短篇小說 24 話 바람의 季節/ 惠庵 박 상 국
봄꽃이던 여름 꽃이던 갈꽃이던 꽃이 피는 곳엔, 벌 나비들이 끌었다 천층만층 구만 층인 사람들 속에 피는 사람의 꽃이 사랑이라서, 그 사랑은 다색다향 한 꽃들처럼, 화려하고 매혹하고 자주감자 처럼 아렸다 얼굴 번지르르하고 말발 화려한 사내의 아스바리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빼어난 미모에 향내 나는 여자에게 무심한 사내가 있을까? 자고로 사내란 물건들은 치마만 두르면 목젖이 떨어지라 군침을 삼키고, 남의 여자라면 그 져 욕심이 동해 언감생심 흑심을 품는 것이 보편적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며 빌미를 삼아 밑질 것 없다는 식으로 슬쩍 들어대는 게 남자들이다 ‘안녕하세 또 만나군요’ 요렇게 말발을 트며 껌 딱지처럼 딱 들어붙는 것이, 또한 남자들이 가진 연애수법이기도 하다 민욱이 지수에게 노골적으로 들이 됐다. ‘우리 사귑시다.’ ‘네-에, 댁이 누군 줄 알고 사겨요? ‘이렇게 두 번 세 번 만났는데 네 번 다섯 번 만나면 차차 알아지겠죠. 내가 누구인지는 ’ 지수는 민욱의 너스레에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싫지가 안은 것이다 그렇다고 날 잡아 잡수셔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여보세요. 꿈 깨세요. 오다가다 만난 사람에게 인생을 마 낄 만큼 허접한 여자가 아니니까?’ ‘인상은 좋으신 분이 말씀은 거칠게 하십니다. 제가 언제 허접한 여자로 봤다고’ ‘지금 당신이 어르고 간 빼 먹으려는 식으로 나왔잖아요?’ ‘이 보세요.’ 민욱이 지수를 바라보며 심하다 투로 말을 하려는데 ‘보긴 뭘 봐요’ 매몰차게 지수는 민욱의 얼굴을 쏘아 보며, 휑하게 자리를 떴다 한마디로 닭 쫒든 개꼴이다 ‘......’ 민욱은 멀어지는 지수의 뒤통수를 향해 그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면 백번 천 번이라도 찍을 태니 안 넘어가나 두고 보자며 혼자 말을 허공에 날렸다 멀쩡하던 하늘이 추적추적 비를 뿌렸다 가랑비가 점차 빗발이 굴어지더니 요란스럽게 소낙비로 변해 쫙쫙 시원스럽게 퍼 붙는 것이다 방금 땡 벌처럼 쏘고 달아난 여자처럼, 생각지도 못한 비를 만난 것이다 민욱은 남의 가게 처마 끝에서 비 맞은 개처럼 후줄근한 모양새로 섰다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빗속으로 눈에 익은 간판이 보였다 ‘참새방앗간’ 낯설지 않는 단어의 친숙함이 지남철처럼 민욱을 빨아 당겼다 날씨 탓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운 테이블사이를 비집고, 민욱은 가게 안쪽 모서리 빈자리에 앉았다 -1- 그리고 자리에 앉자마자 매운 닭발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써 빙하는 아가씨가 이내 자욱한 매운 연기 속에서 기본안주에 소주 한 병을 들고 나타났다 민욱은 일단 소주한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카-’ 목젖을 적시며 소주가 짜릿하게 가슴을 쓸며 내려갔다 한 잔의 술로 위안을 얻으려는 시간이다 그런데 술이 달았다 눈물로 두 뺨을 적셔본 사람들은 그 눈물이 얼마나 짜다는 것을 안다 겨울양식으로 배추를 소금물에 절여 숨이 죽어야, 벌겋게 김치를 버무려 독에 차곡차곡 채워 끼니때마다 한포기 씩 꺼내 입맛을 돋우듯,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은 그 눈물의 의미로 한 생을 담금질 하는 것이다 참아야 기회가 오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 것이 지혜다 인간은 고독할 때 독배를 마시는 사람과 독백하는 사람이 있기에, 사람마다 그 역량이 다르다 한잔 술로 슬픔을 달래고 한잔 술로 기쁨을 끌어안을 수 있다면, 술은 묘약이다 민욱이 취기가 돌쯤, 비는 그쳤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늘이 쨍하나, 일상은 늘 변함이 없었다. 월화수목금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출근하는 직장인이다 민욱은 언제나처럼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 일이었다. ‘좋은 아침’ 자판기 앞을 지나치는 직원들을 향해 항상 먼저 인사하는 인정스런 직장상사 민욱에게, 동료 직원들은 ‘네- 좋은 아침입니다’ 늘 이렇게 업무는 시작 되었다 민욱은 꽤 이름 있는 건축설계사무소우향의 대표자였으니, 30대 초반의 노총각으로 능력 있는 사람 측에 낄만한 사람이다 계절은 바람 냄새로 봄여름가을겨울을 이름 지었다. 한해의 어정칠월 둥둥 팔월이 진 장마 마른장마로 여름이라는 이름을 쓸고 지나 같다 눈을 뜨는 아침이면 창가에 살포시 내려앉는 빛살, 그 눈부심이 경이로워서 민욱은 발가벗은 알몸을 아침마다 감췄다 겨울나무들이 나신의 몸을 아침이슬로 세안을 하고 마른수건질을 끝낸 봄이면, 나무들 몸에서 코티비누냄새가 나듯이, 민욱의 몸에서도 아침이면 코티비누 냄새가 났다 언제나 봄은 소망의 계절이다 올해는 고향집 봉화석포에서 결혼독촉전화가 없게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지만, 그것이 맘대로 뜻대로 대는 일이 아니란 걸 어찌 모르랴! 탄광촌에서 어린 날은 검둥이처럼 자랐다 산도 길도 마을도 집도모두 검정 칠을 해 놓는 곳에서 비비적거리며 살았으니, 어찌 아프리카검둥이를 면할 수가 있겠는가, 눈만 빠끔하게 반짝거리지 움직이는 것들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바위덩어리처럼 까맸다 민욱은 그 꺼져가는 어둠에서 별천지서울을 향해 야망을 키운 사내다 민욱의 아버진 늘 대처로 나가라고 주문했다 아마도 그 영향이 컷을 것이다 지금 서울에서 눈을 감고 눈을 뜨는 이아침을 만날 수 있는 것이..... -2- 생각의 수레가 늘 무거운 남자 민욱이 지수를 만나려면 그 길에서, 퇴근시간을 기다리면 어김없이 만날 수 있다 민욱은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사람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민욱은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정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꿩 병아리 같다 고만고만한 여자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물고기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오니, 분간이 서지 않아 민욱은 더 가까이 몸을 움직였다 그때다. 그 중에 삐쭉키 큰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발의 긴 머리와 눈에 뛸 만큼 야시시한 옷매무새가 기억속의 여자가 분명했다 민욱은 지수의 앞을 막아섰다 ‘뭐야!’ ‘뭐긴 뭐야! 나야나’ 민욱의 얼굴을 빤히 처다 보며, 지수가 한 말이다 ‘내 취향 아니니 제발 꺼져 주세요.’ ‘이 아가씨 어찌 호감을 느끼며 닥아 서는 남자를 잡상인 취급을 하실까?’ 민욱은 지수의 옆으로 바짝 닥아 서서 함께 걸으며 ‘이제 세 번 만났으니, 차나 한잔 합시다’ ‘저 그럴 시간 없거든요.’ ‘시간이야 맨 그면 되는 거죠. 잠깐 차나 한잔 하입시다’ 민욱은 속으로 자신이 참 구질구질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열 번이고 수무번이고 백번이고 찍어야 할 대상의 나무라면, 어찌 마다한다고 도끼를 팽개칠 수 있겠는가, 지수가 힐끔 돌아보며 무슨 얘길 하고 싶어 차를 마시자는 거냐며,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응할 태니, 다음엔 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다 ‘예-에 예-’ 민욱은 일단은 화끈하게 그러마라고 했다 둘은 찻집에 앉았다 민욱은 서민욱입니다 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명암을 건넸다. 지수는 명암을 받아 한참을 살피더니 ‘건축설계사세요.’ ‘네-’ ‘좋은 직장 가지신 분이 왜 저 같은 공순이를 따라 다니세요’ ‘직장이 귀천이 있나요?’ ‘그래도 사람들 보는 눈은 그렇지를 안 찮아요?’ ‘다 제 눈에 안경이랍니다.’ 민욱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며, 지수는 말했다 ‘못 올라갈 나무 처다 보면 목만 빠진 다구요. 전 그렇게 목 빼 구 싶지 않구요.’ 둘의 대화가 제법 농익어 같다 민욱이 제안 했다 -3- ‘친구 같은 애인, 애인 같은 친구로 일단 한번 사귀어 보자구요.’ 지수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한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만나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 그때 말하세요. 먹기 싫은 음식 먹는 것도 고역이지만, 보기 싫은 사람 보는 것도 고역이라는 걸 아니, 싫다는 사람에게 목맬 사람 아니니까’ 한참을 묵묵 경청하다 지수는 나쁠 것 없다며 그러자고 했다 민욱은 속으로 오- 예에를 외쳐다 둘은 통성명을 했다 지수는 고향이 경주 감포이고, 고향에는 어머니와 오빠한명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식당을 하고, 오빠는 공무원이라고 민욱은 봉화석포가 고향이고, 고향에는 양부모와 여동생 둘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아이는 아프면서 자라고, 사랑은 부딪치면서 성숙했다 개 닭 보듯 하던 지수의 태도가 백팔십도로 변해, 민욱보다 더 적극성을 띄웠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 다 던이, 지수가 늦바람에 물불가리지 않고 몸을 던졌다 사랑 그거 한번 빠지면 좀처럼 헤어나기 어렵다 배꼽시계가 때를 넘기면 쪼록쪼록 밥 달라고 성화를 부리듯이, 지수가 민욱의 입김 고파지면 치근치근 보채기 일 수였다. ‘자갸 언제 올 건데’ 옛말 하나도 틀린데 없다 목마른 놈이 샘 판다고, 언젠가는 민욱이 목말랐었는데 지금은 지수가 시도 때도 없이 갈증을 느낀다. 불이란 것도 집힐 때 꾸역꾸역 연기가 나기도 하고, 피식피식 생나무는 제 몸의 물 끼로 불길을 막지만, 그 몸에 불이 번지면 이판사판으로 활활 제 몸을 태우듯이, 사랑이란 것도 한번 가슴의 강을 건너고 나면, 이판사판 공사판이 되는 것이다 유행가가사처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게 사랑이라서, 한번 사랑에 빠지면 먹어도 먹어도 사랑이 고픈 게 사랑앓이다 더욱이 여자는 사랑의 금단현상이 심하다 아릿한 사랑에 빠지면, 지옥이라도 남자를 따라 나서는 게 보편적인 여자의 마음이라서, 옛날 옛적 젊은 과부들이 그 욕정을 견디기 위해 바늘로 허벅지를 찔렀다지 않든가, 지수는 밤마다 민욱의 가슴이 그리웠다 바람 따라 꽃이 피었다 바람 따라 꽃이 지고나면, 꽃들은 씨앗을 남겼다 지수도 배가 불러왔다 아무리 배를 동여매도 더 이상 세상눈을 속일수가 없을 만큼 배가 불러오자, 지수는 사표를 내고 들어앉았다 감포 지수고향집에서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민욱의 부모들은 술장사를 하는 홀어머니를 둔 지수의 가정환경이 썩 내키지 않아, 뭣 땜에 기울어도 한 참 기운 결혼을 하려느냐고 반대를 해, 차일피일 승낙을 받아오겠다면서 민욱은 지수에게 기다리라고만 했다 지수입장에서는 지금 진퇴양난에 빠진 셈이다 -4- 남자라는 짐승들이 그렇다 화장실 갈 때 급하지 화장실 같다오면 바쁠 게 없는 게 남자라는 인간들이다 낚시꾼은 잡은 고기에게는 더 이상 밑밥을 던지지 않는다고, 민욱도 다를 바 없는 사내였다 지수는 하루하루가 무거웠다 몸도 마음도..... 화르르 피어 화르르 진 벚꽃 진자리에, 울긋불긋 물든 단풍잎이 떨어져 바람에 뒹굴었다 지수는 만삭의 몸으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에 뜬 건 눈물이 고였다 겨울 초입 흰 눈이 펄펄 복사꽃처럼 휘날리는 날 지수는 예쁜 딸을 낳았다 축복받지 못하고 태어난 생명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축복 받아야 할 생명이 축복 받지 못하는 것이 태어나는 아이의 잘못은 아니잖은가, 무책임한 어른들의 하룻밤사랑의 씨앗이 된 죄만으로 천대와 천시를 감당해야한다면, 이건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지수는 딸 아랑을 자기호적에 올렸다 원 튼 원치 않았던 아비가 된 민욱의 처신이 우유부단하다는 이유에서, 지수는 결정한 것이다 이렇던 저렇던 아랑은 무럭무럭 자랐다 지수는 눈만 사랑에 허우적거리다 수렁에 두발이 빠진 듯했다 그러나 지수는 민욱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불을 가리지 못한 자기책임도 컷 기에,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한 번의 실수로 빚어진 무거운 책임을 감당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랑이 행복의 홀씨가 되도록, 아랑을 위한 삶을 살겠노라 지수는 다짐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번갈아가며 바뀌었다 아랑은 키 큰 나무처럼 자라 눈 높이 같을 쯤, 아빠의 존재여부를 물었다 지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란 것에 감사하고,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에 고마워하고, 범죄자가 아닌 것에 다행하다 생각해라. 그 다음은 그리워하던 보고파하던 네 마음이 하라는 대로 만나건 만나고 싶지 않건 마음가는대로 하렴’ 아랑은 무심한 아빠라는 존재가 미웠다 지수는 아랑에게 세상에는 가지 말아야 할 길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고, 먹지 말아야 할 것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을 분간하지 못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낭패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아랑은 뭐라 대꾸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의해한다는 눈빛이었다. 생각의 그물에 갇히면 더 이상 발전 할 수 없다 지수는 아랑의 어깨에 천사의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더 높은 창공을 날아오르는 도요새처럼 더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 남들이 보지 못하고 남들이 가지 못한 곳까지 헐헐 날아 아랑의 영적양식이 되게 하고 싶었다. ‘엄마. 오늘 저 좀 늦을 거예요’ ‘왜-’ ‘저 오늘 미팅 있어요.’ ‘응- 알았어,’ 지수는 더 이상 따따부따 너절하게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다 -5- 지수는 아랑의 뒷모습에서 자기의 사춘기가 보였다 멀지도 않은 시간이건만 참으로 멀어져 버린 기억속의 어떤 날이 찰찰 찰 흑백영화 필름처럼 돌아 같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면 백번 천 번이라도 찍겠다던 그 사내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금도끼도 은도끼도 아닌 쇠도끼로 무참히 한 그루 나무를 찍어 쓰러트려놓고, 두발 쭉 펴고 편한 잠을 잤을까? 지수는 부질없는 생각에서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지천으로 핀 뒷산의 아카시아 꽃향내가 미풍에 실려 창을 밀고 들어섰다 사랑 꽃의 홀씨인 아랑을 생각했다 지수는 아랑에게 성급한 사랑은 하지 말라고 늘 말해왔다 사랑의 상처는 항상 더 많이 사랑한 쪽의 사람이 더 깊은 상처로 더 많이 아파하기 때문이다. 바람 냄새가 계절을 말했다 8월의 태양은 성난 사람처럼 이글거렸다 그러나 초목들은 내면의 푸른빛을 겉으로 드러내어 더 푸르고 더 싱그럽게 보였다 아랑도 어엿한 숙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남자친구 집에 한번 되리고 오렴,’ 지수가 넌지시 아랑을 떠봤다 ‘엄마 아직 그럴 단계는 안 여요’ 그 말뜻인즉 알아가는 단계라는 말이었다. 지수가 그랬듯이 첫사랑에 너무 강하게 삘이 꽂히면 성급해 질수 있기에, 지수는 노파심으로 예방주사를 놓은 것이다 가는 세월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실감됐다 어제 같이 딸 아랑과 같은 발랄한 청춘이었거늘, 오늘 거울 앞에 앉은 지수의 모습은 여름 꽃이진 한그루 나무와 같은 중년의 여자모습이다 립스틱을 바르고 아이라인을 그리며 지수는 생각했다 네게도 가을꽃을 피울 기회가 올는지 라고..... 한시대가 막 오른 연극처럼 희비쌍곡선을 이루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같다. 살아있는 생명들에겐 천명이란 게 있다 어떤 사람은 백수를 하고 어떤 사람은 한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사라졌다 지수도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통곡했었다 단 하나 혈육인 오빠는 경찰공무원 퇴직을 하고, 포항에서 법무사 사무실을 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한 낯 빗물 꽃 같다. 빗금을 치며 내리는 빗물이 유리창에 떨어지면 수직으로 줄줄 흘러야 하지만, 고요한 호수나 발길 잦은 보도블록 페인 곳에 떨어지면 동그랗게 파장을 일구며 빗물 꽃을 피우듯이, 인간도 순간순간에 운명이 갈라진다는 것을 지수는 삶으로 터득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지수는 한 여자가 아니라 한 여자의 어머니자리를 바람벽처럼 지켜낼 것이라 굳게 다짐했다 지수는 아무리 궁해도 물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지수가 아랑을 품었을 때 민욱 어머니가 한 말이 가슴에 대못처럼 박혔기 때문이다 홀어미가 술장사를 하면 그 품행은 뻔할 뻔자라는 말이.....가시처럼 돋았든 것을..... -6- 동녘바다에서 붉게 솟은 해가 서쪽 산기슭에 걸터앉아 폐병쟁이가 각혈하듯이 피를 토한다. 술래처럼 숨었던 민욱의 이야기가 바람결에 전해졌다 지수가 아랑을 낳고, 자기유전자를 몸속에 지닌 아랑이 서씨 성을 가지지 못하고, 민씨성으로 입적이 된 후 민욱은 서울을 떴다 아마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겠지..... 대구에서 설계사무소를 차리고 직장동료였던 오혜숙과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하나 없이 오혜숙이 결혼 6년 되던 어느 겨울 위암으로 병사하고, 꺼벙한 독신으로 있다는 소식을..... 지수는 바람결에 전해지는 후문이라 확실치도 않을 뿐, 관심 밖인지 오래된 문제라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이러 튼 저러 튼 아무튼 독한 인간이다 밉든 곱던 자기분신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한번쯤 보고 싶지는 않더라도 어떻게 눈코입귀는 빠지지 않고 삐뚤 하지 않을까 궁금해서라도 아는 듯 모르는 듯 얼굴 한번 비추련만, 이 인간은 칼로 무 자르듯이 그 길로 발길을 끊었다 언젠가 아랑이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풍문에라도 전해지면, 아비 노릇은 못했더라도 아비 몫은 했으면 하는 게 지수의 숨은 마음이었다. 구름은 바람에 떠밀려 바람 부는 쪽으로 흘러가지만, 물길은 아무리 막고 막아도 제 갈 길을 가듯이 사람이면 사람다운 처신을 할 것이라 지수는 생각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아랑이 박사학위를 받고, 자기와 전공이 같은 의사와 결혼을 하겠다며 남자를 집으로 되려왔다 ‘박혜성입니다.’ ‘어서 와요’ 지수는 첫눈에 이 녀석도 한 성깔하게구나 생각했다 콧날이 산맥처럼 오뚝하고, 눈이 매처럼 날카롭고, 귀가 당나귀 귀처럼 큼직했다 혜성의 동굴 속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지수에 귓가에 닿았다 ‘아랑이 어머님을 닮아 군요,’ ‘그래요. 정말’ ‘네-에’ 듣기 싫지 않는 첫 립스미스다 혜성은 생김새보단 매우 침착한 성격이었다. 조근 조근 고향이며 가족관계를 설명했다 혜성은 고향이 강원도 홍성이고,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앞둔 군청공무원이고, 형제는 1남 3녀로 둘째라고 했다 그러자니 위로 누나 하나 아래로 여동생이 둘인 셈이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라고 했다 지수는 유복한 집에서 자랐구나, 안도했다 아이는 부모의 그늘에서 자라기에, 알게 모르게 부모들의 정서가 아이들의 골수에 몰래몰래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지수는 궁금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이 녀석은 지수의 어떤 면을 보고 좋아했을까가 더 궁금했다는 답이 옳을 것이다 ‘우리 아랑이 어디가 좋아요’ -7- 혜성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눈이요’ 지수는 뜻밖의 대답에 ‘눈’ ‘네에-’ ‘사슴 눈 같이 겁 많아 보이는 우리 아랑이 눈이 좋았다고‘ ‘예에-’ ‘겁이 많아 말 잘 들을 것 같아서’ 슬쩍 지수는 농으로 떠 봤다 ‘아뇨’ ‘그럼’ 혜성은 진지하게 말했다 ‘눈은 마음이 창이니까요?’ 그래 이놈 꽤 슬만한 놈이구나, 마음 조렸던 한 가닥 의문의 숙제를 지수는 풀 수 있었다 ‘많이 좋아하구. 많이 사랑하게 예비 사위님!’ 지수는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혜성은 곧바로 승낙에 예를 표했다 지수는 축복은 시작부터 순조로워야 한다는 생각이 변치 않은 사람이다 축복하고 축복해도 모자라는 게 축복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몸소 선행을 베푸는 부모에게서는 어진 자식들이 나고, 악행을 일삼는 부모에게서는 악동이 나기마련이다 맹모삼천지교가 맹자를 어진 사람으로 길렀듯이, 맹자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보고 듣는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서당가까이로 이사를 했든 것처럼, 아이는 부모의 그늘에서 부모들의 언행일체를 답습하며 자란다. 옛사람들은 그랬다 며느리를 얻기 전에 먼저 그 어미를 보고, 그 다음으로 그 친구를 살피라고, 어미의 성품이 모나고 둥근가에 그 딸의 성품도 볼 수 있고, 그 친구들의 행실을 보았을 때 며느리 될 사람의 품행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뿌리가 독이 있는 꽃은 어떤 비바람에도 그 독을 지울 수가 없고, 뿌리에 가시가 달린 꽃 뿌린 어떤 곳에 옮겨 심어도 가시달린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엄청난 거짓말을 꾸며내고, 가짜는 진짜 같이 만들기 위해 더 진짜같이 모방하듯, 인간들은 자기모순을 감추기 위해 끔찍한 짓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머니 혜성입니다. 지금 뭐하세요.’ ‘화분손질하고 있어 왜-!’ ‘어머니 저랑 드라이브 어떠세요. ‘갑작스레 드라이브라니......’ ‘어머니 저 오늘 시간 많아서 어머니 모시고, 어머니 고향바다 한번 가보려 구요.’ -8- 싫지 않는 제안이다 ‘나야 좋지만, 자네 무리해서 그럴 것 없어, ‘아니 예요. 언제부터 바다의 용이 되었다는 문무대왕 능을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그럼 가보세’ ‘네에’ 혜성은 한달음에 달려와 싱글벙글 이다. ‘그렇게 좋아’ ‘예-’ 혜성은 언제 준비했는지 선그라스를 지수에게 건넸다 ‘고맙네.’ 지수는 속으로 말했다 ‘이놈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준비성이 많은 사람은 매사가 신중하다 사람들은 꽃의 아름다움만보고 그 꽃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꽃은 비바람에 질 때 제 몸속에 있는 근성으로 흩뿌리기도 하고, 통째로 뚝뚝 떨어지기도 한다. 모든 사물은 흩뿌리면 추하다 고속도로 차창 밖의 풍광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얼마만인가, 평화로운 외출이...... 지수는 혜성을 보며 말했다 ‘ 자네 아랑이 많이 아껴주게, 외로운 아이야!’ ‘예- 그럴게요.’ ‘고마우이.....’ 혜성은 천안삼거리휴게소로 들어갔다 ‘어머니 여기서 점심 먹고 가요’ ‘그러세’ 천안삼거리 맛 집 해주비빔밥을 시켜놓고, 혜성은 지수를 바라보며 ‘어머니 많이 드세요’ ‘응-그래, 자네도 많이 먹게-’ 몇 십 년을 같이한 장모와 사위의 모습이다 그렇게 몇 시간 만에 다 달은 바다, 바다는 늘 푸른 빛깔로 하염없이 파도로 밀고 들어섰다가 하염없이 밀려나갔다. 얼마만이냐! 이 물씬한 바다 내음이..... 지수는 움츠렸던 가슴을 펴며, 한 아름 바다를 끓어 앉았다 뭉클해졌다. 어머니 생각에 손에 물마를 새 없이 자식들을 길러, 그 자식들 사람 구실하는 것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 어머니가 불현 듯 그리워졌다 혜성은 지수의 생각 밖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진 찍는데 몰두했다 철썩철썩 파도가 발밑까지 와 닿는 바위에 앉아, 수평선을 향해 마음의 편지를 띄웠다 사람들은 때로 숨겨든 속내를 아무도 모르게, 파돗소리에 깊은 계곡물소리에 끄집어내어 헹굴 때가 있다 -9- 지수도 그 동안 말 못하고 꽁꽁 숨겨놓았던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풀어, 발밑까지 밀고 들어선 파도에 던져버렸다 간혹 막힌 듯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살아있음에 느끼는 만족이고, 행복이다 기우뚱 서산으로 기우는 해 그림자가 길게 꼬리를 끌고 따라 다녔다 이제 왔던 길을 돌아갈 시간이다 세상에 홀로 와 그 누군가와 인연을 맺어, 벗이 되고 사랑이 된다는 것만큼 축복된 일도 없을 것이다 유행가기사는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때면, 임이 되었다가 임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붙이면 도로 남이 되는 게 사랑이라 했지만, 남남이 만나 한평생을 연리지처럼 붙어산다는 것 참 신통방통한 일이다 서울의 밤은 항상 불야성이다 그 불빛을 향해 불나방 같이, 하루살이 같이, 많은 사람들이 불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곳이 서울이기도 하다 지수는 기다림을 세웠다 아랑이 오기까지...... 넓은 거실은 지수를 더욱 공허하게 해, 지수는 방으로 피신했다 하루가 이렇게 긴 시간인 줄 미처 몰랐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어떤 날은 무심하게 하루가 지나가고, 어떤 날은 조바심이 나도록 아침에 나간 아랑을 기다리게 된다. 초인종소리가 딩동 딩동 집안에 풍경처럼 흔들리면, 지수는 관세음을 맞는 듯 사뿐사뿐 현관문 쪽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빠끔하게 문이 열리면, 수 십 년 이별했던 사람이 재회라도 하는 냥, 아랑은 엄마라며 지수 품으로 달려들고, 지수는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딸을 만난 듯, 아랑을 와락 끌어 앉았다 정말, 눈물겨운 모정이다 가을빛에 오곡은 여물고, 푸르디푸르던 들녘이 황금물결로 출렁였다 단풍이 절정을 이룰 시월의 마지막 주 혜성과 아랑은 결혼날짜를 잡았다 아랑은 청첩장이 나오자 지수 몰래 청첩장을 들고 민욱을 찾아 대구로 내려 같다 ‘아빠 저 결혼해요’ 민욱은 눈시울을 붉히며 아랑에게, ‘미안하다 아빠가 그 동안 너무 무심했다’ ‘아빠 저 아빠 손잡고 결혼식장 들어가고 싶어요.’ ‘.....’ 민욱은 선 듯, 그러자 그러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속담처럼, 지금에 와서 무슨 염치로 아비입네 하고 얼굴을 들어낼 수 있을까하는 조심스러움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빠 꼭 오셔야 해요’ ‘.....’ 민욱은 아랑에게 간 다 못간 다 확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랑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한 번 -10- ‘아빠 꼭 오셔야 해요’ 다그치듯 말을 남기고 아랑이 떠난 뒤, 민욱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후- 긴 한숨을 내 쉬었다 민욱은 우유부단해 놓친 지수에게도 미안했고, 천륜을 몰라라한 아랑에게도 아비라는 자리에 있다는 게 부끄럽고 미안했다 민욱은 지수에겐 못할 짓을 했었어도, 아랑에게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면상에 침을 뱉고, 뒤통수에 돌팔매질을 한다고 해도 하늘아래 단 하나의 분신인 아랑의 결혼만은 축복해 줘야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민욱은 아랑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찾아가 아랑을 만나, 염치불구하고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한 뒤 결혼비용에 보태 쓰라며 봉투하나를 건네줬다 ‘아빠 고마워요’ 아랑은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기꺼이 봉투를 받았다 민욱은 아랑에게 ‘잘 커줘 고맙구나,’ 그러고는 민욱이 두 손으로 아랑의 손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네에’ 아랑은 가슴이 뜨겁고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다 아랑은 언제인가 지수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한말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란 것에 감사하고,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에 고마워하고, 범죄자가 아닌 것에 다행하다 생각해라. 그 다음은 그리워하던 보고파하던 네 마음이 하라는 대로 만나건 만나고 싶지 않건 마음가는대로 하렴’ 아랑은 엄마가 아빠를 가슴에서 놓지 않았다는 걸 오늘에 사 안 것에, 황송하고 죄송했다 지수는 언제인가 올 날을 예견하고 있었다. 아랑이 결혼할 때쯤이면, 부녀간에는 미우나 고우나 한번은 만나게 될 것이란 걸 세상에 핏줄을 몰라라할 애비는 없을 태니까? 우리속담에 모르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비정한 부모라고 해도 자기자손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가만히 있을 조상은 없다 민욱에게 손녀 아랑이 결혼한다는 말을 들은 민욱의 노모는 밤잠을 설쳤다 지나간 날은 깡그리 개 무시하고, 동네방네 우리 손녀가 대학병원 의사인데 올 가을에 시집을 간다며 자랑이 늘어졌다 그토록 매정하게 내친 그 어미의 그 딸이라는 걸 망각하고, 시 놓치고 때 놓친 뒤에 언감생심 할미자리에 앉아 보겠다는 심사다 우유한 통 연필 한 자루 안 사준 손녀가 박사라고 자랑 질을 하고 싶은 촌로의 욕심을 누가 막을까? 눈뜨면 손가락을 꼽으며 아들 민욱을 들볶는다. ‘애비야 전화한번 넣어봐라!’ 민욱 노모는 세상에 하나 뿐인 손녀아랑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것이다 이런 걸 보고 막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11- 가을하늘이 호수보다 더 맑고 깊었다. 지수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예식장 입구에 들어서니, 일찍부터 와 있던 민욱이 나타나 손을 내민다. 지수는 아랑에게 민욱이 올 것이란 얘기를 들은 봐있기에, 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어 손을 잡았다 ‘오래만이구려’ 민욱의 말에, 지수도 ‘오래만이네요’ 그러고는 더 이상 불필요한 말없이 예식장 안으로 함께 들어섰다 혜성이 아랑에게서 아빠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하마나 하마나 하고 기다리다 지수가 들어서는 걸 보고 달려 나왔다. 지수가 말했다 ‘인사하게, 아랑아빠야!’ ‘처음 뵙습니다. 박혜성입니다.’ 혜성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민욱은 손을 내밀며 ‘’축하하네. 고맙네.‘ ‘.....’ 혜성은 머리를 조아렸다 아랑은 아빠 민욱의 손을 잡고 한 것 밝은 표정으로 웨딩마치에 발걸음을 사뿐사뿐 옮겼다 지수와 민욱은 나란히 앉아 아랑의 환한 모습에 대견했다 다행하다 참으로 다행하다 지수는 생각했다 아랑이 가족친지들의 축복 속에 결혼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감사했다 지수는 민욱이 마지막 아비노릇은 한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지수는 세상 사람들 눈에 애비 없는 자식이 아니라는 증명을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웠다 남인 듯 남이 아닌 사람 서민욱은 결혼예식이 끝나자 대구로 내려같다 아랑이 신혼여행을 떠난 그날 밤 지수는 홀로 남은 외로움에 늦도록 잠들 수가 없었다. 못내 마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던 걸 후회했다 남인 듯 남이 아닌 사람인데 모르는 사람취급을 할 까닭은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지수는 밤 이슥하도록 곰씹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아랑은 홀로 남겨놓고 온 엄마가 마음에 걸리는지 착 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아빠한태 전화 한번 넣어보세요. 아빠전화번호 문자로 넣을 태니....’ ‘이 저녁에 전화는 무슨’ ‘엄마 지난시간 정리할 때가 됐잖아, 함께 살자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처럼 잊고 살 형편도 아니잖아, 왕래는 안 터라도 간간이 살아가는 얘기 전화로 할 수는 있잖아. 아빠한태 냉정하게 할 필요가 뭐 유-’ 지수는 아랑이 어른스럽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언제 저렇게 자라 엄마를 위안하는 성숙미를 보일까 하는 대견함에, 자식을 잘 못 키우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마저 들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었다 -12- ‘여보세요’ 낯익은 목소리가 수화기로 흘러나왔다 ‘나요. 늦은 시간 미안하오.’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아랑이 알려 주며, 꼭 전호하라고 해 전화 한 거요. 그동안 미안했소.’ ‘지난 얘긴 해 뭘 해요. 다 팔자거니 생각하면 편할 일을....’ ‘건강하게 지내시오. 남은 생 당신에게 지은 죄 갚는 다는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 도우며 살겠소.’ ‘그럴 것 없어요, 편하게 사세요. 다 내 팔자가 박복해서 그런 거였으니.... ’ ‘대구에 오면 전화 주구려. 잘 자시오.’ 민욱은 가라앉은 목소리 죄인처럼 몇 마디 말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지수는 괜스레 마음이 착잡해졌다 뒤척뒤척 잠 못 드는 밤이 긴긴 동지섣달보다도 더 길었다. 나이의 숫자만큼 속도에 탄력이 붙는 것이 인생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지수의 인생열차도 시속 60km로 달렸다 아랑은 대학교수로 입용 돼 대학에 나가고, 혜성은 개인병원을 차렸다 아랑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늙어가는 지수의 겨울은 그 누구의 겨울보다 아늑했다 바람의 계절이 겨울이다 속으로 칭칭 나이테를 감는 나무들처럼, 지수도 가슴자리에 사랑의 나이테를 칭칭 감으면서 겨울나기에 들어섰다 [블로그] 혜암의 시 향기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반추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