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21년 4월 19~21일(월~수) 날씨 맑음
★참가자: 4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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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21일, 수)
07:50~09:00 산책 (북진리 마을)
10:05 콘도 출발
10:30~11:18 박달재
12:45~15:30 여주 신륵사
울고넘는 박달재
(반야월 작사, 김교선 작곡, 박재홍 노래. 1948)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신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길아
도라지 꽃이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이 물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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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
제천 10경중 제2경에 등극해있는 박달재.
차에서 내리자 마자 이 박달재 노래가 넓은 주차장을 꽉 메우고 흘러나오면서 분위기를 잡아준다. 물론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애창곡이라 필자도 저절로 흥얼거렸다. 남녀 각각 박달재 비앞에서 인증샷을 만들고 구석구석을 돌아보기 위해 발길을 떼었다.
박달재는 충북 제천시 봉양면과 백운면 사이에 있는 고개(해발 450m)로 차령산맥의 지맥으로 배론성지를 품고 있는 주론산(舟論山, 907m)과 시랑산(侍郎山, 691m)의 안부(鞍部)에 해당한다. 노래가사로 천등산(天登山, 807m)과 박달재가 바늘과 실처럼 붙어다니는데, 박달재는 실질적으로 꼬불꼬불 흐르는 원서천(院西川)을 사이에 두고 남서쪽에 솟은 천등산과 마주보고 있다.
박달재는 1996년에 상행선(1,960m) ,하행선(1,820m) 박달재터널이 개통되어 국도 38호선이 지나간다. 터널로 인해 기존박달재 도로의 이용가치가 상실하되었으나 박달재 옛길이라는 관광상품으로 개발돠어 유지·관리되고 있다.
박달재에는 제천에서 서울로 가는 관행길이 나 있으며, 1217년(고려, 고종 4년) 7월 김취려(金就礪)가 거란병을 크게 물리친 곳으로 김취려장군역사관이 있다.
박달이와 금봉이의 사랑얘기가 얽혀있는 박달재
남원의 춘향이와 이도령 얘기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슬픈 사랑얘기는 이날 박달재를 망문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박재홍(朴載弘, 1924~89)이 불러 지금까지 애창되는 '울고넘는 박달재'는 1948년 작사가 반야월과 작곡가 김교성이 지방공연을 갔다 상경중 박달재 아랫마을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박달이와 금봉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하룻만에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박달과 금봉의 애절한 사연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조선 중엽 과거 급제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가던 젊은 선비 박달은 고개 아래 촌가에 하루밤을 묵고 가려다 들어갔다. 박달은 그 집의 예쁘고 청초한 금봉의 모습에 정신을 빼앗기고 금봉도 박달의 준수하고 늠름한 모습에 잠을 못이루고 달밤을 거닐다가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금봉과 사랑을 속삭이던 박달은 과거에 급제하고 혼인을 하기로 언약을 하고 다시 한양을 향해 떠났다.
금봉은 그 날부터 박달의 급제를 서낭신에 빌었으나 과거가 끝나고도 소식이 없자 상심하여 고개를 오르내리며 이름을 애타게 부르다가 시들시들 아프다 죽게 되었다.
한양에 온 박달도 과거준비를 잊은채 금봉을 그리는 시만 읊다가 낙방을 한 후 금봉을 보기가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금봉의 장례 3일 후 돌아왔는데 죽었다는 비보에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그러던 중 언 듯 고개를 오르는 금봉의 환영을 보고 뒤쫓아가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금봉은 사라지고 박달은 낭떨어지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후 이곳 이등령을 박달재로 바꿔부르게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내려온다.
아래는 이 애절한 이야기를 조각작품으로 재현한 것이다.
여주 신륵사에서
기온이 초여름으로 올라가 점심을 간단히 하고 그늘 벤치에 앉아 쉬었다. 상계동 부부만 처음이라 더위를 무릅쓰고 한바퀴 돌고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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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산책
박달재 가는 중 미담산장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