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념으로 서원하노니
미래세 다하도록
필사(筆寫)한 이 경전 파손되지 말기를
설사 삼재로 대천세계 부서진다 하더라도
이 사경은 파괴되지 말지어다.
만약 일체 중생 이 경에 의지하여
부처님 뵈옵고 법문 들으며 사리 받들고
보리심을 발하여 용맹정진으로
보현행원 닦으면
깨달음 얻으리라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염원으로 경전을 필사하여 왔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되면서 경전의 수입과 더불어 사경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사경은 불교경전을 베껴쓰는 것이다. 불교경전은 부처님 말씀이고 부 처님 말씀은 진리이므로 사경은 진리를 쓰는 것이다. 불경은 불교에서 불·법·승 삼보 가 운데 법보로서 법신사리(法身舍利)이다. 『법화경(法華經)』보문품에서는 '어디서든지 이 경 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거나 쓰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다시 사리를 봉안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는 이미 여래의 전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와 같이 경전은 여 래의 법신사리이고 전신사리이기 때문에 사경은 부처님 사리를 대하는 자세로 필사하는 신 앙행위이다.
이러한 사경은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신앙의식으로 각 시대를 거치면서 그 전통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역사적인 불교 핍박의 영향으로 계속되지 못하고 단절의 상태에 있었다. 이제 그 동안 잊혀왔던 사경을 통하여 찬연하게 빛났던 전통적인 신 앙의식을 회복하여 참된 삶을 향유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Ⅱ 寫經의 對象
사경의 대상은 불교경전이다. 불교경전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문자화한 것으로 불경, 경문, 경이라 한다. 사경이란 말은 엄격히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을 가리키지만 경, 율, 논의 삼장, 즉 일체경(一切經)으로 통칭되는 대장경 모두 를 대상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사경은 부처님이 정한 교단의 규율인 율이나 이들을 조직적 으로 논술한 논을 필사하였다 하여 사율 또는 사론이라 하지 않고 불교성전 모두를 대상으 로 하여 사경으로 불리고 있다.
불교성전은 원래 고대 인도의 표준어인 범어(梵語-Sanskrit)로 표기되 었다. 그 뒤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및 동북 아시아로 전해진 북방 불교권에서는 범어 성전이 중국어나 서장어로 번역되어 유통되어 왔다. 그리고 남방 불교권은 이곳의 언 어인 팔리(Pali)어로 표기되어 인도 남단의 세일론, 미얀마, 타일랜드 등에 전해져 이른바 남 방불교는 모두 팔리어 성전을 사용하여 왔다. 이렇게 전해진 범어와 팔리어 성전은 초기에 패트라(貝多羅, pattra)라는 나무의 잎에 필사한 것으로 패엽경(貝葉經)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한역된 불교성전이 전래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 고 있다. 삼국시대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경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이라 모두 필사의 방법으로 베끼지 않으면 유통될 수 없었던 시기였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경로와 시기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 으나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통하여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는 기록이 최초의 사실로 공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중국에서도 불교경전 의 번역이 시작 단계라서 겨우 몇 종의 경전이 전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교성전의 한역은 서기 67년에 한역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필두로 하여 1064년의 『부자합 집경(父子合集經)』까지 천 년이란 오랜 시간이 걸려 번역 작업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장경이 오랜 세월에 걸쳐 번역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까지 번역된 경전에 한하여 수입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 수입된 경전 은 모두 필사의 방법으로 유통시켰던 것이다. 참고로 해인사 대장경판은 전체 1,496종 6,548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Ⅲ 寫經의 信仰儀式과 功德
1. 信仰儀式
불교성전의 필사는 불교가 수입되던 초기에는 불교교리를 널리 알리 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경이 널리 유통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 더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옮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흐트러짐이 없는 엄격한 신앙행위가 따르 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불경은 불, 법, 승의 삼보 가운데 가장 핵심되는 법보이기 때문 에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불경은 법신사리로 부처님의 전신사리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므 로 불교경전은 전시사리로서 불상이나 불탑과 마찬가지로 예배대상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사경은 부처님 사리를 대하는 자세로 필사하는 신앙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사경의식에 관하여는 신라 백지묵서(白紙墨書) 『대방광불화 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사경은 755년 황룡사 연기조사의 발원에 의해 백지에 먹으로 쓴 당나라 실차난타가 번역한 80권짜리 『화엄경』이다. 이 『화엄경』의 권 말에 있는 발문(跋文)에는 사경하게 된 동기 및 방법, 의식절차, 그리고 당시 관여한 사람들 의 관등과 신분이 적혀 있다. 이것을 통해 보면 신라시대의 사경은 단순한 필사(筆寫)가 아 니라 엄격한 신앙의식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경제작은 사경용 종이를 제작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사경지는 닥나 무를 재배할 때부터 일반 종이와는 달리 닥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리면서 키워 닥껍질을 벗 겨 삶아서 종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참여한 사람은 모두 보살계를 받고 정성껏 종이를 만들 어 내었다.
사경할 때의 의식은 순정(淳淨)한 신정의(新淨衣), 곤수의, 비의(臂衣), 관(冠), 천관(天冠)들로 장식한 두 청의동자(靑衣童子)가 관정침(灌頂針)을 받들며 그 뒤를 기악인(技樂人) 4인이 음악을 연주하며 따른다. 이어 향수를 뿌리고 꽃을 뿌리는 사람이 따 르며, 그 뒤를 한 법사가 향로를 받들며 또 한 법사는 범패를 부르는 뒤에 여러 필사들이 각기 香花를 받들면서 사경하는 장소에 도달한다. 사경소에 도착하면 삼귀의와 삼배를 하고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화엄경』에 공양하고 사경사들은 사경을 시작하였다.
사경하는데는 필사(筆寫)하는 사람, 경심(經心)을 만드는 사람, 불, 보 살상을 그리는 사람이 참여하였는데, 모두 보살계를 받고 대소변을 보거나 잠을 자고 난 뒤 에나 음식을 먹거나 하면 반드시 향수를 사용하여 목욕을 하도록 했다.
경전의 필사를 모두 마치고 경심을 만들거나 불, 보살상을 제작할 때 는 청의동자가 이끄는 행사는 생략되었으나 나머지는 동일하였고 경심에는 사리를 넣었다.
이상과 같이 사경제작은 엄숙하고 장엄한 의식 절차에 의해 행해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경의식이 모든 사경에 다 적용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나 대부분의 사경이 단순 필사가 아니라 신앙의식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불교가 수입된 이후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경이 있었는데 인쇄술이 발달되기 전까지는 주로 연구 독송을 목적으로 하였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사경 은 간행을 위한 필사와 수행과 공덕의 방편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사경은 의식이 간소화 되고 생략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신앙행위로 계속되어 왔다.
2. 寫經을 통한 修行과 그 功德
사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고 익혀 실천하는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사경의 과정은 바로 수행의 과정이 된다. 그러나 현존하고 있는 고려시대 이 후의 사경에서 보듯이 당시에 유행한 일종의 의례적인 신앙의식에 의해 제작된 사경이 많 다. 그리하여 이 당시 사경은 공덕경(功德經)이라고 불리고 있다. 물론 사경이 공덕을 쌓기 위한 불사이고 공덕이 되는 것은 틀림없으나 신앙의식이나 수행과는 별도로 사경의 또 다른 이름처럼 이해되고 있음은 잘못된 것이다.
공덕은 불교의식이나 수행 또는 신앙적인 실천으로 얻어지는 실천행 위임은 틀림없으나 공덕경이란 말은 맞지 않는 것이다.
사경공덕에 대해서는 『금강경』『법화경』『도행반야경』『수능엄 경』 등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다. 그중 『법화경』법사품에 보면 "어떤 사람이 『법 화경』의 한 구절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고 해설하고 베껴 쓰거나 이 경전을 공경하기 를 부처님과 같이하며 갖가지 꽃, 향, 영락, 자루향, 바르는 향, 사르는 향, 당기·번기·의 복·풍악으로 공양하거나 합장하고 공경한다면 약왕이여, 이 사람들은 이미 십만억 부처님 께 공양하였고 또 여러 부처님 계신 곳에서 큰 서원을 성취하고 중생을 어여삐 여겨 이 인 간세계에 난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고 했다. 이렇게 사경에 대한 공덕은 십만억 부처 님께 공양했고 이미 불도를 성취하고 중생을 위해 일부러 이 세상에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법화경』권발품에는 『법화경』을 서사하면 도리천에 태어 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서사공덕이 큰 것임을 말하고 있다.
사경공덕은 필사자의 입장에서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사경행위를 통한 수행과 실천행으로 얻어지는 공덕이고, 다른 하나는 불법을 널리 알리고 경전을 후세에 전하는 유통 차원의 공덕이다. 다시 말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공 덕이다.
공덕이란 부처님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이해하며, 실천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래되고 있는 대부분의 불교경전의 권말에는 비 록 자신이 쌓은 공덕이라도 자기 한 사람의 것으로 하지 않고 널리 일체 중생에게 미치게 하고 모든 중생과 더불어 불도를 이루게 하기를 빌고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러한 진지 한 자세가 바로 사경에 임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마음 자세인 것이며 참된 공덕을 쌓는 행위이다.
사경은 그 과정이 수행 행위이며, 신앙의식의 행위를 거치는데 이러 한 과정에서 생기는 수행력으로 자리이타의 보살도를 실천함으로써 쌓이게 되는 것이 공덕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