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 16 - 이집트 십자군과 몽골군을 물리친후 프랑스, 영국과 싸워 독립하다!
이집트의 영토는 한국의 10배인 100만km² 이지만 사막이 많으며 인구는 1억명으로
“이집트는 나일강의 축복” 이라는 말이 있으니 주거지는 나일강변에 몰려 있습니다.
나일강은 매년 정기적으로 범람하는데 그 시기가 매우 일정하니 예측할수 있는지라
사람에게는 별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와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져다 주니... 5천년 전에 세계 최초로 "이집트 문명" 이 탄생합니다.
국호 이집트는 영어에서 유래한 외래지명이고 아랍어 토착지명은 “미스르 아랍
공화국”, 표준 아랍어로는“줌후리야트 미스르 알아라비야 인데.... 기원전
3150년에 남쪽 테베의 상이집트 나르메르가 3150년 북쪽 멤피스의 하이집트
를 정복하고.... 전 이집트를 통치하는 파라오로 즉위하니 이집트 제1왕조 입니다.
기원전 2686년에 파라오 조세르가 제3왕조를 개창하니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현재
까지 남아있는 피라미드가 지어졌는데 파라오 쿠푸(Khufu)는 규모를 극대화
했으니 오늘날 우리가 보는 기자의 쿠푸와 카프레, 멘카우레 등 거대한 피라미드
이며 제6왕조 페피 2세 이후 고왕국은 붕괴했고 혼란기인 제1중간기가 도래합니다.
멘투호테프 2세가 기원전 2055년에 하이집트의 제10왕조를 제압해 130여년 만에 이집트를 재통일
하면서 제11왕조가 시작되니 중왕국인데 기원전 1650년경 힉소스인들의 침략으로 제2중간기가
시작되니 힉소스인들은 “전차” 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이집트를 침략했으니 뛰어난 기동성
에 이집트 군대는 패했고 힉소스인들은 하이집트를 장악한후 파라오를 칭하니 제15왕조라고 합니다.
그후 아흐모세 1세가 기원전 1550년경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제18왕조를 개창하니
신왕국으로 신왕국은 이집트 제국이라고 불리며 영광과 부유함이 정점을 찍었던
시대였으니 이집트 최고의 군주 람세스 2세 등이 나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두고
히타이트와 세계전쟁을 벌였으며 룩소르와 아스완에 아부심벨등 대신전을 세웠습니다.
이집트는 다신교니 신들이 많은데 그 중에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 (새 머리에 뱀이
감고있는 태양원반을 이고 있다)“라”는 이후 파라오가 그의 아들임을 칭하면서
최고신이 되었으며 상이집트 테베의 수호신(타조깃털 2개를 머리위에 쓰고 있다)
“아몬” 은 테베가 이집트의 수도가 됨으로써.... “아몬-라” 가 되어 최고신이 됩니다.
기원전 1077년 이후 바다 민족들이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멸망시킨후 해적 함대를
꾸려 나일강의 항구도시들을 습격했고 그후 신왕국이 멸망한 이후 남쪽
쿠시왕국의 왕 피이가 분열된 이집트를 통합하고 파라오를 칭하며 제25왕조
를 세웠는데 파라오들은 에티오피아계 흑인이었기에 '흑인 파라오' 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속국인 제26왕조가 들어서면서 외세 간섭기인 말기 왕조의 시대
가 도래했는데 기원전 527년 아케메네스왕조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침략하니
페르시아의 통치기를 '제27왕조' 라 부르며 페르시아가 그리스와 전쟁하면서 과중한 세금을
거두자 이집트는 페르시아가 왕위계승 문제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제28왕조를 세워 독립합니다.
그후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35만명 대군을 몰고 침략하며 무너졌는데 점령된지
11년만인 다리우스 3세 시대에 페르시아가 무너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요절한후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기원전 305년 왕조를 건국했고, 300년간 이집트를
통치하니 제32왕조로 불리는데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영화를 누렸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BC 51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해 이집트를 공동통치하다가 왕위
에서 쫓겨난후 BC 48년 카이사르를 농락하여 세력을 얻어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
와 재혼했고, 로마에 갔다가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니 이집트로 돌아온후 옥타비아누스와 틀어진
안토니우스 장군과 결혼했으나 악티움 해전 패배로 이집트는 망하고 로마의 통치 아래 들어갑니다.
이집트는 969년 시아파 파티마 왕조 통치기에 들어가 신도시 카이로(알-카히라)를 수도로 번영을
누리던중 12세기에 십자군의 침공을 받아 청야작전으로 잿더미가 되었으며 그 후 십자군
전쟁에서 대활약한 술탄 살라흐 앗 딘이 창건한 아이유브 왕조(1169~1252)의 땅이 되었습니다.
1169년 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냈고 기독교 십자군 예루살렘왕국을 침공하여 하틴
전투에서 괴멸시키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업적을 세웠으나 살라딘이 죽은후
형제간의 반목 끝에 알 아딜이 조카들을 쳐내고 아들 알 카밀을 카이로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1218년 제5차 십자군의 침략으로 다미에타 공방전이 벌어지자 알 카밀은 십자군이 다미에타에서 철수
하는 조건으로 "예루살렘" 을 내주겠다고 제안하나 거절 당한후 전투끝에 방어에 성공하는데.... 당시
유럽 기독교도들은 이교도(?) 이슬람과는 평화협상이 아니라 전투로 모두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12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오자 알 카밀은 협상
을 통해 예루살렘의 모스크는 무슬림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에 성벽을 쌓지 않으며,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예루살렘을 기독교측에 내주고 6차 십자군을 종결시키니.....
1239년까지 평화가 이어졌으나 1238년 알 카밀이 죽고 두 아들 사이에 후계다툼이 일어납니다.
1239년 휴전협정이 끝나고 아이유브왕조의 요르단을 통치하던 조카 앗 니시르가 예루살렘
을 점령했고 1244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알 살리흐는 호라즘 왕조가 멸망한 뒤에
남은 군벌들과 손잡고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와 예루살렘을 공격해 점령했으며.... 내전
중이던 시리아 아이유브 왕조는 적군인 십자군과 동맹해 이집트 아이유브왕조에 대항합니다.
1249년 6월 루이9세가 3만6천 대군을 이끌고 제7차 십자군을 선포하니 술탄 알 살리흐
는 알 카밀처럼 예루살렘 양도를 조건으로 철수할 것을 제안했지만 루이 9세는
제안을 거절한 뒤 다미에타를 점령하고 카이로로 진군하지만 십자군은 만수라
에서 바이바르스 군에 패배하였고 루이 9세가 포로로 잡히며 7차 십자군은 종결됩니다.
7차 십자군 전쟁에 승리했지만 후계자 알 투랸샤가 바이바르스에게 숙청당하면서 1250년
맘루크가 권력을 승계하는 것으로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망했으나 아이유브 왕조의
다른 일원들은 무시할수 없는 세력을 갖춘채 시리아와 레반트에서 할거하고 있었으나
문제는 동방에서 불어온 거대하고 강력한 신의 재앙과도 같은 폭풍 "몽골족의 침입" 입니다.
1250년부터는 투르크족 노예병사인 맘루크들의 쿠데타로 인해 맘루크 왕조(1250~
1517)가 들어섰으니 술탄 알 사히르의 후궁이었던 여성 명군인 샤쟈르 알 두르와
황태자 투란샤의 정쟁이 결국 맘루크의 부상을 불렀던 것으로 샤자르 알-두르
는 80일간 재위한 뒤 잇자 알-딘 아이벡과 결혼하고 아이벡이 술탄이 되었습니다.
호라즘 제국과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조를 멸망시키고 진군한 몽골제국군이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레반트 지역까지 다가오자 맘루크 왕조는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의
훌라구의 일 칸국이 보낸 장수를 물리치고 다음해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를 복원하며
세력을 떨쳤는데 맘루크의 분투로 이슬람 세계는 사라질수도 있는 대위기에서 구해진 것입니다.
맘루크 왕조는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며 번영을 누리니 1300년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 칸국과 시리아, 다마스커스 공성을 놓고 여러차례 대결했으나 결국 맘루크가 승리했으며,
오스만에 대항해 동로마 제국을 보호하기도 했는데 알 아즈하르도 학문적, 문화적 중심지로 번영해
카이로는 바그다드를 제치고 이슬람 최고의 도시가 되었고 십자군은 1291년에 완전히 쫓아냈습니다.
1382년 투르크족 중심의 바흐리 맘루크조가 서카시아인과 그리스계 주축인 부르지 맘루크족
으로 왕족이 대체되었는데 그러나 맘루크 왕조는 티무르의 강성함에 다마스커스를
잃었으며, 티무르가 중국 원정을 기획하면서 점령만은 면했고 티무르 제국이
멸망하면서 맘루크는 다시 세력을 되찾아 인도양과 지중해서 강성한 해군력을 자랑했습니다.
번영했던 맘루크 왕조도 15세기초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면서
중개무역에 치명타를 맞아 쇠약해졌고, 1517년 갓 동유럽과 페르시아를 정벌하고 돌아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셀림 1세에게 정복당했으니 이미 동로마 제국의 숨통을 끊은 무기인
대포와 머스킷 소총으로 무장한 오스만군에 기병 중심 맘루크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속주였던 이집트도 그후 군벌(맘루크)들이 득세하였고, 알리 '베이'(군사 지도자) 때인
1770년에는 독립을 선언했는데 1798년 6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군벌들과 친오스만 총독
이 함께 격파되면서 프랑스의 영향권에 들어갔고 영국군의 해상 봉쇄로 프랑스군은 1801년 철수
했지만, 그 과정에서 1799년 로제타 석이 발견되면서 찬란한 이집트 문화는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1799년 7월 15일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라쉬드에서 진지를 구축중이던 프랑스군 피에르 부샤르 중위
는 요새 주춧돌로 쓰려는걸 고고학자들이 기겁을 하고 수습했는데.... 그후 프랑스 군인들이 프랑스
로 무사히 돌아가도록 해 주는 조건으로 영국이 인수해서 대영박물관에 전시중이지만, 프랑스는
양도하기 전에 탁본을 만들었으니..... 그 덕분에 프랑스 학자 "샹폴리옹" 이 이를 해석하는데 성공
했는데, 돌에는 이짐트 신성문자와 민중문자에 그리스 문자등 3가지로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알렉산드리아 상륙에 맘루크 지도부는 만일 모든 프랑크족들이 온다 하더라도
그들은 맘루크에게 맞설수 없을 것이며 맘루크의 말발굽 하에 짓밟힐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폴레옹은 이집트는 인도식민지와 영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를 정복할수만 있다면... 영국과 인도 사이를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공백상태에 빠진 인도를 쉽게 프랑스의 식민지로 삼을수도 있다는 계산까지 한 듯한데,
거기다가 이탈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인기 급상승 중이었던 나폴레옹을 견제하고자 하였던
프랑스 총재 정부의 입장도 그대로 맞아떨어진 상황이었는데 고 나폴레옹이 전면에 내세운 명분은
"오스만제국 술탄 명을 받들어 맘루크의 학정에서 고통받는 이집트 민중을 구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1798년 7월 3일 지중해 아부키르에 상륙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다음날 알렉산드리아
를 점령했고 카이로를 함락시키기 위해 사막으로 행군했지만 프랑스군은 유럽에서
입던 두꺼운 군복을 입고 왔고, 사막에서 꼭 필요한 식수와 신선한 식품을 준비
하는데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는등 사막 행군에 필요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더위와 갈증, 식중독으로 사망하거나 낙오한 병사들이 적지않았고 행군 속도도 매우 느려
졌으니 7월 21일에야 카이로 근처 나일강변의 마을인 엠바베에 도달해 맘루크군
수비대를 격파했으며, 이어 가자 근처 "피라미드 전투" 에서 맘루크군은 오래전 몽골
군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는 당대 최강의 기마병은 영국제 신형 기병총으로 무장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한지 오래였고 나폴레옹군 머스킷 총검으로 만든 방진을 돌파하지 못하고
격파당했으니.... 3,000기에 달하는 맘루크군 기병이 전사하고, 아랍 보병대도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반면에 프랑스군의 사망자는 29명에 불과했으니...... 이걸 "전투" 라고
불러야 하나? 세계전사에서 이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완벽한 패배를 당한 유례가 있을라나?
1871년 신미양요 광성보 전투시 600명 조선군 중에 전사자는 어재연등 350명에 부상자
20명을 포함 다수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는데도 미군은 전사자 3명에 부상 10명 이라?
또 1875년 대포 2문을 장착한 65명이 승선한 일본 군함 운양호는 영종진에 이르러
22명 육전대를 상륙시키니... 450명 조선군은 전사 35명에 포로 16명을 내고 도주하는
데... 성을 점령한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는 없고 경상자 2명에 불과한 것에 견줄만 합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이집트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했고 나폴레옹은 7월 25일 카이로에 입성하여
이집트 정복은 3주만에 끝난 것으로 보였는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에 격분하여 대프랑스 동맹에 가세하고 나폴레옹에 선전포고를 단행했으며
나폴레옹의 뒤를 쫓던 넬슨은 마침내 8월 1일, 아부키르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군을
습격해 섬멸시켰으니 “나일해전”으로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보급과 퇴로가 막히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의 꿈은 넬슨 때문에 좌절을 맛보는데 넬슨제독은 영국 해군에 신전술을 도입한 장본인
으로.... 1797년 세인트 빈센트 곶 해전에서 영국 제독 존 저비스 경과 넬슨이 스페인 함대
를 무찌를 때 그 위력을 입증했으니 넬슨은 접근전에서 용맹한 행동으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원래 저비스는 적 전열을 절단한 다음 합쳐지기 전 뱃머리를 돌려 다시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영국
전열 뒤쪽에 위치한 넬슨은 영국군 선두가 시간 내에 뱃머리를 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신속하게
적 전열로 뛰어들었으니 순간을 포착하고 명령없이 대열을 이탈해 독자적으로 취한 행동 이었습니다.
자신의 배 1척에 74문 대포 를 장착한 넬슨은 무려 적선 7척과 교전 했으며 그동안 영국함대가 돌아와
합류 함으로써 영국군은 대승을 거두었는데.... 다음해인 1798년 바로 저 나일해전이 벌어지니,
넬슨은 나폴레옹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건너가자 추격했는데 풍랑 때문에 따라 잡지는 못합니다.
열흘후 넬슨 함대가 이집트에 나타났으나 석양무렵이라 프랑스 함대는 전투는 내일 낮에 벌어질
것이니 오늘 밤은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닻을 내리자..... 어두워질 때를 기다렸다가 넬슨은
프랑스 함대의 뒤쪽으로 접근하여 기습공격을 가했으니 전햐 대비가 없었던 프랑스 함대는
혼란에 빠졌고 13척의 군함 중에 2척만이 탈출했으니 이집트는 영국 손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전에서 무적인 나폴레옹 은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 를 노렸으니
과학자, 교육가, 기술 공학자와 측량가도 포함됐다는 점에서 문화적인 면도 있었으며
동행한 지식인들은 적해와 홍해 사이 운하를 둘로 나눌 수 있는 가능성를 토론 했습니다.
넬슨의 14척 영국 함대 가 8월 1일 도착했을때 프랑스 함대는 아부키르만에 닻을 내리고 있었으며
8미터가 채 안되는 모래톱 근처 얕은 물위에 떠 있었으니... 함대의 우현 측이 북동쪽과 열린
바다를 마주볼 때 모래톱의 남서부는 함대의 좌현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상황 이었습니다.
15척 프랑스 함대를 지휘한 브루이 제독은 성 빈센트곶 전투등 넬슨의 전술을 연구한 적이 있었는데
해서 제독은 영국 전함이 프랑스 함대 대열을 둘로 잘라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닻을 내린채 전투
대형 을 연결하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브루이는 전투가 다음날 아침에야 시작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수심이 얕으며 잘 모르는 곳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야간 공격을 가해올 것이라
고는 도저히 믿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 준비는 여유만만 이었으니..... 프랑스 함대는
밤을 틈타서 도주할 가능성도 준비했는데.... 넬슨 제독은 프랑스 함대가 얕은 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정박해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자신의 함대를 둘로 나누도록 명령 합니다.
첫번째 대열은 프랑스 전열과 모래톱 사이를 통과하고 두번째 대열은 수심이 깊은 쪽에서 접근하도록
지시했으므로 프랑스 함대는 양쪽에서 포격 을 받게 되었으니.... 영국 전함 컬로든 호가 좌초되었
으나 나머지 전함들은 해상에서 움직이며 프랑스 함대를 1척, 1척씩 따로 떨어뜨려 놓기 시작합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프랑스 전함들이 동료를 도우러 오는걸 불가능 하게 했으며
넬슨은 여러척의 전함을 한번에 목표물로 집중 시킴으로써 작전을 완벽하게 실행할수
있었으니 프랑스 기함 오리엥 은 영국 전함 벨러로폰으로 부터 집중 포격을 받고
돛대를 잃은채 표류 하기 시작했으며 알렉산더와 스위프트슈어가 오리엥을 공격합니다.
21시경 오리엥에 불이 붙었고 전투를 중단한채 전함들은 얼마후 일어날 폭발에 대비하여
오리엥으로 부터 멀리 떨어졌으니 22시경 불이 화약고에 옮겨 붙었고 프랑스 기함이
폭발 하면서 타오르는 파편들과 선원들이 공중으로 수백미터 가량 날아올랐으며
천명 승무원 중에 오직 백명 만이 불타는 전함에서 헤엄처 나옴으로써 목숨을 건집니다.
대열의 끝에 위치했던 두척의 프랑스 전함 제네뤽과 기욤 텔만이 겨우 탈출에 성공하고 나머지 프랑스
전함들은 8월 2일 아침에 불타거나 나포되었으니프랑스 측은 1,700명이 전사하고 3,000명이 포로로
잡힌 반면에..... 영국측은 218명이 전사하고 677명이 부상 당했으니 영국의 일방적인 대승리 였습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 에서 만나다고, 에드워드 베리가 지휘하는 리앤더호는 넬슨의 승전소식을 급보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던중 나일 해전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전함 제네뤽과 마주쳐서 처절한 전투
끝에 나포 되었으며 이런 사정 때문에 승전 소식이 영국에 전해지기 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해전으로 영국 해군은 프랑스혁명 전쟁기간 절대적인 제해권 을 확립 할수 있었으며
넬슨제독의 명성 에 공헌했는데 나일해전 은 문학 을 통해서도 묘사되었으니 펠리시아
헤먼 의 시 '카사비앙카' 의 첫 구절에 나오는 "불타는 갑판 위에 서 있던 소년" 은
전투중 폭발한 프랑스함 오리엥에서 전사한 해군 장교 카사비앙카의 아들 이라고 하네요?
훗날 넬슨은 툴롱항에 정박중인 프랑스군을 대양으로 끌어내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여 10월 21일
트라팔가르에서 교전하는데 넬슨은 이 해전에서 영국군의 전형적인 전술을 적용해 적의
전열을 끊은 다음 뱃머리를 돌려 접근전 을 벌였으니 적선 30척 가운데 18척 을 나포
하거나 침몰시켰으나 넬슨은 치열한 접근전을 벌이던 중 적탄을 맞고는 쓰러져 눈을 감았습니다.
넬슨 은 해전사상 매우 독창적이고 지적인 용맹한 제독 이었으며 탁월한 지휘관이었으니
범선 시대 최후의 해전인 트라팔가르 해전 에서 영국은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제해권 을 완전히 장악한 넬슨은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지상 작전에만
한정시키도록 하여 결국에는 몰락의 길을 걷게 만들었고 영국은 19세기 내내 세계의
바다를 장악 함으로써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 '팍스 브리타니카' 를 건설합니다.
카이로에서 도망친 맘루크군은 나일강 상류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고, 프랑스군과 카이로
시민들과의 관계도 험악해져 10월 21일, 카이로에서 폭동이 일어나 프랑스군 300명이
살해당했고 프랑스군은 보복으로 카이로 시민 2,500명을 학살했는데.... 반란군의
거점 알 아즈하르 모스크는 이슬람 교리상 무기를 든채로 들어갈수 없었으나
프랑스군은 모스크 내부로 기병대를 투입시켜 진압했으니 이집트인의 반감은 심해집니다.
나폴레옹은 나일강 상류에 별동대를 파견해 맘루크군을 격파하게 하고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을 치려 시리아로 진군해 1799년에 팔레스타인에
진입하여 야파를 점령했지만 제자르 파샤가 이끄는 니자므 제디드군의 분전과
시드니 스미스 경이 이끄는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아크레에 대한 공략은 실패로 돌아
갔고 해안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선박에 공성포를 실어갔는데 영국 해군이 나포합니다.
이 공성포들은 그대로 요새포가 되었고, 나폴레옹은 공성포 없이 영국 해군의 함포와 아크레
요새포를 맞아가며 공격하다가 결국 포기했으며, 야파에 주둔한 프랑스군 사이에 페스트가
창궐하였는데도 나폴레옹은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을 방치한 탓에 오늘날에도 논란이 되니
비난을 걱정했는지.... 안토닌 얀 그로스에게 야파를 방문하는 자신을 그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7월 25일 노장 세이드 무스타파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아부키르에 상륙하자 장기간 항해에 지친
오스만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프랑스군은 급히 공격했는데 조아킴 뮈라는
기병 부대를 이끌고 공격해 오스만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무스타파와 직접 맞닥뜨렸고
그를 생포하는데 성공했는데 뮈라도 무스타파가 쏜 권총에 턱을 맞았지만 운좋게도 피부만
다친 경상이었으니 이때 한 발언이 "파리의 여자들은 안심해라, 내 입술은 멀쩡하니." 라나요?
나폴레옹은 프랑스내 이집트 학자들을 만나 치밀하게 연구하여 수지타산을 계산해보았고, 로마 시대
부터 부유하기로 유명했던 이집트의 명성을 믿어 자체적으로 보급도 가능하리라 여겼지만 부유한
이집트는 옛말이 되었던지라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아 오히려 적자만 지속되었지만 곡물 생산량
은 당대에도 유럽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식량이 넘쳐나서 프랑스군은 굶주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가운데 프랑스 본국에서는 오스트리아가 공세를 재개했고 나폴레옹의 정치적 입지도 좁아져
가자 결국 나폴레옹은 이 전쟁을 포기하기로 결정하니 아부키르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한
뒤인 8월 22일,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들만을 이끌고 프리깃함에 나눠타고 영국 해군을
피해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귀환했으며 클레베르 장군이 남은 프랑스군을 지휘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이 탈출한뒤, 지휘권을 인계받은 클레베르는 나폴레옹의 인수인계서를 읽어보고는
'그 빌어먹을 땅꼬마 새끼가 우리를 버렸다!' 라고 광분했다는데.... 사막에서 죽어가게
생긴지라 클레베르는 나폴레옹의 지시대로 영국군을 통해 튀르크군과 항복 협상
을 벌였으며 한편, 드제가 이끌던 나일강 상류의 별동대는 맘루크의 수장
무라드 베이의 잔존 병력을 끈질기게 추격해 격파하는데 성공하는등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클레베르는 튀르크군 증원군이 항복 요청을 묵살하고 계속 전진해오자, 오히려 헬리오폴리스
전투에서 1만의 프랑스군으로 6만의 튀르크군을 쳐부수는 엄청난 활약을 펼쳤지만 무한
보급과 충원이 가능했던 영국군과 오스만군의 공세에 간신히 저항하는 수준이었고얼마후
클레베르 장군이 암살당하면서 프랑스군의 항전의지도 줄어들었으며, 결국 1801년
오스만 투르크군에 항복해 살아남은 1만 5천명 프랑스군은 본국으로 귀환할수 있었습니다.
영국과 인도 사이를 차단해 영국을 견제한다는 나폴레옹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동행한 학술 조사단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집트 신성문자를 해독해내는 결정적
역할을 한 유물인 대역제국 박물고나의 최고의 수장품이라 일컬어지는 “로제타석” 을 발견했고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과 왕가의 골짜기 같은 곳에서 처음으로 학술 조사를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이집트 입장에서는 모스크까지 들이닥쳐 공격하는 것도 모자라 페스트까지 전파시켰고,
자국내 국보급 유물까지 약탈하듯 가져갔으니 이가 갈릴수 밖에 없었는데 그래서인지 사막
을 지나가다가 지친 프랑스 병사들이 낙오되면 그 뒤를 따르던 베두인 무리들에게 포로로
잡혀서 동성 강감을 당한뒤 사지육신이 분해되고 시체가 훼손된 일화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군들은 원정 내내 '투르크 술탄을 도와 역적 맘루크를 몰아낸다'
라는 설정에 충실하여, 최소한 겉으로라도 친 이슬람적인 면모를 보였으니 심지어 어떤
장군은 마을 촌장이 자신들의 정체를 묻자, "유일신과 그 분의 예언자께서 보내셨다" 라며
쇼맨십 넘치는 거짓말을 했으며 나폴레옹은 이 시기 이슬람교로 개종을 권유받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개종에 필요한 요건들을 하나하나 물어보며 마치 정말 할 것 처럼 분위기를
몰아갔지만 술은 안된다는 마지막 부분에서 '그건 좀 어려울거 같다' 며 아쉬워하며
(?) 물러났다고 하는데 나폴레옹은 훗날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이때 일들을 떠올리며,
"그것은 사기극이었다. 하지만 엄청나게 판이 큰 사기극이었지!" 라고 소감을 말했습니다.
사실 그는 동방의 풍습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면모를 지녔고, 제국을 얻을수만 있다면 터번 쓰고 가운
입고 이슬람교도 정도로 되는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으며, 사실 관대하다기 보다는 종교에
무관심하고 정치적 사람이어서 정치적 이익 앞에서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문명의 발상지에 문명을 돌려주려 간다' 는 명분으로 인쇄기를 챙겨가서 신문도
발행했고, 프랑스의 발명품들도 챙겨가서 대중들 앞에서 시연도 했는데 특히 당대
프랑스 과학기술의 결정체였던 열기구도 가져갔으니, 첫번째 시연은 실패해서 기구가
불타버렸는 데.... 이집트인들은 이것을 '적에게 화공을 가하는 무기' 로 착각했다고 합니다.
한편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떠나고 프랑스군을 몰아낸 영국군마저 떠난 이집트는 틈만 나면 군인들이
봉급 문제를 이유로 폭동을 일으키는 등 혼란한 상태가 됐는데, 이때 오스만투르크에서 이집트로
파견된 그리스 출신 군인 메흐메드 알리가 권모술수를 발휘해 맘루크를 숙청하고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이집트의 주인이 되니 그는 술탄 압뒬메지드 1세에게 후손들의 총독직 세습을 인정
받아 사실상 독립국을 세웠고...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메흐메드 알리 왕조의 개창으로 이어집니다.
1805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 임명된 무함마드 알리는 이집트 총독 자리에 오른 후에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뒤, 서방과 적극적인 접촉을 가지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32년에는 레반트와 헤자즈를 정복해 오스만 투르크(터키) 제국과 완전히 갈라섰으며, 1839년
시리아 반란으로 침공한 오스만제국과 전쟁에서 영국 중재로 시리아를 반환하고 1841년 독립을 합니다.
정확히는 "완전독립" 이라고 보기 힘든건 1922년 이전까지 이집트의 세속군주의 호칭은 '헤디브'(khedive)
였으니 '대리인', '총독' 이라는 의미니 사실상 독립상태지만 명목상으로 이집트는 여전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총독' 무함마드 알리까지는 꾸준히 이집트의 수입 중 일부를 이스탄불의 술탄에게
보냈으며 1922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 공화국을 세운 후에는 로잔 조약으로 완전히 절연합니다.
이집트는 근대화를 통해 산업적으로 발전하였고, 남북전쟁기간 동안 면화가격 폭등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았으나 미국의 면화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졌으며
1870년대 이집트는 영국에 많은 이권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수에즈 운하 주식을 영국이
구입하면서 간섭이 심해졌는데 1879년 아라비 파샤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반란
(독립?)이 일어났으니 1882년 영국은 군대를 파병하였고 반란군은 영국군에 순식간에 진압됩니다.
이후 이집트에는 반란(독립?)을 진압한 영국군이 주둔하게 되어 보호령이 되었으니.... 이후
74년간 영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니 이집트의 민족주의자들은 반영 폭동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진압당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1914년,
이집트에서는 후세인 카멜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해 이집트 술탄국이 성립됩니다.
1914년에 영국은 이집트를 식민지로 병합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이집트인의 격렬한 반대 데모로
무산되고 공식적인 보호령으로 삼는 것에 그쳤지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중 이집트인들을 전쟁터
로 동원하고, 전쟁 물자도 수탈해간 영국에 대해 분노한 이집트인들은 전후인 1919년에 민족자결
주의 영향도 있고 해서 대규모 반영운동(독립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게 바로 1919년 이집트 혁명입니다.
결국 영국은 1922년에 이집트를 보호국에서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시켜 주지만 그럼에도 영국군은 여전히
주둔하는 상태였고, 수에즈 운하도 영국 소유였으며 경제적으로도 영국에 의존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시
에는 이탈리아 왕국이 이탈리아령 리비아를 통하여 이집트를 침공했으나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으로 부터
이집트를 방어했으며 2차 대전후, 영국은 군대를 수에즈 운하를 제외한 이집트의 영토에서 철수시킵니다.
하지만 1936년 푸아드 1세가 그해 죽고 아들인 파루크가 제위했지만 겨우 16살 나이였고 영국 영향력이
워낙 막강해서 수에즈 운하에 주둔한 영국군이 계속 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는 영국에
계속 끌려다녔기 때문에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는 거의 누릴 수 없었으니 독립국이라는 말이 무색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목격한 지식인들은 서구와 이집트의 기술 격차에 큰 충격을 받고
이슬람 사상의 근대화를 모색하게 되었으니 알 아즈하르 대학의 셰이크였던 무함마드
압두는 서구의 모더니즘 철학 사조를 이슬람에 도입하고 중세 이후 순니파 세계
에서 사멸되었던 무타질라 학파를 부흥시켜 이슬람 모더니즘 학파의 기원을 이루었습니다.
19세기 이집트의 이슬람 모더니즘은 이슬람권의 세속주의와 살라피즘, 이슬람주의에 모두 깊은 영향
을 주었으니 20세기 세속주의-민족주의 성향의 이집트 문인 타하 후세인은 파라오의 입장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종래의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가치관과 완전히 대치되는 소설을 씁니다.
또 히파티아에 대한 재평가를 주도하였으며, 반서구 감정이 강했던 민중의 입장인 하산 알 반나는
전통적인 이슬람 사상에 레닌주의의 민중 해방론을 접합하여 무슬림 형제단을 창단합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을 저지하려는 제1차 중동전쟁에서 패전하면서 나라가 시끄러워져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를 중심으로 군 장교들의 쿠데타로 인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오니 제2차
중동전쟁인데..... 소련이 영국에 무력사용을 불사하겠다며 겁을 주는데다가 미국도 냉담하게
대하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니 결과적으로 이집트가 승리 합니다.
영국의 영향력이 이집트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며, 이집트와 나세르의 주가가 엄청나게
치솟아 인도와 함께 제3세계의 수장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이스라엘과의 전쟁
에서는 거의 싸우는 족족 패배했고 한때 시리아와 함께 통일된 아랍 연합
공화국을 만들어 전 이슬람 아랍세계의 통일을 꾀했지만 시리아의 이탈로 실패합니다.
1967년 5월 말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는 이스라엘 선박에 대해 티란 해협이 봉쇄될 것
이라고 선언하고 이스라엘과의 국경을 따라 군을 전진시켰고,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에
대항해 이집트 공군기지에 선제 기습 공습을 가했으니 이집트 공군은 궤멸당하는데
기습전에 이스라엘 항공기는 300대 이집트는 957대 였으나 이렇게 처참하게 당한 것입니다.
기습으로 이집트 공군력을 무력화 시킨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향해 공세를
개시했고, 나세르는 시나이반도에서 이집트군을 철수시키자 이스라엘군은 서쪽으로
계속 진격해 시나이반도를 정복하는데 성공했으며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서 요르단군을 축출했고 시리아군에 반격을 가해 골란 고원을 점령했습니다.
6일전쟁이라고도 불리는데 아랍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쿠웨이트는 총병력 55만명 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24만명을 전장에 보냈으며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은 동원된 예비군을 포함해 27만명 중에 10만
명을 전투에 투입했는데... 첫날 공습으로 이집트 공군력을 파괴한게 결정적이었습니다.
1973년에 일어난 욤 키푸르 전쟁이라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은 세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
로써 방심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이집트가 크나큰 일격을 가한 전쟁으로, 결국 전투능력이
더 우수한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지만.... 그 피해가 막심하였던 전쟁이었으니 시나이 반도는
전후 협상을 통해 이집트로 귀속되었으며 이집트는 친소에서 친서방으로 노선을 바꾸었습니다.
“중동전쟁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는 책을 지은 임용한은 집필 이유에
대해 "역사는 과거를 보는 거울이다" 며 "특히 과거의 전쟁사는 닥치지
않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하기 때문" 이라고 밝혔습니다.
임용한은 "이스라엘은 신생국으로 대외 갈등은 물론 내부적 갈등도 깊었다" 며 "그럼에도 거대한 아랍권
세력에 맞서기 위해 현실과 타협할 줄 알았고, 정치적 역량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내부적 갈등을
줄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 이라고 설명했으며 "특히 우리나라는 전쟁에 담긴 함의와
데이터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미래를 대비하는 선진적인 국방전략 시스템이 필요하다" 고 강조했습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아랍의 봄” 민주화 시위는 2011년 1월 이집트에도 일어나 18일동안 지속됐으니 정부는
인터넷 연결을 차단했으며, 소셜미디어를 또한 차단하고자 했으나 수만명의 시위자들이 도시에서 가두
행진을 벌였으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정부를 해산시키고 새 내각을 지명해도 계속되자 무바라크가 퇴진
하면서 권력을 이집트군에 넘겼는데 그후 선거로 이슬람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