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5일 일요일 예수 성탄 대축일
성탄 시기 성탄 시기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야 저녁’부터 ‘주님 세례 축일’까지다. 구세주께서 오셨음을 기뻐하며 환호하는 시기다. 따라서 이 시기 동안 성탄 장식물은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다. 특별히 성탄 날에는 구유 경배와 함께 세 번의 미사를 봉헌한다. ‘밤 미사’와 ‘새벽 미사’ 그리고 ‘낮 미사’다. 미사마다 고유한 기도 양식이 있다. 그리고 부활 때와 마찬가지로 성탄을 경축하는 ‘팔일 축제’를 지낸다. 예수 성탄 대축일 새벽 미사 루카복음 (2,1-14) 말씀의 초대
장차 태어날 임금에 대한 예언이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일 것이고, 그의 이름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릴 것이다. 그는 다윗 가문을 융성케 하며, 공정과 정의로 왕국을 굳건히 할 것이다.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었다(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이들을 모든 불의에서 해방시켜 깨끗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 중요한 것은 믿는 이들의 대열에 들어가는 것이다(제2독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식민 국가의 호적을 정리한다. 정확한 인구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요셉과 마리아도 이 명령에 따라 나자렛을 떠나 남쪽의 유다 지방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낳았다.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복음).
이 기간 동안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을 지낸다. 그리고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도 지낸다. 1월 1일에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님을 기억하며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낸다. 이로써 ‘성탄 팔일 축제’는 끝이 난다.
한편 ‘주님 공현 대축일’ 역시 성탄 시기 안에 있다. 초기엔 1월 6일에 지냈다. 그러나 지금은 1월 2일과 8일 사이의 주일에 지내고 있다. ‘주님 세례 축일’ 역시 ‘주님 공현 대축일’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축일이다. 이 주님 세례 축일을 끝으로 성탄 시기는 막을 내린다. 그래서 이날 저녁 미사를 마치면 성탄 구유를 치우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 태어나셨다(마태 2,1 참조). 그런데 헤로데는 기원전 4년에 예리코에서 죽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기원전 4년 이전에 탄생하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력기원(기원후)을 만들었던 이탈리아의 디오니시우스 수사는 예수님께서 로마 건국 754년에 태어나신 것으로 알았다. 그리하여 그해를 서기 1년으로 삼았다. 그런데 헤로데는 로마 건국 750년에 사망했음이 역사적으로 판명되었다. 디오니시우스는 예수님의 탄생을 ‘4년 늦게’ 계산했던 것이다.
오늘의 묵상
천사를 만났던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자신들에게 알려 준 ‘그 일’을 확인하러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발견합니다. 천사가 알려 준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것은 ‘아기의 모습’이었습니다. 뵙는 순간 ‘하늘의 기쁨’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알려 준 모든 일을 요셉과 마리아께 보고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자신에게 오셨던 천사를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때의 느낌을 되살리시며 생각에 잠기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되새겼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듯 천사는 예수님을 알려 주는 분입니다. 누구라도 우리에게 신앙과 믿음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면 그는 바로 천사입니다.
올 한 해, 신앙으로 이끌었던 ‘아찔한 사건’은 없었는지요?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착하게 살도록 이끌었던 ‘아름다운 만남’은 없었는지요? 우리에게 찾아왔던 천사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건과 만남’ 자체가 천사의 흔적인 것이지요. 복음의 목자처럼 우리 역시 아기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금년 한 해 천사들이 알려 준 메시지를 보고해야 합니다. 사건과 만남을 통해 주님을 알게 해 준 사실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성탄 대축일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이룩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구원하신 주님을 찬미하고 기뻐하고 환성을 울리라고 말한다. 구원자이신 분의 탄생의 기쁨이 예언자를 통해 울려 퍼지고 있다(제1독서).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 증언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끄시는 분이시다(제2독서). 한 처음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말씀이신 분께서 이 땅에 오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께서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분께서 임마누엘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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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기도하려고 태어난 듯한 자매가 한 분 있습니다. 어느 날 그 자매의 아들 친구가 흉기에 맞아 큰 상처를 입고 전신이 마비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자매는 다친 아들 친구를 위해 『성경』을 필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자매는 말씀을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그 청년의 마비된 전신이 움직여 회생하는 모습을 상상하였습니다. 일 년이 지날 즈음 그 청년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청년은 사회에 복귀하여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성경 말씀을 쓰며 기도했다는 것을 본인은 물론 그 가족도 모르고 있습니다.
‘가톨릭 굿뉴스’에서 이봉순 님의 기도 체험 글을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라고 했지요. 우리 주변에서 말씀을 통해 변화되고 치유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 생겨났고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피조물을 변화시키고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의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탄생과 공생활,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온 생애가 말씀이십니다. 2천 년 전 병자를 낫게 하시고, 억눌린 이,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시며 온전히 사랑하셨던 그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말씀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계십니다. 성탄은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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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말씀’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고, 지금도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주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요한 복음은 결론 내립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는 ‘말씀 한마디’면 충분했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실 때도, 눈먼 이를 눈 뜨게 하실 때도 ‘한 말씀’뿐이었습니다.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도 “탈리타 쿰!”이라는 ‘한마디’가 전부였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발음 그대로’ 복음에 남겼던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을 믿고 사는 신앙인의 말에도 힘이 있습니다.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는 신앙인이라면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위력이 넘치는 말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요? 말로써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말로써 아픔을 줄 수도 있습니다. 서운했던 말은 잊어버리고, 고마웠던 말은 ‘기억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남을 위해 ‘좋은 말’을 하면 ‘좋은 일’이 생깁니다. 성탄 미사 때, 우리를 힘들게 했던 이를 위해 기도한다면 또 다른 축복의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사랑으로 살다가 당신께 돌아오라는 말씀을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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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복음 1장 1절의 말씀입니다.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학자들의 논문도 수없이 많습니다. 공인된 해석은, ‘말씀’은 곧 ‘예수님’이라는 견해입니다. ☆☆☆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조건도 없으시고 대가도 바라지 않으시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토록 사랑하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절정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세상 역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집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1.3). 다음 날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도 ‘말씀’으로 만드십니다. 창세기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과 ‘그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말씀은 하느님의 ‘창조 능력’입니다. 우주를 만드신 ‘위대한 힘’입니다. 그러기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시고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시는 분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십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을 통해 언제라도 가까이 갈 수 있는 모습으로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기쁨으로 살다가 당신께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양승국신부- <가장 밑에서 시작하신 하느님>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 정말 불가사이한 일,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 해도 해도 너무한 일,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내내 평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이리저리 부딪치며 상처투성이뿐인 인생입니다. 누구든 따지고 보면 억울한 일이 한 두 가지씩 있습니다. 다들 이런 하소연 한 두 번씩 던지며 살아가고 계시더라구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길을 다리미로 주름 펴듯이 쫙 한번 펴주시면 좋겠는데, 어찌 그리도 꼬이고 꼬입니까?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찌 우리 가족에게 이렇게 이해하지 못할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까?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느님께서 왜 나를 번듯한 가문에서 ‘꽃미남’ 아버지, 신사임당 같은 어머니를 둔 ‘짐승남’으로 태어나지 하지 않으시고, 이리도 구린 한 평생을 살게 하십니까? 내 아들, 내 딸은 왜 김연아, 박지성 선수 같지 않고 저렇게 지지리도 못났습니까? 왜 이토록 혹독한 시련, 정말 이해하지 못할 사건, 정말 함께 하기 힘든 이웃들을 끝도 없이 보내주십니까? 정말 알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 존재 자체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탄생을 한번 보십시오. 그분 앞에 불가능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데, 그렇다면 이왕 구중궁궐 안 가장 따뜻하고 안락한 방에서, 내놓으라는 명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전하게 탄생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시기 바람 숭숭 들어오는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동물들 사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을 한번 보십시오. 전지전능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는가 하면, 손가락 하나로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릴 수도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무수한 추종자들과 함께 적대자들을 힘으로 제압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성도 예루살렘, 천년 왕국 이스라엘을 건설했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이룬 후 천수를 누리다가 모든 백성의 감사와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른세 살 그 젊은 나이에, 사형방법 중에 가장 극형인 십자가형에 처해 정말 눈뜨고 바라볼 수 없는 몰골을 한 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탄생에서부터 시작해서 나자렛의 숨은 생활, 그리고 예수님 삶의 절정기였던 공생활, 이어지는 수난의 시기와 죽음, 그 어느 것 하나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생애는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생애, 결국 하느님이란 존재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로 고생 많은 우리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나보다 더 억울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나보다 더 밑바닥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결국 아기 예수님의 탄생, 하느님의 육화강생은 억울한 일, 이해하지 못할 일, 정말 감당하기 힘든 일로 힘겨워하는 우리들을 위한 성탄인 것입니다. 가장 밑바닥 탄생을 통해 적당히 밑바닥인 우리를 위로하시는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가장 밑에서 시작하심을 통해 이류, 삼류여서 억울해하는 우리에게 자신감과 힘을 주시는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던지 자신의 키를 낮추셔서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 그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이병우 신부- 우리의 구세주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희망의 얼굴 - 김혜경- 그리스도의 육화로 인해 인류가 얻은 가장 큰 은총은 ‘생명’ 이다. 오늘 복음은 그 생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에 대해, 생명을 발산하는 동력으로써 빛에 대해 말하고 있다. 생명 · 말씀 · 빛을 통해 아직은 언급되지 않는 삼위일체의 표상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대인의 가슴속에서 확산되는 죽음 · 침묵 · 어둠과 대비되는 희망의 얼굴이다.
행복으로의 초대 -전삼용신부- 캐나다 몬트리올에 있는 어떤 크리스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이 학교에서는 성탄 성극에 등장할 배우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랄프라는 4학년 학생이 있었는데, 다른 누구보다도 연극을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천적인 말더듬이었고, 판단력도 보통아이들보다는 뒤지는 장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아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연극을 시키기로 하였고, 단 한 마디만 하면 되는 여관 주인 역할을 시켰습니다. 요셉과 임신한 마리아가 찾아와 방을 찾으면 세 번, “방 없어요.”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되는 역할이었습니다. 물론 단순한 역할이라 연습 때는 잘 했습니다. 성탄절이 되었고 연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셉이 찾아와 문들 두드리자 랄프가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요셉이 방을 찾고 있다고 하자, 여관 주인은 또박또박 “방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이, “그럼 큰일이네요, 날도 추운데 제 아내가 언제 아이를 낳을지 모르겠거든요.”라고 감정을 넣어서 말했습니다. 여관 주인은 역시 “방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셉이 한 번 더, “정말 큰일입니다. 이 추운 겨울에 제 아내가 어디서 아이를 낳을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하자, 랄프의 눈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말을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그, 그럼...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 연극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그럼, 제 방으로 들어오세요.”라는 한 마디 때문에 숙연해졌고 따듯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제가 랄프 나이 쯤 되었을 때 어머니는 오고갈 때 없는 아이를 하나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처음엔 밥만 먹여 보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더니 옷도 갈아입혀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밖으로 내보낼 용기가 없으셨는지 갈 곳을 정할 때까지 집에서 머물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우리 집도 가난하고 다섯 식구가 방 두 개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 명이 더 는다는 것은 우리 삼형제에게 여간 큰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는 며칠 잘 지내는 듯싶더니 우리가 학교 갔을 때 우리 저금통을 털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배은망덕한 그 아이에게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이 더 아프실 것 같아서 그 아이 욕만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한 아이를 받아들이고 사랑을 주셨지만 우리 삼형제, 어쩌면 아버지의 마음까지도 얻게 되셨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어떤 선생님께도 그런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지만,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신 어머니께 사랑이 무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미국 보스턴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 소머빌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도시는 성탄을 기념하여 시 당국에서 시청 앞에 구유를 꾸며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장난꾼들이 아기 예수를 훔쳐간 것입니다. 마리아, 요셉, 목자들, 삼왕, 소와 당나귀, 구유와 포대기까지 다 있었지만 예수님만 없어졌던 것입니다. 당황한 시 당국은 라디오를 통해 예수님을 가져간 사람이 있거든 빨리 가져다 놓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밤에 또 조용히 예수님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렇게 우스운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사람들은 큰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없는 성탄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장 힘들 때는 서로 사랑을 확인하지 못했거나 서로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반대로 가장 행복할 때는 상대의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일 것입니다. 저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선물도 주고 마음을 말로 표현하고 행동으로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그 상대에게서 “행복해요.”라는 말을 들을 때 나도 동시에 행복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랑고백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것을 주는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를 취하신 이유는 참다운 생명나무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못한 나무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영원히 살게 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에게 생명나무로 먹히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주시기 위해 살과 피를 취하셔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 영원한 행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맞아들임으로써 예수님까지 함께 맞아들일 수 있었던 것처럼, 엘리사벳이 역시 마리아를 맞아들임으로써 태중의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그래서 자신과 자신 안에 잉태된 요한까지 기뻐 뛰었던 것처럼, 말더듬이 랄프가 요셉과 잉태된 마리아를 맞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을 맞아들인 것처럼, 또 저희 어머니가 한 집 없는 아이를 맞아들임으로써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처럼, 맞아들이지 않으면 오늘 성탄의 기쁨은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없는 성탄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태어날 곳으로 추운 겨울 마구간을 택하셨습니다. 겨울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은 조금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자신을 다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우리 행복을 위해 대신 고통당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모두 잠든 새벽에 태어나신 이유는 세상 것들이 정신없이 판을 치는 곳은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나 돈, 명예 등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태어나시지 않습니다. 그런 세속적 욕망이 모두 잠든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마구간이란 가난의 상징입니다. 가난이란 하느님 외에 가진 것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만을 바라는 사람에게 태어나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구유에 놓였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먹이통입니다. 많은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인간을 위한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은 위대한 왕처럼 칼로 싸워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바쳐 인간들에게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에 가장 합당한 집이 바로 성모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보는 구유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시고 또 그 모든 것을 받음으로써 두 분은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이고 성체입니다. 성야미사 제 1독서에서 이사야는 이 혼인의 신비를 노래합니다.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 너의 땅은 ‘혼인한 여인’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네 땅을 아내로 맞아들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성탄은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고백이고 청혼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에 따라 혼인의 행복을 얻고 잃고가 나눠집니다. 이 성탄의 신비는 매 성체를 영할 때마다 우리 각자에게 반복됩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보이는 한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보이지 않는 빵의 형상으로 오시는 그 분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이신 예수님은 당신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오시지 않습니다. 마치 마더 데레사에게 길에 쓰러져 목마르다고 외치는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처럼, 우리 이웃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내 옆에 있는 한 사람부터 받아들이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평화!” -양승국신부- <예수님을 위한 작은 공간 하나>
예수님의 성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자신의 한 평생 화두로 삼았던 예로니모(AD 340-420) 성인이십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히브리어나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행 중에 고행이었던 성경번역 작업에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임했는데, 그 작업은 바로 아기 예수님 탄생지로 추정되는 예수 탄생 성당 옆에 있는 동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예수님의 성탄과 관련해서 신앙의 후배들인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무리 성탄이 수 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잠깐 시내에 들렀더니 정말 대단했습니다. 번쩍번쩍, 시끌시끌, 와글와글, 캐럴송이 크게 울려 퍼지고, 구세군의 종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으신다면 다 헛것입니다. 그저 세상의 상술에 우리까지 덩달아 놀아나는 것 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처럼 이 예수님의 성탄 전야,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핵심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일입니다. 잠깐만 우리 마음 안을 한번 같이 들여다보실까요?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을 위한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확인해보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우리들 내면이 너무 많은 것들로 빼곡이 들어차 있어서 공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떤 분 마음 안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온통 ‘선덕여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나깨나 선덕여왕입니다. 선덕여왕 방영되는 시간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쩝니까? 선덕여왕도 끝나버렸는데, 그저 우울함과 울적한 감정만이 그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위해 조금 비집고 들어오시려고 해도 워낙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공간이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시는 여러분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성탄절, 예수님은 더 이상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요란한 광란의 성탄파티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휘황찬란한 도시 한 가운데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번뇌와 슬픔, 고독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 각자의 상처받은 인생 안에 탄생하고자 우리 옆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해야 될 준비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우리 삶 가운데로 모시기 위한 아주 작은 공간 하나 마련하는 일입니다. 작은 공간 하나 마련한다는 것은 우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일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지만 크게 한번 마음 비우고 져주는 일입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 -김찬선신부-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고백, 아기 예수님.
-전삼용신부- 오늘 성탄 축하 중, 저희 노총각 형이 남긴 길이 인상 깊었습니다. “오늘 드디어 크리스마스이브네 축복받는 성탄 되고 항상 건강 조심하고 올해도 나는 외로운 크리스마스가 되겠지만 예수님도 외롭게 오셔서 다행이야 ㅋ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주님께 너를 생각하며 미사 봉헌할게^^” 이맘때가 되면 이성 친구가 없는 청년들은 함께 성탄 캐럴을 들으며 걷는 짝들을 보며 더욱 외로움에 빠집니다. 그런데 저희 형의 말처럼 예수님은 짝이 없는 싱글들에게도 위로를 주시는 군요. 아마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가난하게,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외롭게, 소외된 이들의 위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소외되게 태어나시기를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모든 아픔을 보듬어 주시기 위해서 가장 아픈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그런 예수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즐거운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탄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시죠? 물론 모두 행복하실 것입니다. 분위기가 그래서 만이 아니라 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님을 보면 왠지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유를 보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랑고백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으로 오고가는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첫 사랑고백을 진지하게 받아 본 사람이라면 그 행복감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두 남, 여가 서로 좋아는 하고 있지만 눈치만 보고 있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한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것이 속 편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연인도 아닌, 그렇게 친구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싫어서 나는 떠나네!” 라는 유행가도 있지만 아무튼 무엇이나 어정쩡한 것이 가장 힘듭니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사랑한다는 속마음을 드러내 보일 때는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행복합니다. 오늘 구유를 보면서도 사실은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뭐든지 주고 싶어집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보다 소중한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 죄의 속죄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사랑고백’인 것입니다. 사랑고백은 큰 모험입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그 사랑에 응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상대는 그 사랑고백에 자신도 사랑한다고 응답할 수 있고 응답을 회피할 수도 있고 자신은 미안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고백을 하는데 대답을 회피하거나 부정적인 반응이 올 때 사랑을 고백한 사람은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 있고 그 상처는 매우 오래 갈 수 있고 나중에는 두려움이 앞서 다시는 사랑고백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고백을 받는 사람 또한 긍정, 무응답, 혹은 부정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습니다. 긍정으로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이루 바랄 것이 없겠지만 무응답이나 부정으로 어쩔 수 없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참 아프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가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해야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불행해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천국은 사랑이고 지옥은 사랑이 없는 곳입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의 사랑과 비슷하게 먼저 인간에게 사랑고백을 하십니다. 처음 인간들은 하느님의 사랑고백을 한 번 거절하고 에덴동산에서 뛰쳐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존심을 다 포기하고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두 번째 사랑고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또 그분의 생애와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확실히 보고 듣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고백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커다란 숙제를 떠안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것인지 무관심 할 것인지 혹은 거부할 것인지 중의 무엇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을 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눈에 보이게 하느님을 거부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고백에 대해서 응답을 하지 않는 것 또한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연인간의 사랑이 이루어져 행복하기 위해서는 짝사랑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느님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은 인간들의 사랑에서 느낄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고백에 대한 응답이 바로 ‘믿음’입니다. 연인들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서로 간의 믿음이 깨어지기 시작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하루에 백 번씩 사랑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어르신들 중에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고 사람을 너무 잘 믿으면 오히려 사회에서 바보취급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진리이시고 그래서 거짓이 없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버지로써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유독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표현하심으로써 거짓이 없으심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당신의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뜻이고 믿을 만 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들처럼 이랬다저랬다 하시지 않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이루어져있는데 하느님의 의지는 사랑만큼이나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이 사실인지 아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믿기 위해서 설명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사랑고백을 할 때 “글쎄, 잘 믿지 못하겠으니까 설명을 한 번 잘 해봐!” 라고 말한다면 사랑을 고백한 사람이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믿음은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을만한 사람이면 믿게 되고 믿지 못할 사람이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어린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장난으로 아이들에게 다리 밑에서 주워 왔고 지금 부모님은 진짜 부모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믿지 않다가도 어머니에게 야단을 심하게 맞을 때는 ‘정말 주워 온 것이 아닐까?’ 혹은 ‘나의 진짜 엄마를 찾아 가야겠다.’라는 마음까지 듭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사그라지고 맙니다. 누가 설명해 주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고 의심 없이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고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똑똑해서 다 이해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겠거든 설명을 요구하지 말고 먼저 자신부터 바꾸어 나가십시오. 만약 많이 배워서 더 믿게 된다면 아이들과 노인들은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어린이와 같이 본질을 단순하고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믿음은 생길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특징은 이젠 다른 사람들이 둘의 관계에 들어올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삼각관계가 되었다면 누군가는 온전히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자체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고백에 응답한 당신의 연인들에게도 결코 삼각관계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는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애 34,14) 질투의 화신이 하느님입니다. 질투는 우리나라 칠거지악 중의 하나였지만 자신이 온전히 준 사랑에 대해 자신도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질투를 자아내게 하는 것들입니다. 오늘의 예를 들어보면 아기 예수님은 겨울의 혹독함과 밤의 고요함과 마구간의 가난함과 딱딱한 여물통에 놓이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것과 반대되는 도시의 현란함과 무절제와 집착과 이기주의를 좋아하면서 동시에 베들레헴 마구간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도시 아니면 시골 마구간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은 연인 간에 “사랑하게 해 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사랑해!”라는 말 대신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무엇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참 사랑으로 사랑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사랑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씀으로 자주 응답 드리는 것이 오늘 아기예수님께 최고의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사랑고백인 ‘믿음’ 안에는 우리의 ‘가난’도 들어있습니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운 마구간과 같은 가난한 마음에 태어나십니다. 하느님이 당신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셨다면 우리도 가장 소중한 것을 그 분께 드려야합니다. 성모님께서 아드님을 바로 성전에서 봉헌하셨듯이 우리 가장 소중한 것을 돌려드리는 것이 바로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어려운 것은 애정을 봉헌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봉헌하는 만큼 우리는 가난해지고 그만큼 그분과의 사랑이 완전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봉헌하셔서 성전에서 다시 찾으실 수 있으셨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또 내가 소유하려고 하는 것도, 다 잃게 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고백입니다. 우리도 그분께 믿음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봉헌하여 그 분의 고백을 받아들입시다. 그래야 예수님 탄생의 기쁨이 진정으로 나의 것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함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전기를 보면 성인은 성탄 대축일의 기쁨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날에 프란치스코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기를 바랐고, 소나 당나귀까지도 평상시보다 더 많은 양의 여물을 주게 하였다.” 참으로 가난한 성인은 모든 사람이 이 축일을 기뻐하도록 초대하고 또한 하느님의 피조물 모두가 기쁨을 누리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이날은 담벼락까지도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먹일 수가 없으니, 그 겉에다가 고기를 문지르기라도 해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만나는 사람들과 성탄 인사를 반갑게 하기. 예수님의 탄생 -김영수 신부-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 기뻐합니다” 우리의 결핍 때문에 오신 하느님 -양승국신부- 너무나 부당하고 부끄럽지만 소임으로 수도자 양성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양성책임자로서 역할은 솔직히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수도회 내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성탄선물(마태오 1장 1-25절) -양승국신부- 어느 추운 겨울 날 성덕이 출중했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가 여행 중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너무 늦은 시각에 머무르기로 약속한 수도원에 도착했답니다. 때마침 세찬 눈보라까지 몰아치니 이빨이 자동으로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너무 늦게 도착했기에 미안하기도 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누구 한사람 문을 열어주러 나오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수도원의 높은 담은 그의 목소리를 가로막았고, 아무리 수도원 주변을 뺑뺑 돌아 다녀봐도 철옹성 같은 수도원 담벼락으로 인해 내부로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지새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나긴 밤이 지나고 첫새벽이 되어서야 문 앞에서 꽁꽁 얼어있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를 발견한 수사들은 너무나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보르지아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한 평생 지난밤만큼 기쁘게 지낸 날도 없었습니다. 지난 밤 제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 높은 하늘에서 하느님이 눈송이를 하나씩 제게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길고 긴 밤을 얼마나 포근하게 지냈는지 모릅니다." 프란치스코 보르지아의 일화를 묵상하면서 오늘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아기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자신을 낮춰 인간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느님께서도 허름한 여인숙 방 하나 잡지 못해 찬바람이 만만치 않은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밤, 또 다시 인간세상으로 내려오신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밤입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추위에 오들오들 떠시면서 간절히 문을 두드리시는데, 정신 없이 잠만 자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시 성탄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가장 최종적이자 구체적인 표현인 육화강생(肉化降生)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성탄의 핵심은 한없는 자기낮춤이며 겸손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조건 없는 헌신이며 극진한 사랑입니다. 성탄시기는 생명의 빛, 구원의 빛이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극도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신 겸손의 영성, 마구간의 영성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우리 주변을 한번 주의 깊게 둘러보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주변에 아기 예수님께서 홀로 추위에 떨고 계시지는 않는지 살펴보길 바랍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미소하고 가난한 이웃들, 문전박대 당하는 이웃들, 소외된 이웃들, 외로운 이웃들, 가슴아픈 이웃들, 심한 상처받아 속울음 우는 이웃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더욱 허전하고 쓸쓸한 탈북자 형제들, 성탄절 특사로 가석방되어도 마땅히 오라는 곳 한 군데 없는 출소자 형제들. 살을 에이는 추위를 겨우 박스 한 장으로 막아내며 ’오늘은 어디에 머리를 눕혀야 하나?’고민하는 노숙자 형제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성탄 선물> 드릴 선물은 없사오나 첫 눈이 오면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만발한 우리들의 죄가 흰 꽃잎으로 떨어져 쌓이는 엄동의 빈터에 천도의 열기를 지닌 당신 숨결과 우리들의 눈물을 간직한 눈사람을 만들어 황금과 유향 몰약이 녹아 흐르는 양지 곁에 팔도 다리도 없는 눈사람을 만들어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조광호 신부- 방 있어요(루가 2장 1-14절)
바라시는 주님께서 가난하고 미천한 자의 모습,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람이
되시어 오셨습니다. 세상 구원을 위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우리에게
해방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 큰 성탄의 기쁨에서 제외될 수 없고, 모든 피조물은 이 기쁨에
참여해야 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생애 말년에 ‘그렉치오’라는 곳에서
성탄을 맞이하였는데, 그때가 마침 금요일이었습니다.
그때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이미 금요일이 아닙니다.
만일 벽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면 그날 나는 벽에게도 고기를 주겠습니다.
벽이 먹지 못한다면 벽에 고기를 바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매인 종달새에게
모이를 뿌려 주고, 구유에서 탄생하신 아기예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가축에게는 특별히 좋은 먹이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재육화’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은 바로 ‘너를 위한 삶’, ‘너를 살리기 위한
나의 포기요, 비움’이었습니다. 받아서 채워지는 기쁨이 아니라,
주어서 비워지는 기쁨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재육화의 삶이며,
이것이 성탄의 본질이고,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나는 한때 몇 개월 동안 집안에서 거의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오랜 세월을 외국에서 살다 온 탓에 국내에 아는 사람이나 친분 있는 사람이 극히 제한적인 탓도 있지만, 그들의 바쁜 생활과 대비되는 내 모습이 초라해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일미사 외에는 밖으로 나갈 일이 없었다. 학회나 현지조사 등을 핑계로 굳이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때는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처음으로 우울증이라는 병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사람이 더불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사랑 · 평화 · 정의 · 일치 · 화해 등은 물론 각종 싸움이나 미움 · 원망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일어나는 건강한 정신적 · 육체적 · 감정적 활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믿는 하느님이 단일한 위격을 지니신 분이 아니라 삼위의 ‘건강한 하느님’ 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고맙고 든든했다. 건강한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인 성자의 육화를 통해 우리가 생명 (성부) 과 빛 (성령) 을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
“인천교구”, “성령충만”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다른 구호를 외쳐보고 싶습니다.
“Merry Christmas!!!”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어젯밤 걸어둔 양말에는 선물이 들어 있었나요? 어떻게 보면 남의 생일인데 왜 이렇게들 좋아할까요? 단순히 상인들의 상술에 놀아나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예수님의 탄생은 곧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더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오늘 하루만큼 주님께서 오심을 함께 기뻐하면서 즐겁고 의미 있는 날들을 만드셨으면 합니다.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첫째는 시위를 떠난 화살, 둘째는 잃어버린 기회, 마지막 세 번째는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말입니다. 실제로 말로 인해서 곤란을 겪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개구리가 뱀에게 발각되어서 잡아먹히는 것은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이랍니다. 꿩의 울음소리 역시 사냥꾼의 표적이 되는 것이지요. 물고기는 입으로 낚입니다. 이렇게 동물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 말이 얼마나 많은 곤란함을 주는지요? 잘못 쏟아진 말로 인해서 재앙을 부르고, 상처를 주었을 때도 참으로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내뱉는 말은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하느님의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지요. 그래서 당신의 말씀만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창조 때 이루어졌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말씀이 바로 오늘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부족한 우리 인간들,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보이지 않는 말씀을 뛰어넘어, 보이는 하느님으로 그래서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에 비해서 부족하기만 한 나의 모습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데, 사랑을 받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주님처럼 끊임없는 용서를 실천하기 보다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처럼만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은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것으로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합니다.
먼저 미움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똑똑한 사람은 잘난 체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착한 사람은 어수룩한 사람으로 보이며, 얌전한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활력 있는 사람은 까부는 사람으로 보이고, 잘 웃는 사람은 실없는 사람으로 보이입니다. 또한 예의바른 사람은 얄미운 사람으로 보이고, 듬직한 사람은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안경을 쓰면 어떨까요? 잘난 체 하는 사람은 참 똑똑해 보이고, 어수룩한 사람은 참 착해 보입니다. 소극적인 사람도 얌전해 보이고, 까부는 사람은 활기 있어 보이며, 실없는 사람도 밝아 보입니다. 또한 얄미운 사람의 모습도 싹싹해 보이고, 미련한 사람은 든든하게 보입니다.
어떤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바로 사랑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볼 때, 긍정적인 마음으로 인해 행복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가지고 우리 곁에 태어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사랑으로 나의 이웃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주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길 원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오직 사랑 안에서만 있음을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어떤 분은 나에게 심한 상처를 안겨준 그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마음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탄생하셨는데 여러분이 축하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탄생하셨는데 제가 축하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보통 아기가 탄생하면 아기의 부모나 조부모가 축하받습니다.
옆집에 얘기가 태어났는데 내가 축하받을 이유가 없지요.
그러니 우리가 오늘 예수님 탄생으로 서로 축하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이제 옆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오늘 “예수 엄마 축하합니다. 예수 아버지 축하합니다!”하고
다시 한 번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니 기쁘십니까?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니 기분이 좋으십니까?
예수의 어머니가 되는 것 좋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다시 한 번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는
엄마가 되라고 하면 되시겠습니까?
혹시 예수의 엄마가 되는 것은 좋은데
지금 내 아이들의 엄마가 되신 것을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혹시 지금의 이 아들과 딸을 또 낳게 된다면
지금의 이 아들과 딸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지금의 이 아들과 딸이 아닌 다른 아들과 딸을 원하십니까?
저는 이번 성탄을 앞두고 한 10여일 심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저께 저의 형제에게 고백성사를 보면서 고백한 내용이지만
저의 형제들을 포기해버릴까 하는 유혹이 너무 심했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형제들이 잘못하는 것이 그리 많이 눈에 띠고
형제들의 잘못이 너무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형제들 수도자이니 착할 것 같지요?
전혀 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착하지 않고
저의 기대만큼 착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하고 똑같습니다.
저의 형제들 수도자이고 어른들이니 말썽 일으키지 않을 것 같지요?
Trouble Maker들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저의 형제들이 전에는 안 그랬는데
유독 이때 그런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니 성탄을 앞두고 이런 것은 요즘 저의 형제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저의 문제이고 지금 생각하면 마귀의 장난이고 유혹인 것 같습니다.
사실 저의 형제들 욕심만큼은 아니어도 괜찮은 형제들이지요.
예수님만큼 Nice하지는 않아도 괜찮은 형제들이지요.
아니 예수님도 인간 마리아의 눈으로 보면 Trouble Maker였습니다.
어머니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한 자식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렇게 묵상을 하니 이번 성탄 하느님께서 마귀를 통하여
이 착하지 않은 형제들,
이 Trouble Maker들을 문제꺼리로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깊이 다시 고민하게 하신 것이고,
마침내 마리아처럼 이 형제들을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인준 받은 회칙 제 6장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은 어디에 있든지 어디서 만나든지
상호간에 한 가족임을 서로서로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서로 간에 거리낌 없이 드러낼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Mothering, 어머니 됨을 얘기합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이면서
또한 어머니가 되어야 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레오 형제에게,
“레오 형제, 그대의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를 드리며 평화를 빕니다.
나의 아들, 내가 그대에게 어머니와도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런 자식이 나왔어. 너 같은 자식은 싫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부모 되기 싫어 결혼도 하지 않거나
결혼을 해도 애는 안 낳으려고 합니다.
Career Woman이 되는데 걸리적거린다고 자식이 싫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다시 묻겠습니다.
지금 다시 똑 같은 자식을 낳아야 한다면 낳겠습니까?
형제들은 어떠시겠습니까?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형제를 나의 아들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이렇게 어머니 됨을 묵상하다보니
나는 과연 어머니답고 어머니다웠는지 또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식의 모든 문제는 부모 책임이지요.
나의 자식은 나의 유전자를 받아 태어났고,
나의 자식은 나의 교육을 받아 자랐고,
나의 성격, 나의 식성, 나의 모습을 타고났습니다.
그래서 자식의 죄는 다 나의 죄이고
자식의 허물이나 약함도 다 나의 탓입니다.
자식이 잘못 되었을 때 부모가 괴로운 것은
그것이 자식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그리 되었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죄인이고 허물 많고 약한 것 다 하느님 때문입니다.
부모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셔서
이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부모 선택하지 않았고,
내가 이 때를 선택하지 않았고,
내가 이 모습을 선택하지 않았고,
내가 이 성격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과 약함은 다 하느님 책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왜 그 모양이냐고 꾸짖기만 하지 않으시고,
하늘에 계시면서 나처럼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인간성, 즉 인간의 죄와 허물과 약함을 밑에서 짊어지시고
하늘로 오르시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이 성탄 저를 반성합니다.
형제들의 부족을 탓 하기 앞서
“나는 정말 제대로 살았나?”
내가 잘 살았다면,
내가 정말 성 프란치스코와 같이 어머니다웠다면
형제들이 더 행복했을 텐데!
“나는 정말 내려갔는가?”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처럼 형제들 밑으로 내려갔다면
형제들은 더 신적인 고귀함을 지닐 텐데!
-황지원 신부-
우리는 성인을 가난한 성자라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은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은 보화이고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었습니다.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하느님이신 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마구간 구유에서 나신 하느님의 모습이 성인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분께만 봉헌하는 삶을 택하신 것입니다. 지금 모든 성당에 꾸며진 구유는 성인께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베들레헴의 아기를 보여 주기 위한 성탄 전례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성인과 함께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참으로 연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을 경배하고 참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그리고 그 기쁨에서 아무도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의 사랑을 나누어 주시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MERRY CHRISTMAS!
아기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기쁘고 좋은 오늘,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사실 매년 돌아오는 성탄인데도 불구하고, 올해 성탄은 특별한 날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성탄을 준비한다고 고생을 무척 많이 했거든요.
본당 신부로 부임한 뒤, 저는 본당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많이 보게 할 생각으로 미사 1시간에 성사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1시간 전에는 그 좁은 고해소에 들어가서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제가 12월 4일에 부임한 뒤 지금까지 그 고해소에서 600여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또한 다른 성당 일곱 군데에서도 매일 평균 100여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니(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볼 수 있도록, 각 본당 신부들이 각 성당마다 돌아가면서 함께 고해성사를 줍니다), 12월 4일부터 지금까지 총 1300여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엄청난 숫자이지요? 그래서인지 11월 말부터 시작된 감기가 아직까지도 변함없이 제 몸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에게 고해성사를 줌으로써 조금이나마 기쁜 성탄을 맞이할 수 있게 했다는 생각에 뿌듯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일은 없었을까요? 제 일정표를 보는 사람들은 다들 깜짝 놀랍니다. 제 일정표를 보면 한가한 날이 하나도 없거든요. 왜 이렇게 모임이 많은지……. 더군다나 새로 본당에 부임해서 그런지 만날 단체도 사람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래서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을 보낸 뒤에 맞이하는 성탄입니다. 그러다보니 금년의 성탄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한가한 상태에서 성탄을 맞이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무런 변화 없이 그냥 평범하게 성탄을 맞이했다면 제가 맞이하는 기쁨을 똑같이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특별히 힘이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름대로 노력도 했기 때문에, 더욱 더 기쁜 성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지금 당장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내게 다가오면 우리들은 원망도 참으로 많이 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모두 지난 뒤에는 어떤가요? “그때가 좋았어.”라면서 오히려 그 시간을 그리워하곤 합니다. 바로 내 기억 속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소중한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은 어떠하신지요? 정말로 기쁘고 즐거운 성탄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기쁘고 즐겁다고 하니까 나도 그냥 분위기에 취해서 기쁘고 즐겁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비록 그 과정은 힘들고 지칠지 몰라도, 매 순간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고통과 시련만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를 이겨낼 희망 역시 우리에게 주십니다.
빠다킹신부
‘북치는 소년’
성탄절이 되면 김종삼 시인의 ‘북치는 소년’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 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 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 처럼’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리에는 온통 네온사인이 물결을 이루고 아이들은 산타를 기다리고, 사람들은 한 해의 마지막에 찾아온 축제의 분위기에 들떠 또 한 해를 비틀거리며 떠나보냅니다. 무엇을 위해 아름답게 장식을 하고 불을 밝히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은 ‘남들처럼’ 들뜬 마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하고 보냅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리라….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서양나라의 풍경들을 옮겨 놓은 거리와 가게들을 기웃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성탄절은 어떤 풍경일까 궁금해집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에 익숙한 우리의 눈은 외양간 한 모퉁이에 짐승들 속에 누워계신 가난한 아기에게 흥미가 없습니다. 진눈깨비 날리는 겨울의 한 복판에서 사는 일에 지치고, 살아가야할 일들에 기가 죽은 사람들에게 내용 없는 성탄절의 소란스러움은 마치 가난한 아이에게 온 아름다운 카드처럼낯선 풍경일 뿐입니다.
어린시절 나에게는 산타가 성탄절의 주인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보다 산타를 기다렸고 산타 할아버지가 가져다줄 선물의 목록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조건은 내키지 않았지만 산타는 내 어린 시절 성탄절의 모든 추억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나이를 먹고 철이 들면서 산타는 오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성탄절이 지루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그렇듯 성탄절이 돌아오면 남들처럼 카드를 주고 받고, 선물을 기다리고, 한바탕 놀 생각으로 들떠 지내곤 했습니다. 산타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마음 속에는 아직도 ‘나를 위한 산타’를 망연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산타가 없는 성탄절은 지루한 축제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 부터는 나는 산타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자리 하나를 마련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나니 성탄절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산타에 열광하는 세상의 모습을 봅니다. 매스컴은 예수님을 밀쳐낸 자리에 산타를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으로 등극시키고 아이들처럼 들뜨게 만듭니다. 거룩한 기쁨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얄팍한 상흔과 값싼 낭만이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산타와 함께’ 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성탄절을 맞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탄절입니다. 그분께서 가난한 우리에게 오셨듯이 우리도 가난한 이웃에게 다가갈 때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분께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마음에 따뜻한 사랑의 불하나 밝힐 때 그분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다는 영적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깨달을 때에 성탄은 거룩한 기쁨의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대림절 동안 마음을 고쳐먹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 하느님을 향한 길을 향해 발길을 돌린 사람은 이 성탄절에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 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만난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반가워라, 기쁜 소식을 안고 산등성이를 달려오는 저 발길이여. 평화가 왔다고 외치며, 희소식을 전하는 구나.”(이사야 52, 7)
하느님께서 형제들에게 선물로 주신 성소를 잘 키워나가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동반해 줘야 하는데, 역량이 부족해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그들 어려움이나 하소연을 주의깊게 경청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의무입니다. 혹시라도 자신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취약점들이 무엇인지 늘 눈여겨 보고 일일이 알려줘야 합니다. 제 코도 석 자인데 너무 괴로운 일이지요. 형제들을 만나면서 자주 듣는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도 높은 스트레스 지수를 더욱 가중시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진정한 영적 스승이 돼 주십시오. 좀 기다려주십시오. 진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는 아버지가 돼 주십시오.”
오늘도 한 무리의 형제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끝에 내린 마지막 결론은 부성애였습니다. 제겐 정말 부담스러운 '부성애'란 단어를 머리에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신부님 한 분이 계십니다.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네요. 한번은 제가 초대형 접촉사고를 낸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하느님 도우심으로 신체적 피해는 조금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겨우 밖으로 기어 나와서 사고차량들을 바라보니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몰던 차는 폐차장으로 직행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멀쩡하던 차를 한 대 '해먹었다'는 데 따른 자책감이 상당하더군요. 수직상승할 자동차 보험수가를 생각하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사고수습을 마무리 짓고 잔뜩 주눅 든 얼굴로 터벅터벅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나갈 때는 분명히 차를 몰고 나갔는데, 들어올 때는 맨몸이니 미안한 생각에 면목이 없었습니다. 원장 신부님께 단단히 혼날 각오를 하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제 생각과는 달리 신부님은 딱 한 말씀만 하시더군요.
"그만하기 정말 다행이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그러면서 주방으로 들어가셔서 저를 위해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애에서 정녕 잊혀지지 않은 순간입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한 부성애를 느끼게 해주신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저는 단단히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로 과속하거나 난폭운전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언제나 사람을 먼저 챙기고 사람을 가장 소중히 여기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또 다시 성탄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진한 부성애를 가장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 각자를 위해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인간 세상에 개입하신 하느님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우리 각자를 구원하기 위해 강생하셨습니다. 오늘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기뻐합니다. 죄로 실추되고 손상된 우리 인간성을 다시금 원상으로 회복시켜주실 메시아, 우리 각자의 존귀함을 다시금 일깨워주시는 메시아이십니다.
대림 기간 내내 성탄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오늘 내게 성탄은 무엇인가? 성탄이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강생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의 심각한 결핍이 당신 보시기에 너무도 안타까우셨던 하느님은 당신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의 결핍을 채워주시기 위해 하나의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는데, 그 결단이 바로 성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크신 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와 고통을 나누기 위해, 슬픔을 나누기 위해, 죽음을 나누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아들아, 지금 네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구나. 그러나 안심하여라. 나 역시 고통을 감내하고 있단다. 아들아, 지금 네가 슬픔에 잠겨 있느냐? 나를 바라보거라. 내 슬픔은 더욱 크단다. 아들아,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느냐? 그래도 안심하여라. 나 역시 단말마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단다."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를 향해 순례여정을 걷는 우리에게 역풍은 필수과목이지요. 거센 풍랑과 세파를 거슬러 힘겹게 항해하는 우리 각자에게 용기를 주시고자, 위로를 베푸시고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