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은 한국인이다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1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미국인 여성 사학자에게 대한 헌사로 보인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 사학자로 서양인으로는 맨 처음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고,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출판사는 이 책을 시작으로 ‘코벨의 한국문화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조만간 나올 2권의 제목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이름도 낯선 서양 사학자를 뒤늦게 재조명하고 나선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코벨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한일고대사,한국미술,불교,도자기 등에 대한 1400여편의 칼럼을 썼고,‘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한국문화의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책을 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코벨만큼 정력적으로 한국문화를 연구한 서양 학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
그러나 코벨의 존재가 진정 빛나는 것은 연구의 양이 아니라 그 질 때문이다. 그녀의 연구는 한일간 역사전쟁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바로 한일 고대사 분야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되려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자신들이 한국을 지배했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본 미술사 분야의 거장을 꿈꾸던 코벨은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이 한국 땅에 뿌리를 두었다는 ‘고대사의 진실’을 눈치채게 된다. 그때부터 그녀의 시선은 한국미술사에 집중되었고,일본의 고대유물에 남아있는 한국의 흔적들을 찾아내는데 매진하게 된다.
코벨은 1970년대 후반부터 매우 대담한 주장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4세기경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을 주도했다”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다” “일본 왕실은 한국에서 말을 배에 싣고 건너간 모험가들이 건국한 왕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등 그녀의 주장은 당시의 한국 사학계에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글 대부분이 영문으로 발표되는 바람에 대중에게 닿기 어려웠다. 코벨이라는 이름은 얼마 지나서 잊혀지고 만다.
죽은 코벨을 되살려낸 편역자는 김유경(59)씨다. 언론인 출신인 김씨는 1980년대 초반 문화부 기자로 코벨의 글을 받아 1년간 신문에 연재했던 인연이 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후에 코벨을 다시 기억해낸 이유가 뭘까? 김씨는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코벨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코벨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한 한국문화 해설자”라고 소개했다. 제3국 학자라는 객관적 위치,유물과 예술품을 통한 고고학적 접근,누구나 읽기 쉬운 칼럼 형식 등 코벨의 미덕이다. 김씨가 코벨의 글을 수집하고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1999년 출간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무속에서 신라 불교까지’(학고재)는 그 첫 결과물이었다.
이번 책은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한 부여족과 가야에 대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부여족의 야마토 정벌 과정과 왕권 수립의 증거,일본에 남아있는 한국문화의 흔적,한국이 일본에 전한 영향,일본의 역사왜곡 등을 다룬 62편의 칼럼이 수록돼 있다.
코벨은 부여의 일본 정벌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수의 외국 학자들을 동원한다. 미국의 그리피스,페놀로사,게리 레저드 등이 코벨보다 앞서 일본문화의 근원이 한국이라고 주장했고,일본인 학자 중에도 에가미 나미오,기다 사다기지 등이 기마민족 정벌론을 인정했다. 한국 사학자로는 북한의 김석형과 남한의 천관우,최태영의 연구 결과가 소개된다.
김유경씨에 따르면 코벨의 연구에 대해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베푼 지원은 없었다고 한다. 코벨은 6개월마다 있었던 비자갱신 때 입출국을 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만 그런 도움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코벨은 말년까지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 책의 출간은 그녀에게 빚진 마음을 다소 덜어준다.
김남중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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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를 일본것으로 기만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한 미국학자 존 카터 코벨
일본이 오래 전부터 한국문화의 산물을 일본 국적의 것으로 기만하고 역사를 왜곡해온 사실을 폭로한 서양 학자가 있다. 미국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1912~96) 박사가 그 주인공.
컬럼비아대에서 일본미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백인 최초의 일본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문화를 연구하다가 그 근원인 한국문화에 심취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14세기 일본 大화가 80%는 한국인
역사왜곡이 문제다. 왜 모든 사람이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데 대해 그처럼 치를 떠는가.
일본은 과거 500년이 넘게 역사를 왜곡해왔고,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공부한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따르면 바로 한국인들이 고대의 지도자들이었으며 당시 중국인에게 난쟁이들, 혹은 왜구로 알려진 지금의 일본인 이야말로 선진문명을 감지덕지 받아들인 수혜자임을 확신케 하는 것이다.
일본은 ‘난쟁이’‘왜구’ 같은 단어를 아주 싫어해 7세기부터 이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상 왜 인들은 오직 백제사신들을 통해서만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좋은 자료가 전 주일 미국대사 에드윈 라이샤워가 번역한 ‘옌닌(圓仁)의 일기- 입당구법(入唐求法) 순례행기’다. 승려 옌닌은 “한국인 해상왕 장보고의 통치 아래 있던 중국 내 한국 식민지 신라방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배려가 아니었다면 중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불교도인 옌닌 일행이 방문한 840년경 중국은 불교를 탄압하고 있었다.
옌닌 일행은 중국인에게 뇌물을 주고 한국인에게도 선물을 주어 중국으로부터 벗어나 금강경을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 모든 배편은 한국을 경유했으며 배도 모두 한국 배였다.
오늘날 일본이 저지르는 역사왜곡의 맥락에서라면 머잖아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한국인 도공을 ‘초청’해다가 ‘일본에 파견근무’케 하고 이들에게 ‘무료 교통편과 숙식을 제공’하여 ‘그들이 기술을 이곳에 전파했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의 도자기 기술은 5~6세기에 한국인들이 일본에 전한 스에키 토기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1000여 년 동안 일본 도공들은 한반도에서 온 도자기 기본을 따라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16세기에 들어 그들은 조선 도자기산업의 새 피를 수혈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 피의 수혈은 뛰어난 기술혁신을 가져다 준 것이기에 이후 일본의 도자기는 한국적 착상에 힘입어 발전을 이룩했다.
한국 점령이 자랑거리?
1923년 도쿄와 요코하마를 덮친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은 인명과 재산피해로 광포해진 일본인들의 희생양이 되어 타격을 받았다. 교과서가 씌어진 1930년대에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빈곤지역을 ‘마늘 먹는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라 부르며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으로 몰아갔다.
미국 정부는 2차대전 당시 광분한 미국인으로부터 재미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일정 지역에 피난시킨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치를 교과서에 수록하도록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1982년)에 와서 일본 자본가들은 그때 잃은 땅과 사업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배상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일본은 이 같은 조치를 한국인들에게 취했는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과거 한국에 해악을 끼친 사실에 대해 치욕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시건방진 자랑거리로 여기며 수십년 전과 달라진 바 없는 차별과 왜 곡을 일삼고 있다. 일본 군부는 2차대전에서 아무 교훈도 못 얻었단 말인가. 겉보기에 그들은 분명히 반성의 기색이 없다.
그런데 일본문화사에서 한국의 영향을 모두 제거한다면 남아나는 것이 거의 없다. 적어도 서기전 3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그러하다. 순수한 일본 고유 문화가 이룩됐다고 하는 10세기에 와서도 일본 대궐에서 벌어지는 가장 신나는 일 중의 하나는 대궐 사람들 중 누가 제일 한국춤을 잘 추는지 가려 뽑는 행사였다.
일본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14세기 새로운 수묵화의 기법은 사실 조선에서 먼저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수묵화를 그린 화가들 중에 조선 출신의 수묵화가이던 선승(禪僧)들을 다 추려낸다면 일본이 뽐낼 만한 부분은 거의 없다. 적어도 일본이 내세우는 14세기 수묵화 대가의 80%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도 조선에서 유입된 사상과 노동력이 일본의 예술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일본은 한국을 강제합방해 한국인을 노예로 부려먹었다. 또 있다.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왜 구의 노략질이 고려시대에는 특히 심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역사왜곡까지 새롭게 시도해서 한국을 뒤흔들고 있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이런 압력에 굴복하거나 모욕을 한 귀로 흘려넘기는 한, 일본은 소리 없이 등뒤로 다가와 한국을 밟고 설 것이다.
역사왜곡은 712년부터 이어졌다.
일본인이 쓴 글에는 한일관계를 거짓으로 기록한 것이 아주 많은데, 한국인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히틀러는 “거짓말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잘 믿는다. 거짓말이라도 자꾸 되풀이하면 머잖아 많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첫 번째 왜곡은 1300여 년 전 씌어진 첫 일본 역사책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라(奈良)의 왜(倭) 지배자들은 일단의 학자들에게 사서 편찬을 의뢰했다. 편찬 목적은 당대의 일왕들이 정통성을 가진 지배자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역사가들은 369년 가야 부여족의 왜 정벌 이래 700년까지 한국이 정치·문화적으로 일본을 전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히틀러가 말한 것처럼, 거짓말은 클수록 사람들을 속이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사가들은 역사를 뒤집고 가야에서 온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게 아니라 왜가 가야를 정복했다고 썼다.
‘일본에서 와 가야와 신라를 정복했다’고 알려진 유명한 신공(神功)왕후는 사실은 선단을 이끌고 왜를 침략해 정벌한 강인한 의지의 한국왕녀였다. 369년의 오진왕부터 게이타이왕 이전까지(또는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15대 천황부터 25대까지)는 전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왜왕이었다.
일본 건국자로 알려진 초대 일왕 진무는 4세기 부여인들이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해의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臣)은 무당이며, 그녀의 오빠 스사노오노 미코도(素尊)는 신라인이다. 그러나 8세기 역사가들은 이 두 인물에게 일본옷을 입혔다. 20세기에 와서 이들의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역사가들은 사람들을 속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나이 든 부모를 버리는 불효자식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은 두 세대 전 한국인들에게 한국문화는 열등한 것이라며 일본말과 일본 이름, 일본식 제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권했다. 한국의 수많은 서책이 불에 타 없어지고 예술 활동도 금지됐다. 숱한 보물이 나라 밖으로 실려 나갔다. 석굴암을 해체해 돌 하나하나를 일본으로 옮기려고까지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거짓말과 날조를 통해 한국인에 대한 문화적 대량학살을 감행했다. 그러나 진실은 일본이 초기 역사부터 8세기에 이르도록 한국이 떠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자란 어린아이였다는 것이다.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제 한일강제합방이 ‘한국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원한 일’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역사를 재구성하려 한다.
일본이 일으킨 지금의(1982년) 교과서 파동은 첫 단계에 불과하다. 다음 단계는 일본 헌법의 전쟁 금지조항을 삭제하고, 셋째 단계에 가서는 천황가를 ‘성스러운 권력체’로 되살린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다. 이것이 실현 가능할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집권여당이 된 자민당은 그 이름과는 동떨어지게 보수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정당으로 군림했다. 이제 자민당은 상징적인 존재인 일왕을 실제적인 국가원수로 키우고 싶어한다.
일본인은 솔직해질 수 없다.
1980년 나는 유네스코 강당에서 3대의 영사기로 컬러 슬라이드를 비춰가며 한국·중국·일본의 예술형태를 통해 극동의 세 나라를 비교하는 강연을 했다. 세 나라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할 말을 찾다가 영어의 C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떠올렸다. 중국은 통제(Control), 한국은 무심함(Casual), 일본은 작의적(Contrived)이라고. 이런 대비는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드러난다.
중국 도자기는 가마와 유약의 사용을 철저하게 관리한 결과 특히 도자기에서 완벽의 경지를 이뤄냈다. 한국의 도공은 언제나 자연스럽기 짝이 없고 무심해서, 이들이 만들어낸 도자기에는 도공의 기질과 불이 어떻게 작용했는지가 그대로 반영된다.
일본인들은 15세기 이도다완 전쟁에서 보듯, 이러한 한국적 무심함을 높이 취해서 과도하게 발전시킨 나머지, 그들의 도자기는 자의식이 담긴 작의적인 것이 됐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구워낸 화병의 한 귀를 일부러 구부리거나 깨버림으로써 한국 도자기가 갖는 것 같은 ‘무심함’의 미를 주려고 한다.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 도자기의 이런 무심함은 솔직함과 통한다. 내가 일본의 교토보다 서울에서 더 편히 지내는 이유는 지극한 미소로 일관하는 교토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솔직한 서울사람들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10여 년 동안 매년 여름과 겨울을 교토 대덕사(大德寺)의 유명한 선사찰 진주암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나는 주지스님과 삶에 있어 ‘솔직함’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다투곤 했다. 면전에서 하는 말과 등뒤에서 하는 말이 다른 일본인의 이중성에 대해 지적하면 그는 그래야만 하는 것으로 정당화하곤 했다. 그것이 바로 ‘호벤(方便)’, 즉 편의라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솔직함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자기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일본인들은 어떤 상황이라도 거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다. 그들이 진짜로 느끼는 감정은 속에서 억제되고 대신 ‘작의적 얼굴’로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인생은 이미 오래 전에 의도된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니 누구든 자신을 거기 맞춰 살아야지 예상에 없는 짓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진주암은 일본 역사상 아마도 유일하게 100% 솔직했던 인물을 받드는 절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개념을 특별히 더 기만적이라 생각했다. 겉으로는 독신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온갖 난잡한 일을 다 저지를 대신 승려 잇큐(一休)는 거리낌 없이 여자들과 즐겼고 그로 인해 계율로 엄격하게 금지된 것들에 대해 잘 알았다. 이 때문에 잇큐는 호벤, 혹은 ‘편의상의 거짓말’을 생의 방편으로 정당시하는 사찰에서 받드는 인물이 됐다.
진주암에서 이런 문제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스님이 으레 하는 말이 “그래, 당신이 옳소. 잇큐는 솔직한 사람이고 우리도 그래야겠지만 여기는 일본이요. 잇큐처럼 정직한 건 미국에선 괜찮겠지만 일본에선 맞지 않아요”.
나는 일본에 있는 절이 모두 그런 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살아 있는’ 진주암에서 지냈다. 적어도 잇큐를 추모하는 사찰인 이곳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벽에는 섬세한 수묵화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여기서의 표준개념인 ‘살아 있는 거짓말’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존카터 코벨이 말하는 일본의 뿌리는 한국
첫댓글 으음...?
주변국에서 혐한소스로 이용되는 거 아닌지 ㅡㅡ;
답답하다
흥미롭네요, 일단 스크랩 합니다...추천도 하구요
뭐 그러면 뿌듯하겠다만 아니래도 상관없다. ㅋ
현 문명의 가장 오래된 선사유적은 발해만 지역의 발해문명의
소하서 문명으로 기원전 7천년경의 적석총 돌제단 인물조각상등이 발견된 유적으로
바로 한민족의 강역으로, 이후 홍산문화, 대문구 문화, 양저 문화, 반파문화(황하문명)등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서쪽 인도의 모헨조다로 문화, 그리고 고인돌로 증명되는 환북근권대 문화등 서쪽으로도 전파..
이같은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인정못할만큼 위축된 의식을 갖고있는데
연구를 하면 할수록 진실은 확연하고 이미 외부에서는 우리보다 더 파악하여 견제되는 경향도 있다는 것..
중국의 그 대단한 고대문화.. 주체는 남방 화하족이 아닌 환족 즉 배달신시.고조선의 맥들이 이룬것이랍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비슷하게 기원한것도 맞습니다..
다만 과거 문명의 생존자들, 혹독해진 환경으로 인한 인육문화, 이에 아이러니한 목조주택,직물제조의 기술등
당시에 첨단의 문화도 있던 흑인계 문화가 동아시아로 이동하여 환족문화와 마주치지요
왜구들이 한국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게 저것때문인가
평균수명 1000세...고고학이 아니라 외계문명설이 되어버리겠네요..
음 그 당시 의학적인 결론이니..하지만 외계문명설은 아니더라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연구해봐야...
유네스코에서 발표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고..
본문에서 말하는 책의 내용도 허무맹랑하네요. 인간의 수명은 의학이 발달하면서 계속 늘어나서 오늘날에 이른 것인데
17000년전 사람의 평균 수명이 1000세?
유네스코가 공식적으로 발표한게 아니라 존 카터 코벨여사가 유네스코에서 세대의 영사기를 돌려가며 강연한게 와전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런 고대 상고사의 기록물을 딱딱 몇년이네 몇십년이네 년도수까지 맞춰서 생각한다는 건 좀 그렇죠^^
저는 이 글이 존 카터 코벨여사가 쓴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라는 책의 내용을 왜곡했다고 확신합니다. 이 책은 오로지 한국 문화가 일본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만 저술한 책일겁니다.
korean impact on japanese culture 책에서 본문의 파란글씨로 써진 내용이 언급되었다고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전 감히 우리 고대사에 대해 논쟁할 놈이 못 됩니다...하지만 이런 게시글에 관심을 갖고 힘을 실어 주고 싶은 이유는 있지요.! 현재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우리 고대사, 하물며 조선의 역사 조차도 일제 강점기에 의해 상당히 왜곡되고 축소 되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 사학 계통에서 꾸준히 바른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분들께 힘을 실어 주고 싶습니다. 한열사에서조차 환단고기, 화랑세기 등등 이야기 나오면 ~빠로 취급하고 하더군요. 씁쓸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고사와 고대사를 파헤치기 위한 노력 자체를 무마시키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지지합니다, 힘을 실어 주고 싶습니다.
수명 1000년이란 허무맹랑한 말에 힘을실어 주고 싶습니까?저는 이런글이 순수하게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이 작성했나도 의심 됩니다..
이런글이 무비판적으로 우리나라에 수용된다면 이건 주위 장깨와 왜놈들의 비웃음거리밖에 않되는 겁니다..왜놈들이 한글을 가지고 고대일본의 신대문자라고 씨부릴때마다 우리가 왜놈들을 얼마나 비웃고 경멸하는지 다들 아실건대 그보다더한 출처도 불분명한 17000년전 탄화미에 그당시 인간 수명이 1000년이었 다니요..
제발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 합시다..
샛길이지만
7-8백년을 살았다는 성경이야기도 있지요
지금으로서야 공상과학이지만
현재의 물리학상으로도 가능할지도
인간의 dna가 명상등의 상태, 마음에 따라 변화된다는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상태니까
마음(천성)만 잘 보존하면 노화도 늦겠지요
그리고 저 시점은 현 문명이 시작되기전의 선세인듯하군요
그때의 기운은 지축이 기울어진 지금과 또 달랐을지도
제발...좀...이런글이 중국,일본으로 흘러 들러가 혐한소스가 되는 겁니다.. 공자 한국기원설같이 말이죠..이런글이 무비판 적으로 한열사에 게제되니까 일빠들이 득시글한 카페에서 환열사라고 비아냥되기도 하고요..
혐한소스로 작용하지 않는 글이 어떤 글일까요? 그리고 이런 글이 무비판 적으로 올라온게 아니라 매우 억눌린 상태였습니다. 왜 우리 역사에 대해 다방면으로, 이런 저런 가설과 이런 저런 기록을 기반으로 한 연구 조차 우리 스스로가 막아야 합니까? 왜 우리 고대사는 오로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초하지 않으면 위서가 됩니까? 그런 학문적 연구조차 막아서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혐한의 소스가 되니까 하지 말자고요? 그건 아니죠!!! 우리 고대사! 아니 조선사조차도 엄청나게 왜곡돼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불과 대한제국 시절까지만 해도 간도가 우리땅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것조차 부정도고 있는 우리 역사지요.
중국고대 왕조라 알려진 상나라(은나라)가 동이족이란것은 기록상 유물상 엄연한 사실입니다
헌데 우린 중국왕조로만 알고있죠
공자의 제자백가 시대 그리고 그 지역은 제나라를 중심으로한 노나라 등등의 중국 동부의 중소국들인데
이 지역은 대대로 동이족의 영역이였습니다
이들 동쪽 제자백가와 서쪽의 진나라가 대결구도였다가 진나라 진시황의 통일
그 통일은 고조선이 쇠락한 시기와 맞물려 환족의 헤게모니에 큰 변동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진나라는 서융 즉 이민족이였고, 이는 견웅 즉 환족의 한 갈래였지요
황하 이남의 중화족의 기원은 고조선 번한에 파견된 순임금과 당시 벼농사 보급으로 인한
세력의 영토화에 맞물린 결과
동이족이요?님은 동이족이 우리나라만 해당 된다고 보시나요?동이족은 중국동부부터 만주 한반도 전체에 살고 있었던 족속을 모두 통칭해서 부르는 말 입니다...춘추시대에 중국 동부에 소국들(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부터)이 우리와 무슨 혈통적 문화적 동질성이 있습니까?있다는 증거 있어요?그냥 공자가 동이족이니 공자는 우리나라 사람임?
그래도 자료라도 찾고 공부를 한 사람들이 현재 있는 객관적 자료를 공개하는 것이라면 ,,,,,,, 아무 것도 모르는 역사 진실 찾기에 우린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지요,,,소히 까막눈들인 우리가 누구를 옳다 그르다를 판단??? 할 수 있겠어요... 틈틈이 좋은 자료라도 꾸준히 나온다면 우린 학생때 못 배운 역사의 진실을
이곳에서라도 일부분 이나마 배울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죠,,,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는 한발 뒤로 물러서서 잠자코 있는게.........
전세계학자중 한명이 그냥 발표한겁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실필요가 있나요? 아 이런글도 있구나 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는거지 무슨 혐한자료 어쩌고 하는건 오바네요.
오바 라구요?대만 놈들이 tv까지 동원해서 한국인이 공자는 한국인 이라고 주장 한다며 걸핏하면 걸고 넘어지고 그에대해 대만 유학생이나 여러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곤욕을 치뤘습니까?여기 한열사만해도 공자 니덜꺼해라 관심없으니 귀찮게하지마라 이런 반응 아니었어요.그런데 버젓히 공자는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글이 한열사에 올라오고 이게 뭐하자는 겁니까?스스로 무덤파는것도 아니고..
공자는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글이 한열사에 올라왔다구요? 난 못봣는데 어디서 보셧는지요?
그리고 수많은 학자중에서 한명이 발표한거 가지고 심각하게 우리끼리 토론해서 머합니까?? 그렇다고 그학자가 신경이나 쓰게씁니까? 그렇게 따지면 일본학자나 다른 외국학자들이 일본이 한국 발전시켜줬으니 한국지배한건 정당하다고 글쓰고 주장한건 왜 아무도 안따지는건지요?? 그런걸 진짜 따져야하는거 아닙니까??
유네스코는?
인류기원설만 아니면 딱좋았는뎅^^
존 카터 코벨의 저서에서 고대 한국 문화가 일본에 끼친 영향에 저술한 부분은 사실일겁니다. 이건 국내 웹에서 검색을 해봐도 다 나오는 내용이구요.
그런데 이상한 무리들이 거기다가 환타지를 섞어서 인류 한국인 기원설을 보탠-.-....이런 사람들이 존 카터 코벨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중..
ㅋㅋ 이런거 또 혐한자료로 이용됩니다.
지랄 옆차기.. 놀림감 되기 딱 좋은 소스
유네스코가 발표한게 아니고 유네스코에 누가 가서 발표한 거라고요?
참나~ 제목에서 유네스코나 빼세요
판타지역사관에 사로잡힌인간좀 더는 안봤으면하네요.
허,,,참..
어설프게 주장하다 정맞죠. 하긴, 아래 어느 분 말씀처럼 남자의 갈삐벼하나에서 여성을 나온 것을 사실을 초월해서 믿는 시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