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코는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나 손톱을 다듬고 있을 때, 컵에 쿨피스나 물을 따를 때-허리를 숙이고 반드시 컵을 주시하며 분량을 조절했다-자주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가끔 전혀 다른 노래도 불렀는데 그 노래는 항상 알파벳 노래였다.
ABCDEFG HIJKLMN OP의 LMN OP의 부분을 항상 하나코는 에레메노피-라고 발음했다. 그것은 몇 번이나 들어도 에레메노피-여서 알파벳이라기보다는 TV의 어린이 방송에서 나오는 시시한 주문같이 들렸다.
오른손으로 홍차 찻잔을 왼손으로 컵 받침을 들고 있는 <가츠야의 아내>는 조용히 차를 마셨다. 긴 속눈썹과 두툼하고 빨간 입술, 옆얼굴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하지만 굉장히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노래 좋아해? 라고 언젠가 하나코에게 물었다. 하나코는 잠시 생각하더니,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이라고 난처한 듯 이야기했다.
<옛날에 엄마가 가르쳐줬어>
<그래?>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는 아니지만 굉장히 좋은 느낌의 노래라서 무심코 불러 버리는 것 같아. 아마도>
하나코는 가끔 이런 식으로 사소한 질문에 묘하게 진지하게 대답할 때가 있다. 중요한 질문엔 대수롭지 않게 농담으로 얼버무리면서(아니면 무시할 때조차 있다) 그리고 그럴 때 나는 어쩐지 뒤가 켕기는 느낌이었다.
ABCDEFG HIJKLMN OP-.
<.....그렇다면>
딸각 소리를 내며 찻잔을 컵 받침 위에 올려두고, 테이블로 돌아온 <가츠야의 아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이곳에도 없는 거군요>
네, 라고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테이블 위엔 밀크 티가 담겨진 홍차 찻잔 2개가 올려져 있다.
하나코가 두고 간 깡통에 들어 있는 비스킷을 두 세개 컵 받침 위에 올려 두었더니 아직 손도 안 된 채 그대로여서 그 탓으로 홍차는 지독히 소녀 취향 적인 것이 된다.
나는 아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어딘가 매우 특수한 단어 같았다.
<저기>
가츠야의 아내는 조그맣게 기침이라도 하듯 말하며 난처한 듯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가츠야가 있는 곳에 간 거 아닐까, 라고 매우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네?>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켄고를 믿고 있는 것 보다 전면적으로 하나코를 믿고 있었다.
<왜 그렇게 하나코를 만나고 싶어하는 거죠?>
내가 묻자, 가츠야씨의 아내는 손아래 있는 홍차찻잔을 바라보며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라고 대답이 되지 않는 말을 했다.
<알고 싶었어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떻게 웃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 지>
신기한 것은 가시 돋친 말처럼 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갑자기 표정에서 힘이 빠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츠야씨의 아내는 목소리를 조금 가다듬었다.
<그리고 당신과 만나고 싶었어요. 당신이 하나코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홍차를 마셨다.
이 사람과 만나는 건 두 번째이다. 첫 번째는 가츠야씨의 결혼식때.
그때는 가츠야씨의 신부로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선보는 자리에서 가츠야씨가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미녀에다 머리도 좋은 아가씨.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게 될 날이 오리라곤 물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 둘>
아름다운 머리카락-마치 샴푸 CM에 나오는 사람처럼 풍성하고 윤기 나는 곧은 흑발-을 한쪽은 귀에다 건 가츠야씨의 아내는 오히려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헤어지기로 했어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른 사람의 일인데도 동요한 것은 하나코 때문일까.
가츠야의 아내는 작게 미소지었다. 무릎 위로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손가락.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미안하지만 하나코씨가 돌아오면 연락 좀 해 줄래요?>
나는 연락하기로 약속했다.
<어떻게 하나코씨와 같이 살 수 있는 거죠?>
비난은 아니었다.
<어떻게?>
되돌아 온 말 앞에는 나는 10초간 우두커니 서서
<글쎄요>
라고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가츠야씨의 부인은 충분히 10초간 기다린 후 대답이 없자, 그럼 갈게요. 라고 말했다.
마치 질문같은건 하지 않았던 것처럼.
<.....저기>
복도로 나가는 가츠야씨의 부인을 불러 세우고, 이번엔 내가 질문했다.
<하나코랑 가츠야씨 끝난 거 아니었어요?>
글쎄요, 라고 말하며 가츠야의 아내는 살짝 고개를 숙인다.
그대로 바닥에 물끄러미 시선을 두곤
<가츠야는 부정하고 있지만 이젠 끝났다고>
라고 진중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 만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덧붙이고 생긋 웃는다.
<끝난 건지 어떤 건지 난 몰라요>
그것은 모르겠다기보단 이미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울렸다.
그런 일은 이미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럼 갈게요>
라고 다시 한번 말하며 가츠야씨의 아내는 돌아섰다.
들고 있던 핸드백에서 은색 열쇠고리에 걸려 있는 자동차 키를 꺼내면서.
나는 립스틱을 바르고 코트를 입고 혼자서 밤늦게 영업하는 커피숍에 갔다.
역 맞은편에 있는 작은 가게로 커피숍이라기보단 밤에는 바가 되지만 커피만 주문해도 싫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메마른 바람을 얼굴과 목으로 느끼면서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별이 뿌려진 넓은 밤하늘이 기분 좋았다. 겨울밤의 향기.
추위가 지면에서 서서히 올라온다. 나는 코가 차가워지면서 이럴 때 운전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가츠야씨의 아내처럼.
선실처럼 꾸며놓은 가게 안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어 있었다. 문에는 다람쥐. 입구에는 작은 전나무에 전구만 연결한 심플한 장식.
가게 안은 매우 따뜻했다. 코트를 벗고 카운터에 앉는다.
카페오레를 주문하며 가츠야씨의 아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을까, 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제 가츠야씨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
하나코는 타인을 상처 입힌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뜨거운 카페오레는 맛있었지만 바깥세상으로 나오면 언제나 그러하듯 나는 금세 켄고를 사랑하게 된다. 켄고는 분명 버본을 주문하겠지. 여기에 앉아서 등을 둥글게 굽히고 커다란 양손으로 컵을 감추듯 잡고 위스키에 섞은 얼음을 바라본다.
나는 마치 실제로 켄고가 옆에 있는 것처럼 그것을 하나하나 머리 속으로 그렸다.
밤늦게 혼자서 그런데 앉아있는 나에 대해 료코가 말한 적이 있다.
료코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남자를 유혹하는 행위로 보인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은 건-우리는 긴자에 있는 바에 있었다-여름이었고 어떤 영화를 보고 난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웃었다. 그건 너무 지나친 생각이야. 바보 같긴.
지금이라면 나는 웃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날 카츠야씨의 전화를 받았다.
<미안>
전날 아내의 방문에 대해 가츠야씨는 그렇게 말했다.
<성가시게 했지?>
가츠야시의 목소리는 낮다.
<아름다운 부인이던데>
내가 말하자 가츠야씨는 응, 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은 훨씬 더 차분한 여자야>
라고 말하며
<실례되는 말도 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이라고 미안한 듯 말했다.
<알고 있구나>
나는 짧게 대답했다.
<신경 쓰지마>
우리들의 대화는 툭툭 끊긴다.
<켄고와는 헤어진 거야?>
<응>
이라든가
<크리스마스에 어디 갈 꺼야?>
<아니 별로>
라든가
<유럽은 어땠어?>
<나쁘진 않았어. 돌아오기 전 반년정도는 조금 지겨워졌지만>
<유럽의 어디였어?>
<독일의 서쪽에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이 사람을 그곳에서 하나코와 만난 것이다. 켄고가 그렇게 말했었다.
<어떤 곳이야?>
가츠야씨는 2,3초 생각한다.
<아름다운 곳, 빵이 맛있었어>
<그렇구나>
이 사람이 그곳에서 하나코를 만난 일이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생활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다음 주에 켄고와 만나기로 했어>
말투를 바꾸어 그렇게 말한다.
<켄고와?>
<응 오랜만에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코와 만나 하나코를 좋아하게 된 두 남자가 함께 밥을 먹는다니.
<그녀석 일 그만두었다면서?>
가츠야씨가 말해서 나는
<그런 것 같아>
라고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그것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굉장히 남의 말처럼 울렸다.
그리고 곧 켄고의 아르바이트가 정해져 우리들은 결국 다음주에 셋이서 만났다.
<식사>는 물론 야키니쿠다. 학생 때부터 늘 야키니쿠였다.
<오랜만이야>
그렇게 말하며 웃는 가츠야씨의 사각형 얼굴은 변함 없이 햇볕에 타 있었다. 분명 골프를 치다 햇볕에 탄 거 겠지. 이 사람은 그런 식으로 나이를 먹었다.
켄고도 가츠야씨도 정신 없을 정도로 잘 먹고 잘 마신다. 나는 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사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리운 밤이었다. 켄고의 아르바이트가 정해진 걸로 건배했다(렌터카 대리점에서 접수수속이나 타고 난 차를 가지러 가는 아르바이트였다)
옛날 이야기와 누군과의 소식, 럭비부 후배들의 최근 전적에 대한 이야기 등을 했다. 하나코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가는 말로-어디에 있는 걸까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만 이야기했다.
모두 하나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이 무거워졌다.
우리들이 굉장히 나이를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많이 먹어 배가 터질 것 같이 되어 돌아오는 길. 온몸으로 구운 고기냄새를 발산하며 걸으며
<그저께 이혼했어>
라고 가츠야씨가 말했다.
우리들은 놀라지 않았다.
교실은 방학이 되어 나는 극단적으로 한가해졌다.
매일 빈둥빈둥 거리며 보냈다. 하나코처럼.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올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트리도 꺼내지 않았고 선물을 사지도 받지도 않았다. 외롭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보낸-그것은 수업시간에 만든 것으로 어느 것이나 비슷하고 단순한 것이었다-카드에 섞여 하나코가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가 도착했다.
크리스마스가 3일정도 지난 후였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 카드를 보낸 장소였다.
봉투에는 외국우표가 붙여져 있었고 낯선 스탬프가 찍혀져 있었다. 포인세티아가 그려진 멋진 무늬의 카드였다. 파란색 사인펜으로 맨 처음엔 크게 메리-크리스마스! 라고 힘있는 글자로 쓰여 있었고 그 아래 편지가 덧붙여져 있었다. 편지는 같은 색 사인펜으로 첫줄보다 훨씬 가는 글씨로 쓰여져 있다.
리카씨 잘 지내고 있어? 지난주 홍콩에 왔어. 오늘은 양가휘가 나오는 영화를 봤어.
티켓 멋대로 가져가 버려서 미안. 하지만 어차피 안 쓸 거였지?
그럼 리카씨도 크리스마스 잘 보 내. 야부우치씨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하나코-
나는 아연실색했다.
료코에게서 온 에어메일을 넣어둔 테이블 서랍을 열어보았더니 확실히 티켓이 없어져 있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미네랄 워터를 꺼내 컵에 따라 마시고 다시 한번 그 편지를 읽었다.
어디에다 초점을 두고 화를 내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하나코가 갑자기 그런 식으로 나가 버린 것.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 나의 티켓으로 홍콩에 간 것.
<홍콩?>
의아스럽게 말한 후 숨이 넘어갈 듯 웃는다.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홍콩이구나,,,,,,몇 번이나 말했다. 전혀 화가 나지 않는 듯 하다.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거야>
슬픈 기분이 되어 내가 말했다.
<응?>
<비행기 티켓 1년 동안 쓸 수 있는 거라고>
꽤 오래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몰라, 라고 말하자 켄고는 힘없이 웃으며
<그런가>
라고 말했다. 견딜 수 없게 생각되었다.
하나코가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에 대해 가장 분개한 것은 료코였다.
<그건 분명한 도둑질이야>
한참 화를 낸 후 료코는 관광객용 호텔에 묶고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서 설교할꺼야,라고 단언했다.
<두근거리네>
라고까지 말해서 웃어 버렸다.
료코가 별다른 일은 없어? 라고 묻기에 가츠야씨 부부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원인은 하나코?>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묻는다.
<글쎄>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 아내가 일부로 하나코를 만나러 온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것만은 아니겠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 할 생각이었는데 료코는 한숨을 내 쉰다.
<그렇게 괜찮은 여자야?>
전혀. 라고 부정한 이유는 괜찮은 여자라는 말이 도무지 하나코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기분은 알겠지만>
료코는 오해 한 것 같다. 달래듯 그렇게 말한다.
<어쨌든 몇 군데 호텔 알아보고 결과는 나중에 보고 해 줄께.>
어쨌든 고마워라고 말했다. 료코의 제안이 우정을 위한 건지 호기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전화를 끊고 소파에 누워 생각했다.
대체 왜 하나코는 홍콩에 간 걸까 언제까지 있을 생각일까, 돌아오면 다시 이곳으로 올까.
난방이 너무 심한지 목이 따끔거렸다.
정월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창문을 열자 밖은 공기가 뚜렷이 새해가 되어 있었고 그 청결한 공기를 폐 깊숙이 들어 마셨다.
정월다운 일이라면 그 정도였다.
섣달 그믐, 낮잠을 자는데 켄고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둘이서 역의 홈에 서서 켄고가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서 신기한 것을 계속해서 꺼내 보여 주는 꿈이었다.
제일 처음에 토끼, 병따개, 고무공, 도자기로 된 주전자, 연근, 구두(남자용 구두로 끈이 달린 것)뿌리 없는 난초, 나는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꿈이었지만 꿈속에서 우리들은 연인사이 같았다.
잠에서 깨어서도 꿈속의 그 장면을 몇 번이나 생각해내고 공상하며 즐겼다.
오랜만에 꾼 좋은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