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김길영
“어릴 적 고추 달랑거리며/ 모래찜질 하는 엄마 따라/ 멱 감고 마시던 그 맑은 물/
지금은 썩어가는 강가에/ 거멓게 타버린 물고기 떼/ 내 고향이 죽어가고 있다”
설단雪丹 이용주 시인의 시 「금호강」의 첫 문단이다. 화랑교 건너 우측 우방강촌마을 앞 제방에 세워진 시비에 새겨져 있다. 설단은 산업화 과정에서 강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애달아하며 이 시를 썼을 것이다. 대구를 사랑하고 강을 사랑한 마음 짐작하고도 남는다.
금호강은 포항시 죽장면 가사리에서 발원한다. 영천, 경산을 거쳐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지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큰 강들처럼 유장하게 흐르는 강도 아니고 유역면적이 넓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수억, 수천 년 동안 강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이 살았고 강 나름의 정서가 서려 있다. '바람이 불면 갈대밭에서 비파소리가 나고 호수처럼 물이 맑다'하여 금호琴湖라 하였다. 하상이 급하지 않는 관계로 유속이 빠르지 않다. 얼핏 보면 호수 같은 강이다.
대덕산, 와룡산, 무학산으로 둘러싸인 대구는 분지의 도시다. 그 분지에 금호강이 서남방향으로 흐른다. 대구에 금호강이 흐르지 않는다고 가정을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낙동강이 영남의 젖줄이라면 금호강은 대구의 젖줄이기 때문이다.
한국 산업화의 기수처럼 포항제철이 건설되면서 금호강 상류에 영천댐이 만들어졌다. 포항지구 공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산을 뚫고 40㎞의 지하통수로를 만들었다. 금호강으로 흘러와야할 물이 졸지에 경주지역의 젖줄이 되고 포항제철의 용수가 된 것이다.
영천댐은 금호강 상류에 속한다. 1974년 10월에 착공하여 1980년 12월에 준공되었다. 그러니까 영천댐이 완공된 시점은 내가 대구로 삶의 터전을 옮기던 해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금호강물이 썩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대구 남산동에서 성장한 아내가 어린 시절, 방천(신천) 맑은 물에 머리도 감고 빨래를 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대구에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금호강은 한 때 낙동강 수질 오염원처럼 거론되었다. 섬유와 염색공업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70~80년대에 오폐수가 강으로 방류되었기 때문이다. 오염이 심했다는 태화강이 BOD11.3ppm임을 감안하면 금호강의 오염도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몇 급수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썩은 물에서 붕어, 잉어가 살 수 있는 3급수로 변화시켰다. 2015년 기준 수질개선 율은 98.1%로 전국 오염하천 중 최고치를 자랑한다. 대구의 수돗물 역시 세계 수준의 마실 물을 생산하고 있다. 이 같은 성과는 금호강을 살려야 한다는 대구시민의 각고刻苦의 노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은 산업화로 망가진 템스강을 살리는데 5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금호강은 30년도 채 걸리지 않은 셈이다. 새우나 가재, 쉬리, 꺽지 같은 생물이 살 수 있는 1급수에 도달하려면 요원할 것 같지만 못 이룬다는 법도 없다. 선진국에서도 쩔쩔매는 코로나19도 이겨냈다. 생활폐수나 산업폐기물을 강으로 흘러 보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다. 강에 맑은 물이 흐른다는 것은 사람의 혈관이 맑게 흐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2급수이기는 하나 우리는 금호강물을 살려냈다. 농수로도 이용할 수 없던 강물에서 천연기념물 수달이 재롱을 부리고 각 지천에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유유히 회를 친다. 안심습지가 살아나고 낚시꾼들이 몰려든다. 붕어, 잉어, 가물치, 뱀장어, 메기가 낚시 바늘을 물고 나온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했던가. 금호강 주변의 산천에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만고 충신 정몽주 선생을 비롯하여 삼국유사를 집필하신 일연스님과 이름을 날린 문장가, 나라를 이끈 정치가들이 여기서 나왔다. 정치의 1번지요, 문화의 중심지인 대구가 금호강물을 살리지 못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금호강물이 휘돌아나가는 궁산 자락에서 내 마지막 생을 누리고 있다. 아침저녁 둔치를 산책하다보면 설단의 「금호강」 시구가 문득문득 떠오른다. 떠오를 때마다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고추 달랑거리며 멱 감을 수준은 아니지만 하천 중에 으뜸가는 강이 되었다고 자랑하고 싶다.
첫댓글 자연환경 보호를 일깨워주는 좋은 글입니다. 제 고향도 금호강 옆 와룡산 건너인데 염색공단에서 방류되는 폐수가 섞인 강물을 퍼올려서 모내기를 하고 나면 종아리가 퉁퉁 붓고 붉은 반점이 생겨 근질거림을 못이긴 주민들이 아까징끼(밝간 약)같은 약을 다리에 바르곤 했지요, 벼도 독한 물에 골병이 들어 잘 자라지도 않았는데 아무런 보상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기성세대 사람들의 오늘날 자기 성공이 자기 잘나서 성공한 줄 알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니 더욱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수필의 시각을 자기 중심에서 사회 중심으로 외연을 넓힌 좋은 작품으로 평합니다.
김길영 선생님,
금호강을 그리 소상하게 칭송해 주셨네요. 반갑습니다.
어쩐지 금호강을 예찬하시니 고향분을 뵌 기분입니다.
제가 '이용수 시인 금호강' 이란 시가 바로보이는
우방 강촌마을 12층에 살다가 금호강에 미련을 쌓아놓고 떠났거든요.
저는 바닷가에는 살아보지 않았지만 강은 좋아해서요.
낙동강변 안동에서 태어나 대구 금호강을 휘돌며 오십여년 살다가
지금은 경기도 양평에서 남한강변을 산책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강을 얘기하시니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긴~ 댓글 달고 있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건안하시고 건필하소서~~^*^
남한강 산책 중~~~
강촌님!
저도 어릴 때 강에서 살다시피했습니다.
대구에 와서는 우방강촌마을에서 살다가 다사 세천으로 이사온지 3년째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자연보호'에 관심을 가졌고 대구에 와서도 환경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