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정식으로 일본에 사절단을 보낸것은 1404년 回禮使란 명칭으로 보냈다.
그리고 통신사란 이름으로 1428년 세종임금때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무로마치정권의 제6대 장군 足利義敎의 취임축하사절로 갔다.
이때 조선통신사의 사절들은 충격을 받은 것이 있었다.
화폐의 사용이었다. 당시 조선은 물물교환구조였기 때문에 이동을 하거나 멀리 길을 떠날때는 짐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일본은 숙박비와 식당등에서 小錢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충격을 받았다.
다음으로 서민들의 옷차림이 화려한데 놀랐던 것이다.
조선은 백성들은 흰옷을 주로 입었고 염료가 부족해서 염색을 해서 입지 못하게 했다.
왕실이나 사대부만 염색이 된 옷을 입었는데 일본은 상하구분없이 화려한옷을 입는것이 충격을 받은 것이다.
다음으로 水車 물레방아로 논에 물을 대고 농사를 짓는 것이 충격을 받았다.
조선은 그때까지도 수차가 없었다. 자연의 힘으로 농사를 짓는 것을 몰랐다.
이것을 조선에 돌아와서 만들고자 했으나 나무판을 구부리는 목공기술이 없어서 300년이 지나 1800년대에 비로서 만들었다.
이기록들은 신숙주가 통신사로 다녀온후 쓴 해동제국기에 모두 나오는 내용이다.
그리고 통신사의 기록인 일동장유가에는 일본인의 청결함과 목욕문화가 나오고 조선에도 목욕탕이 필요하다고 언급되었다.
한옥은 양반의 가옥이라도 우리나라는 목욕문화가 없어서 욕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의 상가의 진열상태와 상품의 다양함에 경악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일본을 가서 충격을 받았어도 돌아와서는 입을 다물었다.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나마 조엄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처음 먹어보고 이건 생으로 먹어도 되고 삶아 먹어도 된다는 것을 알고
씨종자고구마를 구해와서 심어서 고구마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고정관념이 무서운 것이다.
네델란드 상선의 하멜일행 36명이 제주도에서 풍랑을 만나서 표류해오자 억류하고 일부는 처형당하고 일부는 학대로 죽게 하고 광대노릇과 구걸과 노역으로 살게 했다. 13년만에 하멜이 여수에서 배로 8명이 일본으로 탈출에 성공하고 일본조정에서 나머지 생존자의 송환을 요구하여 나머지 생존자들은 송환되었다.
재난을 당한 외국인을 돌려보내지 않고 억류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다.
조선은 36명이란 전대미문의 외국인한테 배울 수 있었던 행운을 모두 날려 버린것이다.
지리학적 지식이 전혀 없으니 남만인이라고 불렀다. 남쪽의 야만인이란 뜻이다.
유럽에 수십개 큰 나라가 있고 다른문명권이 있는데도 세상에는 중국과 오랑캐 몇나라만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일본이 우리보다 더 큰 나라라는 사실도 19세기말까지도 몰랐다.
러시아가 조선과 국경을 접하는 1858년 아이훈조약이 성립된 이후에도 우리는 그런 사실도 몰랐고 러시아가 어디에 있고 뭐하는 나라인지 얼마나 큰 나라인지도 몰랐다. 아이훈조약과 북경조약이 체결된줄도 전혀 몰랐다. 세상에 자기나라의 국경이 러시아와 맞닿은 줄도 몰랐던것이다. 북경에 조선사신이 왔을때 알려주었어도 조선의 사신들은 무슨말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병인양요와 신이양요때 프랑스군과 미군이 이 강화도수비군을 쾌멸시키고 돌아갔어도 우리가 이긴것으로 주장한 대원군이었다.
척화비만 세운것이다. 프랑스군이 처들어온것도 모르고 양이라고 했다.
미군이 강화도에 또 처들어 오자 이것도 미국인지도모르고 양이라고 했으니 인문지리학적 공간적 물리적 사고방식이 전혀 없는 것도 같았다.
오늘날 탈북자들 한국에와서 받은 충격을 보면 이게 조선시대 일본에 통신사로 갔을때 충격하고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의 농민들이 쌀밥을 먹는 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 기록에 나온다.
북한 주민들이 한국에 오니 쌀밥에 고기반찬에 황홀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북한에 살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모두 북한 처럼 굶주리고 사는줄 알았다는 것이다.
폐쇄된 사회에 살면 사고방식자체가 정상적인 판단이 안된다.
사람은 미개하면 안되는 것이다.
알아야하고 깨우쳐야 하는 것이다.
다른나라사람들은 기차타고 상선을 타고 오대양 육대륙을 개척할때 우리조상들은 아무 생각없이
정말 미개하게 살았다.
문명을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19세기에 서양선교사들 목을 잘라 죽이고 천주교 믿었다고 우리백성들을 수천명 수만명을 죽였다.
나라와 백성은 전혀 생각안하고 오직 왕이 망할까바 그런 것이다.
그 결과 쇄국을 하고 척화비를 세우면 살아 남을 줄알았다.
오죽했으면 청나라가 일본과 수교하고 다른나라와도 수교하라고 했을 정도다.
조선책략에서 일본과 미국과 연계하고 러시아를 경계하라고 했는데 미국이 어디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고 러시아는 대체 왜 조선을 노리는지도 모르고 나중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니 당시 사대부나 왕은 머리가 빠개질 졍도로 혼란스러운 것이다.
세상에 많은 나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모르는 조선의 지도층은 지금 보면 모자른 사람과 다름없다.
보빙사로 미국에 간 조선정부의 사절단은 정신이 나가고 혼이 반쯤 나간상태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것은 지금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원시농경시대 사람이 여객선을 타고 미국에서 대륙횡단 열차를 타니 사람이 구름위를 날아가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미국샌프란시스코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흔들리니 지진이다 하면서 괴성을 지르고 공포에 떨었으니 얼마나 웃겼겠는가?
수교가 무슨 뜻인줄도 모르고 외교사절이 뭔지도 조선은 몰랐다.
일본과 관세협정을 맺는데 관세가 먼지 모르니 안주고 안받는것으로 해서 나중에 청나라에서 이사실을 알고 이 미개한 조선아 정신좀 차리라고 외교고문으로 몰렌도르프를 보내기 까지 했다.
관세가 뭔지도 모르는 관료가 관세협정을 맺으러 갔다니 지금생각하면 비극이라고 하기 보다 너무 슬프다.
공자왈 맹자왈만 할 줄 알지 무역이 뭔지 관세가 뭔지 통화가 뭔지 거래가 무엇인지 영사관이 뭐하는건지 조선관료들도 몰랐던 것이다.
구한말에 조선에 상주하는 외국외교사절들이 테니스를치니 조정의 관리가 아랫것들한테 시키지 왜 땀을 흘리고 힘들게 하냐고 물은 것은 스포츠가 먼지도 모르는 조정의 관리들의 수준을 나타낸 국제적인 웃음거리로 회자되었다.
한세기전까지는 솔직히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는 참으로 미개했었다.
미개함은 일신의 패가망신뿐아니고 나라도 망하는 법이다.
망하고도 남탓하면 정신못차린 것이다.
늘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첫댓글 대원군의 쇄국정치로 나라가 엄청 후퇴한 조선이었지요. 망치님의 말 처럼 미개하면 망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울 나라 부모님들 ~~ 자식 사랑 끝이 없어요. 논 팔고 땅 팔아서 미국으로, 영국으로 유학 보내 공부 시켜서
의사, 변호사. 판사 된 자식들 ~~ 울 이모의 이야기인데 ~~ 지금은 대학교 교수 되어서 이모님께 효도하는 사촌 오빠를
보며 ~~ 심은대로 거둔다는 ~~ 성경 말씀이 떠오릅니다. 생각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좋은말씀하셨습니다.
苦盡甘來군요.
우리집도 가난해서 60년대말에 상경해서 고생많이 했지만 부모님덕분에이만큼 사는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