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작시작곡한 조운파 선생님을 만나다.
사람은 수많은 만남과 인연 속에서 살아간다.
부모형제및 친구들, 사회 동료 같은 사람과의 만남, 또는 책을 통해 선인(先人)들과의 만남,
또 수많은 예술 작품을 통해 예술가들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그 만남과 인연으로 인하여 희노애락을 맛보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영혼의 완성을 지향해간다고 할까요?
지난 8월초 '친구이야기', '달빛'의 작사작곡자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작곡가 최종혁님과 통화를 하기도 하고 또 조운파 작곡가님과 직접 통화를 하여
원저작자를 정확히 확인하는 기회를 갖게 되어 개인적으로 기쁨과 영광의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언급하고자 하는 것 한가지..
사이버상에 달빛 작시자로 잘못 알려진 고 조흔파님의 부인이신 수필가 정명숙 선생님과
만남은 이메일과 전화통화인 간접적인 만남이지만 모든 사실을 접하고,
늦게서야 진실을 알게 되신 그 분의 마음을 짐작하면 한편으로 내 스스로도 마음 아픕니다
잘못 알려진 사실을 가지고 관련 수필을 두편이나 문학지에 발표하셨으니
자칫 '달빛'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큰 혼동을 가져올 사태였던 것이어서
자세한 전후사정과 사실을 알려드렸지만 고인이신 부군 조흔파님과 깊은 사랑과 정을 지금도 간직하면서
살고 계신 노수필가의 마음에 아픔을 안겨드리지나 않았나하는 생각을 떨칠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정중히 말씀드렸고 통화에서 본인도 이렇게 알려준데 대해 감사히 생각하신다면서
해명의 기회를 갖겠다는 말씀을 덧붙여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2008년 4월 고교 홈피에 올린 이안삼 선생님의 곡에 어느 외부인이 댓글로 이안삼 카페를 소개하여
이안삼선생님과 카페를 알게되고 이어 아리수사랑 , 청산, 아트힐 등
몇 번 연주회에 참석하면서 얼굴을 익히게 되고 카페에 가입하여 인사를 나누게되는
소중한 만남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지 않나 싶다. 재밌는 것은 정애련 샘 어머님을 자주 뵙지는 않았지만
84년부터 알고 있었는데 정애련 샘 창작발표회에서 오셔서 딸이라고 하니 깜짝 놀라고 반갑기도 하고....
하루의 시작이 이메일을 확인하면서인데
카페에서 전해온 음악메일에 대해 반갑고 그 수고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지요
물론 전부터 가곡사랑으로부터 이메일을 수신하고 있어서 자주 가곡을 접하기는 했지만
공연 현장에서 직접 만난 작곡가 및 성악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기쁨과 즐거움이란
누구나 같은 생각이라 믿습니다.
또한 인터넷에서 멋지고 아름다운 곡이라도 발견하면 소스를 따로 저장해두기도 하고
html로 편집해 초등카페, 고교및 ROTC동기 홈피에 올려 같이 공유하기도 합니다.
8월초로 기억하는데 우리 아리수사랑 카페에서 '친구이야기'를 배달받고 즐거운 기분으로 감상.
금호생명에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하던 고교 후배가 모임에서 몇번 불러 알고 있었지만
까맣게 잊고 있던 곡이라 반가운 음악메일이었다. 바로 고교홈피에 올리고 검색을 해보니
작사자가 다르게 되어있는 것들이 있어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지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양윤정작사, 최종혁작곡으로 확인한 것은 이미 말씀드린대로입니다.
또 '달빛'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조운파 작시작곡이란 사실 역시
이미 말씀드린바 있지요. (저작권협회에도 등록된 사실도 확인)
서론이 넘 길었나 봅니다.
처음 통화 때 기회 만들어 한번 만나자 하셔서 반가운 해후를 기대하는데
종교활동과 최근 작품활동의 재개로 워낙 바쁘셔서 일정을 잡기 어려웠는데
근 두달만인 지난 7일 영광스런 만남을 갖고 많은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약속장소인 영등포 전철역에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니 전화벨,,
제자인 가수 허윤정( 위 사진 대표곡 관계)이 안내하러 같이 나와 타임스 스퀘어에서
맛있는 우거지갈비탕을 점심으로 들면서 그간의 소회와 고마움,
인터넷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것과
본인의 작품들에 대한 말씀을 따듯하고 정감넘치게 들려주신다..
점심을 들면서 하신 말씀들이 거의 같은 내용들로 잘 정리된 기사가 있어
길지만 원문을 인용해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노래 詩人 조운파
대중가요를 문학으로 끌어올린 예술가
노래를 통해 대중 정서를 다듬는 언어의 장인 "
‘아이야 인생을 알려거든 / 무심히 흘러가는 강을 보라 /
사랑이 무어냐고 철없이 묻지말고 / 피어난 한떨기 꽃을 보라 /
저 떠오르는 아침해와도 같은 아이야 / 저 바람부는 세상을 어찌 네가 알까 /
슬프고 가난한 사람들 만나거든 / 아이야 네가슴 열어주렴’ (바람부는 세상 / 1988 조운파 작사·작곡)
이 노랫말은 1982년 MBC에서 조운파 선생에게 최우수 작사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인생의 질곡을 겪은 어른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사랑과 인생의 노래이다.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깊은 곳에 고이고
막으면 넘치고 굽이치고 돌아가며 흐르는 강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고
사랑의 정의에 있어서는 한 줌의 흙과 바람과 햇빛과 비와 꽃가루를 옮기는
벌 나비의 수고와 희생이 따른다는 것.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기심에 빠지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을 쓰라는 가르침과 당부의 노래이다.
'대중음악을 예술로 승화시킨 선구자’,
'한국적 서정과 정한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곡가’,
'가요계에 가장 존경받는 노래시인’.
이 모든 말은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의 작품과 삶을 말할 때 쓰는 말들이다.
1943년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농상가정에서 태어난 조운파는 한국인의 뼛속 깊이
내재하고 있는 한의 정서를 끄집어내어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으며
한국 대중음악계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꼽히고 있다.
1970년대 청년 조운파는 문정동호회, 영시문학회, 동률문학회 등 순수문학동인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재능의 원석을 연마하던 문학청년이었다.
얼음처럼 날카롭고 예민했던 감수성의 청년 조운파는 양면적인 시풍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쪽은 비판적이고 냉소적으로 아포리즘에 가까웠고,
다른 쪽은 시리도록 서정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성찰이 끝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작품을 읽게 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는 시화전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소극적인 문학 활동을 했었다.
그 당시 대중음악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동인 중 시인 박건호 씨가 대중음악에 관여하는 것을 알고
심히 책망하고 충고할 만큼 대중음악에 대해 도외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문화를 담당하는 기관이나 일부 지식인 속에서는
한국 대중음악이 넋두리나 푸념, 피해의식 등이 걸러지지 않고 대중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하여 대중음악의 질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사회의 흐름에 따라서 시인들과 작가들,
지식인들이 대중가요 가사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런 일에 동감했던
조운파도 먼저 시작한 박건호 시인을 이해하고 대중가요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서정(抒情)을 통해 시심(詩心)을 담고 사랑을 느끼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접어 다져온 이행복 /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당시 이 곡은 폭발적 인기를 얻어 하수영이란 무명가수를 그해 10대 가수에 진입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1977년 반야월 작사상과 1980년 MBC 가요반세기 노랫말 최고 대상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있는 시어머니를 헌신적으로 돌보고
남편과 가정을 위해서 손에 물 마를 날 없는 수고하고 애쓰던 모습을 생각하며 만든
이 노랫말은 아내이자 어머니이고 우리 누이인 이 땅의 수고하고 애쓴 여인들에게 그가 바친 고백이었다.
당시 여인들은 수고하고 애쓴 만큼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안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는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떠다 주는 물만 먹었던 남편들이 일찍 귀가하고 설거지를 돕고
집안청소를 하는 등 소리 없는 가정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김태정의 <백지로 보낸 편지>, 김동아의 <나를 두고 가려무나>,
허영란의 <날개>,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주병선의 <칠갑산>,
김명애의 <도로남>, 태진아의 <옥경이>, 남진의 <빈 잔>, 패티김의 <사랑은 생명의 불꽃>
김성환의 <인생>, 테너 박인수 교수의 <사랑의 테마>, <달빛> 등
사랑과 인생을 주제로 한 따듯하고 정감이 넘치는 노래들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엿볼 수 있다
말이 다한 곳에 詩가 있고 詩가 다한 곳에 노래가 있다
시어 하나하나에 비유와 상징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는 작품을 쓰던 조운파 선생에게
통속적이었던 대중음악의 가사를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많은 작곡가가 그의 초기 가사에 대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비위에 타협하거나 영합하기보다는 노래를 통해서 그 마음을 깨우기를 원했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 무슨 설움 그리 많아 /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 홀 어머니 두고 시집 가던 날 / 칠갑산 산마루에 /
울어주던 산새 소리가 / 어린 가슴 속을 태웠오’ (칠갑산)
느릿느릿 휘어 감기며 이어가는 限 서린 가락에는 비탈진 밭을 일구며
억척스레 살아가는 화전민의 애환과 민족의 생명력이 담겨 있다.
그냥 읽어도 아름다운 이 가사는 ‘콩밭 매는 아낙네’, ‘베적삼’ 등이 상징하는
한국인의 소박하고 끈질긴 삶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가사의 향기가 세월이 지날수록 짙어진다.
그리고 이 곡은 동양음계인 5음계에 서양음계인 7음계를 접합하여 도합 12 음계로 작곡되므로
진부함을 피하고 유장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조운파 선생의 노래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오랫동안 사랑받는 비결인지도 모르겠다.
“대중음악은 가장 원초적인 음악이라 볼 수 있습니다. 넋두리와 푸념이 함께 있고
정과 한이 다듬어지지 않은 채 순수하고 투박하게 표현되는 예술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요즘 일부 막장가요들의 행태를 보면서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중가요는 대중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문화형태이기 때문에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 일부 표피적이고 감각적이고 승화되지 못한 언어들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저질가요들에 대해도 우려가 크다.
그리고 조운파는 1985년 5월 시인 서정주, 이태극, 작사작곡가 길옥윤 씨 등과 함께
‘내 고장 노래 만들기 운동본부’를 설립하여 자기고장에 대한 애향심을 고취시키고
향토음악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청소년을 위한 내 고장 노래 만들기 운동’을 펼치며
아름다운 노래들을 보급하고 있다.
<종로의 아침>, <강남 아이들>, <복사꽃 아가씨를 잊지 마세요>, <대구자랑> 등
85년부터 현재까지 30여 년간 우리나라 삼백여 행정구역을 대상으로
도(道). 시(市). 군(郡), 구(區) 등 지역 단위별로 정해놓고 작사·작곡가, 시인 가수 등
연인원 250여 명이 참여하여 200여 곡을 만들어 보급했고,
이는 자기고장에 대한 긍지를 높이고 애향심을 고취하며, 나라 사랑으로, 민족음악으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될 것이다.
“남녀노소가 다 함께 이해하고 공감하며 슬프거나
기쁘거나 어둡거나 밝거나 잔잔한 여운이 오래 남는 노래,
말하는 것 같지만 말이 아니고, 시인 것 같지만 시가 아니며,
때로는 감추고 때로는 드러내며 음률을 품고 리듬을 간직한 노래.
그런 노래야말로 노래를 만드는 모든 사람의 희망일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2)
마흔이란 늦은 나이에 하나님을 영접한 그는 이제 성경 말씀을
그의 삶의 지혜자요, 인도자로 삼고 살아간다. 그것은 곧 그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해주고 가야 할 길을 명시해 주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요즘 활동에 대해서는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하나님 말씀에 따라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내 삶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고
영생을 얻는 기쁜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신앙인으로서의 견고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출처 주간 소비자연합 타임스 2010.6.10)
몇가지 자료 책자와 진즉 써놓으신 작품을 싣은 '백강문학'지를 보여주시면서
거듭 고마움을 표하시고 다음 만남엔 종교에 대한 말씀을 나눠보자 하시며
사무실도 한번 들르고 가수 남진씨도 소개해주시겠답니다.
우리병원 한방실에서 만든 쌍화탕 1재 선물로 드리고
유익하고 아름다운 만남의 시간 만들고 왔습니다.
끝으로 악보를 유심히 보신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한번 잘못 알려진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다보니
2절 노랫말 " 서둘러 오시는 길 아득히 멀거들랑"중
'아득히'를 '하-그리'로 바로잡아 정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