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에르 드 메스트르의 '내방여행'(왼쪽)과'밤에 떠나는 내 방 여행' 책 표지.
42일의 자택연금에서 나온 책
집에만 있으니 그동안 눈길을 주지 않던 것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거실 한쪽 구석에 쌓아놓은 신문 꾸러미를 들춰보고 정리하는 것도 그런 일이다. 신문을 정리하는 데 2019년 7월29일 자 신문이 보였다. 어, 이 신문을 왜 버리지 않았지! '북 리뷰'란에서 휴가철 특집으로 읽을 만한 책들을 추천한 기사였다.
버릴까 하다가 책 제목이라도 한번 훑어보자고 하다가 그만 소제목에 눈길이 꽂혔다. '내 방 여행하는 법'. 온천 명인이라는 안소정 씨가 추천한 책이다. 어, 이 책 내가 읽었던 책과 비슷한데. 내가 읽은 책은 '내 방 여행'과 '밤에 떠나는 내 방 여행'이었다. 짤막한 기사를 후루룩 읽어보니 같은 책이었다. 새로 출간하면서 제목과 표지를 조금 바꿨을 뿐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게 2001년이다. 시대 배경은 1790년 이탈리아 토리노. 주인공인 자비에르 백작은 불법 결투를 벌인 혐의로 42일간 가택연금을 당한다. 답답하고 무료한 마음에 집안 오디세이를 한다. 판화, 구둣솔, 침대, 의자 등 갖가지 물품들에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는 책이다.
이 책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책은 아니다. '내 방 여행'은 두껍지도 않고 읽는 데 어렵지도 않다. 그러나 나한테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이다.
사연은 이렇다. 2004년 가을 지인이 이화여대 후문에서 소강 민관식 선생과 점심 자리에 초대했다. 소강과는 꼭 10년 전 한남동 자택에서 인터뷰한 일이 있었기에 좋다고 했다. 광화문에서 탄 택시가 막 금화터널 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내 방 여행'이 퍼뜩 떠올랐고, '소강의 컬렉션 이야기를 책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소강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얻었던 물품을 모두 보관해 간단한 메모를 붙여 컬렉션 룸을 꾸며놓았다. 소강은 손님들에게 이 컬렉션 룸을 보여주곤 했다.
2005년 1월부터 나는 매주 토요일을 한남동 컬렉션을 방문해 먼지를 닦아내며 소강으로부터 물품에 얽힌 이야기들을 수첩에 기록했다. 2005년 가을에 '민관식 컬렉션 탐험기-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가 나왔다.
'빈이 사랑한 천재들'의 모티브도 '내 방 여행'에서 얻었다. 2005년 겨울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주간조선 커버스토리를 취재하기 위해 빈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모차르트가 최후의 교향곡을 쓴 집 앞에서 나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
그때 나는 천재가 살았던 공간에 가면 천재들과 교감을 나눌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특정 공간에 저장된 천재들의 시간을 복원해 쓰기로 결심했다. 2006년 여름 휴가 때 다시 빈으로 가 골목길에 숨어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녔다. 천재 시리즈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찰스 다윈
'지질학의 원리'를 읽은 생물학자
장면을 바꿔, 세계사의 연표 속으로 들어가 본다. 때는 1835년 9월15일. 대영제국의 해군측량선 비글호는 3년 동안 남미 해안 측량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비글호에는 스물여섯 생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이 타고 있었다. 비글호는 에콰도르에서 966㎞ 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에 도착한다. 비글호가 닻을 내린 섬은 헤노베사 섬.
다윈은 첫 느낌을 "마치 오븐에 갇힌 기분이었다"고 술회했다. 왜 갈라파고스 제도에는 암석도 특이하고 신비한 생명체들이 가득할까. 호기심이 발동한 생물학자는 나비를 비롯한 갖가지 표본을 채취했다. 영국으로 돌아간 24년 뒤인 1859년 '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왔다. '창조론'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일이 없던 가톨릭의 유럽 세계는 펄쩍 뛰었다. 인류 조상의 기원에 관한 열띤 논쟁이 시작되었다. '지동설', '무의식의 발견'과 함께 인류의 세 가지 깨달음 중 하나라는 '진화론'이 태어난 배경이다.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에 내린 최초의 사람이었을까. 아니다. 역사에 기록된 것은 1535년 3월 10일이다. 파나마에서 에콰도르로 가던 가톨릭 주교 일행을 태운 배가 풍랑으로 표류하다 갈라파고스 군도에 도착했다. 마치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주식회사 선원 하멜이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漂着)한 것처럼 말이다.
주교 일행은 바다이구아나를 보고 기겁한다. 바닷물 속에 있다가 육지로 올라온 바다이구아나는 코로 염분을 배출한다. 생김새도 흉측한 동물이 코로 물을 뿜어내니 그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그들은 바다이구아나를 바다에서 나온 용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갈라파고스 제도는 끔찍한 지옥이었다.
그 뒤로 해적들이 갈라파고스 제도에 도착한다. 해적들에게 갈라파고스는 거북의 천국이었다. 이후 200년 동안 갈라파고스는 천혜의 거북 사냥터로 유럽에 알려졌다.
다윈이 도착한 시점이 바로 이즈음이었다. 다윈이 이 섬에 내리지 않았다면 '진화론'은 태어나지 못했다. 앞서 상륙한 사람들과 다윈은 뭐가 달랐을까.
책이다. 남미 해안을 측량하기 전에 다윈은 이미 '지질학의 원리'(Principles of Geology)를 탐독한 뒤였다. 스코틀랜드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이 1830년에 쓴 책이다. 이 책은 영국 지식인 사회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한동안 암석 관찰 여행이 유행하기도 했다.
지질학적 기초 지식을 갖춘 생물학자가 갈라파고스에 내렸으니 섬은 신기함으로 가득 찬 별세계였다. 흙과 자갈과 바위가 다 경이로웠다. 동식물도 놀라웠다. 섬은 낯설었지만 결코 지옥은 아니었다. 다윈은 모든 걸 의심하게 된다. 왜? 왜 그렇지?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그 출발은 '지질학의 원리'라는 책이었다.
사무엘 스마일즈
1885년 일본 청년이 읽은 '자조론'
1859년은 세계사에서 역사적인 해다. '종의 기원' 말고도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새무얼 스마일스의 '자조론'(Self Help)이 같은 해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자조론'은 개인과 국가의 성공에 관한 책으로 자기계발서의 고전으로 불린다. '자조론'은 영국에서 나온 지 12년만인 1871년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은 메이지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청년들에게 꿈과 야망을 심어주었다. 일본어판이 나온 지 14년만인 1885년 이 책은 시즈오카 현의 열여덟 산골 청년의 손에 들어간다.
그 청년이 도요타 사키치(1867~1930)다. 소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목수 견습생은 자조론을 읽고 깊이 감동한다. 목공을 좋아한 청년에게 확실한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유익한 기계를 발명해 특허권을 받으면 사회에 기여하고 돈도 벌 수 있다. 집 헛간에서 아버지 몰래 직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1890년 혼자 힘으로 수동목제직기를 발명한다.
이후 직기를 계속 혁신한 끝에 1924년 '무정지 저환식 자동직기'를 개발한다. 이른바 'G형 자동직기'다. 사키치가 세계 최고 성능의 자동직기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도요타 자동직기제작소가 설립된다. G형 자동직기는 영국을 비롯한 방직 선진국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도요타 자동직기제작소는 1년 365일 쉼 없이 돌아갔다. 1929년 영국 방직회사는 도요타자동직기로부터 10만 파운드에 G형 자동직기 특허권을 사들인다. 사키치 아들 기이치로는 회사 내에 자동차연구소를 설립한다. 도요타 자동차는 이렇게 탄생한다.
도요타 사키치와 도요타 기이치로가 태어난 생가.
도요타 사키치 기념관에 전시된 자조론 일본어판.
시즈오카현 고사이시에는 도요타그룹 창업자 사키치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키치가 태어난 생가가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 집에서 도요타 자동차 창업자 기이치로가 첫울음을 터트렸다는 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집에서 태어난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기념관에는 열여덟 청년이 읽은 '자조론'이 한 권 전시되어 있다. 사키치는 일본의 10대 발명왕이다.
조성관 작가 /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