기로 약속을
하였다. 이제 모두 네가 원하는 데로 이루어졌으니 이제부터는 매
사에 공평함을 소홀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토록 하거라."
"아버님 감사합니다. 아버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미욱
한 저에게 수빈이를 맡겨 주신 수빈이 아버님, 어머님께도 감사드
립니다. 앞으로 양가의 부모님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아녀, 참말로 고마운 것은 이녁이 아니라 내쪽인 것 같어야.
아무래도 느덜 사이가 심상허지 않다고 생각은 했는디 이렇게 쉽
게 내 사위가 될 줄을 몰랐지. 사람의 인연이란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벼. 그리고 현식이가 군대 가고 나서 가심이 뺑 뚫린
거 맹이로 허전허기가 이를 데 없었는데 사위 자식을 주신 어
르신께도 감사드리는만요."
수빈이는 머리를 깊게 숙인 채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얼굴은
새빨간 능금빛이었다.
"참말로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것인가며. 우리 집 하숙생이 백년
손님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 것이여! 야아 수빈안 너도 원이라고
소감을 한 마디 혀봐라."
농담 섞인 수빈 어머니의 말에 더는 못 앉아 있겠다는 듯이 수
빈이가 밖으로 나가자 양가의 부모들이 모처럼 시름을 잊고 즐겁
게 웃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상옥의 마음은 한없이 행복했
다. 지금 이 순간의 자기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도 들었다. 물론 현식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하지만 현식이도
지금 이 순간의 상옥의 마음을 안다면 누구보다도 축하해 줄 것
이다.
'현식아, 미안허게 됐시야! 이 성님, 행복혀서 죽겄시야1 이 성
님 용서하그라잉 '
그날 저녁 상옥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을 만나 수빈이와
머지않아 결혼하게 될 것임을 발표했다. 친구들은 이미 예정되었
던 일이라며 자신들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고 약혼식에 앞서 약속
식이 빠질 수가 있느냐며 집에 있는 수빈이를 불러 내 약속식을
성대히(?) 열어 주었다.
다음날 새벽 심한 갈증에 눈을 뜬 상옥은 더듬거려 물그릇을
찾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뒷맛이 이상했다 상옥이 마신 물은 달콤한 꿀물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꿀물 한 잔 얻어 마시려면 갖은 아양을 떨어야
했는데 상옥은 혼자서 히죽거리다간 깊은 새벽잠 속으로 빠
져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상옥과 수빈이 서둘러 자신
들의 관계를 부모님께 알린 것은 모든 것을 확실히 해 두고 약혼
이나 하였다가 대학을 마친 후에 결혼하자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상옥의 아버지가 완강하게 나왔다. 상옥 아버지는 기왕
지사 양가 모두가 합의한 사항이니 졸업 때까지 기다릴 필요없이
당장 결혼식을 올리라는 것이었다.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혹시 날 속인 거 아니야?"
당장 결혼식을 올리라는 상옥 아버지의 말씀이 전해지자 수빈
이 기겁을 하고 상옥에게 따지고 들었다.
"내가 뭘 속였다는 거니?"
"오빠가 분명히 말했잖아, 학교 마치고 결혼하겠다고. 그런
데 뭐야! 아버님께서는 당장 결혼식 하라시잖아. 그 이유가 뭐라
서?"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고. 좌우지간에 문제다 아버님 명령은
법인데 ."
"오빠, 이제 보니 사전에 아버님하고 밀약이 있었던 거지'
우리 부모님 허락받으면 곧바로 결혼식 올리기로 한 거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가 어떻게 너하고 상의도 없이
그런 약속을 할 수가 있겠니? 내 마음 하늘이 안다. "
그러나 이미 화살이 시위를 떠난 뒤였다. 상옥 아버지의 성격으
로 보아 이미 결심을 한 일이라면 어떤 이유로든 철회시킬 수 없
는 일이었다. 상옥은 난감했다 추상 같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수빈이에게 당장 결혼하자 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상옥 아버지가 상경하였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분명히 상옥의 결혼 날짜를 결정하러 오셨을 것
이다 수빈이는 아예 방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이거야 정말이지. 부모를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
자니 부모가 운다더니, 이 젊은 나이에 늙으신 부모와 장래 마누
라 사이에 끼여 샌드위치 신세가 웬 말이래."
어휴, 상옥은 한숨이 절로나왔다. 앞일이 난감했다. 그러나 결
국 모든 일은 상옥 아버지의 뜻대로 되었다 상옥과 수빈이, 그리
고 수빈이의 부모까지 학교를 마치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좋
겠다고 설득해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상옥이 아버지는 큰 인심
이나 쓰듯이 다음해 봄으로 날을 잡아 알리겠다는 한 마디를 남
기고는 두말없이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상옥과 수빈이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캠퍼스 커플이 될 운명에
처해진 것이다.
이제는 수빈이도 어쩔 수가 없는지 모든 것을 상옥에게 맡겨
버리는 눈치였다. 아무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해도 막무가내인 상
옥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수빈이의 부모도 기왕지사 결혼하기로 한것이니 좋도록 간절하
게 원하시는 상옥 부모님 뜻을 따르는 것이 도리라며 수빈이를
달랬다.
결국 수빈이는 상옥 아버지의 옹고집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조건부이긴 했지만. 결혼식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어 1969년 2월
7일로 날이 잡혔다. 현식이가 첫 휴가 나오는 때를 맞추어 결혼식
날을 잡은 것이다. 상옥은 수빈이가 너무나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 비길 데가 없었다. 완고한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거
스르지 않고 순순히 따라 준 것이 감사했다.
오랜만에 두 사람은 음악 감상실 '셀브르에 마주 앉았다. 방금
내온 커피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한바탕의 강풍
에 시달린 상옥과 수빈이는 이제 차라리 마음이 편안했다 밀고
땡기던 결혼식 날이 결정되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가벼을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은 그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학교에 퍼
질 소문이었다.
학교 참새들의 입방아에 오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동안 수모를 당하겠지. 그러나수모당할 때의 곤란함보다는 수
빈이와 언제나 한 방에서 한 이불 덮고 잠잘 수 있다는 행복을
생각하면 그런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던 상옥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오빠, 뭐가 우스워?"
"아냐 뭐, 그런 게 있어."
'남은 신경질 나 죽겠는데 누구 약 올리고 있는 거야?"
수빈은 아직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뾰로통한 말투였다. 그
런 수빈이를 쳐다보던 상옥이 터져나오는 웃음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는 듯 푸하하 웃음보를 터뜨렸다
'정말 왜 그래? 빨리 말해, 그 괴상하게 웃는 이유."
수빈이 소리를 꽥 지르며 눈을 흘겼다.
"그런 게 있어, 다음에 이야기해 줄게."
'지금 말 안 하면 난 갈 거야."
수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옥이 잽싸게 일어나 수빈이
를 주저앉혔다.
"좀 부끄러운 일인데, 꼭 들어야 되겠니?"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좋아! 다른 게 아니고 히히히 "
'어허, 또!"
"우리가 결혼한 후의 일을 상상해 봤을 뿐이야 "
수빈이는 한심하다는 듯 상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혀를 찼다.
"오빠는 결혼하는 게 그렇게 좋아?"
'그럼 넌 안 좋으니?"
"이 사람아! 너무 좋아하지 말게나. 자네는 결혼하는 날부터 행
복 끝, 고생 시작이라는 거 명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아마.
"그래도 나는 좋아 죽겠다. 이쁜 색시랑 한 방에서 잘 수 있고
또 한 이불 덮고 히히히
수빈이의 얼굴이 갑자기 자둣빛으로 변하면서 고양이 눈이 되
는가 싶더니 꼬집고 비틀고 때리는 등 상옥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어이구 나 죽는다! 잠깐, 잠깐. 수빈아, 맞아 죽어도 이유
나 알고 맞아 죽자. 헌집 벽 털듯 패는 이유가 뭔지 말이나 하고
죽여도 죽여라."
"몰라서 물어? 이 엉큼한 늑대야!"
"함 사시오! 함 사시오!"
석주의 고함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상옥과 수빈이의 결
혼식 전날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반쪽이 반쪽을 찾아 하나가 되기로 맹세하는 성
스러운 결혼식 날이었다. 상옥은 길지 않은 자신의 지난날을 뒤돌
아보며 두 손을 모으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와 한 번의 사고를 제외
하고는 별다른 큰 사고 없이 오늘에 이르렀고 이제 내일이면 평
생의 반려자를 맞아 긴 인생 여행을 떠납니다. 그 긴 여행의 노정
에서 때로 태산준령이나 깊은 강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힘든
고비고비를 슬기롭고 지혜롭게 헤쳐 나가며 서로가 서로를 가슴
으로 사랑하고 자신보다 상대를 더 아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을
쌓아 결코 부끄러움이 없는 행복한 삶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간
절히 바라옵니다. "
모든 절차는 순조롭게 끝이 났다 함을 팔러 온 상옥의 친구들
과 수빈이의 친구들은 어울려 즐거운 한때를 보낸 후 모두 돌아
갔다.
상옥과 수빈은 밤이 늦어 인적이 드문 장충단공원 벤치에 나란
히 앉았다. 상옥은 쌀쌀한 밤 공기에 한기를 느끼는 수빈이에게
자신의 외투를 벗어 입혀 주었다.
"수빈아, 너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 있겠니?"
"무슨 말인데?"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만에 하나라도 우
리 결혼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후회하는 마음이나 석연치 않은 감
정은 없니'"
"그런 게 있구나. 대답을 안 하는 것을 보니."
"아니야, 오빠! 오빠와 나는 꾀나 많은 날을 함께 살아왔
고 그 많은 날들을 통해서 서로를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해. 나는
우리 결혼에 대하여 후회한다거나 석연치 않은 감정은 조금도 없
어. 다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것은 있어."
'걱정이라니? 그게 뭐야?"
"오빠와 결혼해서 한 가문의 종부로서, 또 한 남자의 아내로서
얼마 만큼의 내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거야."
"수빈아, 그럼 됐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이른 나이
에 결혼을 하는 거는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거는 우리가
얼마나서로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느냐야. 수빈아! 내가 너
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지금 이 순간에 느끼고 있는 이 아
름다운 사랑이 영원해 주었으면 하는 거야."
"오빠, 난 오빠를 믿어. 그리고 사랑해. 비록 내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대학생인데 나의 평생을 맡기겠다고 결심하기까지
나라고 생각이 없었겠어?"
"나는 확신할 수 있어. 오빠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거."
'사랑한다 수빈아 "
"오빠
상옥과 수빈이는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널따란 예식장 안에 결혼 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드디
어 상옥과 수빈이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상옥이 언젠가 꿈
속에서 보았던 선녀같이 아름다운 신부가 미끄러지듯이 식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신부를 인
계받은 상옥이 행복에 겨워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윽고 모든
식순이 끝나 하객들의 축복의 박수를 받으며 신랑 신부가 나란히
팔짱을 끼고 퇴장을 했다.
그들은 양가 부모와 친족 친지들의 축복 속에서 신혼 여행길에
올랐다. 부산행 열차에 올라 자리에 앉은 수빈이는 이내 깊은 잠
에 빠져들었다.
상옥은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곤하게 잠들어 있는 수
빈이가 그렇게 예쁘고 귀여을 수가 없었다.
그들을 태운 신혼열차는 천안을 지나고 대전을 지나 남으로 남
으로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날 또한 이렇게 힘찬 것
이었으면.
열차가 대구역으로 진입하면서 속도를 줄이고 있을 때에야 곤
한 잠에 취해 있던 수빈이가깨어났다.
"어머, 이를 어째? 오빠 여기가 어디쯤이야?"
"많이 피곤했구나! 여긴 대구역이야."
'벌써 대구야? 오빠 미안해. 일생 한 번뿐인 신혼여행인데
정말 무드 없는 신부다. 그치?"
그들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석양의 풍경을 바라보며 행
복감에 취했다.
열차는 밤이 늦은 시간에야 부산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해운대
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의 전망은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
했다. 창 밖으로 밤바다에 떠 있는 상선들이 밝혀 놓은 불빛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저 멀리에서 띠처럼 하얗게 밀려
와 백사장에 부딪치며 산산히 부서지는 파도의 모습은 황홀하기
까지 했다.
그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밤바다의 아름다움을 내려다 보
았다. 아무런 말이 필요 없었다. 그들은 지난날의 아름답던 추억
들을 되새기면서 그들만의 아름다운 미래의 성을 쌓아 갈 것이다.
두 사람은 한 사람이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도 기꺼이 따라 죽겠
노라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며 손가락을 걸기도 했다. 가슴에
안긴 수빈의 촉촉이 젖은 머릿내음이 향기로웠다.
상옥은 수빈이의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지런히 쓰다듬어 노
랑 머리끈으로 묶어 주었다. 수빈이는 뭔가 근심스러운 일이 있는
지 풀이 죽어 있었다.
'오빠, 나 하느님께 벌 받을 거야!"
"왜 ?"
"오빠사고당했을 때 나 약속 했었거든! 오빠만 살려주시면 하느
님의 종이 되어 당신을 따르겠다고 기도했는데 오빠하고 결혼해
버렸으니 하느님이 배신감을 느끼실 거야
"바보, 우리가 결혼한 거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야!"
수빈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지?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신 거지? 나는 오빠와 결혼
을 안 할 수가 없었거든! 오빠를 너무 사랑했으니까!"
수빈이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리려는 듯 상옥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오빠 평생토록 나만 사랑할 거지?"
"그래! 내 생명이 있는 한 너만을 사랑할 거야. 아니 내세가 있
다면 그곳에서도 수빈이 너만을 사랑할 거야!"
상옥은 살며시 수빈이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들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감미롭고 환상적인 미지의 초야를 위
하여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부끄러움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지난 밤의 깊고
깊은 포옹은 그들 밖에 아무도 모르는 영원히 잊지 못할 아름다
운 추억이 될 것이다.
3박 4일의 신혼여행을 끝내고 상옥의 고향집으로 돌아오니 그
들에게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상옥 부모님이 신식 결혼
식이 너무 싱거웠다며 동네 친지들을 초대하여 전통 혼례식을 다
시 치르자고 했다 그들은 또 한 번의 결혼식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식장의 결혼식보다 절차도 복잡하고 힘들었지만 전통 혼례식
의 엄숙함은 그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경건하게 정돈시켜 주는
의미가 있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손을 쥐어 달라고만 했을뿐
용서해 달라고만 했을 뿐
나와 비슷하다고.
나처럼 젊고 착하다고, 너를 그렇게 여겼다
-헤세. 취소 전문
단장의 출산
학교 문제와 현식이가 군복무중이어서 상옥의 신혼살림을
수빈이의 집에서 꾸리게 되었다. 그들이 예측한 대로 결혼하고 한
동안은 캠퍼스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상옥이 생각하기에는 그
들의 놀림은 부러움과 시새움이었다.
행복한 신혼살림이 시작된 지도 6개월째에 접어들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수빈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벌써 여러 날
째 우울해한 것 같았다
"수빈아, 무슨 걱정 있니?"
"아냐."
"아닌 것 같지가 않은데?"
"왜? 공부가 잘 안 되니?"
'실은 나 휴학계를 내든지, 자퇴원을 내든지 해야 죌 것 같
아."
"뭐어? 무슨 엉뚱한 소리야? 이제 잠잠해졌잖아."
'그런게 아니고사정이 생겼어"
"무슨 사정?학교까지 그만둘 만한 사정이 없잖아?"
'실은
수빈이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상옥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
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나, 병원에 가 봐야 될 것 같아 "
'뭐어? 병원! 왜?"
"아무래도 몸이 이상해. 임신한 것 같아. 조심한다고 했는데."
상옥은 머리가 멍했다. 충격이었다. 정말 수빈이가 아기를? 그
러면 수빈이 학교는? 안 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학교는 마쳐
야 하는데 걱정이 앞서 면서도 상옥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
다. 그러고 보니 수빈이가 임신을 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요 근
래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늘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또 전에
는 안 하던 군것질까지 했다.
'정말이야? 아직은 확실히 모르잖아?"
"거의 확실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하니?"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아기가 확실하면 나아야지."
'너, 배불뚝이로 학교에 다닐 수 있어?"
"지금 학교가 문제가 아니잖아 아버님이 얼마나 기다리시는데"
상옥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저 어린 나이에 어쩌면 저렇게도
아름답고, 어른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수빈이가 너무도 대
견스러웠다.
첫댓글 잘 읽어습니다 울님들 늘 행복과 즐거운밤 되세유€€€€€€
보고 갑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즐감 합니다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저역시 눈시울이 글썽~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