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장연홍 사진을 내건 미활 비누 광고
그녀만 보면 외롭지 않아
슬픈 마음도 멀리 사라져
그녀는 나의 샴푸의 요정
이제는 너를 사랑할거야
- 빛과 소금, 샴푸의 요정
아름다움은 거품인가 보다. 사랑과 미(美)의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는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했다. 손에 잡힐 듯 사라지고 마는 거품과 같은 여신 탄생 신화는 내 기억 속에 샴푸의 요정과 연결된다. ‘네모난 화면 헤치며 살며시 다가와 은빛 환상 심어준 그녀는 나만의 작은 요정’이었다.
유년 시절(1980년대 중반)의 나는 샴푸, 화장품을 들고 나온 아릿다운 여배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TV광고를 볼때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왜 그렇게도 나를 빤히 쳐다보며 유혹하던지. 그녀는 나만 바라보는 작은 요정이었고, 부끄러움 많던 유년의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TV광고 속에 나타났던 샴푸의 요정은 카메라가 처음 우리나라에 건너왔을 무렵에 이미 등장했다. ‘사진관 시대’라 불렸던 1920-30년대 우리나라 사진문화 초창기에 평양 명기(名妓) 장연홍은 일본 비누 광고 사진에 얼굴을 내밀었다. 장연홍은 부채를 들고 다소곳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다.
“한 번 두 번에 살 거친 것, 벌어진 것, 주름살은 꿈같이 없어지고 백분이 누구의 살에도 잘 맞도록 화장이 눈이 부시게 해줍니다. 이렇게 여천으로 만들어낸 화장미는 당신을 훨씬 젊게 만듭니다.“
당시의 비누는 머리를 감거나 세수를 할 때만 쓸 수 있는 화장품 같은 미용 상품이었다. 그래서 비누는 그냥 비누가 아니라 ‘미활 비누’로 불렸다. 비누 광고에 출현했던 샴푸의 요정은 조선에서 이름을 날렸던 기생들이었다.
장연홍의 명함 사진. 일제시대 기생들은 본인을 홍보하기 위해 자기 이름이 적힌 사진들을 요릿집, 상점 등에 명함으로 배포했다.
기생들을 해어화라 부르기도 했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절세미인 양귀비를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아름다운 뜻을 갖고 있는, 발음도 아름다운 해어화라는 철자로 불렸던 당시의 기생은 매춘부 보다는 연예인 같은 인물상이었다. 뚜렷한 소신을 가진 이도 많았다. 장연홍은 돈다발로 유혹하며 소실로 삼으려는 친일파 이지용에게 이런 말을 날렸다고 전해진다.
‘나라를 욕보인 더러운 자에게 가느니 죽음을 선택하겠다!’
수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후벼 팠던 장연홍은 돌연히 상해 유학길을 선택했다. 21세 젊은 나이였다. 상해에서의 장연홍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샴푸의 요정에 대한 내 기억은 공책 받침과 연결된다. ‘피비 케이츠’, ‘브룩 쉴즈’, ‘소피 마르소’ 등 샴푸의 요정 못지않은 서양 소녀 사진들은 문구점의 압착기계로 코팅되어 내 공책 밑에 깔렸다. 차마 다른 친구들처럼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을 방에 거는 대담함이 없었던 유년의 나는 소녀 사진들을 내 공책 밑에 깔아놓고 슬쩍슬쩍 들쳐봤다.
사진 인화지에 연예인, 가수 등이 그려져 있는 대형 사진을 일컫는 ‘브로마이드’라는 단어도 일제 시대 때 수입됐다. 당시 기술력으로 달력만큼 대형으로 뽑을 수 있는 사진은 아니었겠지만, 일본인들이 보는 조선 기생들의 사진은 브로마이드였다. 조선 기생들은 이국적인 여인들을 수집하는 일본 남성들의 브로마이드였던 것이다.
장연홍 우편엽서
샴푸의 요정은 우편엽서에도 등장했다. 제국주의 시절 우편엽서는 이국의 침탈과 맞물린 근대성이 만들어낸 ‘여가’나 ‘관광’이라는 문화에 호응하는 이미지 상품이었다. 서쪽 사람들이 바라보는 오리엔탈, 즉 동양의 이미지는 ‘에그조틱(exotic)’이란 단어로 포장되어 팔려 나갔다.
같은 동양이지만 일본이 바라보는 조선의 이미지도 에그조틱했다. 조선을 둘러본 일본 관광객들이 수집해서 돌아가는 전리품 중의 인기상품이 우편엽서였다. 조선 기생들은 우편엽서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욘사마팬들이 명동에서 배용준 브로마이드 사진을 수집하듯 일본 남성들은 자기 품에 안고 싶은 조선 기생들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네모난 화면 헤치며 살며시 다가와’ 유혹했던 TV속 샴푸의 요정은 네모난 사진에 이미 출현했던 것이다. 조선 기생은 미활 비누 광고에, 에그조틱한 우편엽서에 팔려 나갔다. 사진이라는 네모난 격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평론가 ‘존 버거(John Berger)’의 시선처럼 네모난 프레임은 세상을 소유하려는 금고일 수 있겠다. 8장 세트로 구성된 조선 기생들의 사진은 ‘청초 우아 조선미인집’, ‘기생염자팔태’, ‘조선풍속기생’ 등의 이름으로 조선 토산품 가게에서 팔려나갔다. 조선은 그렇게 팔려 나갔나보다.
김창길 기자 / 경향신문
첫댓글 샴프의 요정...사실은 여인들은 이상하게도 살냄새가 더 후각을 끄는데...그게 비누나 샴프였나요? 그럼 난 낚였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