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01 잡지의 날, 한우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24살에 200골 메시, ‘우상’ 마라도나 제쳤다 마라도나는 25살때 호나우두는 26살때 기록 월드컵 축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축구 스타들의 주요 활동무대인 클럽축구로 한정해보자.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반 통틀어 레알 마드리드나 FC바르셀로나, AC밀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바이에른 뮌헨 등 세계적 명문클럽에서 단연 발군의 능력으로 클럽의 전성시대를 이끈 공격수를 꼽으라면 과연 누가 일등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한 시대를 풍미했다가 사라져간 숱한 축구 레전드들의 우열을, 시공을 초월해 가리기란 쉽지 않다. 저마다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과 골 능력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축구 환경이 달랐다. ■ 명문클럽의 전설들 1980년대 초반 ‘축구신동’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FC바르셀로나를 거쳐 나폴리에서 클럽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초·중반까지 FC바르셀로나와 인터밀란, 레알 마드리드 등에서 현란한 개인기와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낸 호나우두(브라질). 50년대와 60년대로 가면 레알 마드리드의 전성시대를 일궈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아르헨티나)와 페렌츠 푸슈카시(헝가리)가 있다.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수려한 용모와 골 감각으로 팀의 전성시대를 이끈 조지 베스트(북아일랜드), 그리고 벤피카의 ‘검은 표범’ 에우제비우(포르투갈)가 있다. 같은 시대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의 ‘폭격기’ 게르트 뮐러(독일)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득점력으로 주목을 끌었다. ■ 메시의 위대성 현역 선수 중 최고 스타로 꼽히는 리오넬 메시(24·FC바르셀로나). 과거 레전드들과 비교할 때 그는 과연 몇번째 정도의 선수일까? 전문가들은 강한 압박과 정교한 패싱게임, 속도와의 전쟁을 추구하는 현대 축구에서 메시가 현재 보여주는 폭발적인 드리블과 현란한 개인기, 가공할 득점력은 역대 스타들과 비교해볼 때 나으면 낫지 뒤지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1m69, 67㎏ 단신임에도 2~4명 수비 숲을 헤집고 골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으뜸이라는 평까지 듣고 있다. “메시는 현대 축구의 환경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선수다. 60년대의 펠레, 80년대의 마라도나, 90년대의 호나우두로 이어지는 세계 최고 공격수 계보의 선수들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패스의 정확성, 볼키핑력, 드리블 능력 등은 현역 중 그를 따를 자가 없어 보인다.” 신문선 해설위원의 평가다. ■ 바르사 유니폼 입고 ‘24살에 200골’ 메시는 지난 1일 2011~2012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빅토리아 플젠과의 조별리그에서 시즌 4번째 해트트릭을 작성하며 FC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286번째 경기 만에 200골을 돌파했다. 현재 287경기 203골. 경기당 평균 0.707골을 기록한 셈이다. 2004년 10월16일 바르사 1군 유니폼을 입고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서 공식 데뷔한 이래 7년 만이다. 이번 시즌 프리메라리가에서 11경기 14골로, 경쟁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13골·레알 마드리드)를 제치고 득점 단독선두를 달리고 있다. 지난 시즌에는 31골로, 40골을 넣은 호날두에게 득점왕 자리를 내줬다. 그 전 시즌에는 34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미국 스포츠채널 <이에스피엔>(ESPN)은 최근 프리랜서 제임스 타일러의 글을 통해 메시가 24살에 한 클럽에서 200골을 돌파한 것은 대단한 업적이라고 했다. AS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는 32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28살 돼서야 200골을 돌파한 것과 비교해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타일러는 마라도나는 25살, 호나우두는 26살이 돼서야 200골을 돌파했다고 했다. 메시는 또 해트트릭 전문가다. 최근 125경기에서 무려 12번을 작성했다. 메시의 거침없는 골 행진은 과연 몇골 고지까지 오를 것인가? 이를 지켜보는 것은 그와 동시대를 사는 축구팬들의 또다른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바르사 구단 역사상 최다 골기록(235골, 세자르 로드리게스. 1939~55 시즌)이 깨질 날도 머지않았다. 김경무 선임기자 kkm100@hani.co.kr /한겨레 20111109 20:05 http://www.hani.co.kr/arti/sports/soccer/504724.html
2010 - 경부고속철도 완전 개통 경부고속철도 완전 개통…서울~부산 2시간18분에 경부고속철도(KTX)가 1일 완전 개통됐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철도 2단계 대구~부산 고속선로(128.6㎞) 구간 공사가 마무리돼 1일부터 본격 운행에 들어갔다. [배한철 기자] /매일경제 2010.11.01 07:15:20 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0&no=590584&sID=300
2010 - 8500만년 전 토종공룡 ‘코리아’ 이름 단다 전남대, 7년 연구끝 실물복원 공개…국제학계 보고 ‘코리아’라는 이름이 들어간 토종 공룡이 탄생했다. 우리말 이름이 붙은 토종 공룡이 국제 고생물학계에 보고된 것은 2005년 1월 부경대 백인성 연구팀의 ‘부경사우루스’(천년부경용)에 이어 두번째다. 전남대 한국공룡연구센터(소장 허민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1일 후기 백악기인 8500만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초식 공룡 ‘코리아노사우루스 보성엔시스’(사진)를 실물 크기로 복원해 공개했다. 한국공룡연구센터 발굴팀은 2003년 5월 전남 보성군 득량면 비봉리 ‘비봉 공룡알 화석지’에서 공룡 골격으로 추정되는 일부 화석을 발견한 뒤, 7년 동안 연구·복원 작업을 해왔다. 코리아노사우루스는 길이 약 2.4m 규모로 상당히 원시적 형질을 지닌 소형 조각류 공룡 힙실로포돈류에 속한다. 코리아노사우루스는 어깨뼈가 매우 발달했고, 위팔뼈도 기존에 알려진 공룡들보다 매우 크고 튼튼하다. 특히 발굴팀은 아랫다리뼈와 허벅지뼈의 길이 비율이 비슷해 코리아노사우루스가 주로 네 발로 걸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허 소장은 “이는 코리아노사우루스와 같은 힙실로포돈류가 주로 두 발로 보행했던 것과 다른 특징”이라며 “코리아노사우루스는 땅을 파는 습성을 지녔을 가능성이 커, 당시 현장에서 둥지를 틀면서 알을 낳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국공룡연구센터는 200년 전통을 가진 독일의 지질고생물학 학술지에 코리아노사우루스 최근 연구 논문을 발표해 국제 고생물학계에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허 소장은 “공룡 연구자와 미술 전공자, 컴퓨터 애니메이션 전공자 등 10여명이 실물 크기로 공룡을 재현한 것은 국내에서 처음”이라며 “토종 공룡에 ‘코리아’라는 이름을 붙여 브랜드를 널리 알릴 수 있게 된 점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한겨레 2010-11-01 오후 08:20:56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446576.html
2010 - 만화 ‘원피스’ 日 발행 부수 2억부 돌파 인기 만화 '원피스(ONE PIECE)'의 발행 부수가 일본 만화로는 사상 최단 기간에 2억부를 넘어섰다고 산케이신문이 1일 보도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 기념
2009 -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개요 기념일 : 제실박물관 개관일(1909.11. 1) 목적 : 한국 박물관 100년사 정리 및 비전 제시 추진방법 : 박물관 유관부서 및 유관기관과 협력 추진 기념사업 : 국제학술대회, 특별전, 박물관 대축전, 기념식, 국제포럼, 100년사 발간, 기증·기부운동, 상징물 건립 /국립중앙박물관 http://www.museum.go.kr/kor/information/museum_100.jsp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행사 풍성 기념식ㆍ청자기와 정자 제막식ㆍ포럼 개최 http://www.yonhapnews.co.kr/economy/2009/10/28 /0302000000AKR20091028172300005.HTML
2008 - 제1회 ‘한우의 날’ 오늘은 "대한민국이 한우먹는 날" 올림픽공원서, 11월 1일 '한우의 날'로 선포 "온 나라가 '한우의 날' 하루만큼은 한우의 맛을 즐기고 한우의 의미를 새겨보고자 합니다" 곽동신 김수영, a1@livesnews.com /라이브뉴스 2008-11-02 오후 2:17:47 http://www.livesnews.com/news/article.html?no=4641
- Bertrand Piccard, Jacques Piccard, Auguste Piccard
2008 - 스위스의 해양공학자, 물리학자 자크 피카르(Piccard, Jacques) 사망 피카르 [Piccard, Jacques, 1922.7.28~2008.11.1] '세계적 해저탐험가' 자크 피카르 별세 인간으로서 바닷 속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던 스위스 해저탐험가이자 발명가 자크 피카르(1922~2008)가 1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 자택에서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http://media.paran.com/news/view.kth?dirnews=2748515&year=2008
- 2005 인구주택총조사 기념 (2005.11.1. 발행)
2005 - '2005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1~15일) 인구주택 총조사 오늘부터 15일간 10일까지 인터넷 응답 가능
전국의 인구, 가구, 주택 등을 파악하기 위한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가 11월1일부터 15일 동안 실시된다. 전국의 모든 가구는 조사원증을 지닌 조사원들이 방문하면 조사원의 설명에 따라 응답하거나 조사표를 작성하면 된다. 인구주택 총조사에 응하지 않거나 허위로 답변하면 통계법에 따라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이번 총조사에는 모두 10만여명의 조사원이 투입되며, 이들은 가슴에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명찰을 달고 있다. 면접조사가 어려운 가구는 인터넷으로도 조사에 참여할 수 있다. 인터넷 조사를 희망하는 가구는 11월10일까지 인구주택 총조사 인터넷 홈페이지(www.census.go.kr)에 접속해 조사에 응하면 된다.(전화 080-456-2005) 통계청은 5년 주기로 실시하는 이번 총조사에서 내·외국인 등 모든 가구를 대상으로 성별, 나이, 아동보육상태 등 44개 항목을 조사한다. 특히 추가계획 자녀 수와 혼인연월, 활동제약(장애) 등의 조사항목이 추가돼 저출산과 고령화, 복지 등에 대한 조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주민등록번호와 가구의 금융관계는 묻지 않는다. 권태호 기자 ho@hani.co.kr /한겨레 2005-10-31 오후 08:31:1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5882.html
- 2000, CYBER KOREA 21 특별 대한민국 전자정부(www.egov. go.kr)가 2002년 11월 1일 완전 개통돼 국민들이 주요 민원을 인터넷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이로써 토지(임야)등본 발급, 자동차등록원부 열람 등 393종의 민원을 인터넷 전자정부 사이트에서 신청해 우편이나 가까운 관청에서 받아볼 수 있게 됐다. 4000여종의 민원은 구비 서류와 처리 절차를 인터넷상에서 알아볼 수 있다. 주민등록 등·초본 등 20가지의 행정서류는 민원인의 발급신청 없이 행정기관끼리 알아서 주고받도록 해, 민원인들이 구비서류 부담을 덜게 됐다. 이에 따라 행정기관 직접 방문이 크게 줄고, 구비서류 준비에 따르는 시간, 비용도 대폭 절약할 수 있게 됐다. 정부는 전자정부가 정착되면 민원처리비용이 연간 1조8000억원 정도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행자부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민원업무를 인터넷으로 완전통합한 서비스는 세계 최초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용과정에서 시스템 불안으로 접속이 끊기는 등 장애가 발생하고, 회원가입을 위한 주민등록번호 입력시 본인확인 기능이 갖춰지지 않았으며 일부 개인정보 유출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조선
- 공중전화 카드 국민은행
- 공중전화 카드 주택은행
2001 -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을 합병한 새 `국민은행(KB)` 출범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을 합병한 새 `국민은행`이 2001년 11월 1일 정식 출범함으로써 국제수준의 초우량은행이 탄생했다. 출범에 앞서 양사(兩社)는 난항을 거듭한 끝에 4월 23일 합병계약을 체결했고, 9월 29일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두 은행간의 합병을 승인했다. 10월 29일에는 이사회를 열고 합병은행장으로 내정된 김정태(金正泰) 前 주택은행장을 초대 합병은행장으로 선임했다. 합병을 적극적으로 환영한 주택은행 직원과는 달리 국민은행 직원들은 착잡하고 침울한 반응을 보여 합병후의 조직융합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합병은행 주식은 주택은행 1주에 국민은행 0.592주(1대 1.6888346)의 비율로 교환됐으며, 11월 20일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합병은행의 총 자산은 2001년 6월말 당시 154조2997억원(신탁 포함시 180조1509억원)으로 세계 60위권 수준이며 고객수도 두 은행 고객을 단순 합산할 경우 무려 4,100여만명에 달해 합병은행은 명실상부한 국내 리딩뱅크로 부상했다. /조선
- 2000 인구주택총조사 (2000.11.1. 발행) 2000 - 2000 인구주택총조사 실시(1~10일) [2000 인구주택총조사 실시 안내] 2000 인구주택총조사는 5년주기로 실시하는 국가 대규모 기본통계 조사로 국력의 기본이 되는 인구 및 주거의 실태를 파악하게 되며 보다 풍요롭고 번영된 21세기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각종 정책입안, 경영계획수립 또는 학술 연구등에 필요한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하여 본 조사를 실시합니다. ○ 조사기간 - 준비조사 : 2000. 10. 30 ∼ 10. 31 (2일간) - 본 조 사 : 2000. 11. 1 ∼ 11. 10 (10일간) ※ 조사기준시점 : 2000. 11. 1. 0시현재 ○ 조사대상 - 조사기준일 현재 조사구역내에 상주하는 모든 내·외국인과 이들이 살고 있는 거처 ○ 조사방법 - 조사원이 가구 직접 방문 조사(면접방식과 응답자 기입방식 병행조사) ○ 조사내용 - 인구에 관한 내용, 가구에 관한 내용, 주택에 관한 내용 등 30개 항목 이 조사에서 수집되는 사항은 비밀이며 다른 용도로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계법 규정에 따라 엄격히 보호되오니 조사원 방문시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장흥군 2000-09-18 http://www.jangheung.go.kr/
2000 - 고바우탄생 50주년 기념우표 발행 고바우탄생 50주년 기념 뭉뚝한 몸집에 코 끝에 걸쳐 쓴 안경, 한올의 머리카락으로 인상적인 고바우 영감이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을 맞았다. 4칸의 날카로운 풍자로 지난 반세기 동안 국민의 아픔과 기쁨을 대변해 온 김성환 의 ’고바우’ 영감은 1950년 11월 주간 ’만화신보’에 처음 등장했다. 그 후 55년부터 동아일보에 연재되기시작하여 80년부터 92년까지 조선일보, 92년 10월부터 2000년 9월 까지 문화일보에 연재되었다. 1932년 개성에서 태어난 김성환은 1949년 경복고 재학 시절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를 연재하면서 만화가로서의 인생을 걷기 시작하였다. 김 화백은 한국 시사만화의 선구자로 한 칸짜리 시사만평화 4칸짜리 시사만화를 가장 먼 저 시도한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강한 정치 풍자로 인해 수많은 필화를 겪었던 고바 우 영감은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1만 4000회가 넘는 신문 연재 기록을 세우며 한국 만화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고 바우의 탄생 50주년을 축하하며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는 1950년 등장 당시부터 지금까지 고바우의 변천 모습을 담고 있다. [새로 만든 우표] /한국조폐공사 2000-11-01 http://www.komsco.com/information/stamp/latest/view.asp?idx=155&keycode=&keyword=
1993 -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에 관한 마스트리히트조약 발효 유럽의 정치-경제 통합에 관한 마스트리히트조약(Treaty of Maastricht)이 1993년 11월 1일 발효됐다. (1991년 12월 10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EC 정상 간 합의되고) 1992년 2월 7일 EC외무장관회의에서 정식 조인된 이 조약은 이날의 공식적인 발효를 통해 지난 수십년간 유럽인들이 꿈꾸어온 유럽합중국을 향한 본격적인 과정에 들어서게 됐다. 각국의 이견과 덴마크의 비준거부 등으로 비록 당초목표보다 10개월 늦게 조약이 발효됐으나 EC 12개 회원국 3억4천6백만 유럽인들의 정치-경제적 운명은 이제 역사상 그 어느때 보다도 긴밀히 묶어지게 됐다. 그후 EC는 유럽연합(EU)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마스트리히트조약은 1999년까지 EU 회원국이 단일통화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권한의 상당부분을 통합기구에 위임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어 각국의 반대가 심했으나 우여곡절끝에 1993년 10월 독일이 마지막으로 비준해 실효를 보게 됐다. 마스트리히트조약은 회원국들이 공동의 외교-안보-국방정책을 수립해나가도록 정했다. /조선 [책갈피 속의 오늘]1993년 마스트리히트 조약 발효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 유럽 통합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의 제안이 나오면서부터.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의 중심이었던 유럽의 일류국가들은 당시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주변국가로 전락했다. 세계무대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미국과 소련에 맞서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뭉치는 도리밖에 없었다.
1993 - 스페인 출신의 생화학자 세베로 오초아(Severo Ochoa) 사망 오초아 [Ochoa, Severo, 1905.9.24~1993.11.1] 스페인의 생화학자. 세균에서 리보핵산(ribonucleic acid/RNA)의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를 발견하여 A. 콘버그와 함께 1959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가 폴리뉴클레오티드 포스포릴라아제로 명명한 이 효소는 유전자에 있는 유전정보들이 매개체인 RNA를 거쳐 각 세포의 기능과 형질을 결정하는 효소로 번역되는 과정을 과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한 점에서 특히 가치가 있다. 오초아는 글래슬로·베를린·런던·마드리드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929년 마드리드대학교에서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1930~31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O. 마이어호프 밑에서 근육의 생화학과 생리학을 연구했다. 그는 또한 마드리드대학교의 의학연구소에서 생리학 분과 과장으로도 재직했다. 1938~41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신체 내의 티아민(비타민 B1)의 기능을 연구했고 1942년 뉴욕대학교의 의학 전임연구원이 되었으며, 1946년 약리학교수가 되었다. 1954년에는 동대학의 생화학교수 겸 생화학과 학과장이 되었으며 1974년부터는 로슈 분자생물학연구소에서 연구했다. /브리태니커 1990 - 한글날·국군의 날 공휴일서 제외 확정 정부, '국군의 날' '한글날' 공휴일 제외 확정 국무회의는 1일 국군의 날 및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고 공휴일이 일요일과 겹칠 경우 다음날을 휴무일로 정했던 익일휴무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의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개정안을 의결, 내년 1월부터 시행키로 했다. /한국일보 1990-11-02 한글날·국군의 날 공휴일서 제외 1991년 11월1일, 한글날과 국군의 날의 공휴일 제외가 확정됐다. 재계에서 10월에 공휴일이 너무 많아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내놓자 총무처(현 행정안전부)가 법정 공휴일 축소를 위해 공휴일에서 제외시켰다. http://www.kyeonggi.com/news/articleView.html?idxno=525906
1989 - 한국-폴란드 국교 수립 한국과 폴란드가 1989년 11월 1일 대사급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최호중 외무장관과 마예프스키 폴란드 외무차관은 이날 수교의정서에 서명하고 서울과 바르샤바에 상주 대사관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한국이 사회주의 국가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1989년 2월 1일로, 폴란드는 헝가리에 이어 두 번째였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수교국은 1백33개로 늘어났다. 양국은 이날 무역협정과 투자보장협정에 각각 서명했으며, 한국은 5년간 폴란드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에 4억달러 상당의 투자지원을 하고 이와 별도로 대외경제협력기금에서 5천만달러의 차관을 폴란드에 제공한다는 내용의 경제협력 합의의사록에도 서명했다. 지난 2월 헝가리와의 수교가 노태우 대통령이 지향해 온 북방정책의 첫 돌파구였다면 이번 수교는 이를 더욱 확대, 가속화시킨 계기로 평가됐다. /조선
1986 - 광주 직할시 승격
1981 - 앤티가 바부다(Antigua and Barbuda) 독립 1958년에는 영국령 서인도 연방이 설립되어 앤티가는 설립과 동시에 이에 가맹하여 1962년 이 연방이 해체될 시점까지 회원국이었다. 1966년에 자치령이 되기 위한 신헌법을 제정하였으며, 1967년에 이 지역 섬의 대부분이 영국의 자유연합주에 포괄됨에 따라 앤티가도 그 일원이 되었어, 외교 및 국방 문제만을 영국에 의존하는 자치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1980년 4월 총선에서 안티구아 노동당 (ALP)이 승리하였다. 여당과 야당이 모두 조기 독립 실현을 공약하고 그해 12월 런던에서 영국과 앤티가 정부 및 바부다 대표에 의한 제헌의회(制憲議會)가 개최되어 독립원칙에 합의하였다. 다음해인 1981년 7월 앤티가의 종속관계를 끝내는 추밀원령(樞密院令)이 공표되어, 1981년 11월 영국연방의 일원으로서 정식으로 독립하였다. /naver
1980 - 1980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실시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최초의 인구센서스는 1949년 1월 <인구조사법>의 제정, 공포 후 실시된 5월 1일의 총인구조사이다. 그 후부터 매 10년마다 실시하며 그 중간에 5년마다 간이인구센서스를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1955년 제1회 간이총인구조사가 실시되었고, 1960년 <세계센서스의 해>를 맞아 대규모의 인구·주택 국세조사가 실시되어 상주인구에 대한 표본조사 방법이 도입되었다. 그 뒤 1966년 실시된 간이센서스에서는 중요 기본항목은 전수조사에 의하고, 기타 항목은 10%표본조사에 의해 실시되었다. 1980년·1985년의 인구 및 주택센서스에서는 교육정도를 알기 위한 전공과목에 관한 조사항목과 교통관계자료를 위한 통근·통학거리 등에 관한 항목이 추가되었고, 경제활동·출산력·인구이동에 관한 전문적 조사 사항은 15%표본조사로 실시되었다. 이러한 인구 및 주택센서스 자료는 인구의 규모·분포·구조, 경제적·사회적 특성을 파악하는 가치를 지니며, 정부의 각종 정책·계획 수립의 기본자료로서 활용된다. 또한 인구·주택을 조사대상으로 하는 경제활동인구조사·도시가계조사·인구동태 표본조사 등의 기초자료가 된다. /yahoo
1977 - 소련 초음속 여객기 TU-144S,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여객기로 취항 Tu-144(Tupolev-144)는 구소련이 개발한 초음속여객기로써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서 붙인 이름은 차저(charger)이다. 영국·프랑스가 공동 개발한 콩코드에 앞서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높은 고도를 더 빠르게 비행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초음속여객기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추락사고와 경제성 부족 때문에 1978년 이후 여객기로 운항되지 않았고 모두 14대만 생산되었다. 구소련은 꼭 필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유럽보다 빨리 초음속여객기를 개발하여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1964년 투폴레프설계국에 초음속여객기 개발을 지시하였다. 투폴레프설계국은 값 비싼 금속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주로 알루미늄합금을 사용하여 시제기를 제작하였다. 시제기는 콩코드보다 2달 앞선 1968년 12월 31일 38분 동안의 첫 번째 시험비행에 성공하였으며 1969년 6월 5일에는 음속을 돌파하였다. 또 1970년 5월 26일과 6월 15일 각각 시속 2,150㎞(마하 2.0)와 시속 2,443㎞를 기록하였다. 1971년 7월 1일에는 동체길이와 주날개 폭을 확대하고 전체 성능을 개량한 양산형 Tu-144S가 첫 비행하였다. NK-144 터보팬 엔진 4개를 장비한 Tu-144S는 1973년 6월 3일 파리에어쇼에서 승무원 6명과 관람객 7명이 사망하는 공중분해 사고를 일으키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1975년 12월 26일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취항하여 화물과 우편물을 수송하였다. 1977년 11월 1일부터는 같은 노선에서 여객기로 운항되었다. 그러나 1978년 6월 1일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추락사고가 발생한 뒤에는 여객기로 운항이 금지되었고 주로 시험비행용으로 사용되었다. /naver [초음속 여객기 TU-144 연혁] 1968-12-31 - 첫번째 시험비행 성공 1969-06-05 - 음속 돌파 1970-05-26 - 시속 2,150km(마하 2) 기록 1970-06-15 - 시속 2,443km 기록 1971-07-01 - 양산형 TU-144S 첫 비행 1973-06-03 - TU-144S 파리 에어쇼에서 공중분해 사고 1975-12-26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취항(화물과 우편물 수송) 1977-11-01 - 모스크바-알마티 노선에 여객기로 취항 1978-06-01 - 추락사고 발생하여 여객기로 운항을 금지
1972 - 미국의 시인, 비평가 에즈라 파운드(Pound, Ezra) 사망 파운드 [Pound, Ezra Loomis, 1885.10.30~1972.11.1] [책갈피 속의 오늘]1972년 에즈라 파운드 사망 조국(祖國)의 법정에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했던 시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02&oid=020&aid=0000212467
- '자유센터' - '올림픽 주경기장'
1966 - 건축가 김수근, 문화예술 종합 월간지 <공간> 창간 (참고) 건축월간지 ‘공간’ 마흔살…종합문화예술 ‘건축’ 국내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건축 월간지 <공간(space)>이 최근 나온 11월호(통권 468호)로 창간 40돌을 맞았다. <공간>은 1966년 11월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사라지는 문화의 흔적들을 기록하자”는 뜻으로 창간했다. 당시 건축, 미술, 춤, 음악을 다루는 유일한 종합문화예술잡지로서 문화계 담론 형성에 주도적 구실을 했다. 비디오 거장 백남준, 무용가 홍신자씨, 사물놀이패 등을 처음 소개했으며, 80년대 비무장지대 자연공원화 운동 등을 주창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97년 11월 건축전문지로 바뀌면서 지금의 영문 제호를 달게 됐다. 기념호인 11월호에는 “양적인 팽창과 지나친 광고 싣기를 지양하고 이 시대 건축 예술을 진지한 고민 속에 기록하겠다”는 발행인 이상림씨의 칼럼이 실렸다. 또 ‘아시아의 도시 아시아의 건축’을 주제로 동남아 건축 현황을 취재한 기획 연재도 시작했다. <공간>지쪽은 내년부터 잡지 내용 전문을 국문과 영문으로 같이 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노형석 기자) /한겨레 20061114 17:36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71748.html ('공간'지에는 '발행일: 매월 1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 제40주년 소방의 날 기념 (2002.11.9. 발행)
소방의 날-소방의날의 유래 소방의 날은 처음부터 전 소방인과 범국민적인 기념일로 시행된 것은 아니고 월동기간중의 대 국민 불조심 계몽행사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 그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일제시대에도 매년 12월 1일을 『방화일』로 정하여 불조심에 관한 각종행사를 전개하였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불조심 강조기간이 정부에서 설정되어 운영되었고 불조심 강조기간이 시작되는 11월 1일에는 지역단위의 행사이기는 했지만 『소방의 날』 이라고 하여 유공자표창, 가두퍼레이드, 불조심캠페인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펼쳐졌다. 이후 1963년부터는 내무부가 주관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소방의 날』 행사를 거행하여 오다가 1991년 소방법을 개정하면서 119를 상징하는 11월 9일을 소방의 날로 제정하여 법정일로 정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행사의 명칭이 통일되지 못하였고 周年(주년)표기를 하지 않았는데, 1962년까지의 행사를 하나로 묶고 지역단위행사에서 전국적 행사로 전환된 1963년을 제 1주년으로 환산하여 1991년부터 행사명칭을 통일, 『제 29주년 소방의 날』 행사로 하였으며, 1999년 제 37주년 기념식부터는 행정자치부 소방국의 주관하에 김대중대통령 내외분을 비롯한 내·외빈 약 5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거행하였고, 2000년 제 38주년 기념식은 대통령께서 참석하신 가운데 올림픽 공원내 제 3체육관에서 거행되었으며, 특히 기념식 부대행사로 국민의 생활안전 유관기관단체와 협조하여 국민이 직접 체험하며 안전의식을 높일 수 있는 「안전체험의 장」 행사를 5일간 개최하여 6만 4천여명의 관람객을 유치하는 좋은 성과를 거두어 앞으로 『소방의 날』 이 소방공무원 및 소방업무종사자의 사기진작은 물론 국민의 안전의식을 높이는 종합적인 안전의 날로의 발전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대전광역시 소방본부-소방자료 http://www.dj119.go.kr/sub/sub03/sub_03_02.jsp
1963 - 베트남, 고 딘 디엠 대통령 축출 1963년 오늘 ! /YTN 2012-11-1
1962 - 소련의 화성탐사선 마르스 1호 발사 마르스 1호 소련의 화성 탐사선, 893 kg http://phys.suwon.ac.kr/~kdh/solafact/craft/mars.htm
1954 - 마리아 칼라스 미국 데뷔 1954년 11월 1일 시카고 오페라 극장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노르마 Norma>의 노르마 역으로 미국에서 데뷔했다. 1923년 12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난 그녀는 1937년 미국을 떠나 아테네 음악원으로 가서 소프라노 엘비라 데 히달고에게 음악수업을 받았다. 아테네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보카치오 Boccaccio>에 출연했고, 1947년에는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라 조콘다 La Gioconda>에 출연했다. 라 스칼라 오페라단에 입단한 뒤 곧 <청교도 I puritani>의 엘비라, <토스카 Tosca>·<노르마>·<람메르무어의 루치아 Lucia di Lammermoor>의 주인공역으로 갈채를 받았다. 1954년 미국 데뷔 이후 비범한 발성 능력을 요구하는 배역들을 맡아 이름을 떨쳤고, 프랑스·독일·이탈리아 오페라에 모두 출연했다. 그녀의 기교를 흠잡는 비평가도 있었지만 힘차면서도 명확한 넓은 콜로라투라 음역과 카리스마적인 연기 능력을 가진 가수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1965년 7월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토스카>로 오페라 출연을 마감한 뒤 영화 <메데아 Medea>(1970)에 출연했다. 1972년 줄리어드 스쿨에서 오페라를 가르쳤으며 그후 미국과 유럽 연주여행(1972~73)을 했다. /브리태니커
[책갈피 속의 오늘]1954년 마리아 칼라스 美데뷔 “칼라스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칼라스는 없다.” “오페라에서 BC란 ‘Before Callas’(칼라스 이전)를 의미한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611010092
- 9th Anniv. of Algerian Revolution
1954 - 알제리 독립전쟁 시작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며 7명의 프랑스인 살해, 알제리아 독립전쟁 시작 1954년 11월 1일 알제리의 전국토 30여곳에서 창고 방화, 농업협동조합 폭격, 프랑스교사 살해 등의 사건이 발생해 프랑스인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이것은 각각의 사건들로 본다면 단순한 데모행위에 불과하지만, 종합해 보면 1954년 결성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의 지도에 의한 결과였다. 1830년이래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온 알제리의 독립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폭력에 대해 경고 조치에 그치지 않고 즉시 300명의 중무장한 경비대를 마르세이유로부터 알제리로 파병했다. 또한 프랑스 수상 맹드는 3개 대대의 낙하산병의 투입을 공식 발표했다. 모로코와 튀니지 보호령에서도 프랑스에 대한 새로운 폭력이 보도되자, 유목민들도 프랑스 공격에 가담했다. 이들의 공격은 유엔에서 프랑스 억압을 비난하고 나선 다른 아랍국들과 보조를 함께한 것이었다. 독립전쟁은 1962년 알제리가 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계속됐다. /조선
알제리 독립전쟁 프랑스인에게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알제리를 점령한 1830년 이후, 이곳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프랑스계 2세·3세에게 알제리는 고향이었고 프랑스 그 자체였다. 그러나 1954년 5월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디엔비엔푸를 빼앗겨 100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지배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도 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이 치솟았다. 11월 1일 민족해방전선(FLN)이 알제리 전역에서 대불(對佛)항전을 시작한 것이다. FLN이 점차 대량학살을 일삼고 프랑스군이 무자비한 고문과 살육으로 응수하면서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5만명에서 50만명으로 늘어난 프랑스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FLN의 저항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http://russiacenter.co.kr/info/main.php?page=view&code=edudata&id=10&start=0
1952 - 미국, 세계최초로 수소폭탄 실험 1952년 11월 1일 오전 7시15분 직경 5km의 불꽃이 마샬군도 에니웨톡환초 상공에서 작렬했다. 근처에 있던 小島 엘게랍섬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세계최초의 수소폭탄 실험 순간이었다. '마이크'로 명명된 수소폭탄 1호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500배를 넘어서는 TNT 화약 1000만톤의 폭발력을 보였다. 핵분열없이 핵융합으로 폭발력을 얻는 수소폭탄은 1942년 물리학자 페르미가 착안했지만, 정작 자신은 개발에 반대했다. 1950년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하자 위기감을 느낀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력위원회에 수소폭탄의 조기개발을 지시했다. 당시 원자력위원회의 자문위원장으로 근무하던 오펜하이머는 개발에 반대하다가 공산당이라는 낙인이 찍혀 1953년 공직정지처분을 받아야 했다. 미국이 실험한 수소폭탄은 크기가 엄청난 습식 수소폭탄으로 폭탄이라기보단 지상에 설치된 핵폭발장치에 가까웠다. 소련도 1953년 8월 12일 수소폭탄실험을 성공시켰다. 실험에서 소련이 사용한 것은 보다 간편한 중수소화 리듐을 핵융합반응재로 사용하는 건식 수소폭탄이었다. /조선
1952년 11월 1일 미국, 세계 최초 수소폭탄 실험 태평양 마샬군도(Marshall islands)의 산호초 에네웨타크(Enewetak)에서 세계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 있었다. 암호명은 ‘마이크(Mike)’. 이 수소폭탄의 폭발력은 TNT 10.4Mt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보다 500배 강한 위력이었다. 헝가리 출신의 과학자 에드워드 텔러(E. Teller)가 이 수소폭탄의 개발을 주도했다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한겨레 2008-11-03 오후 06:17:49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319627.html
1938 -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프랑시스 잠(Jammes, Francis) 사망 잠 [Jammes, Francis, 1868.12.2~1938.11.1] 프랑스의 시인·소설가. 그가 다룬 단순하고 소박한 주제는 세기말 프랑스 문학의 퇴폐적 요소와 참신한 대조를 이룬다. 내성적인 시골 사무원이었던 그는 상징파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 및 소설가 앙드레 지드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상징주의에 반발하고 '자연주의'(Naturisme)라는 새로운 시적 경향을 추구했다. 그는 시를 통해 자연으로, 사소한 일상생활의 사건으로,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그는 〈새벽의 삼종기도에서 저녁의 삼종기도까지 De l'Angélus de l'aube à l'Angélus du soir〉(1898)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주목을 받았다. 1905년 시인 폴 클로델이 그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는데, 개종한 뒤에 그는 점점 더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농경시 Les Géorgiques chrétiennes〉(3권, 1911~12)는 믿음이 깊은 농부 가문의 내력을 일상적인 언어로 이야기한 작품이다. 그는 명성을 얻은 뒤에도 시골에 남아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생활을 하는 것에 만족했다. 단편소설과 장편소설 및 회고록(1923)도 역시 소박하고 친근한 어조로 그의 문학적 성과를 완전하게 해준다. 70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세대의 젊은 시인들에게 존경받는 원로가 되어 있었다. /브리태니커
1936 -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 '로마-베를린 추축' 창설 선언 [오늘속으로] 추축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10&oid=038&aid=0000031277
1924 - 프랑스의 배우, 가수 콜레트 르나르(Renard, Colette) 출생 르나르 [Renard, Colette, 1924.11.1~2010.10.6] Colette Renard (1 November 1924, Ermont – 6 October 2010 Saint-Rémy-lès-Chevreuse) born Colette Raget, was a French actress and singer. Renard is closely associated with the titular character from the musical Irma La Douce, a role she played for over a decade. Renard retired from theatre and film in the 1980s, returning in 2004 to play the role of Rachel Levy on Plus belle la vie. In addition to acting, Renard was a prolific singer, having released 52 albums during her career. Disc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Colette_Renard
콜레트 르나르 Colette Renard 1930년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로,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바느질집의 재봉사였다. 어려서 첼로를 배우고 12세 때에는 어떤 소극장에서 막간에 연주한 적도 있다. 13세 때부터 양품 잡화의 점원을 비록하여 여러 직업을 전전한 뒤 악단 지휘자 레몽 르그랑의 비서가 되었다. 1908년생인 르그랑은 파리의 파퓰러 음악계의 대가인데, 그 덕분에 르나르는 악단의 직속 가수가 되었고, 18세 때 ABC 극장의 르뷔에 출연했고, 1956년 8월 도빌 콩쿠르에서 '나무와 사랑'을 부르고 조르주 브라생스상을 수상했다. 동년 뮤지컬 '온순한 이르마'의 주역으로 발탁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57년 LP 판으로 ACC 디스크 대상을 받고 그 명성을 확립했으며, 레몽 르그랑의 부인이다. http://www.france.co.kr/chansons/q-v.htm
1922 - 오스만 투르크 제국 멸망 1922년 11월 1일,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Kemal Atatürk, 1881~1938)이 주도하는 ‘투르크 대(大)국민의회’가 술탄(황제)제를 폐지함으로써 623년 역사의 오스만투르크 제국(Osman Turk Empire)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299년 창건돼 전성기때는 서아시아·북아프리카·발칸반도·흑해 북부까지 아우르고,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를 함락해 유럽인들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던 대(大)제국이었다. 그러나 술탄의 무능, 지배계급 내부의 알력, 산업 침체 등이 거듭되면서 16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19세기 발칸반도 국가들의 독립 러시는 제국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었고, 1차대전의 패전은 오스만 제국을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때 제국의 보존을 위해 영국이나 미국의 보호령으로 두자는 의견이 제국 내에서 제기됐지만 케말은 단호히 이를 거부하고 투르크 민족 중심의 독립국가 건설을 꾀했다. 케말이 민·군의 지지에 힘입어 오스만 의회로부터 자신의 독립안 지지를 이끌어내자 영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케말은 새로운 ‘투르크 대(大)국민의회’를 구성하며 이에 맞섰다. 그의 관심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광활했던 영토가 아니라 투르크 민족 만의 독립된 영토였다. 따라서 투르크 영토 안에 있는 타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케말은 해결책을 독립전쟁에서 찾았다. 결국 그들을 모두 내쫓고 1923년 10월 29일 터키공화국을 수립했다. 무스타파 케말이 초대 대통령이었음은 물론이다. /조선
1916 - 신소설 작가 이인직(李人稙) 사망 이인직 [李人稙, 1862.7.27~1916.11.1] 신소설 작가 이인직 사망 한국최초의 신소설 작가 이인직이 1916년 11월 25일 조선총독부 병원에서 사망했다. 일본 도쿄 정치학교를 수학했고, 1906년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만세보' 주필로 옮기면서 신소설 '혈의 누'를 동지(同紙)에 연재했다. 1907년 이완용의 도움으로 '대한신문'을 창간해 사장에 취임한 이인직은 국권피탈 때 이완용을 돕고 대정 일본왕 즉위식에 헌송문을 바치는 등 친일 행동을 했으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산문성이 짙은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자였다. 그는 신소설을 쓰는 한편, 연극 개량에도 관심을 가져 1908년 11월 자신의 소설 '은세계'를 원각사 무대에 올려 최초의 신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혈의 누' 외에 대표작으로 '귀의 성', '치악산', '모란봉' 등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장편이 많고, 근대 소설에 다소 접근한 면모들을 보여 주는 한편 작품의 구성과 등장 인물들의 성격 묘사, 그리고 현실적 제재에 의한 사실적 묘사 수법 등에서 개척자적 공로를 인정받았다. /조선
1908 - 한국 최초의 월간 잡지 '소년' 발행 1908년 11월 1일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창간호 독자는 6명, 2호는 14명에 불과했고 1년이 지나도록 200명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소년'은 최남선을 중심으로 이광수 홍명희 등이 필자로 참여한 당시 최고의 잡지였다.
- 미터법 통일실시 기념, 1964.1.1.
1905 - 한국, 도량형 신제도 채택 조선 후기 고종(高宗) 때에는 궁 내부에 평식원(平式院)을 설치하여 도량형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도량형 규칙을 제정하여 도량형 제도를 법제화하였고, 1905년에는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서 도량형법을 제정·공포하였다. 그 후 1961년에 과거의 도량형법을 개정하여 계량법을 제정하였고, 1959년에는 국제미터협약에, 1978년 국제법정계량기구에 가입함으로써 현대적인 계량제도를 마련하여 선진국과 같은 현대적 계량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naver
1902 - 노르웨이의 시인, 극작가 노르달 그리그(Grieg, Nordahl) 출생 그리그 [Grieg, Johan Nordahl Brun, 1902.11.1~1943.12.2]
베르겐 출생. 대학시절부터 모험을 즐겨 세계 각국을 여행하였다. 나중에 옥스퍼드대학에서 G.G.N.바이런, M.W.셸리, J.키츠 등의 업적을 연구하여, 《요절한 시인들》(1932) 등을 썼다. 종군기자로서 중국의 내전(內戰)을 목격하고 에스파냐내란 2년간의 소비에트 체제 등을 체험하여, 종래의 시대적 절망·회의·신앙 등을 다룬 서정성으로부터 차차 사회문제로 눈을 돌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침입하자 이에 항전, 마지막에는 영국으로 가 종군기자로서 베를린 폭격작전에 직접 참가하였다가 피격, 전사하였다. 시집 《희망봉을 돌아서 Rundt Kap det Gode Haab》(1922), 소설 《배는 다시 나아간다 Skibet gaar videre》(1924), 희곡 《우리의 명예와 우리의 힘 V
알렉산드르 3세 [Aleksandr III, 1845.3.10~1894.11.1] 러시아 황제. 정식 명칭 Alexandr Alexandrovich. 알렉산드르 2세의 둘째 아들,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다. 처음에는 군인이 될 생각이었으나 1865년 맏형 니콜라이가 죽자 황태자가 되었고, 이어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테러로 아버지가 암살되자 곧 즉위하여 전제주의의 강화를 목표로, 로마노프왕조의 군주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황제가 되었다. 귀족 ·지주에게 특별할인으로 장기의 유통자금을 대여해 주는 지주토지은행(地主土地銀行)을 창설하고 농민공동체에 대한 지주의 감독제, 경찰권의 강화, 대학자치제의 박탈, 특정 직업인의 중등교육의 제한, 초등교육을 교회의 감독하에 두는 등의 시책으로 대개혁시대(大改革時代)의 자유주의적 조치를 대폭적으로 제한하였다. 또 반(反)유대법을 펴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한편,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 지방에서의 대러시아화(化) 정책 등의 반동정치를 감행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불간섭정책을 취하여 아프가니스탄과의 분쟁으로 군대를 동원한 외에는 전쟁의 경험이 없다. 또, 신중하게 3제동맹(三帝同盟: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황제의 동맹)’을 부활시켰으나, 관세문제 등으로 독일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러시아-프랑스동맹을 맺었다(1891∼1894). 이 동맹에 의하여 도입한 프랑스의 자본으로 남(南)러시아에 신공업이 일어나고, 시베리아철도도 착공하였다(1891). 치세(治世)에 러시아 자본주의의 약진이 시작되었으나 그것이 도리어 러시아 농업을 약화시켰고, 러시아에도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뿌리를 내려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한 노동운동이 혁명적인 급진적 지식계급인 나로드니키의 운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청 ·일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에 죽었다. /naver
1893 - 폴란드의 화가 얀 마테이코(Matejko, Jan) 사망 마테이코 [Matejko, Jan, 1838.6.24~1893.11.1] 폴란드의 화가. 크라쿠프 출생. 1858년부터 독일의 뮌헨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1864년 파리의 살롱전에서 금상을 받은 《스카루가의 설교》로 명성을 얻었고, 그 후 조국의 역사상의 큰 사건과 전투 등을 주제로 한 사실적인 역사화를 많이 그렸다. 때로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한 그림도 그렸으며, 또 초상화도 많이 남겼다. 1873년부터는 크라코프미술학교의 교장으로 일하는 한편 유럽 각지의 아카데미 회원으로서도 많은 활동을 하고, 1889년부터는 크라코프의 성마리아성당의 장식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지나치게 주제를 중시한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국민화가로서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표작에 《그른바르드의 전투》 《포프코프 근처의 스테판 바트리》 등이 있다. /네이버
- 'Children Coming out of School' - 'Children Playing'
1887 - 영국의 화가 로렌스 스티븐 라우리(Lowry, Lawrence Stephen) 출생 라우리 [Lowry, Lawrence Stephen, 1887.11.1~1976.2.23] 영국의 화가. 현대 도시생활의 황량함과 외로움을 표현한 산업풍경화로 유명하다. 1905~25년 맨체스터와 샐퍼드의 여러 미술학교에서 간헐적으로 공부했으며, 맨체스터 부동산회사의 집세 수금원으로 출발해 현금출납 책임자로 지위가 오르기까지인 1910~52년에 장기근무했다. 1915년 샐퍼드와 맨체스터를 비롯한 잉글랜드 중동부 지방의 산업 풍경을 묘사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뒤 20년에 걸쳐 굴뚝 등의 공장 구조물을 배경으로 뭔가 고립된 분위기에서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독특한 도시 풍경의 소재를 발전시켰다. 그의 그림에 사용된 색채는 대개 단조롭지만,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미묘한 색조의 대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소 소박한 그의 양식적 특징은 강렬한 구도와 능숙한 스케치로 보완되어 있다. 라우리는 1939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질 때까지는 대중에게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의 실제 재능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지만, 그의 예술적 상상력의 독창성은 대체로 인정받고 있다. /브리태니커
1884 - 프랑스의 언론인, 작가 알베르 롱드르(Londres, Albert) 출생 롱드르 [Londres, Albert, 1884.11.1~1932.5.16] Albert Londres (1 November 1884 - 16 May 1932) was a French journalist and writer. One of the inventors of investigative journalism, he criticized abuses of colonialism such as forced labour. Albert Londres gave his name to a journalism prize for Francophone journalists. Biography http://en.wikipedia.org/wiki/Albert_Londres
우리의 역할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도,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역할은 자신의 신용과 명예, 삶 전체를 저울에 올려놓고, 전쟁과 분쟁으로 입은 세상의 상처에 펜을 가져다 대는 것이다.
- 알베르 롱드르
1880 - 독일의 기상학자, 지구물리학자 알프레트 베게너(Wegener, Alfred) 출생 베게너 [Wegener, Alfred Lothar, 1880.11.1~1930.11] 독일의 기상학자, 지구물리학자. 대륙표이설(大陸漂移說)을 최초로 완벽하게 설명했다. 고아원장의 아들로 태어나 1905년 베를린대학교에서 천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당시 고기후학(古氣候學)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1906~08년에 극지방의 대기순환을 연구하기 위한 그린란드 탐험에 참여했다. 그후에도 1912~13, 1929, 1930년의 3차례에 걸쳐 그린란드를 탐험했다. 마르부르크·함부르크 대학교에서 기상학을 가르쳤으며, 1924~30년에 그라츠대학교의 기상학 및 지구물리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30년 마지막 그린란드 탐험도중 죽었다. 베게너는 다른 선배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과 아프리카 대륙 서해안의 해안선이 서로 비슷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들 대륙들은 한때 서로 붙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10년경에는 오늘날의 모든 대륙들은 후기 고생대(약 2억 5,000만 년 전)에 하나의 커다란 육괴(陸塊) 혹은 초대륙(超大陸)을 구성했으며, 그후 갈라졌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베게너는 이러한 고대륙(古大陸)을 판게아라고 불렀다. 다른 과학자들도 이러한 초대륙의 존재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초대륙이 오늘날 세계의 여러 대륙들로 분리된 것은 초대륙의 일부가 함몰 또는 침강해 대서양과 인도양을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게너는 판게아를 구성한 지역들이 오랜 지질시대를 통해 수천㎞에 달하는 거리를 천천히 이동함으로써 서로 분리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대륙의 운동을 일컬어 '대륙이동'(continental displacement:독일어로 Verschiebung der Kontinente)이라고 했는데, 이는 후에 '대륙표이'(continental drift)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1912년 베게너는 그의 학설을 강의에서 처음 제시했으며, 1915년 가장 중요한 저서인 〈대륙과 대양의 기원 Die Entstehung der Kontinente und Ozeane〉을 통해 완전한 형태로 출판했다. 그는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질학적 및 고생물학적 증거를 모으기 위해 과학문헌을 조사했다. 그결과 밀접한 유연관계(類緣關係)를 가진 생물 화석 및 유사한 지층들이 멀리 떨어진 대륙들, 특히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양쪽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베게너의 대륙표이설은 그후 10년간 몇몇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았으나 대륙이동을 일으키는 힘에 대한 그의 가정은 믿기 어려워 보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그의 학설은 대부분의 지질학자들로부터 부정되었으며, 그의 이론은 그후 수십 년 간 사장되었다가 1960년대에 들어서야 판구조론(板構造論)의 일부로 부활되었다. /브리태니커
텔레키 [Teleki Pál, 1879.11.1~1941.4.3] 헝가리의 정치가.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나치 독일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1905년부터 헝가리 의회 의원을 지냈고, 저명한 지리학자였던 텔레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파리 평화회의(1919)에 헝가리 대표로 참석했다. 1921년에 그는 평소부터 신뢰하지 않았던 정당정치에서 손을 뗐으나 총리가 되어 다시 공직생활로 돌아왔다(1939. 2. 15). 그뒤 여러 파시스트 정당을 해산했지만, 반유대주의 법률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텔레키는 트리아농 조약(1920)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독일의 힘을 빌려 그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돌려받고 싶어했지만, 히틀러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헝가리에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고 루마니아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북부를 강제로 양도받았다. 텔레키는 히틀러의 이 2가지 조치를 지지했다. 1940년 그는 유고슬라비아와 우호조약을 맺었는데, 1941년 독일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텔레키는 독일을 도와서 유고슬라비아와 싸워달라는(그리하여 우호조약의 약속을 깨뜨리라는) 독일의 요구와 독일을 도우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영국의 위협 사이에서 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졌다. 양쪽의 압력에 견디지 못한 그는 결국 자살했다. /브리태니커
1878 - 아르헨티나의 법률가, 정치가 사아베드라 라마스(Saavedra Lamas, Carlos) 출생 사아베드라 라마스 [Saavedra Lamas, Carlos, 1878.11.1~1959.5.5] 아르헨티나의 법률가, 외교관, 정치가. 187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출생하였다. 190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15년 법무·교육장관, 1932∼1938년 외무장관을 지냈다. 193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회의를 주재하였는데, 이 회의의 결과로 다년간에 걸쳤던 차코전쟁이 종식되었다. 1936년 국제연맹회의 의장에 선출되었고, 1941∼1943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총장을 지냈다. 《Por la Paz de la Americas》(1937)를 비롯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그는 193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네이버
1870 - 오스트레일리어의 시인, 학자 크리스토퍼 브레넌(Brennan, Christopher) 출생 브레넌 [Brennan, Christopher John, 1870.11.1~1932.10.5] 오스트레일리아의 시인·학자. 그의 매우 개인적인 시들은 대중적인 인기는 얻지 못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 생기가 넘치고 진솔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적은 부수만 찍어내거나 또는 타자로 쳐서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끼리만 돌려보았기 때문에 사실상 여러 해 동안 대부분의 작품들을 구할 수 없었다. 1958년 시집이 나와 무명시인의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시드니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1892 문학석사), 뛰어난 고전학자이기도 했다. 그의 시에는 그리스와 라틴 시인들의 영향이 엿보인다. 해외연수 장학생으로 독일에 머무는 동안 상징주의자들에게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귀국 후 도서관에서 목록작성 일을 했으며, 시드니대학교 시간강사를 거쳐 1920년 동 대학 독문학 및 비교문학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인습에 어긋나는 생활방식 때문에 1925년 부교수직에서 쫓겨났고, 그뒤 몇 년 동안 가난하게 살았다. 1897년 〈21편의 시:근원을 향하여 XXI Poems:Towards the Source〉를 200부만 한정출판했고 1914년에는 〈시집 Poems〉, 이듬해에는 〈운명의 노래 A Chant of Doom〉를 발표했다. /브리태니커
1864 - 폴란드의 소설가 스테판 제롬스키(Zeromski, Stefan) 출생 제롬스키 [Zeromski, Stefan, 1864.11.1~1925.11.20] 폴란드의 소설가. 자연주의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칭송받고 있다. 키엘체의 중등학교와 바르샤바의 수의과대학을 다닌 뒤, 시골 대지주의 저택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다가 스위스와 폴란드 바르샤바의 자모이스키 도서관(1897~1903)에서 사서로 일했다. 폴란드 나우엥초프에 살던 1905년부터 대중교육운동을 벌이다가, 1908년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으며 그뒤 파리(1909~12)와 바르샤바에서 살았다. 그의 첫번째 단편소설은 1889년에 발표되었고, 최초의 장편소설 〈시시포스의 노동 Syzyfowe Prace〉은 1897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재 Popioly〉(3권, 1904)로 마침내 명성을 굳혔다. 그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봄날 Przedwiośnie〉(1925)은 폴란드 독립이 거둔 최초의 성과를 다루고 있다. /브리태니커
1849 - 일본 메이지 시대의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출생 노기 마레스케 [乃木希典,1849.11.1~1912.9.13] 일본의 육군 군인. 조슈 한[長州藩]의 무사 출신으로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조슈 정벌 때 조슈 한의 보국대(報國隊)에 가담해 포병대원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보신 전쟁[戊辰戰爭]에도 참가하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따라 바쿠후의 군대와 싸웠다. 1871년 도쿄로 가서 신친위대(新親衛隊)의 육군 소좌로 임관되었으며 1875년 고쿠라[小倉]의 보병 14연대장 직무대리가 되었다. 세이난 전쟁[西南戰爭]에서는 군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일생일대의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1886~88년 독일에서 군제와 전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청일전쟁에 보병 제1여단장으로 출정했다. 1896년에 제3대 타이완 총독이 되었으나 통치에 실패하여 사임했다(1898).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휴직중이었으나 소집되어 같은 해 5월 제3군 사령관으로 뤼순[旅順]을 공략했다. 1907년에는 가쿠슈인[學習院] 원장을 역임했으며 자신을 신임하던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이 죽자, 장례일에 도쿄의 자택에서 부인과 함께 자결했다. 당시 일본군의 최고 지도자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와 함께 '해군의 도고, 육군의 노기'라고 일컬어진다. /브리태니커
1848 - 프랑스의 화가 쥘 바스티앵 르파주(Bastien-Lepage, Jules) 출생 바스티앵 르파주 [Bastien-Lepage, Jules, 1848.11.1~1884.12.10] 프랑스의 화가. 시골 풍경을 배경으로 한 풍속화를 그려 프랑스와 영국에서 널리 모방되었다. 바스티앵 르파주는 알렉상드르 카바넬에게 그림을 배웠고, 1870년 파리 살롱 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출품했으며, 1874년 살롱 전에서는 에두아르 마네의 표현양식을 약간 모방한 〈봄 노래 Spring Song〉로 상을 받았다. 〈목초밭 The Hayfield〉(1878, 파리 루브르 박물관)은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전통을 따른 작품으로서, 바스티앵 르파주의 작품을 특징짓는 감상적인 요소를 보여준다. 잔 다르크를 로렌 지방의 시골소녀로 묘사한 〈하늘의 소리를 듣고 있는 잔 다르크 Joan of Arc Listening to the Voices〉(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는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유명한 초상화가이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15 - 미국의 의사 크로포드 롱(Long, Crawford) 출생 롱 [Long, Crawford Williamson, 1815.11.1~1878.6.16] 미국의 의사. 수술시 마취제로서 에테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롱은 뉴욕 시에 있는 몇몇 병원에서 일한 뒤 고향 조지아 주로 돌아가 제퍼슨에서 개업했다. 그는 '에테르 모임'(에테르 중독 때 생기는 유쾌한 상태를 즐기는 사람들의 사교모임)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1842년 한 환자에게 에테르를 흡입하게 한 뒤 통증없이 환자의 목에서 종양을 제거했다. 그는 계속해서 다른 질병치료에도 에테르를 사용했지만 1849년까지 그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지 않았다. 그보다 3년 전인 1846년 치과의사 윌리엄 모턴은 비슷한 종류의 수술에서 에테르의 사용장면을 공개했다. 모턴이 발견과 발표에 대한 자신의 업적을 주장했지만 에테르를 임상에 처음 사용한 사람은 롱이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1800 - 미국 대통령 관저 백악관 개관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이 1800년 11월 1일 개관됐다. 워싱턴 DC 포토맥강을 내려다보는 펜실베니아가(街) 1600번지에 위치한 백악관은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를 첫 주인으로 맞았다.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1792년 행정-입법부 분리를 상징해 의사당에서 16블럭 떨어진 곳에 초석을 놓도록 했으나 정작 본인은 완공 한 해 전인 1799년 사망했다. 아일랜드 출신 건축가 제임스 호번(James Hoban, 1762~1831)이 공사를 맡아 회백색 사암(砂岩)을 주요 자재로 썼다. 주변 빨간 벽돌 건물들과 대조를 보여 '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로 불리우기 시작했고, 100년 후인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때 공식 명칭으로 확정됐다. 1814년 영국과 전쟁 중 한 차례 불탔고, 1929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엔 화재로 서관(West Wing)이 대부분 소실되기도 했다. 현재는 방 132개에 화장실 32개, 7개 계단이 있는 6층 건물로 확장됐다. 백악관 건물은 내셔널 캐피털 공원의 일부이며, 1988년 박물관으로 승인됐다. /조선
[역사속의 오늘] 백악관 개관 1800년 11월 1일,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이 개관됐다. 백악관은 행정부와 입법부의 분리를 상징해 의사당에서 16블록 떨어진 워싱턴 DC 포토맥강을 내려다보는 펜실베니아가 160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1791년,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대통령이 수도로 지정된 워싱턴에 적합한 대통령 관저를 설계하기 위한 공개 경쟁을 지시, 건축가 제임스 호번이 필라델피아 스타일의 조지 양식의 건물 초안으로 설계권을 얻어냈다. 호번은 엷은 회색 사암으로 된 구조물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주변 빨간 벽돌 건물들과 대조를 보여 'White House(백악관)'로 불리기 시작했고,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때 공식 명칭으로 확정됐다. 이곳은 존 애덤스 대통령 이후의 모든 미국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수도에서 가장 오래된 연방 건물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1814년 영국과 전쟁 중 화재와 1929년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의 화재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현재 방 132개에 화장실 32개, 7개 계단이 있는 6층 건물로 확장돼 있다. 건물의 일부는 개방되어 매년 15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다. 또 백악관 건물은 1988년 박물관으로 승인됐다. 정보관리부 이재근 /매일신문 2008년 11월 0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9921&yy=2008
1772 -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 연소에서 공기의 역할을 연구하여 발표 연소에서 공기의 역할을 연구하여 중요한 업적을 남긴다. 1772년 11월 1일 황과 인이 탈 때에는 공기를 흡수하여 무게가 증가하고 산화납(Ⅱ)를 숯과 같이 가열하여 생긴 금속성 납은 공기를 잃어 버려서 산화납(Ⅱ)보다도 무게가 감소한다는 사실을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했다. 아직 이 과정에서 공기의 역할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연구를 계속해서 그 실험결과를 그의 첫 저서인 <물리와 화학 소론>에 실어 출판했다. http://user.chollian.net/~mooner13/a735.htm
- 'Antonio Canova' - 'The Three Graces' - 'Princess Maria Leopoldine' - 'Canova' - 'Hercules and Lichas' - 'Pius VII'
- 'Paulina Borghese as Venus'
- 'Cupid and Psyche' - 'Bust of Napoleon'
- Galleria Nazionale 'Borghese'
1757 - 이탈리아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Canova, Antonio) 출생 카노바 [Canova, Antonio marchese d'Ischia, 1757.11.1~1822.10.13] 작품으로는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묘(1783~87, 로마 산아포스톨리 교회)와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묘(1787~92,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 나폴레옹의 조상(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런던 웰링턴 박물관), 〈비너스 빅트릭스 Venus Victrix〉처럼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자세로 제작된 나폴레옹의 누이 보르게세 공주의 조상 등이 있다. 나폴레옹이 물러난 뒤 파리에서 미술품들을 되찾아온 공로로 후작이 되었다. 아버지는 석공으로 1761년 죽었으며, 역시 석공인 할아버지가 그를 키웠다. 베네치아 의원의 후원으로 11세에 파냐노(아솔로)로 가서 조각가 주세페 베르나르디(토레티라고도 함)의 문하생이 되었고, 같은 해인 1768년에 베르나르디가 파냐노에서 베네치아로 작업실을 옮기자 그를 따라갔다. 카노바는 스승을 도우면서 몇 개의 소소한 의뢰품을 혼자 힘으로 만들었으며, 당시의 유행대로 고전 미술을 공부하면서 누드 데생을 하기도 했다. 1775년 독립해 베네치아에 작업실을 차렸다. 1779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행정장관인 피사니에게서 의뢰받은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Daedalus and Icarus〉는 최초의 주요작품이다. 로코코 양식을 띤 이 조상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살아 있는 모델에 석고를 부어 만든 것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779~80년 로마에 머물면서 스코틀랜드의 화가이자 화상인 개빈 해밀턴을 비롯한 당대의 주요미술가들과 만났으며, 해밀턴의 지도를 받아 고전미술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나폴리와 헤르쿨라네움·폼페이·파이스툼 등의 고대유적지를 방문했다. 잠깐 베네치아로 되돌아갔다가 1781년 다시 로마로 와서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는 로마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주요인물이 되었으며 언제나 기꺼이 젊은 미술가들을 돕고 후원자를 소개해주었다. 1783년 로마의 산아포스톨리 교회에 교황 클레멘스 14세의 묘를 만들어 달라는 중요한 의뢰를 받았다. 1787년 이 묘가 공개되자 그것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바로 그해에 성베드로 대성당에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묘 제작을 의뢰받아 1792년에 완성했는데, 클레멘스 14세의 묘보다 고대미술에 담긴 고전미학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뒤의 묘들은 점점 더 신고전주의 양식에 가까워졌으며 감정의 표현과 절제를 동시에 갖추고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당대 영국의 조각가인 존 플랙스먼의 작품과 비슷했다. 1798년 프랑스가 로마를 침략하자 카노바는 북쪽으로 갔다. 빈에서는 장크트아우구스티네 교회에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묘비를 만들었다(1798~1805). 1802년 교황의 권유로 나폴레옹의 초청을 받아들여 파리에 갔으며 궁정 조각가가 되어 프랑스 미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02년 나폴레옹의 흉상을 만들었으며, 1806년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서 나폴레옹의 기마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1807년경 〈비너스 빅트릭스〉처럼 거의 발가벗은 채로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으로 나폴레옹의 누이인 파올리나 보르게세의 조상을 완성했는데,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의 하나인 이 작품은 고전적 여신상과 당대의 인물상을 결합한 것이다. 1811년에는 나폴레옹을 고전시대의 영웅들처럼 나체상으로 묘사한 2점의 거대한 조상(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런던 웰링턴 박물관)을 완성했다. 또한 나폴레옹 시대의 가장 표현이 풍부하고 야심적인 작품인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Perseus with Medusa's Head〉(1801, 바티칸 궁전)·〈권투선수들 Pugilists〉(1802)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1805년 교황청의 미술품들과 고대 유물을 관리하는 총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1810년 로마에 있는 '아카데미아 디 산 루카'의 원장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프랑스인들이 약탈해간 이탈리아의 귀중한 미술품들을 되찾기 위해 파리를 방문한 뒤 1815년 런던에 가서 '엘긴마블스'를 접했다. 파리에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자 그 보답으로 교황이 이스키아의 후작 작위를 주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 후에 조지 4세가 된 섭정 왕자로부터 실물 크기의 군상인 〈비너스와 마르스 Venus and Mars〉를 의뢰받았다. 그밖에 말년에는 성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스튜어트 기념비(1819)와 나폴레옹의 기마상을 개조해 완성한 나폴리 소재의 찰스 3세 조상(1819), 1821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롤리에 세워진 고대 로마의 옷차림을 한 조지 워싱턴의 이상적인 기념상(1820, 1830년 화재로 소실) 등을 의뢰받아 제작했다. 카노바는 화가이기도 했지만 그림(대부분 포사뇨의 카노바 미술관에 소장)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대체로 수준이 낮다. 그림으로는 몇 점의 초상화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된 고대 그림들을 개작한 것들이 남아 있다. 그는 로마의 판테온을 모방해 직접 설계한 포사뇨의 사원에 묻혔다. 카노바는 조각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발전시킨 점에서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림에서 차지하는 비중 못지 않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가 18세기말과 19세기초에 유럽 조각 분야에서 얼마 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는 그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찬 회고록·시·산문 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비록 그 다음 세기에 명성이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작품을 평가할 때 '탁월한', '놀라운', '최상'이라는 수식어들이 자주 사용되었다. D. Irwin 글 /브리태니커
1700 -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Carlos II) 사망 카를로스 2세 [Carlos II, 1661.11.6~1700.11.1]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 사망 [역사 속의 인물] 큰 나라의 허약한 왕, 카를로스 2세 스페인 왕 펠리페 4세는 대를 이을 정실 자식을 얻지 못해 초조해하다 아들을 얻게 되자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그 귀한 아들은 몸이 허약해 5, 6세가 되어서야 젖을 떼었고 걸음마를 하는 데에도 그 후 몇 년이 더 걸렸다. 이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아홉 살이 되도록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을 다스린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이다. 카를로스 2세는 정략결혼으로 부상한 유럽 최대 왕가의 후예답게 스페인은 물론 피에몬테주와 베네치아,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 멕시코와 필리핀 등 해외 식민지까지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근친혼을 통해 비정상적인 아이들이 태어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 역시 그러했으며 ‘광인왕’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특유의 긴 턱 때문에 음식물을 씹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5살에 왕이 된 카를로스 2세는 모후의 섭정을 거쳐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나 비합리적인 결정들을 자주 내렸다. 재위기간 내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휘둘리면서 겪는 스트레스도 만만찮았다. 1661년에 태어난 카를로스 2세가 1700년 오늘,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숨지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2년 11월 0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9005&yy=2012
1636 - 프랑스의 시인, 비평가 니콜라 부알로(Boileau, Nicolas) 출생 부알로 [Boileau(-Despréaux), Nicolas, 1636.11.1~1711.3.13] 17세기 프랑스의 시인·비평가. 파리 출생. 시집으로는 《풍자시집 Satires》(1666) 《서한시(書翰詩) Epitres》(1668~1695) 등이 있는데, 그의 이름이 후세에 남은 것은 문학 비평사상 극히 중요한 《시법(詩法) L’art Poetique》(1674)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비평가 ·이론가였으며, 《풍자시집》(1666)에서는 17세기 프랑스의 풍조인 프레시오지테(preciosite:부자연스러운 꾸밈)이나 뷔를레스크(burlesque:광대취미)를 공격하였다. 또 《시법》에서는 그의 친구이기도 한 위대한 작가들, 즉 몰리에르, 라 퐁텐, 라신 등의 대변자가 되어, 그들의 작품에서 고전주의문학의 이론을 추출하여 집대성하였다. 그의 비평의 근원을 이룬 것은 이성(理性)과 양식(良識)이었다. 그는 “이성을 사랑하자”고 노래하고, “자연에서 멀어지지 마라”고 읊으면서, 자연(인간성) 속에 있는 ‘진실성’을 정확히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naver
- 'Church of St. Mary of Peace, Rome', 'Church of St. Agnes, Fountain and Obelisk, Rome'
1596 - 이탈리아의 화가, 건축가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 출생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Pietro da Cortona, 1596.11.1~1669.5.16] 본명 피에트로 베레티니(Pietro Berrettini). 코르토나 출생. 출생지 이름을 따서 코르토나로 불렸다. 17세기 중엽 로마 등에 있는 팔라초의 바로크양식 천장에 천장화를 장식한 일로 유명하다. 그는 화려한 색채와 빛의 효과를 이용하여 바로크양식의 천장에 알맞은 아름다운 인물·장식을 그려, 회화와 건축을 통일적으로 구상하였다.
1520 -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마젤란 해협에 들어서다 [어제의 오늘]1520년 ‘마젤란 해협’ 첫 통과 ㆍ대서양과 태평양 연결한 첫 뱃길 1520년 11월1일 마젤란 해협이 발견됐다. 남아메리카 최남단 칠레 푼타 아레나스와 티에라 델 푸에고 사이의 마젤란 해협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첫 해로다. 남반구 끝에 미지의 대륙이 있으리란 믿음은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지도에 어렴풋이 그려진 이 대륙은 ‘안티크톤’. 거꾸로 된 나라로 여겨졌다. 하늘과 땅이 뒤집혀 있고, 눈이 땅에서 하늘로 내리며 열여섯개의 손가락을 가진 사람들이 춤을 춘다고 상상했다. 대항해 시대의 탐험가들은 남아메리카와 미지의 대륙 사이에 수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 수로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름길일지도 몰랐다. 스페인 왕 샤를 5세가 그의 탐험을 지원하고 나섰다. 아시아의 향신료를 스페인으로 실어올 ‘향료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최명애 기자 glauku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10-31 21:28:3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10312128335&code=100100&s_code=ap005
- Portrait of Cellini - 'Saliera(Saltcellar)' 1500 - 이탈리아의 조각가, 금속 세공가 벤베누토 첼리니(Cellini, Benvenuto) 출생 첼리니(Cellini, Benvenuto, 1500.11.1~1571.2.13] 피렌체파의 조각가, 금세공인, 작가. 매우 뛰어난 마니에리스모 미술가이며 자신과 당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자서전으로 가장 주목받는 르네상스기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를 음악가로 키우려던 아버지의 계획을 거부하고 피렌체의 금세공인인 안드레아 디 산드로 마르코네의 공방에서 금속세공 도제가 되었다. 1516년 소란을 일으켜 시에나로 추방되었다가 1517∼19년 피렌체로 돌아왔으며 그뒤 로마로 옮겼다. 1523년 피렌체에서 싸움을 일으켜 기소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다시 로마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살라망카 주교와 시지스몬도 키지,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위해 일했다.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1527년 로마 방어전투에 참가하여, 오랑주 공과 부르봉 왕가의 고관을 사살했다고 한다. 로마가 함락된 뒤 피렌체로 돌아갔으며, 1528년 만토바에서 곤차가 추기경의 도장을 만들었다(만토바 감독교회의 사료보관소). 1529년 로마로 되돌아가 교황청 주조소의 '마에스트로 델 스탐페'로 임명되었으며, 1530∼31년 클레멘스 7세의 제의에 달 유명한 쇠단추를 만들었다. 귀금속으로 만든 그의 다른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녹아없어졌지만, 그 도안은 18세기에 본떠 그린 3점의 드로잉(런던 대영박물관)으로 남아 전해진다. 그가 클레멘스 7세를 위해 만든 많은 작품들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534년에 만든 2개의 메달(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뿐이다. 첼리니는 경쟁자인 다른 금세공인을 죽였지만 교황 파울루스 3세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해 공증인에게 부상을 입히고 로마에서 피렌체로 달아나 거기에서 알레산드로 데이 메디치를 위해 많은 주화(파리 국립도서관 메달 진열실)를 만들었다. 로마에서 1년을 더 보낸 뒤 한동안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를 방문하여 프랑수아 1세의 초상 메달(1538, 피렌체 바르젤로)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여행에서 그가 남긴 유일한 작품이다. 1537년 로마로 돌아오는 길에 횡령죄로 고발되어 감옥에 갇혔다. 탈옥을 시도하다 잡혀 다시 감옥에 갇혔지만 결국 1539년 페라라의 에스테 추기경의 도움으로 석방되었으며, 그 대가로 그를 위해 도장을 만들어주었다(1540경, 원품은 분실되고 납에 찍힌 도장 자국이 리옹에 있음). 1540년 다시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미완성 상태의 소금그릇을 가지고 프랑스의 퐁텐블로로 가서 왕을 위해 금으로 완성했다. 이것은 첼리니가 만든 귀금속 작품 중 유일하게 진품으로 확인된 작품(빈 미술사박물관)으로 르네상스기의 금세공인이 만든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이다. 1542년 프랑수아 1세로부터 귀화를 허락하는 인가장을 받았으며, 1544년 그로부터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로 장식한 12개의 은촛대를 만들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 가운데 주노 상의 도안은 파리의 루브르 궁에 있는 한 드로잉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543∼44년에는 루브르 궁의 입구에 청동으로 커다란 반달 모양을 한 퐁텐블로의 님프를 만들어놓았다. 1543년에는 퐁텐블로에 세울 분수를 위해 거대한 마르스 상의 모형(분실되었음)을 만들었다. 1545년 첼리니는 갑자기 파리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갔다. 피렌체에서 그는 코시모 데이 메디치의 환영을 받고, 가장 유명한 조각인 청동상 〈페르세우스 Perseus〉(아직도 피렌체의 로자데이란치에 세워져 있음)와 토스카나 대공의 거대한 흉상(피렌체 바르젤로)을 의뢰받았는데, 1546년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 베네치아로 달아나는 바람에 1548년경에야 완성되었다. 같은 시기에 그는 팔레스트리나에서 출토된 고대의 토르소를 〈가니메데스 Ganymede〉(1546∼47,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로 복원하고, 대리석상인 〈아폴론 Apollo〉·〈히아킨토스 Hyacinth〉(1546)·〈나르키소스 Narcissus〉(1546∼47)를 만들었는데, 이 세 대리석상은 〈페르세우스〉의 실험용 주조품으로 만든 작은 부조 작품인 그레이하운드(1545)와 함께 현재 모두 피렌체의 바르젤로에 소장되어 있다. 첼리니는 또한 피렌체에서 은행가이자 예술후원가인 빈도 알토비티의 청동 흉상(1550경, 보스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박물관)을 만들었다. 〈페르세우스〉를 세상에 공개한 뒤(1554) 자신의 무덤(피렌체의 산타안눈치아타 교회에 있음)에 세워놓으려고 대리석 십자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현재 스페인 에스코리알의 왕립수도원교회에 있다. 이 〈에스코리알 십자가 Escorial Crucifix〉(1556)는 그의 미술이 당시 경쟁자였던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나 바초 반디넬리의 작품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 피렌체 아카데미의 문장(紋章)을 위한 2개의 도안(대영박물관, 뮌헨 국립 그래픽 미술관)은 1563년에 완성되었다. 그의 자서전은 1558~62년에 제작되었으며 1565년부터 금세공과 조각에 관한 주요논문인 〈금세공에 관하여 Trattato del-l'oreficeria〉·〈조각에 관하여 Trattato della scultura〉를 쓰기 시작했다. 첼리니의 명성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는 것은 미술가로서의 그의 작품보다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에 힘입은 바가 더 크다. 1728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판된 첼리니의 자서전은 영어(1771)·독일어(1796)·프랑스어(1822)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당시 낭만주의 운동의 여파로 즉시 널리 보급되었다. 비서에게 구술하여 씌어진 이 자서전은 문학적인 가식 없이 구어체로 서술되어 있으며, 작가 자신이 로마의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및 피렌체의 코시모 데이 메디치를 만나 현지에서 겪은 경험들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비록 과장이 심하고 자기자랑이 많기는 하지만, 놀랄 만큼 솔직하고 비할 데 없이 진솔한 인간 기록이며, 바로 이 때문에 첼리니라는 인물은 잘 알려져 있다. J. P. Hennessy 글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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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