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장 9절로 13절 말씀 설교자 / 조한우 목사
예수님처럼 생각하기
할렐루야!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서 참 반갑습니다.
옆에 계신 성도님들과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초원교회가 올해로 개척한 지 7년째가 되었죠?
저도 우리 진주 노회에 온 것이 올해로 7년째가 됩니다.
2003년 1월에 왔거든요.
제가 진주노회에 오던 해에 초원교회가 개척이 되었네요.
그동안 초원교회에서 부흥회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는데, 저도 태어나서 부흥회를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인연이래요, 그래?
인연이라고 그러면 불교 용어니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셔서 이 부족한 사람을 초원교회로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아멘?)
이럴 땐 노사연의 만남을 불러야 되는 건데...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신 줄 믿습니다.
세상에 부흥회를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고 하니 이걸 어쩌겠어요?
어제 밤새도록 원고를 썼다는 거 아닙니까?
저는 원고 없이 설교를 하면 불안해서 설교를 못하거든요.
우리 칠정교회 성도님들은 내가 원고를 써서 설교를 한다는 건 아시는데, 내가 원고를 보고 설교를 하는지, 안 보고 설교를 하는지 그건 잘 모르세요.
그래도 일단은 원고를 써서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흥회 설교하면서 원고를 써서 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서 여기 있는 조한우 목사밖엔 없을 겁니다.
보통 부흥강사 하시는 분들은 자기가 늘 하는 설교 레파토리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청산유수로 잘들 하시죠.
그런데 저는 그걸 못하겠더라고요.ㅠㅠ
했던 설교 또 하면 얼마나 좋아요?
사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 설교가 언제 했던 설교인지, 어디서 들었던 설교인지 잘 모르잖아요?
그리고 또 어지간하면 다들 은혜를 잘 받으세요.
그런데 저는 참 이상한 성격을 가졌어요.
오늘 말씀을 전하고 집에 가면 내일 할 설교를 또 새롭게 준비를 해야 속이 편하거든요.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받으시는 걸 보고서 또 거기에 맞추어서 새롭게 말씀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제 설교는 좀 어설프긴 해도 그때그때마다 상황에 따라서 정확하게 여러분들의 심령을 때리는 맞춤형 설교가 됩니다.
왜 기분 나쁘세요? 졸리세요?ㅎㅎ
졸리신 분들은 의자 밑에 내려 오셔서 편하게 누워서 주무세요.
제가 베개도 갖다 드리고 그럴게요.
혹시 주무시는 분이 계시면 저는 잠 깰까봐 조용조용 설교할 테니까 푹 주무세요.
그때그때 준비해서 말씀을 전해 주면 좋지 기분 나쁠 건 또 뭐가 있어요?
그저 제가 열심히 기도하고 준비해서 전해드리면 여러분들은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제가 모태신앙이걸랑요?
‘이것도 못해! 저것도 못해!’ 그런 ‘못해 신앙’이 아니라 엄마 뱃속에서부터 예수님을 믿어서 태어난 모태신앙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대한민국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서 전부는 몰라도 적어도 반백년 역사는 내가 다 체험을 했고요, 내가 다 훑었습니다.
♫묻지 마세요, 내 나이는 묻지 마세요. 내 나이가 몇이냐고는 묻지 마세요!
저는 63년 정월 초나흘에 태어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토끼띠예요.
경상도에서는 그저 뭐든지 묶기를 잘 하셔서 갑장이다, 띠 동갑이다 해서 자꾸 계라도 묶어놔야 뭔 얘기가 되는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제가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제 나름대로 도가 튼 사람이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아마 제 나이가 네 살이나 다섯 살이나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이래 뵈도 어려서는 신동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거든요.
그 나이에 한글을 줄줄 읽었습니다.
그땐 왜 영어는 안 가르쳐 주셨는지 몰라요?
하여튼 그 옛날 성경, 옛날 성경은 위에서 아래로 읽게 되어 있었잖아요?
지금에야 성경이 은박, 금박 성경들이 있지만, 옛날에는 다 뻘건색이었잖아요? 빨간 색도 아니고, 뻘건 색 아시죠?
성경은 그 뻘건 성경이 진짜 성경 같아요.
그 성경을 볼 때 마다 뭐가 생각이 나요?
예수님의 피, 나를 위해서 흘려주신 예수님의 피가 생각이 납니다.(할렐루야!)
그 읽기도 어려운 성경책을 저는 얼마나 잘 읽었는지 몰라요.
저의 어머니께서 제게 성경을 많이 읽어 주셨어요.
자녀들을 기르면서 제일 좋은 교육이 성경 교육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께서 읽어주신 성경 말씀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그 성경을 읽으면서 관주까지 다 찾아가면서 읽었다니까요.
그리고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삼촌, 외숙모, 그리고 이모들을 다 모아 놓고서 여름 밤에 지린내 잔뜩 나는 모기장 속에서 한바탕 설교를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때 제 나이가 너댓 살 정도 되었던 거 같아요.
그 나이에 얼마나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또 얼마나 열심히 말씀을 전했던지 지금 제 목소리가 이렇게 막걸리에 물탄 것 같잖아요?
전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이랬다니까요.
제가 어려서부터 부흥회라는 부흥회는 다 따라 다녔고요, 교회 예배라는 예배는 한 시간도 안 빠지고 다 참석을 했습니다.
주일 오전, 오후, 수요 기도회, 구역예배, 철야예배, 새벽기도, 심지어는 목사님이랑 권사님들이랑 심방을 다니면 그것도 따라다녔고요, 장례식을 하면 그것도 따라다니면서 다 봤어요. 하여튼 교회 이름으로 모이는 건 다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염을 잘 해요.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 염을 해 봤거든요
하여튼 그러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목사님들과 많이 만나게 되잖아요?
특별히 부흥강사 목사님들을 만나면 그분들이 왜 그렇게도 부러웠던지 말이죠.
허스키한 목소리로, “할렐루야!”
어린 꼬마가 그러고 다녔다니까요.
어려서 꿈이 부흥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제 꿈이 두 가지거든요.
하나는 부흥사가 되는 거하고, 또 하나는 영화배우가 되는 겁니다.
오늘 그 두 가지 꿈 중에 하나를 이루는 날이네요.
그런데 이왕에 부흥강사를 하려면 정말 제대로 하자!
설교도 만날 하는 설교 가지고 또 하고 또 하고 그러지 말고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잘 준비해서 전해 보자!
보통의 경우에는 설교를 하고 나서 속기사가 다시 정리를 하든지, 아니면 녹음을 했다가 다시 받아 적든지 그렇게 해서 설교를 다시 원고로 만들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예 설교문을 처음부터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설교 중에 절대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미리 준비한 원고대로만 설교를 하니까요.
무슨 부흥강사가 원고를 보고 설교를 하냐고 흉보시지 마시고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를 잘 했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더 은혜가 될 줄 믿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그렇게 존경하고 좋아했던 부흥 강사 목사님들을 50년 가까이 관찰해 보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원고로 준비해서 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고 여러분들 앞에서도 그렇고 그게 좋겠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할렐루야!)
제 소개는 별로 할 것이 없습니다.
초원교회와 같은 진주 노회에 있는 칠정교회 조한우 목사입니다.
제 이름은 한번만 들으면 금방 기억을 하시겠죠?
조한우, 조선 소,ㅋㅋ 길거리에 가다 보면 제 이름이 참 많이 있습니다.
무슨, 무슨 한우 전문점 호탄동이던가요? 거기 가면 ‘한우데이’도 있다던데…
그런데 언젠가 보니까 커다란 간판에 ‘조한우’, 제 이름 석자가 딱 써있는 거예요.
너무 너무 반가워서 봤더니, “원~~조 한우”ㅋㅋ
저희 칠정교회는 산청군 단성면에 있습니다.
덕산 가다가 하동 옥종으로 좌회전 하는 삼거리에 우리 칠정교회가 있어요.
여러분들과 오늘부터 네 시간동안 같이 은혜를 받을 주제는 “예수님처럼 삽시다.”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예수님처럼 삽시다!”(×2)
이번 부흥회 기간 동안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의 심령이 변화가 되고, 우리들의 신앙도 변화가 되어서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 인사할 때 뭐라고 인사를 해요?
“성불합시다!” 그러잖아요? - 부처가 되자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뭐라고 인사를 해야 될까요?
따라해 보세요! “예수님을 닮읍시다!” “예수님처럼 사십시다!”
그렇게 옆에 앉으신 분들과 인사를 나누어 보세요!
452장 찬송을 부릅시다.
내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님 닮기 원함이라
예수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잖네
예수님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무한한 사랑 풍성한 긍휼 슬픈 자 위로 하시는 주
길 잃은 죄인 부르는 예수 그 형상 닮게 하옵소서
예수님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겸손한 예수 거룩한 주님 원수의 멸시 참으시사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은 구주를 닮게 하옵소서
예수님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지난 주 수요일이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참회의 수요일이라고도 부르죠?
지난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부활절 하루 전날까지를 사순절이라고 부릅니다.
해마다 부활절을 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나고 나서 오는 보름날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는 거예요.
올해엔 춘분이 3월 20일이거든요.
그리고 춘분 후에 보름이 언제냐 하면 4월 10일입니다.
그러니까 춘분 지난 후 보름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로 4월 12일이 부활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4월 12일 부활절에서 거꾸로 40일을 세는데, 주일은 빼고 40일을 세어 보면 2월 25일부터 사순절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 중간에 주일이 여섯 번 들어 있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사순절의 첫 날은 항상 수요일부터 시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날이 재의 수요일, 또는 참회의 수요일이고 그날부터 사순절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보내게 되는데, 이번 사준절 기간 동안에는 특별히 주님을 닮아가는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수요일 저녁까지 네 시간동안 주님을 닮아가기 위한 훈련의 기간을 마련한 줄 믿습니다.
주님을 닮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게 뭘까요?
먼저 “주님처럼 생각하기”예요.
따라합시다. “주님처럼 생각하기”(×2)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생각이 모든 행동을 지배하게 되어 있잖아요?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만 자꾸 하다 보면 사람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붙잡힌 강호순인가 뭔가 하는 사람 좀 보세요.
그 사람은 분명히 사탄에게 사로잡혀서 생각 자체가 사람 죽이는 생각만 하고 살았을 겁니다.
여러분, 좋은 생각만 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마태복음 9장 9절로 13절 말씀을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쓸 만한 제자는 역시 마태가 아니었는가 그런 생각이 됩니다.
제가 그렇게 말하면 다른 제자들이 기분 나빠할까요? 기분 나빠해도 어쩔 수 없죠.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제자들이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이 있지…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인물도 좀 번번하고, 배운 것도 좀 있고, 사는 것도 좀 뽀대(?)나게 살고 말이죠.
학식도 좀 있고, 직업도 좀 번듯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제자들은 다 거기서 거기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태는 좀 달라요.
예수님께서 이번엔 좀 뭔가를 아셨는지 마태를 부르셨거든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대로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지금 말로 말하자면, 세무서에 다니는 세무 공무원이었단 말입니다.
그럼 적어도 계산 잘하고, 눈치 빠르고, 사는 것도 남들보다는 낫게 살았을 것이고요.
하여튼 그동안에 예수님의 제자라고 따라다니던 사람들 보다는 뭐가 나아도 나은 사람이었을 거란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분들이 몇 분만 계시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요.
저희 칠정교회는 워낙 시골 교회이고 노인들만 계시는 교회라서 그런 분들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 볼 수도 없습니다마는 초원교회만 해도 진주에 있는 교회니까 그런 분들이 더러 계실 거예요.
한편으로는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배우고 돈 많고 똑똑하다고 다 좋은 교인은 아닙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고, 몸은 늙고, 건강은 좋지 않아도 신앙생활을 얼마나 잘 하시는지 몰라요.
우리 칠정교회 성도님들은요, 학생들은 20여명이나 되지만 어른들은 열댓분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 분들이 거의 다 70세 이상 되는 노인들이세요.
배운 것도 없으시고요,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은 지리산 자락이 돼서 그런지 왜 그렇게 정신 장애를 가진 분들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우울증, 자폐증, 정신 지체, 정신 분열, 정신 착란, 언어장애, 지체 장애, 그리고 여러 가지 노인성 질환으로 인한 치매환자, 중풍 환자들이 참 많아요.
성도님들 중에 떳떳한 직장을 다니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열심히 교회를 섬기시는지 몰라요.
어제도 어떤 할머니 집사님께서 사택에 찾아 오셨어요.
“목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내일도 딸기 밭에 가야 되는데, 내일 예배를 못 드리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헌금 봉투를 주시는 거예요.
헌금 봉투가 네 개인데, 십일조 4만원, 감사헌금 만원, 선교헌금 3천원, 주일헌금 6천원, 그렇게 가져 오신 거예요.
우리 교회는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매주 마다 그렇게 헌금들을 하세요.
어제 봉투만 전해 주시고 가신 집사님도 어떤 때는 십일조를 10만원씩 하셔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70이나 되신 노인이 한 달에 100만원을 벌지 못하거든요.
그런데도 십일조는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은 돈 많다고 잘 하는 게 아닙니다.
건강하다고 주일 잘 지키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건강하면 다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성도가 그리 많지 않더란 말에요.
지가 아는 어떤 분은 나이가 많으셔서 눈이 잘 아 보이니까 교회에 나오실 때 마다 나를 붙들고 그러셨어요.
“목사님, 내 눈 좀 나사줘. 내 눈 나사지면 교회 갈게.”
그러더니 한 3년 교회에 잘 나오셨거든요.
그러더니 요즘 백내장 수술을 하시고는 눈이 좋아지셨어요.
그러더니 웬걸요?
딸기밭에 딸기 따러 다니기 바빠서 교회에 못 나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늘 그게 고민입니다.
“하나님, 이걸 고쳐 줘야 되는 겁니까? 말아야 되는 겁니까? 차라리 그냥 이대로 살다가 예수 잘 믿고 천국 가게 해 드리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게는 늘 그게 딜레마예요?
그러나 저러나 마태라는 사람은 다른 제자들 보다 배우기도 많이 배웠을 것이고, 가진 재산도 많았을 것이고, 매달 수입도 적잖았을 거예요.
아무튼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는 제일 나은 사람이 마태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을 아시죠?
우리나라가 옛날에 일본 놈들한테 나라를 빼앗겼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역시 로마의 식민지였단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친일파에 대해서 말들이 많잖아요?
웬일인지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는 조용해졌습니다마는, 남의 나라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매국노 짓을 해가면서 먹고 사는 사람들치고 떳떳한 사람들이 없거든요.
마태도 그랬습니다.
9절 말씀을 보니까 예수께서 가버나움 동네에 들어가셔서 세관을 지나가게 되셨나 봐요.
예수님께서 세무서 앞을 지나가시다가 보니까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나를 따르라!” 그러시는 거예요.
지금 마태는 직장에 출근을 해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밥줄이 거기에 달려 있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따르라!’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놀랍지 않아요?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마태는 두 말 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할렐루야!)
말씀을 듣고 나면 이런 결단이 여러분들에게도 생기시기를 바랍니다.
부흥회 백날 하면 뭐하겠어요?
요즘 웬만한 교회들은 해마다 연중행사로 부흥회를 하잖아요?
아무리 부흥회를 하면 뭐해요? 변화가 되지 않는데.
요즘엔 오히려 너무 너무 말씀들이 넘쳐나는 게 문제입니다.
텔레비전을 켜면 하루 온 종일 설교를 듣고 보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하루 종일 앉아서 텔레비전 속에서 나오는 그 많은 설교들, 재미있는 설교, 은혜로운 설교 다 들어 보세요.
그거 듣고 믿음이 자라납니까?
천만에 말씀이에요.
교회는 안 나오고 그거 듣고 앉아 있는 사람들 치고 신앙 좋은 사람을 저는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교회에는 한 달에 한 번이나 나갈까 말까 그러면서 만날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서 방송 설교를 보고 있어요.
어쩌다가 한번 가뭄에 콩 나듯이 교회에 오면 주일 헌금 천 원짜리 하나 달랑 드리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는 꼭 한 달에 한 번씩 방송 선교를 위해서 ARS로 헌금을 한다고 자랑을 하더라고요.
‘그거 한 번 하면 얼마가 빠져나갑니까?’ 물었더니 5천원 빠져나간다나요?
자기 교회에는 한 달에 단돈 천원을 헌금하면서 방송국에는 5천 원씩 꼬박 꼬박 넣어주고 있더라고요.
그것도 안 하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신앙생활 제대로 잘 하려면 내 교회를 잘 지켜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디나 계시는데, 교회 안 가고 집에 앉아서 예배드리면 어때요?
안 될 건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슨, 무슨 교회 성도라고 한다면 자기 교회엘 나가서 예배를 드려야지, 자기 교회는 내팽겨쳐 놓고서 남의 교회에 나가서 앉아 있거나 방송 설교나 듣고 앉아 있다면 그거 문제 있는 교인 아니겠어요?
내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대아 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대아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야죠.
엉뚱한 명신이나, 동명이나, 진주 고등학교나, 남의 학교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앉아 있는 거나 똑같은 겁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마태가 두 말 않고 따라나선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엄청난 권위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온 우주 만물을 다 지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본체이시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여기에 계시는 저와 여러분들을 만나 주시고, 불러 주시고, 구원해 주신 줄 믿습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마태에게 찾아 오셔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쇠막대기가 자석에 끌려가서 철커덕 달라붙듯이 그렇게 마태는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태라는 사람은요 돈도 많고, 좋은 집에 살면서 편안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어도 남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떳떳하지도 못했고요, 같은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다가 로마에 바쳐서 월급을 받아먹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어쩌면 그때 당시에 대부분의 세리들이 그랬던 것처럶 정해진 세금 이외에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일부는 자기가 착복을 하고 그리고 나머지만 로마 정부에 갖다 바치고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마태는 여러 면에서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회 심리학자인 매슬로우라는 사람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은 다섯 가지 단계의 욕구를 가진다고 그럽니다.
첫 번째 욕구는 생리적인 욕구예요.
먹고, 자고, 배설하고, 그리고 성에 대한 욕구까지 지극히 기본적인 욕구를 말합니다.
두 번째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인데요, 그것 때문에 여러 가지 보험을 들어 놓기도 하고 그러는 거잖아요?
세 번째 욕구는 소속과 사랑의 욕구입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왕따를 당하면 살 수가 없는 거예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왕따를 당해서 고민을 하다가 옥상에서 뛰어내려서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가금 보잖아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야 살맛이 나는 겁니다.
그리고 난 후에 남들에게 존경 받고 싶은 자존의 욕구가 생기는 것이고요, 그런 사람이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충족이 되어서 자기 속에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 가서도, 가정에서도 그리고 교회에서도 만족할 줄 알아야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면 늘 불만이 가득차서 얼굴이 우중충하게 보이는 거예요.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100% 만족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사도바울 선생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할렐루야!
그러면 되는 거지, 안 그래요?
배불러서 만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배가 터질 때 까지 먹어도 만족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이 직업을 선택할 때에 잘 선택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트클럽을 차려 놓고서 목사님께 와서 예배를 드려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거 가기도 그렇고 안 가기도 그렇고, 왜 이 사람 저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마태는 세무서에 앉아서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자기 백성들에게 세금이나 뜯어다가 로마 정부에 바쳐서 먹고 살았으니 이거 사실 죽지 못해서 하는 것이지, 어디 하루라도 맘 편한 적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에게 다가오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나를 따르라!” 그러시는 거예요.
마태가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보나 마나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처럼, 세리 마태도 그랬을 겁니다.
“예수님, 저 좀 보세요! 제가 제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시고 집에 들어가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지금 잔치는 자기네들끼리 먹고 마시는 잔치이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누구네 집에 환갑잔치를 한다.’그러면 동네 거지들은 다 모였었거든요.
마태네 집에서도 잔치를 한다고 소문이 아니까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든 거예요.
같은 세무서에 다니는 회사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사회적으로 손가락질 받고 소외된 사람들, 소위 말하자면 그 당시에 율법적으로 죄인이라고 지목을 받고 있었던, 세리와 창녀들, 온갖 부정한 사람들이 다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하고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셨어요.
그걸 누가 봤습니까?
오늘날의 파파라치들처럼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장로들, 그리고 제사장급에 있었던 사두개인들, 이런 사람들이 늘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스토커 노릇을 했었거든요.
10절 말씀과 11절 말씀을 다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나?”
꼬투리를 잡은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룩하신 분이라면서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율법을 어기고 부정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단 말이냐?’ 그 소립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서 얼마나 깔끔을 떨어댔는지 몰라요.
자기들은 의인들이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죄인들이라는 거예요.
유대인들 생각에는 자기들만 하나님께서 선택해 주신 선민들이고, 나머지 이방 사람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시기 위해서 지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항상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결례라는 의식을 행하는데 대문 앞에 물두멍이 있어서 항상 거기에 물을 채워 놓고서는 집에 들어오기 전에 물로 손을 씻고, 발을 씻고 그리고 들어 집으로 들어 왔어요.
식사하기 전에는 꼭 손을 씻는데, 지금 우리들이 비누로 손을 씻는 것처럼 그렇게 꼼꼼하게 씻는 것이 아니라 물을 살짝 손에 찍어서 툭툭 터는 정도거든요.
내가 볼 땐 그거 차라리 안 하고 말지, 뭐하러 저러나 싶은데 그 사람들에겐 그것이 일종의 결례의식이란 말입니다.
손에 묻은 보이지 않는 부정한 것들도 그 정도로 깔끔을 떠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거룩하신 분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해요?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그걸 꼬투리 삼아서 예수님을 걸고넘어지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지적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모르셔서 그러셨을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능통하신 분이셔서 일찍이 열두 살 나이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함께 성경에 대해서 토론을 하신 분이시잖아요?(눅2:41절 이하)
그럼 뭐예요?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달랐던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몰랐던 거예요.
율법적으로 거룩하고 의롭게 산다고 하면 실제로도 그런 의로움과 거룩함이 삶에 나타나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나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고 예수 잘 믿고 살다가 나 혼자서만 하나님 나라에 가면 되는 거예요?
죽어가는 저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건데요?
우리 초원교회 성도님들은 열심히 전도하시는 분들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이 상가 안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초원교회 주변에 있는 덕산 아파트나 또 더 넓게는 공설 운동장이 있는 곳까지, 또 지리적인 경계를 넘어서 우리가 다니는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동네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지 아세요?
그 사람들이 못 돼먹어서 만나기도 싫다고요?
세상에 더러운 것들이라서 말하기도 싫다고요?
그것은 내 생각이지 예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보세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임금이 종들을 보내서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다 거절하고 오기를 싫어했다는 겁니다.
임금이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가서 이르되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라고 해라!”
그런데도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들은 척도 안하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 버렸고요, 또 한 사람은 자기 사업이 바쁘다고 가 버렸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 종들을 잡아서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까지 했다는 겁니다.
그때 임금님이 노해서 군대를 보내서 그 동네를 싹 쓸어버리잖아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베푼 혼인 잔치를 채우기 위해서 어떻게 했어요?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임금님의 말씀대로 종들이 길에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다가 혼인잔치에 채웠더라.(할렐루야!)
요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너무나 잘났다는 거예요.
사실 잘 나긴 잘 낫지, 그렇지만 그건 우리끼리 있을 때에나 잘 난체 해야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잘나 척을 하면 되겠어요?
우리가 의롭고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의롭다, 거룩하다, 정말 너희들 잘났다 그러시는 것이지,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 난 것이 뭐가 있겠어요?
저도 자식을 기르니까 아는데요, 큰 아이는 미국에 가 있고, 작은 아이는 저기 드럼을 치는 아이가 우리 아이인데요,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예쁘다고 내 새끼니까 예쁘고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그런 것이지 세상에 자기 자식 안 예뻐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어요?
어떤 때는 저도 대 놓고 자식 자랑을 합니다마는 그래도 남들 앞에서는 아주 조심스러워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둬도 다 잘 살아요.
그런데 상처 받은 사람, 실패한 사람, 낙심하고 실망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집중적으로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번듯하고 잘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고 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12절 말씀을 다 같이 봉독하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에 와서 의인 행세 하는 사람은 어디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와서 가슴을 치면서 주여! 주여! 그러는 것이죠.
교회에서 나를 내세워서 ‘나여, 나여!’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도 은혜 받는데 지장이 생기는 거예요.
따라합시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게 될 줄 믿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죄를 사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지만, ‘나는 죄인이 아니오!’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
이런 예화 많이 들어보셨죠?
어느 교도소에서 죄수 한 사람을 석방시켜줄 일이 있었는데, 죄수들마다 다 죄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 자기는 죽을 죄인이라고 했다는 거 아닙니까?
마침 교도소를 순시하던 고위층 인사가 그걸 보더니 ‘유독 저 사람만 자기가 죄인이라고 말을 하니 저 사람을 석방시키시오! 저 사람이 감옥에 있으면 다른 죄 없는 사람들까지 물들면 어쩌겠소?’ 하더랍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거꾸로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의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는 겁니다.
“너희가 다 온전하고 건강하냐?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에게 소용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쳐부순 후에 그 노략물들을 다 불사르고 죽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울 왕이 욕심이 났죠?
아말렉 왕 아각까지 다 쳐 죽이고 깨끗이 진멸시켰는데 살진 양과 소를 보고서는 욕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마땅히 죽여야 할 노략물들을 뒤뜰에다가 숨겨 놓았던 거예요.
사무엘 선지자가 들어와서 왕에게 물어 봤습니다.
‘지금 저 뒤뜰에서 들려오는 양 울음소리와 소 울음소리는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사울 왕이 하는 말이, “마땅히 하나님 말씀대로 다 했습니다. 말씀대로 다 했는데 다만 그것들 중에서 특별히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서 나중에 길갈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 잡아서 제물로 쓰려고 남겨 둔 겁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잘 했다 그랬어요?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하나님 앞에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가 통할 리가 없습니다.
내 생각대로 잔머리 굴리다가는 언제 얻어맞아도 맞고 말아요.
우리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실 때 뭐라고 기도를 하셨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를 하시면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신 예수님을 닮아가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끔 헌신 예배 설교를 부탁 받아서 설교를 하러 갈 때가 있습니다.
헌신 예배니까 보통 여느 때 보다는 다르게 예배를 드릴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헌신 예배 때 헌금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교회 목사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닌, 목사님! 헌신 예배인데 왜 헌금 시간이 없어요?”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교회 교인들은 아직까지 믿음이 없어서 헌금하라고 하면 다 도망을 간다는 거예요.
세상에… 헌신 예배 때 헌금도 안 드리면 그럼 무엇으로 헌신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 교회 성도 수가 얼핏 50명 정도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주보에 보니까 전 주에 헌금이 14만 몇 천원인가 그래요.
죄송합니다마는 우리 교회는 열댓 명도 안 되지만, 헌금은 매주 3, 40만원에서 50여만 원씩은 나오거든요.
어떤 분은 저 보고 헌금을 강조하는 설교를 한다고 뭐라고 그러는 사람이 있어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된 성도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 칠정교회 성도님들은 웬만한 교회 장로님들 보다 낫다고 봐요.
우리 교회는 권사님도 한 분도 안 계십니다.
다 서리 집사님들이거든요.
그래도 누구하나 뒷짐 지고 서 있는 사람이 없어요.
지난주엔 어떤 할머니 집사님께서 교회 청소를 하러 올라 오셨어요.
그 할머니 집사님이 청소를 하시고 나면 교회가 훤해집니다.
화장실 변기가 반짝 반작 빛이 납니다.
장갑도 안 끼시고 그 더러운 변기를 손으로 일일이 다 닦으시는 거예요.
“아이고, 집사님! 더러워요. 그렇게 안 하셔도 되요.” 제가 말리면 그 집사님은 한사코 손 사레를 저으시면서 화장실이 지저분하면 교회에 손님들이 와서 보고는 다 흉을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그 추운데 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닦고 또 닦고 그러고 계세요.
제가 옛날에 김포에서 개척 교회를 하던 시절에 몇가지 특이한 사역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변기 뚫어 주는 일을 한 적이 있었어요.
지하실에 교회를 개척해 놓고 나니 누가 오나요?
교회를 알리고 전도를 해야 하는데, 아파트 문을 두드려서 열고 전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하수구나 변기를 뚫어드립니다.”라고 스티커를 만들어서 아파트 마다 붙였어요.
그리고 철물점에 가서 필요한 장비들을 샀습니다.
마시마로, 엽기 토끼가 들고 다니는 화장실 뚫는 거 있잖아요?
그것부터 시작을 해서 압력을 가했다가 한꺼번에 팍 불어서 막힌 하수구를 뚫는 것들, 또 용수철 같이 길게 생긴 철사 줄을 넣어서 계속 돌리면서 뚫는 것, 그리고 하수구 뚫는데는 역시 방바닥 보일러에 쓰이는 엑셀 파이프가 최고죠.
하여튼 장비들을 장만하는 데에도 몇십만 원은 족히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막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번 똥을 누어도 굵은 똥을 누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기다렸더니 정말 전화가 오더라고요, 목사님이라고도 안 불러요.
“아저씨, 변기 뚫어 주나요?” 껌을 짝짝 씹으면서 야시시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는데 ‘이거 정말 싸가지가 바가지네??’ 그래도 꾹 참아야지 어쩌겠어요?
아저씨라고 부르든지 말든지 전화가 왔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일이죠.
“예, 뚫어드립니다.”
요즘 아이들 하는 말로 번호를 딴 거예요. 번호 딴다는 말 아세요?
전화번호를 알아야 전화를 하죠?
게다가 그 집 호수까지 알았죠? 그리고 자기 스스로 문을 열어 주고 들어오라고 하죠?
땡 잡은 겁니다.
순식간에 그 집으로 달려가서 굽신 인사를 하고 집안으로 들어 갑니다.
아닌 게 아니라 화장실이 막혀서 철철 넘치고 있는 거예요.
저는 그러면 더 좋아요.
뭔가 지저분하고 더러워야 그 집 주인이 더 미안해 하거든요.
그리고 자꾸 그 일을 하러 다니다 보니까, 이제 웬만큼 막힌 건 금방 뚫겠더라고요.
그래도 금방 뚫어 주면 절대로 안 됩니다.
변기 속에 손을 집어넣고서 첨벙 거리기도 하고요, 정말 굵은 똥이 있으면 손으로라도 잘게 부숴뜨리는 걸 보여줘야 한다니까요.
엽기토끼 마시마로가 들고 다니는 것으로 불컥불컥 하다가 얼굴에 똥물도 튀기도 하고요, 하여튼 최대한 주인을 미안하게 해야 효과가 있어요.
그리고 얼마냐고 물으면 “저는 돈을 안 받습니다. 저는 조은교회 조한우목사입니다.”그러면서 차 한잔 얻어 마시면서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우리 할머니 집사님께서 화장실 청소하시는 걸 보니까 영락없이 내가 옛날에 했던 그 일이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거예요.
가끔 우리 교회에 어떤 사람이 화장실에 응가를 해 놓고서는 물을 안 내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어떤 때는 그게 며칠씩 가서 딱딱하게 굳어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러면 우리 할머니 집사님께서 그걸 쭈그리고 앉아서 주걱 같은 것으로 긁고 계시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해 보셨습니까?
이게 사람 생각으로 되는 일이예요?
예수님처럼 생각하니까 그렇게 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제 각자 마다 가슴 속에 손을 얹고 고백해 보세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와 물을 다 쏟아 주셨는데, 나는 주님 앞에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해 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그래도 우리 교회에서는 내가 없으면 안 되는데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드린 것이 없었습니다.
내 생각대로 내 방법대로 신앙 생활하다가 그만 주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 드린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예수님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나도 작은 예수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먼저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 같이 간절히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