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15] 운문(雲門) 도일설(倒一說) - 한말씀도 설하지 않으셨을꺼야
제 15 칙 운문(雲門) 도일설(倒一說) 한말씀도 설하지 않음
수시(垂示)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검은 옛부터의 규범이며 오늘에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자 일러라. 지금 당장 어떤 것이 살인도이고 활인검인지를. 아래 본보기를 잘 살펴보라.
垂示云, 殺人刀, 活人劒, 乃上古之風規, 是今時之樞要.
且道, 如今那箇是殺人刀, 活人劒. 試擧看.
수시운, 살인도, 활인검, 내상고지풍규, 시금시지추요.
차도, 여금나개시살인도, 활인검. 시거간.
본칙(本則)
어떤 스님이 운문에게 물었다.
'설법을 듣는 사람도, 설법을 할 일도 없다면 그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운문이 말했다.
'한 말씀도 안했을꺼야(도일설 倒一說).'
擧. 僧問雲門, 不是目前機, 亦非目前事時如何.
門云, 倒一說.
(거. 승문운문, 불시목전기, 역비목전사시여하.
문운, 도일설.)
* 온갖 교판 사상으로 무장을 한 스님은 전칙의 대일설이란 한마디를 듣고 물러나기에는 뭔가 억울했던 것 같다. 몇십년 공부가 운문의 말한마디에 끝장이 나다니 억울할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자. 억울해하여야 할 일인가를.
자신의 공부의 미진한 점을 운문이 탁 깨우쳐 주었으면 응당 그 시원함에 절을 올리고 물러서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그런데 이 스님 지나치게 승부욕이 강했던 것 같다. 본전생각이 났다고나 할까. 한 수 더 겨루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진 싸움을 본전생각이 나서 더 끌어보았자 얻는 것은 망신뿐이고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한심한 모습일 뿐이다.
교학의 문제는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선적인 도리로 한 판 붙어보자. 여러 선어록을 살펴 보았던 이 스님, 공안의 구성도리를 조금은 안 모양이다. 선적인 방식으로 나름대로는 공안이랍시고 퀴즈같은 것을 하나 구성해 보았다.
부처님의 말씀은 시절인연에 따라 가장 적절하게 진리를 표현한 것이란 스님의 말씀을 옳다고 칩시다. 그러면 본래 진리의 입장에서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을 터이니(本來無一物), 설법을 들을 대상(機)도 없고 설법을 하는 그 자체(事)도 없고, 설법을 할 때(時)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부처님이 하셨을 법문을 스님께서 한 번 해 보십시오. 대충 이런 취지의 질문이 스님이 구성한 퀴즈라 할 수 있겠다.
선사의 답변을 언제나 질문자의 마음을 향하여 이루어 진다. 잔뜩 교학으로 무장한 이 스님이 갑자기 선적인 도리 같은 것으로 무장하고 질문을 하자 운문스님 그 즉시 한말씀 내린다. 체(體)에 대한 질문에 용(用)으로서 답을 해 버렸다. 번개보다도 빠른 변신이다.
법을 설할 대상도 때도 내용도 없다면 그대가 말한 설법이란 것이 이루어질 조건이 전혀 갖추어 진 것이 아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한 것이 아니니 부처님이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어느 곳에서 이것이 진리이다 하고 법을 설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아직까지 교리에 또는 선이라는 지식에 조금 더 예쁘게 봐 준다면 공(空)에 폭 빠져 있어 펄펄 살아 움직이는 진리의 작용을 보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대가 말하는 공이 정녕 텅 빈 것인지 아니면 두두물물에서 사랑과 지혜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인지 그대 스스로 잘 살펴 보려무나.
참진리를 깨달으신, 참진리 그 자체가 되어버리신 부처님께서 지나가는 놈 아무나 막 붙잡고 이것이 진리이니 그대는 이렇게 살아야만 한다 라고 강요를 하겠는가. 아니면 그 사람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빛나고 있는 불성을 더욱 무르익게 도와 주시다가 때가 되면 한말씀으로 탁 틔워 주시겠는가. 공의 논리로 나를 유도하는 그대의 함정에 나는 용(用)의 도리를 가르쳐 주고 싶다. 이러한 용을 모른다면 그대가 알고 있는 공도 죽은 공에 불과할 뿐 참된 공의 이치는 될 수 없다. 히말라야의 물을 소가 먹으면 우유를 만들지만 독사가 먹으면 독을 만드는 법이다. 공에 빠진 그대여, 공(空)의 심오한 이치로 우유를 만들고 있는지 독을 만들고 있는지 그대 스스로를 돌이켜 잘 살펴 보거라.
도일설에 담긴 운문스님의 한없는 뜻을 일부 풀어 보았다. 도일설이란 이 한마디는 음미할수록 더욱 깊은 맛을 풍긴다. 일상사에서도 늘 느낄 수 있는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을 경계한 말씀이다.
무언가를 조금 알았다고 하여 나머지를 거기에 억지로 꿰어 맞추다 보면 반드시 무리가 생기고 마침내는 알았다고 하는 것이 조금 모자란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됨이 우리의 삶이다. 공의 심오한 도리를 맛보았으면 그 이치가 살아있는 삶 자체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야 한다. 삶에 반영되어 향기를 풍기지 못하는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도 아니다. 그냥 책속의 생명없는 문자일 뿐이다. 그런데 대부분 생명없는 문자를 참진리로 오인한다. 자신이 쓸 수 없는 진리를 다 쓰는 양 착각을 한다. 우둔한 이가 책만 잔뜩 쌓아놓고 다 알았다고 행세하는 격이다.
화엄경 십지품의 첫 번째는 환희지이다. 왜 시작이 환희인가. 무언가를 알게 되면 기쁨이 앞서게 때문이다. 부처님의 진리를 맛보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모습을 살펴보고 나를 지배해 온 지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안 순간 온 몸에는 희열이 솟는다. 올바른 길을 찾은 기쁨 내게는 온통 기쁨 뿐이다. 하늘 끝까지 닿는 이 기쁨 이 즐거움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자나가는 사람들 붙잡고 미친 놈 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전해주고 싶다. 잘못된 삶들을 다 깨우쳐 주고 싶다. 기쁨의 이면에는 강열한 전달의 욕구가 있다.
환희지의 다음인 보살2지는 이구지(離垢地)이다. 어째서 때(垢) 더러움을 벗어나는 것이 진리를 맛본 환희지 다음에 위치하는가. 기쁨에 취하다 보면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어리석음에 잘못 이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동기는 좋은데 과정과 결과가 나쁜 여러 모습을 우리는 많이 접하게 된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하여 도둑질을 하였다면 그는 도둑에 불과할 뿐이다. 그가 생각한 좋은 일이란 것도 자신의 중생심의 발로였을 뿐임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욕심이 앞선 것이라고나 할까. 진리의 문에 들어선 기쁨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업식의 사기작용에 휘말린 것이라고나 할까. 기쁨을 그대로 유지한체로 한없이 솟아나오는 업식의 사기작용을 맑혀야 한다는 가르침이 바로 환희지다음에 이구지를 배당한 혜안이라 짐작된다.
도일설. 공의 도리에 기뻐하고 있는 스님에 대한 운문스님의 자상하고도 애틋한 가르침이 바로 환희지에 취하고 있는 이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경계한 말씀이다. 이구지의 의미를 가리키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동기는 그렇지 않은데도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환희지에 취하다 보니 환희지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묵은 때 업식에 휘말린 사람들이다. 불교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여 불교를 결과적으로는 욕보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매정하게 뿌리치거나 외면만 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의도를 살리되 그들의 업식에 빠지지않도록, 아울러 스스로 잘못을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하고도 따끔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그들 모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소중한 도반들이다. 상불경보살의 표현을 빌리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되실 분들'이다.
도일설에 담겨있는 운문스님의 깊고 넓은 사랑이 우리에게도 전달되어 우리 자신 운문스님만큼은 못될지라도 나름나름의 사랑을 주위에 따뜻이 드러내 보자. 선을 맛본 사람들이라면 운문의 도일설로 스스로를 경계하며 더욱 겸손하고 진지해야 할 것이다.
* 운문스님의 다른 공안에 이런 것도 있다.
'최고의 진리로 나아가는 외길이란 어떤 것입니까(問 如何最向上一路)'
'구구는 팔십일(師云 九九八十一)'
잘 음미해 보았으면 한다.
송(頌)
도일설은 대일설의 한부분.
생사를 같이할 뜻 각별하기도 하다.
팔만사천 대중들 모두 다 장님,
삼십삼 조사 모두 호랑이 굴에 들어갔네.
훌륭하고 또 훌륭하여라.
어지럽고 바쁘게 흐르는 물속의 달이여.
倒一說分一節. 同死同生爲君訣. 八萬四千非鳳毛. 三十三人入虎穴.
別別. 擾擾 悤悤水裏月.
도일설분일절. 동사동생위군결. 팔만사천비봉모. 삼십삼인입호혈.
별별. 요요총총수리월.
도일설은 대일설과 같은 운문의 자상함,
그대와 생사라도 같이 할 듯 그 사랑 깊기도 하여라.
부처님 제자라 하여 모두가 눈뜬 이 아니니,
용기있는 삽십삼 조사만이 호랑이 잡으러 범굴에 들어갔다네.
뛰어나고도 빼어났어라. 운문의 사랑이여.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운문의 빛과 사랑 언제나 그대로 찬연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