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치매 남편을 놓친 울산 할머니 (이연실 논설위원) 지하철에서 치매 남편을 놓친 울산 할머니
이연실 논설위원
늙어가는 일이나 아픈 일도 서러운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어려움을 겪게 되면 더 안타까운 일이다
3호선 지하철 안, 내 옆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앉자마자 갑자기 탄식을 하셨다. "아이고! 이 양반이 전철을 안 탔네. 그새 문이 닫혔나?" 하며 사색이 되었다. 수서행 지하철이 교대역을 막 출발할 때였다. 같이 온 할아버지가 지하철을 타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진땀을 흘리셨다. 나는 양재역에 미팅차 가던 길이었다.
낯선 할머니의 긴박한 사태로 나는 만날 사람에게 급한 사정이 생겨 미팅에 늦을 거라는 짧은 문자를 남겼다. 나는 일단 할머니 손을 잡고 진정시킨 뒤 자초지종을 들었다.
울산에서 할아버지(85세)를 모시고 서울 아산병원에 오셨단다. 할아버지는 치매가 있는 데다가 폐암 환자라서 혼자 어딜 못 가시는 분이다. 할머니는 서울 지리가 낯설고 지하철을 갈아탈 줄 모르는 분이었다. 오며 가며 물어물어 다니셨단다. 할머니는 대략 80세쯤으로 보였고, 말투나 행동으로 보아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분 같았다.
할머니가 "당장 할아버지를 만나러 아까 그 역(교대역)으로 가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수서역에서 울산 가는 기차를 타야 하니까 수서역으로 가면 할아버지를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정신이 오락 가락해 일체의 신분증이나 전화기도 자신이 갖고 있어 연락할 방법조차 없다신다. 그 사이 할아버지가 놓친 지하철 그 다음 것을 타셨으면 길이 어긋날 상황이었다.
할머니는 마치 어린 자식을 잃어버린 아이 엄마처럼 울상이 되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리셨다. "아산병원에서도 잠깐 동안 사람들 많은 곳에서 정신이 없는 할아버지를 잃어버렸다"며 "오늘만 해도 벌써 두 번째"라고 마구 우셨다.
나는 "지하철 안내 방송을 하든가, 직원들에게 연락해 찾아보든가, CCTV를 확인하겠으니 얼른 진정하시라"고 다독여 드렸다.
양재역 안에 경찰 지구대가 있어서 서둘러 달려갔다. 그러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게 아닌가? 경찰 휴대폰 번호가 지구대 문에 붙어 있어서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아무도 받지 않았다. 결국 지하철 개찰구 직원 호출 버튼을 눌렀다.
나타난 두 청년이 그 할머니의 어리숙해 보이는 행색을 보더니 약간 고자세로 귀찮다는 듯이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돌직구를 날렸다. "지금 그 말투가 뭐죠? 이 할머니께 예의바르게 대하지 않으면 내가 문제 삼겠어요!" 하며 싸늘한 말투로 그들의 태도를 바로잡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연세, 이름과 특징을 여쭤보았다. 할머니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내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그 양반 나이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안 되겠다 싶어 "오늘 병원에 가실 때 가지고 오신 신분증이 있을 테니 보여주세요"라고 했다. 할머니가 넋이 나간 상태로 배낭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주셨다. 국가유공자증도 같이 있었다. 1930년대생 하@선 할아버지였다. 오후 SRT를 예매해 놓은 상태였고 울산역에서 왕복 기차표를 끊으신 거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잃어버린 충격과 예매한 기차를 못 타실 걱정으로 사색이 되었다. 서울에는 연고가 전혀 없으시단다.
내가 역무원 청년 둘에게 당부했다. 교대역 역무원한테 연락해서 할머니가 들려주신 인상착의와 지팡이를 짚고 계신 할아버지의 차림새를 설명하도록 했다. 할아버지가 계신지 역무원들이 확인하라고 내가 그들과 얘기하는 사이, 할머니가 황급히 몸을 돌려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할머니는 마음이 급해서 발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내가 인파를 헤치며 수서역 가는 방향으로 가보니 그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늙으신 분이 그때는 할아버지 찾는 것 때문에 급해서인지 그야말로 바람 같이 사라지셨다.
나는 역무원에게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교대역이든 수서역이든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찾게 도와드리고 또 수서역에서 울산행 SRT 기차를 타도록 업무 협조하고 결과를 꼭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 명함을 하나 주었다. 내 명함을 받기 전에는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던 두 젊은이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대략 1시간쯤 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내 예측대로 지하철 근무요원이었다. "다행히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가까스로 수서역에서 만났고, 울산행 SRT도 잘 타셨습니다." 할렐루야!
아직도 우리 사회의 80대 이후 어른들은 지하철 타는 것이나 노선 갈아타는 걸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다. 치매를 앓거나 혼자 의사 표현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야광 호루라기를 보급하는 건 어떨까? 어린이들 또는 성폭력 위기에 놓이는 여성들, 갑자기 산에서 길을 잃거나 다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길을 잃어버린 노인층에게 호루라기는 대단히 요긴할 것이다.
살다보면 젊거나 늙거나 긴급히 도움을 요청할 일이 생길 때가 있다. 호루라기는 위급할 때 큰 도움이 된다. 값도 싸고 또 목에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면 된다. 호루라기에 위급시 가족이나 해당 주소지 전화번호를 새겨 놓으면 어떨까?
앞으로 한국 사회는 급격한 노령화로 큰 변화가 올 것이다. 노인 문제, 치매 문제 등 그간의 사회 문제와 다른 엄청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이 늙어가는 일이나 아픈 일도 서러운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어려움을 겪게 되면 더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자주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수순, 우리 사회가 조금 더 그 무게를 나누고 함께 지상을 통과하고 싶다. 사랑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이연실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