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8:1-12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인과 응보라는 말은 일반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고 있고, 불교에서는 전유물처럼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이 말에는 상당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가르쳤는데 이것 역시 이 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또 <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는 우리 속담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점에서 한 가지 우리가 크게 각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수단과 방법이야 어떠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앞세우면서, 불법을 하는 일을 더러 봅니다. 하지만 이런 일에도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냉엄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깊이 통찰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바람직한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말씀의 은혜를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1.미약하더라도 시작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본문 7절에 보면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을 거창하게 시작하고 거창하게 벌이려는 욕구와 야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의 입신과 명예에 관련되는 일이라면 이러한 욕구와 야망은 더욱 크게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이렇듯 세속적인 입장에서 시작하고 벌인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결과에 못지 않게 그 동기와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하는 말씀은 깊이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에 하나님의 일은 어떤 것이나 무조건 미약하게 시작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은 것은 아닙니다. 앞에 언급된 구절을 유의하여 읽어야 바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이라는 말씀이 5,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바른 태도만 가지고 일을 시작하면 그것이 아무리 미약하게 보이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그 시작이 얼마나 거창하며 화려하냐 하는 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 시작이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계획을 세울 때에 처음부터 거대한 계획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추진이 불가능하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마태복음 18:2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 시작이 아무리 미약하더라도 바른 신앙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2.시작이 바르면 결과는 창대하게 되어집니다
시작이 미약한데 어떻게 결과가 창대하게 되어진단 말입니까? 대개의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결과가 창대하려면 시작도 거창해야 한다는 세속적 사고 방식에 깊이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많은 자본을 들여야만 사업이 크게 융성할 수 있다는 상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뜻과 일치하는 진실한 일만을 크게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시작한 일은 그것이 아무리 미약해도 그 결과는 창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려 주신 겨자씨 비유는 지극히 작은 것이 자란 후에는 어떤 것보다 크게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포드 대학교 안에서 동생 챨스 웨슬레등 몇 사람과 더불어 성경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모임은 그 규모가 극히 미미한 채 수년동안 계속되었고 그나마도 중간에서 한 차례 중단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미미한 모임이 터가 되어 오늘날 전세계에 뻗혀 감리교라는 교단을 이룩하였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이 임종 직전에 했다는 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 나는 칼로써 전 유럽을 제패해 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는데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는 오늘날 온 세상을 제패하고 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또한 과정도 중요합니다.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어느 마을에 한 게으름뱅이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나 게을렀던지 누가 음식을 차려 주면 먹고 차려 주는 사람이 없으면 굶어 죽는 쪽을 선택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일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 싫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루 종일 굶은지라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상태로 가다가는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만 할까봐 겁이 난 나머지 그냥 죽은 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일을 하느니 차라리 땅에 평안히 묻히고 말지.> 중얼거렸습니다.
몸이 바짝 야윈 채 침대에 누어 있는 그를 발견한 이웃집 사람은 그가 죽을 줄로만 생각하고 목사님을 불러 장례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게으름뱅이의 시체를 메고 걸었는데 그를 본 한 노파가 동정어린 눈초리로 이렇게 말했다.
< 쯧쯧, 불쌍도 하지! 배가 고파 죽은 것이 분명해!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감자라도 갖다 주는건데.....>
관 속에 누어 있던 게으름뱅이는 이 말을 듣자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키더니 노파에게 물었다. < 찐 감잔가요? > < 아...아니요. 안 찐 감자요.>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일어나자 노파는 너무 놀란 나머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게으름뱅이는 다시 말했습니다. < 에이, 그렇다면 장례곡을 계속 읊으세요.> 게으름뱅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관 속에 눕더니 눈을 꼭 감았다. 그는 감자를 찌는 수고를 하느니 차라리 산 채 땅에 묻히는 쪽을 택했던 것입니다. --웃는 이야기입니다만은 과연 이런 자의 길이 형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 시작이 아무리 미약해도 결과는 창대하게 됩니다. 그 일을 이룩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기 때문입니다.(잠16:9) 이 말씀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 8:11-22
옛 교훈을 통한 회개
시편 1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최후 행복과 악인의 최종적 불행을 철저히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빌닷은 과거 모든 지혜의 요체로 불리웠던 '두 길'에 대한 전통적인 교훈을 들어서 욥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빌닷은 자신의 원리 원칙적인 견해의 근거를 옛 교훈에서 찾아서 욥이 파멸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한 순전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합니다. 즉 옛 시대의 교훈을 배울 것을 종용함과 더불어 그 교훈을 따를 것을 충고하고 그것에 의거해서 회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생각해 보십시다.
##### 1.옛 교훈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노아나 아브라함 시대에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에 이미 인간들의 다양한 행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규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욥과 같이 짧고 단순한 경험에 의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바스처럼 개인적인 생각으로 진리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수 세대에 걸쳐 내려온 선조들의 가르침을 의지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옛 법칙에 따라 의인이 형통하며 악인은 잠시 번영하더라도 결국 근절되어 버린다고 말합니다
##### 2.빌닷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사용한다
1)'왕골과 갈대'의 비유(11-13절)
진펄과 물 가운데서 자라나는 왕골이나 갈대은 다른 풀보다 빨리 자라는 속성이 있습니다. 사곡은 원어로 <하네프>로서 '타락하다' '불경하다'는 뜻으로서 심히 타락하여 하나님께 경건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곡 자'는 누구보다도 빨리 세상적인 형통함을 누리는 것 같지만 헛된 소망에 근거를 두는 것이기에 언젠가는 시들어 버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13절)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혜택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던 할 때 그들은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어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길은 푸르른 왕골과 갈대가 아직 벨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 마르는 것처럼 잠시 형통해 보이지만 참된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 대신에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거미줄같이 끊어질 뿐입니다.
오늘 날 성도들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파숫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는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의 주관자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거미줄'의 비유(14-15절)
거미는 자기 집을 매우 힘들여서 그리고 많은 시간을 소요하여 정교하게 짓습니다. 그러나 그 줄은 매우 약하기 때문에 외부의 조그마한 충격에도 쉽게 허물어져 버립니다. 사악한 자들의 결국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악(邪惡)한 자의 소망은 자기 공상과 자만에서 나온 조작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스스로 자신의 눈을 속이고 헛된 신념으로 이 세상을 속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책략과 공력에 의해 자기 행사를 도모하지만 조만간에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앞에 불타버릴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때 그들이 소유했던 소장품은 전혀 지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그들의 성과는 외견상으로는 화려하지만 의지하는 대상이 생명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3)무성하고 뿌리 깊게 박은 나무의 비유(16-19절)
이는 마치 여름철에 온 뜰을 뒤덮는 무성한 잡초처럼 왕성한 성장을 합니다. 생명력이 강한 식물은 그 뿌리를 단단하 지층에 둡니다. 대부분 암석과 자갈로 뒤덮힌 팔레스팅 지방에서 식물이 암석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악인은 생명력이 끈질깁니다. 집요하게 집착하는 악인의 심성은 풀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간첩의 생명력, 20일 이상을 버티고 있음.
이러한 악인이 이 세상에서 갑자기 크게 번성하고 형통할 때를 봅니다. 그러나 그 번성은 일시적인 것이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이 믿었던 것으로 부터 버림을 당하는 비참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을 믿고 감사하는 삶을 살자.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