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그리고 남자와 여자 (김병종, 호텔 남녀 종이에 먹과 채색 35×48.5㎝, 2020)
파리시 변두리의 ‘북호텔’ 전경. 숙박은 받지 않고 카페와 레스토랑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25) 파리 북호텔 (Hotel du Nord)
벌집같은 방을 서민에게 내주고
그들의 삶을 글로 써내려간 작가
작은 호텔 사연은 스크린에 옮겨
죽음을 향해 치닫는 청춘도 담아
늙은 문학의 성채는 아직 그대로
사람도 사연도 없지만 풍경 남아
북호텔은 정말 파리의 북쪽에 있는 걸까? 길 안내를 해준 디자이너 조민수 씨는 웃으며, 모르긴 해도 그래서 붙여진 이름은 아닐 거란다. 그렇다면 ‘북’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곳은 삶의 의미를 잃고 떠도는 부랑(浮浪) 인생의 종착지일까. 아니면 떠나온 날들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출발하는 한 지점일까.
왜 이 작은 호텔이 문학 작품으로 영화로 그토록 세상에 이름을 알렸던 걸까. 호텔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한 낡은 그 집 앞으로는 제법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흐르는 개울이 있다. 유서 깊은 생마르탱 운하다. 그 운하 건물의 뒤쪽은 생루이 병원이다. 건물의 1층은 선술집 겸 레스토랑. 소설 ‘북호텔’의 무대 그대로인 듯 헐겁고 편안하다. 벽에는 여기저기 이곳을 현장으로 찍은 영화 ‘북호텔’의 포스터들이 붙어있다.
바라보고 있는데 저만큼에서 메뉴판을 들고 웃으며 한 청년이 다가온다. “안뇽하세요, 쏜님”이라는 다섯 살짜리 같은 한국말로 “이게 맛있어요”하며 추천해준 음식을 기다리는데 왁자지껄 한 떼의 젊은이들이 몰려오더니 적막하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소란하게 바뀐다. 여기저기서 맥주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상쾌하다.
알고 보니 근처에 패션계통의 학교가 하나 있단다. 이 도시의 좋은 점은 풍경이 좀체 변하지 않는다는 것. 10년 전 20년 전에 왔던 음식점이 그대로 그 음식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면 묘한 안도감이 든다. 번쩍번쩍 변하며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주는 안도감이다. 이 길모퉁이의 작은 호텔 역시 그 역사나 내력이야 어찌 됐든 이 빠른 세상에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어 준 것 자체가 미덕이다.
어쨌거나 이 지점이 북쪽이 아니라면 호텔 이름은 왜 그렇게 불렸던 걸까. 동양학의 음양오행 상으로 ‘북’은 종종 ‘죽음’ 혹은 ‘죽음의 장소’를 이른다. 북망산의 ‘북’이 그렇다. 그런데 호텔이 죽음의 장소라니. 설마 ‘북호텔’의 영화감독 장 피에르 오몽(Jean Pierre Aumont)이 음양오행을 끌어다 썼을 리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의 북호텔은 두 남녀가 만나서 죽기 위한 장소로 나온다. 같은 제목인 외젠 다비의 소설 ‘북호텔’이 그려냈던 이곳에서의 다양하고 시끌벅적한 삶을 들여다보는 방식을 뒤집은 셈이다.
특이한 것은 생전 작가가 이 건물을 직접 구입해 경영했다는 점이다. 그는 경영주로서 수지 타산을 맞추기보다는 식솔을 데리고 월세를 내며 좁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각기 다른 삶의 풍경을 글로 쓰기 시작한다. 마치 화가가 눈앞의 대상을 스케치하듯이 여러 개의 시놉시스를 희곡처럼 에피소드 중심으로 꿰맞춰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실제 삶과 오버랩 시키는 특이한 글 작업을 하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알쏭달쏭할 지경이다.
마치 부조리극처럼 술주정뱅이와 노름꾼, 바람둥이 같은 현실감각 없는 사람들이 서로 얽혀들면서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고 연극보다 더 연극적인 실제 삶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쓴 글을 그는 친구인 작가 앙드레 지드에게 보냈고 우여곡절 끝에 소설로 출판되며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소설이 뜨면서 그는 호텔을 팔아치우고 아예 전업 작가의 길로 나섰던 것.
소설로 미루어, 아니 현재의 모습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 건물이 애초부터 번듯한 호텔이었다기보다는 서민들이 모여들어 장기투숙하는 모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책이 출간되고 십여 년 후 작가는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번에는 같은 이름의 영화가 나온다. 훗날 ‘노트르담의 꼽추’와 ‘금지된 장난’의 각본을 써서 유명해진 장 오랑슈(Jean Aurenche)에게 각본이 맡겨지면서 영화 ‘북호텔’은 소설 ‘북호텔’과 달리 죽음을 향해 치닫는 젊은 남녀 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서로 만나서 죽기 위해 호텔을 찾는다는 남자와 여자. 당시로는 실로 파격적인 상상력이었다.
물론 소설 ‘북호텔’에도 마치 ‘무진기행’의 장면처럼 익사한 여자의 죽음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호텔 앞 운하에서 건져 올려진, 시신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녀를 두고 북호텔 사람들은 ‘버림받은 여자가 자살한 것이다’고 단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북호텔’은 이곳 벌집 같은 좁은 방에서 절망적인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북호텔’이 삶의 가장 화창해 보이는 날에 죽음의 방향 ‘북’쪽을 향하는 두 젊은 남녀들과는 달리.
프랑스식 옛 모텔인 북호텔 앞으로는 여전히 작은 운하가 흐른다. 소설 속에서는 마지막에 호텔이 사라져버리지만 현실 속에서는 영화와 소설 속의 모습 그대로이다. 소설 속의 대사는 집이 사라지면서 과거도 함께 가져가 버렸다고 했지만 현실 속에서는 아직 집이 서 있다. 어쩌면 조만간 떠나갔던 시간은 그 집으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북호텔’은… 佛 귀족주의 문학에 반대해 서민의 현실 그려
파리시의 오래된 주택지인 케드제마프(Quai de Jemmapes)에 있는 낡은 서민 호텔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외젠 다비(Eugene Dabit·1898∼1936)는 직접 이 호텔을 구입해 경영하면서 그곳의 세입자들을 묘사하는 동명의 소설을 썼고,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 문학의 귀족주의적 경향에 반대해 서민과 대중의 진솔한 삶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으로 포퓰리즘 문학상을 받았다.
그 이후 영화감독 장 피에르 오몽은 같은 이름의 영화를 만들었고 이 영화 역시 영화사에 남는 작품이 됐다.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