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순항쟁 시발지 14연대추모행사
주최: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사회적공론회미디어 투쟁단
후원단체:광주전남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광주여성회.(사)우리민족).통일WHO.(사)사단법인우리민족.광주시민단체협의회.전국농민회총연맹 순천시농민회.전국농민회보성군농민회.광주전남추모연대.21C광주전남대학생연합.광주교육희망네트워크.광주진보연대.전남진보연대.국민주권개헌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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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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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14연대 현황을 설명하는 주철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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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대 주둔지
신월리는 동양, 물구미, 신근 등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마을로 여수에서는 동정과 서정 다음가는 큰 마을이었다.
앞에는 잔잔한 바다를 끼고 뒤에는 청산이 감싸고 있으며 주위는 바둑판 같은 옥토에 둘려싸여 주민들은 반농반어로 꽤 유족한 생활을 해 옛날에는 봉산동 국동 일대사람들이 신월리 덕으로 먹고 산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다. 그런데 무릉도원같던 이 평화경에 갑자기 모진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쳤다. 즉, 1942년 8월경 앞바다가 ㄷ자형으로 천연만을 이루고 있는 신월리의 지형을 이용해 일본해군비행장을 만들고 미평역에서 이 비행장까지 철도를 놓기 위해서 다듬기 위해 신근, 물구미, 봉양부락 철거하게 된 것이다. 이 비행장공사는 일본토목회사들이 맡아 했는데 인부는 이 고장을 비롯 전남동부6군에서 끌려온 근로보국대들이 2개월씩 교대로 와서 일해 해방이 될 무렵에는 거의 90% 가까운 공정을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이 항복을 하였고 빈 막사로 남아있었다.
1948년 5월4일 신월리는 다시 군용지로 편입돼 안영길 대위 이하 1개대대 병력이 14연대를 창설 이영순 소령이 연대장이 되었다가, 김익렬 중령,오동기 소령을 거쳐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48년10월19일 4.3 진압을 하기위해 떠나는 제주출병을 거부하면서 여순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사건 후 1950년7월25일 군대가 완전철수하고 한때 텅텅 비어있던 이곳에 1952년 12.31일 제 15육군병원이 설치되어 전방에서 내려온 부상자들을 수용했다가 1953년7월27일 철수하였고 육군병원 철수로 상당기간동안 공백상태에 있던 이곳은 1962 년 6월26일 뜻밖에도 보사부 결핵환자 자활촌으로 지정돼 전국결핵환자의 총 본산이 됐는데 이들이 시내 음식점이나 목욕탕 등으로 함부로 출입하는 바람에 말썽이 많다가 1976년2월20일 보사부에서 각기 생활보조금을 지급하여 자유분산시켰던 것이다.1976년7월23일 한국화약 제2공장이 들어서 가동중인 것이 오늘날의 신월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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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항쟁 진압을 거부한 14연대 여순항쟁의 역사 발자취를 따라 14연대 주둔지-중앙초등학교를 거쳐 이곳 형제묘 학살지에 원혼비 백비가 세워졌습니다. 협력자를 색출하려고 인간터널을 만들어 지나가다 손가락으로 가르키면 끌고가 재판도 없이 일본도로 즉결 처형하는 김종원부대의 만행이 벌어졌던 중앙초등학교에서 위령제를 올리고 이곳 형제묘에 원혼비 표식을 설치하였습니다. 어디서 몇명을 죽였다고 말할수도 없던 시절, 지나던 여수시민들이 돌 하나씩 던져 쌓아올려 위령탑이 세워졌다는 통곡의 길에 위령순례단 백비는 섰습니다. 통한의 역사 깊이 묻혀진 가슴속 돌덩이를 들어내듯이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의 길을 다짐하며 원혼비 백비로 우뚝 섰습니다.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여수에 들어온 진압군이 여수 서 초등학교에서 반란군에 협력한 부역자를 색출하는 장면이다. 당시 초등학교 교정으로 붙잡혀온 여수의 청장년들은 진압군의 부역자 판별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부역자로 판명되면 오른쪽 대열에 앉혀졌다. 이들 대부분은 학교 뒤 교정에서 즉결 처형을 당하였다. 사진 뒤편으로 진압군의 소개 작전으로 마을이 불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5⋅10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남로당의 폭력적 반대 투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였다. 총선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제주도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 충돌이 계속 되었다.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 또 다른 정부가 세워짐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국가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키고자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에 출동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자 김지회(金智會, ?~1949)와 지창수(池昌洙, ?~1950) 등 남로당 계열의 군인을 중심으로 명령을 거부하고봉기를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부는 즉시 진압군을 투입하여 10월 27일부터 진압 작전을 실시하였다. 그 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부역자 색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반란군 동조자로 지목되어 희생당하였다. 봉기를 일으켰던 군인들 중에서 일부 생존자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이후 빨치산의 주 세력이 되었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남한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화되었다. 1948년 12월에 ‘국가 보안법’이 제정되었고, 군대 내의 좌익을 소탕하기 위한 대규모의 숙군 작업이 단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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