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7.
유은2614산악회랑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했다.
함양은 안동에 버금가는 선비의 고장이다.
일찍이 묵향의 꽃이 핀 함양에는 사대부들의 학문과 문화가 만발했고, 동천 중의 동천이라 할 수 있는 안의삼동(安義三洞)이 위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정자가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화림동은 함양 유림의 선비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천이다.
화림동은 안의에서 장수 방향으로 난 육십령 고개를 거슬러 올라가는 계곡을 일컫는다.
화림동계곡은 골이 넓고 물의 흐름이 완만하다.
청량하고 풍부한 물줄기는 계곡의 만을 감아 돌면서 이곳저곳에 작은 못을 만든다.
더러는 너럭바위를 유연하게 타고 넘기도 하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못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화림동계곡은 정말 아름답다.
맑은 물과 너른 암반, 기암괴석과 늙은 소나무 숲이 어우러져 있고, 아름다운 승경이 절정을 이루는 곳마다 정자들이 연이어 자리하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요산요수하며 음풍농월을 즐기던 함양의 선비들이 맑은 계곡과 수정 같은 옥수를 놓칠세라 건립한 정자다.
이러한 정자들은 주위의 자연과 조화를 이뤄 마치 수채화 같은 풍경의 연계 경관을 형성한다.
원래 화림동계곡의 풍광은 ‘팔정팔담(八亭八潭)’이라 일컫는다.
여덟 개의 정자와 여덟 개의 담이 있는 계곡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정확하게 여덟 개의 정자와 담이 있었는지, 아니면 정자와 담이 많은 계곡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여하튼 팔정팔담이라는 표현은 화림동계곡을 매우 적절하게 묘사한 말로 생각된다.
화림동을 비롯한 안의삼동에는 정자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영남의 선비들은 사화와 당쟁으로 산수에 은둔하고 시서를 논하며 풍류를 즐겼다.
현재 화림동계곡에는 거연정(居然亭), 군자정(君子亭), 동호정(東湖亭) 등 세 개의 정자가 남아 있다.
이중 명승으로 지정된 정자는 거연정이 유일하다.
화림동계곡을 흐르는 남강천 암반 위에 건립된 거연정은 매우 특별한 형태를 보여준다.
거연정은 화림교를 건너야만 진입할 수 있다.
화림교는 무지개다리, 즉 홍교(虹橋)다.
홍교는 또 다른 말로 아치형 다리를 뜻하는 오교(吳橋)라 하기도 한다.
화림동계곡의 한가운데 위치한 거연정은 계곡의 기암과 주변의 노송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매우 아름답다.
중층으로 된 누각 형태의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내부는 판재로 벽체를 구성한 1칸의 판방을 갖추고 있는 유실형(有室形) 정자다.
굴곡이 심한 천연 암반의 형태를 그대로 활용하기 위해 정자의 아랫부분은 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바위 표면이 높은 곳은 주추 없이 그대로 기둥을 올리기도 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순응하는 정신과 자연친화적인 건축술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계원의 중요한 또 하나의 조망은 밖에서 정자가 위치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계원이 대단히 아름다운 조망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도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있는 곳에는 대부분 정자가 위치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계류를 끼고 있는 기암괴석의 절승에 정자가 있는 사례는 더욱 많다.
그러므로 당연히 정자가 자리한 계원을 주변에서 바라보는 모습 또한 아름다운 풍광이 아닐 수 없다.
화림동계곡의 초입에는 고요한 밤 냇물에 비친 달을 한잔의 술로 희롱한다는 의미를 가진 농월정(弄月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지족당 박명부가 즐겨 찾던 곳에 지었다는 이 정자는 본시 화림동계곡 경관의 백미라 할 만한 제일의 경승이었다.
그러나 2003년 불이 나면서 농월정은 완전히 소실되었다.
아직도 이 정자가 남아 있다면 당연히 화림동천의 가장 중심적인 경관 요소로 계속 자리하고 있을 것이며,
이미 명승으로 지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화림동계곡은 안의삼동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연과 문화의 소중함을 잃어버린 국토개발에 의해 심각하게 원형이 훼손되었다.
바로 대전에서 통영을 잇는 제35호선 고속도로 때문이다.
화림동계곡에서 보면 고속도로의 인공구조물과 도로를 따라 형성된 절개지 사면이 흉물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오로지 용이한 방법의 국토 이용에만 역점을 두어온 국가정책의 부끄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경제개발 못지않게 문화의 고양이 중요한 시점이다.
다소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천년기념물 제154호인 상림숲은
신라 진성여왕(887~897년)때 천령군(지금의 함양군)의 태수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이
재임 중에 마을과 농경지를 보호하려고 조성한 인공림이라 전해지고 있다.
당시에는 지금의 위천강 물이 함양읍의 중앙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홍수 피해가 번번히 있었다.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 현재와 같이 강물을 돌려 둑을 쌓고 둑 옆에 나무를 심어 가꾸게되었다고 한다.
이 숲은 처음에는 대관림이라고 이름을 지어 각종 재해 방비, 풍치, 경관보호를 위한 숲으로 잘 보존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큰 홍수로 중간 부분이 유실되어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이후 하림은 많이 훼손되었지만
상림은 당시 숲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 숲의 면적은 약 21ha이고 120여 종류에 달하는 각종 수목 2만여 그루가 생육하고 있으며
이 숲은 전형적인 온대남부 낙엽활엽수림으로 잘 보존되고
인공 숲으로서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