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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사랑
지은이 최 돈 호 ( paris75012 )
해가 질 무렵 경성의 종로 장처는 더욱 사람들로 붐볐다. 예전 같으면 생각지도 못 할일 이지만, 이젠 제법 전깃불이 들어와 꽤 늦은 시간까지도 사람들이 장을 보고, 편하게 무엇인가 노점에서 사먹기도 하고, 주막에서 술도 마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채는 조선인으로서 총독부에 근무하는 법학도 출신 김 선생님을 모시는 여자 제자이자 비서이다. 시대가 바뀌기 전 김 선생님의 집안은 원래 대궐에서 꽤 놓은 벼슬을 하는 인물들이 많았고, 그 중 절반은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자결하거나 만주로 떠났고, 그 중 절반은 친일파로서 국내에 남아 온갖 기득권을 다 누리는 판세였다. 영채는 대한제국의 패망도 정치도 모르는 순진한 처녀로서 개화파 집안의 여식답게 신식교육과 신사상을 받아들여 신여성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영등포로 떠나는 마지막 전차가 종소리를 울리며 떠날 때 그 옆으로 난 신작로를 따라 검은색 승용차는 시끄럽고 불빛으로 반짝이는 종로 장터를 뒤로한 채 영채와 김 선생님을 태우고 창경궁을 지나 명륜동으로 향하였다. 김 선생님은 옛 성균관 근처 찻집 앞에 차를 세우라고 운전사에게 말하더니, 영채를 데리고 조용한 찻집 안으로 들어갔다. 김 선생님은 영채를 많이 믿었기에, 이런 식으로는 세상을 살 수 없노라고 자기 심경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해서 총독부 금광관리소에 사직서를 내고, 밀항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상해에 머물다가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미국에서 만주에 흩어져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단체들에게 자금을 모집해주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포부도 밝혔다.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갔지만, 조선의 금광과 금괴에 관한 정보를 상당수 넘겨주는 조건으로 충분히 돈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찻집 마당에는 봄 개나리와 진달래가 금방 내리다 멈춘 가랑 빗물을 머금은 채로 전구 불빛에 향기어린 반짝임으로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한 줄기 찬바람이 열려진 창문 사이로 상큼하게 불어왔다. 영채는 김 선생님이 얼마 전 부인과 사별한 것을 알고 있었다. 오랜 폐질환으로 고생하다가 급기야 마지막으로 각혈을 심하게 하고 세상을 뜬 것 이었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양쪽 집안은 그대로 남이 되어버렸다. 김 선생님은 그대로 다시 독신으로 돌아왔고, 장안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미모의 소프라노 여가수에게 변심 당하자 조선을 떠나는 길을 택하게 된 것 같았다. 종로 단성사에서 그녀는 성대에 이상이 생긴 상태에서 무리하게 독창회를 개최하다가, 고음에서 대단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역시 친일파의 딸로서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배운 그녀의 최후는 비참했다. 각 신문사는 부르주아의 자살극, 성악이 판소리 보다 못하다는 이유를 증명한 공연 이라는 등의 표현을 써가며 비난의 칼날을 들이 댔다. 김 선생님은 단순히 위로의 자리를 마련하려 그녀의 분장실에 들어갔는데, 그녀와 일본 총독 데라우치의 아들과 입술을 포개 서로 껴안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조용히 발길을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그 뒤로 소월의 “못 잊어”라는 시를 혼자서 낭송하곤 하는 버릇이 생겼다. 다시 창밖에는 봄비가 주룩 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김 선생님은 영채 앞에서 중얼거리듯 그 시를 낭송하다가 담배 하나를 꺼내 피워 물었다. 영채는 오래전부터 김 선생님을 사모하여 왔다. 자유연애에 익숙하지 못하였던 그녀는 그토록 서양 소설에서 읽은 애틋한 남녀 간의 연애 이야기에 감명 받았던 적이 많았고, 그런 사랑을 꿈꾸어 왔다. 영채는 알 수 없는 사랑의 올가미에 역인채로 그날 밤 얼떨결에 김 선생님께 몸을 맡기게 되었다. 밤이 깊을수록 비는 더 세차게 쏟아졌고, 또한 순결한 진달래 꽃잎들도 소리 없이 떨어졌다.
그날 이후로 김 선생님은 경성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 사이에 영채는 불행하게도 헌병대장의 아들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정식 결혼은 아니었고, 그저 간단한 약혼식을 거치는 수준에서 첩으로 살게 되는 조건이었다. 그녀의 일본 남편은 의사이자 경성제대 교수로서 동경과 경성을 자주 오갔다. 교양 없는 사람은 아니었고, 영채를 성노리개로 생각하는 경우도 없었으나, 평소에 영채에게 무관심한 남편이었다. 영채는 짧지 않은 세월을 김 선생님만을 생각하며 살아갔다. 그녀는 이광수의 무정이라는 소설을 읽었으며, 김억 선생에 의해서 번역된 보들레르의 “교감”이라는 시를 읽고 감명 받았다. 그녀의 필력도 대단한 지라 여러 동인지에 단편 소설이며, 시들이 실리게 되었고, 많은 문필가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으며, 일본어로도 번역되어 동경의 문단에 까지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일본 남편의 이유 없는 반대로 집필을 멈추어야 했다. 나중에 영채가 남편에게 조용히 물어보자,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조선 여자는 남편에게 순종할 뿐이지, 글 같은 것은 쓸 필요가 없다는 것 이었다. 그런 남편도 나이어린 기생에게 홀려 영채와 이혼하게 되었다. 영채의 부친은 딸의 불행함을 아랑곳 하지 않았고, 같이 살아준 대가로 받은 여러 가지 혜택에 만족해하는 뻔뻔함을 보였다. 그의 부친은 자기 딸에게 위로의 뜻으로 집한 채를 주었거니와 풍족할 정도로 돈과 몸종을 대 주었다. 그녀에 관한 소문은 날대로 난지라 그 누구에게도 혼사가 들어 올 리가 만무하였다. 그런 불행한 세월을 보내던 와중에, 무료함을 달래려고 이화학교 동창생들과 단성사에 발레 공연을 보러갔다가 기절할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조선을 영영 떠나있는 줄로만 알았던 김 선생님이 버젓이 젊은 여성과 손목을 잡고 다정하게 맨 앞좌석에 앉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극장을 빠져나와 찻집에서 친구들의 위로를 받고 시간을 보내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종로 원서동의 집에 들어가자 어지간한 일로 방문한 적이 없는 부친과 모친이 영채를 기다리고 계셨다. 영채의 어머니는 자기 남편에게 순종적이라 할 말을 다 못하고 살아서 그렇지 딸을 생각하는 마음은 깊었었다. 어머니의 설득에 영채는 집한 칸과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것 이었다. 그 분들이 온 목적은 흔치 않게 혼사가 들어 왔으니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비록 상대 남자가 영채에 비하여 30년씩이나 차이가 나는 늙은 남자지만 재력이 대단하여 이번 기회에 시집가면 최소한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편하게 살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 이었다. 이번엔 어머니에게 까지 배신감을 느낀 영채는 부모님을 그 자리에서 바로 돌려보냈다. 그녀의 부모는 일말의 양심상 가책을 느꼈는지 영채의 완강한 태도에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대문 밖으로 나가셨다. 영채는 그날로 바로 사람을 시켜서 김 선생에 대한 소문을 캐내었다. 김 선생이 영채에게 한 말은 말 뿐이었고, 그는 철저하게 총독부의 개로서 조선의 금광 개발에 관하여 일제에 충성을 다하고 살았다고 한다. 사실 그가 경성을 떠난 것은 여러 해 동안 지방 금광들을 돌아다니며 현장에서 일을 도맡아서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승진하여 다시 경성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고, 다른 일본 여자와 정략결혼에 성공하여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상태였다고 하였다. 영채는 몸종을 시켜서 술을 찾았고, 청주를 한 병 다 들이킨 다음 온갖 감정을 다 실어 거실 한 구석에 놓여 진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한 곡 불렀다.
“ 그대는 차디 찬 의지의 날개로 한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사는
어여쁜 꽃이 아닐까 ...“
영채는 첫 사랑의 꿈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는 이미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친의 노력과 주선으로 그녀의 모교에 교편을 잡게 되었고, 상당한 무게로 짓누르던 심심함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옛 동인지의 문필가들과 여러 예술인들의 권유로 다시 창작과 집필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지난날 첫 등단 때처럼 많은 관심과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1926년을 얼마 안 남긴 12월 어느 날에 종로에서 꽤 이름난 한식집에서 예술인들과 비평가, 신문기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총독부는 그녀가 참석하는 모임이 불순하다고 판단하지 않았기에 전적으로 막지는 안았지만, 일부 참석 인원에 대해서는 요시찰 인물로 분류해 놓고 감시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 중에 한명이 곽 노명이라는 젊은 화가였는데, 법대 출신으로 그림을 그리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일제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그의 괴팍한 예술 성향과 행동 때문이었다. 그의 그림은 여인의 파격적인 나체화가 대부분이었고, 유림들의 항의와 총독부에 대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명성만 더 높아가는 형편이었다. 심지어는 경성에 머무는 유럽인들에게도 그의 그림이 알려지면서 호평을 받게 되어 일본 고위 관료들은 곽 노명의 그림을 싸게 사서 고가의 미술 경매시장에 내다 파는 영악함을 보였다. 곽 선생은 일제의 비호를 받는 친일 작가가 되었으나, 그의 행적은 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곤 하였다. 곽은 술이 잔뜩 취해서는 종로경찰서 담벼락 앞에다 오줌을 갈기고는 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한 쪽 손에 지폐를 쥐고 있었다. 순사가 그를 만류하며 “선생님, 이제 그만 하시죠. 제발 이러지 마시고 어서 집으로 돌아기시오”라고 하면, 곽은 소리치며 이렇게 말하였다. “야, 이놈들아! 내가 누군지 알아? 조선 최고의 화가 곽 노명이다! 날 즉결에 넘기려면 넘겨봐! 여기 벌금 준비해 놓았으니까, 잡아가려면 잡아가라고!”라고 고함치는 것 이었다.
그런 곽 화백에게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것은 당연하였고, 겉은 친일인 척하면서 예술을 빙자해 은근히 반일 감정을 분출하는 그의 행동을 일인들은 묵인해주고 넘어갔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강압정치 보다는 “내선일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문화정치 체계를 앞세워 나가려 했으며, 조선의 유명한 예술인들과 문인들을 다독거리며 동경에서 건너온 일인 예술가들과 교류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 영향 덕분에 오랫동안 경성만큼은 평화롭게 보였다. 갑오년과 을미년, 병신년에 거쳐 조선왕조가 무너져 내리고 명성황후가 시해 되면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나도, 종로의 극장가에는 사람들이 붐비었고, 순수 미학을 추구하는 동인지 문학이 대세를 이루었다. 단지 조선의 신문사들의 입을 봉함에 있어서 일본제국 주의는 철저하였다. 만주 사태를 취재하러 먼 길을 떠난 기자들이 실종되거나 죽었고, 사무실과 인쇄기 철거, 조직적인 배포 금지 조치와 방해로 경성의 언론은 드디어 그 입에 단단하게 멍에가 씌워 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신문사들이 정상화 되었을 때는 이미 모든 신문사들이 하나 같이 총독부와 일본 황실을 찬양하는 관보로 전락되고 만 상태였다. 관보에 불과한 신문사들은 해마다 3월이면 신춘문예를 공지하여 신인 작가들을 등단시켰고, 작품의 선정 기준은 현실을 철저히 무시한 순수 문학을 얼마만큼 작가가 견지하고 있느냐 인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곽 노명은 일제가 자기네 구미에 맞추어 길러낸 화가였다. 일본 유학파 법대 출신이지만, 출세를 포기하고 겨우 그림 그리기에만 열중하는 모양새가 좋았고, 그의 화풍이 유럽의 것과 명치유신 이후 유행하였던 동경 근대 미술의 것이 혼합된 양상이었던 것이 좋아 보였다. 원래부터 전문 화가가 아니었던 그의 경력은 그리 문제가 되어 보이지 않았다. 워낙 작품성이 뛰어나다 보니, 기존 화단의 질투를 받아가며 금세 유명세를 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곽 화백은 영채 보다 나이가 몇 살 아래였다. 그는 바람둥이로 소문나있었고, 영채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곽 노명은 영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 제안은 다름 아닌 자신의 누드모델이 되어달라는 것 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성편력이 많음을 인정하면서, 영채에게 만큼은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있노라고 망설이지 않고 고백까지 하였다. 옛날 김 선생님과 자리를 같이 하였던 그 찻집에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와의 이별 후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고, 그 때와 달리 화단에 만발했던 진달래는 사라지고 앙상한 가지를 바람에 떨고 있는 관상목만이 정원을 지키고 있었다. 창문 넘어 시선을 두고 옛 생각에 빠지다가, 물깊이가 낮은 연못이 추위에 꽁꽁 얼어 버린 덕분에 뻣뻣하게 죽은 잉어 두세 마리를 보게 되었다. 그게 자신의 불행한 처지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잠시 슬픔에 빠졌고, 곽 노명의 언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둥이 남자의 혀 놀리는 솜씨는 예리한 칼이 방패를 뚫고야 말듯이 영채의 귀를 파고들었다.
“나는 일찍이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본적이 없습니다.
꼭 한번 제게 기회를 주시어 메마른 나의 예술적 영감에 불을 지펴
주시길 고대합니다. 일찍이 서양에서는 플라토닉 러브가 있다 들었습니다만,
제가 누님께 느끼는 감정이란 오르지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이 제 마음입니다. 또한 이런 사랑에는 육체적 교감이 필요 없다
하지 않는 가요... 그저 누님께서 저를 동생으로 받아 들이 듯이 보아주시고,
마음으로만 애틋한 사랑을 나누어 봄이 좋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영채의 얼굴을 살펴보면, 그 미색이 은근히 대단하였다. 그녀는 초승달 같은 모양의 둥근 눈썹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동자가 갈색이며 항상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위에 입술보다 아래 입술이 더 두꺼워 앵두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속눈썹은 길었고, 눈가의 끝은 약간 위로 올라갔으며, 눈두덩은 도타와 보였다. 그녀의 살결은 백설과 같았고, 눈이 부시게 희었다. 게다가 그녀의 긴 생머리는 자연 갈색이었고, 얼굴은 항상 홍조를 띄고 있었다. 이른바 남자들이 많이 꼬인다는 도화살 같은 종류의 관상이었다. 영채는 곽 노명의 말을 일축해 버렸다. 그저 흔한 바람기 많은 남자들의 언변이라고 치부하고 화를 내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영채는 나르시즘과 호기심으로 인하여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플라토닉 러브는 인류의 진화된 사랑 방식이라는 곽 노명의 논리에 걸려들기 시작했던 것 이다. 거북하게 연인끼리 포옹할 필요도 없으며, 그저 가볍게 손을 맞잡고 눈빛만 서로 주고받아도 충분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점차 그 남자에 대한 관심을 촉발 시켰던 것 이다.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을 위하여 그녀는 곽 노명과 자가용을 타고 경성의 사대문 밖으로 나갔다. 추위에 얼어붙은 한강변에 울창한 갈대숲을 앞에 두고 탁 터진 경관을 두 사람은 바라보았다. 어느 주가에 들러 점심을 겸하여 차려진 술상을 앞에 놓고 영채는 곽 노명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진정으로 곽 화백께서 저만을 사랑 하시나요?
그 플라토닉 사랑이라는 것이 아무 뭇 사내들이 하는 행태가 아니라
참으로 천 년 만에 한 번 찾아온다는 거룩한 것이기에 소중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않은 가요? 사실 그렇다면 장안에 소문난 바람둥이 사내가
이제야 한 여자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겠습니까?
좋습니다. 당신 마음이 거짓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당신의 메마른
예술혼에 불을 지펴줄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내
기꺼이 허물을 벗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드리지요...
하지만 함부로 거짓말로써 내 맘을 뺏으려면 일찌감치 포기 하는 게
좋겠습니다..“
곽 노명은 감격한 듯 영채를 바라바라 보고 말문을 이어가려다, 안주를 내오는 아주머니 때문에 헛기침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상위에는 도토리묵 한 접시가 놓여 졌고, 한 동안 어색한 듯 정적이 흐르다가 오히려 영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
“무슨 조건입니까? 내 그대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데 어떤 조건이 필요합니까?”
“내 얼굴은 그림에 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더러 미완성 작품을 남기시라는 말씀입니까?
“ ... ”
“저를 못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그저 나는 그림을 벽장에 가두어 놓고
공개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믿겠소?“
“그림을 그리시려 거든, 먼저 내 마음을 빼앗아 보세요. 나는 불행한 여자랍니다.
아무도 믿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 마음을 상상이나 해보셨나요? 하기는
당신이 바람둥이라 그럴 주제도 못되지만... 오늘은 이만 합시다. 나도 마음을
돌려 보려고 여기까지 왔지만 참으로 힘듭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다 포기 했소이다. 기다리겠습니다. 조용히 먼 곳에서...”
곽 노명은 신작로 위로 달리는 차안에서 주머니에서 향수 한 병을 영채에게 선물로 건네주었다. 영채는 처음에는 받기를 거부하다가 살그머니 받아들었다. 그녀는 마음으로는 살포시 웃었지만, 얼굴 표정은 서양 카드 속의 인물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서대문에 그를 내려 주고 종로 자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선물 포장을 뜯어보았다. 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프랑스 향수를 발견하고 영채는 즐거워했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느라 거울을 쳐다보고 향수를 뿌려 보기도 하다가, 포장지 안에 들었던 편지 한 조각을 뜯어보았다. 영채는 그의 편지 속에서 진실 같은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미 옛날에 김 선생님으로부터 심하게 상처를 받았던 그녀는 편지 속의 말들이 설혹 진정이라 해도 심하게 굴절된 그림자처럼 모든 표현들을 이해하였다. 간단히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림으로서 답답한 속을 풀어 버리려 했고, 낮에 마셨던 술 때문에 피곤에 빠져 일직 잠을 청하였다. 그날 이후에 해를 넘고 여름이 되어서야 뜸하였던 곽 노명의 최근 소식을 접하였다. 곽 노명의 유명세는 한 없이 꺾이었고, 평창동의 자택에 칩거한 채, 상심에 빠져 술과 담배로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영채는 죄책감 같은 마음에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의 창작열이 식음과 작품의 퇴락이 순전히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드디어 영채는 그를 찾아 나섰다. 이번엔 여의고 수염이 덥수룩해진 곽 노명을 차에 태우고 녹음이 우거진 남산 중턱에 올라갔다. 8월의 여름 햇살에 매미의 울음소리가 사방에 퍼졌고, 논밭과 초가집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능선이 이어졌으며, 한강을 둘러싸고 경성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영채는 이제야 곽 노명을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말을 시작했다.
“이것이 플라토닉 사랑입니까? 병들도록 그리워하고, 그리움에 사무치다가
폐인이 되고야 마는 것이 정신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인가요?“
곽 노명은 오래간만에 해를 보는 사람처럼 미간을 찌푸리다가, 미소 지으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동그란 안경테 넘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마치 어린 아이처럼 순진해 보였으며, 그는 길게 한 숨 쉬듯 담배를 피워 가며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미안 합니다. 내 욕심 때문에 ...
하지만 사랑의 본성은 쾌락도 슬픔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꿈꾸어 보지 못하였던 천상의 행복을 겨냥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일찌감치 마음의 기쁨을 포기하고 살게 되었지요.
나는 미완성된 사랑의 감정을 당신을 통해서 완성시키고 싶었습니다.“
영채는 그 말을 듣자 상대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길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남자는 다소곳이 여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아주 어린 소년과 소녀처럼 둘은 순진한 미소를 피워 올리며 서로의 눈빛을 나누었다. 산에서 내려오자 그의 화실에서 영채는 스스럼없이 알몸으로 의자에 앉았다. 곽 노명은 순전히 그림에 미친 사람 같았다. 여자의 감성으로 느끼기에 화폭 속에 옮겨 놓은 여인의 모습을 그가 더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되어 어색한 질투심까지 생겨났다.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남자는 영채를 멀리하였다. 여자는 그를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여자의 모성애로서 연약한 남자를 감싸줄 수 있었다는 것으로 영채는 만족해하려고 했다. 단지 마지막으로 완성된 그림을 보고 싶었으나, 끝내 곽 화백은 공개하지 않았다. 더욱이 곽 노명은 경성에서 사라졌다. 그는 거처를 어디론가 옮겨 먼 곳으로 떠나 버렸고, 한 참 후의 소식에 의하면 지리산 근처에서 혼자 실성한 사람처럼 지내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영채는 그의 친구로부터 자초지종을 설명 듣게 되었고, 망연자실 해지고 말았다.
“곽 노명은 뇌에 종양이 생기는 바람에 더 이상 오래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남기려고 했던 작품의 대상이 바로 당신이었던 것이고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완성된 그림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
습니다“.
그 말을 하고 일어서려는 곽 노명의 친구를 붙들어 앉히고는 영채는 곽 노명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없었는지를 물어 보았다. 친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쓴 편지 한 장을 건네주고 떠났다.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것은 편지가 아니라 그의 일기장 가운데 한 페이지를 찢어서 접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일기 형식의 독백에는 그의 고백이 간결하게 담겨있었다.
1929년 12월 28일
"나의 뇌는 죽어가고 있다. 모든 기억도 좀먹어가고 있어 때론 영채의 모습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완성된 그림 속의 그녀에 의지해 그 그림자의 일부만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날이 갈수록 그것조차 불가능해지는 것 같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듯 오늘은 기억이 되살아난 덕분에 중단되었던 일기도 쓰고, 화폭에 담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흠뻑 빠질 수도 있었다. 이제 그림 아닌 살아있는 영채를 안아보고 싶다. 나는 곧 경성을 떠난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지리산 자락 아래서 움을 트고 살다가 기억 없는 생을 마감하겠지... 하지만 모든 것을 마음속에 품고 천당까지 가련다. 잃어버린 조선과 아름다운 여인 영채를 품고 천당을 훌쩍 넘어 하늘 끝까지 날아보련다... "
영채는 남자의 마지막 일기를 곱게 접어 지갑에 보관하였다. 그녀는 더 이상 슬프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다. 워낙 충격이 컸던지라 한 동안 담담한 세월을 보내던 그녀는 더 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도난당하였다가 되찾아진 곽 노명의 그림 몇 점 중에 영채의 나체가 담긴 작품 한 점이 세상에 공개되자 집안 문중이 발칵 뒤집혀 졌던 것이다. 영채는 부친께 불리어 갔고. 더 이상 경성에 머물지 말고 어딘가로 떠나 있으라고 종용 받았다. 그녀는 얼마 후에 제물포에서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상해로 향하였다. 조금 밖에 남지 않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여자 홀몸으로 갑자기 중국으로 건너온지라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나, 임시정부에서 일하다 만난 미국 외교관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남자와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본토로 건너가 아들 하나를 낳고 잘 살다가 6.25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봄에 경성이 아닌 서울로 영채는 돌아왔다. 서울에서의 남편의 미국대사관 재임 기간이 3년이었고, 영채는 그 기간 중에 인사동의 어느 허름한 골동품 가게에서 자신의 나체 그림을 찾아냈다. 그녀의 미국인 남편은 그 그림과 그림에 얽힌 사연을 모두 듣고 놀라워했다. 영채의 부친과 모든 친척들의 흔적은 다 사라졌고, 오르지 젊은 날의 모든 기억들이 수줍은 화폭 하나에 달랑 남아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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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래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연재하려 했으나 그냥 한 번에 다 올려 버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모자란 필력이지만 즐감하시길 바랍니다.
1920년대의 한국을 상상하며 쓴 소설입니다. 역시 여자의 삶을 남자의 시각으로 묘사하여 보았습니다.
그동안 습작을 꽤 하셨나봅니다.
참 부럽습니다, 잘 읽었네요.
칭찬 감사드립니다~ 프안회원님들의 좋은 의견 덕분에 용기가 많이 생깁니다. 습작은 프안 가입 후에 우연히 시작되었습니다.
제 아내에게 이 소설의 내용을 설명해주니까, 당장 여주인공 영채는 누굴 모델로 한 거냐고 묻더라고요... ㅎㅎ 당연히 당신이지
누구겠어? 라고 답하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저는 계속 모아두었다가 날잡아서,... 파리스님 이해하시죠? ㅋㅋㅋ
때론 이 소설 속의 여주인공 처럼 어쩔 수 없이 먼곳으로 떠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아프리카라는 환경이
사람을 너무 지치게 하네요...
날씨나 기온이 인성을 많이 좌우한다는 애기가 있긴 하더군요. 전 방콕이나 싱가폴에 자꾸가곤했는데,..
그 쪽도 연중 덥잖아요? 사계절 변화가 없고, 옷도 계속 같은거입고, 겨울이 없고 굶어죽을일도 없고 몸이 조금 느려진다고 하던데,..
여기서 느끼기에는 아프리카~ 정말 동경의 대륙인데,.. 지치게하는 부분도 있는가봐요?
신용이 없고, 법제가 통일이 않되있고, 마따비시 ( 뒷돈 ) 안 주면 일하기 힘들고... 차없이 걸어다니기 곤란한 점이 많고...
등등... 밤에 갇혀지내게 되고~ 통관 힘들고 ... 휴~
바쁜 중에 이렇게 글을 쓰시니 참 부럽습니다,
잘 보고 느끼고 갑니다,*^
여기는 밤이 길고, 저녘에 나 돌아 다닐데가 없습니다. 스트레스를 매일 밤 술로 풀다보니, 말라레야에 자꾸 걸리니까, 아예
무서워서 술담배를 끊어 버렸습니다. 영화도 보던거 또 보는 것도 지겨워 글쓰기로 취미를 바꾸어 버리게 되었네요...
이렇게 프안회원님들 께서 보잘 것 없는 제글을 잘 읽어 주시고 좋게 평가 해주시니 늘 감사하고 즐겁습니다~ 특히 타이티님
께 항상 감사드려요~
어떤분들은 지겹우면 지겨운데로, 반복적이면 반복적인데로 살아가는데,.. 파리스님은 얼마나 좋으십니까?
단점인 환경을 살려 술담배끊으시고 이렇게 좋은 글을 쓰시는시간으로 활용하시니,..
이것이 경쟁력이고 이것이 현명한 지혜인 듯합니다. 저도 가족과 떨어져지내는 시간을 공부에 활용하려고 합니다. 많이는 못하고 있지만,.. 쑥스쑥스...
5주르디님~ 저는 파리에서 사는 스님이 아니여요^^ 빠리님이라고 불러쥬샴~ ㅎㅎㅎ
큭큭 아직 불어가 혼동이 많이되어서,... 알겠습니다. 빠리님.
글 잘 적으시는 분들 너무 부러워요^^
저는 한국에 사시는 분들이 너무 부럽습니다... 곧 겨울이 올텐데 큰 뚜껑을 열면 김이 쏟아져 나오면서 막 담아내는 만두가
생각납니다.
만두사가지고 한번 시장조사겸 노러가겠읍니다
오실때 영화나 연예 오락 프로 많이 다운 받아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만두를 함 콩고로 배달해 드릴수 있을까요? 혹 거기서 인기가 좋으면 만두장수 할 수도 있지않을까요? ㅎㅎㅎ
ㅋㅋ 스님이라,ㅎㅎ
엤날 빠리외곽 길상사 스님과 인연이 되어,,
동짓날인가,그 무렵에 길상사에서 팥죽을 끓이는데 한나절은 저엇던 적이 있습니다 솥단지 바닥에 눌러붙지않도록,ㅎ
그 후 금강경과 법구경, 천수경을 스님한테서 가름침 받았엇는데 그 스님이 갑자기 떠오르네요~*^
소설 잘 읽었습니다...재미나네요...^^ 여주인공이 부인이라고...에고 넘 부럽습니다..
여자들은 다 똑 같은 거 같아요... 남편이 자기를 아름답다고 칭찬해주면 모두 좋아하는 거 말입니다. 해인맘도 꽤 미인이실 듯 합니다만...
( 따님 사진을 보고 판단 할때 ... ) ㅎㅎ
으음,,,,,,,,,,,,,,,,,,,!!@@
단편을 모은 책을 하나 내 놓으세요, 상상력도 좋고 글도 잘쓰시고 부럽습니다... ^^
프안님~오래간만이네요... 칭찬에 감사드리고, 좋은 글을 남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처럼 좋은 단편소설 잘 읽었습니다. 하나의 문장 골격에 붙는 형용사구나 언어의 비유에 참신한 느낌을 받습니다. 마지막 부분이 빨리 마무리된듯한 느낌은 있지만 여운을 남기게 하는 소설입니다. 감사합니다.
역시 독자의 눈은 예리한 것 같습니다^^ 사실 마지막 파트를 제대로 마무리 지려면 1페이지 이상의 글이 더 나가야 했는데... 실험적으로 쓴 작품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