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표지인 성례의 신실한 시행
칼빈이 제네바교회를 섬기면서 했던 최초의 시도가 시급한 개혁과제로 제출한 ‘네 가지의 제안’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바대로입니다. 칼빈은 파렐, 꾸롤 등의 동역자들과 함께 「제네바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을 시의회에 제출하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성찬(주의 만찬)을 거룩하게 시행하는 것과 이를 순결하게 운영하기 위한 제반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칼빈의 이러한 입장은 앞서 출판했던 기념비적인 저서에서부터 주장했던 것으로, 기독교강요91536)에서 주의 만찬은 매주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CO 10a:7). 그의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1년에 한 번 시행하던 당시의 관습에 대해 단호히 ‘마귀가 만든 것’이라면서 강력하게 비판했습니다(4.17.46).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에 주신 성례에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례에는 언약의 가정에 주신 자녀라는 차원에서 유아에게 세례를 주는 것도 포함되지만, 성찬의 경우 그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을 것이 요구되므로 유아들은 참석할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성례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신중하게 시행되는 데서 교회다운 특징이 있는 것이지만, 실제 상황을 보면 우려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난무합니다. 세례와 관해서는 너무 무분별하게 시행되는 모습이고, 성찬과 관련해서는 반대로 너무 드물게 시행되는 양 극단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그것에 내포된 진리를 잘 살려낼 때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함부로 시행할 수 없다는 각성 하에 대부분의 교회들로서는 일 년에 한 두 차례 시행하는 것이 지금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경향입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그렇게 될 경우 성찬은 그야말로 일종의 형식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찬 시행을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여김에 있어온 교회가 자초한 모순일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성찬을 가져나가는 것에서도 인간의 본성에 자리하고 있는 죄는 여지없이 그 속성과 함을 발휘하고 있는 것에서입니다. 해서, 성찬이 매주 시행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가져 자주 시행하면 좋은 전통으로 교회에 자리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하나의 관습으로 전락해 나가고, 그렇다고 해서 이 부작용을 염려하여 단순히 반대의 입장을 취하면 나아지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이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는지요. 내부적으로 부단한 개혁을 실시해야 합니다. 애초부터 성찬을 빈번하게 실시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외적인, 그리고 내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먼저 외적인 요인으로는 부흥을 이유로 교회의 대형화를 꾀함으로써 많은 교세를 갖춘 교회로서는 많은 교인을 대상으로 주님의 만찬을 거룩하게 가져나갈 수 없고 다만 의식적(儀式的)으로만 가져나감으로 이것이 오랜 세월 속에서 고착화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을 대상으로 성찬을 거룩하게 실시할 수 있으려면, 그리고 평소에 적법한 자격자라 할지라도 좀 더 영적 각성이 고양될 수 있으려면, 그리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전체 교인들을 경성시킬 수 있으려면 교회로서는 여간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교인으로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사실로 성찬의 빈번한 시행과 그때마다 신실한 시행에 있어야 할 것이 암초에 부딪혀 파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가 하면 내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주님의 피에 의한 죄사함의 새언약’ 체결이 영속성을 가지고서 지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의 살에 의한 한 몸의 연합’에 있어 죄 사함 받은 한 믿음으로 한 분 생명의 주님을 섬김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인 형제요 자매인 사실을 인식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가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깨어 있는 정신과 마음에 있지 않음으로 성찬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을 살려가는 것에 있지 못하고 매주 또는 매월 시행하든지 일 년에 분기별로나 몇 차례만 실시하든지간에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으므로 별 상관이 없이 교회가 실시하는 것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참여하는 실정입니다. 혹, 성찬을 신중하게 실시하려는 의도 때문에 자주 성찬 을 갖지 않고 드물게 실시한다는 이유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다가 성찬을 실시하는 날짜가 닥쳐옴에 따라 마치 기념일을 갖고서 기념행사를 치르는 듯한 태도로 의식을 가져나가는 실정에 있는 작금의 모습이란, 그것을 거룩한 시행에 있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더럽힘에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작금의 교회가 스스로 거짓 교회로 전락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교회 스스로는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 사실을 인지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자기 수렁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성찬이 본래의 의도대로 잘 시행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의식이 뛰어나야 하고, 실제적인 경건으로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외적인 그리고 내적인 요인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도 이 문제 앞에서 난관에 처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주 예배 때마다 성찬이 실시되어 말씀과 함께 하여야 한다는 것은 성경 사상에 따른 불변의 확신이었지만, 당시의 교회 형편의 상황과 수준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칼빈도 매주 성찬을 실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칼빈이 처음부터 그러한 교회가 되게 한 것이 아니었고. 그러한 상태의 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던 형편에 처해있었던 것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비록 성찬의 빈번한 실시에 확신을 갖고 주장하였지만 “전혀 예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참여로 성찬이 더러워지면 안 된다”는 입장도 칼빈에게는 확고부동했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평소부터 교육과 훈련(권징)을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교육과 훈련(권징)은 주님께서 자시의 교회에 주신 ‘가장 유익하고 이루온 것들 중의 하나’이므로 교회로서는 이 규례를 잘 지켜야만 참된 교회의 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표지 갖추기’를 최고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부흥이나 선교도 그 다음의 문제이고, 구제도 나중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명분하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교회의 부흥이란, 성령께서 구원 얻게 하는 진리인 말씀을 쓰시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여야 하는 것으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 인위적으로 조작해 내는 것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거듭 강조하게 되는 것이지만, 올바른 말씀 선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정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실을 도외시하고 성찬을 시행하는 것에 있어서도 안 되겠거니와 이 사실을 도외시하는 때문에 성찬을 시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소홀히 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그럴 경우 그 모두는 그 자체로서 교회의 표지를 저버리는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성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있어 그 시행을 신실히 가져나감에 교회의 온 성도가 신경을 쓰며 애써 나감에 있다면, 그 교회는 참으로 교회의 표지를 잘 드러냄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고려할 것이 있습니다. ‘개혁교회를 이룸에 대하여’에서 예배의 개혁에 있어 온 것에서 성찬을 다룰 때 언급을 한 것입니다만, 다시 한 번 여기에서 그대로 말하고자 합니다. 주일예배에서 매주 말씀선포의 설교가 시행되는 것에 반해 성찬이 매주 시행에서 빠진 것은 칼빈에 의한 예배관에 의하면 아직 예배의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는 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거듭 언급하거니와, 칼빈은 매주일 성찬을 가져나가기를 원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찬으로 이루어진 예배를 온전한 예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해서 일 년에 성찬을 몇 차례 시행하거나 분기별로 성찬을 시행하는 것에서 이보다 더 자주 행해지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하여 나을 것이기에 제언하는 것은 마땅할 것입니다. 이에 그렇게 하고자 하지만 부득이함으로 그러지 못할 때 그 대체를 고려하게 됩니다. 그것으로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에서 대개의 경우 예배 후에 갖는 성도의 식탁에서 가져나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과거의 한국 교회는 주일예배를 아침예배와 저녁예배로 가져나갔습니다만,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 거주자의 예배 참여가 교회 지역을 벗어난 거주자 중심에 의한 예배 참여로 변화를 갖게 되면서 거주자의 상황에 의해서 주일예배가 오전예배와 오후예배로 가져나감으로 오전예배 참여자가 오후예배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점심을 해결할 수 있도록 식사를 제공하게 됨으로,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에 의한 식탁이 마련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까닭에 주일예배는 오전과 오후로 이어져가는 상황에서 그 의식이 단순화되는데, 예배시간 또한 아주 제한적으로 가져나가야 하는 실정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발생하는 개교회적인 문제는 잘 대처해 나가야겠습니다만, 오전예배와 오후예배 사이에 갖게 되는 점심의 식탁은 매주일 시행하기 어려운 성찬의 의미를 살려나가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성찬 그 자체는 ‘주님의 만찬’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가진 식탁에서 음료와 떡을 제공하시는, 주께로부터 주어지는 그분의 피와 그분의 살이 갖는 대속에 의한 죄 사함과 부활에 의한 영원한 생명에 있어 이를 기념(기억)하여 그 은혜를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에 있는 것이므로, 이를 교회가 정하여 실시하는 성찬의 시행과 함께 매주 갖는 주와 함께 하는 성도의 식탁에서 의미 있게 가져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매주 교회가 주의 이름으로 베푸는 주의 식탁을 가볍게 가져나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후예배에 참여하기 위해서 단지 점심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이 식사의 자리를 갖는 것을 통해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요 6:51) 라고 하신데 따라,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눅 22:19; 고전 11:25) 라고 하신 떡과 음료를 마심에 의해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에 있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의 믿음의 일체(一體)에 있는 형제와 자매가 같이하는 자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본 글은 주언개혁교회(장수민목사 시무)의 안내서인 '주언개혁교회(Guide Book for the Life of Jooeon Reformed Church)'에 의해서 허락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 글 내용과 전개를 그대로 따르면서 부천개혁교회에 보충, 보완이 필요한 부분만 더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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