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문제는
형이상학적 물화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물화 그 자체에 있다.
물화를, 그것도 콰인의 영토인 경험의 영역에서 전개되는 물화를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콰인보다 더 근본적이다.
의미의 물화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잇다.
시험장에서 다른 수험생들의 답안을 훔쳐보는 학생은 어느 수험생의 답안이 모범답안인지,
그리고 그 답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후쳐보는 행위가 모범답안의 확정과 이해에 충분조건이 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맥락에서 지시(혹은 지향성)는 의미의 확정이나 이해에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빨간색 색연필을 지시하며 "이것이 '토우브'이다 하고 말할 때
우리는 '토우브'가 연필을 뜻하는지 , 빨간색을 뜻하는지, 몽ㅇ을 뜻하는지,
재질을 뜻하는지, 혹은 개수를 뜻하는지 알 수 없다.
지시에 의한 의미의 가르침과 학습은
배경 언어에 대한 이해와 숙달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
의미의 물화에 바탕은 둔 지시적 의미론의 문제는
그것이 불충분한 그릇된 이론이라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문제는 그 이론이 함축하는 세계와 삶에의 태도에 있다.
지시적 의미론은
지시하는 것과 지시되는 것을 가르는 과정에서 의미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지시가 의미와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립각을 세우기 때문이다.
물화가 의미와 존재의 유일한 척도가 되면서 우리의 삶 자체도 물화의 대상이 되고 만다.
물리주의라는 유물론의 득세는 과학에 대한 신봉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철학 내적으로는 이처럼 의미의 물화에서 비롯되는 귀결이기도 하다.
의미의 물화 프로그램을 완성한 콰인이
종국에 의미를 부정하는 대목은 반전(反轉)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리주의가 택할 수 있는 환원주의와 제거주의의 두 길 중에서
그는 제거주의의 길을 택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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