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 김경집, 한국 사회의 미래와 그 대안을 말하다
왜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를 논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 제1조에서 보장하고 있듯, 대한민국에는 더 이상 왕과 신하가 존재하지 않고 어느 한 사람에게 불복종한다고 해서 혹은 듣기 거슬리는 말을 한다고 해서 목숨이 위태로운 사회도 아니다. 1987년 이후 대한민국에는 본격적인 정치적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 수평사회를 만드는 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28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측면에서도 크게 일그러지고 있다. 청년실업과 노동개혁, 99:1의 극단적 양극화, 사교육으로 인한 교육의 불평등, 학교폭력과 집단따돌림, 세대 갈등, 노년의 빈곤 등의 문제에서 보듯, 현재 한국 사회는 크고 작은 집단에 눌려 개인을 잃어버리고 지배계급을 위해 작동하는, 수평과 균형을 잃어버린 고장난 저울과도 같다.
『고장난 저울』은 강연과 방송, 지역사회 문화 운동 등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사회에 대해 꾸준히 관심 갖고 참여하는 행동하는 인문학자 김경집의 신작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그의 책과 강연은 동세대와 미래세대를 위해 작은 밑돌이 되기를 희망하는 그의 작지만 소중한 실천으로, 이번 책 역시 국민적 인식이 시급한 사회적 의제들을 철저히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고 현실의 삶을 담아 제시하고 있다.
이번 책에서 그는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앞으로 닥칠 ‘피할 수 없는 미래 의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제 다시 민주주의와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민주주의는 이념 논쟁에서 비롯된 정치적 이슈로만 다뤄져 왔고, 다루어졌다 하더라도 ‘경제 민주주의’와 같이 정치인들의 선거 공약 속에 잠들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제 민주주의는 우리가 맞이할 ‘현실적 삶의 미래’에 꼭 필요한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틀 위에서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 특히 경제·교육·세대 분야의 문제에 있어서 수평사회라는 패러다임을 반드시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수평사회가 시급한 ‘경제 교육 세대’의 문제
현실적이며 심각하지 않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대안 제시
우리 사회에는 수평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부분이 무수히 많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그것을 표면적으로 느낄 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의 수직적 모습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한 현실이다. 이 책에서는 수평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많은 부분들 중 우리 미래와 직결된 세 분야를 선택해 미래 의제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경제·교육·세대다.
제1장 ‘경제’에서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수직 명령체계로 인한 성장동력의 상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삼성이 안드로이드를 놓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사회의 수직적 위계에서 바라보고 있다. 또한 부의 쏠림현상이 낳은 사회적 문제들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짚어봄으로써 문제의 본질에 대해 재인식하게 해준다. 특히 IMF 이후 거의 모든 조직이 따르는 ‘팀제’에 대한 인식이 놀랍게도 결여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팀제의 핵심은 바로 수평성에 있으며, 따라서 수평사회를 이루지 못한 팀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제2장 ‘교육’에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소수를 위한 교육현실과 그것이 낳을 미래의 또 다른 불균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수를 위한 특혜가 돼버린 수시입학에서부터 ‘교육이 진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 사학법 파동이 남긴 기득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가장 수평사회여야 할 교육계의 민낯을 드러냄으로써 수평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음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25년간 교육계에 몸담고 있었기에 교육계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한층 더 신랄하고 깊은 우려를 표한다.
마지막 제3장 ‘세대’에서는 수평사회를 온전히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최초의 수평사회의 기초적 교육을 받고 실제로 그런 사회를 위해 싸웠던 새로운 실버 ‘세시봉’ 세대의 역할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굳은 사고가 아닌 유연한 미래지향적 사고를 지님으로써, 젊은 세대를 위해 미래에 대한 진지하고 진보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저자는 바라고 있다.
어려운 용어나 이론 대신,
삶의 모습을 생생히 품고 실천적 해법을 제시하는 사회과학서
고정화되고 모순된 틀을 깨고자 하는 저자 김경집의 짜릿한 글과 강연은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는 대중에 맞춰져 있다. 사회라는 거대한 틀을 이야기하지만 ‘개인의 현실적 삶’과 괴리되지 않는다. 어려운 용어나 이론, 남의 일같이 들리는 외국 사례로 무장한 글 대신, 당장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고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문제의 껍데기를 벗기고 본질을 파악하는 일에 천착을 거듭한다. 불특정 다수라는 대중을 움직이기 위해 그의 시선은 언제나 청소년·엄마·노년층·지역사회와 같은 ‘작은 대중’을 향해 있으며, 책이라는 깊이가 있는 소품으로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번 책에서도 그의 이러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먹방(먹는 방송)으로 가득찬 TV프로그램에서 3포세대의 절망을 만나는가 하면, 세시봉 세대를 겨냥한 추석명절 TV프로그램에서 새로운 실버의 탄생을 발견한다. 100세 시대의 인생을 10대 때 결정짓게 하는 무모한 현실에서 ‘교육은 미래를 읽는 진보’여야 하는 이유를 말하며, 석관동 두산아파트의 경비원 임금인상 사례를 통해 노동개혁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보게 한다.
우리 사회 흐름의 본모습을 깨닫게 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발전적 변화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샘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책속으로
여기 저울이 있다. 저울은 무게를 재고 값을 정한다. 저울은 판단과 측정의 기준이고 객관성과 보편성의 잣대가 된다. 저울은 수평을 유지했을 때 제 기능과 역할을 완수한다. 그러나 지 금 우리 앞의 저울은 기울어져 있고 추는 저울을 쥐고 있는 사람 마음대로 정한다. 그런 저울 은 현재를 망칠 뿐 아니라 미래까지 깡그리 망쳐버린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고 산다. 지금은 힘들어도 미래의 삶은 보다 나을 것이라는, 나아야 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산다. 저울의 수평성은 미래사회가 지향해야 할 수평사회의 기준과 밑돌이 된다. 수평사회는 밝은 미래를 열어줄 결정적 열쇠다. 지금 우리는 고장난 저울을 버리고 새로운 저울을 마련해야 한다. 올바른 저울이 필요하다. (중략) 나는 이 책에서 우리가 당면한 미래 의제를 세 가지로 뽑았다. 경제·교육·세대가 바로 그것으로, 망가진 저울을 여기부터 고쳐야 한다. 그렇다면 이 미래의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민주주의적 수평성을 이루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왜 99퍼센트의 못 가진 사람들이 1퍼센트를 위한 정당에 표를 줄까?” 문제는 저소득층에게 복지 혜택을 ‘거저 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품는 건 부자들인데, 왜 가난한 사람들까지 거기에 편승하는가 하는 물음이 정신의학자이자 정신과 교수인 뉴욕대 제임스 길리건의 의문이다. 그에 따르면 공화당은 중상류층과 중하류층이 최하류층을 미워하게 만드는 ‘분할 정복’ 전략을 발판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계급배반형 투표’가 성행하는 것은 길리건의 분석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0오히려 베블렌의 지적과 비판이 우리에게 딱 적절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의 유한계급론에 따르면, 부자들이 굳이 기존의 제도와 생활양식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 보수적인 것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적이 되는 까닭은 가난한 하위 소득계층은 현제도와 생활양식 속에서 당장의 일상과 생활에 급급해 변화와 대안을 생각할 틈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빨리 적응할 수 있는 기존의 방식에 순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엉뚱하게 보수적이고, 부자의 ‘꿈’을 안기는 이미지에 주저하지 않고 표를 던진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장노년층, 시골의 농부들과 어부들, 쪼들린 살림살이에 전전긍긍하는 대부분의 가정주부, 무엇보다 가장 절망을 체감하는 청년들까지 무기력해지고 보수화되는(건강한 의미의 보수가 아니라 체념과 순응의 보수) 현실을 볼 때, 우리 사회가 불의와 탐욕, 민주주의의 퇴행과 비인격화의 자행을 그저 빤히 바라만 보면서 내 일만 아니면 된다는 자포자기의 상황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적응마저도 실패한 젊은이들이 지금도 매일 7명씩 삶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야만의 상태가 지속되게 내버려둔다면 결국 우리가 스스로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왜 보수가 집권하면 자살률이 증가할까] 중에서
수시입학제도는 입시정보의 접근이 용이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재력과 인력이 있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아예 이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앞에서 언급한 대도시의 좋은 학군들에서 거의 독점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취지와, 암기 위주의 주입식 학습을 탈피하여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학습을 유도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소수의 상류계층에 특혜를 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15%까지만 수시입학으로 뽑던 것이 이명박정부 들어서 50%에 육박했고 지금은 그 수치조차 무색할 지경으로 별별 명목의 수시입학제도가 널려 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시행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소수의 특권계층에 거의 일방적으로 혜택이 돌아가는 이러한 방식에 대해 이제는 재고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유리한 입장에 있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주는 수시입학제도는 교육의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실패작이다. 좋은 취지와 내용에서 시작되었고 그런 입시로 뽑은 학생들의 자질이 우수하다 하더라도, 다수의 약자들에게서 입학시험 기회의 절반을 앗아가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교육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