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에 MC몽
이수근도 보인다.
<1박 2일> 팀이 새벽에 잡은 흑산도 산 홍어를 한마리 구입한 가게. 70만원을 호가하는 흑산도 산 홍오를 우리는 3.9kg짜리를 12만원에 산다. 그리고 경주로 택배로 부친다.
우리가 구입한 것이 바로 밑에 놈이다.
홍어는 상해도 먹는 음식이어서 상한 것을 먹어도 탈이 나지 않고 삭힐 수록 맛있는 음식이다. 홍어를 먹기 좋게 토막토막 잘라서 밀봉하여 장독 항아리 속에 넣어 놓았다가 일주일 정도 지나 삭은 것으로 먹게 된다. 예전에는 홍어를 삼베더미 속에 싸서 두엄이나 지푸라기 속에 넣어 삭히기도 했다. 홍어는 밀봉되어서 삭는 과정에서 몸안의 삼투압을 조절하기 위해 요소를 몸안에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분해되어 소화효소인 펩타이드와 아미노산이 만들어지게 된다.
홍어를 삭히게 되면 톡쏘는 냄새가 나는데 이것은 고기가 부패되어 나는 냄새가 아니라, 세균이 부패해서 나는 냄새로서 육질의 변화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섭취해도 좋다. 홍어가 가지고 있는 암모니아는 부패 세균의 발육을 억제 하므로 식중독 발생의 염려가 없는 것이다. 잘 삭힌 홍어는 묵은 김치처럼 오래 보관할수록 살이 단단해지고 싸한 맛이 더욱 깊어진다.
발효된 홍어를 뜨겁게 찜을 만들면 아직 분해가 되지 않은 요소와 암모니아가 함께 우리 코를 콱 자극한다. 사실 이 때 우리의 코를 자극하는 암모니아의 양은 소량에 불과하기 때문에 암모니아의 독성은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홍어는 다른 물고기와는 다르게 진화하였다. 가오리과는 상어가 바다 밑바닥에서 살때메 환경 조건에 따라 변형된 물고기라서 성분 ,조직, 맛이 비슷하다. 홍어는 상어(경상도에서는 돔베기)보다는 단백질이 적고(14%), 지방은 (0.5%) 로 훨씬더 적다. 홍어, 가오리, 상어는 모두 연골 뼈로 되어있으며, 질소 화합물인 요소, 암모니아, 트리메틸아민 등을 대량 함유 하고 있다.
도대체 왜 발효시키면 홍어가 유독 다른 물고기보다 암모니아를 많이 만들까?
우선 화초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비료를 너무 많이 주면 잘 자라기는커녕 오히려 화초가 시들어 죽는다. 뿌리 주위 흙에 너무 영양분이 짙으면 화초가 영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화초 몸 속의 물이 흙으로 빠져나가는 삼투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똑같은 현상이 물고기에도 일어날 수 있다. 즉 염분이 많은 바닷물 속에서 물고기가 살아남으려면 체내수분이 바닷물로 빠져나가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내에 여러 가지 화합물이 충분히 녹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바닷물고기는 모두 나름대로 그런 방향으로 진화되었다. 특이하게도 바닷물 속에서 삼투압 조절을 위해 살 속에 요소와 요소전구물질이 많이 들어있다. 요소는 물론 비료로 사용되는 물질이다.
흑산도 육로관광은 관광객 수에 따라서 차의 크기가 달라지는데 우리는 6명 밖에 되지 않아 이런 차가 나왔다. 하지만 가이드를 맡은 운전기사는 달변으로 우리를 웃겨댔다. 차 문에 '천사섬'이라고 씌여져 있는 데 그것은 흑산도가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고, 기를 들고 서 있는 마스코트는 '홍어'이다.
어느 전망대에서 촬영한다. 맨 왼편 섬이 대장도, 그리고 소장도, 내망덕도이다. 대장도에는 뒷섬 위편 우측에 푹 파진 곳이 있는 데 그곳이 산지습지라고 했다. 늪지대라는 것이다.
섬들의 지도
흑산도 앞 바다이다. 양식은 거의가 전복이다.
지도 바위다. 파진 부분이 한반도를 닮았단다.
한국의 나폴리라고 하는 흑산도 사리포구이다. 흑산도 정남쪽에 있는 사리마을은 동남풍이 불어도 어선들이 정박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사리포구 앞의 7개의 작은 섬들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사리마을에 홀어머니가 아들 7형제와 바다에 물질하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해 큰 태풍이 불어 와 몇날 며칠을 어머니가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지 못해 아들 7형제 하나하나가 바다에 들어가 두팔을 벌려 파도를 막아서다가 7개의 작은 섬들로 굳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7개의 섬을 7형제 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사리마을에 정약전이 세운 서당이 있다.
아름다운 사리마을
사리마을 속에 유배 온 정약전이 세운 사촌서당이 보인다. 자산어보를 저술했다는 그 집이다. 손안 정약전(1758-1816)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며 다산 정약용의 형으로 신유사옥 당시 흑산도로 유배되어 15년간 우이도와 흑산도에 머물면서 물고기 해산물 등 총 227종을 채집하여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 또한 우이도의 어상 문순득이 오끼나와와 필리핀, 중국을 거쳐 극적으로 생환해 돌아온 표류 이야기를 듣고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견문을 남겼으며, 흑산도 사리마을에 사촌서당(복성재)을 지어 학문을 가리치는 등 많은 후학을 양성하시다 순조 16년(1816) 지금 도초면 우이도에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98년 복원된 사촌서당 옆에는 1950년대에 건립된 천주교 촉산성당의 사리공소가 있다. 일제시대에는 사촌서당 자리에 단층 초가건물로 된 동광학원이 있어 사리 인근 마을의 아동들이 다녔는데 이것이 현재의 흑산초등학교 사리분교의 전신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흑산도 샛개해수욕장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오는데
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향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에서 목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30분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차를 몰고 목포에서 광주를 향해서 달린다. 내일이 <산에 대하여> 정기산행일이라, 오늘 일찌기 서울에서 전종성이 광주로 내려와 무등산을 타고 하산해 지금 우리들을 광주에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오늘밤 같이 지내고 내일 순천 조계산으로 들어갈 것이다. <산에 대하여>정기산행이 마침 이번 여행중에 끼어 있어 나름대로 그렇게 스케쥴을 잡은 것이다.
전종성이와 연락이 된 뒤 바로 광주로 들어가면서 전종성이를 광주의 유명한 한식집 <조선한정식>으로 오라고 했다.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서이다. 한식집 <조선한정식>은 인터넷에도 자주 등장하는 광주의 맛집인데 음식의 화려함 보다는 섬세함이 뛰어난 집으로 내가 광주에 들릴 때마다 즐겨 찾는 집이다. <조선한정식>은 2006 광주김치대축전 대통령상 수상했다는 루시아 김치로 유명한 음식점이기도 하다.
위 사진은 매생이탕이다.
<조선한정식의>의 특이한 음식
조선한정식의 유명한 김치(사진이 짤렸지만....)와 청국장
맛있는 자연산 회
경상도 말로 하면 뭉티기라고 한다. 단지 모양이 길쭉길쭉하다. 소의 생고기를 양념소스에 찍어 먹는 음식이다.
홍어 삼합. 역시 고급집이라 돼지고기 수육이 아주 질이 좋은 부위이다.
낙지탕탕이와 전복회
떡갈비약식도 나오고...............
새우요리도 나왔다.
생선구이도 맛있게 구워졌다.
버섯튀김 요리는 별미였다.
어탕의 국물이 아주 구수하다.
버섯요리
우측 아래는 김치 같지만 속에 건어포가 섞여 있다.
갈치젓갈을 두드려 놓았다. 매실 피클이 있었는데 사진을 찍지 못했다.
청국장도 맛이 있다.
감태는 해초이다. 파래보다는 부드럽고 매생이보다는 거칠다. 맛은 파래에 가깝다.
저녁 식사를 거하게 하고 광주의 번화가인 충장로로 나와서 숙소를 정해서 짐을 풀고 잠시 쉬다가 밤 9시에 광주의 명동인 충장로 다운타운으로 나온다. 한국100명산 등정을 축하하는 축하주를 전종이한테서 얻어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숙소로 들어온다. 광주에서 3박을 한다.
아침에 서둘러 산행에 나선다. 짐을 싸 들고 나와 광주 조선대학교 앞에서 국밥을 먹는다.
조선대는 한국 최초의 민립(民立)대학으로, 1946년에 섰다. 한강 이남의 3대 사립대학으로 흔히들 대구 영남대, 부산 동아대, 광주 조선대를 일컬을 정도로 메머드급 지방 사립대학교이다. 군사정권 때 호남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모든 조건들의 혜택을 주곤했는데 대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결과 조선대학은 없는 학과가 없을 정도로 대규모 대학이 되었다. 한국에 있는 학과들은 조선대에 모두 다 있다. 연극영화과, 특수교육학과, 원자력공학과, 러시아어학과, 광고홍보학과, 문예창작학과...........등 좀 특이한 것들도 모조리 다 있다. 특히 김대중 정권 때에는 대학의 모든 건물들이 신축, 개축하여 완전히 새롭게 단장을 하고 있다.
조선대학교 앞에서 먹은 국밥. 거지죽같지만 보기보다는 맛이 있다.
그리고 광주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동남으로 달려 순천 못 미처 승주IC에서 내려 선암사로 들어온다. 위는 선암사 주차장이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竹鶴里) 선암사에 있는 돌다리인 승선교이다.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어져 있다. 선암사에 이르기 전 조계산(曹溪山) 계류 건널목에 놓인 돌다리이다. 다리는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고, 전체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다.
선암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종, 순조때 여러차례 중건하였으며 이 돌다리도 임진왜란 이후 사찰을 중창할 때에 가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 24년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을 보려고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뜻을 이룰 수 없어 자살을 하려 하자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했다. 대사는 이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우고 절 입구에 승선교를 세웠다고 전한다.
승선교의 치석(治石)과 홍예의 결구(結構)가 벌교 홍교의 것보다 고식(古式)을 띠고 있으며, 그 구조도 웅장한 점으로 보아 영조(英祖) 때 조성하였다는 벌교 홍교보다 조성연대가 앞선다.
그리고 나타나는 강선루. 단미의 모자가 예쁘다.
이제 드디어 태고총림 선암사다.
선암사는 542년 아도(阿道)가 비로암(毘盧庵)으로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도 한다.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건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사로 방치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창하였고, 영조(英祖) 때의 화재로 폐사된 것을 1824년(순조 24) 해붕(海鵬)이 다시 중창하였다.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의 당우(堂宇)만이 남아 있지만 그전에는 불각(佛閣) 9동, 요(寮) 25동, 누문(樓門) 31동으로 도합 65동의 대가람이었다. 특히 이 절은 선종(禪宗), 교종(敎宗)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松廣寺)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修鍊道場)으로 유명하다.
주요문화재로는 보물 제395호인 삼층석탑 2기가 있으며, 대웅전은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395호인 삼층석탑 2기중 하나가 보인다.
대각암 길을 못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뒤에 길을 제대로 찾아 오르기 시작한다.
산으로 들어갈 수록 눈이 많아진다.
영차, 영차! 산을 오른다.
드디어 정상 장군봉이다.
조계산은 전남 순천시 송광면과 주암면 일대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 884m이다. 소백산맥 끝자락에 솟아 있어 고온다습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예로부터 소강남(小江南)이라 불렸으며,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한다. 피아골, 홍골 등의 깊은 계곡과 울창한 숲, 폭포, 약수 등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동쪽의 계곡 물은 이사천(伊沙川), 서쪽의 계곡 물은 송광천으로 흘러드는데, 특히 비룡폭포가 유명하다. 서쪽 기슭에는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僧寶寺刹)인 송광사(松廣寺)가 자리한다. 이 곳에는 목조삼존불감(국보 42),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43), 국사전(국보 56) 등의 국보와 12점의 보물, 8점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동쪽 기슭에는 선암사(仙巖寺)가 있다. 이 곳에도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395), 아치형 승선교(昇仙橋:보물 400) 등 문화재가 많다. 그 밖에 송광사의 곱향나무(일명 쌍향수:천연기념물 88), 승주읍 평중리의 이팝나무(천연기념물 36) 등이 유명하고, 선암사의 고로쇠나무 수액과 송광사 입구의 산채정식 등이 유명하다.
산 일대의 수종이 다양해 산 전체가 전라남도 채종림(採種林)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선종의 송광사와 교종의 선암사가 조계산을 경계로 동서로 갈라서 있으니 참 대단한 대치이다.
조계산 정상이다. 이로서 나의 한국100명산 등반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추운 날씨에 떠날 준비를 하는 종성과 단미.
드디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남쪽 방향으로 하산을 시도한다. 우리는 작은 굴목재와 큰굴목재를 거쳐 다시 선암사로 내려갈 것이다.
작은굴목재가 나온다. 사람들은 거의 다 여기서 선암사로 떨어진다.
하지만 우리만 큰굴목재로 나아간다. 이 길에는 우리 뿐이다.
큰 눈은 아니지만 올해 처음으로 눈산행을 해본다.
큰굴목재이다. 이 길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다. 가볍게 산을 타려고 하는 사람들은 송광사에서 여기 큰굴목재를 지나 선암사로 바로 내려간다. 이른바 트레킹 코스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등반로를 많이 밟아 제법 미끄럽다.
선암사로 내려가는 길
여전히 하산 중이다.
제법 가팔라지기도 하고...............
1 시간 이상을 내려와야 된다.
선암사가 가까와지자 나타나는 편백나무 군락지이다.
편백나무는 측백나무과의 상록교목으로 원산지가 일본이다. 삼나무와 생김이 비슷하지만 좀 다르다. 노송나무라고도 한다. 높이 40m, 지름 2m에 달하며, 가지는 수평으로 퍼져서 원뿔형의 수관을 하고 있다. 수피는 적갈색이고 섬유성이며 세로로 얇게 벗겨진다. 일본 특산종이며, 재질이 좋으므로 한국에서는 남부 지방의 조림수종으로 재배한다. |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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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선암사가 가까와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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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산 등반 후, 우리는 순천으로 나와 터미널에서 전종성을 서울로 보내고 곧 바로 해남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전국 최고의 해물탕집으로 유명한 해남 용궁해물탕 집으로 온다.
전남 해남은 바다와 인접해 있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해산물이 무척 풍부한 고장이다. 물론 해남의 명산, 두륜산은 산채 나물들이 풍부하여 부근에는 유명한 산채식당들도 여럿 있다.
하지만 웬만한 미식가들이면 꼭 한 번씩 먹어보았다는 그 유명한 해물탕 집이 바로 용궁해물탕이다. 용궁해물탕의 특징은 뭐니 뭐니해도 신선한 해물이라 하겠다. 매일 새벽, 목포나 완도 수산시장을 돌며 신선한 재료만을 엄선하여 해물탕을 끓여내니 그 맛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뚜껑이 덮이지 않을 정도로 힘 좋고 풍성한 해물을 듬뿍 넣고 푹 끓여낸 해물탕의 첫번째 맛은 깔끔한 국물 맛이다. 양념을 많이 넣지 않아 국물이 전혀 텁텁하지 않고 개운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맛이 동일하다. 주먹만큼 큰 문어와 쫄깃한 가리비, 선명한 색깔의 새우 그리고 오동통한 맛조개까지............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그릇을 비우게 된다.
그 집 음식 맛을 알려면 장맛과 김치맛을 보라했던가? 푹 익힌 묵은 김치는 도망쳤던 밥맛까지 돌아올 정도로 개운하고 맛이 좋다. 김치를 비롯해 밑반찬 가지 수가 많지는 않지만 딱 필요한 만큼의 깔끔한 밑반찬도 나무랄 데가 없다.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은 것 같다. 맛은 신선한 해물과 콩나물을 위시한 야채를 듬뿍 넣어 끓여 울겨 낸 것이어서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역시 등장하는 감태. 감태는 갈조식물 다시마목 미역과의 여러해살이 해초이다. 바다 깊은 곳에서 자라는데 해조류를 구성하는 중요한 조류식물이며 주로 전복과 소라 등의 먹이가 된다. 알긴산이나 요오드, 칼륨을 만드는 주요 원료가 되고, 채취하여 식용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한국(남해안·제주도),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반찬이 정갈스럽다. 배추절임인데 맛이 희한하다. 여행 중 4박은 해남에서 한다. 밤 늦게 다운타운에 나가서 맥주 한잔 걸쳤음은 물론이다.
몸 컨디션들이 좋지 않아 오늘 11일에 오를 예정이었던 해남 두륜산은 취소한다. 여행 일정 중에 산행이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선은 쉬는 데에 포인트를 둔 여행이라 두륜은 후일에 기약하기로 하고 완전한 관광으로 일정을 바꾼다. 그 첫번째 행선지가 해남 녹우당이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윤선도(尹善道)의 고택(故宅)이 바로 녹우당이다.
녹우당은 호남지방에서 가장 연대가 오래 됐으며 규모가 큰 민가로서 대문, 사랑채, 사당 및 제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ㄷ자로 남향해 앉은 고옥은 원래가 수원에 있었던 것을, 세자 시절에 가르침을 받았던 효종이 고산 윤선도를 늘 곁에 두고 싶어 수원에 이 집을 지어 주었으나 효종이 승하하고 조신들의 모함에 낙향하게 되자, 옛 왕과의 정을 생각해 집을 여기로 옮긴 것이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 담장 안에 한채가 있고 담장 밖에 고산서당이 있다. 뒤편 동북쪽 숲 속에는 증조인 어초은 윤효정의 제실인 추원당이 있다. 입구에는 수령 500년, 높이 20m의 은행나무가 예쁜 기와 돌담을 배경으로 서 있다. 뒷산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녹우당 옆 400m 오솔길을 걸으면 비자나무숲이 나온다. 빽빽이 들어선 비자나무숲 사이에 송림과 활엽수림이 간간히 섞여 있다. 해남윤씨의 선조가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가난해 진다"고 해서 후손들이 정성으로 숲을 가꿨다고 한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시인으로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녹우단과 녹우당을 헷갈리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밝히면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던 사랑채가 녹우당이고, 녹우당을 포함한 해남윤씨 종택을 녹우단이라 부른다. ‘녹우’(綠雨)란 녹우단이 들어선 뒷산의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면 우수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녹우당 편액은 공재 윤두서의 친구이자, 성호 이익의 이복형인 옥동 이서(李漵)의 글씨이다.
녹우당 뒷편에 있는 비자나무숲이다.
고산 윤선도에 대해서 한번 조사해 보자.
윤선도는 해남윤씨로 호가 고산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과 경상도 기장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42세 때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왕자사부가 되어 봉림대군(뒤에 효종)을 가르쳤다. 1629년 형조정랑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에 급제, 문학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항해하다 보길도에서 은거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1638년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 고향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2년(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에 복직되었다. 1658년 동부승지 때 남인 정개청의 서원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 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꺽으려다가 실패, 삼수에 유배 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보냈으나 경사, 의약, 복서, 음양, 지리 등에 해박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가 있다.
고등학교 때 古文시간에 우리를 그렇게 질리게 했던 이가 바로 윤선도 선생이시다. ㅋㅋ
해남에 두륜산보다 더 절경의 산이 있다하길래, 왜 한국100명산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궁금해 하던 참에, 지나가는 길에 한번 들러 보았다. 소문은 그저 난 것이 아니었다. 달마산은 절경의 산이 맞았다. 저런 산이 왜 100명산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유적지가 부족했겠지! 했으나, 미황사라는 대찰을 보고는 그것도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한국100명산을 끝낸 뒤에 <한국100명산에 포함 되지 않은 것이 이해되지 않는 명산>이라는 주제로 산행을 한번 해 볼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당장 짚어도 몇개가 생각이 난다. 영축산, 매화산, 의상봉, 울진백암산, 기백산, 금원산, 달마산, 가리봉, 노인봉, 노추산, 청옥산, 선달산, 조령산, 토함산 등이 당장에 떠오르는 산들이다. 왜 이 산들이 한국100명산에 포함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전부 하면 100개가 넘어가니까? 그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경기 천마산을 위시한 몇개의 산들은 위의 산들에 비해 형편이 없는 산이 아닌가!
달마산은 전남 해남군 송지면 및 북평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가 489m이다. 남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산으로 공룡의 등줄기처럼 울퉁불퉁한 암봉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능선은 단조로운 산타기와는 달리 계속해서 정상으로만 이어지는 등반으로 멀리 해안 경관을 보는 즐거움이 함께해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산이다. 산행은 약 6km, 3시간에 불과하지만 암릉, 억새, 다도해 조망 등 온갖 재미를 두루 볼 수 있다. 특히 바위능선과 함께 억새풀과 상록수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것이 이 산의 특징이다. 또한 산 전체가 규암으로 되어 있다. 산을 오르는 도중 돌더미가 흘러내리는 너덜지대를 통과하기 때문에 산행이 쉽지만은 않으며 곳곳에 단절된 바위 암벽이 있어 혼자 등반하기보다는 여럿이 오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산은 백두대간이 덕유산 바로 아래 영취산에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을 갈라내고 호남정맥이 나아가다가 땅끝기맥으로 갈라내어 월출과 달마, 도솔봉으로 내려와 땅끝까지 이어 한반도 최남단 땅끝 사자봉에서 멈춘 듯하지만 바다로 맥을 끌고 나가 멀리 제주도 한라산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산이다.
미황사는 달마산의 돌병풍을 뒤에 둘러치고, 해남과 진도 일원의 다도해를 앞마당 삼아 뛰어난 풍광을 지닌 고찰이다. 절에서 내려다보면
다도해의 많은 섬이 짐승의 새끼처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두런거리는 모양새다. 바다와 맞닿은 들녘은 시간이 갈수록 불그스름한 갈색에 서 석양에 달구어진 장엄한 황금빛으로 변해간다. 보물 제947호인 대웅전을 비롯해 여러 당우들이 화려한 단청 옷 대신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 훨씬 더 절을 고풍스럽게 하고 있다. 대웅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주춧돌로 그 위에 물고기, 게 모양 등이 양각되어 있으며 조각된 동물 문형은 토속적인 민간신앙이 불교와 만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남도 제일의 템플스테이 명소로 각광받고 있지만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대웅전에다 세삼당과 요사채, 그리고 초라한 공양간 한 집을 거느린 단출한 절이었다.
미황사 대웅전은 보물 947호이다.
이제 한반도 최남단 땅끝마을에 왔다.
한반도 최남단은 북위 34도 17분 21초의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사자봉 땅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우리나라 남쪽 기점을 이곳으로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이천리를 잡아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사자봉 정상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보면 진도를 비롯해 어룡도, 백일도, 흑일도, 조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갈두리 선착장에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노화도와 보길도를 오가는 연락선의 모습을 보며 가슴에 묻어 둔 것들을 훌훌 털어 버린다.
땅 끝에 서서 더는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중략)
내 마음속에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린다.
-김지하-
땅끝 유래
전망대 옆 석탑
사자봉 정상에 있는 전망대 9층에서 바라다 본 땅끝 바다
완도로 들어가다 기사식당에서 먹은 밥. 6,000원 치고는 꽤 맛이 있는 식사가 나왔길래 밥을 2그릇이나 해치우고 꺼억꺼억한다.
완도를 지나 바로 신지도로 들어왔다. 이곳에 유명한 명사십리가 있대나? 과연 명사십리이다. 백사장도 수준급이다. 물도 깨끗하고......
신지도는 전남 완도군 신지면에 위치하고 면적이 30.92㎢ 이다. 완도 동쪽 5㎞ 해상에 있으며 모황도 등과 함께 신지면을 구성한다.
삼한시대에는 백제의 새금현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탐진현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인 1124년(인종 2) 장흥부에 편입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417년(태종 17) 도강현과 함께 강진현에 편입되었다. 1896년 완도군이 창설되면서 면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른다. 옛날에는 지도라고 하였으나 나주목에 있는 지도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신지도라고 하였다고 한다.
최고 고도점은 상산(324m)이며, 그밖에도 노학봉(225m), 범산(151m), 기선봉(141m) 등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서남쪽에 소규모의 평지가 있다. 동백나무, 곰솔, 후박나무, 팽나무 등의 아열대성 식물이 자란다. 주요농산물은 보리, 쌀, 콩, 고구마, 마늘, 고추 등이며, 근해에서는 갈치, 멸치가 잡히고, 김, 미역 등의 양식도 활발하다.
신지도 명사십리 백사장에 흩어진 조개껍질
신지도에서 완도로 나오다 만난 장보고 동상과 청해진터.
장보고는 신라의 무장으로,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려고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장보고는 일찍이 당나라 서주(徐州)에 건너가 무령군소장이 되었으나,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의 비참한 처우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귀국했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락을 얻어 1만의 군사로 해로의 요충지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항만시설 을 보수,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가 되자 휘하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37년(희강왕 3)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후에 신무왕)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하자 진해장군이 되었다. 840년(문성왕 2)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845년(문성왕 7)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보내려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846년(문성왕 8) 그의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우리나라 역사는 맨날 저 지경이다. 일 좀 하려고 하면 자객을 보내어 죽인다...........이런 식이다. 젠장!!
청해진터.
통일신라 흥덕왕 때의 장군 장보고(張保皐)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하던 곳이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건너 청해진 터로 와 본다.
장보고 장군의 숨결이 느껴온다.
해남을 벗어나 원래 강진에서 5박을 하려고 했으나 그냥 광주로 날라온다. 폭설 소식이 있고 강진에서 경주까지 가기가 벅찼기에.......또 여행에 질리기 시작했으므로..........그냥 편하게 광주의 충장로로 다시 돌아온다.
1차로 송쓰라는 횟집에 들러.................
이런 저런 사이드들과 함께............
회를 먹고...........
아른하게 취해 자정의 충장로로 다시 나와..............
2차 막창구이 집으로............냉장이 아니라 바로 생물이어서 맛이 있다. 이제 여행 마지막날 밤이겠지? 아른하게 속이 취해 오면서 여행의 기억도 서서히 의식 속으로 가물가물해 진다.
광주를 위시한 서해안 일대에 낮에 폭설이 예보되어 아침부터 서둘러 광주를 떠난다. 밥도 거르고 차를 달린다. 오전부터 담양지역에 눈이 쌓인다 하여 88고속도로를 피하고 남해고속도로로 달리려다가, 에라 모르겠다. 부딪히자! 하고 88고속도로로 핸들을 돌린다. 담양, 순창, 남원을 지날 때까지도 눈발이 뒤에서 따라왔다. 백두대간이 바로 지나가는 지리산휴게소까지 왔으나 눈발이 여전해 다시 차를 몰고 백두대간을 넘어 영남으로 들어온다. 그리고는 거창까지 단숨에 달렸더니 드디어 눈이 사라지고 햇볕이 나기 시작한다. '폭설로 부터의 대탈출'이다.
거창휴게소에 내려 고픈 허기를 채운다. 오후 1시가 넘어선다.
아마 지금쯤 정재수 집에는 내가 보낸 흑산도산 홍어가 도착하고 있겠지. 오늘 밤에 지인들을 불러모아 흑산도산 홍어로 회식을 하려고 한다. 오래 집을 떠나 있으니 집 생각이 간절하다. 특히 막내의 모습이 유난히 가슴속에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