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사도행전 3,11-26 루카 24,35-48
정호승 시인은 ‘새들은 바람이 강한 날에만 집을 짓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높은 나무 가지 위에 위태롭게 보이는 둥지는 바람이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새들은 바람이 강한 날에 집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배우지 않았어도, 새들은 바람이 없는 날에 편하게 집을 지으면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에는 둥지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고치에 있는 나비가 쉽게 나올 수 있도록 밖에서 고치를 열어주면 나비는 결코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합니다.
스스로 고치를 열고 나와야만 날개에 힘이 생겨서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타면 엉덩이가 아프기 마련입니다. 다리의 근육도, 팔의 근육도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려면 그 과정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 해 줄 수도 없습니다.
처음 자전거를 탈 때는 엉덩이가 아팠는데 어느덧 아픈 줄 모르고 타게 되었습니다.
다리와 팔이 아파서 경치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예쁜 꽃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새들이 바람이 강한 날에 집을 짓듯이, 삶은 폭풍우 속에서도 항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잔잔한 파도는 결코 강한 항해사를 만들 수 없습니다.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들도 모두 지난겨울 눈보라를 맞으면서 봄을 맞이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삼보일배, 오체투지, 108배’와 같은 고행이 있습니다. 이는 깨달음을 얻어 구원받으려는 염원입니다.
묵주기도에 ‘고통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가신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고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수고(受苦)하셨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타인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나의 삶이 세상의 것들에 머물러 있다면
주님의 부활을 애써 외면하고 감추려했던 율법학자와 대사제의 삶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다면 진리를 외면한 빌라도와 같은 삶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베드로 사도처럼 변화된 삶이 아니라면 타인을 위한 수고의 삶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기쁨의 삶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찾으려는 열망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삶이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처럼 가슴 벅찬 감동의 삶이 아니라면
주님과 함께 머물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 부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부활은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이 빛을 보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일의 증인입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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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사도행전 3,11-26 루카 24,35-48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베드로 사도는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가 치유한 불구자가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고 있고 군중은 불구였던 사람이
걷는 것을 보며 감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는 곳으로 몰려옵니다.
사도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문을 엽니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사도행전 3장 12절)
그리고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의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3장 14절-15절)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유를 사람들의 무지의 탓도 있지만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알려진
‘수난 받는 메시아’의 뜻을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사도는 이제라도 그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인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당부하며 이런 말을 이어서 이런 말로 마무리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 26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인들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드디어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복음 24장 38절-39절)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손과 발의 상처를 보고서야 주님이신 것을 믿고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1) 잡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시며 식사하시던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그제야 하나 둘 스승의 부활을
실감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 시편에 이르기까지
수난 받는 메시아와 부활에 대한 대목을 설명해 주십니다.
세상에서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반가움보다 먼저 두려움이 앞섭니다.
세상 사람들의 판단대로만 산 사람이 귀신을 만난다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소문으로만 스승의 소식을 들었지만 그래도 죽었던 분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낯설기도 하고 두려운 일이도 한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러한 제자들 앞에 스승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상처들을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시고
식사를 청해서 생선을 잡수기도 하신 것입니다.
서서히 제자들은 스승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복음 24장 47절-48절)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하셨듯이 당신에 관한 성경의 대목들을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절망으로 끝날 것 같았던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제 부활이라는 새로운 출발로 제자들에게 등장합니다.
슬픔에 싸였던 제자들은 기쁨과 희망을 갖게 되었고 또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쁨소식으로 전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 부활을 못 받아들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잡수시는 사랑은 우리 마음도 따뜻하게 만드십니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흩어지고 도망치던 그 마음도 한 켠에서는 부끄러움이 남아 있을 법도 한데
주님께서는 지난 일들은 침묵하시고 일상생활에서 부활 전이나 후에도 그 사랑에는 변함없으심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스승을 만나 뵙는다는 것만큼 기쁘고 위로가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듯이 묵은 우리가 아니라 이제는 새로움으로 향할 때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던 우리의 삶의 모습에서 이제 우리도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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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자들이 그분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익튀오스 옵투 메로스 ἰχθύος ὀπτοῦ μέρος)’를 드리자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그것을 잡수신다.(루카 복음 24장 42절-43절)
생선은 당시 일상생활의 양식으로 이해된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셨다.
(마태오 복음 14장 9절-11절 / 루카 복음 14장 17절-19절 / 마르코 복음 6장 35절-41절/ 요한 복음 6장 16절-21절).
주님께서 부활 후에 갈릴리 호숫가 뭍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시며 숯불에 물고기를 얹어놓으시고
빵과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하신다.(요한 복음 21장 9절)
부활 후에도 전처럼 변함 없으심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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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사도행전 3,11-26 루카 24,35-48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복음 24장 36절)
오늘 복음의 대목은 어제 우리가 들었던 엠마오 제자들의 일화 뒤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모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체험을 서로 나누고 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오시어 평화를 베푸십니다.
지난 며칠간 롤러코스터를 탄 것보다 더 두렵고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제자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라고 예수님은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영육으로 평화를 되찾아
새 시대에 걸맞는 새 존재로 거듭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평화를 말씀하시지요.
평화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심어주신 자기다움을 가장 충만히 누릴 때 존재적으로 느끼는 행복일 테니까요.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복음 24장 39절)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 몸을 만져보라고까지 하십니다.
이 접촉은 지금 그들 눈앞에 나타난 예수님이 실제 현존하심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그분과 제자들의 거리를 좁혀 줍니다.
스승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제자들 내면의 심정적 죄의식도 녹여 주는 배려가 될 터이지요.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복음 24장 41절)
예수님께서 정말로 배가 고프고 허기가 지셔서 먹을 것을 요청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 스승과 제자가 동고동락한 세월 동안 그들이 가장 빈번히, 허물없이,
동질감을 공유하며 나누었던 행위가 바로 먹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경계심과 의혹, 두려움과 죄책감을 덜어주시려 여러 모로 애쓰시는 듯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복음 24장 45절)
예수님은 생전에 누차 말씀하셨어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했던 메시아의 소명을 깨닫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은 인간적 지식과 욕망만으로는 열리지 않는 신비니까요.
스승의 부활까지 체험한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이제 말씀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복음 24장 48절)
비로소 제자들은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그분 존재와 가르침, 행적과 부활의 영광까지 맛보고 누리고 체험한 진짜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증인"은 세상 사건의 증인과 사뭇 다른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증인은 어떤 사건에 대해 체험한 바를 객관적 입장에서 진술하고 증거하는 역할일 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전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라 사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사명까지 부여받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달하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만납니다.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사도행전 3장 15절)
굳이 반복할 필요없이 베드로의 설교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치유 능력이나 언변이 아니라,
모든 일이 성경에 근거해 이루어이진 것이며 자신들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증인은 그저 증인일 뿐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증인입니다.
곧 그분의 판박이, 따라쟁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증인은 말과 행동, 선포와 능력 등 자기 존재를 총동원해 주님의 영광을 증거합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무수한 증인들, 증거자들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삶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상승과 추락과 충돌의 충격으로
온 존재가 들썩이면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주님 사랑의 증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빕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