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뉴올리언스 재즈의 뛰어난 클라리넷, 소프라노 색소포니스트였던 시드니 베셰는 프랑스에서 화려한 말년을 보냈다. 1959년 그가 암으로 사망한 후 앙티베에는 그의 이름을 따온 거리가 생겨났으며, 동상도 건립되는 등, 듀크 엘링턴·찰리 파커 등 본토의 위대한 뮤지션들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영예와 존경을 낯선 대륙 유럽에서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문필가이면서 그 자신이 트럼펫 연주자이고, 평론가이기도 했던 보리스 비앙의 예찬, 제2차 세계대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등의 억압 상태에서도 독일·이탈리아·옛 소련에 피어나던 열기, 시드니 베셰·버드 파웰·케니 드루·듀크 조던·케니 클락·덱스터 고든 등 미국 뮤지션들에 대한 경의 등 단편적인 예에서 볼 수 있듯 유럽인들의 재즈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다. 물론 그 위세가 팝이나 클래식에 미치지 못한다지만, 소수 매니어들의 열기만은 뜨거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유럽에서 재즈가 성행하기 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라벨·드뷔시·사티·스트라빈스키·미요 등 유럽 근·현대 작곡가들은 이미 랙타임과 재즈에서 신선함을 느끼고 자신들의 기법에 인용하곤 하여 이후 넓은 팬층 형성에 이바지했다(재즈가 태동하기 전 이미 1887년에 랙타임 악보가 출판되어 유럽으로 수입된 바 있으며, 스트라빈스키가 1918년 작곡한 ‘11개의 악기를 위한 랙타임’에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파병(1917년)을 통한 미 군악대 진출, 최초의 재즈 레코딩을 실현했던 ODJB(Original Dixieland Jass Band, 당시까지만 해도 Jass로 표기되었고 Jazz는 정착된 단어가 아니었음)의 1919년 런던 공연 이후 이어진 1930년대 듀크 엘링턴·루이 암스트롱 투어 등의 반향도 재즈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전까지 유럽 재즈의 사정은 일천했다. 재즈 자이언트로는 장고 라인하르트 한 명만 꼽아도 족했고, 미국 재즈의 답습 외에 큰 진보는 없었다.
지미 스키드모어(1916, 영국), 플라비오 암브로제티(1919, 이탈리아)같은 개척자들의 노력이 2세대인 앨런 스키드모어나 프랑코 암브로제티에 대물림한 1960년대에 이르러 유럽 재즈의 아이덴티티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유럽은 오늘날 가장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재즈의 보고로 자리잡게 되었다. 영국의 존 서먼·존 맥러플린·데이브 홀랜드, 이탈리아의 조르지오 아졸리니·클라우디오 파솔리, 프랑스의 제프 질송·마샬 소랄, 독일의 알베르트 망겔스도르프·알렉산더 폰 슐리펜바흐, 노르웨이의 얀 가바렉, 핀란드의 에드바르드 베살라, 스웨덴의 라스 구에린, 폴란드의 크시스토프 코메다, 루마니아의 얀시 코로시, 옛 소련의 바체슬라프 가넬린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개성파 뮤지션들이 1960년대에 자신의 음악적 꽃을 만개시키며 유럽 재즈를 살찌웠다.
클래식의 전통에 바탕을 둔 이들 대부분은 미국 재즈에 대한 애정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고, 클래식의 기법과 그 지역 특유의 토착성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했으며, 사망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현재도 유럽 재즈를 대표하는 뮤지션들로 우뚝 솟아 있다.
독자적으로 구축해온 다채로운 색채-유러피언 재즈
혹자는 다소 프리재즈 쪽에 경도됐던 1960∼1970년대가 유럽 재즈의 도전정신과 창조력이 가장 왕성했던 전성기라 일컫지만, 2000년대를 전후한 현재의 유럽 재즈야말로 더 세분화되고 다변화된 상태에서 양적, 질적인 면을 충족시키며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십 개의 국가와 수백 개의 레이블이 산재해 있기에 자세한 소개보다는 요즈음의 유로 재즈에 대한 거시적인 조망을 해보고자 한다.
현재 유럽 재즈의 가장 큰 흐름은 ECM을 필두로 한 독자적인 세계의 음악과 모던한 감각에 기초를 둔 정통 재즈, 이 두 현상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모습이다. 즉 블루스와 스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종 다양한 영역을 재즈라는 이름을 빌어 자신만의 고유한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경우와, 정규 재즈 교육과 미국 뮤지션의 영향이 음악형에서 크게 드러나며, 작곡 대 즉흥연주의 통상적인 관계에 충실한 스타일이 공존한다.
또한 재즈를 연주하더라도 유서 깊은 정규 클래식 음악교육을 통해 이론과 기법을 튼튼히 다진 상태에서 등장하는 뮤지션이 많아 양식과 감각이 미국 뮤지션과 일견 다른 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유러피언 피아니스트의 경우 터치가 고르고, 홀 톤(온음) 위주의 밝은 멜로디를 즐겨 사용하며, 색소포니스트들은 음색과 음정을 곧고 정확하게 연주한다. 따라서 타악기적 타건의 굵고 블루지한 연주와 거친 음색과 다양한 톤을 기조로 한 배음으로 절묘하게 스윙하는 부분에는 미국계 뮤지션을 따라가기 힘들지만 난이도가 높고, 텍스트가 복잡하게 얽힌 아카데믹한 음악에는 강점을 나타낸다. 또한 미세한 감정까지 조절하고 미학적 가치를 높이며, 정제된 이론과 감성의 끈으로 다른 장르와 쉽게 연결된다.
근엄한 영국, 심각한 독일, 감각적인 프랑스, 집요한 예술혼과 개방된 사유를 지닌 이탈리아, 광활한 설원을 연상케 하는 신비한 분위기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과거 본국 뮤지션의 이주가 빈번했던 이유로 아직 정통 재즈 강세가 두드러진 베네룩스 3국 등 외형적으로는 어딘가 구분은 있지만, 각 뮤지션이나 레이블의 지향점에 따라 국가적·지역적 구분이 의미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프리재즈가 전부가 아니다” 유럽 재즈의 다섯 가지 양상
그러면 유럽 재즈의 최근 경향을 알아보자. 우선 첫 번째로 각 나라의 민속음악과 재즈·클래식·필름 뮤직·퍼포먼스 등을 융합, 범주화하기가 힘든 음악을 펼치는 경우를 들어보자.
이러한 동향에 대한 기여는 특정 뮤지션보다도 ECM이란 레이블의 일조가 크다. 특히 북유럽의 신비함과 어우러진 고요 속에 혼란을 대치시킨 얀 가바렉(1947, 노르웨이)을 통해 ECM 색채의 전형 혹은 유럽 재즈의 대표적인 경향으로 비쳐지기까지 했다. 5현 콘트라베이스로 삭막하고 고독한 정서를 실어보내는 에버하르트 베버(1940, 독일), 탱고·민속음악·재즈를 모티브로 한 긴 작곡 속에 프리한 즉흥연주를 지속적으로 삽입시키는 에드바르드 베살라(1945∼2000, 핀란드), 떠도는 공기처럼 아련한 톤을 지닌 존 서먼(1944, 영국) 등은 모두 ECM과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경향의 대표로 불린다.
두 번째로는 재즈와 매개고리를 유지하면서 첫 번째 언급한 특징과도 관련이 있는 뮤지션들이다. 이는 연주와 작곡에서 약간 상반된 기질을 지니고 있는데, 앙리 텍셰(1945, 프랑스)같이 리듬과 하모니는 아카데믹한 재즈지향이면서 테마 멜로디나 즉흥연주는 멜랑콜리한 에스닉풍인 경우, 루이 스클라비(1953, 프랑스)같이 프리재즈적 집단 즉흥연주와 다형식의 모드를 동시에 진행시키는 경우가 있다.
세 번째는 유럽 재즈 정체성 확립의 기틀을 마련한 프리재즈 혹은 프리뮤직이다. 레이블 수가 많은 데 비해 규모가 작은 연대 조직형이 두드러지며, 스위스의 ‘Hat Hut’·영국의 ‘Leo’·이탈리아의 ‘Black Saint’ 등이 가장 대표적인 레이블이다.
유럽의 프리재즈는 앨버트 아일러, 존 콜트레인, 오넷 콜맨,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의 영향 아래 출발한 후 매우 다양한 주법과 연주양식이 개발된 바 있다. 그리고 미국에 비해 더 논리적이고 타당한 전개가 나타나며, 가넬린 트리오나 세르게이 쿠료힌(1954∼1996)의 충격적인 데뷔를 통해 옛 소련 재즈의 실상이 드러나기도 했던 분야이기도 하다. 이반 파커(1940, 영국), 노엘 악쇼테(1968, 프랑스) 등의 최근 작품에서 컴퓨터와 무작위적 교환을 실험하는 ‘C-Sound’가 시도되는 데서, 정체된 실험성의 어떤 돌파구가 느껴지기도 한다.
네 번째로 어쩌면 가장 보편적이라 할 수 있는 4비트 재즈(오프비트 스윙감을 기조로 하는 컨벤셔널한 재즈)는 신구의 조화, 구보 복각 등 통상적인 세계 재즈 흐름의 추세와 비슷하다. 장 프랑수아(1944, 프랑스)와 제니 클락, 다니엘 유메르(1934, 스위스)와 유럽 최고의 피아노 트리오를 형성하는 요아힘 퀸(1944, 옛 동독), 몽크 컴피티션 1995년 우승자 예세 판 룰레(1972, 네덜란드)와 1996년 작곡 부문 우승자 미킬 보스트랍(1966, 네덜란드), 버클리 수석 졸업자 닐스 란 도키(1963, 덴마크) 등의 연주를 들어보면 정통 재즈에 대한 대안까지 느껴지는데, 재즈적인 에센스를 잃지 않으면서, 가다듬어진 프레이즈 자체가 그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완벽한 경지로 섬뜩한 테크닉과 함께 수준 높은 유럽 재즈의 현주소를 시사하기도 한다.
다섯 번째는 이른바 퓨전재즈이다. 여기서는 스무드 재즈와 긴장감 높은 코드 변화와 복합 리듬, 고난도의 섹션이 어우러진 포스트 퓨전 스타일까지 포함해 언급하도록 하겠다. 먼저 애시드 재즈의 발상지는 영국 런던 댄스 클럽이며 ‘Cantaloupe Island’ 리메이크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힙합 재즈 붐을 일으킨 US3는 영국 출신의 그룹이다. 그리고 이 신의 중심 인물인 스티브 윌리엄슨(1964, 영국), 코트니 파인(1964, 영국) 등은 미국 M-BASE 뮤지션들과의 교류가 깊다. 이 밖에 도발적인 랩과 깔끔한 호른 섹션으로 인기를 모은 프랑스의 자미로콰이와 재즈·펑크·월드·스트리트 뮤직을 장대하게 편곡하고 기발한 즉흥연주를 펼치는 ‘Groove Gang’의 리더 줄리앙 루로(1970, 프랑스), 펑키와 힙합적 요소를 절묘하게 혼합한 캔디 덜퍼 등이 있다.
한편 월드 뮤직과 퓨전 스타일을 결합해 미국 활동중에 상당한 찬사를 불러모은 클라우스 돌딩거(1934, 독일), 존 스코필드 이후 최고의 기타 귀재라 불리는 볼프강 무스피어(1965, 오스트리아) 등의 작곡이나 연주는 포스트 퓨전의 최고봉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기타 프리재즈와 정통 재즈의 경계에서 작곡과 빅밴드 통솔 방식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토니 코(1934, 영국, 비미국계로는 최초로 Jazzpar를 수상한 인물임)와 장고 베이츠(1960, 영국, 1997년 Jazzpar 수상)는 독특한 밴드리더로 꼽힐 만하다.
이상과 같이 필자 임의대로 유럽 재즈를 분류해 보았다. 하지만 언급한 뮤지션들이 꼭 그 스타일을 견지하란 법도 없고, 영향받은 분야를 어디 하나에만 국한하기도 사실 힘들다.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보아주기를 바라며, 이들의 독자성과 탐구성에 비추어 우리나라 재즈도 더 이상의 답습이나 기본적인 굴레에서 어느 정도 탈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바람도 가져본다.
우리 재즈계의 타산지석, 일본 재즈
“재즈는 국민소득 1만 불 시대의 음악이다.” 이는 불과 몇 년 전 우리나라에 재즈 붐이 일어났을 때 한참 떠돌았던 말이다. 별로 탐탁지 않은 표현이지만, 사실 재즈는 문화적 유산이 풍부하고 삶의 질이 보장되는 유럽·일본 등에서나마 시장을 형성하기에, 그리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네들의 문화가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발생한 재즈가 다시 역수입된 경로를 거친 유럽의 경우 어느 정도 연관성이 보이지만, 일본에서 재즈가 성행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유추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신축성이 아시아 어느 국가보다 뛰어나고, 이를 빛깔 좋게 꾸며내는 기질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막연히 스킨 콤플렉스에서 발전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여간 일본의 재즈 시장은 미국 다음으로 크다고 언급될 정도로 거대하다. 열도 곳곳에서 벌어지는 콘서트와 페스티벌, 도시마다 산재한 라이브 클럽이나 재즈 찻집 대형 음반 매장마다 마련된 상당 면적의 재즈 부스, 두터운 뮤지션층 등은 부러움의 대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전 거품경제의 여파로 쇠퇴하는 일본 재즈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지닌 한 일본 뮤지션의 글을 접한 적이 있지만, 재즈 클럽의 경영이 어렵고, 뮤지션 대부분의 생계가 힘든 것은 어디에서나 공통된 현상이며, 차라리 거품의 제거로 제대로 된 현실 반영이 이루어진 듯한 인상이 들기도 했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우리와 인접해 있고, 여러 측면에서 우위에 서 있는 까닭에, 재즈도 마찬가지로 영향 받기 쉬울 듯하지만, 정작 카시오페아나 T스퀘어 같은 팝적인 멜로디와 테크니컬한 연주를 펼치는 이른바 일본적인 밴드 이외에 음악적인 기여도는 별로 없다. 오히려 스윙저널지 같은 재즈 잡지의 골든 디스크 선정 음반이나 평점에 의존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이는데, 자국 뮤지션과 레이블 키워주기 인상이 짙은 골든 디스크 선정은 그리 신뢰도가 높다 할 수 없을 것이며, 게다가 각종 잡지에서 경쟁하듯 평점을 매기는데, 청자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킬 우려가 높은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는 한번쯤 숙고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 일본 재즈 뮤지션과 레이블, 팬층은 두텁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우리 입장에서 본 상대적인 시각일 뿐, 미국에 비할 바가 못 된다(물론 유럽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느낌은, 유럽인들은 라이브가 그들 일상생활의 연장인 데 비해 일본인들의 경우 우리와 별다를 바 없이, 일종의 폐쇄된 오디오 공간에서 트인 공간으로의 일탈을 꿈꾸는 일종의 도피처 같은 인상이 들었다. 이는 콘서트가 빈번하다 해도 초대형 규모가 없으며, 수십 곳의 콘서트 일정이 연속적으로 잡히는 미국 도시나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초라할 수밖에 없는 까닭에 재즈 매니어들이 결국 레코드 컬렉션 쪽으로 몰리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레코드가 지탱하는 일본 재즈의 힘
미국 혹은 유럽의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톱 클래스의 뮤지션이 일본에도 분명 있다. 우선 일본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다운비트 어레인지·컴포저·빅 밴드 부문 폴 위너만 10차례 차지한 아키요시 토시코(1929)가 그 첫 번째로 언급될 수 있다. 그녀의 출세작이자 동양(일본)적인 정서를 가미한 ‘Kokun’(孤軍) 같은 빅밴드 작품은 서양인들 눈에 신비함으로 비쳐진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리고 버브 창립 50주년 기념 콘서트에 유일한 동양인으로 출연하여 버드 파웰의 ‘Parisian Thoroughfare’를 비밥 테마에서 발전하여 프리 스타일로 풀어헤치는 절정의 해석을 선보인 바 있는 야마시타 요스케(1942), 동양인으로 상상하기 힘든 깨끗한 고음 톤과 엄청난 에너지·독특한 컬러의 프레이즈를 지닌 히노 테루마사(1942), 음색이나 음량 자체로는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찰리 파커풍에서 비밥까지 거의 모든 장르를 완전 자신의 페이스로 흐름을 조절하는 와타나베 사다오(1933) 등은 ‘Japan Jazz Big 3’라 불리며, 오래전부터 국제적인 명성을 누려오고 있는 뮤지션들이다.
사토 마사히코(1961)는 대중적 명성은 없지만, 건반악기 연주자로서 어쿠스틱과 일렉트릭 두 부문에 공히 완숙한 경지에 올라 있으며, ‘란두가’란 자율 음악 집단을 이끌거나 프리 뮤직에까지 지평을 넓혀, 실질적인 일본 재즈계의 리더로 꼽히기도 한다.
이 외에도 일본 최고의 기타리스트이자 다양함이 오히려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방해하는 듯 감성의 결여가 아쉬움으로 느껴지는 와타나베 카즈미(1953), 버클리 졸업생으로 한때 신드롬까지 번지기도 했던 오니시 준코(1967)나 일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GRP와 계약을 맺은 키시노 요시코, 재일교포 3세로 우리와 친근한 리 게이코(李慶子, 1965) 등은 우리 팬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인물들이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운드의 마술사 오사무 키타지마나 팝 재즈 성향의 기타리스트이면서 어지간한 가수 못지않은 관객 동원력을 지닌 타카나카 등은 국내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척박한 국내 여건과 비교하기는 무엇하지만, 필자가 믿어 의심치 않는 바는 최소한의 자질만큼은 국내 뮤지션들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응용력이나 개성 추구란 측면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정형화된 듯한 경향이 강한 일본에 비해 숨겨진 가능성에 의한 발전 여지는 더욱 높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스탠더드 위주의 안일한 기획에 안주하려는 대부분의 레이블 정책―오마 토키, DEW 같은 예외는 분명 있으며, 우리는 이조차도 갖추지 못했다―경직된 콘서트 홀 분위기는 서두에 언급한 재즈 강국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 같다.
그러나 축적된 노하우나 체계화된 자료집, 세밀한 트랜스크립션, 넓은 음반 매니어층은 충분히 일본 재즈 고유의 저력을 실감케 할 수 있다.
일본 재즈가 우리에게는 타산지석이 될 수 있는 가까운 예가 되기에 한번쯤은 달리 생각해보기도 하며, 무저항적인 접근은 삼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김제홍|재즈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