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金海金氏,가락)는 인구수도 많고 계파도 아주 많습니다.
인구수는 2000년 전국인구조사에서 412만명으로 조사 되었고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8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A.삼현파(三賢派:극일, 일손, 대유): 김관(金管)을 중시조로 한다.
B.경파(京派: 영견,영서,영정,영순): 고려의 김목경(金牧卿)을 중시조로 한다.
C.사군파(四君派:극조,완,여수,세기): 목경의 동생 김익경(金益卿)을 중시조로 한다.
본관지는 경상남도 김해시입니다.
가락중앙종친회: 02) 714-7459
**근원이 다른 김해김씨가 있는데 임진왜란때 왜장 김충선이 귀화하여 성을 하사
받은 김해김씨(우록김씨)와 신라김씨 계통인 김해김씨(법흥파)가 있습니다.
홈피: "김해김씨"로 검색하시면 http://kimgane.new21.net 외 여러곳이 있습니다.
[유래]
시조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가락국에는 본래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아홉 촌장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3월에 구지봉(龜旨峰)에서 이상한소리가 났다. 아홉 촌장과 사람들이 올라가자 "산봉우리에 흙을파며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약 머리를 내지않으면 구어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임금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하자 그대로 하였더니,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땅에 닿아 있었다. 그 끈의 끝에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이것을 열어 보니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가자 다음날 이 알이 여섯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제일먼저 나온 아이 이름을 수로(金首露, 42~199.3.23)로 하고 그달 보름에 왕으로고 나라 이름을 가락(대가야)이라하고,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 이상은 "삼국유사" 중에서 -
그중 먼저 나온 수로는 금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으로 하였다. - 이상은 "개황력(開皇曆)" 중에서 -
이 수로왕을 시조로하는 성씨가 바로 김해김씨이다. 김해는 가락국의 고도로서 지명도 여러가지로 변했으나 고려 충선왕 때 김해부가 설치됨으로써 본관을 김해로 하였으며 가락김씨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수로왕이 즉위 7년에 아유타국(현재 인도 중부지방의 고대국가)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 33~189.3.1)을 왕비로 맞이하여 10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고 두 아들은 왕비의 간곡한 요청으로 왕비의 성인 허(許)씨(태인허씨)를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화하여 하동 7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가 있으며 세 성씨가 다같은 혈족이라며 종친회도 '가락중앙종친회'로 하였다.
김해김씨의 중시조는 수로왕의 12세손인 김유신(金庾信)장군이다. 김유신은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증손자이며 무열왕의 딸 지소 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였다. 할아버지는 신라의 장군이자 각간(角干)인 김무력(金武力, 구형왕의 막내 아들)이고, 아버지는 당대의 이름난 장군인 김서현(金舒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가문의번영]
-삼현파: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1세조인 김관(金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김극일(金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극일의 아들 김맹(金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 김일손(金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김일손은 1486년(중종 1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를 살피게 되니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 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 때의 영의정(領議政) 남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을 마쳤다.
김일손의 증손 김언유(金彦諭)는 고양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비(碑)와 병풍, 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김언유의 아들 김현성(金玄成)은 광해군 때 폐모론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와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에 능통했던 김덕승(金德承),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김예직(金禮直), 조선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金弘道)가 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김진희(金晋熙)와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 등이 있다.
-경파:
경파의 파조인 김목경(金牧卿)은 고려 충정왕 때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당시 혼란한 국정을 개탄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조년(李兆年)과 함께 누차 왕에게 상소 했으나 듣지 않자 속리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여생을 마쳤다.
김목경의 맏아들 김보(金普)는 공민왕이 세자 때 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갈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김보의 6세손 김영견(金永堅 : 동지중추부사), 김영서(金永瑞 : 현감), 김영정(金永貞 : 성종 때 대사헌), 김영순(金永純 : 한성판관)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때 명신 김우항(金宇杭)은 김영정(金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사군파:
사군파에서는 파조인 김익경(金益卿)의 손자 김진문(金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색(李穡), 박자검(朴自儉) 등과 함게 은둔 생활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김추(金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김석(金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김조는 세종 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자격루(自擊漏), 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그는 벼슬이 옮겨질 때마다 몽은제(蒙恩祭)를 올리는 충신으로서도 이름이 났고, 세종이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榻 : 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化)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김진문(金振門)의 6세손 김극희(金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김완(金完 :
학천군 김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 할 때 벽동(碧潼)의 성(城)을 사수했던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우(金宇)의 아들 김여준(金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의 맏아들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와 인평대군(璘坪大君)을 호종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중국 심양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를 소리내어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거(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時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송상현(宋象賢), 유극량(劉克良)과 더불어 삼충절(三忠節)로 일컬어진 김동광은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재직시 임진왜란 일어나 성이 함락되자 좌우를 피난시키고 성의 정문 앞에 조복단장한 채 관인을 쥐고 단좌하여 적에게 저항하다가 참살당하여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김해김씨(金海金氏, 우록)
시조 김충선(金忠善,1571~1642, 자는 선지, 호는 모하당)은 본래 일본인으로 성은 사(沙)씨이며 이름은 야가(也可)이다.
그가 임진왜란때 21세의 나이로 일본군 가등청정(加藤淸正, 가또오 기요마사)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4월 13일 부산 동래에 상륙 했다.
조선의 문물과 인정, 풍속에 감탄하여 상륙한지 1주일만인 4월 20일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과 김응서(金應瑞)에게 "내가 못난것도 아니요, 나의 군대가 약한 것도 아니나 조선의 문물이 일본에 앞서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를 짓밟을 수 없어 귀순하고싶다."라는 편지를 보내 귀순의 뜻을 밝힌 후 귀순하였다.
귀순 후 조선의 장수로 울산과 경주, 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그는 조선에 화포와 조총을 만드는 법과 사용술을 보급하였고, 18개 지역의 왜적의 성을 탈환하는 등 눈부신 업적과 전공을 세우자 권율장군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이 왕에게 간청하여 정이품 자헌대부에 올랐으며 선조가 그를 친히 불러 이름을 김충선으로 하사 하였다.
1603년(선조 36년) 북방에서 여진족이 국경을 어지럽히자 국경방어를 자청하여 10년간 국경을 지키다 물러났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다시 출정해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의 목을베어 평정에 공을 세웠다.
1627년(인조 5년)의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서 매복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어 무훈을 떨쳤다.
그는 서른살이 되던 해 진주 목사(晋州牧使) 장춘점(張春點)의 딸을 아내로 맞아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友鹿洞)에 뿌리를 내리고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풍(家風)으로 살다가 1642년(인조 20년) 72세로 세상을 마쳐 가창골에 세워진 녹동서원(鹿洞書院)에 배향되었고, 정헌대부 지중추부사(正憲大夫 知中樞府事), 병조참판(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지금 그의 후손들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많이 살고 있으며 우록동에 살았기 때문에 우록김씨라고도 불리운다.
본관지는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
### 김해김씨(金海金氏, 법흥파, 김염계)
시조 김염(金濂)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은열(金殷說)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고려 시대에 벼슬이 봉어(奉御)에 이르렀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고있다.
김녕김씨 시조인 김시흥(金時興)의 8세손 김문기(金文起)가 단종복위운동에 찬가하여 사육신과 함께 순절하고 3족을 멸하는 위난이 닥치자 김문기의 8촌동생 김춘(金春; 김해군수)은 황해도 풍천으로 피신했다가, 성종2년에 다시 평안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法興洞)에 옮겨가 터를잡고 살면서 자손이 번창하자 본관을 법흥으로 하고 김춘을 관조(寬祖)로 하여 1세조로 하고 있다.
[계 파]
고강파(古姜派)
남시파(南市派)
당산파(堂山派)
동문파(東門派)
만다지도파(灣多地島派)
만진리파(灣津里派)
법흥파(원류본파)(法興派(原流本派))
사동파(社洞派)
산후파(山後派)
선천사사파(宣川沙士破)
주의파(做義派)
본관지는 평안도 용천군 동하면 법흥동
연락처: 02)815-0227(김기보씨), 02)302-0275(김효승씨)
인구수: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125,277명(우록김씨 포함)이 있었다.
유래및 씨족사회에 관하여는 윗분이 말씀을 드렸으니 보충하는 선에서 파조만 올려드립니다
세계표
김수로(태조왕)--거등(도왕)--마품(성왕)--거절미(덕왕)--이니품(명왕)--
좌지(신왕)--추희(해뢍)--질지(장왕)--겸지(숙왕)--구형(양왕)--탈지(이질금)--
무력---서현--유신(흥무왕)--삼광--윤중---장청--웅원---
경주--성해---정철--수윤---천수--상좌--호--화제--진유--승의---천정--항령--수성--상흠----성우--일서--광국--종백--수--이탁--서천--양철--시추-진국(41세)---주국(50세)--목경(김년군파),익경(감무공파)[사군파]
...|용직(48세)--관--판도 판서공파)[삼현파]
....ㅣ41세정국--자옥(49세)유찬--태령(55세)유공(판서공파)거공(부호공파)
...............ㅣ--유찬, 유환, 유옥,유윤 -상태--첨일(판서공파)
..............................ㅣ유옥---평(부정공파)(양의공파)
유환--지서(51세)(승시랑공파)
김녕공파(경파)
1세조(김목경)--보(충간공),저(문간공),수(밀직),난(평장사)
--보(충간공)--도문,달문(참찬공파),현문(봉상공파),창문(밀직사공파)...........
목경--보--도문--근--, 효분--진손,진서(호참)(호참공파)영석,영희,영모..
..........................ㅣ진손--영견(참판공파),영서(횡성공파)영정(안경공파)영순(석성공파)
목경--저(문간공)--경문--ㅇㅇ,규,관(문간공파)...............................
목경--수(밀직)--사검,사언--중현,중보,중억,만억,(밀직공파).................
목경--난(평장사)--거-,여,기-,광문-(평장사공파)
감무공파(사군파)
일세조(김익경)--시--진문--연(생원)[생원공파],추(도총관)-우형[도총관공파]
구-웅진[생원공파],석-희문[찬성공파],감(상서)-태보,태준,태현[상서공파]
조(공간공)-자정,극신,극현,홍정[공간공파]
판도판서공(삼현파)
일세조(김관)--문숙--항--서,
서--극일(절효공)--건(군수)-태식[군수공파],맹(집의[집의공파],용(한림)[한림공파],순(진사)[진사공파],인[녹사공파]현(진의)[진의공파]
부호공파
일세조(김거공)--자문--,치련(참봉)--석견(첨정)--몽수,몽량,몽남(주부)--원갑,형갑,문갑,무갑,계갑,종갑
판도판서공파
일세조(김첨일)택--성집--령--사필--웅역
승사랑공파
일세조(김지서)--시의--인범(현감)--상지(지충수),상용
상지--세온,,
부정공파
일세조(김평)--승--장량--귀진--효생--개--몽하--계식--인용--경서(양의공)
김평--승--장견(별장)--매신--여경
판전공파
일세조(김명택)--영손(직제학)--
,
판서영천공파
일세조(김부비)--수광(부사),숙광,계광,익광
수광--석공(현감)--
숙광--석하--,
계광--석징--극손--치원
익광--석형,석보--윤덕--일순
진사공파
일세조(김건--희순--양직--웅벽--용득--호민,원민,정민
부호군공파
일세조(김천일)--석태(병조좌랑)--상국--득례(판관),득의--준민--일훈
좌정승공파
일세조(김만희)--혁--례--봉(참판)독희--계찬,후찬,일찬
...................례--검--백희,억희
승정공파
일세조(김종정)==문범--만충--각--중도--신검--천벽--순일--수성--웅우,웅원,웅건
판결사공파
일세조(김용만)--을동--문--득복(선무공신)효원(부장)--경신,경택
충정공파
일세조(김이장)--서옥(첨의시중)--영철--시발--봉채--하진,인채
이외에도 운은공파,한림공파,부사공파,충정공파,유수공파,참봉공파,승록공파,장사공파,휴은공파,도사공파,도총관공파,대제학공파,사정공파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