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에 걸리는 연(緣)
류 근 만
지난 2월 18일 일요일, 아직 기상 전인데 지인한테 전화가 왔다.
“형, 8시까지 밭으로 와요, 내가 나무를 싣고 갈 테니 밭에서 만나요”
하면서 자기 말만 하고 통화가 종료된다.
‘대동강물이 풀린다.’라는 우수가 코앞이다. 평소 같으면 아직 추위가 심할 테지만 요즈음 날씨는 변덕스럽다. 봄날 같아 성질 급한 사람들은 벌써 농사 준비에 바쁘다. 나도 덩달아 조급하다. 지난가을에 나무를 심으려다 미루어졌다. 나는 초년생이라서 농업기술센터 지도사의 지도에 의존하는 편이다. 너무 이른 봄에 나무를 심으면 자칫 동해를 입을 우려가 있다면서 삼월 초나 중순에 심으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나에게 전화를 한 지인은 대추나무를 심고 가꾸는 경험이 많다. 그는 이론보다 실전을 중시한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낀 새다. 지도사는 농촌지도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고, 지인은 내 가까이서 나를 잘 도와주는 조경사다. 만약 나무가 얼어 죽으면 보상을 하겠다는 협박 아닌 자신감을 보인다. 이쯤 되니 내 고집을 더 부릴 수도 없었다. 자칫 이웃을 못 믿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도 되었다.
나는 지인에게 대추나무 묘목을 구해달라고 부탁을 한 터였다. 자기 집으로 배달된 묘목을 싣고 직접 온다는 것이다. 내심 식재 준비를 서둘렀기에 다행이었다. 미리 나무 심을 두둑도 만들고 심을 간격도 표시를 해두었다. 나무를 심을 때 물이 많이 필요하다 하기에 지하수가 얼지 않았는지 점검도 하고, 호스도 물이 잘 통과하는지 시험도 해봤다. 지인은 나무를 심을 때 사용하는 ‘生命 精(생명 정)’이라는 퇴비도 쓰던 것이 남았다면서 가져왔다. 일찍이 내가 알지 못한 영양퇴비다.
농촌지도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꺼림 칙 하지만 나중에 적당히 핑계를 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무를 심었다. 실전 경험이 없는 나는 조력자일 뿐이다. 나무뿌리를 다듬고, 나무 심을 구덩이를 파고, 영양제 퇴비와 흙을 1:4로 혼합했다. 허리가 아프지만 일어섰다 구부리기를 반복하면서 서둘렀다. 오후 늦게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했는데, 대추나무 식재 중에 갑자기 하늘이 우중충하고 비가 곧 쏟아질 것처럼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우리 둘이는 나무를 구덩이에 넣고 흙을 얕게 덮었다. 그런 다음 호스를 박아 물을 주면서 곤죽을 만들었다. 물이 완전히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가 갈라진 틈새를 메웠다. 전에는 나무를 넣고 물을 준 다음 흙으로 덮고,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발로 꼭꼭 밟았었다. 다른 점은 물을 충분히 주고 뿌리 사이는 자연히 메꿔지게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물주기라고 한다. 내가 초보인 것을 아는지라 자세히 설명을 해 준다. 고맙기만 하다.
점심때가 다 되어서 식사를 하러 가자고 해도 그는 내 말은 듣지 않는다. 나무 심는 것이 먹기보다 급하다는 것이다. 나무를 다 심고 나서 아픈 허리통증을 달랬다. 시계를 보니 오후 한 시가 넘었다. 내심으론 시장했지만 일이 끝났으니 마음이 후유 하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오는데 빗방울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진다. 하늘은 비구름으로 우중충 하지만 내 마음은 한결 가볍다. 오늘 할 일을 다 했으니 걱정이 없어진 것이다.
나는 대추나무를 심으면서 여러모로 새로움을 느꼈다. 평소 인간관계의 중요성이다. 처음 이곳에 땅을 샀을 땐 지인은 평이 좋지 않아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인상도 말투도 그랬다. 서로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런데 차츰 친하게 지내다 보니 그게 아니다. 그는 인정 많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넓다. 나는 아마추어 농사꾼이라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도움도 받는다. 옛말에 이사할 때 ‘대물값이 천 냥이라면 주변 값이 구백 냥’ 이란 말의 의미를 다시금 되뇌게 한다.
또 하나는 기술이다. 나도 옛날에는 사방공사를 할 때도 나무를 심어 봤고, 그 후 복숭아 과수원도 해봤지만, 오늘처럼 물을 흠뻑 주는 일은 없었다. 물론 물을 공급하기가 어려운 탓도 있었지만 이렇게 중요하게는 생각지 않았다. 심을 때 물을 흠뻑 줘야 활착이 잘되고, 자주 물을 주지 않아도 되며, 성장도 빠르다. 사람이나 나무나 물을 좋아하기는 마찬가지란다.
그 후부터 나는 대추나무에 관한 정보를 얻기에 바빴다. 지인이 심은 대추밭도 가보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나무가 실하게 자란 것을 확인했다. 지금은 하늘을 보고 일할 시간을 조절하고, 흙을 보고 성장 속도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에 기술이 좋고 숙련이 필요하다. 모르면 답답하고 알면 당당하다.
나는 과일 중에 으뜸인 대추를 심으니 마음이 으쓱해진다. 그것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이다. 대추는 왕의 과일 임을 자랑하면서 관혼상제에서 터줏대감이다. 혼인 폐백 자리에 빠지지 않는다.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에게 절 받을 때 치마폭에 던져주면서 손자를 많이 낳으라고 덕담을 한다. 차롓상을 차릴 때도 앞줄 가장 왼편에 놓는다. 조율이시(棗栗梨柿)다. 대추를 맨 앞에 진설하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다.
대추나무는 열매가 많이 열린다. 많은 자식을 낳고, 순수 혈통이 보존되는 유교적 윤리다. 대추의 붉은색은 임금님의 용포를 상징하고, 씨는 크면서도 하나뿐인 특징으로 왕을 상징하는 과일로 통한다고 한다.
대추나무는 한자로 대조 나무였다. 큰 대(大)에 대추나무 조(棗)인데 대추나무를 뜻하는 조(棗)자는 가시 자(朿)가 두 개 합친 모양이다. 즉 가시가 많다는 뜻인데 조심하라는 뜻도 있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도장을 조각하면 복이 많다는 말도 있다. 또한,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한다.’라는 속담도 있다. 대추나무는 가시가 억세고 크다. 그래서 연이 잘 걸린다고도 하고,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려 빚을 진 사람이 많다는 말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나는 ‘대추나무에 연이 걸리듯’을 달리 해석한다. 연을 연분(緣分)을 맺는 연(緣), 또는 인연(因緣)을 의미하는 뜻이라 생각한다. 오래전 KBS에서 방영된 ‘대추나무사랑걸렸네’는 농촌의 정감을 자아낸 오랜 세월 동안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은 드라마가 있었다. 대추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약재로도 이용되고 대추차도 사랑을 받는다. 나도 평소에 즐겨 먹고 정감이 가는 과일이다.
그게 내가 대추나무를 심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일하기가 수월하다. 농약 하는 횟수도 적고, 재배시설도 저장시설도 불필요하다. 식재 후 2~3년이면 수확할 수 있다. 추위에 강하고 병해도 적은 편이어서 비교적 관리가 편하다.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것이 ‘복조 대추’다. 약 대추라 불리면서 건과로 많이 이용되고, 당도가 좋아 생과로도 인기가 좋다.
‘대추나무사랑걸렸네’ 드라마는 아니어도, ‘대추나무 연(緣) 걸리듯’ 지인들과의 인연(因緣)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랑의 대추 맛’도 보여주고, 지인들에게 ‘엄지 척’ 신호를 받고도 싶다. 농촌 지도사와 지인 사이에서 이론 봄에 대추나무를 삼는 의사 결정까지 어렵게 하면서 조금씩 초보 농사꾼을 면해 가고 있지만 그날의 선택이 지금 나를 기쁘게 한다. 오늘도 나는 대추나무 밭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