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초물리적 영역에 물화시키는 형이상학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거은 올바른 탐구의 방법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형태의 형이상학을 제거하고 과학에 안주해야 하는가?
의미는 정녕 철학이 다룰 수 없는 사이비 주제에 불과한가?
혹시 물욕물을 버리면서 목용통 안의 아이까지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형이상학이 존재에 대한 물음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에 의하면 존재란 그 자신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것이다.
그가 존재와 불안에 대한 하이데거의 하유에 공감을 포명한 거이나.
자신의 저작을 신의 영광에 헌정한 것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 사유의 또 다른 국면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발견한 존재의 지평은 전통 형이상학이 그려내고자했던 초물리적 지평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일상적 삶의 지평이었다.
삶의 지평에는 무엇보다 사람이 있다.
영혼이나 마음 의미등도 실은 이 지평에 발 딛고 선 사람과 그에 관련된 현상에 대한 표현들이다.
예컨대 의미는 이 사람의 언어 사용을 통해 드러난다.
사용은 의미를 풀어내는 과정이자 의미화된 삶을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물론 사용과 독립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미는 실체가 아니라 산종(散種,dissemination)이다.
그 산종을 가능하게 하 것이 언어 사용이고 산종이 이루어지는 밭이 삶의 지평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의 물리주의와 과학주의를 배격하고
인간의 정신성을 회복하여 삶의 진실과 마주하려 했다.
동시에 그는 정신이나 역사성을 부정하는 제거주의뿐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물화의 집요한 형이상학적 망령도 함께 뿌리치고자 했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가치는 이 과정에서 그가 전개한 참신히고도 정교한 논증들뿐 아니라.
그가 호소한 관점의 전환과 태도의 변경,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이 본 것을 전달하기 위해
차분히 기술해낸 인간 언어 사용의 다양한 이모저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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