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로서 대한민국국민으로서 진작에 가 보았어야할 종묘(宗廟)다. 마음만 먹으면 2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도 역사나 문화에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이 바쁘다는 이유였다.
부끄러운 마음에 망설이다가 제관으로서 종묘대제에 참여했던 경험을 생애최고의 영광으로 기록하고, 한편으로는 나와 같이 아직도 종묘와 종묘제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를 도와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도록 하겠다는 소망으로 이 글을 쓴다.
공부하고 느낀 만큼 쓰긴 했지만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거나 지적되면 고치기로 하겠다.
종묘대제(宗廟大祭)는 나라의 제일 큰 제향(祭享)이어서 종묘제례를 이렇게 부르는데, 지난 5월6일 치룬 종묘대제의 영녕전 제7실 종헌관을 맡게 되어서야 습의(習儀ㆍ종묘대제에 참여하는 제관 등에 대한 실습교육)를 받기 위해 제향하루전날인 어린이날에 종묘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5월4일,인터넷을 통해 서너 시간동안 종묘와 종묘제례에 대한 대강을 공부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습의의 등록이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오전10시까지여서 좀 게으름을 피우다가 집을 나서도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일찍 도착하여 종묘정문인 외대문에 묵례(默禮)라도 올려야 기본도리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토요일이면서 어린이 날인 2012년 5월 5일 오전 8시 40분.
지하철 종로3가역에서 내려 종로4가방향으로 5분정도가면 종묘라는데 5분을 걸었어도 종묘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다 세운지 얼마 안돼 보이는 대리석 기둥에 붙어있는 안내표시를 보고서야 들어가는 입구를 찾았다.
종묘입구
주변이 종묘공원이라는데 무슨 공사를 하는지 울타리가 쳐진 직로를 따라 들어가니 지주식안내표지판이 이곳이 세계유산 종묘임을 알려주며 서 있었다.
종묘지주간판과 외대문
그러나 한 동안 의아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 보이는 문에 종묘대제를 알리는 작은 현수막이 걸려있어 종묘로 들어가는 문이 확실해 보이긴 하지만 거창할 것으로 생각했던 예상과는 달리 정문의 규모가 작고, 건물에 있어야 할 간판(현액)이 없는 것이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은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부르는데 간판이 없다.
간판은 이곳이 무엇하는 곳인지 누구나 알아보기 쉽고 찾기 쉽도록 하기위해 써 붙이는 것인데 종묘는 왕과 왕비 등 이곳에 모신 신들의 영역이고 꼭 드나들어야 할 사람들에게만 출입이 한정된 곳이기 때문에 간판을 만들어 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외대문은 간판도 없지만 단청도 극히 절제하여 단아하다.
종묘를 향해 잠시 묵례를 올리고 습의등록 장소로 향했다.
습의는 오전에 실내에서 시청각으로 이루어 지고, 오후에는 종묘의 정전에서 현장교육으로 이루어 진다. 오전과 오후습의 간에는 넉넉하진 않지만 공백이 있어 종묘를 미리 둘러보기로 했다. 여러차례 제관을 경험하신 분을 만나 안내와 도움을 받았다.
외대문을 통과하여 종묘에 들어섰다.
수 백 년 동안 말없이 종묘를 지키며 역사를 지켜본 고목들이 울창하고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불과 몇 백 미터 밖의 복잡하고 번화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울의 한복판에 이런 숲이 보존돼 있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널찍한 길 가운데에 돌을 깔아 만든 또 다른 길이 쭉 벋어있다.
삼도(三道)
삼도(三道)이다.
거친 박석(薄石ㆍ구들장처럼 넓고 얇은 돌)을 3단 凸자형으로 깔아 만든 돌길이 도로 한 가운데로 곧게 나 있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인데,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신만이 다니는 길로, 제향 때 향로와 축.폐백 등 을 받들고 가는 길이다. 신향로(神香路)는 신로(神路)와 향로(香路)가 합쳐진 말로 재궁(齋宮)인 어숙실 일곽(一廓)을 거쳐 정전과 영녕전의 신문(神門)을 통해 묘정(廟廷) 월대(月臺)의 신로(神路)에 이어진다. 신로는 신만이 다니는 길이니 결국 삼도를 제외한 양쪽 흙길이 일반인의 길인 셈이다.
종묘에는 신로(신향로).어로.세자로.일반로의 구별이 뚜렷하다.
조상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에 왕을 포함하여 제사에 참여하는 제관들이 경박하게 빨리 걷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거친돌을 깔았다. 조상을 받드는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라는 의미이다.
삼도(三道)의 의미를 알고 나니 마음이 한층 엄숙하고 경건해 졌다.
종묘를 둘러보는 순서는 외대문을 들어서서 오른쪽 길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망묘루가는 길
종묘는 크게 5개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종묘제례를 위한 준비실인 향대청(香大廳) 일원. 제를 위해 심신을 정결히 하던 재궁(齋宮)일원. 제례용 음식을 조리하던 곳인 전사청(典祀廳)일원, 역대왕실의 신주를 모신 정전(正殿)일원. 왕실 신주를 모신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일원 이다.
외대문을 들어서서 삼도(三道)를 따라 조금 더 가다가 오른쪽 길로 들어서니 연못 하나를 만났다.
중지당이다. 기록에 의하면 종묘에는 4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외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에 있는 작은 못을 비롯해서 3개이다. 이곳에서 만난 연못은 사각형으로 못 안에는 돌을 쌓아 둥근섬을 만들었는데 섬에는 향나무가 한그루 심겨져 있다. 또한 연못의 물속에는 아무것도 기르지 않고 있었다.
중지당
연못의 모양이 직사각형인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즉 연못의 형태가 네모인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며, 못 가운데의 둥근 섬은 하늘을 뜻하여 인간의 생성과 소멸이 하늘에 있음을 나타내고, 섬 안의 향나무는 정신을 맑게 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에다 향내를 맡고 조상의 혼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여 조상혼의 영신(迎神)을 나타낸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궁궐 등의 연못에는 연꽃도 심고 비단 잉어 같은 관상어도 기르는데 반해 종묘안의 연못에는 아무것도 기르지 않는 것은 영혼을 위한 연못이기 때문이다.
종묘라고하면 서울의 종로근처에 있는 왕가의 무덤(墓·묘)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종묘에 묘(墓)는 없다.
여기에 쓰는 묘(廟)는 사당 묘자이다. 묘는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사서가(士庶家)에서는 가묘(家廟) 또는 사당이라 하고, 왕실에서는 그 왕조(王朝)의 조종(祖宗)을 모시고 제향(祭享)을 받드는 곳을 종묘라 한다. 우리나라의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공신의 신주(神主).토속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종묘사직이란 말이 있는데 왕실과 국가를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유교의 엄격히 규정된 제도에 따라 한 국가의 도읍지의 궁궐왼쪽(동쪽)에 종묘와 오른쪽(서쪽)에 사직을 두어야 비로서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1392년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이후인 1395년 궁궐보다 먼저 종묘를 처음 짓도록 한 것도 나라의 면모부터 갖추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들어온 종묘가 모두 당시의 것은 아니다.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으로 건립 후 모시는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규모를 늘려 지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삼도가 아닌 오른쪽 흙길을 따라 들어가면 맨 처음 만나는 건물이 종묘제례를 위한 준비실인 향대청이다.
향대청을 들어가기 전에 망묘루 바깥을 따라 가면 망묘루의 별채에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민왕의 신당이 있다.
공민왕신당(내부)
망묘루(望廟樓)는 '왕이 묘를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떠올리는 곳'이란 뜻으로, 왕이 종묘에 도착하면 잠시 머물러 쉬던 곳이다. 종묘를 관리하는 관청, 종묘서가 있기도 하였고 때로는 왕의 초상화나 왕이 쓴 시를 걸어 관리하며 의궤를 보관하기도 하였다. 종묘 경내에 있는 건물 지붕 모양이 엄숙하고 단아한 맞배지붕을 하고 있지만 이곳만은 유일하게 팔작지붕에 건물의 일부가 누각의 형태를 띠고 누각부분이 나와 있다. 이곳에서 앞에 보이는 연못이 앞에서 말한 중지당이다.
망묘루
공민왕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함께 있는 영정과 함께 공민왕이 그렸다는 준마도가 봉안되어있다. 조선왕조의 종묘에 고려왕의 신당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바람에 날려 종묘경내로 떨어졌는데 조정에서 회의 끝에 그 영정을 봉안키로 하여 신당이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며 태조가 역성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어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헌관(獻官)들이 대기하던 향대청(香大廳)을 돌아보고 나와 계속진행하면 재궁에 도달하게 되어있었다.
재궁은 정전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국왕과 세자가 제사 하루 전에 도착하여 머물며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북쪽에 왕이 머물던 어재실이, 동쪽에는 세자재실이, 서쪽에는 어목욕청이 있다.
어재실 서쪽 뜰 돌 위에는 높이가 낮고 넓적하게 생긴 독, 주로 물을 담아 놓는 데 쓰는 드므가 하나 놓여있다. 드므는 순우리말로 그 안에 물을 담아놓으면 불귀신(火魔)이 왔다가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달아난다는 주술적의미가 있으며, 화재가 났을 때 실제로 사용하기도 하였다는 일종의 방화수(防火水)다.
왕과 세자가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재궁의 어재실
정전의 담장과 동문
나도 같은 길을 따라 나갔다. 다다른 곳은 정전의 동문(東門).
정전의 동문은 왕과 세자가 제사를 위해 출입하는 문이다.
그 길을 따라 동문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묘정(廟廷·종묘 정전의 마당)의 월대가 넓게 펼쳐있는 모습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정전건물 또한 크고도 길다. 정전의 정문격인 남문을 향해 묘정을 질러가니 종묘 정전의 위용을 점점 더 느끼게 되었다. 남문 앞에 이르러 월대를 내려서서 뒤를 돌아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넓은 월대와 웅장한 정전 전체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중압감이 크게 느껴지는 지붕, 그 지붕 뒤를 빙둘러 우거진 숲이 하늘을 바탕으로 긋는 금, 긴 지붕선아래 검고 깊으며 짙은 그림자가 붉은 색의 긴 열주와 한데 어울려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압권이다.
정전(1)
정전(2)
순간적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위엄의 분위기와 절제와 경건의 마음이 우러났다. 드넓고 거친 월대 바닥과 그 위로 육중한 지붕을 떠받히고 서있는 크고 긴 정전모습은 종묘의 중심건물 신전(神殿)으로서의 위엄 그 자체였다.
정전은 서쪽에 있는 별묘(別廟)인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역대 왕과 왕후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19칸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신위를 맨 왼쪽 1칸(1실)에 모시고, 이어서 19칸까지 역대 왕 중에서 공덕이 큰 19위의 왕과 30위의 왕비 신주 등 49위의 신주를 모셨다. 조선시대 초 태조의 4대조(목조, 익조, 탁조, 환조) 신위를 모셨었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정전에 모시는 신위가 늘어나고 신실이 부족해졌는데, 불천위(不遷位ㆍ예전에, 큰 공훈을 세워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사람의 신위(神位)를 이르는 말.본래 종묘 정전에 다섯 신위를 모시기로 하는 오묘제를 택하였으나, 그 뒤 다섯 신위 외에 다른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제도)가 아닌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기다가 결국 건물을 증축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춘 정전은 동.서 월랑을 포함해 길이가 101미터가 되어 우리나라 단일 목조건축물로는 가장 길 뿐 아니라 사당 건축물로서는 세계에서도 가장 길지만 이음새가 매끄러워 이어진 표시가 거의 없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위엄과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홑처마에 지붕은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의 둥근 기둥이고, 정남쪽에 3칸의 정문이 있다. 이 정문을 남문이라 하며 신문(神門)으로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므로 단청도 극도로 절제하는 등 건축이 화려하지 않고 지붕과 기둥 등 최소한의 건축요건만으로 지극히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는데다 전체공간이 담으로 둘러 있고, 규모의 웅장함이 신전으로서의 위엄과 경건함을 동시에 우러나오게 한다. 정전은 선왕에게 제사지내는 최고의 격식과 검소함을 건축공간으로 구현한, 조선시대 건축가들의 뛰어난 공간창조 예술성을 찾아볼 수 있는 건물로 국보 제227호이다.
동서로 117미터 남북으로 80미터의 담장에는 혼백이 드나드는 남문,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을 비롯하여 악공.춤을 추는 일무원.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의 3문이 있다. 담장안의 건물로는 정전을 비롯해서 정전의 월대아래 동쪽에는 정전에 모신 역대 왕들의 공신83위의 위패를 모신 16칸의 공신당이 있고, 서쪽에는 일곱의 토속신을 모신 칠사당이 있다.
정전의 분위기를 더욱 위엄있고 신성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월대와 지붕과 기둥이다.
월대는 견월대(見月臺)의 약칭이다.
글자그대로 달을 바라보기위해 올라서는 축대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궁궐 등에서 각종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는 장소다. 이 곳 정전의 월대는 하월대와 상월대로 구성되어있는데 제례 때 제관.악공.일무원 등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하월대는 1미터 남짓 사방이 주변 지면에서 올려져있어 세속과 구별되며, 남문으로부터 하월대에서 상월대로 오르는 가운데 계단인 태계(太階)로 이어진 신로가 중앙을 가로질러 놓여있어 동서의 경계가 되고, 둘러친 담장과 그 너머로 뒤덮인 울창한 수목으로 월대지역을 비워진 공간으로 느끼게 한다. 제례 때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면서도 영혼들의 영역임을 나타낸 고차원적인 건축기법이 숨어있는 것이다.
정전에 세운 기둥이 배흘림기둥임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원형 기둥의 몸을 배불린 형식으로 시각적인 착시에 의해 기둥몸이 가늘게 보이는 현상을 교정하기 위한 기법이다. 이 기둥들이 육중한 지붕을 떠 바치고 긴 열을 만들며 서있는 모습이 정전의 위엄을 더욱 끌어올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정전의 정문인 남문을 나와 우회전하면 제례악을 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며 연습도 하던 건물인 악공청(樂工廳)이 있는데,정전의 서남쪽 담장밖에 있다.
삼도가 연결된 악곡청 앞길을 따라들어 갔다.
그곳에는 1421년(세종3년)에 정종의 신주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이 있다.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평안하라는 뜻이다. 신주를 정전에서 모셔왔다(祧遷ㆍ조천)는 뜻에서 조묘(祧廟)라고도 한다.
남문을 통해 영녕전안으로 들어섰다.
규모가 정전에 비해 적은데다 하월대의 높이도 낮고, 가운데 4칸의 지붕이 더 높고 좌우에 대칭인 건물의 지붕이 낮아서 인지 정전에서 느낀 위엄의 중압감과는 다르게 친근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얼듯 보아도 건물전체의 지붕높이가 다른 것 외에는 규모나 건물배치로 볼때 정전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영녕전의 가운데 4칸(이 4실을 ‘정전’이라 한다)에는 좌측(서쪽)으로부터 차례대로 목조, 익조, 탁조, 환조 등 네 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이른바 추존된 사조(四祖)의 신주를 모신 곳이므로, 후대 왕들의 신위가 모셔진 곳보다 더 높고 장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고안된 건축기법이다. 원래 영녕전은 추존된 사조(四祖)만을 모시기 위하여 건립되어 사조전(四祖殿)으로 불렸으나, 차차 조천(祧遷)되어 오는 신주를 모시는 조묘(祧廟)로 변화되었다. 정전이 서상법(西上法ㆍ남향한 신전의 향좌측 제1실에 시조의 신주를 모시고 차례로 동쪽으로 제1세, 2세, 3세, 4세의 순서로 신주를 봉안하는 법)대로 신주를 모신 반면, 영녕전에서는 가운데 4실과 나머지 좌우의 협실 각각6칸에는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왕비 및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서쪽부터 서상법으로 모시고 있다. 모두 16감실에 34위의 신주가 모셔져있다.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이다.
영녕전
영녕전을 건립 하게 된 이유는 묘제(廟制)와 관련이 있다.
천제의 나라인 중국의 종묘에는 7신실에 신주를 모시는 7묘제를, 제후의 나라였던 조선은 5신실에 신주를 모시는 5묘제로 되어있었던 당시에는 이 원칙 때문에 신실이 모자라도 함부로 증축할 수가 없었다. 신주를 5신실에 모시는 오묘제(五廟制)는 왕조를 일으킨 태조와 현재왕의 4대 조상을 모시는 제도이므로 논쟁 끝에 중국송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사당을 하나 더 짓기로 하고 정전 옆에 영녕전을 세운 것이다.
궁금한 대목이 있다.
예법에는 임금의 사당은 '오묘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했으나, 현재 종묘에는 정전의 신실이 19칸에 이르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불천위에 따라 신실을 붙여 늘리는 방법을 써서 19신실에 19왕과 그 왕비의 신위를 합해 49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불천위의 신위는 모두 정전에 모셔져 있는 것이다.
한편, 영녕전의 신실은 16칸으로 합계 35칸의 신실이 있으며 모든 신실에 신위가 모셔진 상태이다.
그런데 조선의 역대 임금은 27분이었다. 왕위에 있었던 임금 27분 가운데,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되었으므로 25임금의 신주만이 종묘에 모셔진 셈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10개는 누구의 신주인가? 추존된 임금 9분(목조, 익조, 탁조, 환조, 덕종, 원종, 진종, 장종, 익종)과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신주이다.
영녕전을 나와 습의장소인 정전의 묘정으로 향했다.
오후 습의는 현장교육이었다.
홀을 잡는 집홀법(執笏法). 홀을 꽂는 진홀법(搢笏法) .꿇어 앉는 궤법(跪法). 부복(俯伏). 국궁(鞠躬). 사배법(四拜法). 걷는 법(步行法). 계단을 오르내리는 승강계법(陞降階法). 손을 씻는 관세법(盥洗法). 제복(祭服)의 종류와 착용법 등 기본부터 각 제관 및 제집사(諸執事)의 봉무(奉務)요령. 제례순서와 요령 등.
생소한 용어와 처음 대하는 제례절차를 4시간 쯤 교육받고 나니 오후5시가 가까워 습의가 끝났다.
습의
하루 종일 계속된 습의와 무더운 날씨로 피로하긴 했지만 울창한 숲으로 둘러쌓인 길을 나오며,난생처음 종묘를 보고 느낀 감회가 새롭기만 했다.
종묘의 총 면적은 5만 6,500여 평에 달한다.
종묘는 울창한 숲으로 우거져있어 이 숲이 영혼의 공간으로서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한껏 더해준다. 이 숲을 일컬어 신림(神林)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종의 2/3정도가 갈참나무로 갈참나무 숲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머지는 은행나무,느티나무.귀롱나무.때죽나무.쪽동백 등 낙엽수가 기본이다. 잣나무도 있고 소나무도 없는 건 아니지만 종묘를 화마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불에 잘 타는 소나무를 배제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지금은 서울의 한 복판에서 허파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살아있는 보물이니 나무가 없는 종묘, 숲이 없는 종묘는 상상하기 조차 어렵다.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국가에 의하여 보호되고 있다. 뿐만아니라 1995년 12월에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종묘는 한국, 한국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세계, 세계인의 것이 되었다.
외대문을 나와 종묘공원의 느티나무 숲 아래서 장기나 바둑을 즐기고 더러는 소줏잔을 기울이거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많은 수의 노인들 사이를 지나며, 신의 영역인 종묘담장안에서의 장엄한 분위기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를 느끼며 귀가를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종묘공원
2012년 5월 6일 일요일
종묘대제가 거행되는 날이다.
조선시대의 종묘제례는 정전에서 정월, 4월, 7월, 10월, 각 계절의 첫 달과 음력12월에 좋은날을 정하여 1년에 5번을 지냈고, 영녕전에서는 봄과 가을 두 번 지냈다. 일본 침략으로 중단되었던 것을 1965년부터는 지금까지 매년5월 첫째일요일에 먼저 영녕전에서 지내고, 나중에 정전에서 지낸다. 또한 예전에는 밤에 제향을 올렸던 점도 변화된 부분이다.
종묘제례는 다른 제사들과 같이 유교식 절차에 따라서 진행되는데 크게 보아 신을 맞는 절차, 신이 즐기도록 하는 절차, 신을 보내 드리는 절차로 나눌 수 있다. 신을 맞는 절차에는 영신(迎神)과 전폐(奠幣)가 있고, 신이 즐기도록 하는 절차로는 진찬(進饌) . 초헌(初獻) . 아헌(亞獻) . 종헌(終獻)이 있으며, 신을 보내드리는 절차에는 음복(飮福) . 철변두(撤邊豆) . 송신(送神) . 망료(望療)가 있다.
오전 9시 30분.
영녕전 제7실의 종헌관으로서 제향을 모시기 위해 종묘에 들어섰다. 종묘대제를 관람하시겠다고 하는 고장향교의 유림어르신들 7분도 동행했다. 아침나절이지만 제향준비가 한창인 종묘는 제관과 제집사는 물론 방송 등 각 분야의 스탭들과 관광객들로 이미 북적이고 있었다. 제관들의 집결시간 전에 동행하신 분들을 안내하여 종묘일원을 둘러보았다.
제향준비중인 정전
올 영녕전제향은 오후1시 시작하여 오후3시에 끝이 나고, 정전제향은 오후4시반에 시작하여 오후6시반에 끝난다.
영녕전제관들과 제집사들은 오전 10시 30분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평상시엔 열어놓지 않는 전사청에서 제복(祭服)을 입었다. 초헌관.아헌관.종헌관에게는 당상관의 제복이 나머지 집사들에겐 당하관 제복이 지급되었다. 어제 제복 입는 법을 교육받았지만 제대로 입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13가지에 이르는 복색을 갖춰 입는데 무척이나 복잡하고 힘들었다.
종류도 여러 가지이고 이름도 생소하지만 소개하면 홀(忽).양관(梁冠).상의(上衣).상(裳ㆍ치마).중단(中單).대대(大帶).혁대(革帶).패(佩ㆍ패옥).후수(後綬).방심곡령(方心曲嶺).폐슬(蔽膝).말(襪ㆍ버선).이(履ㆍ신) 등이다. 이 중에서 홀.양관.혁대.패옥.후수.신이 당상관과 당하관의 것이 다르다.
헌관 및 제 집사
왕께서 입으시는 제복이 또 다름은 말할 나위없다. 제왕이 제례나 즉위식 등에 착용하는 예복을 면복(冕服)이라 하는데, 왕의 제복은 9장복(九章服).황제의 제복은 12장복(十二章服)을 입는다. 여기서 장(章)은 옷에 새겨진 문체의 수를 나타낸다. 면류관(冕旒冠)은 황제의 대례복에 갖추는 면관으로 앞면과 뒷면에 각각 12류(旒:줄)를 느렸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구장면복에 9줄의 면류관을 썼으나 대한제국시대부터는 황제국 임을 감안하여 12장복에 12줄의 면류관을 착용하고 있다.
점심으로 도시락이 지급되어 적당한 자리를 잡고 끼리끼리 둘러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12시 10분.
제관과 전사청안에서 인원과 복장 등 최종점검을 한 후 문을 나와 영녕전제향에 참여하는 제관 등 157명이 1열을 유지하며 영녕전으로 향했다. 전사청의 앞마당을 비롯한 종묘안에는 이미 수많은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와 있었다.
가슴이 뭉쿨해 졌다.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이 놀랍고 뿌듯했다. 그 중심에 내가 섰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껴 콧등이 시큰해지기 까지 했다.
어가행렬.정전과 영녕전의 제관 및 제집사. 종묘제례악단 및 무용단. 자원봉사자와 방송스탭 등 종묘대제를 봉양하는데 참여하는 인원은 2,000여명에 달한다.
그 중에서 제사를 모시는 일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보존회에서 맡아한다. 제관과 제집사 등인데 보존회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안에 있다. 제관은 첫째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셋째 잔을 올리는 종헌관(終獻官) 3명이다. 그 밖에 홀기(笏記·)를 읽는 집례(集禮), 초헌관을 모시는 사람인 찬례(贊禮),조(俎·익힌 고기)를 올리는 사람인 천조(薦俎),조를 받들고 가는 사람인 봉조(捧俎)가 있다. 또한 축문을 읽는 사람인 대축(大祝),오른쪽에서 작(爵·술잔)을 올리는 사람인 우전(右奠),향합을 받드는 사람인 봉향(捧香),향로를 받드는 사람인 봉로(捧爐),신실 안에서 작을 전해 주는 사람인 내봉(內奉),준상에서 내봉에게 잔을 전해주는 사람인 외봉(外奉),술을 따르는 사람인 사준(司樽),집사와 헌관을 인도하는 사람인 찬의(贊儀),손 씻는 대야를 둔 곳에서 도와주는 사람인 관세위(盥洗位)가 있다. 발디딜틈 없이 늘어선 군중사이로 제향을 모시기 위해 전사청에서 영녕전으로 향하는 157명이란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영녕전 동문을 들어서 하월대로 내려서서 지정된 자리에 정렬했다. 월대아래와 월대위의 허용된 일정공간에도 제례를 참관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있었다.
영녕전 제향을 참관중인 관람객
제례는 집례가 부르는 홀기에 따라 엄격한 격식으로 진행되었다. 제관 등이 정해진 자리에 나가 각자 맡은 바 역할을 할 준비를 하면서 오후1시에 시작되었는데 이를 취위(就位)라 한다.
마침내 각 신실의 감실 신주장안의 신주가 내 모셔지고 독이 열렸다. 다음으로 혼을 맞이하기 위해 향을 피우고 바닥의 관지에 울창주를 부어 백을 모신 후 신에게 흰색 모시를 바치는 신관례(晨祼禮)가 이어졌다.
취위와 신관례가 진행되는 동안 홀기에 따라 악사들은 보태평지악을 연주하고,일무원은 보태평지무를 추었다.
이어서 제사에 사용할 희생의 털과 피,익힌 내장 등을 올리고 간과 기장,피,쑥 등을 기름과 섞어 숯불화로에서 태워 조상신을 즐기게 하는 천조례(薦俎禮)를 올렸다. 제1실의 대축관이 간을 조금 떼어내 신위전 밖으로 나가 화로에 먼저 태우고 난 후, 서직(쑥.조.기장)도 조금씩 덜어 기름에 버무려 화로에 태웠다. 간과 기름에 버물인 서직이 화로에서 타며 나는 연기와 냄새가 영녕전 일원에 퍼져나갔다. 천조례가 진행되는 동안 악사들은 풍안지악을 연주했다.
보태평지악이 연주되고,보태평지무를 추는 가운데 신이 즐기도록 초헌관이 첫 잔(예제·감주)을 올렸다. 대축관에 의해 축문을 읽는 초헌례가 올려졌다. 축문의 내용은 간단하다.
정전 제1실 축문의 내용을 풀어 살펴보면...
생각하옵건대
때는 임진년5월6일,
효현손 황사손은 감히 아뢰옵니다.
태조 고황제와
조비 승인순성 신의 고황후
조비 순원현경 신덕 고황후께
삼가 엎드려 생각하오니
세월이 바뀌어 이 좋은 때를 맞아
느끼고 사모하는 마음에 정결하게 예를 갖추고
삼가
희생과 폐백과 예제와 도량서직(벼, 조, 기장, 수수) 등
법도에 따라 올리오니
바라옵건데 흠양 하시옵소서.
축문의 끝부분에 희생(犧牲)이라는 말이 들어있다. 여기서 희생이란 종묘와 사직에 제물로 바치는 소,양,돼지 따위의 산짐승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의미는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이나 가진 것 등을 포기함, 또는 예기치 않은 재난이나 사고로 목숨을 잃음으로 종묘제례에 제물로 올리는 희생의 의미와 다르다. 그러나 종묘제례를 위해 죽임으로 희생당하는 희생들(소,양,돼지)의 입장에서 보면 그 뜻이 상통하니 재미있다. 종묘제례에 올리는 희생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희생의 어원이 아닐까?
이어서 정대업이 연주되고 정대업무를 추는 가운데 아헌례와 종헌례가 이어졌다.
영녕전제향
제례는 수많은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나는 종헌관으로서 찬의의 인도에 따라 관세위로 나가 손을 씻고, 동계(東階)로 올라가 준소인 제7실로 향했다.
제7실은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신위전에 나가 꿇어앉아 집준관이 희준에 담긴 청주를 따른 작을 받들어 올린다음 부복했다가 일어나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선 6대 왕으로서 아버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3년 만에 왕위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질곡 많은 어린 임금. 서인(庶人)으로 까지 강봉되었다가 243년 만에 복위되어 단종의 묘호를 받아 신위가 영녕전에 모셔진 비운의 왕이다. 영월로 귀양 떠나는 왕과 생이별하고 왕을 그리며 60여년을 홀로 지내다 간 정순왕후의 절개와 충절을 되 뇌이면서 결코 길지 않은 순간의 종헌례였지만 두 분의 혼이나마 함께 만나 즐겁기를 가슴깊이 빌었다.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생애 두 번째 들어온 종묘에서 신실 안까지 들어와 왕과 왕비의 신주에 잔까지 올리는 영광을 누렸다.
정대업악이 그치고 종헌례가 끝났다.
종묘제례가 엄숙하고 장엄하며 독특한 멋과 아름다운 분위기가 나도록 작용하는 것이 종묘제례악이다. 제례의 각 절차마다 편경,복고 등 전통악기의 연주와 노래,그리고 팔일무(八佾舞)가 시연되는 것이다.
1447년 세종이 처음 만들고 세조 때 이르러 제례악에 걸맞도록 보태평(保太平·역대왕 들의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내용)11곡과, 정대업(正大業·역대왕 들의 무공(武功)을 칭송하는 내용)11곡으로 정비하였다. 죽은 신령과 인간,왕과 백성을 한데 결속시켜주고 후손에게 한없는 복을 내려 나라가 창성하게 해줄 것을 기원하는 내용이 간절하게 표현되어있다. 제례의 각 절차마다 악기를 연주하며,종묘악장(宗廟樂章)이라는 노래를 부르고,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와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라는 일무(佾舞)를 추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의 총칭이다.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있고 종묘제례와 함께 2001년 5월에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시대의 기악연주와 노래·춤이 어우러진 궁중음악의 정수로서 우리의 문화적 전통과 특성이 잘 나타나 있으면서도 외국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이다.
영녕전제향에 참여한 종묘제례악단
종묘대제에는 4가지의 제주(祭酒)를 쓴다.
혼을 맞이하기 위하여 향을 피우고 바닥의 관지에 술의 일종인 울창주를 계이(鷄彝ㆍ닭이 그려진 술통)에 담아부어 백을 모신다. 이 절차를 신관례라 한다. 여기서 혼(魂)과 백(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혼백이란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이 죽으면 정신인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육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즉 땅으로 돌아가신 조상님의 백을 모시기 위해 쓰는 술이 울창주다. 울창주는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나는 술로서 제사(祭祀)의 강신(降神)에 쓴다. 신관례는 제사의 강신과 같은 절차이다.
조상에게는 세 번에 걸쳐 술을 올린다.
세 번의 의미는 최고의 정성으로 모심을 뜻한다.
종묘제례에서 초헌에는 감주의 일종인 예제(醴齊)를 희준(犧罇·소 형태의 술통)에 담아 올린다. 아헌에는 막걸리인 앙제(盎齊)를 상준(象罇·코끼리 형태의 술통)에 담아 올리며, 종헌에는 청주(淸酒)를 산뢰(山罍·산과 구름이 새겨진 술통)에 담아 올린다.
술의 종류로 보아서는 친서민적이고 값이 싼 것들이다. 종묘 등의 대제에서는 질박함을 숭상하고 최고로 쳤기 때문에 종묘제례의 명품주 기준은 질박함과 소박함, 단순함이었기 때문이다.(왕의 영혼, 조선을 말하다.이상주 저)
술과 고기를 먹음으로서 조상이 주는 복을 받는다는 음복례(飮福禮)가 이어졌다.
황사손이 술과 고기를 받아 음복했고, 옹안악이 연주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홍안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변(籩·과실을 담는 제기)과 두(豆·국을 담는 제기)를 옮기는 철변두(撤籩豆)가 진행되었다. 철변두란 결국 제사음식을 물리는 절차다.
제례를 지낼 때 신주를 옮겨 모시는 신탑(神榻) 위에 있는 궤(机)에 의지해 있던 신주도 당초 모셔져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정전과 영녕전의 건물 안 1칸씩이 신실이다.
말 그대로 신의 방으로 신주(神主)를 봉안한 곳이다.
신실안에는 신주를 모셔 두는 작은 방인 감실(龕室)이 있고 신주를 봉안하는 신주장(神主欌)이 북쪽 벽 한가운데에 있다. 신주 위쪽은 건(巾·작은 수건)으로 덮여 있는데 왕은 백색 건을, 왕비는 청색 건이 덮혀 있다. 신주장 앞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다.
신주장 좌측에는 어책(御冊)과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을 보관하는 책장(冊欌)이, 우측에는 어보(御寶)를 보관하는 보장(寶欌)이 있다.
신주장 앞에는 제례를 지낼 때 신주를 옮겨 모시는 신탑이 있다.
감실 앞에는 주렴(珠簾)과 노란 명주 천으로 만든 휘장인 면장(面帳)이 드리워져 있고, 감실 전면 위쪽에는 구름과 연꽃 조각으로 장식된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신실과 신실 사이에는 우렴(隅簾ㆍ발)을 내려 공간을 구분하며 신실 바닥에는 지의(地衣ㆍ돗자리)를 깐다. 오늘처럼 제례를 지낼 때에는 감실 앞에 제상 4개를 설치하고, 감실 앞쪽의 건물 바깥에 준소상(신실밖에 놓는 제사상)을 놓는다. 신실 입구 양쪽에는 용선(龍扇ㆍ용이 그려진 부채)ㆍ봉선(鳳扇ㆍ봉황이 그려진 부채)ㆍ용개(龍蓋ㆍ용 무늬 덮개)ㆍ봉개(鳳蓋ㆍ봉황무늬 덮개) 등의 의장구를 세운다.
태조와 왕비의 신실
신주는 몸을 떠난 혼령이 의지할 수 있도록 밤나무로 만든 상징물이다. 종묘신주는 윗면이 둥글고 아랫면이 네모난 직육면체로, 혼이 드나드는 규(窺)라는 구멍을 내었다. 신주앞면에는 왕의 묘호(廟號).시호(諡號).존호(尊號)를 세로로 썼다. 여기서 묘호(廟號)는 임금이 죽은 뒤에 그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으로 왕의 3년상이 끝나고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부르는 호칭이다. 묘호는 신료들이 돌아간 왕의 업적을 평가하여 왕의 치세를 나타내는 글자 하나에 공이 많다고 여기면 조(祖)자를 붙이고, 덕이 많다고 여기면 종(宗)자를 붙였다. 태조(太祖),세종(世宗)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다른 군주에게도 조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시호(諡號)는 임금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주던 이름으로 황제 중국에서 받았다. 존호(尊號)는 임금의 덕을 기리는 뜻으로 올리던 칭호다. 이 중 중국에서 받았던 시호는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에 올라 제후국 체제를 청산함으로서 그 전에 받았던 시호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종묘신주는 임진왜란.병자호란같은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겨 모셨을 만큼 신성시하였다. ‘신주단지 모시듯 한다’라는 말에서 신주의 상징성을 알 수 있다.
혼이 드나드는 구멍이나 틈은 신주뿐 아니라 종묘의 신실문에도 있다. 정전과 영녕전 내부로 출입하는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이 달렸는데, 한쪽 문짝이 약간 뒤틀려 딱 맞지 않고 틈새가 벌어졌다. 이 틈새 역시 혼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단지 상징적인 것이고 ,실제목적은 공기가 통하게 해서 내부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신실
종묘제례의 마지막 절차는 망료례(望燎禮)다.
제사에 올렸던 축문과 폐백을 모두 모아 요대(燎臺)에 가서 태워 혼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2시간에 걸쳐 엄격한 규칙과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영녕전의 제례는 끝났다.
지나간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그대로 모셔 놓고, 옛 격식대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 곳은 세계에서 우리 종묘밖에 없다. 종묘의 이런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불국사 석굴암, 해인사의 대장경판 판고와 더불어 1995년에 세계문화유산(제738호)으로 지정하였다. 이와 함께 종묘에서 거행되는 국가제사의식인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와 종묘제례악(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이 2001년 5월 유네스코로부터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우리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인정받았음은 앞에서도 설명한바 있다.
내가 참여한 소감으로는 종묘제례가 제례라고 하여 슬프거나 경직된 분위기가 아니었다. 종묘가 지니고 있는 신전으로서의 여러 요소들에다가 제례악과 일무, 또한 제관 등이 한데 어울려 만들어 지는 장엄함은 국가의 위엄을 과시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돌아가신 왕을 기리고 나라와 왕의 신성함과 존엄함을 깨닫게 하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가적 의식이다.
제관 등이 입는 옷이 의식용 예복이며, 신하들도 품계에 따라 정장을 하고 참여한다. 임금도 면복을 입고 집전한다. 면복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종묘제례악은 본래 세종 29년(1447) 회례연(매년1월1일과 12월22일에 왕과 신하가 정과 뜻을 나누기위해 베푸는 잔치)에 사용하기 위해 창작하였으며 세조 10년(1464) 제사에 적합하게 고친 후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종묘제례가 길례(吉禮)라는 증거다. 길례를 요즘 말로 표현하면 결국 축제다.
영녕전제관참가를 바탕으로 정리하다보니 종묘대제의 일부가 된 어가행렬에 대한 내용이 빠졌다.
임금께서 종묘대제를 봉행하기위해 경복궁에서 종묘까지 행차하는 과정을 1,200여명이 재현하는 어가행렬은 큰 볼거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임금을 중심으로 문무백관과 호위부대인 현무대(玄武隊)가 앞뒤에서 뒤따르며 취타대 등이 함께 이동하는 행렬로 학생과 일반인이 참여한다. 종묘대제를 대내외에 홍보하고 현대적의미의 세계적인 축제로 승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종묘와 종묘제례를 더 많은 국민들이 이해하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가적 축제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곧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를 보존하고,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을 인류의 미래에 전승하는 대한민국의 책임이기도 하다.
출처 : 전원(田園)통신http://blog.chosun.com/lbj1223/6438201 2012/06/05