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잡혀온 어린 소녀의 전도”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였습니다. 독일군의 폭격기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영국 런던의 상공에 나타나서 폭격을 퍼 부었습니다. 런던 시민들은 방공호 속에 들어가서 폭격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런던 시민들은 방공호 속에서 벌벌 떨며 자다가 깨며 밤을 지새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곳에 한 어린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아이는 잠자기 전 무릎을 꿇고 계속 쫑알쫑알 거리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더니 곧바로 쓰러져서는 쌔근쌔근 깊이 잠들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엄청난 폭격 속에서도 꼼짝도 하지 않고 평안히 잠을 잤습니다. 아침까지 푹 자고 깨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침작하면서도 평온한 모습을 보면서 놀라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애야 너는 무섭지도 않니? 우리는 무서워서 밤새 한숨도 못 잤는데 너는 어떻게 그리도 평안히 잘 수 있니?“ 그러자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무서워요?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늘 깨어 계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이 깨어서 나를 지켜 주시는데 하나님과 나, 모두가 깨어 있을 필요가 무엇이겠어요?"라고 했습니다. 방공호에 있던 사람들은 이 아이의 믿음을 통해 큰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해리엇 비쳐 스토우라는 미국의 저명한 여성작가는 아버지가 목사였는데 그녀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한창 어머니 품에서 사랑받고 자라야 할 때 어머니와 사별의 슬픔을 당했으니 그 아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 아이가 자라면서 노예로 태어난 자녀가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어릴 때 느꼈던 그 아픔과 슬픔을 흑인 노예 아이들이 수없이 당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가슴이 메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리라’는 말씀이 그녀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이 문제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소설을 씁니다. 그 소설이 바로 링컨 대통령의 마음도 움직인, 그래서 남북전쟁을 결심하게 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미국의 역사가 바뀌는 큰 일에 한 연약한 여인을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어릴 때 당한 아픔, 슬픔을 통해서도 일하셨습니다. 우리의 강점을 통해서만 아니라 약점도, 아픔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내 아픔을 속히 잊길 바라고 치유되길 바라고 내 환경이 속히 역전되기를 바라겠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아픔을, 환경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녀를 노예해방에 쓰시기 위해 일찍 어머니를 여의게 하셨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 되고, 어머니를 잃은 그런 일을 겪었지만 아픔을 극복하게 하시고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시는 분, 약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님이 택하신 자녀인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나님이 떠난 것이 아닙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하나님도 모르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환경을 초월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이 환경을 통해 나를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시는 것이라고 믿고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것이냐?’ 는 생각이 잠시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의심과 불평과 원망을 넘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전3:11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지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나아만 장군은 아람군대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아람은 지금 한창 내전을 겪고 있는 시리아입니다. 그에게 한센병이라고 하는 질병이 있었습니다. 이후에 그가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서 선지자의 명령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하고 질병을 치료받았습니다. 그러자 어린아이의 살같이 깨끗하게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이 모두 사실이지만 특히 본문의 사실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예수님이 이 사건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눅4장에서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도 믿지 않자 선지자 엘리사 때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때도 위대한 선지자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지금 너희들처럼 믿고 나오지 않았는데 오히려 이방인 나아만은 그 소식을 듣고 낫기 위해 찾아갔다. 그리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자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너희에게 왔지만 인정하지 못하여 배척하는 고향사람들을 책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나아만 같은 이가 고침 받을 수 있고 은혜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놀라운 기적이 한 어린 소녀에게서 출발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주연과 조연을 따지자면 당연히 엘리사와 나아만이 주연입니다. 그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이 일어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이가 잡혀온 어린 계집종과 그리고 화가 나서 돌아가자고 한 나아만 장군을 돌려세운 그의 종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요즘 드라마로 치면 대사 한 두 번 있는 지나가는 사람의 역할, 엑스트라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야말로 위대한 조연입니다. 주연을 빛나게 한 조연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잡혀온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는 이 소녀를 주목해보십시오. 이 소녀의 이런 전도의 힘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저는 이 소녀에 대해 생각하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소년 다니엘이나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들은 포로로 잡혀간 가운데서도, 노예로 팔려간 가운데서도 철저히 주님과 동행하는 모습이 먼저 보입니다. 보통사람들 같으면 자신의 꿈이 다 무너지고 자기 동족을 죽이고 자기 고국과 고향과 가족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든 이런 상황에서 슬픔에 북받쳐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원수 갚을 생각으로,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목말라 살아갈 터인데, 이들의 모습에서는, 그리고 이 소녀의 모습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아주 평안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너무도 엄청난 상황이라 아예 체념해서 그럴까요? 아니면 힘없는 고국과 동족을 버리고 혼자만 잘 살겠다는 마음에서 일까요? 제가 볼 때는 그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조차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있기 때문이고 이곳에서도 주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자리에서도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떠하십니까? 마치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이나, “악한 일을 도모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비록 형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노예생활을 하였지만 요셉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것은 형들이 아니라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장차 될 일을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나를 먼저 보내심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이 소녀도 나를 붙잡아 온 이는 이 나아만 장군이겠지만 나를 잠시 이곳에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있지 않았을까요? 이럴 때 소망이 보이고 할 일이 보입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결정한 일은 때때로 주님의 뜻을 거스리므로 영광이 아니라 고난을 자처할 수도 있지만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그야말로 나의 의사와 의지에 상관없이 떠밀려 결정되는 일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상황을 주도해나가시는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슬픔을 뛰어넘는 소망이 보입니다. 아픔을 이기는 꿈과 비전이 보입니다. 고난 뒤에 있는 영광이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도 해야 할 일,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럴 때 원수를 원수로 갚게 하지 않고 원수에게도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주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동행할 때 이런 힘, 원동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전도의 힘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녀가 가진 확신입니다. 소녀는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 병을 고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고침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감히 포로로 잡혀 와서 여종이 된 신분으로 아람에서 왕 다음으로 존귀한 신분인 나아만 장군을 조롱했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소녀는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아만이 사마리아의 그 선지자를 만나러 갔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위대한 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놀라운 믿음입니다. 이 소녀의 믿음, 확신이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만약에 나아만 장군이 물에 들어가는 순종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왔다면 이 소녀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아만 장군의 부하들이 말고삐를 놓치 않고 장군을 말린 것이 이 소녀의 확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처럼 우리도 확신하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소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주인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로로 잡혀 와서 여종이 된 신분으로서 감히 여주인에게 그렇게 제안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여주인은 그 소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만일 이 소녀가 여주인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함께 한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르나 점점 신뢰를 쌓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소녀의 제안이 여주인을 거쳐서 나아만에게, 그리고 나아만을 거쳐서 아람 왕에게까지 보고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왕의 신임을 받고 있는 만큼이나 이 소녀는 주인에게 깊은 신임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포로가 되어서 이방인의 집에서 종노릇 하면서도 그런 신임을 받았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전도의 첫째 조건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이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더라고 한 것처럼, 그리하여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더하여지더라고 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먼저 신임 받는 자가 될 때 전도의 문도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는 예수님 나도 믿고 싶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 나도 다니고 싶다’고 해야 하는데, 그 반대라면 어찌 전도가 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이런 어린 여종을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소녀의 믿음에서 출발된 일에 결국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셨습니다. 소녀의 확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책임져주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한 어린아이의 헌신을 통해 일어났듯이 나아만 장군의 치료도 한 어린 소녀를 통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통해서도, 작은 순종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믿고 순종하여 걸음을 내딛으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믿는 자와 함께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나가서 전하고 씨를 뿌리면 열매 맺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내가 선 자리가 바로 주님이 보내신 땅 끝임을 믿고 그 자리가 전도의 자리로 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