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샅바를 잡으며
이 홍사
세상에 친구가 둘 뿐인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두 친구를 알고 있다. 두 친구 모두 이제는 이승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과거 완료형으로 굳었다. 나는 그 두 친구가 그렇게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구미라는 이 좁은 바닥에서 두 친구가 그런 기막힌 연결고리를 가지고 살았다니? 이럴 때는 두 친구라고 하는 것보다 두 남자라고 부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래. 두 남자.
두 남자는 희한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니다. 그런 인연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부지기수다. 그런데 내가 아는 친구와 또 다른 친구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건 분명히 놀라운 사실이고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했던 그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기막힌 인연이라는 현실에 잠시 몸서리를 치며 살을 떨었다.
한 친구는 고향 친구고 또 다른 친구는 사회에 처음 나와서 사귄 친구였다. 그 둘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고향 친구는 종철이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중학까지 같이 다녀서 친하지는 않지만, 가끔 본다. 초등학교 동기 중에서 도시의 변두리가 되어버린 이 구미에 눌어붙어 사는 친구가 상당히 많다. 그 친구들이 계를 모았다. 순전히 친목을 도모한다는 거대한 명분으로 모은 계인데 인원이 서른 명이 넘었다. 오합지졸이 다 모인 셈인데 종철이도 나도 그 계에 계원이었다. 종철이는 환경회사에 대형덤프트럭을 지입시켜 공사 현장에 폐콘크리트를 수거하러 다니는 지입차주였다. 그는 앞바퀴가 네 개라 속칭 앞사발이라고 부르는 차를 운전했다. 별명을 부르기를 좋아하는 어느 친구는 그에게 앞사발이라고 불렀다. 그는 가끔 현장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그가 계모임에 서너 번 빠졌다. 친구들 입을 통해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가 입원했다는 것이다.
왜?
친구들은 그것도 몰랐냐는 듯이 암이라고 했다. 간암에서 전이되어 췌장암으로 갔다는 얘기를 담담하게 했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계 모임의 술자리였다. 췌장으로 전이 되면 못산다. 췌장이라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다스리기에는 너무 동맥과 근접해 있기에 췌장암이라면 반드시 암 덩이가 몸으로 내려가는 대동맥을 물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동맥을 물고 있기에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은 어렵다. 대동맥을 건드리지 않고 암을 없애는 의술이 아직은 도입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항암치료가 고작이다.
그날 모임에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공금 중에서 얼마를 떼어 그의 병원비에 보태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누군가 계의 규칙에도 없는 그 제안을 했고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오합지졸이 모인 계지만 그 선택에는 모두 훌륭했다.
그렇게 한 지가 겨우 두어 달 되었나 그의 부음을 접했다.
아침 일찍 온 부음을 접하고 대뜸 전날 밤늦게 운명했을 거라는 짐작했다. 부음은 카톡으로 보내왔다. 부음을 찬찬히 살펴보니 밤 열한 시에 사망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이틀 만에 치르는 장례나 마찬가지다. 요즘은 아무리 시간이 촉박해도 사일이나 오일장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삼 일에 맞추려면 발인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렇다면 이틀 장이나 진배없다. 그의 부음을 접하고 잠시 머리를 숙였는지 모르겠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날 저녁에 조문해야 마땅했다. 부음을 접하고 나서 계원들의 단톡방에는 명복을 빈다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단체 문상을 몇 시에 하자는 말은 없었다. 그 부음을 보낸 총무에게 전화했다. 단체문상이 몇 시로 예정되어 있느냐고, 총무의 대답은 빈소가 가까우니 각개전투라고 했다.
이제 막 정년퇴직하는 놈들이 생겨나고 주민등록상 생일이 빠른 놈은 이미 정년퇴직을 하고 눈높이를 낮추어 다른 공장에 놀기 삼아 재취업을 하는 형편이나 그의 죽음이 적당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러 친구를 남기고 서둘러 간 길이었다. 이럴 땐 친구들이 왕창 단체로 조문을 가서 그의 가는 길을 배웅하고 위로해야 한다.
해거름이 되어서 총무에게 다시 전화했다. 몇 시에 갈 거냐고 물으니 근무가 여섯 시에 끝나는데 바로 출발하겠노라고 했다. 나는 집에서 천천히 걸으면 삼십 분 남짓 걸리는 요양병원 장례식장이니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출발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으니 여섯 시면 어둑어둑한 시간이었다. 도량동에 있는 요양병원 장례식장은 버스를 타기에도 어중간하고 택시를 타기에도 어중간한 거리다. 자전거를 타면 잠시 가겠지만, 가면 아무래도 한잔할 것이기에 걸어서 가는 게 가장 만만했다. 죽은 친구는 덩치가 우람하고 건강 체질이었다. 탄탄한 체력을 바탕으로 덤프트럭을 운전했었다. 죽은 친구와 따로 만나서 술을 마신 일은 없지만, 오다가다 현장에서 마주치면 언제 한잔하자는 말을 건성으로 했다. 이젠 그 말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좁은 바닥에서 어릴 적부터 중장비를 운전했다. 그게 오늘 짚어보니 42년 차다. 조수로 시작해서 42년. 짧은 세월이 아니다. 지금은 관리만 하고 있지만 그래도 현장을 둘러보러 나가야 했다. 현장에 나가면 그 친구를 가끔 마주치기도 했다. 남들은 어릴 적부터 중기를 배워서 자수성가했다고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중기를 여러 대 가지고 있으며 그 업을 아들 녀석에게 물려 주려고 아들 녀석이 지금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사무실 여직원이 결혼한다며 퇴사를 잘됐다 싶었다. 여직원을 구하지 않고 그 일을 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녀석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남는 짬에 중장비 면허를 취득하게 했다. 그리고 대학으로 가서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일 년을 천방지축 놀다가 군에 갔는데 자격증 덕에 군에서 굴삭기를 주특기를 받아 중장비 운전을 제대로 배워 나왔다.
지금은 모든 일을 녀석을 통해서 하고 있다. 내가 직접 해도 되는, 간단한 일마저 기어이 녀석을 통해서 일을 처리하게 한다. 그것이 배우는 거다. 빈소로 향하면서 아들 녀석이 사무실에 있는 것을 보고 나왔다. 어딜 가시느냐는 녀석의 물음에 친구가 죽어서 문상간다는 쓸쓸한 음색의 소리를 뱉고 나왔다. 친구요? 일찍 돌아가셨네요. 조금 놀라는 투로 받아친 녀석은 아버지도 제발 담배를 끊으라는, 하지 않아도 좋을 잔소리를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밖에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걸었는데, 요양병원까지는 금방이었다. 장례식장은 지하였다. 전문 장례식장이 아니라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장례식장에는 예전에도 서너 번 조문을 간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
지하에는 두 군데 빈소가 차려져 있었다. 친구의 빈소는 특실이었다. 빈소 입구에 줄지어 선 화환이 눈에 띄게 단출해서 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빈소는 썰렁했다. 친구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거라는 내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친구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빈소 입구에서 접견실을 둘러보니 젊은 사람 두엇 앉은 자리가 듬성듬성했고, 친구들은 단 한 명, 아니 한 놈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못 찾았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빈소 앞에 걸려있는 전광판을 다시 보았다. 친구의 빈소가 분명했다. 안내 전광판에는 그의 사진까지 박혀있었고 아들 하나에 딸이 둘이었다. 친구의 빈소가 분명했다.
나도 모르게 시계에 눈길이 갔다.
일곱 시에 가까웠다. 이 시간이면 문상하기에 적절한 시간이 아니든가. 그런데 아무도 와 있지 않아서 좀 망설였다. 혼가서 들어서기가 뻘쭘해서 다시 다시 지상으로 나왔다.
빈소 앞 복도에 줄지어 선 꽃의 리본을 보면 망인의 자식들이 무엇을 하는지 가늠할 수가 있다. 화한은 고작 대여섯 개. 리본의 특이점은 씨름이었다. 씨름에 관계된 화환이 두어 개 있었다. 씨름협회와 씨름협회 친목회에서 보낸 화한이었다.
아들이 씨름을 하나?
밖에 나와 담배를 물고 총무에게 전화했다.
총무는 전화를 받자 대뜸 친구들이 많이 왔느냐고 물었다.
“희한하네? 지금 나 혼자야. 이 자식들 다른 빈소로 갔나?”
총무라는 녀석도 차를 가져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버스에서 막 내려 지금 오는 중이라며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 주차장 입구에서 담배를 한 대 다 피우기 전에 총무 녀석이 들어왔다. 총무라는 녀석은 회사에 다니다가 정년퇴임을 하고 하청회사 영세 기업으로 옮겨가서 일용직으로 뛰고 있는데 이제 돈 버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하루하루 버는 게 공돈 같은 기분이라 회사에 다닐 적보다는 금액은 적지만 인생의 덤이라 생각하니 더 만족한다는 녀석이다. 녀석이 나를 부러워하는 것은 정년이 없다는 점이다.
“아무도 안 왔어?”
총무라는 녀석이 다가와 물었다.
“연락을 제대로 안 한 거 아니야? 그러면 총무가 직무 유기인데?”
연락은 다 했다고 했다. 더러는 전화로 직접 알려주었다고 했다. 한 놈은 허리에 디스크 수술을 해서 못 온다는 통보를 접했다고 했다.
“회장은 왜 안 보이는 거야?”
내 말이 끝나자 총무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회장이라는 녀석인 모양이었다.
“지금 오고 있대. 일단 들어가자.”
빈소에 다시 들어서서도 접견실이 썰렁하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둘이서 빈소를 먼저 보기로 했다. 빈소에는 아들인 모양인지 상주 하나가 있었고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검정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맞은 편에 서 있었다. 내가 헌향을 했다. 무릎을 꿇고 향을 하나 피워 꽂은 다음에 총무와 나란히 서서 절을 했다.
“이 친구야, 나한테 절 받으려고 이렇게 일찍 갔나?”
영정사진을 보고 한마디 했다.
아들로 보이는 녀석에게 우리는 아버지의 친구들이라고 했다. 아들이라는 녀석은 나를 알고 있다면서 대한중기 사장님이 아니시냐고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안면이 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녀석은 예전에 우리 회사에서 포클레인 조수로 일을 했노라고 했다.
종철이 아들이?
그런 적이 없는데,
종철이 아들이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고,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녀석이 없는 소리를 할 리가 없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총무 녀석이 끼어들었다. 결혼식에서 봤다면서 지금도 씨름을 하고 있느냐고 녀석에게 물었다. 녀석은 지금 씨름 지도자로 뛰고 있다고 했다. 총무 녀석이 어디 소속이냐고 물었고 사주라는 녀석은 무슨 고등학교에서 씨름을 지도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학교라면 내 모교였다. 그 모교의 씨름코치를 나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 죽은 창대의 아들 녀석이 그 학교에서 씨름코치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녀석은 예전에 우리 회사에 포클레인을 배우러 온 적이 있었다.
가만, 우리 회사에서 포클레인을 배우고 모교의 씨름코치라면 창대의 아들인데, 내 기억에 뭔가 에러가 난 것인가? 뭔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거기서 따져 물을 입장은 아니었다.
간단하게 몇 마디 하고 우리는 접견실로 나왔다. 자리를 잡고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례도우미가 냉큼 음식을 내왔다. 음식이 나올 때쯤 회장이라는 녀석이 빈소로 들어섰다.
“왜 이리 썰렁해?”
“몰라, 다른 녀석들이 오지 말자고 약속이라도 했나?”
친목계지만 상조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오합지졸의 계도 마찬가지였다. 본인이 상을 당하면 얼마를 위로금으로 준다는 계칙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걸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회장은 그 계칙에 의해서 현금을 찾아온 모양이다. 그런데 망자가 된 종철이가 모임이 있는 날 참석하지 못하는 바람에 밀린 회비가 좀 있었던 모양, 둘은 그 밀린 회비를 공제하고 주느냐, 그냥 무시하고 다 주느냐에 대해서 조곤조곤 상의했다. 죽은 친구를 앞에 놓고 돈 얘기를 하고 있으니 뭔지 모르지만 심기가 불편했고 꼴볼견이라 말을 거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잠시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왔다.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예전에 포클레인을 배우러 왔던 씨름을 했다는 아이가 분명히 창대 아들이지 싶은데 종철이 아들이 나를 알고 있다? 내 기억에 이렇게 오류가 발생할 수가.
창대 아들에게서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창대의 부음이었다. 그때는 내가 몽골에 일을 벌여놓고 있을 적이었다. 국내 사업에 이골이 날 정도가 되자 해외로 눈을 돌렸다. 몽골로 나가서 발판을 구축하고 그 메마른 땅에서 중기 사업을 했다. 그곳에 현지 직원을 고용해서 회사를 차리고 국내에서 쓰던 중고 장비를 여기서는 내가 수출하고, 몽골에서는 내가 수입을 하는 식으로 가져가서 임대를 하며 굴리다가 마땅한 주인이 나타나면 웃돈을 받고 팔아넘기고 또 장비를 가져가던 시절이었다. 몽골의 사막에서 일하고 있는데 창대 아들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 그곳에서는 다른 서비스는 안 되고 문자메시지만은 받을 수가 있었다. 창대의 부음이었는데 간단한 메시지였다.
아, 이 친구가 기어이 죽었구나.
사막에서 오지는 못하고 잠시 그의 명복을 빌었던가.
그랬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종철이의 아들이었나? 기억에 혼돈이 왔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웠다. 내 기억을 의심하지 말자, 정말 이상해지겠다. 결론은 그것이었다. 담배를 밟아서 끄고 내려갔다. 부디 돈 얘기가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창대를 안 것은 벌써 사십 년에 가깝다. 이 좁은 바닥에서 조수로 시작해서 기사를 하다가 처음으로 내 차를 할부로 사고 난 뒤였다. 물론 굴삭기다. 그렇게 따지니 사십 년은 좀 못 되었다. 아무튼 그는 소형 덤프트럭을 운전하고 있었다. 물론 그 차도 창대의 차였다. 중고로 구매한 것인데 할부가 들어갔다. 둘은 열심히 벌어서 할부금을 갚아야만 했다.
나는 구미의 저쪽 가장자리에 있는 면 단위가 고향이고 창대는 구미의 이쪽 가장자리에 있는 면에 태어나서라 전혀 다른 학교에 다녔고 일로 만나기 전까지는 서로가 몰랐던 사이다,
덤프와 굴삭기, 현장에서는 다음날 사용할 장비를 주문할 적에 그렇게 요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창대에게 일이 들어오면 나를 불렀고 나에게 일이 들어오면 창대를 불러 콤비가 되어 일했다. 물론 장비 단가와 덤프의 단가는 달랐다. 같이 일을 하고 서로의 몫을 챙겨갔다. 당시에 나는 결혼을 해서 딸 둘을 낳았고 창대는 결혼을 전제로 연애하던 중이었다. 창대는 일을 마치면 나와 소주 한잔을 기울이든가 아니면 애인을 만나러 나갔다. 당시에는 차가 귀했던 시절이라 그는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애인을 만나러 나가면서 꼭 덤프트럭을 끌고 나갔다.
창대를 만나고 보니 나이가 동갑인데다 친구의 친구가 되었으니 서로 친구를 하자고 했다. 어느 술좌석에서 창대가 먼저 제시했다. 그의 연애 시절, 같이 애인을 만나 커피를 마셨고 술값을 내가 먼저 내고 자리를 피해 주던 날도 있었다. 그이 애인은 여러 번 만났다. 만났다고 하기보다는 보았다.
그의 결혼식에도 참석했고 그의 신혼집, 집들이에도 당연히 참석했다. 그의 칠팔 년 가까이 친하게 지내며 일을 나눠 가졌다. 그와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것은 창대가 일하는 중간에 짬이 나면 내 중기에 만지면서 운전 기술과 일머리를 배워 덤프트럭을 버리고 중기, 굴삭기로 갈아타면서였다. 그가 굴삭기를 사버린 것이었다. 공동 운영체였는데 갑자기 경쟁업체가 된 것이다. 굴삭기 두 대가 나란히 들어가 사이좋게 일을 할 현장은 드물었다.
창대는 창대대로 일을 잡고 나는 나대로 일을 잡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창대는 나의 경쟁자가 되지 못했다. 나는 이미 근면과 성실, 그리고 깔끔한 일머리로 좁은 바닥에서 인정받아 굴삭기를 세 대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창대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나를 전범으로 여기며 쫓아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이미 좁은 바닥에서 중기의 대명사로 자리를 견고하게 굳히고 있었다. 그는 나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다. 가끔 소주 한잔하자면서 전화를 넣기도 했다. 창대가 내 사무실로 찾아와 같이 소주를 마시기는 했지만 일에 대해서는 서로가 입을 다물었다.
창대가 찾아오는 횟수가 점점 뜸해졌고 세월은 갔다.
그가 이혼했다는 소문을 풍문으로 들었고 자세한 내막을 알기에는 또 세월이 갔다. 그 후 언젠가 조수를 하나 구했는데 관심이 없었다. 당시에 내가 거느린 직원이 스무 명이 넘었으니 어느 기사의 어느 연줄로 들어왔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현장을 둘러보러 나갔다가 현장에서 타고 들어올 차를 놓친 어성버성하게 생긴 조수를 태우고 들어왔다. 운전해서 오는 동안 조수의 신상에 관해서 물었다. 배우러 들어온 녀석들에게 정을 주면 안 된다. 기술만 어느 정도 배우면 나갈 놈들이기에 가능하면 냉정해야 했다. 그런 놈들을 수도 없이 겪었기에 이골이 났다. 그런데 심심해서 물었는지 어딘가 모르게 관심이 가서 물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아버지가 사장님의 친구라던데요?”
내 친구? 그 말을 듣고 꼬치꼬치 물으니 바로 창대의 아들이었다.
아, 인연은 이렇게 또 연결되는구나,
내심 놀랐다. 보통 조수들이 제 생각으로 어느 정도 배웠다고 생각하고 갈 적에는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데 이 녀석은 아니었다. 기술은 덜 배웠지만 제 전공을 찾아서 간다고 인사를 하러 왔었다.
전공이 뭐냐고 물으니 씨름인데 모교의 코치 자리가 비어서 채용되었다고 했다.
“씨름? 너희 아버지가 기골이 장대하니 너도 그 길로 들어섰구나.”
좋은 기분으로 녀석을 보냈다.
당시에 몽골에도 일을 벌여놓아 구미와 몽골을 오가며 일을 했는데 상당히 바빴었다. 몽골에서 창대의 부음을 받았으니 십 년 가까이 되었겠다. 몽골을 완전히 접고 미얀마로 투자처를 옮긴 지가 벌써 팔 년이니 창대가 숟가락을 놓은 지, 대충 따져도 십 년은 넘었겠다.
창대는 내 기억에서 서서히 엷어지고 있는데 오늘 종철이 빈소에 와서 종철이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창대를 떠올린 것이다.
무엇이 그를 떠올리게 했나?
씨름? 씨름이었다.
씨름이 창대의 연결고리였다. 빈소에 들어가 눈치를 총무와 회장은 돈 얘기에 대해서는 일단락을 지은 모양이었다. 겨우 문상은 온 친구가 회장과 총무, 나를 제외하고는 단둘이었다. 정말 이래도 되나? 친구가 먼 길을 갔는데, 내가 서운하고 어색했다. 총무와 회장이라는 녀석들도 그게 자신을 일이 아니라면 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주 앉은 녀석들에게마저 비정한 기운이 느껴졌다.
“저 애가 종철이 양아들이야.”
앞에 비어 있는 잔에 소주를 따라주던 총무라는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은밀한 듯 말했다. 그때 상주인 씨름이 빈소를 나와 체 친구들로 보이는 무리가 앉은 자리로 지나갔다.
“양아들? 그래?”
이제 뭔가 감이 잡혔다. 내 기억은 틀린 게 아니었다. 오류가 아니었다. 창대의 아들이 창대가 죽고 종철이 양아들로 갔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상주라는 녀석이 그 옛날 중기 기술을 배우러 왔다가 씨름코치로 간 그 아이가 분명하다. 그 말은 듣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데 대한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럼 종철이는 아들이 없었나?”
“딸만 하나 있었지.”
총무는 죽은 망자의 근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전광판을 보니 딸이 둘이던데?”
“이런 눈치 없기는, 딸 하나와 아들은 지금 마누라가 데려온 자식이야.”
“뭐라구?”
그 소리를 듣고 뭔가에 홀린 기분이 들었고 지구가 잠시 기우뚱거렸다. 그냥 아들이 없어서 후원자로 나서서 수양아들로 삼은 게 아니라 마누라가 데려온 자식이다? 그럼 지금 본 저 여자가 그 옛날 창대와 같이 커피를 마시고 술자리에 앉아있던 그 여자란 말인가?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자면 창대 마누라가 이혼하고 종철이 마누라가 되었다는 말인데 이게 말이 되는가. 기우뚱거리던 지구가 바로 잡히자 녀석에게 물었다.
“그게 언젠데? 지금 마누라와 재혼한 게?”
충무 녀석은 술잔을 들다 말고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으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종철이 마누라가 옛날의 창대 마누라였단 말인데?”
좀 더듬거리고 있었다. 나는 지극히 간단한 사실이 복잡하게 여겨져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다른 친구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창대가 누군데?”
총무가 내 입에서 나온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는지 되물었다.
“지금 종철이의 마누라, 저 여자의 전남편인데 내 친구야. 어딘가 모르게 안면이 있다고 했더니 종철이와 창대가 구멍 동서였었네.”
그 말을 뱉고 나서야 안개 속에 있던 모든 사실이 명확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들은 구멍 동서였다. 그렇다. 이제 명확해졌다.
“희한한 관계도 다 있네. 그거 재미있는데, 자네 친구라는 그 종철이 구멍 동서는 지금 뭐 하는데?”
감이 잡혔는지, 총무 녀석이 이젠 호기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는 죽었다. 죽은 지 십 년이 넘었다. 그가 살아있을 적에 이혼했다는 사실도 말했다.
총무 녀석도 조금 놀란 눈빛이었다.
“친구의 친구, 마누라가 친구의 친구에게 개가했다는 말인데 나도 재미있는 놈이구만.”
“그럼 죽어서 과부가 되어 종철이에게 온 것이 아니라 이혼을 하고 종철이를 바로 만났다는 말인데,”
둘은 참 희한한 인연이 다 있다는, 말을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까지 다른 친구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빈소가 어쩐지 허허로웠다.
“어이 친구! 계원이 서른 명이 넘는데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앞골의 고향 친구들은 없나.”
종철이의 고향은 앞골이었다. 앞골에서 나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바로 앞에 있는 해평면 소재지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얼른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앞골에도 꽤 여러 명의 친구가 있다. 그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이 친구가 연락을 끊고 살았을 수도 있어. 이럴 때 보면 망자의 인간성이 나타나는 거지.”
총무의 말이었다. 총무의 말을 나는 역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잘못한 게 있어도 이럴 때 와서 풀어야지, 그렇다고 종철이가 드러나게 인품이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한 모 난 데가 없이 무덤덤하게 살았던 친구였다.
회장이라는 녀석은 차를 가져왔다며 술을 마시지 않고 옆에서 그저 듣고만 있었다. 회장은 지금 행정구역이 다른 아포에 살고 있다. 거기는 김천시에 들어간다. 대리운전을 시킬 수도 없는 곳이라 술을 권하지 않았다. 회장은 볼일만 보고 바로 돌아가겠다는 눈치인데 그의 볼일이란 미망인을 만나 계에서 정한 위로금을 전해주는 일이 고작이다.
그때 빈소에 들어서는 친구가 있었다. 명수인데 시청에서 무슨 과장 자리를 전전하다가 올해 정년으로 공로 연수에 들어간 친구다. 육 개월은 출근하지 않아도 월급이 고스란히 나온다며 외국으로 다니고 싶은데 아직 코로나로 인해 막고 있는 나라가 많아서 꿈을 펼치지 못한다는 친구다. 그 소리를, 지난 계 모임에서 들었다.
“벌써, 다 왔다 갔나?”
“가기는, 이게 전부야.”
명수도 좀 놀라는 눈치였다.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던 명수는 다 조문을 했느냐고 묻고 있었다. 같이 보자며 회장이라는 녀석이 일어섰다. 회장은 빈소 조문을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둘이서 잠깐만에 조문을 마치고 합석을 했다. 장례도우미들은 새 손님을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을 다시 내왔다.
“야, 인간성 엿보인다. 다 늙은 놈들이 밤에 알을 품는 건 아닐 터이고 여기 와서 술이나 한잔하지.”
잔을 들며 명수가 탄식처럼 뱉은 말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속으로는 그렇게 동조했지만 나는 잔을 들었다 놓았다가 했을 뿐 입을 닫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탁자 밑으로 내려 단톡방에 카톡을 보냈다.
빨리 문상오세요. 지금까지 나 빼고 세 명이 왔슴돠. 친구가 죽은 것보다 더 슬픈 일입니돠.
간단하게 작성해서 날렸다. 이렇게 카톡을 보내면 서른 명에게 다 날아간다. 시도 때도 없이 건강을 챙기자는 이야기가 올라오는 단톡방인데 나는 카톡을 잘 보내지 않았다. 이렇게 보내면 물론 누가 보낸 것이라는 것도 안다. 금세 맞은 편에 앉은 총무라는 녀석이 카톡을 확인했는지 나를 넘겨다 보고 눈 흘기며 웃었다.
“올 사람 다 왔는가 봐”
회장이라는 녀석도 카톡을 읽었는지 씁쓰레한 소리를 한숨처럼 토해냈다. 정말 인간성이 확인되는 자리였다. 너무 썰렁해서 불편한 자리였다.
“이거 친구가 죽었는데 정말 이래로 되는가?”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흘렸다. 그 말을 기화로 자리를 정리하자는 뜻인지 총무가 미망인을 부르자고 했다. 인사를 하고 가야 하겠지. 어리숙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심 호기로웠다. 창대와 살다가 이혼하고 종철과 재혼한 여자의 얼굴이 궁금했다. 어떻게 변했을까? 빈소에서 잠깐 보았지만, 그때는 건성으로 보았다. 총무가 미망인을 불렀다, 창대 마누라라고 해야 마땅한지 종철이 아내라고 불러야 하는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엉뚱하게도 그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상복을 입은 미망인이 친구들이 있는 자리로 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전혀 낯설지 않았다. 어떻게 보니, 옛날의 모습이 살짝 비쳤다.
미망인이 자리에 앉자 총무가 돈 얘기부터 했다. 회비에서 얼마를 부조하기로 되어있다. 그런데 망인이 된 친구가 병이 오기 전에 세 번이나 불참하는 바람에 밀린 회비가 조금 있다. 그걸 공제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죽은 친구가 빚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가는 게 홀가분하겠다는 판단으로 그 금액을 공제했다.
총무의 말은 거기까지였고 종철의 아내는 당연히 그래야 떠나는 사람이 홀가분하게 간다고 거들었다. 그다음은 내일 장례 절차에 대해서 한 친구가 물었고 장지에 관해서도 얘기했다. 청도의 무슨 공원묘원으로 간다고 했다. 총무 녀석은 앉은 자리에서 둘러앉은 친구들을 소개했다. 회장인 거시기고, 친구이며 같이 계를 하는 시청의 과장이고, 이 친구는 해외에서 사업을 하는 친구라고 나를 소개했다. 종철이 아내는, 아니 창대 아내는 나를 보더니, 안면이 많다고 했다.
“재작년에 상행 갈 적이 같이 가셨어요?”
미망인이 나에게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재작년인가 계에서 부부 동반으로 강원도 무슨 산엘 간 모양이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 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미얀마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럼 어디서 봤죠?”
미망인은 다시 묻고 있었다.
“아주 옛말에 창대와 연애할 적에 같이 커피를 많이 마셨죠.”
내 말에 미망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창백해지는 얼굴을 보며 아차, 싶었다. 지나가다가 어디서 봤다고 둘러대도 되는데.
내 말을 끝으로 순간적으로 감전된 정적이 흘렀다.
“그 사람 이야기는 하지도 마세요. 그 사람 때문에 정신병원에도 가고 나는 기억마저 상실했어요. 그때 기억은 아무것도 없어요.”
실수였다.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또 이상해지고 기억에서 떠올리게 된다. 앞에 놓인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안주 빚을 생각도 잊은 채 눈을 감았다.
이 자식들은 도대체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이 자식들 지금 알을 품고 있나?
엉뚱한 생각을 짚다, 창대의 얼굴이 난데없이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한참 있다가 눈을 떠보니 미망인은 자리를 뜨고 없었다.
조용히 일어나 담배가 당긴다는 투로 자리를 털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카톡이 들어왔다. 단톡방에 카톡을 읽은 한 녀석이 지금 근무 중이라며 저녁 늦게 조문을 할 거라는 글이었다. 그 글을 보고 중얼거렸다.
다른 놈들은?
어두컴컴한 영안실 마당을 나와 담배를 물고 서성이다,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빈소에 다시 들어가기도 어색하고, 아무래도 이렇게 맨숭맨숭한 기분으로 집으로 가지는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앞에 편의점 진열장의 소주가 펼쳐졌고 씨름판의 흰 샅바가 난데없이, 눈에 어른거렸다.
샅바!
누구와 씨름이라도 한판 붙어볼까? 나는 소주보다 먼지 샅바를 잡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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