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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군왕(君王)은 성군(聖君)으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누가 폭군(暴君)·용군(庸君·어리석은 임금)으로 기억되고 싶겠는가? 그러나 원한다고 모두가 성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주 개인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 시대는 악역과 가시밭길을 요구한다. 이때 악역과 가시밭길을 거부하다 용군이 된 지도자는 많다. 반면 묵묵히 악역과 가시밭길을 걸음으로써 후대에 평가받았던 군주는 소수이다. 스물일곱 조선 군주 중 악역을 자청했던 두 임금이 3대 태종과 7대 세조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뭇 다르다.
태종도 다른 군주처럼 성군이 되기를 바랐다. 또한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성군이 되기를 바랐는지는 태종우(太宗雨) 고사가 잘 말해준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가 태종우이다. 조선의 민간 풍습을 기록한 홍석모(洪錫謨·1781~1850)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5월조는 “태종이 임종할 때 세종에게 ‘가뭄이 극심한데 내가 죽어서도 비록 알게 된다면 이날에는 반드시 비가 오게 하리라’고 말했는데, 훗날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 초·중기 문신 정경세(鄭經世·1563~1633)는 『우복집(愚伏集)』에서 “동산(洞山)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니 크게 가물었는데, 때마침 반가운 비가 왔다. 금년은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오지 않고 더 심했는데, 5월 10일 감로수 같은 비가 새벽부터 밤까지 내렸다. 이 나라의 민간에서 소위 말하는 태종우이다”며 “느낀 바가 있어서 그 기쁜 뜻을 적는다”고 기록했다. 신라의 문무왕이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겠다고 한 비장한 애국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죽어서도 비를 내리고 싶었던 태종은 살아서는 성군의 길을 걷지 못했다. 시대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종은 재위 16년(1416) 5월 19일 극심한 가뭄 속에서 기우제를 준비하는 예조와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에 전지를 보내 “가뭄이 든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니 다른 까닭이 아니라 무인년(戊寅年)·경진년(庚辰年)·임오년(壬午年) 사건이 부자와 형제의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고 자책했다.
무인년(1398·태조 7년)은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 해이고 경진년(1400·경종 2년)은 제2차 왕자의 난, 임오년(1402·태종 2년)은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발생한 해였다. 이 난들이 부자와 형제의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자책이었다. 태종으로서 이는 피를 토하는 자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종은 곧이어 “이 또한 하늘이 시켜서[天使] 한 일이지 내가 즐거워서 한 일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태종이 악역을 수행한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그러나 그 명을 따른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에 따른 벌책은 태종이 감수해야 할 운명이자 업보였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의 최초 악역은 정몽주 살해였다. 이성계는 우왕(禑王) 9년(1383) 함주까지 찾아온 정도전(鄭道傳)을 만나면서 새 왕조 개창을 꿈꾸었지만 그에 따른 역신(逆臣)이란 비난까지 감수할 생각은 부족했다. 변방 무장 출신이란 이성계의 콤플렉스는 세평(世評)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때론 이런 성격이 개국에 대한 의지도 무뎌지게 해 개국을 물거품으로 만들 뻔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혁명 무력과 혁명 사상의 결합이었다. 역성혁명파가 고려 말의 문란한 토지 문제 해결을 개국 명분으로 삼은 것은 정도전의 혁명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1388)으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 정도전은 조준(趙浚)에게 토지 개혁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게 해 혼란스러운 회군 정국을 일거에 토지 개혁 정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부전(賦典)에서 “전제(田制·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아울러 병합해 부자는 밭두둑이 서로 잇닿을 만큼 땅이 많아진 반면 빈자(貧者)는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의 주인이 7~8명인 경우도 있어서 빈자들은 남의 땅을 빌려 일년 내내 부지런히 일해도 밥을 먹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토지 개혁을 통해 새 왕조를 개창하기로 결정한 역성혁명파는 공양왕 2년(1390) 공사(公私) 전적(田籍·토지문서)을 개경 시가(市街)에 모아 불을 질렀는데, 『고려사』 ‘식화지(食貨志)’는 “이 불이 사나흘 동안 탔다”고 전한다. 이때 공양왕은 “선왕들이 만든 토지제도가 내 대에 와서 크게 바뀌니 아까운 일이다”며 눈물을 흘려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이처럼 과거의 문란했던 토지제도를 무효화하고 공포한 새 토지제도가 공양왕 3년(1391) 5월에 반포한 과전법(科田法)이다. 정도전이 이에 대해 “전조(前朝·고려) 때와 비교하면 어찌 만 배나 낫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빈농(貧農)들은 과전법을 쌍수 들어 환영했고, 농민의 지지는 새 왕조 개창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공양왕 4년(1392) 3월 명나라에 다녀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낙상한 것이다. 『고려사』는 경연(經筵) 중에 이 소식을 들은 공양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정몽주는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전한다. 공양왕과 정몽주는 이를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기 위해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로 여겼다.
정몽주는 곧바로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을 시켜 역성혁명파를 탄핵했는데, 『고려사절요』는 보고를 들은 공양왕이 주저 없이 정도전·조준·남은·남재·윤소종·조박 등 역성혁명파 핵심을 귀양 보냈다고 전한다. 게다가 “정도전은 귀양 간 곳에서 처단하여 뒷사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탄핵이 뒤따라 곧 사형에 처해질 분위기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이성계가 벽란도(碧瀾渡)에 누워 자려 하자 이방원이 급히 말을 달려 찾아왔다.
“이곳에 유숙해서는 안 된다”는 방원의 거듭된 재촉을 받고서야 이성계는 견여(肩輿)에 올라 개경의 사저로 돌아왔다. 『고려사절요』는 “형세가 위급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는 방원에게 이성계는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있으니 다만 순하게 받을 뿐이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거의 체념 상태였던 것이었다. 이때 다시 변수가 발생했다.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온 것이다.
위독하다는 소문과 달리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자 사실 여부를 알아보러 온 것이다. 정몽주는 세평에 신경 쓰는 이성계가 자신을 해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고려사절요』는 정몽주의 문병을 받은 이성계가 “전과 같이 대하였다”고 적고 있다. 방원이 이지란에게 정몽주 제거를 요청하자 “공(公·이성계)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하겠는가”라며 거절한 것처럼 정몽주 제거는 모두가 꺼리는 일이었다. 정몽주의 예상은 맞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방원을 간과한 예상이었다.
방원은 결단을 내려 가신(家臣)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 공양왕 4년(1392) 4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제거했다. 이성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동각잡기』는 방원이 사실을 고하자 이성계가 “너희들이 대신을 멋대로 죽였으니, 남들이 내가 모르는 일이라 하겠는가”라면서 “내가 약이라도 먹고 죽어 버리고 싶다”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했기 때문에 이성계는 석 달 후 개국시조가 될 수 있었다. 방원까지 악역을 거부했다면 조선 개창은 무망(無望)한 일이었을 것이다. 개국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오명 또한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 이 또한 그가 선택한 인생이었다.
]‘집안’에 갇힌 아버지, 칼로 맞선 아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태종② 골육상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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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첫째 부인인 향처(鄕妻) 한씨(1337~1391)에게서 여섯 아들을, 개경에서 얻은 경처(京妻) 강씨(?~1396)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다. 강씨는 개경 명가 출신이었지만 한씨가 사망하는 공양왕 3년까지는 후처일 수밖에 없었고, 두 아들 역시 서자(庶子)에 불과했다. 조선 개국 당시 열한 살에 불과했던 강씨의 둘째 방석은 아무 공을 세우지 못했고, 두어 살 위의 형 방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명종 때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와 『태조실록』은 개국 초 태조가 배극렴·조준·정도전 등 공신들을 내전(內殿)으로 불러 세자 문제를 논의하자 ‘시국이 평안할 때는 적자(嫡子)를 세우고, 시국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고 전한다. 개국 초의 혼란기였으므로 당연히 ‘공이 있는 자’를 우선해야 했는데, 이 경우 정몽주를 격살해 개국의 기틀을 연 방원이 유리했다. 시국이 평안하다면 적장자(嫡長子)인 진안대군 방우(芳雨·태조 2년 사망)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방우는 조선 개창에 부정적이었으므로 제외한다면 둘째 방과(芳果·정종)나 방원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이 논의를 들은 신덕왕후 강씨의 통곡 소리가 전세를 뒤집었다. 『동각잡기』는 “뒷날 또 배극렴 등을 불러 의논하니 다시는 적자를 세워야 하느니, 공 있는 이를 세워야 하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태조 1년(1392) 열한 살의 방석(芳碩)이 세자가 된 것은 오로지 모친의 눈물 덕분이었다. 정도전도 『조선경국전』의 ‘세자를 정함’이란 글에서 “세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옛날 선왕(先王)이 장자(長子)를 세자로 세운 것은 (형제간의) 다툼을 막기 위한 것이고, 현자(賢者)를 세운 것은 덕(德)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 동궁(방석)은 뛰어난 자질과 온화한 성품으로…”라며 장자도 현자도 아닌 방석의 세자 책봉이 가져올 문제에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는 눈을 감는다고 없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방원은 우왕 9년(1383) 이성계 집안에서는 최초로 과거에 급제했다. 변방 무가(武家) 출신이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이성계는 이때 “대궐 뜰에서 절하고 사례하여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할 정도로 기뻐했다. 신덕왕후도 방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왜 내게서 나오지 않았을까”라고 한탄했다고 『동각잡기』는 전하지만, 스물여섯의 장년인 그는 열한 살 이복동생에게 밀려났다.
방원은 반발했다. 단순히 이복형제 사이의 자리다툼이 아니라 조선의 미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한신(韓信) 같은 개국공신들을 제거한 것처럼 피의 숙청을 통해 왕실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안을 나라로 만든 화가위국(化家爲國)의 부친과 맞서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세자 방석·방번 형제와 배후의 정도전을 죽인 것은 사실상 부친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제1차 왕자의 난은 당(唐) 고조 9년(626) 태종 이세민이 장안(長安·현 서안) 북쪽 현무문(玄武門)에서 태자인 친형 이건성(李建成)과 넷째 동생 원길(元吉)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현무문의 변(變)’과 흡사했다.
현무문의 변으로 고조 이연(李淵)이 강제로 양위(讓位)당한 것처럼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도 사실상 강제로 양위당했다. 이성계는 충격을 받았고 격분했고 좌절했다. 이성계 퇴위 이틀 후인 『태조실록』 7년 9월 7일조는 “상왕이 이방석 등을 위하여 소선(素膳)을 드니 도평의사사에서 육선(肉膳)을 올리기를 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는 백운사(白雲寺)의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방석이 다 죽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고 탄식했다. 심지어 태조는 왕자의 난이 발생한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돌아가 시중(侍中) 윤환(尹桓)에게 “내가 한양에 천도(遷都)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 환도(還都)했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다. 날이 밝지 않았을 때만 출입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정종실록』 1년 3월 13일)”고도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종 2년(1400)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정종실록』은 방간이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 거병 계획을 보고하자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라고 꾸짖었다고 전하지만 이성계가 일방적으로 방원 편만 들었을 까닭은 없다. 제2차 왕자의 난 직후 세제(世弟)로 실권을 잡은 방원이 인사하러 오자 이성계는 덕담 대신 “삼한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은데,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정종실록』 2년 2월 4일)”고 조롱했다. 그러나 방원은 부친의 경멸에 좌절하는 대신 강력한 개혁 노선을 걸었다. 사병(私兵) 혁파가 그것이었다.
정종 2년(1400) 4월 대사헌 권근(權近) 등이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세이니 마땅히 통속(統屬)해야지 흩어서 주장할 수 없습니다”고 사병 혁파에 대해 상소하자마자 당일로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실록이 전하는 것처럼 전광석화처럼 사병을 혁파했다. 『정종실록』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원망함)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고 전할 정도로 반발도 작지 않았다. 그중에는 방원의 측근이자 정사·좌명 1등공신인 조영무(趙英茂)도 끼어 있었다. 대간에서 조영무의 처벌을 요구하자 방원은 두 번 반대하는 형식을 취한 후 황주(黃州)로 유배 보냈다. 이 조치에 조야가 놀랐다. 조영무까지 내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드디어 정종은 재위 2년(1400) 11월 11일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 전에 정종이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 양위하겠다고 보고하자 이성계는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성계는 태종 1년(1401) 5월 태종이 헌수(獻壽)하자 토산(兎山)으로 유배 간 방간을 불러 올릴 것을 요구했다. 태종은 “이것이 신이 전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이라며 명령대로 하겠다고 답했으나 대간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이 태종의 본심이었다. 태종은 방간을 불러옴으로써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친동기이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반발해 함흥으로 돌아가 버렸다. 심지어 이성계는 태종 2년(1402·임오년) 계비 강씨의 친척인 안변(安邊)부사 조사의(趙思義)가 ‘강씨의 원수를 갚겠다’며 군사를 일으키자 여기 가담했다. 태상왕부인 승녕부(承寧府)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 “태상왕을 호종해 동북면으로 가서 조사의의 역모에 참여했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조사의의 난은 비록 진압되었지만 이성계의 가담은 무수한 뒷말을 낳았고 태종의 정통성에 큰 상처가 되었다. 태종도 “내가 무인년(1차 왕자의 난) 가을 사직의 대계(大計) 때문에 부득이 거사한 후 부왕께서 항상 불평하는 마음을 품으셨다(『태종실록』8년 6월 21일)”고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태종은 부친은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이 신생 조선을 살리는 길을 걷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아직도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왕에게 동지는 없다, 신하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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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년(태종 2년) 3월 7일. 태종은 성균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 권씨를 ‘어진 행위가 있다는 이유로’ 후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혼인을 주관하는 가례색(嘉禮色)까지 설치했으나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가 태종의 옷을 잡으며 “제가 상감과 어려움과 화란(禍亂)을 함께 겪어 국가를 차지한 것인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라고 거칠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환관과 궁녀를 시켜 권씨를 쓸쓸히 별궁(別宮)으로 안내해야 했다.
『태종실록』은 “상이 며칠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즉위 직후에도 “중궁의 투기 때문에 경연청(經筵廳)에 나와 10여 일 동안 거처하였다”고 『정종실록』이 적고 있는 대로 민씨의 투기는 처음이 아니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의 취첩(取妾)은 왕실의 안녕을 위한 합법적 제도였다. 궁중의 모든 여성은 내명부(內命婦)에 소속된 여관(女官)으로 왕비의 지휘를 받았다. 후궁에게는 정1품 빈(嬪)부터 종4품 숙원(淑媛)까지 주어졌고, 정5품 상궁 아래는 궁녀였다. 왕비에게 궁중의 여인들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통솔의 대상이었다. 태종이 더욱 심각하게 여긴 것은 ‘내가 상감과 어려움과 화란을 함께 겪어 국가를 차지했다’는 말이었다. 여흥(驪興) 민씨(閔氏)와 공동 왕권이란 뜻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숙번의 안성 이씨와 조영무의 한양 조씨도 지분을 요구할 수 있었다.
태종의 즉위 과정을 되짚어 보면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민씨는 고려 충선왕 때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 15가문에 들 정도로 명가였다. 게다가 제1차 왕자의 난을 처음 기획한 인물은 민씨 부인과 동생 민무질이었다. 『태조실록』은 먼저 민무질과 상의한 부인 민씨가 종 소근(小斤)을 급히 궁으로 보내 방원을 불렀고, ‘셋이 비밀리에 한참 이야기’한 후 거사에 나섰다고 전한다. 환수령이 내려진 무기를 몰래 감추었다가 내놓은 인물도 부인 민씨였다.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 때도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권했다”고 『정종실록』은 전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모두 처남 민무구·무질이 선봉에 서서 칼을 휘둘렀고 두 처남은 공신에 책봉되었다. 부인 민씨가 태종의 왕위를 두 가문의 것으로 생각한 것은 일견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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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이런 우려를 무시한 채 민씨 형제들은 즉위 초부터 세력 확장에 나섰다. 태종이 원년(1401) 정월 초하루 강안전(康安殿) 터에 거둥하여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데, 상장군(上將軍) 이응(李膺)이 차서(次序)를 잃었다고 사헌부에서 탄핵했다. 태종은 “민무구가 사헌부를 사주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응이 민무구 등에 대한 총애가 너무 극진하다며 “억압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제거하기 위해 탄핵했다는 뜻이었다. 태종이 권력 배분을 거부하자 형제는 스스로 세력을 키우는 한편 세자에게 접근했다. 태종에게 이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태종 7년(1407)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화 등이 민씨 형제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공세의 시작이었다. 이화는 태조의 이복동생이자 태종의 숙부라는 점에서 사전 교감에 의한 상소였을 것이다.
지난 해(1406) 재변(災變)이 끊기지 않는다며 태종이 양위를 선언했을 때 모든 신하가 명의 환수를 극력 요청했으나 형제는 은근히 선위(禪位)를 바랐다는 혐의였다. ‘태종이 선위 계획을 발표했을 때 모든 신민은 애통해했으나 민무구 형제는 화색을 띠었다’는 심증뿐인 공격이었지만 어린 세자를 끼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였으므로 죄는 위중했다. 두 형제가 강하게 반발하자 이조참의 윤향(尹向)이 ‘태종이 양위하려고 할 때 민씨 형제가 비밀리에 내재추(內宰樞)를 선정했다’고 폭로했다. ‘내재추’는 고려 말기 5, 6명의 대신이 전권을 행사함으로써 왕권을 약화시켰던 기구였다. 이런 공격이 잇따르면서 두 형제는 태종 8년(1408) 10월 지방으로 쫓겨나야 했다. 태종은 이때 처남들을 내쫓는 교서를 발표해 ‘임금이 아들이 많으면 형세가 심히 불편하다’며 세자 외의 다른 왕자들을 제거해 ‘왕실을 약하게 만들려 했고’ ‘양인(良人) 수백 구(口)를 사천(私賤·노비)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태종 9년(1409) 우정승(右政丞) 이무(李茂)가 민씨 형제를 옹호했다는 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하면서 형제의 처지는 더욱 궁박해졌다.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에서 공격을 재개해 “자고로 난역(亂逆)하는 신하는 먼저 당(黨)을 만든 연후에 악한 짓을 감행하기 때문에 『춘추(春秋)』에서 그 당(黨)을 엄하게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면서 전 계림부윤(鷄林府尹) 이은(李殷) 등 13명을 ‘간인(奸人:민무구 등)에 아부한 죄’로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민씨 형제는 태종 10년(1410) 3월 제주 유배지에서 자진(自盡·스스로 목숨을 끊음)해야 했다.
5년 후인 태종 15년(1415)에는 남은 처남 민무휼·무회 형제까지 옥사(獄事)에 연루되었다. 노비 소송에 패한 전 황주(黃州)목사 염치용이 ‘태종의 후궁 혜선옹주(惠善翁主) 홍씨와 영의정 하륜 등이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패소했다면서 민무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무회는 충녕(忠寧·세종)에게 이를 알렸다. 충녕에게서 송사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한낱 노비 소송에 임금을 연루시키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이 때문에 두 형제도 유배형에 처해졌는데, 잇따른 비위 사건으로 처지가 불안했던 세자 양녕이 ‘작년(1414) 무휼·무회 형제가 두 형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했다’고 공격에 가세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태종 15년 겨울 ‘왕자 이비(이비)의 참고(慘苦)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태종은 6~7년 전 잠시 입궐했던 민씨 친정의 여종을 임신시켰는데 이 사실을 안 원경왕후가 겨울 12월에 산통(産痛)을 시작한 여종과 갓난아이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한 사건이었다. 자신의 혈육 이비와 그 모친을 죽이려 했던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민무회 형제 사건을 재조사시켰고 그 결과 세자에게 “무구·무질 형은 모반죄로 죽었으나 사실은 무죄입니다”고 옹호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두 형처럼 사약을 마셔야 했다.
외척뿐이 아니라 측근 이숙번도 제거 대상에 올랐다. 태종 16년(1416) 이숙번은 박은(朴誾)이 우의정이 된 데 불만을 품고 가뭄으로 모두가 근신하는데 입궐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숙번 역시 사형 위기에 몰렸으나 과거 태종에게 “신은 크게 우매하니 나중에 설령 죄를 지어도 성명을 보존케 하여 주소서(『태종실록』 17년 3월 4일)”라고 요청했었고 태종이 “종사(宗社)에 관계되지 않으면 어찌 보존해 주지 않겠는가”라고 답했었기 때문에 겨우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태종은 “전의 말은 종사와 관계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만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며 살아생전 도성(都城·서울)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훗날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민무구의 옥사’에서 “집안 전체가 화를 당한 것은 무슨 죄에 연루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약 역적죄를 범했다면 여기에서 그칠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네 처남은 혐의는 뚜렷하지 않아서 많은 의혹을 낳았다. 사적(私的) 관점에서는 태종의 행위는 배은(背恩)일지 모르지만 이런 피의 숙청을 통해 왕권은 안정되어 갔다. 국왕과 동지적 관계라고 생각하는 신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 법 아래 복종했다. 현재도 우리 사회의 고질인, 최고위층과의 사적 친분에 의한 권력의 사적 점유를 태종은 확실히 단절시켰다. 이렇게 조선은 정상적인 왕조가 되어 갔고, 이런 왕조를 물려주기 위해 태종은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태종④ 세자 교체와 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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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2년(1402) 6월조는 “상이 매일 청심정(淸心亭·개경 수창궁 후원)에 나가서 독서하는데, 덥거나 비가 오거나 그치지 않았다”고 적고 있고, 3년 9월조는 “상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며 독서하는 엄한 과정을 세웠다”고 전하고 있다. 태종은 특히 역사서와 경서(經書)를 열독했다. 역사서에는 현실에 응용 가능한 사례들이, 경서에는 유교국가의 통치 철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왕(嗣王·후계 임금)도 독서가여야 한다고 생각한 태종은 재위 2년(1402) 아홉 살의 원자 이제를 교육시키는 경승부(敬承府)를 설치했다. 그러나 성현(成俔)이『용재총화(용齋叢話)』에서 “세자는 성색(聲色·노래와 여자)에 빠져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고 쓴 것이 정확했다.
태종은 재위 7년(1407) 열네 살의 세자를 숙빈(淑嬪) 김씨와 혼인시키며 그 장인 김한로(金漢老)에게 “경(卿)은 멀리는 심효생(沈孝生·방석의 장인)을 본받지 말고 가까이는 민씨(閔氏)를 경계하여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면서 “나는 호랑이가 새끼를 키우는 것처럼 세자를 엄하게 키우려 한다”고 경계했다. 태종은 재위 3년 시강(侍講) 김첨(金瞻)이 수(隋) 양제가 망한 원인이 성색 때문이었다고 하자 “그렇다! 성색은 실로 천하를 망치는 근본”이라고 동조했다.
태종도 후궁을 두었지만 말년에 총애하던 숙공궁주(淑恭宮主)의 부친 김점(金漸)이 평안도 관찰사 시절 수뢰 혐의로 수사를 받자 “탐오(貪汚)한 사람의 딸을 궁중에 둘 수 없다”면서 출궁시킨 후 다시는 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재위 15년(1415) 세자와 어울리는 기생 초궁장(楚宮粧)이 상왕 정종의 옛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쫓았다. 그러나 세자는 그후에도 구종수(具宗秀)의 사가까지 쫓아다니며 초궁장과 어울렸다. 세자 시강원의 깐깐한 스승 이래(李來)가 사냥용 매(鷹)나 악공(樂工·악사) 때문에 세자와 다툰 일화는 숱하다. 태종은 재위 15년 세자전(世子殿)에 잡인들이 들락거린다는 말을 듣고 세자의 사부 이래와 변계량(卞季良) 등을 불러 “경 등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을 꺼려 세자를 바른 길로 보도하지 못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이래는 세자에게 가서 “전하의 아들이 저하(邸下)뿐인 줄 압니까”(『태종실록』 15년 1월 28일)라며 흐느꼈다. 세자는 몰랐지만 이래는 태종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 문제는 더 심각했다. 전라도 적성(積城·순창)현에 살던 어리는 친족을 보러 상경해 곽선의 양자인 전 판관(判官) 이승(李昇)의 집에 머물렀다. 악공 이오방(李五方)으로부터 어리의 미모와 재예(才藝)가 빼어나다고 들은 세자는 어리를 세자궁으로 납치했다. 축첩(蓄妾)이 합법인 조선에서 어리는 유부녀였다. 양부의 첩을 빼앗긴 이승이 고소하려 하자 세자는 사람을 보내 “내가 한 일을 사헌부에 고할 것인가? 형조에 고할 것인가? 어느 곳에 고할 것인가?”라고 힐난했다. 권력남용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었다. 심지어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과 사적 관계까지 맺었다. 민무구 형제를 옹호하다 사형당한 이무(李茂)의 인친(姻親) 구종수의 집에 가 박혁인(博奕人:바둑·장기 명인) 방복생(方福生), 악공 이오방, 기생 초궁장·승목단(勝牧丹) 등과 어울려 놀았다. 이때 구종수 형제 등이 “저하께서 저희를 길이 사반(私伴·사적 수하)으로 삼아 달라”고 청하자 허락의 증표로 옷까지 벗어주었다. 한마디로 공사 구분이 안 됐다. 태종이 구종수 등을 귀양 보낸 후 다시 목을 벴어도 세자는 변하지 않았다. 태종이 출궁시킨 어리를 장모 전씨를 시켜 몰래 세자전으로 다시 데려왔다. 그래서 태종은 재위 18년(1418) 5월 10일 세자를 구전(舊殿)으로 쫓아냈다. 마지막 경고였다. 그러나 세자는 보름 후에 되레 수서(手書)를 보내 항의했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해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이 첩(妾)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 『 태종실록』18년 5월 30일)
세자는 조사의 난 때 태조를 동북면까지 모셔갔던 신효창(申孝昌)은 죽이지 않으면서 장인 김한로는 왜 처벌하느냐고도 따졌다. 외척까지 옹호하는 것을 본 태종은 세자 교체를 결심하고 정승들에게 수서를 보여 주었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했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 없어서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면서 오직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기를 바랐으나 이제 도리어 원망하며 싫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
태종이 폐위 의사를 밝히자 의정부와 삼공신(三功臣)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료는 즉각 동조 상소를 올렸다. 세자의 비행은 ‘매와 개[鷹犬]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던 황희(黃喜) 등 소수 신하만이 반대였다. 신료 사이에는 양녕의 아들을 대신 세워서도 안 된다는 공감대까지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효령과 충녕 중에서 누가 적당한지를 묻자 “아랫사람이 말할 수 없는 일”이라며 사양했고 태종은 “충녕(忠寧)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몹시 추운 때나 더운 때도 밤새 독서하므로 병이 날까 두려워 야간 독서를 금지했으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태종실록』18년 6월 3일)며 충녕을 선택했다.
영의정 유정현 등은 “신 등이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擇賢]도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례했다. 충녕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뜻밖에도 충녕이 술을 조금 할 줄 알아 명 사신을 접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명(明) 성조(成祖)는 1406년(태종 6) 안남(安南·베트남)을 침략해 호 꾸이 리(胡季이) 부자를 납치해 갓 건국한 호조(胡朝)를 멸망시켰다. 명은 내사(內史) 정승(鄭昇)을 사신으로 보내 이를 조선에 알렸다. 명과의 우호관계는 국체 보존의 핵심 과제였으므로 술을 전혀 하지 못하는 효령(孝寧)은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두 달 후인 8월 8일 태종은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주었다. 태종은 양위의 변에서 태조 이성계가 자신을 거부할 때 ‘필마(匹馬) 한 필만 거느리고 혼정신성(昏定晨省·조석으로 부모를 모심)하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왕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형제와 싸우며 임금이 된 것이 아니란 뜻이었다.
신하들이 말리자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족하다”며 강행했다. 태종은 권력을 호랑이 등에 탄 것으로 여겼다. 자칫하면 호랑이에게 삼켜 먹힐 것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살아생전 후계자 수업을 시키려 했다. 호랑이 등에서 내려온 것으로 태종은 악역이 끝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권력이 호랑이 등에 탄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태종⑤ 마지막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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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 조선에 안남 사례는 큰 공포였다. 태종은 안남 사태를 논의할 때 “나는 한편으로는 지성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을 튼튼히 하고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태종실록』 7년 4월 8일)고 말했다. 침략의 명분을 주지 않는 한편 방어 준비도 철저히 하겠다는 뜻이었다. 세종 즉위년(1418) 8월 왕위 교체를 알리는 사은주문사를 신의왕후 한씨의 친척 한장수(韓長壽)에서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으로 교체한 것도 명과의 외교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세자 교체 직후 왕위까지 바뀐 데 대해 명이 의혹을 품을 수 있었기에 신왕의 장인이자 명나라 환관태감 황엄과 친한 심온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해 9월 태종은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그 존귀함이 비할 데가 없다”면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승진시켰다.
『세종실록』은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 되어 순서를 뛰어넘어 수상(首相)에 오르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고 전하고 있다. 이때 심온은 불과 44세였는데, 『연려실기술』은 “상왕이 그 소문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신하에게 쏠린 권력을 구경하고 있을 태종이 아니었다. 심온이 명나라로 떠나기 보름 전인 8월 25일 발생한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의 옥사’가 심온 제거에 이용되었다. 상왕은 양위 후에도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은 내가 친히 청단하겠다”며 군사권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에 관한 일을 세종에게만 보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태종은 “내가 군사 문제에 대해 듣는 것이 사직(社稷)에 무엇이 나쁘겠냐(『세종실록』 즉위년 8월 25일)”면서 강상인과 병조 낭청(郎廳) 등을 의금부에 하옥해 국문했다.
이들은 모두 군권을 세종에게 돌리려는 뜻이 아니라 ‘사리를 잘 살피지 못한 탓’이라고 변명해 강상인이 함경도 단천(端川)의 관노(官奴)로 떨어지는 것으로 일단락되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심온의 전별식 사건이 발생하자 태종은 이 사건을 재조사시켰다. 임금의 경호부대를 관할하는 동지총제(同知摠制) 심정(沈<6CDF>)이 심온의 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당여(黨與)를 대라는 심한 추궁을 받은 강상인은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날이 저물 무렵 심온의 집에 가서 ‘군사는 마땅히 한곳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했더니 심온도 ‘옳다’고 했습니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22일)라고 심온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강상인이 관련자들과의 대질신문에서 “고초를 견디지 못했을 뿐 실상은 모두 무함(誣陷)이었다”며 고문에 의한 자백이라고 부인하는 등 무리한 옥사였다. 강상인은 심온 귀국 전 수레에 올라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매( 楚)를 견디지 못해 죽는다”고 외치며 능지처참 당했고, 귀국길에 체포된 심온은 관련자 대질을 요청했지만 “이미 황천객이 되었으니 어찌 만나겠느냐?”는 태종의 싸늘한 답변과 함께 사약을 마셔야 했다. 『세종실록』은 충녕이 세자가 된 직후 심온이 “지금 사대부들이 나를 보면 모두 은근(慇懃)한 뜻을 보내니 내가 심히 두렵습니다. 마땅히 손님을 사절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세종에게 이 말을 들은 태종은 ‘심히 옳게 여겼다(즉위년 12월 25일)’고 전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의 다짐을 잊고 전별식 사건을 방치한 것이었다. 세종은 자신도 폐위될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태종은 좌의정 박은에게 “나의 여생은 많지 않고 본 것은 많으므로 이런 대간(大姦)은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자신이 죽기 전에 심온을 제거해 세종에게 안정된 왕위를 물려주려 한 것이었다.
태종은 왜구 문제 해결책도 가르쳐주었다. 우왕 6년(1380) 전라도 운봉(雲峯)에서 왜적을 무찌른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이성계는 왜구 전문가였다. 그래서 건국 후 “옛날과 비교하여 왜적들이 10분의 8, 9는 감소되었다”(『태조실록』 4년 7월 10일)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세종 즉위년(1418)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이 계승하면서 통제력이 느슨해지자 왜구가 다시 창궐했다. 세종 1년(1419)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庇仁縣)을 습격해 만호 김성길(金成吉) 부자를 전사시키자 태종은 격분했다.
그는 세종과 대신들을 불러 ‘허술한 틈을 타서 대마도를 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이때 병조판서 조말생만이 선제공격에 동조하고 나머지는 ‘적이 공격하는 것을 기다려 치는 것이 좋다’고 반대했다. 태종은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漢)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세종실록』 1년 5월 14일)라면서 대마도 정벌을 결정했다. 태종은 신민(臣民)에게 고하는 글에서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던 것”이라면서 군사를 출진시켰다. 이것이 기해동정(己亥東征)인데 그해 6월 19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는 227척의 병선에 1만7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거제도를 떠나 7월 3일 귀환할 때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재정벌이 논의되는 와중인 9월 20일 대마도주 종정성은 예조판서에게 항복하기를 비는 신서(信書)를 바쳤다. “기해동정 이후 왜구들이 천위(天威)에 굴복해 감히 포학(暴虐)을 부리지 못했다”(『세종실록』12년 4월 12일)는 기록처럼 왜구는 크게 위축되었다.
세종 3년 허물어진 도성(都城)의 수축 문제가 나오자 상왕은 눈물을 흘리며 “도성을 수축하지 않을 수 없는데, 큰 역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 그러나 잠시 수고함이 없이 오래 편안할 수 없는 것이니 내가 수고를 맡고 편안함을 주상에게 물려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세종실록, 3년 10월 13일)라고 말했다. 악역은 자신이 맡고 그 공은 후계자에게 돌리겠다는 뜻이다. 미래를 위해 측근 공신을 제거하고 후계자를 미리 양성했으며, 자신을 희생해 내일을 준비한 태종 같은 거인이 그리운 시대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① 시대를 잘못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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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은 “이때 사왕(嗣王·단종)이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의 슬퍼함이 세종 상사 때보다 더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세자 이홍위(李弘暐·단종)는 12세에 불과했으나 모두 그의 즉위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것이 개국 60년 된 조선의 헌정질서였기 때문이다. 미성년의 임금이 즉위할 경우 대비가 수렴청정해야 했으나 그럴 왕대비가 없었다.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와 모후(母后) 현덕(顯德)왕후 권씨는 모두 세상을 떠났고 문종은 부왕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다며 계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정부의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우의정 정분(鄭분)이 단종을 보좌했다. 이정형(李廷馨·1549∼1607)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계유년(癸酉年:단종 1년) 임금은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대군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의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서른여섯 살 수양대군 이유(李유)가 주목 대상이었다. 그래서 대군들의 이심(異心)을 막기 위해 단종 즉위 교서에 분경(奔競) 금지 조항을 넣었다. 이·병조(吏·兵曹) 등의 인사권자를 찾아다니며 엽관운동(獵官運動)을 하는 것이 분경인데, 단종 즉위교서에는 특별히 정부 대신(大臣)과 귀근(貴近) 각처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귀근 각처가 대군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경을 가장 강력하게 금지한 왕은 태종이었다. 태종은 삼군부와 사헌부의 아전(吏)들에게 권세가의 집을 상시 감시하다가 5세(世) 이내의 친족이 아닌 자가 드나들면 무조건 체포해 가두게 했을 정도였다. 조선의 법전인 『속육전(續六典)』은 종친의 정사 관여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과거에는 굳이 대군들을 분경 금지 대상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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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경 금지 조처에서 해제된 것을 계기로 수양은 다양한 사람을 끌어 모았다. 신숙주(申叔舟)나 권남(權擥) 같은 벼슬아치도 있었고, 한명회(韓明澮) 같은 낙방거사도 있었다. 음서(蔭敍)로 종9품 경덕궁(敬德宮:태조의 개경 잠저)지기가 된 한명회를 두고 수양대군은 “예부터 영웅은 처세하기 어려운 법이니 지위가 낮은들 무엇이 해롭겠느냐”고 극찬하면서 국사(國士)로까지 높이 평가했다. 당초 친구 권람에게 수양을 만나보라고 권했던 인물이 한명회였다. 과거에 거듭 낙방한 한명회에게 정상적 헌정질서 속에서는 미래가 없었다. 그는 수양의 야심과 결탁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권람에게 수양을 만나라고 권한 것이다. 한명회는 이미 수양을 임금으로 ‘택군(擇君)’한 것이었다. 수양대군은 지위와 돈과 술을 이용해 숱한 사람을 끌어 모았다.
수양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나라의 동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나라의 지지를 확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단종 즉위년(1452) 9월 10일 수양대군은 스스로 고명(顧命) 사은사를 자청한 것이다. 도승지 강맹경이 “수양대군이 가기를 청하니 사신으로 삼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말하자 단종은 답을 하지 않다가 선왕의 부마(駙馬)를 사은사로 삼자고 제안했다. 이미 수양에게 붙은 강맹경은 부마들이 병들어서 안 된다고 반대했고, 수양대군은 거듭 자청해 드디어 사은사로 낙점되었다.
수양대군 측에서 작성한 『노산군일기(단종실록)』는 이때의 사신 길이 무척 위험한 일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단종 즉위년 10월 11일자는 수양대군이 이복동생 계양군(桂陽君) 이증(李증)에게 “국가의 안위가 이 한 번의 행차에 달려 있으니, 나는 목숨을 하늘에 맡길 뿐이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매일 밤 대왕대비(大王大妃:세조비 윤씨)가 몰래 울었고, 세조도 비통하게 울면서 “나의 충성을 하늘이 알아주기 원한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의 사신 길은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명에서 통상 관례에 따라 단종에게 국왕 책봉 고명(誥命)을 내린 데 대한 답례사일 뿐이었다. 쿠데타를 결심한 수양에게는 ‘이 한 번의 행차’가 중요했는지 몰랐지만 이는 그의 사정일 뿐이었다. 후세의 비난이 두려워 편찬자의 이름도 적지 못한 『노산군일기』는 단종 즉위년 윤9월 27일 종친이 베푼 전별식에서 수양이 홀로 취하지 않자 양녕대군과 태종의 서자 경녕군(敬寧君)이 “이는 천하의 호걸이다. 중국 사람이 그것을 알 것인가”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양녕이 수양에게 “수양은 천명(天命)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도 적고 있다. 임금 이외의 인물에게 ‘천명’이란 용어를 썼다면 그 자체가 ‘역모’였다. 수양은 사신으로 가면서 영의정 황보인의 아들 황보석(皇甫錫)과 좌의정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金承珪)를 일종의 인질로 데려갔다.
이 무렵 명나라의 위세는 땅에 떨어져 있었으나 조선은 태종~문종을 거치며 국력이 크게 신장돼 있었다. 명의 영종(英宗) 주기진(朱祁鎭)은 3년 전인 1449년(세종 31년) 8월 몽골군과 전쟁에 나섰다가 현재의 허베이(河北)성 화이라이(懷來)현 부근의 토목보(土木堡)에서 대패했다. 대군은 궤멸되고 영종은 생포되는 ‘토목의 변(土木之變)’이었다. 몽골군은 베이징(北京)까지 공격했다.
영종은 이듬해 몽골군이 풀어주는 바람에 귀국했으나 베이징 남지자(南池子)에 있는 남궁(南宮)에 유폐되어야 했다. 영종의 동생인 대종(代宗:재위 1449~1457) 주기옥(朱祁鈺)이 즉위했으나 정정 불안이 계속되었다. 수양이 사신으로 간 것은 이런 때로서 주변 국가들이 명을 우습게 볼 때였다. 그러나 양녕은 대종이 예부 낭중(郎中)을 시켜 표리(表裏:겉옷과 속옷)를 하사하자 “황제께서 내리시는 것이니 의리로 보아 앉아서 받을 수 없다”며 일어나서 받았다. 예부 낭중 웅장(熊壯)이 놀라 일어나면서 “조선은 본디 예의의 나라지만 예의를 아는 것이 이와 같다”고 감탄했다고 『노산군일기』는 전한다. 조선 국왕의 숙부가 일개 낭중에게 통상 예법을 뛰어넘어 과공(過恭)한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킬 때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수양은 저자세 외교로 일관함으로써 권위가 땅에 추락한 명 왕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명의 지지를 확신한 수양은 쿠데타를 결심하며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태종처럼 왕위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 때와는 세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태종 때는 질서를 만들던 시기이고 이때는 질서가 잡힌 시대였다. 태종~문종대를 거치며 유학이 사회의 주도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그렇게 유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② 헌정질서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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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란 송석손(宋碩孫)·유형(柳亨) 등은 “마땅히 조정에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우리가 역적이니 죽여 달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수양이 온갖 공을 들여 키운 무사들에게조차 수양의 ‘대의’는 ‘역심(逆心)’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노산군일기’는 수양의 말을 듣고 ‘북문 쪽으로 도망가는 자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아무런 명분이 없는 쿠데타였다.
다급해진 수양이 한명회에게 “대다수 사람이 불가하게 여기니, 장차 어떤 계교가 좋겠는가”라고 묻자, 쿠데타에 인생을 건 한명회는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완성할 수 없습니다. …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라고 답했고, 홍윤성(洪允成)도 “군사를 쓰는 데 이럴까 저럴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해(害)입니다”라며 결행을 촉구했다.
부인 윤씨가 갑옷을 갖다 입히자 수양은 가동 임어을운(林於乙云)과 무사 양정(楊汀) 등을 거느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갔다. 김종서에게 “정승(政丞)의 사모(紗帽) 뿔을 빌립시다”라고 말해 경계를 느슨히 한 다음 청이 있다면서 편지를 건넸다. 김종서가 달빛에 편지를 비춰보는 순간 수양의 재촉을 받은 임어을운이 철퇴로 내려쳤다. 아들 승규가 아비를 구하기 위해 몸으로 덮자 양정이 칼로 찔렀다. 두만강 육진(六鎭) 개척의 원훈(元勳) 김종서가 이렇게 쓰러지면서 조선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꾸는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시작된다.
수양 측에서 작성한 ‘노산군일기’는 이때 “노산군이 환관 엄자치(嚴自治)에게 명해 궁중의 술(內온)과 음식(內羞)으로 세조(수양) 이하 여러 재상을 먹였다”고 전하지만, 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李廷馨)의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譜錄)’은 “숙부는 나를 살려주시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두려워하는 단종을 협박해 대신들을 부르는 명패(命牌)를 내리게 한 수양은 문(門)마다 역사들을 배치했다.
‘본조선원보록’은 이때 ‘한명회가 ‘생살부(生殺簿)’를 들고 문 곁에 앉아 있다가 ‘사부(死簿)’에 오른 대신들을 때려죽이게 했다’고 전한다.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李穰),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이 명패를 받고 입궐하다가 죽임을 당했고, 윤처공(尹處恭)·조번(趙藩)·원구(元矩) 등은 집으로 쳐들어 온 역사(力士)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때 죽은 이현로(李賢老)는 단종 즉위년 윤9월 이미 수양에게 구타당했던 문신이었다. 감여(堪輿:풍수)에도 능했던 그는 “백악산(白嶽山) 뒤에 궁을 짓지 않으면 정룡(正龍:종손)이 쇠하고 방룡(傍龍:지손)이 발(發)한다”라고 말했었는데, 그의 말대로 백악산 뒤에 궁을 지으면 지손인 수양은 국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구타했던 것이다.
다음날 수양은 영의정부사·영경연·서운관사·겸판이병조사(領議政府事·領經筵·書雲觀事·兼判吏兵曹事)가 되었다. 혼자서 의정부와 이·병조를 모두 차지했으니 ‘왕’이란 말만 빠진 사실상의 임금이었다. 살육전은 계속되어 수양의 친동생 안평대군, 선공부정(繕工副正) 이명민 같은 왕족들과 허후(許후)·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지정(池淨)·이보인(李保仁)·이의산(李義山)·김정(金晶)·김말생(金末生) 등이 죽임을 당했다. 국왕을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죽인 후 그 시신 위에서 축제를 열었다. 쿠데타 닷새 후인 단종 1년(1453) 10월 15일 수양대군·정인지·한확(韓確)·한명회·권남 등 14명을 1등공신, 신숙주 등 11명을 이등공신으로 하는 43명의 정난공신이 책봉되었다.
태종 즉위년(1401)의 좌명공신(佐命功臣) 이후 52년 만의 공신 책봉이었다. 공신의 자손들은 범죄(犯罪)해도 영원히 용서하는 특혜가 주어졌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제거했던 특권층이 다시 부활하는 역사의 반동이었다. 살해당한 사람들의 토지와 노비를 난신전(亂臣田)이란 명목으로 나누어 가졌고, 급기야 그 가족들까지 죽였다.
처음에 가족들은 ‘변군(邊郡)의 관노(官奴)’로 삼았으나 계유정난 10개월 후인 단종 2년(1454) 8월 15일, 추석제를 지내고 환궁하다가 중량포(中良浦)의 주정소(晝停所)에서 살해령을 내린 것이다. 단종의 명을 빙자했지만 “대신의 의논도 이와 같았다”는 기록처럼 수양대군이 주도한 것이다. “이용(李瑢: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과 황보석(皇甫錫:황보인의 아들)의 아들 황보가마·황보경근,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金木臺), 김승규의 아들 김조동(金祖同)·김수동(金壽同), 이현로의 아들 이건금(李乾金)·이건옥(李乾玉)·이건철(李乾鐵)… 그리고 정분(鄭분)·이석정(李石貞)·조완규(趙完珪)·조순생(趙順生)·정효강(鄭孝康)·박계우(朴季愚) 등을 법에 의하여 처치하라.(‘노산군일기’ 2년 8월 15일)”
39명을 추석날 사형시킨 것이다. 태종은 정도전을 죽이고 아들 정진(鄭津)을 수군으로 삼았으나 재위 7년(1407) 판나주(判羅州) 목사로, 상왕 시절인 세종 1년 충청도 도관찰사까지 승진시켰다. 선 자리가 달랐기에 정도전은 제거했어도 자식은 종2품까지 승진시켰던 것이다.
단종은 재위 2년(1454) 수양에게 “숙부는 과인(寡人)을 도와 널리 서정(庶政)을 보필하고… 희공(姬公:주공)으로 하여금 주(周)나라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을 독점하지 말게 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조카 성왕(成王)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소문과 달리 끝까지 조카를 보좌함으로써 공자가 성인(聖人)으로 추앙했던 주공(周公)이 돼 달라는 애원이었다. 단종은 여러 차례 수양을 주공(周公)에 비유하는 글을 내렸으나 수양은 애당초 주공이 될 생각이 없었다.
수양은 단종 3년(1455) 윤6월 친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세종의 서자 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 등 단종을 지지하던 왕족들을 귀양보내 압박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단종은 그날 환관 전균(田畇)을 시켜 수양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세조실록’은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고 전하지만 ‘육신록(六臣錄)’은 “밤에 수양대군이 철퇴(鐵槌:쇠몽치)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자 단종이 용상에서 내려와, ‘내 실로 왕위를 원함이 아니로소이다’라면서 물러났다”고 전한다. ‘육신록’이 신빙성이 있는 것은 바로 그날 수양이 근정전 뜰에서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즉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위에 성공한 수양은 한명회·신숙주·한확·윤사로 등 7명을 1등공신으로 하는 총 47명의 좌익(左翼)공신을 다시 책봉했다.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은 수양이 왕위를 빼앗을 때 ‘승지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하니 수양이 머리를 들고 그 광경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수양이 왕위까지 빼앗은 것은 시대가 용인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을 넘은 것이었다.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자리잡은 조선에서 수양의 행위는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에서 주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비판한 찬탈(簒奪)에 지나지 않았다. 세종 때 집현전 등을 통해 성장한 유학자들이 이 명분 없는 쿠데타에 강력히 반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③ 사육신·생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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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조실록』이 “낮인데도 어두웠다(晝晦)”고 쓰고 있는 다음날. 성균관 사예(司藝) 김질(金질)과 장인인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이 대궐로 달려가 ‘비밀리에 아뢸 것이 있다’면서 충격적 사실을 털어놓았다. 성삼문(成三問)이 김질을 찾아와 “이러한 때를 맞이해 상왕의 복립(復立)을 창의(唱義)한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라며 세조를 죽이려 했다는 고변이었다. 세조는 즉시 호위 군사를 모으고 승지들을 급히 불러 좌부승지 성삼문을 꿇어 앉혔다. 세조가 “김질과 무슨 일을 의논했느냐?”고 묻자 성삼문은 한참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김질과 면질(面質)하고 나서 말하겠다”고 답했다. 김질이 다시 입을 열자 성삼문은 “다 말할 것 없다”고 말을 막았다. 세칭 사육신(死六臣) 사건, 곧 상왕 복위 기도 사건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같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들과 유응부(兪應孚)·성승(成勝)·박쟁(朴쟁) 같은 고위급 무신들이 결합한 사건이었다.
명 사신 접대 연회에서 성승·유응부·박쟁이 임금 뒤에 칼을 차고 시위하는 별운검(別雲劍)으로 뽑힌 것이 기회였다. 그러나 광연전이 좁고 덥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폐지하면서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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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일당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박팽년이 자백한 관련자만 박팽년과 부친 박중림(朴仲林), 성승·성삼문 부자, 하위지·유성원·이개·유응부·김문기·박쟁·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 등 14명이었다. 세조 일당은 관련자의 부친과 형제, 아들들을 모두 죽여 대를 끊었다. 그러나 『선조실록』 36년(1603) 4월조는 박팽년의 유복(遺腹) 손자 박비(朴斐)는 딸을 낳았다고 속이고 죄인들을 점검할 때마다 여종을 대신 바쳐 죽음을 면했다고 전한다.
이 사건은 세조의 즉위 명분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영조 40년(1769) 『장릉지(莊陵誌)』의 서문을 쓴 남학명(南鶴鳴)은 “조정에서 금지령을 내렸으나 집집마다 『육신전』을 간수해 두고 외우다시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세조는 공자의 말대로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건 직후 세조는 8도 관찰사에게 “아직도 소민(小民)들이 두려워할까 염려하니, 소민들을 경동하지 않게 하라”는 전지를 보내 백성의 소요를 두려워하는 심경을 드러냈다. 용안(龍眼)이란 무녀(巫女)가 ‘금년에 상왕께서 복위하시는 기쁜 일이 있다’는 점을 친 사실이 드러나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사회 불안이 계속되었다. 세조는 공신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지 않으면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그래서 수백 명에 달하는 부녀자를 종친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일례로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는 정인지가, 조완규(趙完圭:김종서의 측근)의 아내 소사(召史)와 딸은 신숙주가, 유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와 딸은 한명회가 차지했다. 조선 중기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월정만필(月汀漫筆)』이 ‘신숙주가 노산군의 왕비 송씨를 받으려 했다’고까지 전하는 것처럼 몇 달 전만 해도 동료의 부인이거나 딸이었던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나 여종으로 삼은 이들의 행위는 패륜으로 인식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유 토지까지 나누어 가졌다. 장물을 나눔으로써 결속을 강화하는 식이었다.
세조는 그해 6월 21일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귀양 보냈는데, 『육신록』은 ‘풀로 엮은 집이요, 사면에 가시울타리를 둘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세조 일당은 단종의 생존 자체에 공포를 느꼈다. 단종이 살아 있는 한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연 이듬해(1457)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 간 세조의 친동생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기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신숙주는 “이유(李瑜:금성대군)가 또 노산군을 끼고 난역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노산군도 편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단종의 사형을 선창했고, 정인지가 “노산군은 반역을 주도했으니 편안히 살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가세했다. 양녕·효령대군도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라고 가담했다. 과거의 임금을 죽이자고 청하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훗날 선조 때 쓰인 『대동운옥(大東韻玉)』이 “수상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고 비판하고, 이덕형(李德馨)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서 “그 죄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 되고, 신숙주가 다음이다”라고 전하는 것처럼 후세까지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세조실록』은 금성대군과 장인 송현수가 사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문신 이자(李자)가 『음애일기』에서 자살설을 부정하면서 ‘여우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의 간사하고 아첨하는 붓 장난이니, 실록을 편수한 자들은 모두 당시에 세조를 따르던 자들이다’고 비난한 것처럼 조작의 혐의가 짙었다. 『병자록(丙子錄)』은 사약을 가지고 간 금부도사가 왕방연(王邦衍)이라고 적고 있고, 훗날 『숙종실록』에도 이 사실을 적고 있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육신록』과 『단종출손기(端宗黜遜記)』는 금부도사가 나타나자 단종이 하늘을 우러러 “푸른 하늘이 이렇게 앎이 없단 말인가?”라고 탄식하고, “돗개무리(개·돼지)가 어느 면목으로 차마 일월(日月) 아래 다니느냐”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금부도사가 엎드린 채 울자 공생(貢生:관가의 심부름꾼)이 활시위로 단종의 목을 졸랐는데, 공생은 문밖을 채 나가지 못하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고 『육신록』 등은 전한다.
세조의 찬시(簒弑:왕위를 빼앗고 죽임)는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가치관이 붕괴되었고, 왕실은 충성의 대상에서 극복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육신전』의 저자 남효온(南孝溫)과 5세 신동 김시습(金時習)은 과거 응시를 거부해 생육신(生六臣)으로 남았다. 엄청난 사회적 자산이 낭비되었던 것이다.
특권층 1만 명의 천국, 백성들에겐 지옥이 되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세조④ 공신들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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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9월 한명회·신숙주·한확 등 8명을 1등 공신으로, 모두 46명의 좌익공신이 책봉됐다. 1등 공신은 전토(田土) 150결(結)과 근수(근隨 :수행 몸종) 7인, 반당(伴당 :사환) 10인, 노비 13구(口), 백금(白金) 50냥(兩), 내구마(內廐馬) 1필이 주어지는 등 막대한 부상이 뒤따랐다. 세조 때 공신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공신과 그 자손들을 법 위의 특권층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공신 범죄에 대한 세조의 원칙은 ‘공신은 사형죄를 범해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세조실록』 8년 2월 30일)’는 것이었다. 본인은 물론 그 자손까지 정안(政案:인사안)에 “몇 등 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고 기록해 어떤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았다.
조선이 일반 양인(良人)은 물론 노비까지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사헌부(司憲府)의 감찰 기능 때문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사헌부에 대해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고 협잡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맡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신들도 길에서 사헌부 관리들을 보면 피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세조 3년(1457) 4월의 사헌부는 ‘공신의 처첩(妻妾) 중 범죄를 저질렀으나 면죄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라면서 “지금부터는 공신의 조부모·부모·아내 및 공신의 자손과 자식이 있는 첩(妾)까지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면하게 하소서”라고 주청했다. 감찰권을 쥔 사헌부가 이 정도였으니 통제받지 않는 공신집단의 불법행위는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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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도 공신의 자손들과 북단(北壇)에서 회맹하고 ‘자자손손(子子孫孫) 오늘을 잊지 말라’는 회맹문을 발표했다.
세조 3년(1457)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공신의 모친들을 내전(內殿)으로 초청해 잔치를 베풀자 세조는 그 아들들을 사정전으로 불러, ‘어머니가 잔치에 나와서 그 아들을 특별히 부른 것이니 각자 실컷 마시고 배불리 먹으라”고 가족처럼 대했다. 공신 사이의 결속만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세조는 궁궐에서, 또는 공신의 집으로 자주 행차해 연회를 베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북부(北部)조에 “홍윤성(洪允成)의 집은 숭례문 밖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다녀간 일이 있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세조 2년(1456) 5월 경연에서 시독관(侍讀官) 양성지(梁誠之)가 “어두운 밤중에 민가 사이를 세자, 훈신(勳臣:공신)과 함께 행차하시니 신은 불가하게 여깁니다”라며 중지를 요청했으나 세조는 “밤에 공신들과 연회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공신들의 불법행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헌부나 형조에서 고소장 자체를 접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기록이 드물다.
예종 때 『세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사초를 고치다가 원숙강(元叔康)·강치성(康致誠)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민수(閔粹)는 관노(官奴)로 떨어졌는데 민수가 ‘사초를 고치고 삭제한 것은 실로 재상(宰相)을 두렵게 여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공신 범죄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이유를 말해준다.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朴東亮)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정난 2등 공신 홍윤성의 불법행위가 전해진다. 홍윤성이 문 밖 시내에서 말을 씻기는 사람을 보고 사람과 말을 함께 죽였고, 늙은 할머니의 논을 빼앗고는 땅문서를 들고 와서 호소하는 할머니를 바위 위에 엎어놓고 모난 돌로 쳐서 죽이고 시체를 길가에 두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에는 광해군 때의 문신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부溪記聞)』을 인용해 더한 이야기를 전한다. 홍윤성이 곤궁할 때 30년 동안 돌봐줬던 숙부가 이조판서가 된 홍윤성에게 벼슬을 청탁했다는 것이다. 홍윤성이 논 20마지기를 요구하자 숙부가 옛일을 거론하며 항의했고 홍윤성은 숙부를 때려 죽였다.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도 사헌부도 받지 않았다.
세조가 온양에 갈 때 숙모는 전날부터 버드나무 위에 올라가 기다렸다가 세조의 행차가 이르자 크게 호곡했는데, 세조가 사람을 시켜 묻자 ‘권신(權臣)과 관계된 일이라 한 걸음 사이에도 반드시 그 말 내용이 바뀔 것’이라며 직접 말하겠다고 해서 세조는 정상을 알았으나 홍윤성 대신 그 종만 죽였다는 이야기이다. 공신들의 탈법이 빈발하자 세조는 재위 3년(1457) ‘공신들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의(故意)로 범죄하니 금후에는 3차까지는 논죄하지 말고, 그 후에도 범법하면 승정원이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무한정 불법 허용에서 3차까지 불법 허용으로 공신범죄법이 강화된 셈이다.
세조 5년(1459) 6월 원종 2등 공신인 북청부사(北靑府使) 서수(徐수)는 백성 고현(高玄) 등이 부사의 잘못을 관찰사에게 호소했다는 이유로 곤장을 때려죽였다. 형조는 참대시(斬待時:춘분~추분을 피해서 참형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으나 세조는 공신이라고 용서했다. 세조 7년(1461) 1월에는 원종 3등 공신 이백손(李伯孫)이 아내 천종(千從)이 죽자 처제 종이(從伊)와 간통했으나 종이만 처벌받았다. 원종공신이 이 정도니 정공신은 말할 것이 없었다.
세조 7년 5월에는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의 관노 화만(禾萬)이 좌익 3등 공신 황수신(黃守身)에게 부친과 조부의 땅을 빼앗겼다고 사헌부에 고소했으나 정작 옥에 갇힌 것은 화만이었다. 사헌부에서 황수신이 실제로 땅을 빼앗았다고 보고하자 세조는 “황수신은 죄가 없다. 다시 말하지 말라”고 억지를 부렸다. 수양대군 시절 종이었던 좌익 3등 공신 조득림(趙得琳)은 세조 7년 종복(從僕)을 대거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오다가 제지하는 시위 군사를 구타했다.
군사가 군무를 총괄하던 진무소(鎭撫所)에 고발했으나 진무는 두려워 보고도 못할 정도였다. 태종이 피의 숙청을 통해 법 아래의 존재로 끌어내린 공신들을 세조는 법 위의 존재로 끌어올렸다. 태종이 국가권력을 천명(天命)의 실현 도구로 생각했다면 세조는 공신집단의 사적 이익실현의 도구로 사용했다. 혁명아 정도전이 계구수전(計口受田: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줌)의 이상으로 건국했던 조선이 세조의 왕위 찬탈로 공신들의 천국이자 백성들의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첫댓글 이거 가져가서 자세히좀 읽을게요~~~ 감사~~ 안되면 쪽지주심 삭제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