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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의 길
1964년 3월 15일(일), 전 본부교회.
누가복음 12:48-53
<기 도(Ⅰ)>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 만물을 지으신 아버지, 당신의 소망과 기쁨과 사랑의 마음이 온 피조만물 속에 어려 있는 것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느끼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높고 귀하신 그 소망을 위하여 어느 한 존재라도 아버지의 손길을 거치지 아니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줄 아는 아들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영원하신 존귀와 영광을 위하여 온 피조만물을 지으셨고, 피조만물은 은사의 품에 안기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을, 그런 기쁨의 한 날이 있었던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한한 생명의 원천과 영원한 생명의 권한을 세우시어 당신과 지음받은 모든 피조물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이 하나로 뭉치어 살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의 터전, 무한한 사랑의 터전이 있었던 것을 잊지 말게 하시옵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던 그 소망, 당신께서 희망하시던 그 영광, 당신께서 간곡히 고대하시던 그 사랑이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어려 있사오나 만물 가운데는 어려 있지 않음을 아옵니다. 만물 가운데 그러한 것이 어리는 것이 당신의 소망이었사옵고, 창조의 목적이었사오나, 그 소망이 슬픔과 낙망으로 맺히게 될 줄 어느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습니까? 영광 받으셔야 할 당신께서 원수들 앞에 조롱받는 억울한 신세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당신의 무한한 사랑 앞에 하늘의 영광을 찬양하고 땅의 영광을 찬양하며 승리의 영광을 드러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눈물과 더불어 한의 복귀역사노정 위에 피 살을 뿌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렇듯 소망의 세계는 오늘날 이 땅 위에서 갈 곳이 없어졌사옵고, 이 천지에 이와 같은 터전은 남은 바 없이 사라지고,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될 때, 오늘 당신의 마음을 그리며 당신의 심정을 더듬는 저희들은 지난날의 과거를 원망치 않을 수 없고, 인류의 비참한 역사를 조소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선 이 자체가 얼마나 원통한 사실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이 품으시고 싶었던 만우주요, 당신께서 사랑하고 싶었던 자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 위에 널려 있는 피조만물은 슬픔의 상징체가 되었사옵고, 만민은 아버지의 사랑을 배반한 후손이요, 아버지의 심정의 터전을 유린한 후손이 되었사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될 때,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해 드려야 할 각자의 책임이 얼마나 귀중한가 하는 것을 이 시간 여기 모인 어린 소자들이 마음속으로 느끼어 무릎을 꿇고 과거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자체들이 되겠다고 맹세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저희들이 동료들을 규합하여 악의 권한과 싸워 승패를 결정지어야 할 때는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희들이 서 있는 자리는 슬픔의 자리인 것을 알게 허락해 주시옵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원수와 대결해야 할 중차대한 책임을 진 곳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자들이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기나긴 역사노정을 헤쳐 나오시면서, 아담으로부터 노아, 야곱, 모세,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조들을 대해 나오시며 역사적인 승리의 한 날을 세워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참다운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얼마나 그리워하셨으며, 얼마나 고대하셨으며, 얼마나 몸부림쳐 오셨사옵나이까?
오늘 저희들은 아버지의 슬픈 복귀역사를 알았사옵니다. 한 많은 복귀역사를 알았사옵니다. 억울하고 분통한 복귀역사를 배웠사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희들은 한 많은 아버지를 붙들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억울한 아버지를 붙들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사옵니다. 피어린 노정에서 상처 입은 아버지를 진실로 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아버님을 모시고 있는 저희들은 아버지께서 걸으셨던 슬픈 역사노정을 살피면서 통곡하는 자가 되든가, 아니면 아버지 앞에 새로운 책임을 지고 사탄을 대적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용사가 되든가 해야 할 것이옵니다. 이것을 이 시간 깨닫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불쌍한 이 민족을 찾아오신 아버지, 얼마나 가슴 아프시옵니까? 이 땅의 수많은 민족 가운데 이 삼천만 민족을 바라보며 애태우시는 아버지, 얼마나 처량하셨습니까? 수많은 자녀를 고대하시는 아버지, 보잘것없는 이 어린 것들을 불러 놓으시고 얼마나 초조하시며 안타까워하셨습니까?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때를 정하시고 한 날을 세우셔서 한 중심을 통하여 최후의 결판을 짓고자 하는 섭리의 뜻을, 비참하고 처량한 이 민족 삼천리반도 위에 두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저희들은 머리 숙여 무릎을 꿇고 감사할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희들은 뜻을 알았사옵고, 뜻을 위하여 부름을 받아 이 자리에 모였사오니 저희들이 맹세하고 결의한 모든 내용이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어린 것들이 여기에 모였사오니, 아버지, 이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들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시달린 무리입니다. 이들은 피어린 노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싸우고 허덕여 나온 아들딸들이오니 버리지 마시옵소서. 버리지 마시옵소서! 이들을 품으시고 사랑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들은 남다른 길을 가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사옵고, 남다른 위치에서 많은 핍박을 받았사오며, 남다른 실천노정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사옵나이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는 아버님이시여, 이 모든 것을 받아 주시고 이들이 소원하는 것을 성취하여 주시옵고, 이들의 한을 당신이 해원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날 불쌍한 삼천만 민중을 대신하여 방방곡곡에서 피어린 역사노정을 걸으며, 외로운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통일의 무리들이 있사오니, 긍휼히 보아 주시옵고 품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를 위하여 출발했사오니 끝까지 아버지를 위하여 돌진하게 하시옵고, 아버지를 위해 싸우기를 맹세했사오니 아버지를 위해 싸워 승리하여 아버지의 동산, 아버지의 민족,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세계를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승리의 반도, 승리의 삼천만 민중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날은 거룩한 날이오니, 만민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천상에 있는 천 천만 성도들이 땅을 대하여 해원되고, 복귀되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을 알았사오니, 오늘 저희들이 얼마나 귀중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서, 스스로 자기와 인연된 모든 책임을 감당하는 자리에서 성심을 다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하늘과 땅 위에 아버지의 기쁨의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시옵고, 사탄의 권한을 무너뜨리기 위해 영계에 있는 모든 영인과 지상에 있는 도인들이 합하여 아버지의 한을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승리의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시간 아버님 앞에 무릎 꿇고 머리 숙인 수많은 민족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수많은 교단 위에 축복하여 주시옵고, 이름없이 기도하는 아들딸들에게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한 날이 어서 오게 해 주시고, 당신의 소망과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사랑을 찾는 한 날이 어서 오게 해 주시옵소서. 본연의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 있는 행복한 이 천지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올 때, 이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기 도(Ⅱ)>
아버지, 저희들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같이 부모님의 품에서 엄마 아빠를 부르며 안기고 싶어하는 어린아이가 되어야겠습니다.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사정을 잊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반길 수 있는 그 자체가 되는 것이 그립사옵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 자라는 어린 날이 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아버님 품에 안길 수 있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되길 고대하고 있사옵나이다.
그러한 어린아이가 된다면 아버지께서 바라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친히 오셔서 품어 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생명의 젖으로써 저희를 성장시켜 주시옵고, 생명의 능력으로써 저희가 장성할 수 있는 힘을 보충하여 주시옵소서. 어려운 환경과 흑암권세를 삼켜 버릴 수 있는 아버지의 영광의 지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붙들어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오늘은 거룩한 날, 만민이 머리 숙여 아버지의 성호를 찬양하는 날이오니, 이들의 마음과 몸에 아버지의 영광의 인연을 보유케 하시사 부르는 그 음성과, 간곡히 호소하며 사모하는 그 마음 위에 아버지께서 바라신 소망의 인연이 두터이 나타나게 하시옵소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던 뜻을 이들의 마음과 몸에 나타내시어, 한 날의 기쁨을 위한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민족을 대신하여 수많은 교단들이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일 줄 알고 있사옵고, 30억 인류를 대신하여 수많은 교단들이 아버지 앞에 머리 숙이고, 수많은 자녀들이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리에 서 있을 줄 알고 있사오니, 아버지께서 친히 오시어 찾아오시기에 수고하셨던 아버지의 사정을 토로하시옵소서. 불쌍한 죄악의 후손이지만 버리지 마시옵고 품어 주시사, 당신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복귀의 혈족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보잘것없는 통일의 무리를 모아 놓았사오니 아버지 이들을 기억하시옵소서. 이들은 남이 아니라고 하는 길을 피눈물을 머금고 따라 나왔습니다. 핍박의 길도 개의치 않고 따라왔습니다. 몰리고 짓밟히는 길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염려하면서 이날까지 찾아 나왔사옵니다.
이제까지 나온 통일의 무리들과 이 교회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희들은 알고 있습니다. 보기에는 초라하고 나타난 모습은 처량한 모습일지라도 아버지의 피눈물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게 허락하옵소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간곡한 내용이 엉클어져 있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뜻을 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할수록,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면 할수록 아버지께서 부르시고 분부하시던 때가 그립사옵니다. 자라고 있는 이 어린 것들의 마음 마음 위에 아버님, 같이 찾아 주시옵소서. 아버지, 같이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남아진 사망의 세계를 향해서 싸워야 할 당신의 크나큰 목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사옵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다 제물로 바치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아버지께서 분부하시고 권고하시는 명령에 따라 생사를 각오하고 나선 몸이오니, 원하시는 소망의 터전 위에 아름답게 쓰여지는 당신의 장미, 백합화가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당신의 자랑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님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딸을 사랑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 민족 위에 당신의 아들딸들이 참 됨을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도록 허락하시옵고, 수많은 인류 앞에 당신이 품으시고 사랑하시는 민족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속히 오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저희들이 부족한 마음을 모아 아버지 존전에 모든 것을 바치오니, 이 몸을 제물로 삼으시든지 이 마음을 제물로 삼으시든지 하시어서 당신의 복귀의 터전을 넓혀 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이곳에 왔다가 아버지 앞에 슬픔을 남기고 아버지 앞에 한탄을 남기고 가는 자들이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올 때엔 슬픈 사정을 품고 왔사옵고 아버님께 염려를 끼치는 자로 왔사오나, 돌아갈 때는 과거를 뉘우치며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마음을 갖고 돌아가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 앞에 과거의 부족한 것을 다시 한 번 자책하고, 스스로 맹세하고 결의하고 나설 수 있는 실체의 무리들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역사노정에 있어서 최후의 단계를 앞에 놓고 심히 초조한 마음으로 아버지 앞에 아뢰오니 남은 4년노정 동안에 몸 마음 다 드려 제물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부족한 정성과 불충한 마음이오나 한 데 모았사오니, 아버지의 거룩한 존재를 분별할 줄 아는 하늘의 자녀로서 세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오늘 이 민족을 위하여 많은 정성을 들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때가 이루어지길 마음으로, 영적으로 고대하며 호소하는 무리들이 있사옵거든 그들 위에도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이 시간 이곳을 향하여 눈물어린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 당신의 아들딸들도 있사오니, 비록 환경과 처지와 습관과 전통과 습성은 다를지라도 아버지를 위하는 심정만은 하나이오니 거기에도 같이하시어, 남아진 싸움터를 지키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앞에 세계적인 재단을 쌓아 드리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모세와 아론과 훌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유대교단 앞에 새롭게 나타났던 예수의 제자들이 되게 허락해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아버지, 이 시대의 새로운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아버지의 뜻 하나를 놓고 승리의 제단을 쌓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해 주시옵고, 만민을 감화시킬 수 있는 무리가 되도록 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영계의 천천만 영인들이 땅을 찾아 나오고 있는 것을 아오니, 아버지, 땅 위의 저희들이 조금이라도 보태어 그들의 원한을 풀어 드리는 데에 열정과 충성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길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남아진 모든 시간을 친히 주관하여 주시옵기를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말 씀> 오늘 말씀드리려는 제목은 ‘복귀의 길’입니다. ‘복귀의 길.’ 이 복귀라는 명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기쁜 명사가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명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있기 때문에 복귀라는 명사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죽음 가운데 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을 살리시기 위해서는 메시아, 즉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시조가 타락하지 않았던들 구원이니 복귀니 구주니 하는 명사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나, 타락하였기 때문에 구원이니 복귀니 구주니 하는 명사가 생겨났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복귀섭리의 목적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당신의 소망의 실체로, 당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실체로 지었으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망도 이상도 심정도 간 곳이 없이 사라져 버리고, 오늘날 이 땅 위에는 사탄세계의 소망과 사탄세계의 심정이 남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으나 원치 않는 원수의 품에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로서 지었지만 타락함으로써 그 존재는 하나님 앞에 상심(傷心)의 존재가 되었고, 후회와 원망의 상징체가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원한을 남긴 인간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지 만물을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지었고, 원리 법도를 통하여 지은 연고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이 기반이 되었고 뜻이 남아 있는 한 지었던 만물과 인간을 근본적으로 파괴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만물과 인간을 파괴시켜 버리면 하나님은 뜻을 세웠던 그 이상의 고통을 받아야 하고, 심정을 세웠던 그 이상의 고통을 받아야 할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 세계와 인류를 다시 본연의 뜻과 심정 앞으로 세워질 수 있는 만물과 사람을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복귀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 인간 한 개체를 복귀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타락한 전체 인간을 타락하지 아니한 본연의 위치로 회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품을 떠나 원수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천지 만물을 하나님 앞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복귀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같이 복귀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있어서는 소망도 이상도 영광도 없는 것이요, 당신의 심정으로 지은 만물과 더불어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함이요, 당신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자녀를 찾아 행복된 세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광의 터전, 생명과 사랑과 승리의 터전 위에서 온 우주만물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면서 영원무궁토록 천국 생활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런 천국 환경을 만들어야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창조목적이 찾아진 입장에 설 수 있기에 이것을 목표로 하여 복귀의 역사를 해 나간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복귀섭리의 내용과 인간의 무지
그러면 복귀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원리를 통해서 아는 것처럼 만물부터 복귀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제물시대를 거치고 신약의 말씀시대를 거친 후에 실체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물시대로부터 말씀시대를 거쳐 실체시대까지 복귀해 나오는 데 있어서, 우리 인간은 어느 자리에서부터 복귀해 올라가야 하느냐? 인류의 시조가 사탄의 혈통을 받고 난 그날부터 인간은 사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혈통적 인연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 없는 원수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의 자식으로 태어난 인간을 사탄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세워 하늘 편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늘 편으로 이끌기 위해서 종의 시대로부터 양자의 시대로, 그 다음은 참아들딸의 시대로, 그 다음은 참부모의 시대를 거쳐 역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거꾸로 올라가는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종이라는 명사가 필요 없고 양자라는 명사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모습이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선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선의 부모의 자리까지 나아갔을 것입니다. 종의 신세와 양자의 신세를 벗어나 아들딸이 되게 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참다운 부부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요, 복귀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역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과 그 역사를 대해 나왔던 인류의 조상과 현세에 처해 있는 인간들을 비교해 보게 될 때, 오늘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복귀역사를 해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선조들이 복귀의 노정을 개척하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하였고, 그 수고의 노정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다가도 그 맹세를 저버리고 저버려 하나님께 슬픔을 가해 내려왔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단번에 복귀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의 곡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류의 시조가 잘못되어 천지를 뒤집어 놓은 연고로 아담 해와의 타락을 복귀해 가기 위해서는 한 중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참다운 시조가 될 수 있는 한 중심을 찾기 위해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헤매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한 중심을 세우기 전에 그 중심을 받들 수 있는 외적인 터전을 준비해 나오시면서 오늘날까지 6천년 동안 기나긴 섭리역사를 해 나오신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사명이 크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4천년 역사를 통하여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으나 선민으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 책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분과 하나되지 못함으로 인해 역사는 엇갈려지고, 하나님이 찾아 나오던 이스라엘 민족은 사망의 세계로 떨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던 메시아는 십자가에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제2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제3이스라엘 민족을 세움으로써 이 땅에 새로운 세계적인 가나안을 복귀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게 될 때, 또 오늘 우리가 복귀의 사명을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하나님과 선조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해서 보게 될 때 오늘날 이 시대는 제1이스라엘 시대가 아니요, 제2이스라엘 시대도 아니요,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향하여 나아가는 제3이스라엘 시대,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위해 모진 투쟁을 하여 승리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하늘의 명령과 더불어 넘어가야 할 중대한 시기인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야곱을 중심한 복귀섭리
복귀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은 대번에 하늘땅을 복귀해 낼 수 없기 때문에 개인부터 복귀해 나오셨습니다. 하나의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 야곱을 택하시어 종의 종시대에서 종의 시대로 옮겨 놓기 위한 역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없었던 야곱 이전의 시대를 청산하고 종의 시대로 옮겨 놓기 위해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의 종시대를 벗어나려면 하나님이 분부하신 명령에 순종하여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합니다. 그래야 종된 개인으로부터 종된 가정, 종된 민족으로 거쳐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4천년의 역사는 무엇을 하기 위한 역사였던가? 종의 개인으로부터 종의 가정을 넓힌 후 종의 민족을 건설하여 원수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한 투쟁을 했던 역사였습니다. 그러한 투쟁의 역사를 거쳐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종의 시대를 복귀하기 위한 기반을 닦기 위해서 야곱은 개인적인 투쟁의 과정을 거쳐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했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었던 야곱은 어머니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에서에게 축복을 해 주려는 것을 안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행함으로써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축복을 받아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 위에 선 야곱은 하란 광야를 지나 라반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았더라도 야곱은 그곳에서 가정이라는 기반을 하늘 앞에 세워야 민족적인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민족적인 출발을 할 수 없는 연고로 라반의 집에 가서 21년 동안 가정적인 기반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는 비참한 생활 환경 가운데서도 일편단심 하나님만을 사모하였으며, 다시 가야 할 고향 땅을 지극히 그리워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간교한 속임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붙들면서 21년 동안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을 축복하여 라반의 가정에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주시고, 새로운 승리적인 가정 기반을 완성하여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야곱가정은 어떻게 해야 했느냐? 야곱가정은 민족을 대신하여 민족적인 싸움터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운명에 놓여 있었던 연고로 야곱의 70식구는 애급 땅을 찾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민족에 대한 모세의 사랑
이스라엘 민족이 포악한 바로의 마수(魔手)에 비참한 제물로 사라져 갔던 400년, 마음대로 농락하며 피 살을 빨아먹기에 급급했던 바로의 학정 아래 비참한 제물로 사라져갔던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기간은 지쳐 쓰러지는 기간이요, 낙망하여 하늘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요, 민족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시련이 심하면 심할수록, 부딪치는 역경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마음속에 솟구치는 하나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만은 어떠한 시련과 어떠한 역경이 휘몰아치더라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민족적인 싸움에 있어서도 지치지 않고 하나님을 그리워하였던 것이며, 축복받은 나라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애국심이 울어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지도할 수 있는 모세를 세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모세는 40년 바로 궁중 생활 속에서 뜻을 세우려던 1차 계획을 실패한 후 가나안 복귀를 생각하면서 몇천만 번이고 기도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축복받은 민족인 것을 알았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혈족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 사탄에게 농락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호화스러운 바로의 궁중에서도 가나안 복귀의 한 날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는 멀리 본토에 자기 나라를 그리워하며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세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궁중의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큰 고초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과 자기의 호화스러운 생활과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무쳤던 모세였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의 생활을 하면서 양떼를 몰 적마다 그의 마음에는 바로 치하의 애급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잊지 않았습니다. 또는 양떼를 불러모아 우리로 몰아넣게 될 적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마음으로 신념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모세는 그런 경지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여! 이스라엘을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몰랐으나 그는 미디안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기억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모세는 40년의 기나긴 시련 속에서도 지치지 않았고, 어떤 억센 환경 속에서도 낙오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뜻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마침내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냈던 것입니다.
모세는 숱한 싸움의 노정에서도 하나님이 민족과 같이하는 한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요, 내 뜻이 이스라엘 민족의 뜻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꿈에도 하나님을 배반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배신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천지는 변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는 마음만은 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모세가 가는 길은 하나님이 가는 길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바로와 수차의 싸움을 거듭한 후에 애급 민족을 굴복시키고 민족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발하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애급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죽든지 살든지 그들의 소원이 곧 모세의 소원이요, 모세의 소원이 곧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알고, 그 가는 길에 모진 핍박과 갖은 시련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모세가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 또한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진 이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400년 동안 시련을 거치게 한 것은 새로운 가나안 천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애급노정에 있어서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찌하여 광야에서 쓰러졌느냐? 하나님이 모세를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를 받는 그날부터 만사가 형통하여 세계가 자기들 뜻대로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본래 복귀의 길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가정을 찾기 위해서는 가정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민족을 찾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국가를 찾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하늘땅을 찾기 위해서는 천적인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편에 서서 10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 민족은 당당히 천하를 호령할 수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것인데 그들은 해야 할 책임은 다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한 자리에 서기만을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명과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을 모르는 자리에서 그들의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게 될 때 불평하였고, 가는 걸음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뜻과 모세를 세워서 인도하는 뜻을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장도(壯途)에서 부딪치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망하였습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본래의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적인 승리를 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7족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 할 노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왕을 세운 목적도 하나의 주권국가를 이루어 사탄세계의 민족을 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애급에서 장자를 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쳐서 정복하라는 것이 사울왕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사울왕에게는 민족적인 크나큰 사명과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기준, 사적인 기준에서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사울왕 때 세우려 했던 성전이상은 다윗왕, 솔로몬왕으로 연장되었던 것입니다. 이 성전이상은 본래 모세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아니하고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통일왕국시대 말기에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북조 이스라엘 10지파와 남조 유대 2지파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서로 싸웠습니다.
예수의 사명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불러들이신 것은, 가나안 땅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승리적인 민족 기반을 완결 지어 하나의 주권을 세운 다음 장차 보낼 메시아를 맞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자기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주인공으로 모시고, 메시아를 중심으로 사탄세계를 쳐서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종결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은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구세주가 오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민족이 될 줄만 알았지, 민족적인 승리와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 세계적인 승리의 터전을 닦아 복귀의 역사를 종결지어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님 당시를 회고해 볼 때, 예수님은 어떠한 사명을 갖고 왔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요, 황태자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와서 해야 할 사명은 무엇인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수습하고 로마와 대결하여 로마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은 400년 후에 로마 제국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로마를 점령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이미 예수의 이념은 세계적인 승리의 기반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늘과 땅,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들고, 사탄을 심판하여 사탄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하나님 편으로 복귀하고 사탄세계에 있는 만물을 하나님 편으로 복귀해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져 있는 하늘땅을 연결시켜 천국이념을 지상에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예수가 죽은 후 재림의 한 날을 세워서 천년왕국을 고대하게 하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이 땅 위에, 하늘과 땅에 천국, 곧 천년왕국을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원하시던 천주적인 가나안의 천국이념을 땅 위에서 실현하는 것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했느냐? 자신을 맞기 위한 기반으로서 4천년 동안 준비시킨 이스라엘 민족은 신앙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 앞에 가깝게 서야 되는데 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러 세운 본연의 목적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수습하는 것이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을 출발하셨던 첫째 목적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또 예수님은 로마의 속국이 되어 허덕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희생시켜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유대교단과 민족이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데도 불구하고 유대교단은 예수님을 몰아 세우기에 급급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잡아죽이는 데에 선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조건을 잃어버렸습니다.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뜻을 다 못 이루신 예수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유대교를 수습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여 세계적인 가나안 복지를 건설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으나 바라던 소원의 터전이 다 무너지자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십자가에 의한 영적 구원의 기대를 세우고 가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쁜 일이 아닙니다.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한 구절만 해결하면 신․구약의 모든 문제가 다 풀립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50)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결 귀절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완전히 해결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천지를 장중에 넣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골자 중의 골자는 어떤 귀절이냐? 바로 이 구절입니다.
예수께서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했는데 그 불이 무슨 불입니까? 또 예수가 받아야 할 세례가 무슨 세례입니까? 요단강가에서의 세례냐? 아닙니다. 수많은 기독교의 신도들이 많이 있지만,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습니다. 이 내용을 아는 무리가 있다면 통일교회 무리밖에 없습니다. 원통하고 분합니다.
4천년 동안 피어린 역사노정 위에 죽음의 제단을 연결시켜 찾아 세운 이스라엘 민족과 교인들이 자기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를 몰라보았습니다.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워 준비시켜 그 교단과 그 민족을 위해 보냈건만 그 터 위에 오신 예수가 메시아인 줄 누가 알았던고?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난 예수 믿네.’ 하고 있지만 살아서 하나님을 소개했고 살아서 천국생활을 증거했던 예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유대교인과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뭐 예수 믿고 천당 가자….’ 간단해서 좋을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게 그렇게 간단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민족과 교단을 세우기 위해 4천년 동안이나 힘을 다해 수고하셨습니다. 무형의 신으로 계시는 하나님이 원수인 사탄의 종을 하늘 편의 종으로 구원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 줄 알아요?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육계에는 수많은 악인들이 역사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깊은 기도를 해서 신비적인 체험을 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육계와 하늘 보좌를 연결하는 공중권세를 사탄이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수한 악영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권세를 뚫고 지상에 한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뜻을 붙들고 생명을 내바칠 각오를 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들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아담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인과 아벨로 나누고, 노아를 세워서 120년 동안 끈기 있게 이끌고 나온 하늘의 희생이 얼마나 컸던고! 암흑의 천지에서 섭리의 한 터전으로 남아질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아 세우기에 얼마나 희생이 컸던고! 노아는 120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기의 환경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분명히 노아의 자식들과 처가 노아에게 항거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기에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고 있느냐고 비방하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홍수 심판을 가능케 한 노아의 신앙
노아는 슬픈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는 철석같이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믿었지만 처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환경이 얼마나 어려웠고 비참했겠습니까? 환경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아버지여, 이 지상에 아버지를 믿는 자는 나뿐입니다.’라고 했던 노아였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조소가 커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컸기에 그 시대의 악한 세력을 누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 기반이 노아에게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죽어도 가겠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조롱받고 핍박받는 것을 분하다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천대 받는 것도 분하지만, 자기를 믿고 찾아 나온 하나님이 120년 후에 세상을 심판하겠다고 하시며 방주를 지으라고 분부하셨는데, 내가 만일 그 뜻을 반대한다면 얼마나 슬프실까 하고 자기의 슬픔을 넘어 하나님을 위로하기에 급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120년 동안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1년 동안이라도 참아 보았습니까?
노아가 방주 짓는 일에 대해 아침저녁으로 처자들로부터 반대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알아보세요. 기도해 보면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서로가 도와주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처가 방주 짓는 일을 허락했겠어요? 그러한 환경에 처한 노아였지만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서서 자기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위로하였습니다. 이런 노아의 신앙으로 인해 복귀의 길을 이어받고도 남을 기반이 닦여졌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고한 노아를 세워 뜻을 이루시려 했던 하나님의 뜻이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깨어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노아를 제2의 인간조상으로 세워서 원수 사탄을 몰아내고 하늘의 혈족으로 새로운 천지를 만들어 보시려던 하나님의 뜻이 함의 실수로 인해 깨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 아브라함을 찾아 세웠지만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말미암아 이삭과 야곱을 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3대의 하나님이라는 명사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것이 좋은 명사인 줄 알고 있습니다.
2천년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가정을 찾아 나왔지만, 제물 실수로 그 가정을 잃어버리자 다시 에서와 야곱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이 사탄 편과 싸워 승리하여 비로소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승리했다는 말입니다. 누구한테 승리했느냐? 지상 사탄한테 승리했고, 그 다음엔 천사장한테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 야곱이 천사를 굴복시킨 것은 천사장 루시엘이 천륜을 파탄시킨 것을 회복한 것입니다. 즉 천사장을 자기의 본래의 위치, 종의 위치로 되돌린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기반 위에 가정, 종족, 민족, 국가적인 기반을 4천년 동안 쌓아 메시아로 보낸 분이 예수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부활의 교리
이러한 예수께서 오자마자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배척당하셨습니다. 그런 유대교단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단결하여 사탄세계를 뚫고 나가야 합니다. 자기들의 믿음만이 최고라고 알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한 많았던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믿는다는 신자들이 말하기를, ‘오! 예수님은 이 땅의 온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죽이지 않고는 구원섭리를 못하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잃어버린 예수요, 유대교단을 잃어버린 예수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에게 접붙여서 천민(天民)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천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했나요? 유대교단이 어떻게 했나요? 제사장 교법사들이 어떻게 했나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잡아죽이라고 4천년 동안 섭리해 왔겠습니까?
크나큰 포부를 품고 계시되 말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사회에서 제일 버림받은 무리인 어부나 창녀, 거지같은 자들을 모아 놓았지만 천국의 이념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감당치 못한다는 말씀을 남겼겠습니까?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 제단을 한 개도 갖지 못했던 한을 간직한 불쌍한 예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남들이 자는 고요한 밤중에 무엇 때문에 감람산까지 찾아갔을까요?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했겠어요? 유대교인이 책임 다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다했더라면 그거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친히 같이하는 입장에서 예수님과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되었다면 큰 문제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로마도 문제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합하면 로마는 꼼짝못합니다.
본래 기독교의 교리는 십자가의 교리가 아니라 부활의 교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성립되었지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립되었겠어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십자가를 모두 불살라 버려야 합니다. 누가 하겠어요? 두고 보세요. 내 말이 틀리는지 맞는지. 그렇다고 십자가의 도리, 십자가 구원의 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찔림받은 그 십자가를 왜 걸어 놓느냐는 것입니다.
돌아가셨다가 3일 후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부활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부활 후 40일 기간의 기반 위에 비로소 새로운 제2이스라엘, 즉 유대교를 대신한 새로운 기독교가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교리가 아니라 부활의 교리라는 거예요.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기도해 보세요. 자신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통일교회가 이 시대에 있어서 핍박받고 몰림받고 있지만 참과 거짓은 기필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신념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한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
예수님 당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와 하나되어야 할 민족과 교단이 어디로 갔느뇨? 어디로 갔느뇨? 무너져 버렸습니다. 사탄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기에 예수님은 할 수 없이 다시 기반을 닦기 위해 제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는 세례 요한을 중심으로 한다하는 제사장들과 교법사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못난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니면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체면이 서겠습니까?
유대교단은 어디로 갔는고?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는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세우기 위해 했던 노아의 수고는 어디 갔는고? 아브라함의 수고는 어디 갔는고? 이삭과 야곱의 수고는 어디로 갔던고? 애급의 바로 치하에서 400년 동안 고역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던고?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수많은 공적을 세운 선조의 터전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때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 교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몇 명이나 되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은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제2이스라엘 민족을 재건하기 위하여 영적인 구원섭리를 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영적인 유대교요, 영적인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요, 유대교단을 대신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초림 예수 당시에 이 뜻을 완결 짓기 위해 이스라엘 나라를 움직이고, 그 국가적인 기준을 세계적으로 넓혀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재차 수습하여 세계적인 환경을 마련해서 재림 때를 준비해 온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어떻게 하셨느냐? 예수님께서는 4천년 동안이나 닦아온 민족적인 기반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탄에게 시험당했고, 사탄과 싸웠던 것입니다. 민족적인 기반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든 것을 사탄이 빼앗아 갔기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사탄과 싸워서 승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갖가지 시험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사탄에 끌려가 시험을 받아야 합니까? 역사적인 원한을 청산해야 할 조건이 남아 있는 연고로 사탄에게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영적 구원섭리의 기대를 조성하고 오늘의 기독교로 발전시키는 기대를 조성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으로 예수의 사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의 사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유대민족을 중심으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반을 닦아 세계적인 가나안을 복귀하는 것이 본래 예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끝날에 오시는 주님도 역시 그러한 사명을 하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실체적으로 승리함으로써 그가 걸은 노정은 그 이후의 중심인물이 걸어야 할 기준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개인적인 노정에서 개인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고, 가정적인 승리 기반, 민족적인 승리 기반 등 모든 기반을 다시 닦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나라가 실패하였던 것을 재차 닦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실체이니만큼 그에게는 역사적인 실체로서 역사적인 선조의 모든 혈통을, 혹은 전통을 상속 받기 위해서 역사적인 사탄과 대적하여 투쟁해야 하는 문제가 산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비결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완전히 개인적, 가정적, 민족적, 국가적인 조건을 세워서 사탄과 싸워 이겨 보았느냐? 이겨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사탄이 예수 믿는 사람한테 굴복할 것 같아요? 6천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고 하나님의 뜻을 유린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망쳐 나온 지혜가 늠름한 사탄이 예수 믿는 사람이 물러가라고 한다고 물러갈 것 같아요? 상속권이 있어야 됩니다.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우리에게는 역사적인 상속권이 있어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예수 이후까지의 전통과 기반을 이어받아 역사적인 제물을 대신한 상속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너는 역사적인 노정 가운데 노아한테 졌고, 야곱한테 졌으며, 모세한테 지지 않았느냐? 나는 이들의 승리의 기반 위에 서 있고 섭리역사의 모든 전통을 상속 받았으니 사탄아! 너는 물러가라.’고 해야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사탄아 물러가라고 아무리 기도해 봐요. 사탄이 물러가나. 6천년 동안 하나님 앞에 참소하고 유린하여 복귀섭리를 파탄시킨 사탄인데, 내가 예수 믿으니 물러가라 한다고 쉽게 물러날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상속보(相續譜)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심정을 이어받은 상속보가 있습니다. 4천년 동안 예수님을 보낼 때까지의 심정적인 상속보가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대상의 상속보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대상이 되실 분은 사랑의 핏줄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선한 혈족을 통해 태어나셔야 합니다. 그런 상속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노정에서 싸워 죽는 자는 쓰지 않습니다. 억만 사탄과 대결하는 자리에 서더라도 죽지 않고 영육이 합하여 부활의 실체가 되어야 실체적인 상속자로 쓰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알고 보니 이런 문제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기성교회 신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것입니다. 사탄을 굴복시키는 비결은 내가 심정적인 상속 부활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틀림없이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찾던 자로다. 나는 예수님의 거룩한 성체에 접붙인 자로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십자가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사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을 쓰고 실체로 부활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실체의 상속자로 인정받아야만 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했어야 하나 그 민족은 책임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은 그러한 자리에 서지 못했으니 아버지 앞에 ‘주인을 보내 주십시오.’ 해야 합니다. 주인을 보내 주신다고 했으니 주인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오시는 주인을 모시려면
그러면 찾아오시는 주님을 한국의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서 어떤 책임을 해야 하느냐? 여기서는 주인이 오실 길을 닦아 놓아야만 그 도의 책임을 질 수 있는 도리가 됩니다. 세계를 찾아오신 주인을 맞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책임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만 합니다. 그래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주인을 위해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어떤 분야의 책임이 아무리 무거워도 주인의 입장에서 자기의 책임으로 맡아서 나가야 합니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잃어버린 주인이 될 수 있고, 또한 주인을 모시는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선생님이 말씀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날 재림하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된다면, 이러한 사명과 책임을 중심삼고 고통을 겪고 모든 것을 준비한 민족이 있으면 틀림없이 그 나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설령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해도 그분은 절대로 그 나라로 오시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여러분이 선생님을 따라오게 되면 선생님이 한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지나고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정신이 좀 들 때입니다. 이제 머지않아 세계가 굴러 들어올 때가 되어 있습니다.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굴러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굴러 들어오는 세계를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 그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해결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오늘날 혁명정부가 이 민족 앞에 수습할 방법을 몰라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를 수습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저 사람들이 잘못하고 아무리 그들이 저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우리로서는 지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무기만 가졌다면….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만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재료
오늘 이 세상의 온갖 고민과 고통을 대신해 나온 통일교회 선생님이 있는 한, 앞으로 이 세계와 기성교회가 제아무리 반대하더라도 통일교회한테 흡수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에 흡수되어 수백만이 넘어오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 자신이 장차 감당해 낼 수 있는 큰 재료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우리 앞에 불평을 할래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걸어서 항소를 할 수 없으며 그러한 재료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예수님의 권한으로 세계 만민 앞에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재료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만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품어서 눈물 흘린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은 반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넘어설 용기가 없는 사람은 굴복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계사적인 사명을 짊어진 우리는 이 세계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30억 인류를 바라보게 될 때, 악인이 온 세계를 사망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저들이 더 이상 이 세계를 망치기 전에 인류를 구해야 합니다. 나는 비록 낮은 자리에서 망하는 자리로 들어간다 해도, 통일교회가 이 민족과 세계 인류 앞에 제시할 수 있는 재료를 갖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걸 염려하는 겁니다. 지금 통일교인이 많아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많아지게 될 겁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염려하십니다. 그 재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역사를 두고 때릴 수 있는 재료, 시대를 두고 때릴 수 있는 재료, 미래를 두고 때릴 수 있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그 재료는 무엇이냐? 그것은 피와 눈물과 땀입니다. 심정으로 통할 수 있는 피와 눈물과 땀, 하나님을 눈물 흘리게 할 수 있는 피와 눈물과 땀, 민족을 눈물 흘리게 할 수 있는 피와 눈물과 땀입니다. 그래서 개인 개인이, 세계인들이 그것을 듣게 될 때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피와 땀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땀 위에 쌓아진 승리의 공적은 후대인들이 숭배할 수 있는 재료요, 후대인들이 필요로 할 수 있는 재료라고 인식하게 되면, 세계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두 흡수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3년 동안 고생하라고 선생님이 외친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망하지 않습니다.
축복가정들을 이 천지의 산지사방에 내세웠으니 마음이 아파요. 통곡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 심정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대하게 될 때는 무자비한 스승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나 역사를 창조할 계획을 세우고, 역사를 수습하는 백성으로 만들어야 되겠으니 무자비하게 내모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생님이 주장하는 신념입니다. 이렇게 해야 몇년 후에는 여러분이 많이 따라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신이 있고, 체면이 있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는 때에 축복 받았으나 내가 그런 길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길로 가 보십시오.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재료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효성
하나님은 개인을 그러한 자리에 세워도 항의할 수 있는 개인이 없고, 가정을 그러한 자리에 세워도 항의할 수 있는 가정이 없고, 민족을 그러한 자리에 세워도 항의할 수 있는 민족이 없고, 국가를 그러한 자리에 세워도 항의할 수 있는 국가가 없으니 세계를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한 후에 기독교는 오늘날 세계적인 종교로 군림하게 됐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연결시켜 나와 가지고 오늘의 세계의 문명권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 한 사람을 다시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예수는 아담이 타락했던 그 이전까지의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눈을 들어 그의 무릎 앞에 모여들던 제자들을 바라보게 될 때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말입니다. 어이구, 지지리도 못난….
천지를 호령하며 만왕의 왕으로서 왕권을 세우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길잡이로 어부에게 찾아갔으니 잘된 것입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예수가 처량하고 불쌍한 신세가 되었습니까? 이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예수가 책임을 못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이 4천년 동안 고대한 소원이 나 하나 찾기 위한 것이 아니었더냐?’ 예수님이 하나님의 한을 품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천지를 걸어 놓고 저주받아 마땅한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위해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때까지 민족의 역사적 심정을 붙들고 나오신 당신의 마음, 유대민족을 따라 나왔고 유대교단을 따라 나온 그때까지의 아버지의 마음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역사적인 발판이 끊어지는 마당에 아버지의 마음은 어디 가셨습니까?
그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내가 대신 지겠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당신께서 4천년 동안 수고하여 나오신 심정적인 전통을 끊지 마시고, 비록 4천년 준비하신 제1이스라엘은 망했지만 나를 통해 제2이스라엘로 상속하여 넘겨주시옵소서.’ 이런 마음 갖고 기도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랑이 많아서? 사랑이 많아서? 천만에요. 하나님이 수고하신 역사적 터전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진정코, 진정코 저들의 죄를….’ 하신 것은 저들이 좋아서?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이 소망의 날을 가져야 4천년 동안 찾아 나오신 하나님도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죽음의 자리에서 사라지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이 슬퍼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해서 사죄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하늘 아버지가 상심했을 때 그 심정을 위로하는 효자 중의 효자였습니다. 이런 자리에 서면 사탄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딸을 지금까지 유린해 나온 원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중심한 용사로서 심정적인 터전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는 고통과 핍박과 조롱을 받는 데에도 만왕의 왕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6천년 동안 수많은 민족을 대신하여 역사의 배후에서 수고하셨는데, 어느 한 날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자들이 나올 것이며 어느 한 날 예수님의 한을 해원성사할 날이 올 것입니까? 또한 6천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괴롭혀 온 원수 사탄을 우리 인류의 혈통에서 완전히 끊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통일교회 식구들은 역사적인 열매라고 하고 있습니다. 말은 잘 합니다. 진정 역사적인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 받아야 됩니다.
역사적인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선한 예수님 앞에 접붙임을 받아 선한 혈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십자가 도상에서도 사탄을 굴복시켜서 영육을 합한 부활의 성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적인 결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리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일시적인 욕망을 위해서 나가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중심하려면 하나님의 심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역사적인 원리의 말씀을 들고 나아갈 때에는 사탄의 혈통은 잘려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원리 말씀을 들고 나가면 사탄이 항복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중심삼고 말씀의 실체로서의 완성한 자리를 실현한 사람이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러 왔던 예수님을 민족과 그들의 교단이 쓰러뜨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개인으로부터 가정과 종족과 민족적인 싸움을 해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싸움에 이길 수 있어야 갈라진 영계와 육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세계에 가서, 이 땅과 영계를 주름잡는 사탄의 흑암 권세를 타파해 버리고 종족적으로 싸워 오던 역사적인 원수들의 종족과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싸워 오던 수많은 악령들과 대결해서 이겨야, 비로소 영적 세계가 평등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후에 지상에서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복귀의 노정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한 분의 완성은 천주의 완성이요, 예수님 한 분의 승리는 천주의 승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제일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제일 큰 고통을 받고 제일 많은 슬픔 속에 산 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제일 복을 많이 받은 아들로 태어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고통을 받는 데도 만왕의 왕이요, 핍박을 받는데도 만왕의 왕이며, 수많은 원수들 앞에 조롱을 받는 데에 있어서도 만왕의 왕이었습니다.
천민(天民)이 되려면
오늘날 우리들은 무엇을 바라고 나갑니까? 선민(選民)이었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천민(天民)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 할 땐 선민(選民)입니다. 시대 변천과 더불어 환경에 몰리는 민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천민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 중심과 이념이 태초부터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천민이 되어야만 합니다.
천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줄 아십니까? 그 족속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천민사상을 넘겨주기 위해 온다면 우리는 그의 족속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민족을 배달민족이라 한다면 배달민족을 중심하고 한국이란 나라가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위주로 한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아직까지 민족 편성이 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스라엘 선민은 당시 70장로를 중심삼은 족보권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는 12사도를 중심으로, 70문도를 중심으로 하나되지 못하고 제각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나와 제각기 놀았기 때문에 다 망해 버렸듯이 교파 싸움을 하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망하나 안 망하나.
누구든지 자기 교파를 위주로 하면 망합니다. 왜 망하느냐? 모세를 따라 나온 이스라엘 민족들이 12지파와 72장로를 위주로 해서 명령 계통을 세우고 절대복종하여 단합된 행동을 하였다면 그들은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굶자면 굶고…. 그런데 그들은 서로 물고 싸우다가 결국 망하게 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는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교파를 어떻게 통일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2사도를 위주하여 70문도로 지파를 편성하여 이스라엘 정권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을 잡았더라면 그들은 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사명
오늘 우리 통일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참을 세워서 새로운 기준으로 나오면 언제나 이단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쫓김받고 몰림받던 무리들의 발자취를 통하여 수습되어 왔고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혁명도 그의 보상으로 달성되어 나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기독교 앞에 유대교가 반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세계가 통합하여 통일교를 반대할 테면 하라는 것입니다. 반대하려면 힘껏 반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들이 천년 만년 구원받게 됩니다. 우리 한국에 있어서 지금까지 선생님의 일대가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와 민족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내적으로 남모르는 투쟁을 계속해 나왔던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승리적인 통일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조상들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계를 통하는 지상의 수많은 영통인들은 선생님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느 산기슭에 엎드려 기도하든지 아니면 영통해서 별의별 일을 다하고 있지만, 그들은 선생님의 말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통일교회입니다. 통일교회, 이름과 같이 실제로 통일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영계를 통하는 무리에는 도주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도주들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천상의 이치로, 심정의 이치로 정복해 나가야 합니다. 인륜의 이치와 천륜의 이치를 통해서 정복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천륜의 원칙은 이러하고, 아들딸된 인류를 다시 찾기 위한 심정은 이러하다고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의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너 아느냐고 하는 물음으로 모두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도적(道的)인 인연을 책임지고 세계의 영통인을 배후로 하고 있는 영계의 수많은 도주들에게 항의서를 자동적으로 받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계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에게는 세상 이야기나 뭐 시시껄렁한 것들을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끝날에 남아지는 것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6천년 동안 사탄의 농락에 유린되었고, 더러워진 이 무지하고 어두운 세상이 나 한 개인에 부딪쳐 온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영계에서부터 공격해 나옵니다. 그런데 푯대만 확실히 세워 있으면 천지는 요동하고 변할망정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부딪쳐 오더라도 그 세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끝날에 남아질 것이 무엇이냐? 다 깨어지더라도 제일 끝날에 남아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딸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딸이란 어떠한 사람들이냐?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혈통을 통해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땅의 기독교인들은 주님이 오시게 되면 원죄를 벗는다고 말하는데 원죄를 벗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는 심정적 혈통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맨 나중에까지 남을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탄이 와서 부정해 보았댔자 부정되지 않습니다. 몇천 번 몸부림치며 강의를 해도 듣고 난 다음에는 ‘아니다.’ 했을 때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하나님 편의 사람입니다. 심정을 건드려도 하나님 편이요, 몸을 보더라도 하나님 편이요, 그 사람의 다른 어떤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 편이요, 그 사람의 손수건 하나만 갖다 놓아도 사탄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끝날에 남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끝날에 남아지는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 원리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외국 분들도 와 있지만, 앞으로 두고 보십시오. 서운할지 모르지만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전부 꼬리표를 달아 주어서 전국 팔도강산을 돌아다니게 할 것입니다. 내 순회코스를 맨발로 벌벌 기어 다니게 할지도 몰라요. 사실 이런 것은 생각하지 맙시다. 오늘에 와서 그것은 벌써 과거이니까 그만해 놓고 오늘 현실을 바라봅시다.
오늘 우리 통일교회를 두고 볼 때, 통일교회는 외로운 교회입니다. 그렇지요? 외로운 교회지요? 아니라구요? 아니긴 왜 아닙니까? 통일교회는 외로운 교회, 통일교인은 불쌍한 무리, 통일교인은 밥 굶는 무리….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천대를 해도 뜻을 위해서 반항할 줄 모르는 무리입니다. 선생님도 일생을 엮어 얘기하면 역사가 많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통일교회에 가면 선생님이 수염이 이렇게 자라 가지고 ‘에헴!’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구만,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일하기가 좋습니다. 작전상으로 봐도 참 잘됐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은 저기 있는데 행동은 뒤꽁무니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 알았다는 겁니다. 뭐 음란하고, 뭐 어떻고, 자꾸 욕하지만, 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린 욕먹고 쫓김받지만 망하지 않습니다. 계속 크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를 벗겨도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선은 맞을수록 흥하고 악은 맞을수록 망한다
우리 통일교회는 지금까지 자유당을 비롯하여 민주당과 혁명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어느 정부도 우리편을 들지 않았습니다. 떠도는 말에는 통일교회가 무슨 혁명정부의 편이라고 하는데 천만에요. 그것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통일교회는 무슨 정당의 편이 되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날 이 모진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한 번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앞으로 20세기 말기에 이 혼란된 사회가 휘몰아쳐 오더라도 ‘해보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갖고 대처하면 됩니다. 이것은 영계에 가서 싸우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단들이 통일교를 이단으로 낙인찍어 심판하는데 그 심판이 나중에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기성교회 목사들이 왜 반대를 하느냐 하면, 자기들이 수십년간 고생해서 길러 놓았던 교인들을 자기가 아무리 ‘너는 내 아들딸이다.’라고 해도 우리 통일교회에 한번 데려다가 몇 시간만 강의를 듣게 하면 그들 교회에서 꽁무니를 빼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리가 없어서 강의도 못 들어요. 그러나 이것은 절대 강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추수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익은 열매가 있으면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여자들의 비방이 많은 모양인데, 내가 왜 그들하고 원수져야 합니까?
여러분들, 싸우다가 지쳐 죽으면 죽었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죽으면 안 됩니다. 또한 기껏 싸워 가지고 지면 말이나 됩니까? 사탄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야! 사탄아! 네 모든 능력과 실력을 동원하고, 너의 세계를 활용하여 나를 전도해 보라!’고 하면 사탄도 자연굴복합니다.
예수님도 영계에 돌아가서 수많은 수고를 하면서 지상에 발판을 건설해 나왔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대신해서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반대하는 그 속에서도 뜻을 이루어 왔으니 말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은 맞고 맞으면서도 빼앗아 나오는 것입니다. 악은 맞으면 그대로 망하지만, 선은 맞으면 맞을수록 발전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예수가 하늘 편에 서 있었기 대문에, 로마의 통치 밑에서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서 죽었으면 망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머리를 들고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은 맞고 흥하지만 악은 맞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통일교회 문선명이라는 사람은 지금 많이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맞아도 잘 맞겠습니다. 모둠매를 맞으면서도 흔적이 없게끔 맞겠습니다. 그렇다고 맞고 망하는 사람은 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했습니다. 맞고 망하는 무리는 역사적인 역적이요, 맞고도 흥하는 무리가 있다면 의인들로, 역사의 심판자들로 영원히 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저기 아줌마들도 그래요? 이 해와의 후손들…. 그렇다고 선생님이 욕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은 사실 해와를 생각하면 원수 같습니다. 해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6천년 동안이나 인류가 이렇게 지지리 고생하는가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 하면 해와가 생각되어지고, 해와 하면 뱀이 생각되어집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타락한 해와와 선생님과는 원수지간이기 때문에 미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 문 선생도 여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욕을 먹고 있습니까? 뭐뭐 어쩌고저쩌고 하며 욕하고, 퇴폐하다느니 어쩌니 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자라는 인간들…. 그렇지만 통일교회의 여자들은 필요합니다. 죽으라 한다고 다 죽어 버리면 그것도 큰일입니다. 그래 요즈음 수고 많이 하는 여자분들은 해와가 아니라 해와 편에 있는 분들이지요? 저기 부인들, 선생님이 말한 그런 배포 있어요?
오늘 이 세기말적인 역사의 끝에서 태어난 여러분, 이왕 한번 사나이로 태어났으니 결판을 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살살 피해 다니지 말고 몽땅 붙안고 몹쓸 것은 집어던지고 멋지게 해치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나는 그렇게 해 왔습니다.
복받기를 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
선생님에게는 무한한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노동판에 가면 일등 노동자입니다.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든 먹고살 걱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령 내가 어떤 노동판에 가서 일을 하더라도, ‘아 통일교회 선생님이 밥벌이가 곤란해서 이런 일을 하는구나.’ 하고 알면 그건 큰 오해입니다.
나는 당장에 어디 가든지 이 몸뚱이를 가지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무엇이든지 한번 붙드는 날에는 끝을 보지 않은 것이 없어요. 또 어디서 무엇을 한다 하면 설렁설렁해도 3등 이내는 한다 이겁니다. 아마 하나님도 지혜로우신 분이라서 나 같은 사람, 특종을 잘 택하신 것 같습니다.
한번 손을 대서 시작하는 일에는 생명이 가다가 죽더라도 해치워야 직성이 풀립니다. 시시껄렁하게 하려면 아예 시작부터 안 합니다. 누구든 한 번 붙드는 날에는 네가 망하든지 내가 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이 길을 나설 때에도 ‘하나님 있습니까?’ 하고 끝까지 캐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실히 알고 출발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 소원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서 하나님의 소원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 내가 필요합니까?’ 하고 여쭈어서 내가 필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필요합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이렇게 내가 한번 찾아가 붙으면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시든가 아니면 보따리 싸들고 다른 데로 가시든가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인간을 많이 연구했습니다. 사람은 별난 게 아닙니다. 내가 술집에 있는 여자를 붙들고 그녀가 제일 안타까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몇 마디만 하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를 선한 사람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은 악한 사람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도 옆에 살인강도가 왔기에 아주 가까이에 가서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서 진실한 심정의 폭발이 있었습니다. 진실된 심정의 폭발을 일으켜 주면 다시 살아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모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좋은 것을 자주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좋은 것이 찾아들게 됩니다. 가만히 보니까 영계가 수고해 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여, 저에게 복을 주소서!’ ‘저에게 큰 복을 주소서!’ 하는데 복이 보입니까? 그들은 욕심이 많은 만큼 징계가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복도 큰 것만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큰 복은 주더라도 삼키지 못합니다. 큰 복만을 고대하는 만민들, 복받기 위해 도닦는 도인들이여 복에 혹이 달려 있는 것을 알라! 큰 복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여! 그것이 뒤바뀔 때에는 커다란 짐과 같을진대, 큰 복이 도리어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알지니라.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
내가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입장에서 염려하는 것은 기필코 하늘의 세계를 이 땅에서 일으켜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큰 복을 받으려면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뒷받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 도상에 있더라도 거뜬히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한 나라와 한 민족의 전통을 세우고 그 민족정신에 부응하는 것도 마음가짐에 달렸습니다. 몇 대를 거치면서 그와 같은 전통을 세우고 심정적인 인연을 세우고 세계적인 혼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나오면 그때부터 그 민족은 발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뜻을 알고 보면 무한히 높은 것이요, 뜻을 알고 보면 틀림없이 하늘의 아들딸로서 하늘의 황족이 될 것이로되, 가는 방향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살 때가 다가왔는데 복을 감당치 못하여 다 빼앗기면 거지가 됩니다. 우리는 복을 빼앗기는 곳에서 자리잡을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그 권(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렇게 믿는 부분부터 하늘이 터를 열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알고 있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금방 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역시 밥을 얻어먹는 고통도 겪었고, 또한 문전박대를 받는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스승이 가는 길이 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이 거짓이 아니요 참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면 하늘을 참되게 모셔야 합니다. 배고픈 자리에 가면 배고픈 사람처럼 굶고, 죽는 자리에 가면 과거에 충신들이 그런 자리에 들어가서 애달파한 것보다 더 애달파하고 그들보다 더 간절해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의 주인공이 되지 않고서는 천륜을 대할 수 없습니다.
지치고 몰림받고 통일교회 무리를 그런 길로 내몰아야 하는 하늘의 사정이 있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가는 길이 비록 험할지라도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할 적마다 나를 버리고, 눈물을 머금고 최후의 폭탄과 같이 터지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오늘이 있기까지 하늘이 나를 붙들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이 같이했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노정에 살아 있는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하늘이 같이 안 해 주기를 바래도 같이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그런 자리를 권고하고 그러한 자리에 내모는 것은 영원히, 영원히 복을 줄 수 있는 터를 마련해 주시기 위한 참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어디에 이루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이 일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각오를 했고, 또는 선서를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뜻만을 위해 살고, 뜻만을 위해 죽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맹세한 그 승리의 터전이 언제 이루어지겠습니까? 안식하는 보금자리일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풍우가 몰아치고, 그런 와중에서 까딱 잘못하면 내 중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자리일 것이냐? 후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하늘이 고대하신 승리의 터전을 닦기 위한 팻말이라도 꽂을 수 있어야 하고, 하늘이 바라는 대로 살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도 버리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이 무정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통일교회 무리가 역사적인 길을 가기 위해 벼랑 끝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떨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승리의 기대를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와 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복귀의 길은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6천년 역사가 흘러 종말기에 다다랐는데 핍박받는다고 해서 낙망하고 절망해서 쓰러지면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사랑의 발걸음을 걸어 나를 붙들었습니다.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한 길을 개척해 놓지 않는 한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을 중심삼고 돌아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애써 왔지만 이제는 자기를 중심하여 종족을 이루고, 가정을 중심하여 민족을, 민족을 중심하여 국가를, 인류를 중심삼아 세계를 구성하여 돌아갈 수 있는 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의 요구가 역사적인 우리 선조들의 소원이요, 선조들을 지도하던 하늘의 소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역사적인 해원, 하늘의 해원과 선조들의 해원을 성사하여야 할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고 할진대, 지극히 엄숙한 자세로 묵묵히 가야 하겠습니다. 복귀의 길은 그렇게 가야 됩니다.
여러분, 보세요. 3년 동안 우리는 고생했습니다. 밥을 제대로 못 먹고 옷을 제대로 못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지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본부에 있으면서, 어떤 식구는 개밥을 빼앗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있는 개를 향하여 ‘야! 이놈아, 너는 너의 한 주인을 위해서 밥을 먹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인류를 위하고 하늘땅을 위해 살고 있으니 이 밥은 내가 먹어야 돼! 내가 먹어야 돼!’ 하고서 그 밥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처럼 개밥을 먹으면서도 하늘 앞에서 호소할 수 있는 날이 있어야 합니다. 스승된 나로서도 여러분에게 개밥을 먹이고 내가 보리밥을 먹으면 내가 더 곤란합니다.
우리는, 우리는 한(恨)에 사무친 무리입니다. 우리는 이를 악물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후에 우리를 엿보는 사탄이 우리를 농락하게 됩니다. 날마다 눈물과 더불어 가야 하고, 패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의 전통을 고수해야겠고, 마음껏 그 뜻을 붙들고 눈물과 더불어 사는 일은 있을지언정, 하늘을 배반하고 ‘나는 기운이 없어 못 가겠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매를 맞아 쓰러지면서도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며 차라리 송구스러워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먼저 아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호소도 원망도 할 수가 없었어요. 오로지 갈 길을 바라보며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갈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한을 생각하면 자신의 한을 이길 수 있다
지금 통일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잘 모를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과거 역사를 모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그 못나고 지긋지긋하게 고생하던 모습을 무엇 때문에 보여 주겠습니까? 하늘도 우리 앞에 그걸 가르쳐 주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실정을 알고 싶다고 하면서 저 밑바닥까지 탐사를 해 보니 그때서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원리를 공부할 적마다, 또는 하늘의 심정을 노래하는 자리에 들어갈 적마다 하늘은 어찌하여 역사적인 노정에 감추어진 심정을 가르쳐 주셨던가! 감추려고 하는 그 심정보다 그 심정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할 때에 하늘은 우리에게 새로운 원리를 지상 위에 나타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이 진실로 선생님의 역사를 알고 싶거든, 선생님이 하나님을 대하여 안타까워하던 마음이 하나님이 그 심정을 감추어 두려는 마음보다 컸던 것처럼 안타까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다면 가르쳐 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직까지 진실로 그러한 자리에 서려 하는 통일교회 사람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한이 많다면 무한히 많은 사람입니다. 길가에 구르는 조약돌을 보고도 한을 호소했고, 살아 있는 풀 한 포기를 보고도 한을 호소하였습니다. 처량했던 자신을 역사를 걸어 놓고 원망도 해 보았고, 별을 보고 원망도 해 보았습니다. 내가 가야 할 복귀의 길에서 낙오병과 같은 심정도 가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천주복귀를 위해 하늘은 인간을 보내 놓고 얼마나 낙망하셨겠느냐, 하늘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슬프고, 하늘 아버지의 한이 얼마나 많으셨느냐 하는 것을 알고, 내가 천번 만번 죽고 내 몸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님께 슬픔을 더해 드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왔습니다. 내가 죽음이란 두 글자를 남기게 될 순간, 내가 죽는 그 시간에 ‘내가 정성을 더 드렸으면, 내가 이렇게 해 봤으면 좋을 뻔했다.’고 하는 유언을 남기지 않겠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참아 나왔습니다. 이러한 가정이 진정한 통일의 가정이요, 통일의 무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3년노정을 생각해 보세요. 3년노정의 기간 동안 자기가 뜻 앞에서 움직인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복귀 역사는 개인적인 복귀의 기준을 통하여 가정적인 복귀의 기준을 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천주 상에서 최고의 승리의 기대 위해서 복귀를 바라보고 계시는데, 여러분은 하늘땅을 초월한 승리의 기반 위에서 개인복귀를 꿈꾸어 보았습니까? 가정 복귀를 꿈꾸어 보았습니까?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를 꿈꾸어 보았느냐 말입니다.
40이 넘어서 요즈음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위로해 드렸습니다. ‘아버지! 저를 보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제 결의와 소망은 이러했으나, 이런 연령에서 그런 소망의 한 날을 아버지 앞에 이루어 드리지 못한 것을 아버지 슬퍼하지 마십시오. 지금 자라고 있는 통일가의 무리들은 그 뜻을 받들어 아버지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울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로하고 나서 여러분을 바라볼 때 내가 하나님께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참다운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버지 앞에 참다운 자녀들을 못 가졌다고 할 때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후손들은 거기에서부터 선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의 무리인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과 예수님의 사정을 생각할 때, 하늘을 봐도 부끄럽고, 땅을 봐도 부끄럽고, 나무를 보나 날아가는 새를 보나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복귀노정에 있어서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놓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지옥 밑창을 뚫고 가는 길
지금은 복귀의 시련 도상에 서 있으나 개인적인 기반을 닦고 가정적인 기반을 닦고 민족적인 기반을 닦고 세계적인 기반을 닦기 위하여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늘 기도하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을 바라볼 적마다 너희들이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는 자리냐고 묻고 싶습니다. 축복받은 가정의 후손들이 그런 자리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들이 누더기 옷을 입고, 밥을 굶으며, 광야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생활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선생님은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인 이 천적인 역사 앞에 서기에 합당한 사람인가 물어보세요. 노아를 걸어 물어보고, 아브라함을 걸어 물어보고, 야곱을 걸어 물어보고, 모세를 걸어 물어보고, 예수를 걸어 물어보고, 2천년 동안에 순교의 길을 갔던 수많은 선지자들을 찾아서 물어보십시오.
개인 복귀노정에서 나는 책임을 다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가정 복귀노정에서 승리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직도 종족과 민족 복귀노정이 남아 있거든, 그들을 복귀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참다운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안 됩니다. 뜻길의 낙오자들을 다시 불러 모아 재기시켜 주시려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의 그 아픈 마음을 여러분이 잊어버리면 원리가 여러분을 심판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앞에 있는 복귀의 길이란 슬픔의 길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도 가기 싫은 길입니다. 한이 많아요. 쓸쓸한 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고 예수와 성신도 그렇습니다. 아니 갈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지옥을 통과해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지옥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 밑창을 뚫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지방 실정은 선생님이 다 알고 있고 심정으로 다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나타나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젊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난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책임을 할 수 있을 때 책임을 다하라고 말입니다. 만약 책임을 다 못하면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것을 느낀다면 마음으로써 넘어가야 합니다. 복귀의 길은 마음으로 넘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먼저 그 길을 몇천만 번 왕래한 것을 알아야 됩니다.
크게 믿고 크게 넘어가자
내가 가는 이 복귀의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우리 선조들이 몇천만 번 왕래하던 길이며, 하나님이 몇천만 번 왕래한 길입니다. 여러분 홀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친히 행하고 명령하던 것이니 여러분은 틀림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그냥 시켜먹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의 고개를 넘고 사탄이 따라오지 못할 고개를 넘어서 신천지를 향하여 가는 것이 통일의 무리이거늘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신 말씀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눅 12:49)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 풀래야 풀 수 없는 예수님의 서러움이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나라든 군왕을 모시는 충신은 그 나라의 환경이 비참해지고 어려워질수록 왕에 대한 사무치는 심정이 더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뜻을 품고 말없는 가운데 묵묵히, 남은 돌아서더라도 나는 질러가고, 목숨을 건 결전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품고 가는 길이 하늘의 아들딸이 가는 길이요, 통일교회 무리가 가는 길이라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선생님은 가끔 애기들을 불러서 이야기 할 때, 만일 이러이러한 계획이 실천되지 않을 때는 그것을 생각하게 해 주고 갈 길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나가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하늘을 대했던 그 마음을 오늘날 복귀의 도상에서 우리가 전부 상속 받아야 합니다. 이런 엄숙한 과제를 앞에 놓고 있는 여러분은 어떠한 자세로서 그 과제를 대하겠습니까?
선생님은 하나님께 결의하고 섭리노정을 출발했기에 여러분에게 그런 과제 앞에서는 죽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죽지 말고, 죽지 말고 다시 출발해 가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한국에서 출발해서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는데, 오늘의 이 세계는 얼마나 복잡하고 혼란이 많습니까? 세상은 복잡한 문제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더욱 무너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올라갑니다. 여러분이 안 올라가려 하면 영계의 영인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민족이 올라가지 않으면 20세기의 수많은 인류가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올라가면,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한국이 돕니다. 그런 시대가 옵니다. 통일교회 여러분은 그 시대가 오면 감사해야 합니다. 불원한 장래에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날이 오게 하려면 하루의 싸움이 문제가 아닙니다. 천년 만년을 위한 크나큰 계획을 세우려 하니 1년, 2년, 10년, 20년, 혹은 일생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계획을 세워 끝까지 갈 결의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출발했으니 끝까지 갑시다. 물론 가다가 거센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을 모시고 그것을 벗어납시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적 과제를 이루어야 하고, 하늘의 한을 붙안고 이것을 해원성사하지 않으면 아니 될 현실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좌하면 천지가 좌하는 것이요, 여러분이 우하면 천지가 우하나니 여러분은 자세를 똑바로 세워 천리의 대도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효자가 될 것이냐, 충신이 될 것이냐, 열녀가 될 것이냐, 효녀가 될 것이냐, 아니면 사탄의 구렁텅이에서 하늘의 원수와 인류의 원수들과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서 있는 슬픈 모습이 될 것이냐?
알려 주어야 할 하늘의 심정을 다 알려 주었고, 밝혀 주어야 할 하늘이 길을 다 밝혀 주었고, 보여 주어야 할 천도를 다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잘 크느냐 못 크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잘 사용하느냐 못 하느냐의 여하에 따라 복귀의 길은 단축되기도, 연장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복귀의 길에서의 어려움
한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비둘기 하나 쪼개지 않은 것이 한이었습니다. 야곱의 노정에 있어서는 에서와 라반이 야곱의 원수였습니다. 모세의 노정에서도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몰림받은 것이 한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노정에 있어서도 현실에서 자기 자신을 갖추어 가지고 미래의 자신의 가치를 바라보며 현실을 바로 수습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의 한 기점이 되고, 미래의 역사를 돌려놓을 수 있는 하나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의 자체를 위한 복귀의 길을 감사하며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오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그러면 복귀의 길이 여러분을 중심삼고 어떻게 될 것입니까? 한 개체를 놓고 과거와 미래가 오늘을 중심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현재․미래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미래가 관계되어 있고, 과거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중심으로 해서 천지의 운세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을 어디에 머물게 하고 싶습니까? 자신을 갖고 더욱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몸과 마음을 터로 하여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을 하시게 될 때, 내 개인이 심판의 성경이 되고 법전이 되고, 심판을 하여도 걸리지 않는 절대적인 자리를 닦아야만 개인복귀가 완결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개인완성 위에 가정을 완성해야 할 때입니다. 가정의 역사는 전부가 심판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받게 될 때에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순결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정적인 복귀를 이루고 민족적인 터전을 완결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민족적인 승리의 기반을 완전히 닦으면 사탄세계의 만민을 심판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친히 재판장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변호사가 되시고 사탄은 검사가 됩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민족들이 사탄을 공격하게 될 때 항의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야 민족적인 복귀의 길을 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국가, 세계, 하늘과 땅, 온 인류의 구속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영계와 육계를 통합할 천주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역사적인 전체의 탕감 기준을 완결해 놓고, 하늘땅을 중심한 억천만세의 대심판장을 마련해 놓은 후 창조주이신 아버지를 모셔 놓고 지금까지 하늘땅을 저끄러 나온 원수를 무자비하게 심판하게 될 때, 배신자로부터 졸장부까지 전부 항의하지 못하고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천지 복귀노정이 완결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서운가?
고통의 역사인 고로 하늘은 나를 세워 틈만 나면 몰아내십니다. 개인을 세워 놓고는 가정적인 십자가의 환난노정으로 내몰고, 가정을 세워서는 민족적인 환난노정으로 내몰고, 민족을 중심삼아서는 국가와 세계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러니 택함받는 것도 귀하지만 택함받은 자로서 축복을 받는 길은 심히도 어렵습니다. 나를 찾아 세워 복 주시려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기 쉽기 때문에 복귀의 길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도 천상의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의 한을 풀어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판은 땅에 있는 인간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디 험한 것에 속지 말고, 하나님이 오라 하시는 그 표준을 향해 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여러분을 부여안고 대성통곡하고 승리했다고 하는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아버지 앞에 할렐루야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복귀의 길의 최후의 목적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억대 만세 온 천주는 기념할지어다.’ 하는 축복을 받는 자리, 참부모의 자리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길에서 마지막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죽지 말아요. 그 책임을 다하기 전에는 죽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 앞에 작전이 필요한 것입니다. 엉클어진 이 세계를 참부모를 중심삼고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세계적인 탕감복귀노정을 넘어가야 할 때에는 5퍼센트의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영광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국가적인 기준을 세워서 세계의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고, 예수님 당시 세계적인 중심이었던 로마와 같은 미국에 자리잡았고, 이스라엘과 같은 우리나라에 자리잡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몰림받고 핍박받고 설움받던 예수님의 사정과는 다릅니다. 이제는 아무리 반대해도 소용없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몇년 동안에 선생님이 말한 것이 지금에 와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다 들어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하는 말이로되, 그 내용에는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보았을 것입니다.
통일교회 스승의 배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가 억만 사탄과 싸우다 죽어 그 시체가 가나안 땅에 묻힐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영광일 수밖에 없습니다. 애급 땅에 묻힌다고 한다면 큰 한이 되겠기에 야곱과 요셉은 죽음에 이르러 유언한 것입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부디 본향 땅에 묻어 달라고.
이제 한국 강산에서 싸우다 죽어도 그렇게 한이 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사탄세계는 어차피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기에 책임분담을 짊어지고 전생애를 다해야 합니다. 복귀섭리 앞에서 천주의 상속권을 받아 가지고 언제든지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부탁합니다. 알겠습니까?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기 도>
아버지!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질시하며 죽으라고 하는 이 살벌한 도상에서, 그래도 죽지 아니한 것은 오로지 당신의 은사이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을 흘기며 손가락질을 하는 속에서도 홀로 다짐해야 했던 그런 슬픔도, 당신이 보호해 줌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한 날의 승리를 행해 가는, 기뻐할 수 있는 길에 서 있습니다. 늠름한 자세로 전죄악역사를 감고 뒤넘이쳐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 있음을 생각할 때 감사하옵나이다.
지금의 국제정세로 볼 때 한국은 지극히 불쌍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갈래야 갈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갈래야 갈 수 없는 이 민족이 이제 다시 바라볼 것은 하늘밖에 없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지금 한국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사옵니다. 잃어버린 세계와 천주를 그 마음에서 다시 불러일으켜야 되겠사옵니다. 이 한민족은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위하여 정성들여 온 민족이요, 선의 역사를 위해 심혈을 아끼지 않은 민족임을 저는 알았사옵니다. 이 민족이 인연 되어 세계적인 책임을 짊어졌사오니, 소용돌이치는 와중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민족이 되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아버지! 누가 아버지의 심정을 알겠으며, 누가 아버지의 가는 길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는 자와 책임을 맡은 자 외에는 없사옵니다.
무지한 백성을 바라보게 될 때 통곡밖에는 할 수 없으며, 땅 위에 살고 있는 인생들이 죄악 가운데 있는 것을 바라볼 때 저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인도해야 할 책임과 무서운 사명이 있음을 알게 되옵니다. 저희들이 굶주리면서도 그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하늘 앞에 세워야 할 책임이 있사옵고, 저희들이 헐벗으면서도 저들을 입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사옵나이다.
이러한 노정에서 슬픔에 잠긴 통일의 무리가 있사옵니까? 아버지시여, 그 슬픔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낙오자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최후의 싸움터에서 아버지 앞에 슬픔과 염려를 남기는 자가 되지 말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나의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지금도 저희들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을 찾아가는 길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모르고 있사옵니다. 모르는 것이 죄이옵니까? 모르는 것이 죄가 아니옵거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통일의 무리들이 가는 앞길을 가로막는 자들이 있사오니, 그들의 무지함을 용납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부탁드리옵니다.
하늘과 땅은 하나요, 하늘땅은 아버지의 것이요, 모든 아들딸은 아버지의 것임을 아옵니다. 12자녀를 세우고 12족속을 세우기 위한 선의 조상들이 그 혈적(血跡)을 탕감복귀하고 이 시대를 치리할 수 있게 하여 주옵기를, 아버지,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아직도 남아진 한 많은 복귀역사 도상에서 승리의 한 날을 찾아 나오기 수천년, 오늘 저희가 그 마음 앞에 보답하기 위해 짐을 짊어지게 됨을 감사드리옵니다.
수천만 형상 앞에 이념을 세워 가야 할 길이 복귀의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죽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까지 기어이 아버지의 한을 제거시켜 드리고 되돌려 드릴 수 있는 그 무엇에 플러스가 되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아직도 가야 할 한 많은 복귀의 길 앞에 아버지의 영광의 기준을 높이고 승리하여 길이길이 후손들의 찬양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후손들로부터 찬양받을 수 있는, 영원한 승리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아들딸 되게 허락하여 주옵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오늘 세계에 널려 있는 불쌍한 통일의 무리의 앞길을 아버지,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피눈물로 그리워하고 마음을 조이면서 보고 싶어하는 자녀들임을 아오니, 아버지! 그들의 마음을 채워 주시옵소서.
아버지, 뜻을 이루어 세계적인 대가족을 이루는 날, 아버지 홀로 아버지 되시옵소서. 저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시옵고, 사랑의 세계를 이루어 남을 비판하는 사탄의 마음이 한 호리(毫釐)도 없게 허락하여 주옵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이 모든 말씀 주의 이름으로 아뢰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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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버지, 저희들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같이 부모님의 품에서 엄마 아빠를 부르며 안기고 싶어하는 어린아이가 되어야겠습니다. 자기의 체면과 위신과 사정을 잊어버리고,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를 반길 수 있는 그 자체가 되는 것이 그립사옵니다.
모세는 호화스러운 바로의 궁중에서도 가나안 복귀의 한 날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는 멀리 본토에 자기 나라를 그리워하며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세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너는 역사적인 노정 가운데 노아한테 졌고, 야곱한테 졌으며, 모세한테 지지 않았느냐? 나는 이들의 승리의 기반 위에 서 있고 섭리역사의 모든 전통을 상속 받았으니 사탄아! 너는 물러가라.’고 해야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 길을 나설 때에도 ‘하나님 있습니까?’ 하고 끝까지 캐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실히 알고 출발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 소원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서 하나님의 소원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 내가 필요합니까?’ 하고 여쭈어서 내가 필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