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요
약200만년전인 신생대의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화산섬으로 극동 아시아에 위치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섬이다.
서남단 해상에 위치60여 개의 부속도서(유인도9개)를 포함한 가장 작은 도(道)이다. 동서의 길이가 길고,
중앙에 한라산(1950 m)이 있는 타원형의 화산섬으로 고도에 따라 한대에서 아열대에 이르는 각종식물이 분포한다.
(약 1,800여종) 인 구 : 약 53만명
위 치
동 경 : 126도10분 ~ 126도58분 북 위 : 33도 12분 ~ 33도 34분
제주 ~ 서울 : 452.0 km 제주 ~ 부산 : 297.6 km 제주 ~ 일본 : 240.0 km
면 적 / 크 기
총 면 적 : 1,845 km 동서길이 : 74 km 남북길이 : 41 km 해안선 길이 : 263 km (해안도로길이 : 182 km)
지 형
화산활동및 빙하 해수면 변동과 지각운동에 의한 지형의 변화에 따라 제주도는 대륙과 連陸 되었다가
또 孤島로 변화 하는등 이러한 상태가 여러차례의 반복으로 인하여 특수한 오늘의 제주도가 형성 된 것으로
< 추정 하고 있으며 섬의 중앙에 위치한 한라산 정상에는 그당시 화산활동의 분화구인 직경 700 m의
백록담을 볼수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사면은 3°∼ 5°의 매우 완만한 경사이며, 남북사면은 5°정도로
약간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섬의 곳곳에 오름 이라 불리우는 약 360 여개의 기생화산(奇生火山)으로
형성된 작은 봉우리 들이 산재. 고도200 m 이하의 해안지대가 섬전체 면적의 55.3%를 차지하고 있다.
해발 200 m 이하의 해안지대와 주거지, 농경지 및 과수원으로 이용 해발 200m-500m의 중산간지대는 목장을 비롯한
관광지와 유휴지, 해발 500m-1000m 의 산지 산림 및 목야지 해발 1000m이상은 한라산 국립공원으로 지정 보호
지 질
퇴적암층과 현무암,조면질안산암(粗面質安山岩),조면암등의 화산암류와 기생화산에서 분출한 화산쇄설암(火山碎屑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부 지방의 점사질 토양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흑갈색의 화산회토로 덮여있다.
약200만년전인 신생대 제3기에 화산활동에 의해 분출한 조면암(粗面岩)이 원래의 기반인 화강암(花崗岩)을 덮고,
그 후 다시 제4기에 현무암(玄武岩)이 분출되어 그 위를 덮으므로서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지표면은 투수성(透水性)이 강한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비교적 많은 강우량에도 불구하고 지하로
빠져들어 하천은 거의 대부분 건조한 상태가 되어서 물이 흐르지 않아 제주에는 물을 이용하는 논농사가 없고
잡곡 위주의 밭농사가 주를 이룬다.
제주의 유래
제주도의 옛 이름인 '탐라'의 의미는 '깊고 먼 바다의 섬나라'라는 뜻이라 한다. 그 밖에 문헌에 따라
탐모라,서모라,섬라,담라,둔라,모라,탁라,영주,제주 등 이다. 영주는 중국의 신선설에서 비롯되었으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도 불렀다.지금의 제주란 명칭은 고려 고종(1214년)때부터 사용하기 시작 하였다.탁라의 탁자는
'풀입 책'이며 라 자는 '벌릴 라'로 나라를 뜻한다. 그래서 탁라는 '풀로 짠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의
뜻이라고 한다. 제주는 '바다를 건너가는 고을'이란 뜻이다.
제주의 역사적 배경
제주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년전인 신생대 제3기에서 제4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차례의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火山島이다. 화산활동및 빙하 해수면 변동과 지각운동에 의한 지형의 변화에 따라 제주도는 대륙과
連陸 되었다가 또 孤島로 변화 하는등 이러한 상태가 여러차례의 반복으로 인하여 특수한 오늘의 제주도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 하고 있으며 섬의 중앙에 위치한 한라산 정상에는 그당시 화산활동의 분화구인 직경 700 m의
백록담을 볼수 있다. 제주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섬의 북부지방인 제주시와 북제주군 일대에서
선사문화 유적 발견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원주민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고, 양, 부 三姓이 건국하였다는
三姓神話가 있으나 그 정확한 연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제주도의 역사는 州胡, 涉羅, 耽牟羅,耽羅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우는 部族國家로 이어져 내려 왔으나 웅대한 왕국이나 고도의 문화국가를 이루지는 못하여 백제,신라,
고려에 屬國이 되면서 독립국가적인 명맥만을 이어 오다가 고려 숙종10년 (서기1105년)에 비로소 고려의 중앙집권제
밑에 들어가 耽羅郡이 되었으며 제주라는 명칭은 고려 고종때(서기1214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고려왕조가
元나라의 침략을 받아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삼별초가 제주를 최후거점으로 항거를 전개하므로 고려 원종14년 (1273년)
蒙古軍이 제주를 침범하여 약 100 여년간 원의 직할통치인 탐라총관부 에 의하여 외국의 통치를 받은 쓰라린 역사를
기록 하기도 하였다. 朝鮮朝에 들어서도 제주는 버림받은 오지도서 취급을 받아 조선조의 정객 과 학자들의 流配地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이때 유배되어 내려온 우암 宋時烈, 추사 金正喜등 많은 정객과 학자들의 訓學으로 인하여 제주에
儒學의 보급과 문화 발전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효종4년(서기1653년)때에 제주도의 유일한 正史文獻인
" 耽羅志 " 가 만들어 졌으며 조선조 이후 日帝治下를 거쳐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전라남도에서 분리 "道" 로 승격하여
오늘의 濟州道에 이르고 있다.
주 요 연 대 기
선사시대 - 동굴 혈거생활 (유적지 :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 동굴)
고대 - 毛興穴에서 三姓神人(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용출 - 농목생활
- 국호 : 탁라, 耽羅, 涉羅, 耽浮羅, 耽牟羅, 瀛州
- 三國과 교류 : 신라에 入朝
고려시대 - 938 (태조21년) 탐라태자 高末老 고려에 입조
- 1002 -1007 기생화산군 마지막활동 (휴화산이 됨)
- 1105 (숙종10년) 탁라를 고려중앙집권제 耽羅郡으로 개칭
- 1271 (원종12년) 삼별초 입거, 김통정 항파두리에서 대몽항쟁
- 1273 (원종14년) 麗蒙聯合軍 삼별초 진압, 몽고 직할령으로 예속
- 1374 (공민왕 23년) 최영장군 몽고토벌, 1세기동안의 몽고지배종식
- 1376 (우왕 2년) 왜구 침입
조선시대 - 1394 (태조3년) 제주향교 설립
- 1416 (태종16년) 濟州牧, 정의현, 대정현,으로 3현 分置
- 1448 (세종30년) 관덕정 창건
- 1653 (효종30년) 서양인 네델란드 하멜 일행 대정현에 표도
- 1906 (광무10년) 정의, 대정현 제주군에 통합, 牧使制 폐지 郡守制 실시
- 1907년 근대학교인 官立 제주보통학교와 私立 의신학교 설립
근대 - 1915년 濟州郡 폐지하고 濟州島制 실시 - 일제식민통치
- 1919년 朝天 독립만세운동
- 1930년 제주면 읍으로 승격 (전러남도 소속)
- 1946년 전라남도에서 분리 濟州道로 승격 (행정구역 : 2군, 1읍, 12면)
해방이후 제주도의 현대사에 대하여는 제주실록을 참조
참고문헌 : 濟州道廳 發行 " 濟州道의 文化財 "
제주의 자연환경
제주의 地形은 한반도의 서남단 해상 (동경 126도 10분에서 126도 58분, 북위 33도 12분에서 33도 34분 사이)과
동지나해의 북단에 위치한 火山島로서 그 크기는 東西로 73km, 南北으로 41km, 면적 1,845 km2의 타원형의
모양으로 되었으며 섬 중앙에 1,950m의 한라산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은 매우 완만하고 남북 방향은 약간 급한
경사를 이룬다.地質의 형성은 대개 新生期 제3기에 火山活動에 의해 분출한 粗面岩이 원래의 기반인 花崗岩을 덮고,
그 후 다시 제4기에 玄武岩이 噴出되어 그 위를 덮으므로서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지표면은 透水性이
강한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있어 비교적 많은 降雨量에도 불구하고 地下로 빠져들어 河川은 거이 대부분 乾川 상태가
되어 물이 흐르지 않아 제주에는 물을 이용하는 논농사가 없고 잡곡 위주의 밭농사가 주를 이룬다.
地形利用 형태를 보면 고도200 m 이하의 해안지대는 섬 전체 면적의 55.3%로서 주거지를 비롯하여 농경지 및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해발 200m - 500m의 중산간 지대는 목장을 비롯하여 관광지와 유휴지가되고 있다.
또 해발 500m-1000m 의 산지는 산림 및 목야지로 이용되고 1,000m이상은 한라산 국립공원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제주의 氣候는 계절에 따라 대륙성과 해양성의 기후가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난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섬의 중앙부에는 해발 1950m의 한라산이 위치하고 있어 제주도근해의 해류,
지형등이 복잡하게 기후인자로 작용하여 겨울철에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 차가 심하고 여름철에는
高溫多濕한 북태평양 기단 의 영향으로 降雨集中이 큰 편이다. 또한 島嶼 라는 특성에서 오는 해양성 기후의 영향과
난대성 기후를 나타내어 아열대성 식물 분포도 보이고 있다. 제주도의 연평균 기온은 16도C, 강수량은 1568 mm,
풍속은 3.0m/sec 이며, 구름이 거의 없는 쾌청일수는 제주시가 년평균 49일, 서귀포시 년평균 67일로서 한라산 남쪽에
위치한 서귀포가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제주의 自然生態系
- 식물 생태계
제주도는 해발 1950m의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지형조건과 특수한 기후조건에 의하여 暖帶植物 에서부터
溫帶植物, 고산지대 의 寒帶林植物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식물의 보고를 이루고 있으며 그 분포도도 뚜렷이 구분되어
있어 생태 및 식물학적으로 중요한 연구 대상지 가 되고 있다. 해안과 저지대에는 구실 잣밤나무를 위시하여
녹나무과와 참나무과 등의 난대림식물이 분포 되어 있으나 지금은 경작지와 목야지 등으로 많이 개발되어 본래의
식물군락이 남아 있는 곳은 계곡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으며, 한라산 국립공원내의 수림 지대에는
온대림식물이 주요 임상을 이루고 있고 한라산 고산지대에는 구상나무, 시로미, 산철쭉 등 한대림식물이 군락을
이루어 자생하고 있다. 특히 제주는 감귤나무와 유채 재배지로 알맞는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어 밭농사 특용작물의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중산간 일대에는 草地가 형성되어 목장에 적합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의 주요 식물및 보호구역
▶ 섭섬 파초일엽 자생지 (서귀포시 보모동 / 섭섬일대 )
▶ 하도리 문주란 자생지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 산1)
▶ 신예리 왕벚나무 자생지 (남제주군 남원읍 신예리 산2의1)
▶ 제주시 곰솔 (제주시 아라동 산78)
▶ 성읍리 느타나무와 팽나무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882의1)
▶ 도순동 녹나무 자생지군락 ( 서귀포시 도순동 210)
▶ 서귀포시 담팔수나무 (서귀포시 서귀동 973 )
▶ 제주한란 (제주도 일원)
▶ 평대리 비자나무자생지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 비자림일대)
▶ 납읍리 난대림지대 (북제주군 애월읍 납읍리)
▶ 산방산 암벽식물지대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 산방산일대)
▶ 안덕계곡 상록수림지대 (남제주군 안덕면 감산리)
▶ 천제연 난대림지대 (서귀포시 색달동 / 천지연폭포 주변일대)
▶ 천지연 난대림지대 (서귀포시 서귀동 )
(우로부터, 섭섬 파초일엽자생지, 하도리 문주란자생지, 천제연 난대림, 천지연 담팔수, 유채밭)
- 동물 생태계
제주도의 동물은 대부분 우리나라 본토의 동물상과 공통되어 육지부와 크게 다르지 않으나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간혹 특이한 種들도발견되고 있으며 과거의 무분별한 포획과 동물보호가 미흡하여 많은 수의
동물들이 감소 되거나 멸종된 상태에 있다.
▶ 哺乳類 : 육지와 격리된 지리적 여건으로 제주의 포유류는 매우 빈약하여 맹수류는 발견된 바 없고 멧돼지,
삵괭이 등은 멸종되어 없으며 족제비, 오소리 등도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근래에 인위적으로 노루를
한라산에 방사하여 철저한 보호관리로 지금은 많은 수의 노루가 번식하여 한라산 국립공원에서 서식하고 있다.
▶ 鳥類 : 1985년 한라산 학술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제주에는 조류가 48과 236종으로 발표되었고 통과새 69종,
겨울철새 69종, 여름철새 36종, 텃새 36종, 미도 28종 으로 분류되고 있다. 특히 제주도는 북방계와 남방계의
조류들이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황새와 검은목 흰따오기의 도래지로 알려 지고 있으며 꿩이 많이
서식하여 꿩 사냥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 해양 생태계
제주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과거 오래전 부터 제주인은 바다와 밀접한 생업활동을 영위하여 왔으며
제주바다는 유형, 무형의 생활자원의 공급처이자 중요한 관광자원이며 다양한 해양생물의 서식처이다. 지리적으로
온대및 아열대에 위치한 섬으로 수심 100m 내외의 대륙붕이 광활하게 펼쳐 있고 겨울철에도 수온이 비교적 높고
각종 동,식물 프랑크톤이 풍부하여 어류들의 산란장및 월동장이 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제주의 漁類는 동해와 서해에서 유입되는 한류와 대마난류및 서해난류가 교차되고 해안선 일대의 용천수의 영향으로
각 해역마다 특유한 어장을 형성 하며 제주 연안에서만 서식하는 옥돔(오토미), 자리돔(자리) 등을 비롯하여
자바리(다금바리) , 돌돔(갯돔), 감성돔(가문돔), 흑돔(웽이), 전갱이(각재기), 먹장어(곰장어), 별우럭(붉바리),
쥐치(깩주리), 노래미(졸락), 놀래기(꼬생이), 횡놀래기(어랭이), 독가시치(따치), 멸치(멜) 등 320여종의 정착성 및
회유성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 * 괄호안은 地方名임) 海藻類와 貝類 또한 제주의 해저가 일부 沙地를 제외하면
암초 또는 암반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정착성이 좋은 여건으로 톳, 감태, 우뭇가사리, 미역, 청각 등 지금까지
학술조사에서 발견된 해조류는 369종으로 다양한 海藻相이 제주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고 이를 먹이로 하는 전복,
소라, 고둥류, 오븐자기 등 150여종의 貝類가 서식하고 있어 예로부터 제주의 해양은 바다농사가 풍성하고 오염되지
않은 청정해역임을 자랑하고 있다.
참고문헌 : 濟州道廳 發行 " 濟州道의 文化財 "
제주도를 호위하고 있는 섬
- 북제주군
상추자도, 하주차도, 직구도, 추포도, 수령섬, 엄섬, 검은가리섬, 덜섬, 보론섬, 쇠머리, 푸랭이섬, 수덕이섬,
밖미역섬, 절명이, 차귀도, 비양도, 우도
- 남제주군
지귀도, 숲섬, 문섬, 범섬, 형제도, 가파도, 마라도
두번째 제주도의 문화
- 제주 의생활의 특성
지형적으로 고립된 여건과 박한 풍토라는 자연환경적 원인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수탈로 경제적인 빈곤뿐
아니라 문화교류의 단절과 문화의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특히 조선시대 이조와 순조까지
약2세기(1629~1830)에 '도민출육금지령(島民出陸禁止令)'은 인적교류와 문화의 단절을 초래할 뿐더러
페쇠된 고유성을 더욱 굳히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여건들에 의해 제주 고유의 의복형태들이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는 다른지역과는 독특한 노동복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생활은 노동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환경적 특성 속에서 살아가야 햇던 생활상은 물질문화라든가, 정신문화 특히,
문학이나 속담.노동요 등에 잘 나타나고 있다. 도민들은 박한 상황 속에서 생존의 방법과 의미를 터득했으며,
의식속에는 불우한 생활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극기심과 자립심을 생활신조로 세우게 되었다. 제주인
생계관(生計觀)은 천재지화인 삼재(風.水.旱)와 정치적 현실의 냉대 속에서 배고픔을 참아 내면서
삼무(無大門, 無盜賊 無乞人)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니,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면서 절약하고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을 스스로 키우면서 살아온 삶의 보상이었던 것이다.
1. 일상복
조선시대 1400말에도 "가죽띠와 미투리에 칡베옷을 입었다."고 1600초 에도 "가난한 자들이 추운 겨울철에
도롱이나 망석을 입고도 동사를 면했다."고 했다. 또,"무명 및 삼과 모시가 생산되지 않아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모자라므로 오직 해산물을 캐어서 생업하였으며, 부인은 치마가 없고 다만 삼새끼로 허리를 동이고
두어자 베로 새끼 앞뒤에 기워서 그 음부를 덮을 뿐"라 했다. '소중이' : 경제적이고 실용적이나,
양촌(농업위주인 촌락)에서는 "잠수들이 물질할 때 입는 옷"이라 하여 내놓고 입기를 꺼러했다.그러나
1900년 초부터는 차츰 소중이가 보편화하여 결혼할 때 장만하여 가기도 햇다. 치마여밈에 있어서도
"외쪽으로 여며야 양반"이라 했다.제주에서는 오른쪽("오른깍")으로 입었다. 그러나 이 논리는 당쟁의 소산으로
부녀자의 옷 입기에까지 파급되었던 한 가지 예였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1) 경상도의 일부지역과 제주도와
북한등을 제외한 전국에서는 '왼쪽여밈형'이다. '외쪽 양반론'은 노론이 지배했던 노론권 지역에서는
특히 강하고 남인권 지역에서는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1)
高富子 : <우리나라 婚禮服의 民俗學的 硏究> PP. 83 120,1989.
2. 노동복
(갈옷.잠수복.목자복)
1) 갈옷 (사진은 신혼부부가 기념으로 입고 찍은 사진)
갈옷의 형태는 여름용 한복인 적삼.고의.단속곳.몸빼에 감물을 들인 것으로, 이 옷들은 각기 '갈적삼',
'갈중이', '갈굴중이', '갈몸빼'라고 불렀다. 갈옷은 무명천에 감물을 입힌 옷이다. 7∼8월 사이에 풋감이
여물어가는 시기에 떫은 물을 짜내어 염색한다. 감즙이 고르게 다 들면 찌꺼기는 떨어내고 일단 초가지붕위에
얹어 하룻밤 이슬을 맞힌 후 옷 모양을 반 듯하게펴서 넌다. 말릴 때는 멍석이나 지붕. 잔디 위 편편한 굿에
너는데, 햇볕이 잘 들고 고이가 잘 통해야 한다. 열흘간 마르는 대로 계속 물을 적시면서 말린다.
(이 과정을 '바랜다'라고한다.) 바래기를 잘해야 붉은 황토 빛깔이 나고, 빳빳하여 풀을 먹인 옷처럼 된다.
햇볕을 잘못 쪼이거나, 장마로 인해 제대로 말리지 못하면 풀기가 죽어 후줄근하고, 빛깔도 거무튀튀한
흑갈색으로 되며, 견고성도 떨어지게 된다.
- 갈옷의 특징:
새옷일 때는 뻣뻣하고 색도 빨갛다. 이슬맺힌 풀밭에서 일을 해도 이슬이 스며들어 적셔지지 않고 물방울이
떨어진다. 좀 입다보면 부드러워지고 갈색으로 변한다. 낡은 것은 아기들의 포대기나 기저귀로 이용되고
더 낡으면 걸레로도 썼으며, 또 질기고 더러움이 덜 타므로 헌 바구니나 멍석. 푸대.가마니 등 떨어진 곳을
깁는 데도 이용되었다. (더러움이 덜 타고 늘 새옷 입는 느낌이어서 자주 빨래를 할 필요가 없다. 한벌이면
2년 정도 입을 수 있으며 일할 때는 몸에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시원하다. 거친 가시덤불이나 풀밭에서도
상처를 입지 않으며 먼지 흡착도 다른 섬유에 비해 덜하다. 제주 가옥마다 예전에는 감나무가 쉽게 눈에
띄었는데, 육지의 감과는 달리 직경 3∼4㎝ 정도로 작고 씨가 많기 때문에 식용보다는 주로 감물을 들일 때
사용하였다. 갈옷의 기원은 어부들이 낚시줄이나 그물테가 질겨지도록 염색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 잠수(潛女,潛嫂)복 물소중이
잠수(潛嫂)란 바닷물 속에서 미역.소라.점복등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을 말하며, '잠수복'은 이들이
수중작업('물질') 할 때에 입는 옷들을 말한다. '잠수복', '해녀옷', '좀녀옷'.'물소중이'.'소중이'로 부르고
있으나 불소중이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통칭되었다.재료는 무명이나 광목으로 하고 주로 흰색옷을 입었는데,
검정 물감이 흔해지자 19부터 검정물을 들여 입었다. 물적삼(상의)
3) 목자복(牧者服)
목자복은 추운 고지대의 기후 적응에 알맞은 짐승의 털까죽으로 만든 모자와 옷, 신발이용, 털은 밖으로
노출시키고 있다.모자는 '가죽감티'.'털벙것'.'정당벌립'.'대패랭이'등이있다. 몸에 입는 옷으로 겉에는
가죽두루마기와 '도롱이(雨依)가 있으며, 겨울에는 솜을 넣은 솜옷이나 누빈 바지 저고리를 입었다.
허벅지부터 다리에 '가죽발레'를 꿰었다.
- 일생 의례복
1. 출생의례복
1) 초생아 옷(출생~7일)
초생아 옷은 '봇뒤창옷'.'봇뒤적삼'.'베옷'.'삼칠일옷'.'베창옷'이라 했는데, 대부분 봇뒤창옷으로
통칭되었다. '봇'은 자궁이며, '창옷'은 홑옷이라는 뜻이다.
2) 백일.돌옷
생활이 여의치 못한 점도 있지만, 어른들에 대한 눈치와 "백일이나 돌 때에 상(床)을 차리거나 좋은 옷을 입혀서
호사시키면 질병에 걸리거나 단명(短命)한다"는 속설 등으로 하여 생략되었다.
3) 평상복
'물애기'(젖먹이)일 때는 아래에 입히는 옷은 없었다. 아기옷이나 '지성귀'(기저귀)는 어른들 헌옷이나 갈옷
헌 것으로 만드는 정도였고, 여름엔 발까벗겨 키우고 옷 한벌을 만들면 다 떨어질 때까지 입혔다. 그와
'지성치매'(두렁치마:배두렁이)였으며, 조금자라면 '강알터진 바지'(십자바지)를 입히고 '풍채바지'를 입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2. 혼례복
1) 새서방(신랑) 치레
혼례날은 일반인도 평생에 한 번 관복을 입고 관원으로 우대를 받을 수 있었다.
머리에는 사모(紗帽)를 썼는데, 겨울에는 방한용으로 목건()이나 '풍뎅이'(남바위)를 사모 속에 쓰기도 했다.
2)새각씨(신부)치레
새각씨는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 '괴팡'(고팡: 광)에서 단장했다. 새각씨를 단장해 주는 사람은 첫아들을 낳고,
부녀해로하고, 건강하여, 복덕과 수덕()을 갖춘 부녀자가 했다. 장옷을 입고 고부랑건지머리' 짚신이나
감악창신, 고무신을 신고 원삼과 족두리에 용비녀를 꼿았다.
3. 호상옷(사후의례복,저승옷)
"호상에는 명주가 최고"라고하며 명주와 삼베 외에 다른 직물은 철저히 금기 했다. 무명은 시신이 썩을 때
새까맣게 되고, 모시를 쓰면 자손들의 머리에 새치가 생기며, 화학섬유는 잡물질이 섞여 있어서 시신이
썩지 않기 때문이다. 호상옷은 윤년이나 윤달 또는 환갑을 기해서 자손들이 만들기도 했다. 갑자기 준비없이
상을 당했을 때는 손이 막히지 않는 날을 택해서 했다. 바느질 할 때는 매듭을 맺거나 상침질 뒷바느질은
절대로 삼가했다.
4. 상복(喪服)
상복을 '복옷'이라고 한다.
상을 당하면 "복입었다" 고 하는데 남자는 '굴건제복'(屈巾祭服)을, 여자는 '대수장군'(大袖長裙)을 갖춘다.
이상은 <제주 민속학적연구>의 제 1장 의생활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제주도 주거문화
제주도 가옥은 육지의 그것과 는 사뭇 다르다. 마당을 중심으로 한 구심적 대칭형과 별동 배치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배경에는 무속신앙과 풍수지리, 기후에 대처한 요구, 이섬에만 있는 특이한 가족제도 등
여러 가지 문화적, 지리적 요인에 기인한다. 제주도 주택은 '-'자형 겹집을 기본으로 하여 분할식으로 평면구성을
하기 때문에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된다. 안거리, 밖거리, 목러리등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로 구성해 나간다.안거리 한채와 부속채로만 이루어진 집을 외거리집이라 하고, 안.밖거리를
갖춘 두채의 집을 두거리집이라한다. 이 때 안거리와 밖거리는 마당을 중심으로 '='자로 마주보기도하고,
때로는 'ㄱ'자로 배치되기도 한다. 주택이 규모를 갖추게 되면 안거리와 밖거리 및 부속채의 목거리를 포함하여
3채 혹은 4채로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밖거리 또는 목거리는 이문간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 특이한 가족제도
제주도는 육지와는 구별되는 가족제로로 아들이 결혼하면 안거리는 부모세대가, 밖거리는 아들세대가 산다.
또 일정기간이 되면 부모세대가 밖거리로, 자식세대가 안거리로 들어간다. 두 세대에는 정지, 장독대 등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침식과 생산경영을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주거단위를 보면 한 가족이나,
경제적 단위로는 두가족인 셈이다
- 구조
3간으로 한쪽은 구들(침실, 온돌 때는 방)과 고팡을, 가운데 칸은 마루방을, 다른 한쪽은 부엌으로 했으며,
여유 있는 집안에서는 주채를 4간으로 하고, 모커리(모에 있는 집)라 하여 3간집을 지어 사랑채로 이용하기도
했다. 빈곤한 집안에서는 2간 집을 지어 한 쪽은 구들과 고팡을, 한쪽은 부엌으로 사용했다. 대부분 밧집 (헛간)을
지어 중간에 나무를 이용한 칸막이를 하여 우막과 방앗 간으로 이용했다.
- 제주초가집의 특징
초가집 제주도의 초가는 과거 제주도 민간주택의 일반적 형태로서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가족구조및 그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건축물이다. 외부는 석축으로 쌓고 내부의 가름멱은 나무와 대를 이용하여 벽을 만들어
흙을 발랐는데,그 기본구조는 기둥, 귀틀, 보, 보짓, 내도리, 중보, 중마루, 상마루 등 뼈대를 나무로 만든 후
주위 벽을 굵은 돌로 쌓아 두루고 제주도 전역에서 자생하는 연한 갈대처럼 생긴 띠풀(또는 "새" 라고도 함)로
지붕을 덮은 것이다. 벽은 흙을 발라 붙여 돌담을 단단히 하고 지붕은 띠로 덮은후 직경 5cm의 굵은 밧줄로
바둑판 처럼 얽어 놓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태풍과 바람이 많은 제주의 기후조건에서 그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지혜로운 건축기술이라 할 수 있다. 지붕은 1년 또는 2년에 한번씩 덮은위에 다시 덮어 가므로 상마루선이
완만하고 부드러운 선을 이루게 된다. * 방에는 벽장이 있어서, 이불등 큰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다.
창문 - 창호지 문은 잘 뜯어지므로 그위에 무명천(?)같은 것을 한번 더 입혀 튼튼하게 사용. 대부분의 창문에는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적당한 부분에 창호지를 도려내서 유리를 붙여 사용했다.
- 제주도 시장
오일시장 :
제주도민들의 생생한 삶의 생기가 묻어나는 곳. 제주의 전통적인 시장형태의 하나인데 지역별(시,읍,면 단위)로
돌아가며 5일마다 한번씩(1일) 개장된다. 제주도에 오일장이 서는 곳은 열한군데이다.
오일장 날이면 상인들은 그날 팔 무우, 배추 등 채소류, 생선류, 한약재, 곡류, 신, 옷가지, 죽제품 등을 펼쳐놓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요즘도 오일장다운 맛을 풍기는 곳으로는 제주시장, 중문장, 서귀포장, 대정장,
고산장으로 볼 만하다. 제주시 오일장터는 공항남서쪽, 서중 근처로 장날때마다 이 일대가 사람, 차들로 붐빈다.
장서는 날 | 장 터 |
1,6일 | 대정, 성산,함덕 |
2,7일 | 제주, 표선 |
3,8일 | 중문 |
4,9일 | 서귀표,고성,한림 |
5,10일 | 세화,고산 |
제주의 미풍양속
제주의 집세 지불방법은 타 지역과는 사뭇 다르다. 타지의 사글세 와 비슷한 "죽어지는 세"이다.
삭월세는 매월 주인에게 집세를 지불하는 반면에 "죽어지는 세"는 일년 분을 미리 주인에게 지불하는 방법이다.
한꺼번에 많은 돈을 준비하느라 서민들은 허리를 졸라 매야 했고, 때문에 계를 이용하는 경향이 많았다.
- 신구간
이사나 집수리 등을 할 수 있는 기간으로, 보통 대한(大寒) 5일 후에서 입춘(立春) 3일 전까지의 일주일을
말한다. 신구간이란 옥황상제의 임명을 받고 내려왔던 여러 신들의 교대기간을 말한다. 즉, 신들이 승천한
틈을 타서, 인간이 이사나 집수리 등의 일들을 손보아도 아무런 탈이 없다고 믿는 기간이다.
- 영등굿
영등굿은 음력 2월달에 영등신에게 올리는제주 고유의 무속제이다. 영등신은 흔히 "영등할망"이라 부르는
신으로서 음력 2월 1일 제주를 찾아와서 같은달 15일에 떠나간다고 하며 특히 어촌에서 어민들의 해상안전과
해녀채취물의 풍요를 빌기 위하여 행하는 이 굿은 2월 1일에 영등신 환영제를 하고 2월 13일에서 15일 사이에
영등 송별제를 올린다. 이 기간동안에는 바다에 나가서도 안되며 지붕을 이거나 밭에 나가 김을 매어서도 안되는
여러가지 금기를 지켜며 생활의 풍요를 내려받기 위하여 영등신을 정성꼇 모셔진다.
이처럼 영등굿은 제주 특유의 신앙과 생활민속이 담겨 있으며 제주의 민속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제주도 지방무형문화제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참고문헌 : 濟州道廳 發行 " 濟州道의 文化財 ">
- 넋들라
아기가 경기가 있거나, 놀랬을 때, 혹은 이유없이 칭얼대거나 하면 "넋나다(넋나갔다)"라고 하며, 이럴 때는
보살을 찾아가서 그 넋(?)을 달랜는데 그것을 "넋드리러간다"고 한다.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않고, 위로의 소리를
하기도 하며, 침 놓는데, 신기하게도 넋을 드린후에는 아이가 순해(?)지며, 경끼도 사라진다고 믿었다.
제주의 역사
고대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의 기원은 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시대 사람들은 동굴이나 바위 그늘 주거지에서 생활하였으며, 유물로는 타제석기, 골각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후 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 등도 도내 전역에 분포되고 있어 제주특별자치도 역사의 기원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제주의 옛명칭은 도이, 동영주, 섭라, 탐모라, 탁라 등으로 불리어 왔다.
이들 명칭중 '동영주'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섬나라' 라는 뜻이다. 제주도의 개벽신화인 3성 신화에 의하면 태고에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라고 하는 삼신인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현재의 삼성혈) 이라는 땅 속에서 솟아나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 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 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제주특별자치도 동쪽해상으로 들어온 삼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이때부터 이들은 오곡의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
삼국시대
그후 '고을나'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당시 한국의 고대왕조의 하나인 '신라'(B.C 57~A.D 935)에 입조하여 '탐라'(제주특별자치도의 옛명칭) 라는 국호를 갖게 되었고, 또 이때부터 '탐라'는 '신라'를 섬기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탐라국은 고구려, 백제 및 신라로 분열된 삼국시대에는 이들 나라들과 독자적으로 혹은 그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
고려시대
탐라국이 육지에 직접 예속되어 행정구역으로 편제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엽인 1105년(숙종 10)부터이다. 1271년(원종 12)에 삼별초가 제주도에 웅거하면서 몽골에 마지막까지 항쟁을 벌이다가 1273년에 패한 후 제주도는 원나라의 직할지가 되어 목마장이 설치되었다.
원의 직할지였던 까닭에 다른 곳보다도 몽골의 문화적인 영향이 컸으며, 대규모 목마의 흔적으로 환경에도 뚜렷한 자취를 남겨놓았다.
그후 약 1세기 동안 제주도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 소속이 여러 차례 바뀌는 복잡한 과정을 겪다가 1367년(공민왕 16)에 완전히 고려에 회복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 1416년(태종 16)에 한라산을 경계로 북쪽에 제주목을 두고, 남쪽의 동부에는 정의현, 서부에 대정현을 설치하여 전라도에 소속시켜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64년에 정의현과 대정현을 군으로 승격했으며,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23부제를 실시함에 따라 1895년에 제주부를 설치하여 정의군·대정군을 관할하도록 했다. 1896년에 다시 13도제 실시로 전라남도 제주군·정의군·대정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1914년에 시행된 군면 폐합 때 정의군·대정군과 완도군 추자면이 제주군에 병합되어 제주군은 제주도 전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1915년에 도제를 실시하여 제주도라 했으며, 1946년에 비로소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로 승격하고 북제주군 및 남제주군을 신설했다.
현대
1955년에 제주읍을 시로 승격하고, 1956년에는 서귀면·대정면·한림면을 각각 읍으로 승격하고 한경면을 신설했다. 1980년에 애월면·구좌면·남원면·성산면을 읍으로 승격했으며, 1981년에 서귀읍과 중문면을 합하여 서귀포시로 승격했다. 1985년에 조천면을 읍으로, 1986년에 구좌읍 연평출장소를 우도면으로 승격했다.
조선시대까지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제주도는 1948년의 이른바 제주 4·3사태 등 현대사의 아픔을 겪으면서 취락의 구조 등에도 변화가 초래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변모는 1960년대 이후부터 이루어져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관광지로, 감귤 등의 상품작물의 재배지로 지역의 특성이 변모되었다.
2006년 7월 1일부터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특별자치지역으로 전환되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독자적인 자치권을 갖는 제주특별자치도로 새로 출발했다. 자치 입법권 강화, 자치조직·인사 자율성 강화, 의정활동 강화, 주민참여 확대, 자주 재정권 강화, 교육자치 강화, 자치경찰제 실시 등 자치기능이 확대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함에 따라 기초자치단체인 시군을 폐지하고 제주 단일 광역체제로 전환되어 2행정시, 7읍·5면·31동으로 개편되었다.
(제주의 역사 유적지)
1.제주 관덕정
종 목 보물 제32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도2동 983-1
시 대 조선시대
관덕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누정 건물은 『탐라지』에 의하면 조선 세종 30년(1448)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 성종 11년(1480)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보수한 것으로 원래의 건축 수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은 사방이 탁 트이게 뚫려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는 새부리 모양으로 뻗쳐 나온 재료를 기둥 위에 두 개씩 짜 놓았다.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어 현재의 글씨는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의 작품인 것으로 청음 김상헌이 지은 「남사록」에 의해 밝혀졌으며, 지붕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1924년 일본인들이 보수하면서 처마 부분을 많이 잘라냈다. 제주도의 대표적 누정 건축으로 건축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며 건물 안쪽 대들보와 그 아래에 그려진 작자를 알 수 없는 벽화도 상당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2.제주 삼성혈
종 목 사적 제134호
지 정 일 1964.06.10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이도동 1313 외
시 대 시대미상
삼성혈은 제주도의 고씨·양씨·부씨의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의 구멍을 말한다.
3시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사냥해 먹고 살다가, 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멍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만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과 비석을 세우고, 주위에 울타리를 쌓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3.제주목 관아
종 목 사적 제380호
지 정 일 1993.03.31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등 일원
시 대 조선시대
관아란 벼슬을 가진 사람들이 일을 보던 건물로서 제주목 관아터는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였다.
발굴조사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관아의 중요한 시설이었던 동헌·내아 건물터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였다. 이로써 제주목 관아터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의 중심지 구실을 한 중요한 곳임이 밝혀졌다. 관아터 남서쪽에는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조선 세종 30년(1448)에 세운 관덕정(보물 제322호)이 있다.
4.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종 목 사적 제396호
지 정 일 1997.04.18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1126-1외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원종 14년(1273) 김통정 장군과 삼별초 대원들이 여몽연합군과 마지막까지 싸운 곳이다.
진도 싸움에서 패한 삼별초는 원종 12년(1271) 제주도에 들어와 안팎 2중으로 된 성을 쌓았는데 안쪽의 성은 성벽의 안팎을 수직에 가깝게 돌로 쌓았으며, 바깥성은 언덕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았다.
이 성은 해발 약 190∼215m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고성천이 있고 서쪽으로는 소앵천이 있다.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으며 동쪽은 완만하고 서쪽에는 하천이 있어 성을 쌓기에 적합한 지형이다. 주변에는 대부분 경작지, 목초지 들판이 있고 남쪽과 북쪽에는 논이 있었다.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돌쩌귀, 기와, 자기, 연못터 등 많은 유적이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유적 정화사업을 벌여 순의비, 순의문, 항몽유적기록화 7폭, 관리사무소를 두고 역사교육 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5.제주 고산리 유적
종 목 사적 제412호
지 정 일 1998.12.23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628번지
시 대 석기시대
수월봉 앞 해안단구 대지에 넓게 형성되어 있는 신석기시대 전기의 선사유적이다. 신석기시대는 원시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인류문화 발달사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시기이다.
발굴 결과 나온 유물로는 석기 99,000여 점, 토기조각 1,000여 점이 있는데,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조각은 독특한 토기형태로 고산리식 토기라고 불린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 조합을 통해 후기 구석기 말엽의 수렵채집 집단이 석기 전통을 계승하며,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구석기 후기 문화에서 신석기 전기 문화로 옮겨가는 과정을 알 수 있고, 시베리아, 만주, 일본, 한반도 지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전기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로서 중요한 유적이다.
6.제주 삼양동 유적
종 목 사적 제416호
지 정 일 1999.11.1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양1동 1660-5외
시 대 선사시대
제주시 삼양동 일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던 당시에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이다.
1997년 4월부터 1999년 7월에 걸쳐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결과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집터 236곳을 비롯하여 돌을 쌓아 만든 담장, 쓰레기를 버리던 폐기장, 마을의 외곽을 두르고 있던 도랑 자리가 있는 큰 규모의 마을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집터 안에서는 구멍띠토기, 덧띠무늬토기(점토대토기), 적갈색항아리 따위의 그릇 종류와 돌도끼·대패·갈돌·숯돌 등 돌로 만든 도구종류와 철제도끼, 손칼, 동검,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콩, 보리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됨에 따라 탐라국이 형성되던 시기의 제주도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다.
7.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종 목 사적 제487호
지 정 일 2007.10.10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1666-1번지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서귀포시 대정읍성 동문자리 안쪽에 자리잡은 추사거적지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다.
김정희는 영조의 사위였던 김한신의 증손으로, 조선 순조 19년(18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다 조선 헌종 6년(1840)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김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초기에 포도청의 부장인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현재의 적거지로 지정된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은 것이다.
김정희는 이 곳에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추사 유배지는 추사 김정희선생이 제주에 남긴 유배 문학의 커다란 문화적 가치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금석학과 유학, 서학의 의미는 역사적·학술적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8.성읍민속마을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88호
지 정 일 1984.06.07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시 대 조선시대
제주도는 조선 태종 16년(1416) 안무사 오식의 건의로 5세기라는 긴 세월동안 세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그 중 성읍은 세종 5년(1423)에 지정된 정의현의 도읍지로서 산골 마을이면서 도읍지였다는 특이성을 갖추고 있다.
아늑한 터에, 주변으로는 마을을 둘러싼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의젓하게 감싸고 있다. 또한 길들이 굽이 돌아 나 있고 길과 길이 만나는 지점에 평상과 나무들을 두어 쉼터와 모임장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 마을 민가는 뭍과는 다른 독특한 건축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대개 一자형 평면을 가진 집 2채를 중심으로 몇가지 배치방식으로 짜여있어 제주도 민속 ·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옥으로는 조일훈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8호), 고평오 가옥(중요민속자료 제69호), 이영숙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0호), 한봉일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1호), 고상은 가옥(중요민속자료 제72호) 등이 있다.
정의현 관청건물이었던 일관헌을 비롯하여 느티나무와 팽나무(천연기념물 제161호)·정의향교·돌하루방·초가 등 많은 문화재가 있어,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풍경과 함께 제주도의 고유한 생활풍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9.제주향교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2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용담1동 298-1
시 대 조선시대
제주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에게 제사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조선 태조 원년(1392) 제주성내 교동에 세웠으며 순조 27년(1827)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 사당인 대성전과 계성사 등이 있다. 명륜당은 원래 아름다운 건물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콘크리트로 다시 지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책, 노비 등을 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지금은 제사만 지내고 있다.
10.연북정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90
시 대 조선시대
바닷가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로 조선 선조 23년(1590)에 조천관 건물을 새로 지은 후 쌍벽정이라 하였다가 선조 32년(1599)에 건물을 보수하고 이름을 연북정으로 고쳤다. ‘연북’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들이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충정의 뜻을 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게 축대를 쌓고 다진 기단 위에 세웠다. 축대의 북쪽으로 둘러싼 타원형 성곽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망을 보기 위한 망대의 용도로 지은 것이라 추측한다. 기둥의 배열과 건축재료의 배열방법은 모두 제주도 주택과 비슷하다.
11.대정향교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4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3126-1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세운 국립교육기관을 가리킨다.
대정향교는 조선 태종 16년(1416)에 세웠는데 이후 터가 좋지 않다하여 여러 차례 옮기다가 효종 4년(1653)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영조 48년(1772)에는 명륜당을, 헌종 원년(1834)에는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할 때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북향하여 자리잡고, 뒤쪽에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남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서재, 내삼문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하였다.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으며, 1948년부터는 문명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대정향교절목』등의 책이 남아있는데 유교경전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대정향교는 많은 보수로 인하여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장식이 검소하고 단청을 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간결한 느낌을 준다. 주위에 큰 소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12.정의향교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5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20-1
시 대 조선시대
정의향교는 조선 세종 5년(1423)에 진사리 현의 서문 밖에 처음 지었다가, 헌종 15년(1849)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
대부분의 향교 건물들이 남쪽을 향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향교는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삼문 등이 남아있다.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대성전과 배움공간이었던 강당인 명륜당은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책·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3.향사당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6호
지 정 일 1975.03.12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삼도2동 970-2
시 대 조선시대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각 고을 무반(武班)들이 봄·가을 2차례 모임을 갖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하던 곳이다.
가락천 서쪽에 처음 지었던 것을 조선 숙종 17년(1691)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짓고 향사당(鄕射堂)이라 이름지었다. 그 뒤 정조 21년(1797)에 이름을 향사당(鄕社堂)이라고 고쳤다. 조선 전기에는 좌수의 처소로 쓰이다가 고종 16년(1879)에 신성여학교 자리로 이용하였다.
이 건물은 1981년에 동남향이던 방향을 동북향으로 바꾸어 다시 지은 것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14.일관헌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7호
지 정 일 1975.03.12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809-1
시 대 조선시대
지금의 군청과 같은 건물로, 당시 정의현감이 업무를 보던 관청 건물이다. 원래 건물이 있던 곳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 조선 세종 5년(1423)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최근에 원형으로 복원한 것이다.
4각 기둥을 사용하였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주변이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161호)와 소나무로 둘러싸여 멋스러운 경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5.신촌향사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8호
지 정 일 1975.03.12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2156-1
시 대 조선시대
신촌향사는 마을의 공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조선 순조 5년(1805)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하며,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고쳐서 원래 형태에서 많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보수 때 침수에 대비하여 지대를 높이면서 본래의 분위기를 거의 잃었다.
앞면이 7칸으로 제주도의 일반 민가보다 규모가 크고 가운데에 있는 대청도 넓다. 그러나 구조와 양식 등은 민가와 거의 비슷하다.
신촌향사는 우리나라에 별로 많지 않은 용도의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16.추자처사각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9호
지 정 일 1975.03.12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추자면 영흥리 285
시 대 조선시대
처사 박인택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사당이다.
언제 지었는지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고, 처음에는 마을에 소규모의 초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 뒤 현 위치로 옮겨 짓고 2차례에 걸쳐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후손이 병에 걸려 갖가지 약으로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꿈에 박인택이 나타나 사당을 짓고 공을 드리면 나을 것이라 하여 그렇게 하자 병이 바로 나았다고 한다.
처사 박인택은 조선 중기에 추자도로 유배와 불교적 생활을 하면서, 주민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불교 교리도 가르치면서 살았다고 한다.
17.오현단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이도1동 1421-3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이곳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5현)을 기리고 있는 제단으로, 이들의 위패를 모시던 귤림서원의 옛 터에 마련되어 있다.
5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 선생, 중종 29년(1534)에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규암 송인수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 선생,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 선생 등 다섯 분이다.
고종 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비를 세우고 제단을 쌓아놓았는데, 원래는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기 위한 충암묘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현종 6년(1665) 판관 최진남이 이 묘를 장수당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은 뒤, 숙종 8년(1682)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김정 선생·송인수 선생·김상헌 선생·정온 선생 등 네 분의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숙종 21년(1695) 송시열 선생도 함께 모시면서 5현을 배향하게 되었으나, 고종 8년(1871)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 서원이 헐리게 되어, 그 터에 이 제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단내에 있는 5현의 자취로는 철종 7년(1856) 송시열 선생의 글씨로 하여 판관 홍경섭이 바위에 새긴 ‘증주벽립’이라는 글씨와, 김정 선생과 송시열 선생의 ‘적려유허비’가 남아있다.
18.명월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81.08.26
소 재 지 제주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 이 지방 유학자들과 시인들이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남읍리와 함께 양반촌으로 알려진 한림읍 명월리에 있다.
명월대는 옆으로 맑고 고운 시냇물을 끼고 있으며, 수십 그루의 팽나무가 울창한 자연림을 이루고 있어 한여름 찌는 듯한 더위를 식히기에 좋은 곳이다. 또한 아담한 반달형 돌다리가 놓여 있어 운치를 한층 돋구고 있다.
19.대정성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2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인성리,안성리
시 대 조선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조선 태종 16년(1416) 제주도의 행정 구역 정비로 대정현이 설치되고, 2년 뒤에 현감 유신이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읍성을 축조했다. 이 읍성은 산과 계곡을 끼고 있는 일반적인 읍성과는 달리 집과 밭들 사이에 만들어져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614m이고, 높이는 약 5.1m이다. 지금은 성벽 안에서 군데군데 옛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성문은 동·서·남문 3개만 설치되고 북문은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관아와 창고들이 있었으며, 이 지역 방어를 위하여 10여 곳에 봉수대를 설치해 먼 곳에 외적의 침입을 알렸다.
20.법화사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3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1071
시 대 고려시대
법화사는 12세기∼15세기에 제주도에서 번창했던 절이다.
18세기 전기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의 절 3곳을 불태워 없앨때 완전히 불타버렸으며, 지금의 건물들은 1987년 다시 세운 것이다.
현재의 법당 자리에서 금당지로 보이는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앞면 5칸·옆면 4칸에 면적이 약 100평인 대규모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법화사는 건물 기단의 바닥돌이 2단으로 되어있고, 면석의 기법이 특이하며, 출토된 도자기와 기와조각 등으로 보아 10세기∼12세기 경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규모가 매우 큰 절로 제주도 3대 사찰 중 하나인 중요한 유적이다.
21.혼인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7호
지 정 일 1971.08.26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
시 대 미상
혼인지는 탐라(지금의 제주)의 시조인 고·양·부 삼신인이 지금의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 온 나무상자 속에서 나온 벽랑국의 세 공주를 각각 맞이하여 혼인을 올렸다는 조그마한 연못이다.
삼신인은 수렵생활을 하고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다가, 나무상자 속에서 나온 송아지와 망아지를 기르고 오곡의 씨를 뿌려 태평한 생활을 누렸으며, 이때부터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무상자가 발견된 해안을 황루알이라고 부르는데, 황루알에는 세 공주가 바위에 디딘 발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22.존자암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3호
지 정 일 1995.07.13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산1-1
시 대 미상
『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 등의 문헌에 나한을 모셨던 절로 기록되어 있는 절터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 인간의 소원을 빨리 성취시켜 주는 복전이라 하여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큰 절에는 대부분 영산전을 두어 석가의 10대 제자를 비롯하여 16나한, 500나한 등을 봉안하고 있으며 나한전이나 응진전을 따로 둔 절도 있다.
1990년대의 발굴조사에서 건물지, 부도, 배수시설과 기와조각, 분청사기조각, 백자파편들이 발견되었으며, 1998년부터는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절을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건물지 북쪽에 있는 부도(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7호)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3.하원동 탐라왕자 묘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4호
지 정 일 2000.06.21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하원동 21
시 대 조선시대
이원조의 『탐라지초본』, 『대정군읍지』와 김약익의 『심재집』과 같은 문헌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 왕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내부구조는 잘 다듬어진 석재로 4∼8단의 판돌과 깬돌로 축조된 네모형의 돌덧널무덤(석곽묘)이다. 자기편과 소옥·지석좌대·석재향료·문인석 등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축조되었음을 가르쳐 준다.
하원동 탐라왕자 무덤은 당시 고위층의 무덤으로 제주도 무덤 변천과정 연구에 높은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24.서귀진지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55호
지 정 일 2000.11.01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서귀동 717-4번지 외
시 대 조선시대
서귀진은 탐라십경의 하나로서,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적인 방어유적으로 3성 9진에 속하며 정의현 관할이었다.
서귀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대왕실록』(1439. 2. 4) '서귀방호소에는 성곽이 없다고 하여 성을 쌓도록 요청하니, 허락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초 축성은 1439년대로 판단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서귀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161척(48m), 높이 5척(1.5m)이라 기록하고 있다.
서귀진은 본래 홍로천에 있었으나 조선 선조 23년(1590) 이옥 목사가 현재 위치로 옮겨 축성했다. 규모는 주위 251m, 높이 3.6m에 이르는 진성이었다 한다. 1920년대 한일합방 시기까지에는 기와 건물 3동과 성담이 남아 있어, 당시에는 일본군의 관청으로 사용되어지다가 제주도 4 ·3사건이 발생하자 이곳의 성담을 헐어 마을을 방어하는 축성용으로 사용하였고, 이후에는 주거용 건축 용도와 ‘밧담’으로 무분별하게 훼손되어, 지금에는 당시의 성담이었던 담들이 ‘우잣담’과 ‘성굽담’으로 일부 남아 있다. 이러한 서귀진의 자세한 자료는 1695년 제주목사 이익태의 탐라십경 중 하나로 서귀소라는 그림에 당시의 서귀진 규모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귀진은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유적인 3성 9진의 하나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25.양금석 가옥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3-45호
지 정 일 1978.11.14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예1리 1313
시 대 근대
60여 년전에 지은 양씨 종가댁이다. 600여 평의 대지 한가운데 안채가 있으며 바깥채는 안채와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큰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부엌이 있다. 툇마루는 큰방과 마루 앞에만 있어 부엌 공간이 넓으며, 바깥채는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 앞에 방과 뒤쪽에 곡물을 보관하는 고팡이 있다. 마루방의 앞쪽과 뒤쪽에는 툇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양씨 종가댁은 안채·바깥채를 통틀어 방이 넷이고 툇마루가 셋이며, 마루방 셋이 배치되어 있는 제주도 전통 초가 양식 중에서도 다양한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26.송종선 가옥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재 제3-46호
지 정 일 1978.11.14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하천리 720
시 대 근대
제주도 민가의 일반적 형태를 지닌 초가집이며 벽은 검은 돌로 쌓았다.
지붕은 선이 완만하고 매끈한 유선형이며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새(띠)를 바둑판처럼 얽어 놓았다.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27.선덕사 대적광전
종 목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8호
지 정 일 2005.10.05
소 재 지 제주 서귀포시 상효동 1156-6
시 대 근대
대적광전은 주불을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금당을 말한다.
선덕사 대적광전은 1987년에 시작하여 1993년에 완공되었다. 중층 목조건물로서,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서 면적 197.48㎡이다. 공포는 다포식이며 하층은 외3출목, 내6출목, 상층은 외3출목 내7출목이다. 가구는 이고주칠량가이고 천장은 우물(井)반자 천장이며 바닥은 상하층 통층으로 우물마루이다. 지붕은 중첨으로 팔작지붕이다. 공포의 세부적인 특성은 쇠서 받침을 초화형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장식적 수법은 조선조 후기로 내려올수록 그 경향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주불은 비로자나불이며 좌우에는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선덕사가 있는 선돌에서는 오래 전부터 수행납자들이 수행하였다. 1870년대 쌍월선사와 응월화상이 수행하셨던 곳으로서, 현대에 와서는 고승 고암대종사에 의하여 1982년부터 조근호의 설판으로 중창불사가 이뤄졌다.
선덕사 대적광전은 이처럼 축조시기가 짧지만, 제주도내 사찰 금당 중에서는 유일하게 중층 목조로 축조되어 있는 등 사찰 건축물의 연구 자료로서의 학술적 가치가 높아 향토문화 보존에 필요하다고 인정되어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