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신실한 선포
제네바교회의 예배의식에서 보듯이 예배에서의 핵심적인 가장 중요한 요소는 봉독한 성경말씀의 선포인 설교에 있습니다. ‘교회를 올바르게 분별하는 바람직한 표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에 의한 말씀의 신실한 선포를 교회의 표지로 여겼습니다. 교회의 표지에서 말씀의 신실한 선포와 함께 하는 성례의 올바른 시행과 권징의 정당한 시행은 모두 말씀의 신실한 선포가 있음으로써 교회에 따르는 표지가 됩니다. 말씀의 신실한 선포가 전제되지 않으면 다른 두 표지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신실한 선포와 관련하여 한국 교회의 현실에 주목할 만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교회의 표지를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다른 두 표지 또한 덩달아 자동적으로 상실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이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근, 현대교회사에서 세계 온 나라에 있는 교회의 실정도 그렇지만, 한국교회가 보여 온 교회 모습은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의한 복음 전파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움에 있은 사도시대와 교부시대에서의 교회, 그리고 교회개혁 운동을 통해 개혁교회를 세움에 있은 종교개혁시대에서의 교회는 자칭 교회였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성립되어 있는 그런 정통의 교회는 아닌 ‘사단의 회’1)로 불리는 거짓 교회였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개혁이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개혁자들에 의해 “교회는 이런 것이다!”하는 새로운 정의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며, 지금의 교회 또한 그럴 것입니다.
사단의 회로 불리는 거짓 교회는 참된 교회와 다른 모습에 있는 것에서가 아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해 주고 있는 바인 ‘다른 복음’ - A와 유사한 A’인 것에서가 아니라 A가 아닌 A와 전혀 다른 B인 것에서 이다 - 을 말함에 있는 것인 교회가 아닌 다른 것에 있는 것, 곧 참된 교회가 아닌 거짓 교회인 것에서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는 것인지는 그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아니면 사단의 회에 있는 거짓 교회인지 그 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의한 죄로부터의 구원이 지닌 거룩성으로 충만한 참된 교회인지 아니면 죄의 부패성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 거짓 교회인지 교회 속성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만일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의해서 교회의 표지가 말해지지 않고 다른 것에서 말해질 수 있다고 하면 자칭 교회가 표지로 삼는 것이 교회의 진위와 속성 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고 맙니다. 그럴 경우 로마카톨릭교회가 제시하는 교회의 기준에 의해서 참된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카톨릭’(Catholic)이란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보편성’을 교회의 속성으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보편성’은 교황청이 만들어 각 교회에 하달하여 제시한 전례를 따르는 것에 있는 것으로 참된 교회에서 의도하는 ‘보편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해서, 종교개혁 당시 로마카톨릭교회의 규모는 엄청난 크기와 위엄을 지닌 건물로 건축되고 그 안에서 행하는 예전으로 채워졌습니다만, 그럴지라도 교회이기는커녕 사실상 사단의 공회당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로마카톨릭교회와 함께 교회사에서 출현하는 나름 교회라고 하는 각양 형태가 출현해 왔습니다. 교회 내에 있은 유대주의자들을 비롯하여서 영지주의자, 에비온파, 마르시온주의자, 몬타누스주의자들이 있어왔으며, 이러한 출현은 작금에까지 이어져 현대종교에 의하면 문제성 있는 사이비종교가 100여개에 이르며 그 추종자만도 200여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초대교회가 한창 세계로 뻗어나가던 시절에는 니케아 신경(325년)과 콘스탄티노플 신경(381년)은 사도신경을 좀 더 확장하되 “교회는 하나뿐이며, 거룩하며, 보편적이요, 사도적입니다.”라고 신앙고백에 있어 온 사실을 주의 깊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시대를 맞이하면서는 개혁교회들이 교회의 하나 된 일치에 있는 것에서 신앙고백서와 신앙고백문답서를 작성하여 온 것을 함께 생각해야겠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개혁자들의 한결같은 목표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를 정확하게 정의하는데 이구동성으로 ‘말씀의 신실한 선포’를 교회의 첫째 되는 표지로 확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있어야 말씀 선포는 선포되는 내용이 철두철미 성경적이라는 데서 성립됩니다. 즉, 선포에 있는 말씀이 지닌 내용의 문제였지 형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요즈음 흔히 보듯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예배 의식 중의 하나로 차례가 되면 목사가 강단에서 성경 구절을 읽은 후 그것에 대해 설교해 나가는 의식을 행하고 성도는 그 참여에서 의미를 갖는 일종의 형식의 문제가 아닌, 그 의식에 의해 설교를 함으로써 성도에게 전하는 말씀이 지닌 내용이 의미하는 바인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어 그 믿음에 있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작금의 교회에서 선포되는 소위 설교가 진정한 말씀 선포라고 볼 수 있느냐 할 때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주의이기는커녕 차라리 일종의 담화주의 또는 만담주의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세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웃고 울리는 만담 일색이거나, 철학적 사상으로 도배한 교양 일색이라거나, 센티멘털한 내용으로 청중들의 감정을 덥혔다가 식히기를 반복하는 감성 일색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지요. 이것은 속칭 설교 기법을 비판한 것이고, 더 심각한 문제는 선포된 내용에 도사린 인본주의 일색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온갖 성경적 용어들로 채색한 기독교주의라는 형태의 새로운 종교운동도 포함됩니다. 이는 개혁된 교회의 정통성을 벗어나 있으며 기껏 채색된 무늬만 그러싸할 뿐인 개신교 그룹으로 제도권으로 있는 교회들의 경우에서 보게 되는 것으로, 요즈음 유행하는 표현으로는 이머징 교회들이 그러하며,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교회들이 그렇구요, 예전에는 헌신예배이니 찬양예배이니 간증예배이니 일색으로 이런저런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이끌어가려는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씀 선포의 정통성을 형식이 아닌 말씀이 신실하게 증거되는 내용에서 찾아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는 말씀을 도구로 쓰시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이방 종교에서 말하는 식으로 선포되고, 교회 내에서 암덩어리의 세포요 인체에 해로운 바이러스균으로 활동한 이단의 설을 말하며 사이비 신앙의 추구에 있게 하고 미신적이요 무속적인 신앙으로 열심을 갖게 하는 선포에 있는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없는 까닭에 그 진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역사하실 리가 없습니다. 진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17; 5:33; 8:32; 16:13).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최선을 다함에 있어야 하며, 말씀 선포에 있는 설교자인 목사는 이 직무를 수행함에 기도와 함께 참으로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렇게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믿음에 있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에 신실해야겠습니다.
그 예를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한 곳인 베뢰아 사람들에게서 봅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 17:10-12)
이 성경 구절 앞서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사도행전 17장 1-9절에 의하면, 바울과 실라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가 그곳에서 세 번의 안식일, 곧 3주간 머물며 매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성경을 펴놓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설교는 메시야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설명하고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감동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신자가 되었는데, 많은 경건한 헬라 사람과 그 도시의 귀부인들도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시기한 유대인 지도자들이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이에 폭도들이 바울과 실라를 끌어내어 시의회에서 처벌받게 하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습니다. 하지만 폭도들은 두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대신에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끌고 의회로 가서 아우성을 쳤습니다.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은 바울과 실라가 이곳에도 왔는데 야손이 그놈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소. 그놈들은 모두 가이사 대신에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반역자들이오.” 이 말을 들은 시민과 치안관들은 이 일을 처리하는 일로 한때 떠들썩하였으나 보석금을 받고 그들을 놓아 주었습니다. 그 일이 있음으로 바울과 실라의 신변의 위험을 느낀 신자들은 안전히 보호하고자 그날 밤에 서둘러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에 닿자 두 사람은 늘 하던 대로 그곳에서도 역시 회당에 가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복음을 듣는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는 다르게 신사적으로 대하며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귀를 기울여 들으며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울과 실라가 가르치는 말이 과연 진실인지 알고자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확인에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믿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헬라의 상류계급 귀부인들과 남자들의 수도 적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있는 성령의 역사가 무슨 일에 있게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전하며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라고 하는 것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았으며, 이곳 베뢰아에서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으니 그들 중에는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성령에 의하여 얼마나 놀라운 이적을 일으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며 그분을 주로 받아 섬기는 믿음에 있는 것은 바울과 실라, 그리고 그들이 전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르는 자들을 반대하고 대항에 있는 것과 대조하여 볼 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이적에 의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 이적이 ‘믿을 때’만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겠는지요. 아닙니다. 날마다 믿는 자에게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서는 그 이적이 나타남에 있는 성령의 역사인 믿음의 역사가 말해지는 삶의 여정에 있어 남겨진 흔적, 곧 육체에 예수의 흔적을 뚜렷이 갖습니다(갈 6:13). 이것이 믿는 자가 예수의 사람이라는 명백한 표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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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2:9; 3:9)
*본 글은 주언개혁교회(장수민목사 시무)의 안내서인 '주언개혁교회(Guide Book for the Life of Jooeon Reformed Church)'에 의해서 허락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 글 내용과 전개를 그대로 따르면서 부천개혁교회에 보충, 보완이 필요한 부분만 임의로 더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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