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세화
1947 서울 출생
경기고 졸 / 서울대 외교학과 졸
1979 남민전 사건 연루되어 프랑스 망명
2002년 귀국.
한겨레신문 편집국 기획위원,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EBS 시사프로그램 <똘레랑스 차이 혹은 다름> 진행
‘아는 남자’가 전화를 해서, ‘몹시 유감이다.’라는 아주 외교적인 언사를 제게 했습니다.
간추리면, 프랑스에서 고생을 하다가 겨우 23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함께 남민전에 관련된 이재오처럼 변절하지도 않고, 나름대로 진보 쪽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그를 그런(민족의 역적) 식으로 딱지를 붙일 수 있느냐는 말이었습니다.
필자도, 홍세화가 한국에 돌아와서, 애타게 기다리다가 늙어버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산길을 산책하는 모습을 텔레비젼으로 보며 잔잔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2007년 필자가 ‘물레방아는 멈추었다’ 편에서 그에게 한 욕(비판)은 취소하지 못합니다.
우선 반드시 밝힐 것은, 필자가 쓴 욕(비판)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레마르크(E.M. Remarque 1898~1970)의 소설이자 영화로도 너무나 슬펐던 ‘사랑할 때와 죽을 때(1954)’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연합국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고향에서 부모님을 찾는 주인공 에른스트가 동사무소에 가서 부모가 살았는지, 혹은 폭격으로 사망했는지 물어보는 장면에서, 유리창 너머의 동사무소 직원이 잘 들리지 않으니 큰 소리로 말하라고 합니다. 그 순간 에른스트에게는 자신의 비극을 큰 소리로 외쳐야 하는 것이 부모의 실종보다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선한 얼굴생김새의 홍세화가 민족의 역적임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 필자에게는 남한의 비극을 아주 큰 소리로 떠벌리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래서 이글은 ‘홍세화’라는 변절한 적 없는 우리시대(남한)의 진보인사들에 대한 이야기로 환치하여 보아 주십시오.
말을 이리저리 돌리 필요없이, 결론을 우선 말씀드리자면,
홍세화의 생명을 살려 준 것은 ‘홍세화의 프랑스’가 아니라 ‘홍세화의 서울대’라는 것입니다.
‘광장(1960)’을 쓴 소설가 최인훈(1936~)은 말하기를 “전의(戰意)가 충만한 성(城)이 함락된 것은 파수병의 잘못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보면, 백성들의 항상 전의(戰意)가 충만하여, 모든 왕족과 사대부가 도망을 가도, 그들이 대신 외적과 싸웠습니다. 백성들이 전의가 없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런 민족이 항복과 식민지배를 연달아 경험한 것은 파수병들이 잠을 잤거나, 아니면 적과 내통했거나, 혹은 적을 감시하기는 커녕 역으로 아군을 감시했거나 했다는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파수병의 잘못은 용서받을 수 없는 제1의 죄악이나,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단죄된 적은 없습니다. 그 단죄하는 재판의 재판장과 검사, 변호사, 피고도 모두 파수병들이 하기 때문입니다.
파수병은 오늘날, 계급적으로 말하면, 지식인계급이요, 산업적으로 보면 언론산업이요, 분야로 보면 예술분야입니다.
영어권 국가를 제외한 외국에 대한 통념과 상식은 반드시 해당 언어에 능통한 자를 통해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사실 교차검증할 자료조차 풍부하지 못해 주어지는 정보에 의식이 종속되기가 쉬운데, 더불어 이런 제2외국어 국가들에 대한 경계심도 크지 않기에, 더욱 쉽게 정보를 받아들입니다. 특히 유럽에 관한 이해는 거의 세계사 교과서 수준과 여행기 따위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홍세화는 남한의 파수병입니다.
우리는 그의 눈을 통해 성곽 밖의 백인과 프랑스와 유럽을 보고, 사민주의를 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실’ 하나는, 1차세계대전에 유럽 새퀴들이 전쟁터로 끌고 간 아프리카인이 약 20만명이었고, 2차대전에는 무려 50만명을 전쟁터로 총알받이로 끌고 갔습니다.
홍세화는 말합니다. “똘레랑스는 민주주의보다 우선한다.”
알제리해방전쟁 당시 알제리를 도운 샤르트르를 반역죄로 기소하자는 의견에 드골이 ‘놔 둬, 그도 프랑스잖아.’라는 것을 인용하며, 교묘하게 드골과 샤르트르 포함 그 모든 프랑스인들의 만세를 외칩니다.
실제 삶에서의 외눈은 상하좌우를 다 보는데, 정신의 외눈박이는 그저 한 측면만을 봅니다. 홍세화는 정신의 외눈박이입니다.
골방에서 혼자 외눈박이를 하던 두눈박이를 하던 상관할 바가 아니나, 그는 지금 남한의 파수대 안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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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이라는 인물을 빼고 프랑스의 현대사를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드골은 “위대하지 않으면 프랑스가 아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 인물입니다. 그는 생각과 행동은 드골주의가 되어 전후 프랑스의 정치사상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현재 시라크까지 드골주의를 거부한 대통령은 지스카르 데스텡(V. Giscard d'Estaing 1926~)으로, 데스텡이 대통령 재직 시절인 1974~81년에는 드골주의자들은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데스텡의 대외정책은 드골주의를 충직하게 따랐습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한 시사점입니다. 사실 프랑스 대외정책은 좌,우, 극좌, 극우 상관없이 거의 동일한 궤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프랑스의 대외정책의 대상입니다. 이 좌표점에서 벗어나 홍세화는 자꾸 자신을 본토 프랑스인으로 착각하는데서 문제가 발생하고, 프랑스 지식계급과 언론들이 떠들고 다니는 귀에 솔깃한 이야기가, 우리 황인족들에게도 해당 사항이 있는 것처럼 홍보하고 다는 겁니다.
드골은 1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중동에서도 근무했고, 2차대전 중에는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파리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알제리에 있었습니다. 드골은 군사전략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한 사람으로 전쟁, 국가, 정치에 대한 나름의 견해가 확고한 인물입니다. 쉬운 말로 산전수전 다 겪은 아주 노련한, 교활한 정치가라는 말씀입니다.
2차대전 직후인 1945년, 인도차이나에 대한 재(再)식민지배를 통해 ‘프랑스라는 국가의 위엄’을 다시 세우려는 의도를 미국에 전합니다. 미국의 루즈벨트는 그러한 프랑스의 의도를 듣고, 나찌와 일본과 전쟁이 끝나자마자, 식민지개척을 하려는 프랑스를 경멸합니다. 루즈벨트가 양심적이여서 그 기도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독일과 일본의 저열한 점령 방식의 침공을 저지하기위한 정의로운 전쟁을 수행한다고 홍보해왔는데, 그런 ‘원시적이고 노골적인’ 식민지 점령정책은 명분이 부족하고, 아주 수준이하의 하책(下策)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또한 미국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 먼저 포크질 하려는 프랑스가 괘씸했던 것입니다. 루즈벨트는 사망할 때 절대로 프랑스의 요구를 들어주면 안된다는 비망록까지 남겨 후임자에게 전달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물레방아 편에서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드골은 인도차이나 재점령에 미국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소련 편에 붙겠다는 협박을 했고,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유훈(?)을 깡그리 무시하고, 미군 수송기로 프랑스군을 인도차이나로 수송시켜줍니다.
프랑스 새퀴들이 동남아시아에서만 재점령을 획책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에서 전후에도 계속 식민지배를 추구했습니다.
1940~3년까지 영국의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프랑스내의 저항운동을 지원하고 고무(鼓舞)하는 활동을 하다가, 마그레브지역(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3개국 영역의 총칭 :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에서 연합국의 승전이 확실해지자, 1943년 알제리로 와서 프랑스로의 ‘잘 연출된’ 귀환을 위해 ‘자유 프랑스 위원회’를 옮겨와 머물게 됩니다.
나찌가 프랑스를 점령하는 것은 인류와 정의 그리고 ‘신(神)’의 질서에 반(反)하는 것이고,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하고 있는 것은 인류와 정의, 신의 질서 합치되는 것입니까? 알제리 땅에서 드골이 프랑스해방을 외치고 있는 그 꼴은, 인류 사상 가장 머저리 꼴통 같은 짓이며, 가장 뻔뻔하고 치졸한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 드골과 프랑스인들은 알제리를 해외영토부가 아닌 내무부가 관할하도록 하여, 알제리는 식민지영토가 아닌 그냥 ‘원래 프랑스땅’이라고 주장하려 하였습니다!
하여간 2차 대전이 마무리에 들어서자 알제리인들도 추축국보다 연합국의 승전을 위해 애쓴 까닭에 유럽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독립의 꿈에 부풀게 됩니다.
1945년 5월 독일의 패망되자,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알제리인들의 대규모 평화시위를 벌이자, 황당하게도 프랑스군이 습격하여 알제리인들을 살상합니다. 그러자 여기에 분노한 알제리의 20여개 도시에서 광범위한 민족해방을 위한 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프랑스인들의 특유의 웃으면서 즐기면서 벌이는 살인광난극이 벌어집니다.
이 때 학살된 알제리 민중들이 무려 약 45,000명입니다!
이어 동아프리카의 프랑스의 핵심 식민지로 마다가스카르섬(한반도의 2.5배 면적에 인구는 1,700백만인 거대한 섬)에서, 1947년 3월 반제국주의 무장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러자 '똘레랑스 옷을 입은 프랑스인'들이 ‘토인’사냥을 합니다. 전투기를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작전을 시도합니다.
여기서 학살된 마다가스카르 민중들은 무려 약 89,000명!
반면 사망한 유럽인은 550명(군인 350명 포함)에 불과했습니다.
1955년 8월 모로코의 독립투쟁에는 유럽의 나토군 소속의 프랑스군을 나토의 묵인아래 동원하여 진압을 시도합니다. 이 나토군을 튀니지, 알제리까지 계속 투입합니다.
나토는 유럽의 연합군입니다. 결국 유럽 백인 국가들이 2차대전 후에도 식민전쟁의 당위성과 합법성에 동의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냉전 이라는 것도 백인들의 주도권싸움에 지나지 않으며, 냉전을 이용하여 백인들의 전지구적인 패권을 확장한 것입니다. 나토군이 이러한 식민지배를 위한 더러운 전쟁에 차출된 것에 어떤 공식적인 역사책에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에서의 반제독립운동과 함께 서아프리카에서는 영국 지배하의 가나는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 1909~1972)’를 필두로 하여 가봉, 카메룬, 콩고 등의 주요한 반제민족해방 인사들이 영국과 프랑스로 부터의 식민지해방을 위해 다양한 교류와 연대가 행해집니다.
프랑스는 직접적인 군사개입과 교묘한 내분 유도, 원조를 통한 민사작전, 주요 지도부의 포섭과 회유 등 미국의 씨아이에이(CIA)와 국무부가 보여준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의 비밀작전을, 한 10년 앞서서 프랑스가 1945년부터 1960년대에 모두 보여줍니다.
최근 전남의 진도만한 크기의 “마요뜨(Mayotte 375km2 20만명)”는 아프리카 동남쪽 인도양에 있는 섬으로 2005년에만 2,000억원을 원조하여, 자신들의 주요한 군사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회교도들이 대다수인 이 섬나라를 인도양을 관리하는 군사거점으로 이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요뜨에게 프랑스영(領)으로 있는 조건으로 마요뜨의 국방은 프랑스에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이 인도양에서의 군사거점은 레위니옹(Reunion 2,500km2 78만명)이었습니다. 마다가스카르섬의 동쪽 인도양에 위치한 섬으로 현재까지 프랑스의 해외영토[海外州 oversea territory : 이 해외주는 프랑스 지방행정조직 명칭임. 현재 해외주는 4개임]로 남아있습니다. 이 섬이 인도양을 총괄하는 프랑스 해군사령부가 들어있던 곳입니다. 이 레위니옹과 연결한 새로운 군사기지를 위한 예비용 기지로 마요뜨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레위니옹에는 아프리카 노예를 데려다가 설탕농장을 위해 써 먹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인도차이나와 인도 등에서 아시아인들을 저임금으로 들여와 농장을 운영하던 섬이었습니다. 이런 흑인노예 출신과 아시인, 원주민들의 반란을 억누르기 위해 당연히 강력한 ‘총칼’의 힘을 갖추어야 이러한 식민지 농업을 수행할 수 있으므로, 무역과 경제는 모두 ‘총구’의 힘이 그 밑바탕에 없으면 사상누각임을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레위니옹의 프랑스 해군기지에 늘어선 초계정과 프리킷함들
태평양쪽으로 호주 북동쪽, 남한의 중상류층들이 가는 비싼 여행지로 인기 있는 열대 섬으로, 누벨(뉴)칼레도니아(Nouvelle Caledonie ; New Caledonia 18,000km2 21만명)라는 아주 큰 섬이 있는데, 이 섬에서는 2006년까지 독립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프랑스는 원조와 분열, 그리고 회유를 통해 굳건히 이 섬을 자신들의 주요한 해군 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 프랑스 해군 소속으로 누벨칼레도니아를 모항(母港)으로 하는 플로레알(Floreal)급 프리킷함인 방데메르(Vendermaire F734 : 만재톤수 2,950t, 승조원 80명)호가 뉴칼레도니아 정박중
다시 돌아가서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가 중심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이 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나자, 이 때 호응하여 반제민족해방 운동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콩고(현 콩고민주공화국)의 루뭄바(P.H. Lumumba 1925~1961)로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정당인 콩고민족운동(MNC)를 결성하여, 1960년 5월 총선거에서 승리하여 1960년 6월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면서 초대총리가 됩니다. 벨기에는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데, 이 콩고에 짝 둘러붙어 ‘고혈’을 아주 쪽쪽 빤 악질적인 흡혈귀였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 벨기에의 국가 수입의 절반을 콩고에서만 벌어들였습니다. 역사상 이렇게 지저분하면서도 극악스런 식민지배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벨기에의 식민지배는 1839년 유럽 각국으로부터 영세중립국임을 승인받았음에도, 식민지배에 나서는 아주 뻔뻔함을 보임입니다. 이 식민지배도 국가에 의한 지배가 아닌, 국왕 레오폴트의 ‘사적(私的) 영유지로써의 콩고’라는 정말 골때리는 방식으로 식민지배에 나섭니다.
각설하고, 미국의 아이젠하워가 공산주의 견제를 위해 제거를 지시하고(최근에 비밀문서 해제를 통해 알려짐), 벨기에와 유럽정보기관의 협력과 여기에 결정적으로 콩고에 주둔중이던 유엔(UN)군의 합동비밀작전으로 루뭄바는 콩고군 대령이었던 모부투(Mobutu Sese Seko 1930~97)에 체포되어 감금되었다가 탈출을 시도하나 실패하여 결국 1961년 1월 총살형을 당합니다.
* 루뭄바 ** 1960. 12. 04. 붙잡힌 루뭄바
이러한 루뭄바의 감금과 처형에 따른 콩고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순진하게 뛰어들었던 유엔사무총장 함마르셸드(Dag H. A. C. Hammarskjold 1905~1961, 스웨덴인)는 그해 9월 콩고로 가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비참하게 사망합니다.
* 함마르셸드 ** 함마르셸드와 루뭄바
루뭄바의 좌절은 아프리카의 제국주의 ‘찬란한’ 승리의 기록입니다. 까불면 현역총리도 사살하는 것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도 표면적으로 벨기에라는 조그만 나라도 아프리카 국가 한 두개를 박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루뭄바의 비극은 그가 현역 총리이고, 또한 아프리카 민족주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반제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역사책에 한 줄 기록도 없이 소리소문 없이 살해되거나, 제거되었습니다.
루뭄바보다 먼저 가나의 은크루마와 협력하여 아프리카 민족운동을 이끌던 사람은 카메룬의 ‘루벵 움 은요베(Ruben Um Nyobe 1913~58)’입니다. 은요베는 1948년 카메룬인민동맹(UPC)를 결성하여 독립투쟁에 나섰다가, 1958년 9월 13일 프랑스군에 의해 카메룬의 붐녜벨지역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 유일하게 알려진 루벵 움 은요베의 사진.
1956년에서 1958년 사이에 마르크스를 신봉하면서 민족해방을 나서던 은요베를, 카메룬 민족내부의 반역자인 아히조(아래 설명)가 샤를르 드골에게 비밀리에 협력을 요청하여, 프랑스군과 아히조는 협공을 가해, 은요베의 카메룬인민동맹(UPC)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과 포로와 협조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합니다.
이 때 파괴된 마을이 160개, 학살된 카메룬 민중만 40,000명(프랑스 헬기조종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 보다 10배가 넘는 400,000명이 학살당했다 함)
은요베가 살해당하면서 가혹한 프랑스군의 교묘한 와해작전이 계속되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카메룬인민동맹은 와해직전까지 몰립니다. 카메룬인민동맹은 정상적인 정당활동을 통해 카메룬의 독립을 추구하나 프랑스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은요베가 프랑스군에 제거되자 카메룬인민동맹의 당수가 된 펠릭스-롤랑 무미에(Felix-Roland Moumie ?~1960)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스위스로 도피를 합니다.
********* 아무리 인터넷을 헤매어도 무미에의 사진은 없군요.
흑인 무미에는 외롭고, 힘든 스위스 생활을 하던 중에, 프랑스계 스위스인이던 윌리암 벡텔(William Bechtel)이라고 알려진 친절한 사람과 알게 됩니다. 어느날 벡텔이 이 외로운 흑인을 저녁식사에 초대합니다. 무미에는 기쁜 마음에 응하게 됩니다. 여러 요리가 나오고, 포도주와 파스티스(pastis)라는 감초에 아나스열매로 빚은 술을 서로 나누어 마십니다.
*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유럽인들에게는 친숙한 과일주 ‘파스티스(pastis)’- 어떤 것은 알콜도수가 40%일 정도로 높다.
그런데 이 포도주 잔과 파스티스 잔에는 독약이 잔뜩 섞여있었습니다. 식사후에 무미에는 갑작스럽게 돌연사합니다.
사용된 독약의 주성분은 ‘탈륨(thalium)’으로 쥐약(살충제)의 주성분...
아하하하!
프랑스의 똘레랑스란 흑인에게 쥐약을 혼합한 음식을 나누어주는 방식입니다! - 삼가 카메룬 열사에게 명복을 빕니다......
그후 무미에의 시신처리와 매장지 기타 자료가 없는 현재 전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윌리엄 벡텔은 프랑스 정보요원이었습니다.
무미에가 암살당한 장소가 중립국인 스위스의 제네바입니다.
중립국이라는 것도 다 흰소리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중립국 혹은 힘센 놈에게 붙겠다는 기회주의 쪽재비국이 중립국이라는 가면으로 나타납니다. 중립국들이 미국 씨아이에이(CIA)와 협력하여 전후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나토군에 적극 협력하여 비밀군사작전을 벌인 것이 1990년대 이후 서서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작전 글라디오(Operation Gladio)"로 이탈리에서 처음으로 폭로되어 세상에 조금 알려집니다. 단순히 비밀군사작전이 아니라 유럽국가내에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의 분야를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현지인 비밀조직”을 건설한 것입니다. 문제점은 이 비밀조직의 구성원들이 국가의 공식적인 권한과 정보를 가진 인물들로 채워졌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암살과 테러를 함께 할 사설군사조직까지 뒤에 가지고 있고, 각종 장비와 해외정보를 미국 정보기관에게 제공받기 하는 점입니다.
‘작전 글라디오’를 통해서, 유럽 동유럽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의 민주적 통제에서 벗어난 음모의 지배자들이 해당 국가에 각각 포진하여 국가전략을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이 충격적입니다.
미국 씨아이에이(CIA)에서 명명한 ‘후방잔류(stay-behind)’작전을 통해 각국에 조직화한 준군사정치조직의 해당 국가별 암호명 중에, 자칭타칭 ‘중립국’이라고 씨부렁거리는 국가들의 암호명을 살펴보면, 스위스 쪽은 피26(P26), 오스트리아는 오더블유에스지브이(OWSGV), 스웨덴은 에이지에이지(AGAG), 룩셈부르크는 그냥 스테이비하인드(Stay-Behind), 벨기에는 스드라8(SDRA8), 핀란드는 그 암호명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프랑스정보부와 스위스의 비밀조직간의 은밀한 협조아래 무니에는 쥐약으로 분사(憤死)를 했습니다. 이 무니에의 사망에는 미국과 유럽들의 모든 정보기관의 긴밀한 협조아래 이루어진 암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암살을 지시한 사람(자끄 포까르, 아래서 설명)을 보면, 프랑스가 말하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아름다운 구호 속에 숨은 살육과 음모, 배신과 잔인이 뒤섞인 프랑스의 본모습과 만나게 됩니다.
“식민주의 파쑈 프랑스의 드골 정권” 하에 이루어진 아프리카에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한 것을 살펴보면,(마그레브 지역 제외)
1960 콩고
1960~1 카메룬
1960 차드
1961 모리타니
1962 가봉 - 여기에는 프랑스 공수부대를 낙하시킴
1963 다시 차드에 프랑스군 투입
1963 니제르
1968 다시 차드에 또 투입
1968 나이지리아 - 미국과 영국 영역인데도 투입하여 세계를 놀라게 함
여기서 니제르와 가봉은 프랑스에 우라늄을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국가로, 프랑스에게는 사활적 이익이 달린 국가입니다. 프랑스는 1970년 중반이후 우라늄이 고갈되어, 80년대 중반에는 완전 고갈되었습니다.
차드와 나이지리아는 유전지대가 있는 곳입니다.
서아프리카는 황금해안, 노예해안, 상아해안 등의 명칭이 줄줄이 이어진 자원의 18세기부터 자원의 보고로 유럽의 화수분 역할을 한 지역입니다. 세계 5위의 우라늄 매장국가인 니제르는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이후의 정치사를 보면 누더기에 가깝습니다. 조용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서아프리카 국가 대다수가 마찬가지입니다.
서아프리카의 정치를 엿같이 만든 것은 흑인들 스스로의 무능력과 업보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힘과 정보, 지식, 조직력, 쪽수(多數)로 무장한 유럽의 전략가들의 작전에 의한 것입니다.
여기서 무미에의 독살을 포함하여 이러한 아프리카와 그외 해외영토에서의 쿠데타와 내전, 분열, 암살, 뇌물공작, 자원 약탈, 토지수탈, 기아, 인종청소 등의 씨앗을 뿌리는 프랑스의 신제국주의라는 탱크를 조종한 사람이 바로 ‘프랑스와 아프리카 관계의 아버지(the father of France-African relations)’로 일컬어지는 자끄 포까르(Jacques Koch-Foccart 1913~97)입니다.
* 유일하게 알려진 자끄 포까르 사진.
이 자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고급의 지식인과 언론인, 정치인들은 다 알고 있지만, 가능한 한 이 사람의 생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거나 공개적으로 포까르의 생애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포까르의 사망 때 미국의 보수계열에서 부고 기사가 나왔습니다.[국가이익(National Interest), 1997, 가을호 “신식민주의(Francafrique)를 이끌던 사나이 - 샤를르 드골의 지도하의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프랑스 정치인 자끄 포까르의 역할 - 부고기사”
http://www.findarticles.com/p/articles/mi_m2751/is_n49/ai_20319603 ]
자끄 포까르는 콜럼버스가 인도로 착각하여 상륙하여 서인도라고 이름이 붙은 중앙아메리카의 캐라비안 해안의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인 과들루프(Guadeloupe : 프랑스의 해외주)에서, 백인농장주였던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학력은 알려지지 않았고, 처음에는 알제리에서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2차대전 중이던 1942년부터는 드골을 대리하여, 프랑스 본토의 북서부에 있는 마옌느(Mayenne)에서 레지스탕스활동을 했습니다. 이때의 경력으로 프랑스 제4공화국(1946~58)사이 동안 프랑스인민전선(RPF)의 사무총장을 엮임할 수 있었습니다.
1952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업무를 맡기 시작했는데, 1953년 코트디브와르의 우푸에부아니와 친교를 맺게 되면서 아프리카 공작에 깊게 발을 담그게 됩니다. 공식적으로 1960~74년까지 해외식민지 총괄책임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서는 1986년 다시 당시 총리이던 시라크의 해외식민지문제의 고문(adviser)으로 역사에 등장했고, 시라크가 대통령이 된 1995년에는 또다시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으로 81세임에도 출근을 했습니다. 1997년 3월 사망하던 주에도 자이레 관한 문제로 아프리카 인사와 통화를 했습니다.
사실상 2차대전 후의 50년간의 모든 해외식민지 문제를 주무른 진정한 실세였습니다. 샤를르 드골, 퐁피두, 미테랑, 현역 대통령 시라크 등 좌우파를 상관없이 항상 아프리카문제는 이 포까르가 결정했던 것입니다. 오직 지스카르 데스텡(V. Giscard d'Estaing 1926~)이 대통령 재직 시절인 1974~81년 사이에만 공식적으로 무직이었습니다. 그의 자리를 물려받은 자는 르네 주르니악(Rene Journiac).
그런데 무직이던 와중에도 웃기게도 프랑스 정보국이 벌인 대규모의 공작을 주도합니다. 1977년 서아프리카의 베냉(Benin)의 사회주의 정권 전복을 위해 프랑스 용병을 투입했다가 실패한 작전과, 1979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카사(E.A. Bokassa 1921~96)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동국가의 수도 방기에 주둔하고 있던 1,300명의 프랑스군과 공수부대를 대거 투입하여, 리비아로 원조요청하기 위해 여행중이었던 보카사를 축출하는데 성공합니다. 암호명 ‘작전 바라쿠다(Barracuda)’.
‘팽’당한 보카사는 세네갈의 프랑스 생루이군관학교 졸업하고, 프랑스군으로 인도차이나 전투에도 참전한 흑인이었는데, 부인중에는 베트남 여자도 있었습니다. 인육을 즐겨 먹었다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니는 아프리카 최악의 폭군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프랑스가 진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인민을 위해 폭군을 몰아낸 것일까요?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은 면적이 623,000km2 으로 한반도의 3배인데, 인구는 고작 300백만명입니다. 지금도 여기에는 1,500명의 프랑스군이 진주하고 있는데, 이 나라에는 우라늄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최고급 목재가 생산되는 아프리카 내륙의 최고 요지입니다. 보카사가 팽당한 후 들어선 인물은 공인된 프랑스 꼭두각시 다빗 닥코(David Dacko 1924~)로 아주 철저한 반민족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도 쿠데타로 내쫓졌지만, 프랑스군은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여기에 눌러 있습니다.
* 보카사가 황금독수리 앞에 황제모습으로 앉아있다. ** 다빗 닥코
코트디브와르는 한반도 면적의 1.5배에 인구도 1,700만명이나 되는, 상아해안에 있는 아프리카에서는 꽤 큰 나라로, 펠릭스 우푸에부아니(Felix Houphouet-Boigny 1903~95)는 이곳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무려 33년(1960~93)간 머문 인물로, 아프리카에서 반공사상을 내세우면서, 철저히 프랑스 앞잡이를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 (우측)펠릭스 우푸에부아니(1960~93)
포까르는 1960, 70년대의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프랑스의 유혈, 무혈 작전을 위해 늘 우푸에부아니와 협의를 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포까르-우푸에부아니 협력체계’가 우푸에부아니의 사망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1994년 우푸에부아니가 사망하자, 그의 고향인 야무수크로(Yamoussoukro : 코트디브와르의 행정수도)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당시 대통령 미테랑을 물론이고, 사회당 주요인사와 드골당파의 지도자 모두 참석했고, 전(前) 대통령 지스카르 데스텡은 아예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기를 전세 내어 코트디브와르에 전부 모입니다.
* 우푸에부아니가 자신의 고향 야무수크로(Yamoussoukro)에 세운 성당 ‘바실리카’로, 1985~9년 사이에 프랑스의 노테르담성당을 본 따 지은 300만불짜리 교회(정식명칭 Basilica of Our Lady of Peace of Yamoussoukro)
** 남루해 보이는 인민들과 시장통 사이로 멀리 바실리카성당이 보인다.
전후 프랑스의 서아프리카에 대한 신식민지 개량화 정책을 ‘매우 성공적 성과’을 올리도록, 다시 말해 포까르가 그렇게 오랫동안 아프리카 문제의 실권을 가질 수 있도록 협력한 인물로 바로 우푸에부아니와 독살당한 무니에의 조국인 카메룬의 아마두 아히조(Ahmadou Ahidjo 1924~1989)입니다.
* 아마두 아히조(1924~89)
프랑스 해외주에게는 하원과 상원에 각각 1~5명의 의원을 보낼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보통 식민지의 최고지배층(추장)이 당연히 가게 되고, 이들이 친불인사가 되어 조국을 프랑스에 적극적을 팔아먹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위에서 잠깐 설명 드린 레위니옹이란 섬에서는 프랑스 의회에 5명, 상원에는 3명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히조는 1955년(카메룬 독립 전임. 독립은 1960년)는 프랑스연합의회 의원 겸 카메룬 부총리로 임명되었고, 1958년 총리, 이러다 프랑스령의 카메룬지역 독립되자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영국령의 카메룬지역과 연방국이 되어 지금 카메룬이 되는 1961년에는 초대연방대통령이 되어 이어 1982년까지 계속 대통령을 해먹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적극적으로 내부의 첩자가 되어 서아프리카의 모든 정보와 전략을 포까르와 상의하여 진행하니, 서아프리카 민족민주세력은 백전백패일 수 밖에 없습니다.
프랑스는 17세기인 1633년에 ‘세네갈회사’라는 노예무역 회사를 차리고, 모리타니, 세네갈, 기니,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베냉 그리고 우푸에부아니의 코트디부아르 이렇게 8개국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방(French West Africa)으로 통합하여 관리하였습니다. 이 식민 지배가 무려 430년 넘게 이어져, 8개국들이 1960년대에 되어서야 형식적으로나마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 세네갈 북서부에 있는 항구인 생루이(Saint-Louis)로 프랑스가 1658년 건설했으며, 서아프리카에서 잡은 흑인들을 유럽과 남북아메리카, 다마카스카르 등지로 수출하던 프랑스인들의 전초기지 겸 수출항을 했던 곳으로 서아프카에서 가장 번성한 항구 중에 하나였음. 무정한 바다물결이 흑인들이 흘린 피를 아는지모르지.......
** 다카르랠리(Dakar Rally)는 1978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파리(최근은 리스본)에서 세네갈의 다카르까지 이어지는 6~7,000km의 아프리카 종주 자동차 경주로, 프랑스의 유명한 운동경기 전문흥행회사인 아모리스포츠조직(Amaury Sport Organisation)에서 운영하고 있는 경기이고, 이 경기의 입안자도 프랑스인(티에르 사빈느 : Thierry Sabine 1949~1986)입니다. 왜놈들이 부산에서 중국의 난징까지 자동차경주를 하도록 허용하면, 남한에 1조원, 중국에 2조원을 주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허용해야 할까요? 왜놈들이 부산에서 남경까지 자신의 옛식민지의 극과 극을 달려보고자 하는 야욕을, 돈에 눈이 멀어 해야할까요?
사람은 굶어죽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새퀴들이 이 다카르랠리를 하는 것은 뻔한 의도가 있는 겁니다. 원래 다카르랠리의 명칭은 “파리 다카르 랠리(The Paris Dakar Rally)”였습니다. 규모가 국제적으로 노는 스포츠는 신제국주의 첨병 역할을 합니다.
다카르(Dakar)는 세네갈의 수도로, 1659년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1902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방8개국’의 전체 수도로 지정되었습니다. 여기에 바로 파스퇴르연구소도 들어섰고, 아직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생태제국주의(Ecological Imperialism)의 첨병이 바로 파스퇴르연구소입니다.
이 8개국에 바로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가 있고, 이 나라에 우푸에부아니가 있는 겁니다. 코트디부아르는 그저 축구선수 드록바의 조국으로만 널리 알려져 있지요.
우푸에부아니가 죽은 후 코트디부아르에는 친불과 반불세력 사이에서 갈등이 폭발하게 되자, 프랑스는 여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직접적으로 코트디부아르 문제에 개입합니다. 2004년 초에 반불세력에 의한 프랑스군 기지에 대한 포격으로 프랑스군 9명과 미국인 1명이 숨지자, 프랑스는 재빨리 코트디브와르를 유엔 안보리에 제소하여 ‘만장일치’로 제재안을 통과시킵니다.
제재내용은 우선적인 무기수출금지와 2004년 12월 15일까지 평화구축을 위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자산동결조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코트디브와르의 경제를 박살내서, 우푸에부아니 시절처럼 철저히 친불(親佛)하면 ‘따뜻한 이밥에 고깃국’을 주겠다는 것으로, 프랑스의 제국주의 짓에 도덕적, 국제법적 명분을 유엔(UN)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살인면허를 주는 거죠.
이것이 유엔의 본모습입니다.
1972년 가봉(Gabon)을, 당시 프랑스 대통령 “조르쥬-쟝-레이몽 퐁피두(Pompidou 1911~74)”가 공식 방문했을 때, 자끄 포까르가 수행했습니다. 기자회견 때 용감한 가봉기자가 퐁피두에게 물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모든 쿠데타의 배후에 프랑스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대통령 각하?”
퐁피두는 아주 크게 웃고나서, “포까르 선생에게 묻는 편이 좋겠는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자끄 포까르는 퐁피두 뒤에 서 있었습니다.
프랑스 근대적 정보기관은 출발은 ‘방첩과 국외문헌조사국(SDECE : The Service de Documentation Exterieure et de Contre-Espionnage)’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이 기관은 1944년 11월 6일으로 창설되었습니다. 미테랑대통령 시절인 1982년 이 기관을 ‘해외안보총국(DGSE : The Direction Generale de la Securite Exterieure)으로’ 개명하였습니다.
‘방첩과 국외문헌조사국’은 프랑스의 ‘제11 기습공수여단’ 병력을 주축으로 처음 창설되었는데, 이 공수여단은 바로 알제리에서 알제리민중에 대한 고문과 살인을 주로 하던 최악의 특수부대였습니다. 드골이 알제리 독립을 결정하자, 드골의 암살을 하려던 세력들이 이들이었고, 결국 이들은 쿠데타를 하려고 하다 실패합니다.
이 공수여단은 ‘알제리는 프랑스다!’라는 표어로 더러운 전쟁을 수행했으며, 본토의 결정도 거부할 만큼 식민주의 정신에 충실한 놈들이었습니다. 최근 프랑스 대선에 또 출마한 프랑스 백인만세주의자인 극우파 ‘장 마리 르펜(Jean-Marie Le Pen 1928~)’은 인도차이나에 참전하여 디비엔푸전투에도 참가했으며, 알제리전쟁 당시 정보기관 요원(그래서 어떤 문헌에는 공수부대출신으로 기록함)으로 활약하면서, 악질적인 고문을 자행했습니다.(르펜은 고문을 자행한 것을 부인했으나, 알제리 전쟁 당시 고문이 사용된 것은 인정합니다.)
이 정보기관을 창설을 주도한 자가 바로 자끄 포까르입니다. 드골에 대한 반역으로 나아갈 때, 포까르는 드골 편에 서 있었고, 드골에게 반역했음에도 이 기관이 프랑스의 비밀스런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을 계속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줍니다.
자끄 포까르가 이 정보기관을 통해 아프리카를 가지고 놀 때, 마그레브(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아랍, 인도와 그 주변국, 그리고 남북한까지 가지고 놀던 인물은 바로 프랑스와 드그로수브르(Francois de Grossouvre 1918~94)입니다.
프랑스의 좋은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은행가였던 아버지가, 거주지이자 사망지가 레바논의 베이루트인 관계로 이 레바논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주요 공작거점으로 활용합니다.
그는 카톨릭 중 예수교 소속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외과의사가 되었으나, 2차대전이 벌어지자,스키부대에 가입하여 레지스탕스를 전개합니다. 여기서의 군사작전을 벌이며 쌓은 인맥이, 전후에 위에서 미리 말씀드린 반공세력 비밀 규합 공작인 ‘작전 글라디오’의 프랑스쪽 조직을 건설하는데 이용됩니다.
프랑스 리옹지방을 중심으로 조직된 ‘무지개(Arc-en-ciel)’ 조직의 두목이 됩니다.(암호명은 르둑크씨:Monsiur Leduc).
이어 1950년에 위의 ‘방첩과 국외문헌조사국(SDECE)’의 요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의 태생이 부유한 귀족인 까닭에 비밀요원활동 보다는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을 했는데, 그것은 장인의 기업을 운영하고, 자신이 직접 여러 언론사를 창업하는 등의 행보를 보입니다.
코카콜라의 프랑스 배급 및 생산권을 얻었고, 큰 설탕회사, 그리고 유명한 시사잡지인 렉스프레스(L'Express)를 공동창업하기도 합니다. 1952~67년 사이에는 프랑스의 대외무역에 관한 고문으로 활동했습니다.
1959년 중국여행 때 미테랑과 친하게 된 후 1965년부터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한 미테랑의 모든 선거운동을 그가 주도합니다. 선거운동의 재원 마련은 그가 아랍과의 무기거래 및 각종 이권거래를 통해 얻은 것으로 충당합니다.
1981~95년까지 미테랑(Mitterrand 1916~96)은 대통령을 해 먹었는데, 선거운동 전체는 드그로수브르가 했고, 포까르와 협력하여 비밀스런 대외정책도 모두 맡아했습니다. 1985년 6월, 프랑스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에서 열린 비밀회의에는 국방장관 샤를르 아르누(Charles Hernu), 라코스테(Lacoste) 제독 그리고 드그로수브르가 모였습니다.
그 회합 후 다음 달인 1985년 7월 뉴질랜드 오크랜드강에서 프랑스의 핵실험을 방해하려는 그린피스의 배(무지개 전사 : Rainbow Warrior)가 폭파되어, 사진기자 한명이 사망합니다.
이 사건이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키자 드그로수브르는 수면하로 잠수하여, 보이지 않게 엘리제궁의 실권을 계속 장악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미테랑의 선거운동 자금과 관련하여 주식내부거래혐의 조사가 확대되던 와중인 3월 7일, 드그로수브르는 대통령궁 내의 자신의 사무실에서 권총으로 머리에 두발을 쏘아 자살합니다.
* 2006년 11월에 발간된 프레데?? 로랑(Laurent Frederic)의 ‘검은 캐비넷 : 미테랑의 대통령궁의 핵심부에 있던 그로수브르와 더불어(Le cabinet noir : avec Francois de Grossouvre au coeur de l'elysee de Mitterrand)’란 책의 표지에 실린 뒤의 남자가 드그로수브르(앞은 미테랑)입니다. 대통령궁에 집무실 있을 정도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활동했음에도 프랑스 인터넷에서도 그의 사진자료는 전무하고, 이 책에 보이는 것이 유일합니다. 그의 부고 기사에도 사진을 싣고 있지 않았습니다.
‘검은 캐비넷’이란 뜻은 옛날 편지를 검열하던 비밀 공간을 의미하며, 아마 미테랑에게 들어가는 모든 정보를 드그로수브르가 임의로 취사선택했음을 의미하는 듯 합니다.
작전 글라디오의 주요한 핵심 관계자이자, 전후 프랑스 대외관계사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드그로수브르는 그렇게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프랑스가 더러운 공작이 냉전시절만의 부산물이 아닙니다.
드그로수브르가 사망한 날을 기점으로 냉전 종식 후 가장 끔찍한 대량학살로 기록되는 ‘르완다 대학살’을 추적하면, 프랑스의 더러운 본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르완다 부족구성비 : 투치족(Tutsi 14%), 후투족(Hutu 85%)
1962 벨기에의 위임통치 종료. 벨기에는 소수부족인 투치족 우대
1963 투치족 20,000명이 후투족에게 학살됨
1973 후투족의 하뱌리마나(J. Habyarimana) 육군소장 쿠테타 성공
1975 하뱌리마나 일당독재 정부 구축
1990 주변국에서 난민화된 투치족은 '르완다애국전선(RPF)' 결성
1993. 07. 유엔과 아프리카단결기구(OAU)의 중재로 양 부족 평화협정 체결
1993. 10. 유엔의 평화유지군 2,500명 파견
1994. 01. 하뱌리마나 대통령 같은 후투족 출신 인사를 총리 선임.
르완다애국전선은 이에 반발 과도정부 참여 거부
1994. 03. 07. 드그로수브르 자살
1994. 04. 06. 하뱌리마나 대통령 전용기 추락하여 사망
1994. 04. 07.이후 하뱌리마나 대통령 경호원 중심의 후투족 강경파가
후퇴를 하면서 100일 동안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을
포함하여 800,000여명을 살해함.
1994. 07. 18. 투치족인 ‘르완다애국전선’이 전국 장악
1994 .07. 23. 신 르완다 정부 출범. 현재까지 계속 정권 장악.
하뱌리마나(J. Habyarimana 1937~94) 르완다 대통령의 전용기 추락 사망은 아직도 역사의 미궁에 빠져있는데, 이 전용기는 미테랑이 기증한 것입니다. 최근 씨아이에이(CIA)가 전용기 추락과 연관이 있다는 설에 대해 공식으로 부인했습니다.
* 하뱌리마나 ** 추락한 ‘팔콘9’ 전용기 잔해
하뱌리마나는 쿠테타에 성공하여, 소수부족이면서도 르완다에서 지배계급을 형성했던 투치족을 몰아내고, 후투족 일당독재를 구축한 인물인데, 그에 반발하여 투치족이 르완다의 국경근처에서 ‘르완다애국전선’을 결성하여, 무장투쟁이 본격화되자, 평화적으로 이 문제를 풀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강경파를 제어하면서, 투치족과 연립정부 수립을 위해 어렵게 양보를 하여, 외세에 의한 분열과 갈등의 고리를 풀려고 시도합니다. 여기에 투치족도 비교적 적극 협렵하여, 아프리카정치사에 새 장을 여는 중재안과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바야흐로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르완다가 출범하려는 시점에서 하뱌리마나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합니다. 바로 그 다음날 투치족의 소행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지고, 대통령 경호실의 무장병력과 강경 후투족들이, 투치족 출신의 총리와 각료 3인을 즉각 살해하고, 이어 평화유지군 11명도 살해합니다. 이어 투치족을 닥치는데로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수도 키갈리 외곽에 진주하던 르완다애국전선이, 투치족에 대한 학살을 막기 위해 수도 진격하게 되고, 정부군과 교전을 벌어져 3일 동안 2만명이 사망합니다. 애국전선에 밀린 정부군은 프랑스군이 있는 서쪽으로 달아나면서,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는데, 황당하게도 투치족과 평화협정을 원했던, 같은 부족 온건파들도 마구자비로 학살합니다. 이들의 100일에 걸친 후퇴길에 살해한 사람 최대 80만명이 될 것으로 기록됩니다.
* 르완다 대학살
수도 입성에 성공하고, 새 정부를 세운 소수부족 투치족은 보복적인 살인을 자제하고, 정국 안정을 꾀하나, 신정부의 보복을 우려한 후투족은 주변국으로 피난가면서 르완다는 회복할 수 없는 만신창이가 됩니다.
프랑스는 옛후투족 정부인사들과 난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르완다 서남부에 꽈리를 틀었다가, 여기서도 후투족에 의한 대학살이 일어나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이 후투족의 학살에 프랑스군이 방조와 조력을 제공했다는 것이 최근 영국 비비씨(BBC)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 http://news.bbc.co.uk/2/hi/africa/6079428.stm : 2006. 10. 24.기사
100일 동안의 인류 최악의 학살극의 벌어지던 상황에서, 르완다 서남부에 후투족 살인마와 후투족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군이 유엔의 위임을 받아 안전지대를 설정하고, 관리 감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후투족이 투치족의 캠프에 들어가 집단학살을 자행합니다. 이 안전지대를 만드는 작전이 바로 ‘작전 터키석(Operation Turquoise)’이었습니다.
드그로수브르가 자살했다고 보도가 되자, 제일 강력하게 ‘자살’이 아니라, ‘살해’되었다고 주장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뽈 바릴(Paul Barril 1947~)로, 1994년 당시에 르완다에 들어가 공작을 벌이던 프랑스 특수요원이었습니다. 프랑스가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테러진압 특수부대로, 남한 경찰특공대도 가서 연수를 받을 만큼 세계 최정예 부대로 일컫어지는 “프랑스 국가헌병대, 지젠느(GIGN : groupement d'intervention de la gendarmerie nationale)”의 부(副)대장 출신으로 대장 프루토와 지젠느를 창설하고, 휘하 요원을 훈련시킨 지젠느의 산증인입니다.
* 뽈 바릴(1947~). 선글라스는 지젠느 창설 당시 대장 끄리스티앙 프루토(Christian Prouteau)
뽈 바릴은 1988년 지젠느을 벗어나, 코트디브와르의 우푸에부아니의 연락책 으로 활동하다가, 1989년부터는 르완다에서 하뱌리마나대통령의 자문관으로 위촉되어, 특히 르완다의 정보기관의 창설과 운영에 대한 조언과 훈련교관역을 수행했습니다.
영국 정보기관인 엠아이식스(MI6)는 바릴이 하뱌리마나 사망 직후, 경호원과 후투족 강경파를 고무하여, 대학살에 나서게 했다고 본국에 보고합니다. 일설에는 전용기 추락도 바릴의 짓이라고 보고 있으며, 투치족의 르완다애국전선에 무기도 팔아먹는, 피아와 상관없는 교묘한 공작을 통해, 르완다를 최악의 소용돌이로 빠지게 만든 핵심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바릴은 아마 드그로수브르의 명령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런 바릴이 드그로수브르의 살해를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차차 시간이 가면, 미국-프랑스-미테랑-드그로수브르-바릴로 연결된, 르완다의 책임자들이 점점 들어날겁니다.
이렇게 프랑스의 비밀 대외공작을 총책인 포까르와 드그로수브르가 1950년대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의 제국주의짓을 기획하고 집행한 ‘어둠속의 남자(l'homme de la part d'ombre)’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홍세화는 프랑스에 망명요청을 했습니다.
홍세화를 악어의 입으로 던지는 것과 에펠탑 아래 숨겨주는 것, 어느 것이 프랑스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 - 위의 어둠속의 남자들은 숙고했을 겁니다.
홍세화는 맑스주의자가 아닙니다.
홍세화는 반제국주의도 아닙니다.
이 두가지 조건을 충족했다고 숨겨줄 수 없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필요충분조건이 성립합니다.
살려두면, 언젠가 남한의 주류 지배계층으로 편입할 수 있는 신분인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홍세화는 국립서울대학 졸업자!
‘서울대학교’의 의미를 우리보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2002년 ‘무사히’ 서울로 귀환하자, 홍세화는 ‘한겨레신문’에서 신문 한 쪽 전체를 책임지는 기획위원으로 임명됩니다. 초등학교 중퇴의 구두닦이 아저씨가 프랑스에서 택시기사 하고 왔다고 한걸레신문이 지면 한쪽 전체를 내 줄까요?
Tolerance!
이 단어를 ‘톨러런스’ 읽으면......
“상식이 부족하군요, ‘똘레랑스’라고 해야죠.^^”하는 힐문이 들어옵니다. 다 홍세화 덕분입니다.
프랑스에는 똘레랑스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홍세화는 프랑스에는 똘레랑스가 있다고, 이 남한 민중 5,000만명을 속이는 거대한 사깃질을 쳐 주었습니다. 누굴 위해서? - 그 답은 회원여러분이......
홍세화를 살려 준 것은 똘레랑스가 아니라, 파리 택시기사가 남한에 오자마자 중요일간지의 ‘기획위원’이 될 수 있도록, 그 신문사의 구성원 대다수가 동문이고, 그를 핍박하거나 응원한 여론주도층이 모두 동문인 학교, 바로 그 ‘서울대’가 홍세화를 악어의 입에서 살려준 것입니다.
귀환이후 그의 행보는 대체 누구를 위한 활동입니까?
대체 누가 누구를 교양시키고, 학습시키고 있는 것입니까?
그가 부르짖는 것이 정말 그 땅에 존재했다고, 그는 진짜 믿고 있을까요?
위에서 설명드린 콩고의 루뭄바가 처형당하기 전에, 하디감옥(Camp Hardy Prison)에서 자신의 부인 ‘폴린 루뭄바(Pauline Lumumba)’에게 보낸 이승에서의 마지막 편지글을 소개하며 글을 끝맺고자 합니다. 영국 비비씨(BBC)의 다큐멘타리(2000년) 속의 편지와 다른 싸이트 편지가 그 분량에서 차이가 나는데, 비비씨를 토대로 소개합니다. http://www.raceandhistory.com/historicalviews/Lumumbascript.html
* 루뭄바 ** 루뭄바 체포 모습 *** 루뭄바의 부인 폴린(좌)의 최근 모습
여보, 이 편지를 당신이 읽게 될 때, 내가 살아 있을지 혹은 그렇지 않을지, 또한 이 편지가 당신 받을 지 혹은 언제 받을지 알 수 없음에도 이 글을 쓰고 있다오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죽었거나, 살았거나 혹은 감옥에 있던가 풀려나던가, 그것은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오. 새장으로 변모한 그곳에서 독립하려는 우리의 불쌍한 민중들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콩고요.
그곳에는 위엄도 없고, 자유도 없고, 정의도 없고, 독립도 없고, 자유인도 없소이다.
어느 날 역사는 콩고가 말하게 하리라.
“브뤼셀, 파리, 와싱턴 또는 유엔에서 식민주의자들이 가르치는 역사가 아니라, 이 땅에서 꼭두각시 지배자와 식민주의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역사.
아프리카는 스스로 자기 역사를 써야할 것이되, 그것은 영광과 위엄의 역사이리라.”
여보 내 사랑, 울지마시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당한 내 조국이 독립과 자유를 스스로 지킬 수 있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소이다!
콩고 만세! 아프리카 만세!
-- 빠트리스 루뭄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이 글은 예전에 읽었던 글인데요.. 똘레랑스라는 것 자체는 좋지만, 프랑스에 대해서 과장되게 미화 된 모습만 알고 있어서.. 호불호를 떠나서 자료차원에서 보면 좋을 것 같아서 퍼옵니다.
스크랩해갑니다. 정독해서 읽어볼게요! ^ㅡ^
좋은글감사합니다. 파리의택시운전사 그 책 읽었었는데 뭔가 혼란스럽네요...
프랑스 분명 관용적이고 좋은 사회라는 건 알지만 프란츠 파농이 "유럽의 복지와 진보는 흑인, 아랍인, 인도인, 황색 인종의 땀과 시체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요.. 사실 프랑스 핵개발하고 그러는거 보면 뭐.. 그 외에도 아프리카 대륙에서 아직도 나쁜 짓도 많이 하고..
그런데 홍세화씨를 정신적인 외눈박이 라고 하는건 좀.. 분명 프랑스도 제국주의적 성향을 가지지만 시민사회적인 모습에서는 우리가 같이 살펴보아야 할 것이 많은 곳은 맞습니다. 제국주의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다른 선진국이라고 불리우는 나라들도 다 살펴봐야겠죠. 홍세화씨가 쓴 책은 정말 일종의 에세이로 프랑스의 시민사회적 모습을 주로 다뤘죠 학술책이 아니구요.. 프랑스를 미화했다기 보다는 프랑스의 시민사회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거 같아요
전, 홍세화씨보다 박노자씨를 좋아하다가, 사민주의와 유럽철학사조 등에 회의를 느끼고 유럽주의 역사관에 대한 환상, 선진국과 근대화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찾을려고 노력을 하는데, 어렵네요.. 왜냐? 우리것도 제대로 모르면서 포장된 외국의 것부터 배워와서요.
저도 거기에 동의해요 정말 박노자씨 젤 좋아하고요.. 근데 분명 프랑스에는 노동자의 지위라던가 공공성을 중요시하는, 똘레랑스라는 사회 분위기 같이 생각해봐야할 것도 있다 뭐 그런거에요 당연히 프랑스는 우리랑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요. 무조건적으로 프랑스 따라하자 이런건 아니지만 참고할 만하고 같이 생각해볼 것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홍세화씨 요즘은 프랑스 얘기 잘 안하시는듯. 그건 프랑스에서 막 왔을 때 그 동안 출간했던 책들 얘기하면서 많이 나왔던 말 같아요 학벌 폐지 문제나 비정규직 등 우리 사회 직접적인 문제 많이 얘기하시죠
스크랩해갈게요~좋은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말머리에 공부를 달아야할 것 같아요:) 공장의불빛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더 관심있는 분들은 프란츠 파농의 책들을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추천!
잘 읽었습니다. 정말 몰랐던 사실들이 많네요. 그냥 피상적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해주니 .... 허걱 스럽습니다.
정독하려고 퍼가요~
프랑스가 말하는 자유, 평등, 박애는 오로지 프랑스 기득권층과 그들 백인만을 위한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흑인,황인종들과 타 약소국가들은 짓밟혀도 된다고 생각하죠. 프랑스를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그 모든 만행을 다 정당.합리화하고....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영국 다 그런식이죠^^ 구역질나는 백인들
그래도 지식인들과 의식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념에 대한 반성이 꾸준히 이루어지고는 있지요. 국가적 차원이든 인간 개별적 차원이든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시스템이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 어쨋건 과거를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약자의 권리권익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은 안하는 것보다는 낮죠. 어쨋건 오늘날 과거 식민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건 서유럽에서는 언론과 대중의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운 내용입니다.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한국인은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약합니다. 유럽과 미국을 보면서. 그러나 중국, 동남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가들을 깔봅니다. 우리에 대한 자부심은 결여된 채로 약한 자에 대한 오만이 팽배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진국이란 무엇인가, 개발도상국이란 무엇인가. 과연 국가의 가치 기준이 경제력을 비롯한 국력 하나 밖에 없는가 고민해보아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랑스는 물론 아름다운 나라지만, 그 아름다움의 뒷면은 개발도상국의 현실보다 더 더러울지도 모릅니다.
담아가서 정독할께요~자료 감사해요^^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요즘 아프리카역사를 좀 공부했는데 정말 가슴이 아프더군요...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 개인 카페로 가져갈게요. 요즘 소위 강대국들의 야만적인 행위에 흥미를 가지고 도서를 보고 있었는데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